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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원전 (원문/해석)
태백일사 : 고구려국본기 17 당 태종 이세민의 대침략
당 태종 이세민의 대침략
開化四年에 唐主李世民이 謂群臣曰 遼東은 本諸夏之地어늘
隋氏가 四出師而不能得하니 予今出兵은 欲爲報諸夏子弟之讐라 하고
世民이 親佩弓矢하고 率李世勣·程名振等數十萬하야 到遼澤하니
泥淖二百餘里에 人馬가 不可通이라 都尉馬文擧가 策馬奔擊하야 旣合戰이러니
行軍摠管張君叉가 大敗하니 李道宗이 收散軍하고 世民이 自將数百騎하야
與世勣으로 會하야 攻白岩城西南하니 城主孫代音이 詐遣請降이나
而實은 欲乘隙反擊이라.
개화開化 4년(28세 보장제, 단기 2978, 645)에, 당나라 왕 이세민15)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우리 중국 땅16)이다.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곳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이제 출병하여 우리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노라.”
이에 세민이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이세적李世勣, 정명진程名振 등 수십만을 거느리고 요택遼澤에 이르렀다. 진창이 200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채찍으로 말을 치며 돌진하여 맞붙어 싸웠고, 행군총관 장군차張君叉가 대패하니 이도종李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다.
세민이 스스로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세적과 합세하여 백암성白岩城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으나 실은 빈틈을 타서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世民이 至安市城하야 先自唐山으로 進兵攻之라 北部褥薩高延壽와
南部褥薩高惠眞이 率官兵과 及靺鞨兵十五萬하야 引至直前하고
連安市爲壘하야 據高山之險하며 食城中之粟하야 縱兵掠其軍馬하니
唐奴不敢犯이오 欲歸나 則泥淖爲阻하야 坐困必敗라
延壽가 引軍直前以進하니 料去安市四十里라 遣人하야 問於對盧高正義하니
以其年老習事也라. 正義曰 世民이 內芟群雄하야 化家爲國하니 亦不凢常이라
今據全唐之兵而來하니 其銳를 不可輕也라
세민이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唐山으로부터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관병과 말갈 군사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에 도착하여, 주저없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작은 성)를 쌓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을 차지하였다. 성중의 곡식을 먹으면서 군사를 풀어 당나라 군마를 빼앗았다. 당나라 군사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돌아가려 해도 진창에 가로막혀 그냥 주저앉아 괴로워하며 패할 수밖에 없었다.
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진하여 안시성과 4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는 고정의가 연륜이 깊어 일처리에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정의가 대답하였다. “세민이 안으로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지금 모든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그 예봉銳鋒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오.
爲吾計者는 莫若頓兵不戰하고 曠日持久하야 分遣奇兵하야 斷其糧道니
糧道旣盡이면 求戰不得이오 欲歸無路리니 乃可勝也라.
延壽가 從其計하야 賊來則拒하고 賊去則止하며 又遣奇兵하야
焚奪糧路하니 世民이 百計誘之以賄나 面從而內違하야 数遣陰襲陷裂하니
賊之死傷이 酷多라.
우리 계책은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여러 날을 끌면서 기습부대를 나누어 보내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소. 양식이 다 떨어지면 싸울래야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이오.”
연수가 그 계책을 좇아 적이 오면 막고, 물러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또 기습 부대를 보내어 군량을 불태우고 빼앗았다.
세민이 온갖 계략으로 뇌물까지 쓰며 꾀었으나, 겉으로 따르는 척하고 속으로 거부하여 자주 군사를 내어 몰래 습격하고 함락시켜 흩어지게 하니 적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延壽等이 與靺鞨로 合兵爲陣하고 持久作戰이라가
一夜豹變하야 急襲電擊하니 世民이 幾被圍迫하야 始有懼色이라
世民이 又復遣使하야 懷財寶하고 謂延壽曰 我以貴國强臣이 弑其君上故로
來問罪오至於交戰하야 入貴境에
蒭粟이 不給故로 間有焚掠幾處而已오 俟貴國修禮納交則必復矣라 한대
연수 등이 말갈병과 더불어 함께 진을 치고 지구전을 펴다가, 어느날 밤 돌변하여 번개같이 습격하니, 거의 포위를 당하게 된 세민이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세민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물과 보화로 달래며 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국貴國의 힘 있는 신하(연개소문)가 임금을 시해하였기로 이렇게 와서 죄를 묻는 것이다. 이제 귀국에 들어와 전쟁을 하는데 말 먹일 꼴과 식량을 공급할 수 없어 몇 곳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했을 뿐이다. 귀국이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延壽曰 諾다 退貴兵三十里則吾將見帝矣리라 然이나 莫離支는
爲國柱石이오 軍法自在하니 不須多言이오 汝君世民은 廢父弑兄하고
淫納弟妃하니 此可問罪也라 以此傳之어다
於是에 四遣督察하야 益加守備하고 依山自固하야 乘虛奇襲하니
世民이 百計無術하야 痛恨遼東出兵之不利나 而已悔無及焉이러라.
이에 연수가 말하였다.
“좋다. 그대들 군사가 30리를 물러난다면 내가 장차 우리 황제(보장제)를 만나 뵈리라. 그러나 막리지는 우리나라의 주석柱石이고, 군법이 있으니 여러 말이 필요 없다. 너희 임금 세민은 아버지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음란하게도 아우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죄를 물을 만하다. 이대로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찰관을 보내어 수비에 더욱 힘쓰게 하고, 산을 의지해 스스로 견고히 하고 적의 허점을 틈타 기습하였다.
세민이 온갖 꾀를 다 내어 보아도 아무 방법이 없었다. 요동으로 출병하여 전쟁에 진 것을 몹시 한탄하였으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柳公權小說에 曰 「六軍이 爲高句麗所乘하야 殆將不振하고
候者告英公之麾가 黑旗被圍라 한대 世民이 大恐이라」 하니 雖終自脫이나
而危懼如彼어늘 新舊唐書와 及司馬公通鑑에 不言者는 豈非爲國諱耻乎아.
李世勣이 言於世民曰 建安은 在南하고 安市는 在北하니 吾軍糧을
早已失輸遼東今昌黎이어늘 今踰安市而攻建安이라가 若高句麗가
斷其輸送이면 勢必窮矣리니 不若先攻安市니 安市下則鼓行而取建安耳로이다.
류공권柳公權의 소설에, “당나라의 6군六軍은 고구려가 세를 타게 되자 장수들이 전공을 떨치지 못하였고, 척후병이 와서 영공英公(이세적)의 군기가 흑기에 포위당했다고 보고하니, 세민이 크게 두려워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세민이 비록 끝내 탈출하였으나 위태롭고 두려워함이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구당서新舊唐書』와 사마공司馬公의 『통감通鑑』에 이러한 사실을 적지 않은 것은,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해서 수치스런 일을 숨기려 한 것[爲國諱恥]이 아니겠는가?
이세적이 세민에게 말하기를,
“건안建安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습니다. 아군의 군량은 이미 요동(지금의 창려)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가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끊는다면 대세가 반드시 궁하게 될 것이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북을 두드리며 여유있게 가서 건안을 빼앗으면 될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安市城人이 望見世民旗蓋하고 輒乘城鼓譟하야 唾罵世民하고 數其罪目하야
以告于衆하니 世民이 怒氣極甚하야 以爲陷城之日에 男女를 盡坑之라 하니
安市城人이 聞之하고 益堅守하야 攻之不下러라. 時에 張亮兵이 在沙卑城이나
而欲召之未果하야 低回失機하고 張亮이 將移兵하야 襲烏骨城이라가
反爲官兵所敗라 李道宗이 亦在遭險不振하니 於是에 唐奴諸將이
議自相歧하야 世勣은 獨以爲高句麗가 傾國救安市하니
不若捨安市而直擣平壤이라 하고
안시성 사람들이 멀리서 세민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성에 올라 북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침을 뱉으며 세민을 욕하고 죄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군중에게 고하니 세민이 노기가 극도에 달하여,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남녀 모두 생매장시킬 것이라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건히 지키므로 공격을 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에 수군 제독 장량張亮의 군사는 사비성沙卑城에 있었는데 그들을 부르려다 시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장량은 병력을 이동시켜 오골성烏骨城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관병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도종李道宗 역시 험준한 길을 만나 군세를 떨치지 못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당나라 여러 장수의 의견이 서로 갈라졌다. 세적은 홀로, ‘고구려는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안시성을 구하려 하니, 안시를 버리고 곧장 평양을 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長孫無忌가 以爲天子親征은 異於諸將하야 不可乘危徼幸이니
今建安新城之敵衆이 數十萬이오 高延壽所率靺鞨이 亦數十萬이니
國內城兵이 若又回烏骨城하야 而遮樂浪諸路之險이면 如是則彼勢日盛하야
急於迫圍오 而我翫敵이라가 悔無及焉하리니 不如先攻安市하고
次取建安然後에 長驅而進이 此萬全之計也라 하야 未之决이라.
安市城主楊萬春이 聞之하고 乘夜深하야 以數百精銳로 縋城而下하니 賊陣이
自相踐踏하야 殺傷甚多라 世民이 使李道宗으로 築土山於城東南隅러니
官兵이 從城缺出擊하야 遂奪土山하고 塹而守之하야 軍勢益振하니 唐奴諸陣이
殆失戰意라 傅伏愛는 以戰敗로 斬하고 道宗以下는 皆徒跣請罪라.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에 나섬은 장수들과는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지금 건안建安·신성新城에 있는 적군의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거느린 말갈 군사 또한 수십만이다. 만약 국내성 군사가 오골성을 돌아서 낙랑의 모든 길의 험한 곳을 차단한다면, 적의 기세가 날로 강성해져 우리를 포위하고 압박하여 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적을 갖고 놀려고 하다가는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먼저 안시를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 다음에 멀리 적을 몰아 쫓으며 진격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이 문제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안시성주 양만춘이 그 사정을 듣고 야밤을 틈타 수백 명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공격하였다. 적진에서는 서로 짓밟혀 죽고 상처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세민이 이도종을 시켜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성 한 귀퉁이가 무너진 곳으로 나와 쳐서 드디어 토산을 빼앗았다. 거기에 참호를 만들어 지키니 군세를 더욱 떨쳤다. 이리하여 당나라 모든 진영은 싸울 생각을 거의 잃어버렸다. 부복애傅伏愛는 패전 책임으로 참수당하고, 도종과 그 부하들은 모두 맨발로 나아가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莫離支가 率數百騎하고 巡駐灤坡하야 詳問情形이오 遣命摠攻四擊할새
延壽等은 與靺鞨로 夾攻하고 楊萬春은 登城督戰하니 士氣益奮하야
無不一當百矣라 世民이 憤不自勝하야 敢出决戰이나 楊萬春이 乃呼聲張弓하야
世民이 出陣이라가 矢浮半空하니 遂爲所中하야 左目沒焉이라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從間逃遁할새 命世勣道宗하야 將步騎數萬하야
爲殿하니 遼澤泥淖하야 軍馬難行이라 命無忌하야 將萬人하야 剪草塡道하고
水深處는 以車爲梁하고 世民이 自繫薪於馬鞘하야 以助役하니라
冬十月에 至蒲吾渠하야 駐馬하고 督塡道하며 諸軍이 渡渤錯水할새
暴風雪이 占濕하야 士卒이 多死者어늘 使燃火於道하야 以待之라.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灤河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진창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서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세민 자신도 스스로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蒲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널 때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기다렸다.
時에 莫離支淵蓋蘇文이 乘勝長驅하야 追之甚急하니 鄒定國은 自赤峰으로
至河間縣하고 楊萬春은 直向新城하야 軍勢大振하니 唐奴多棄甲兵而走하야
方渡易水라 時에 莫離支가 命延壽하야 改築桶道城하니 今高麗鎭也라 又分遣諸軍하야 一軍은 守遼東城하니 今昌黎也오 一軍은 跟隨世民하고
一軍은 守上谷하니 今大同府也라.
於是에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乃遣人乞降하니 莫離支가
率定國萬春等數萬騎하야 盛陳儀仗하고 鼓吹前導하야 入城長安하야
與世民으로 約하니 山西·河北·山東·江左가 悉屬於我라.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쫓았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에서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新城을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桶道城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되,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의 창려昌黎이고, 일군은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上谷을 지키게 하니 상곡은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에 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 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하여,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江左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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