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증산도 조화사상 2

유철(상생문화연구소)

2023.02.27 | 조회 4875

IV. 증산도의 조화사상

 

신교는 천신 즉 상제의 가르침으로 나라를 열고 백성을 다스린 인류 시원종교였다. 이러한 신교의 흔적은 서경, 예기, 사기등 여러 사서들에 기록된 천제天祭에서 알 수 있다. 특히 홍산유적지에서 발견된 제천단과 세계 각국의 제천단은 신교의 흔적이 남은 유적으로 신교가 고대에는 보편 문화였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 신교의 제천의식은 고조선 천제의 흔적인 강화도 마리산의 제천단과 고조선의 국통을 이은 북부여, 그리고 북부여에 뿌리를 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의 불교이념과 조선의 유교이념을 거치며 쇠퇴하여 그 명맥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잊혀진 신교문화는 조선말에 이르러 수운 최제우의 동학과 고종이 건원칭제하며 올린 원구단의 제천의식으로 되살아났지만 일제와의 한일합방으로 천자국 조선은 명을 다하게 된다. 수운의 동학 역시 성공하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고 수운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9년 뒤, 무극지운이 닥친다는 수운의 예언대로 이 땅에 상제가 직접 강세하게 된다. 1871년 인간으로 내려온 증산 상제의 가르침으로 다시 이땅에 신교가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었다.

 

1. 신교의 맥, 참동학 증산도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상제의 가르침으로 창도된 동학은 인류 역사에 있어 상제 신앙과 무극대도를 전하면서 잊혀진 신교의 맥을 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부패한 조정과 일본 제국주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동학의 외침을 탄압하였고 수운은 죄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목으로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실패는 단지 당시 정치적 박해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道紀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도전2:30:14-17)

 

수운에게 내려진 천명과 신교는 곧 상제의 명이고 상제의 가르침이었다. 이를 동경대전에서 수운은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라...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라고 말하였고, 용담유사에서는 천은이 망국하여 경신사월 초오일에...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증산 상제는 강세하기 전 하늘에 기도하던 수운에게 나타나 스스로 상제의 신원을 밝히며 가르침을 내렸다. 수운이 그 가르침으로 동학을 창도하였으나 유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무극대도의 참빛, 즉 진법을 밝히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다. 수운을 통해 내린 가르침, 즉 신교가 올바로 전해지지 못하자 상제는 인간으로 직접 강세하였으며, 인간으로 강세한 상제, 즉 증산 상제는 스스로 인간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신교를 이땅에 실현하였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나니...서양 천개탑에 내려와 천하를 둘러보며 만방의 억조창생의 편안함과 근심 걱정을 살피다가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궁을가弓乙歌조선 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니라최제우는 유가儒家의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나니 나의 가르침이 참동학이니라.(도전2:94:2-9)

 

여기서 중요한 말은 참동학이다. 수운과 증산 상제의 인연은 수운의 간곡한 기도에 응하던 때, 금산사 미륵전에 임어해 있던 그 때였다. 수운은 19604, 일명 천상문답사건으로 하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선어로 표현된 그 목소리는 바로 천주, 상제의 음성이었다. 수운의 동학이 상제의 가르침에 바탕하고 있지만 유교의 틀에 갇힌 수운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 결국 증산 상제가 본 동학은 천명과 신교를 올바르게 펴지 못한 미완의 신교였다. 그 미완의 신교는 직접 이땅에 온 상제의 가르침으로 완성되었으니 이를 이름하여 참동학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참동학이라 하였는가? 그 이유는 한편으로 그 이전의 동학이 틀렸다거나 난법이라는 뜻이 아니라 미완에 그쳤기에 이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다른 한편 상제가 직접 인간으로 내려와 참된 법을 내었으므로 비로소 무극대도의 참빛이 밝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내가 천지를 개벽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인간과 하늘의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삼계를 둘러 살피다가 너의 동토에 그친 것은 잔피孱疲에 빠진 민중을 먼저 건져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어 주려 함이라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니 이것이 참동학이니라.(도전3:184:9-12)

 

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린다. 이것이 참동학이다는 구절에서 참동학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나를 믿는 자시천주를 의미한다. 앞에서 논자는 시천주는 천주, 즉 상제를 지극히 모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모심이란 지극한 신앙과 같다고 하였다. 결국 나를 믿는 자는 시천주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 다음 무궁한 행복을 얻는다.’는 말은 무극대도를 받는다.’는 말과 같다. 상제의 가르침인 무극대도를 받아 무궁한 행복, 참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다음 구절은 시천주와 무극대도를 받은 것으로 우리는 선경의 낙을 누린다.’는 것이다. ‘선경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선의 경지에 든다.’는 것과 같은 말로 이는 시천주 조화정에서 조화정을 의미한다. 앞에서 논자는 조화정은 상제 신앙의 결과 인간이 얻게 되는 조화의 경지, 인간이 신과 하나되어 만드는 조화의 세상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참동학은 시천주와 조화정의 가르침을 담은 신교외 다름 아니다.

인용문의 첫 구절에서 동학 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고 한 것 역시 참동학이 곧 시천조화정의 가르침이며, 이것이 곧 인간으로 강세한 증산 상제의 신원과 그에 대한 신앙의 올바름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참동학의 가르침을 이어 증산 상제의 무극대도를 전하는 곳이 증산도이다. 증산도는 증산 상제의 무극대도를 의미하면서, ‘증산 상제를 신앙하는 단체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류 시원종교인 신교와 그 신교의 맥을 이은 동학, 그리고 인간으로 강세한 증산 상제의 가르침으로서 참동학이 고스란히 담긴 경전이 증산도 도전이며, 도전에서 신교의 조화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 도전11장에 나타난 우주 생성의 조화

 

지금까지 논의 결과 신과 신교, 선과 조화 등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전에 나타난 조화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 증산도 조화사상은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과학적 인과가 아니라 신의 개입으로 일어나는 목적적(창조적) 변화, 즉 조화로 설명한다. 물론 신의 개입 역시 하나의 원인이라고 본다면 조화에도 인과논리가 적용된다. 문제는 조화는 물리적 인과로 설명될 수도 있고, 설명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모든 변화가 신의 개입으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물리적 변화로 설명된다면 굳이 조화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조화는 모든 변화를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물리적 인과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등 양자 물리학의 거장들이 그 탐구의 과정에서 종래의 물리학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인과율을 본의 아니게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그 이면에 작용하는 조화의 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증산도의 우주생성론에서 찾을 수 있다. 논자는 도전11장을 토대로 우주 생성의 조화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도전의 첫 구절은 우주의 생성과 신의 작용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여러 문장으로 구성되지만 전체를 이해하는 중심 용어는 조화이다. 도전의 첫 장에서 나타나는 조화사상은 증산도에서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논리이다.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이 문득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大光明 가운데 삼신三神이 계시니, 삼신三神은 곧 일신一神이요 우주의 조화성신造化聖神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도전1:1:1-3)

 

도전의 첫 세 문장이다. 이 문장의 핵심은 태초의 시간과 우주 생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태시는 가장 시원의 시간에 대한 형용사이다. 태시에 일어난 생성변화의 과정에 처음부터 모든 것과 함께 하는 존재가 신(삼신, 일신, 조화성신)이다. 즉 만물의 변화는 신이 함께 하는 변화이며, 이 신적인 변화현상의 중심에 조화성신(삼신이요 일신)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우주 생성의 첫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조화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왜 조화(성신)인가? 도전11장에서 우주의 가장 원초적 모습을 묘사하여 대광명이라고 하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우주의 큰 빔 속에 빛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모습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광명사상은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시원과 상통한다. 즉 물리학이 말하는 우주 생성의 첫 단계는 바로 빅뱅이다.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순간(특이점)에 무한대의 밀도를 가진 물질이 폭발하여 팽창하면서 현재의 거대한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팽창하고 있는 현재의 우주가 이 가설을 증명하고 있다고 한다. 빅뱅은 물질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스스로 자화해 나가는 것으로 우주의 생성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단지 과학은 그들에게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로 빅뱅을 받아들이며, 그 자화하는 우주의 생성과정에 대해서는 인과론으로 해석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빅뱅이라는 그 순간의 현상은 설명할 수 없으며, 그래서 이를 특이점이라고 부른다. 과학에서는 이 특이점의 시간을 1043초라고 하는데, 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계산된 것으로 물리학이 정의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단위이다. 문제는 플랑크 시간이라 불리는 이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대해서는 과학은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특이점은 조화로 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홀연히 열린은 빅뱅의 신학적 표현이다. 도전은 만물의 시원적 현상을 빛이며 광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라는 구절은 만물은 빛에서 시작되며, 그 빛과 함께 존재하는 것, 혹은 빛 자체가 바로 삼신임을 말해준다. 성경이 빛과 신을 구분하고 빅뱅이 빛을 그 결과로 본다면 도전은 이 삼신과 빛을 동일시한다. 대광명 가운데 있는 삼신은 곧 대광명이며, 태초에 빛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삼신이라 부른 것이다. 왜냐하면 태시에 빛이 있었는데 그 빛 속에 삼신이 있다면 빛과 삼신은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분을 한 것은 설명을 위한 것일 뿐, 삼신은 곧 빛이며 빛은 곧 삼신이라는 말과 같다. 예로부터 우리가 신을 신명神明으로도 불렀던 것은 신의 특성이 밝은 빛이었기 때문이다.

그 삼신을 다시 이름하여 조화성신이라고 하였다. 만물의 시원적 생성과 변화(‘태시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림(도전1:1:1)’)는 삼신과 함께하는 조화작용이며, 그 조화작용의 주체는 바로 삼신으로서 조화성신이다. 이는 하늘과 땅의 문득 열림=대광명=삼신=조화성신으로 등식화 된다. 삼신은 우주의 원신으로서, 태시에 문득 열린 천지 만물의 근원이며 바탕인 빛 자체이며, 빛으로서 삼신은 만물로 스스로 변화하여 형상화된 존재이므로 조화성신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의 기원은 창조적 변화, 조화로 규정될 수 있다.

이렇게 도전을 이해할 때 우주 만물은 절대신의 창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에 깃든 신성의 작용에 의해서 생겨나고 또 그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변화해 나간다. 즉 만물의 생성변화를 일으키는 제3의 독립적 창조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재물리학자 스트븐 호킹은 누가 혹은 무엇이 우주를 창조했느냐는 질문은 정당하지만 그 질문에 신이 창조했다고 대답하는 것은 원래의 질문을 누가 신을 창조했느냐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우리는 온전히 과학의 범위 안에서 어떤 신적인 존재에도 호소하지 않고 위의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말한다. 물론 세계의 존재를 신 없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지만 분명한 것은 창조론에 대한 비판이다. 창조자가 없다면 만물이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 화하는 방법뿐이다. 신이 곧 만물이며, 만물이 곧 신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세계관이 증산도 신학적 생성론의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증산도 우주관은 신도우주관이다. 그리고 신에 바탕한 생성변화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두 신과 함께 하는 것으로 조화로 표현되어야 한다. 여기서 그 시원의 특이점(물리학의 빅뱅처럼)에 대해서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문득이다. 우주의 시초에 하늘과 땅이 문득열리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문득은 어떤 현상적, 과학적 설명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시초의 상황을 나타내는 형용어이다. 만일 그것이 다 설명되고 이해되었다면 굳이 불확정적 단어인 문득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득에는 만물생성의 불가측한 방법과 시간과 형상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설명하는 가장 올바른 표현은 바로 조화이다. 그래서 증산도가 밝히는 만물의 생성과 변화는 천지조화이면서 신명조화이다. 그 둘은 같은 현상의 다른 표현이다. 천지만물의 변화는 모두 외적 초월적 존재의 계획적 결과가 아니라 천지가 스스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조화이며, 이를 표현하여 천지조화라고 한다. 그리고 그 천지만물에 깃든 것이 신이므로 천지만물의 변화인 천지조화는 곧 신명조화이기도 한 것이다.

 

 

 

3. 조화성신造化聖神조화

 

조화성신造化聖神이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성령이며 신성이다. 도전11장에서는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사심이 계시니... (삼신은) 조화성신이니라고 하였다. 즉 태시에 대광명과 함께 존재한 삼신은 곧 조화성신이라는 것이다. 조화성신이란 우주의 생성과 변화라는 조화작용의 주체로서 원신元神을 말한다. 그래서 조화성신은 조화造化작용으로 우주만물에 신성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우주만물의 신성과 생명성은 곧 조화성신 그 자체이다. 증산도 신관에서 삼신을 우주의 조화성신”(도전1:1)으로 정의하는 이유이다.

조화성신은 만물의 근원으로 그 속에 내재하는 보편적 신령이며 존재의 바탕이 되는 신성이므로 줄여서 성신이라고 부르고, 그 신적 존재성은 원신primordial God이다. 원신의 전통적 명칭은 삼신이었다. 우리 한민족의 정통 역사철학서인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은 우주를 만들고 만물을 지으신 일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신은 우주만물의 근원적 존재를 의미하며 삼신과 같다고도 말한다. 일신은 우주 원신으로서 삼신인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삼신은 신이 셋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신으로서 바로 원신이자 조화성신이다. 조화성신의 존재성은 다음 구절에서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은 곧 일신이요 우주의 조화성신이니라.(도전1:1:2)

 

이 구절에서 대광명, 삼신, 조화성신은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에서 주의해야할 표현은 홀연히 열린 우주이다. “우주가 홀연히 열렸다함은 태초의 우주가 저절로, 자연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시작된 것은 누군가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며, ‘열림개벽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홀연히인데 우주가 열리는 근거나 방식 또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홀연忽然어느 순간에 그러하다는 뜻이다. 홀연히알 수 없는 순간에, 알 수 없는 방법으로라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로 볼 때 홀연히의 다른 표현은 바로 조화이다. 우주 생성의 시원적 사태에 대한 명확한 인과적 설명이 불가능한 것, 그러나 그 사태의 실재성을 표현하여 홀연히라고 하였고, 그러한 사태에 대한 증산도적 표현은 조화이다.

홀연히 열린 우주 시원의 자연 상태는 바로 대광명이다. 즉 우주의 가장 원초적 상태를 표현하여 큰 빛이라고 하였다. 이 빛을 철학적 용어로 대치할 경우 그것은 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가장 원초적 존재성은 무형의 기일 것이며, 이런 원시적 기는 종교적으로 표현하여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와 신은 서로가 서로를 함유한다. 기와 표리관계를 이루는 최초의 신은 고등종교의 대상이 되는, 인격적 모습을 갖춘 그런 신이 아니다. 증산도 신관에서 이 최초의 신성은 곧 원신이며, 동방 신교神敎의 전통에서는 삼신이라 부른다. 삼신으로 부르지만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실재라는 의미에서 곧 일신혹은 일자一者라고 할 수 있다. 도전11장에서 그 삼신을 조화성신이라 하는 것이다.

일신이자 삼신인 조화성신은 만물의 근원이요, 그 자체 근원적 실재이므로 스스로의 변화와 발전이 곧 우주만물의 생성이며 변화이며 발전이다. 즉 우주만물은 삼신의 현현顯現 혹은 화현化現인 것이다. 그래서 만물을 낳는 삼신의 자발적 변화를 조화로 부를 수 있다. 즉 삼신은 조화신이며, 그래서 조화성신이라고 부른다. 조화성신의 조화는 다음의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도전1:1:3)

 

삼신이 만물을 낳는다.”고 한 이 구절은 우주 생성의 시원적 상태에 대해 창조작용으로 해석되어 삼신이 따로 있고 그 삼신이 삼신과 구별되는 만물을 만든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한 해석이 바로 기독교의 창조론이다. 그러나 만일 삼신이 세상을 창조한다면 삼신과 세상은 두 가지 독립된 존재가 될 것이다. 이는 태시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 혹은 홀연히 열린등과 모순된다. 나아가 동양의 신관과 세계관은 결코 주객이 구분되는 이러한 이원론이 아니라 우주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일원론이다.

낳음창조가 아니다. 여기서 낳음만듬(창조)’이 아니라 드러남(화현)’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다고 표현할 때 낳았다창조했다는 뜻이 아닌 것과 같다. 어머니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길러 어머니의 분신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것은 어머니의 모든 속성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삼신이 신성을 갖는 만물을 낳는 것과 같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것이 창조가 아니듯, 삼신이 만물을 낳는다는 것 역시 창조가 아니다. 빅뱅이 창조가 아니듯, 삼신이 낳는 것 역시 창조가 아니다. 삼신이 만물로 화해 드러남(화현)’을 일컬어 도전은 삼신이 만물을 낳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드러남이 삼신이 만물을 낳은 조화작용인 것이다. 이것이 삼신은 조화성신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4. 조화주 상제

 

조화성신인 삼신은 곧 일신이라고 하였다. 삼신과 일신의 관계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삼신은 우주의 원신이며, 이 우주원신은 하나이지만 세 위격을 가지므로 삼신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삼신은 우주원신의 이름이며 신인 이유는 조화, 교화, 치화라는 그 작용에 따라 조화신, 교화신, 치화신의 위격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우주를 주재하는 일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우주의 원신인 삼신과 그 신성을 함께하며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최고의 신이 있으니 일신이며, 상제이다. 주체는 일신이지만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작용으로 보면 삼신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은 곧 한분 상제님이라고 하였다.

상제는 우주의 조화성신과 그 신성을 함께 하기에 삼신 상제이며,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라고도 표현한다. 즉 원신으로서의 삼신과 그 신성과 능력과 위격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제는 우주를 주재하고 다스리는 최고신으로 인격성을 지니고 있다. 즉 원신인 삼신과 하나 된 신이지만 인격성을 가지고 우주만물을 주재하고 통치하는 최고의 인격신이다. 그래서 이 일신인 우주 주재신을 삼신 상제라고 부른다. 아래 인용은 앞에서 인용한 도전11장의 다음 구절이다.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도전1:4-5)

 

지금까지 우리는 우주의 원신으로서 삼신은 곧 일신이며 조화성신이라고 하였다. 위 구절은 이러한 원신과 함께 하는 우주주재자로서 일신이라는 새로운 신격을 밝히고 있다. 즉 조화성신인 삼신과 하나 되어 우주를 통치하시는 인격신을 삼신 상제, 혹은 줄여서 상제라고 부르며, 상제는 곧 우주 통치자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일신이며 주신인 상제의 위격과 작용에 대해 이맥은 태백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상 세계에 곧 삼신이 계셨으니 곧 한분 상제님이시다. 주체는 일신이시니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시다. 삼신은 조화로 만물을 빚어내고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지만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신다.

 

결국 상제님은 조화의 신인 조화삼신과 하나 되어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최고신이므로 그 다스림의 결과 역시 조화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도전에서는 상제님을 조화주하느님, ‘조화주상제님이라고 부른다.

 

상제님께서 열석 달 만에 탄생하심은 황극수皇極數384수에 맞추어 인간으로 오심이니, 우주의 조화주로서 천지 변화의 조화 기틀을 품고 강세하심이라. (도전1:16)

 

만물의 생성과 변화와 함께 하는 조화성신조화삼신’, 그 조화삼신과 하나 되어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한 신이신 상제를 우주의 조화주라고 부른다. 조화주는 천지만물의 조화의 주체, 혹은 조화의 주인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바 모든 조화의 근원인 조화삼신과 하나 된 위격이므로 조화주이며, 따라서 조화주 상제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조화로 일어나고, 조화로 변화하며, 조화로 결실을 맺기에 조화주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조화와 신명조화를 모두 주재하시는 사제는 최고의 신성을 가진 일신이며, 모든 조화의 근원인 조화주이다.

 

V. 조화의 근원, 신명조화

 

지금까지 우리는 도전11장을 중심으로 증산도 조화사상의 가장 본질적 부분을 검토했다. 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바탕에서 원신과 삼신, 조화성신, 조화주 상제님 등 신성이 개입하여 있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 신의 작용이 곧 조화임을 살펴보았다. 즉 천지만물의 생성변화의 바탕에는 언제나 신이 함께 하며, 그 신으로 인해 일어나는 변화 모두를 일컬어 신명조화라고 한다.

 

1. 천지조화, 신명조화

 

인류의 역사는 신과 함께 한 역사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에서 신이 떠난 적은 없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단지 그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서양의 기독교 신관에서는 신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창조신관을 주장한다면, 동양에서는 천지만물의 생성은 우주법칙에 따른 스스로의 변화발전에 의한 것으로 설명된다. 창조자도 피조물도 없는, 천지가 신이고 신이 천지인 신관이다. 당연히 천지만물의 변화는 신을 떠나서 설명되지는 않는다. 즉 현상적 사물의 이면에는 신이 존재하고 신은 변화의 바탕에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신관을 창조신관과 구별해서 주재신관主宰神觀이라고 말한다. 즉 천지만물의 변화를 신이 주재한다는 것이다.

증산 상제는 우주를 다스리는 주재신이며 최고신이다. 그러나 오직 증산 상제만이 신이고 신성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천지에 가득한 것이 신이며, 증산 상제는 그 모든 신들 중에서 최고의 위격을 가진 한 신(일신一神)이며, 그렇지만 모든 신을 주재하는 통치신이다. 모든 신들은 동일한 신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상제조차 신으로서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위격은 서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 도전11장의 다음 구절을 보자.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제사문화의 본고향이니라.(도전1:1:7)

 

동방 한민족의 신관은 최고신으로서 상제님과 천지만물에 내재한 다양한 신(천지신명)을 인정하는 일원적 다신관임을 알 수 있다. 상제는 조화의 주체로서 조화주라면 천지신명은 천지에 내재한, 천지와 함께하는 신으로서 천지변화의 구체적 주체들이다. 그래서 천지의 변화는 신이 함께 하는 천지조화인 것이다. 그래서 증산도 사상에서 조화의 다른 표현은 천지조화이다.

천지조화란 천지만물이 조화주 상제의 주재 하에서 변화하는 모든 과정을 말한다. 하늘과 땅과 인간을 주재하시는 조화주 증산 상제는 삼계의 모든 일을 다스리며, 그 다스림의 바탕에 무수히 많은 신들이 함께 한다. 인간으로 강세한 증산 상제의 모든 행위 역시 이와 같다. 증산 상제의 말은 천지조화를 낳고, 천지조화로서만이 천지의 일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나의 일은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신도神道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니라. 신도로써 만사와 만물을 다스리면 신묘神妙한 공을 이루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니라. 내가 천지를 주재하여 다스리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쓰나니 이것을 일러 무위이화라 하느니라.(도전4:53)

 

무위이화는 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노자는 자연自然즉 스스로 그러함이라고 하였다. 즉 도의 작용은 무위이화이고, 그 도는 곧 자연을 본받는 것이다. 만물이 어떤 작용 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조화라고 한다면, 무위이화는 곧 조화작용의 본질이다. 증산 상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의 변화를 짓는 조화권능을 지니고 이로써 천지를 다스리니 그 조화권능이 실현되는 법이 바로 무위이화이다. 무위이화와 상제의 다스림으로서 주재가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일은 무위이화라고 하였고, “내가 천지를 주재하여 다스린다.”고 하였으니 결국 주재의 방식은 무위이화가 될 것이다. 이는 증산 상제의 주재는 의도적, 목적적, 인위적 다스림이 아니라 주재의 법이 곧 무위이화인 것으로, 이는 달리 조화라고 밖에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증산 상제의 무위이화는 신도로써 실현되므로 이를 신명조화라고 부른다. 신명조화란 모든 변화의 바탕에 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변화는 곧 신의 작용이며 신적 변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도전4:62)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이란 말로써 이 우주의 바탕은 신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된다.’는 말로써 이 우주의 모든 변화는 신이 짓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신도 우주관에서 모든 변화는 신의 무위이화이며, 신의 조화이다. 즉 신이 깃든 변화이다. 이러한 천지조화를 신명조화로 보지 못하면, 즉 모든 변화에 깃든 신의 작용을 보지 못한다면, 자연은 오직 물질이며 모든 자연의 변화는 물질적 인과관계에 따른 변화로 인식될 뿐이다. 그래서 카프라는 운동과 변화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처럼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신성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의 저자 에모토 마사루는 물에 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물이 그냥 물(H2O)이 아니라 영성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물은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물질이면서 인간의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물에 대한 다양한 상징과 신화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에모토 마사루는 이러한 상징과 신화를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물은 과학적 관점에서는 물질의 하나이지만 단지 물질이 아니라 마음과 신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였지만 단지 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러한 실험이 가능하다면 천지만물의 신성을 입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모토 마사루의 결론은 우주전체가 영적 메카니즘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를 물을 매개로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을 안다는 것은 우주 전체를 아는 것과 같다고 과감히 주장한다.

저자는 만물을 파동으로 보는데 인간의 의식과 사물 역시 고유의 파동으로 서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만물의 생성과 변화 역시 파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이다는 말과 같으며,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단지 신의 작용을 파동으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 성도가 여쭈기를 “‘다가오는 세상 난리는 신명의 조화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사온데 과연 그러합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개벽을 해도 신명 없이는 안 되나니, 신명이 들어야 무슨 일이든지 되느니라. 내 세상은 조화의 세계요, 신명과 인간이 하나 되는 세계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내 일은 인신합덕人神合德으로 되느니라.” 하시니라.(도전 2:44)

 

신명이 들어야 모든 일이 된다.”는 말과 내 세상은 조화의 세상이라는 말을 종합하면 신의 조화로 모든 일이 생성소멸한다.’는 뜻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천지조화는 곧 신명조화라는 것이다. 일상의 눈으로 볼 때 그 변화가 모두 신명조화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선천은 신명과 인간이 원활히 상호작용하지 못해 서로가 하나임을 알지 못할 뿐, 증산 상제의 모든 일은 인간과 신명의 합덕으로, 즉 인간의 모든 일에 신명이 함께 함으로써 조화로 열리게 됨을 말한 것이다. 우주가 생겨난 그 태시에 빛이 있고 그 빛이 곧 신이며, 신의 자기 현현이 우주만물이므로 신과 만물과 인간은 서로 분리되지도, 분리할 수도 없는 통일적 존재이다.

 

귀신鬼神은 천리天理의 지극함이니, 공사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귀신과 더불어 판단하노라.”(도전4;87)

 

귀신은 신명이며, 신명은 천지변화 이치의 바탕이니 모든 공사는 반드시 신명의 참여하여 행해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증산도의 조화사상에서 볼 때 조화성신, 천지조화, 신명조화, 인간조화는 모두 같은 말이며, 모든 생성변화에 대한 증산도적 설명이다.

 

2. 조화주 증산 상제의 조화법

 

천지만물의 변화가 다 조화이지만 그 조화가 과학적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 그런 조화를 현묘불측한 공덕, 즉 신통묘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모든 것에 명확한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신비라고 말하여 과학의 영역 밖으로 밀어버린다. 일명 과학지상주의인데 신도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비과학적, 비상식적 신비라도 그것은 신도의 조화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없다. 증산 상제의 언행은 모두 조화권능의 표현이며, 그 결과가 신명조화 아님이 없으므로, 증산 상제의 언행은 항상 신묘불측한 공덕을 이룰 수밖에 없다.

 

616일에 객망리 댁을 떠나 전주 모악산母岳山 대원사에 이르시어 칠성각七星閣에서 도를 닦으시니라. 이 때 겹겹이 싸인 깊은 숙연宿緣을 닦으시고 미래의 세상을 살피시어 장차 온 천하가 대개벽기의 운세에 닥쳐 멸망당할 것을 걱정하시며 무궁한 조화의 법을 통하시어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앉아 수일을 지내기도 하시고, 천지의 풍운변화의 조화법을 시험하기도 하시니라. ..공부를 마치시고 도문道門을 여신 뒤에 각국 제왕신과 24장을 부르시어 충북 청주군 청천면淸州郡 靑川面 만동묘萬東廟에 응집시켜 놓으시고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금후 이 자리가 쑥대밭이 되면, 이 제왕신과 24장이 모두 금산사金山寺에 와서 옹위하리니 이 신명들을 잘 대접하라.” 하시니라.(도전2:3)

 

증산 상제가 도통하기 전의 한 장면이다. 인간으로 강세한 상제로 삼계대권을 회복하기 전에도 무궁한 조화의 법에 통하시고, 풍운변화를 일으키는 조화법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모두 인과원리에서 벗어난 변화의 원리인 조화법을 사용하는 조화권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왕신과 24장을 자유자제로 부르는 권능 역시 신도에 관련된 조화법이 아닐 수 없다.

증산 상제의 수많은 공사와 기행이적奇行異蹟은 모두 신명과 함께 하는 신도공사이며, 그 공사가 도수로 정해지고 또 현실화 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모두 신명조화의 산물이다. 그래서 신명조화가 아니고서는 고쳐낼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상제님께 소와 개를 잡아서 올리거늘 상제님께서 신명이 같이 해야지, 신명 없이는 일을 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제를 지내 신명 대접을 하신 뒤에 나누어 먹게 하시고...(도전4:53)

 

신명이 모든 일에 같이 할 때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신명대접은 신명이 함께 하는 모든 일에, 그 일이 조화로 잘 풀려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의례이다. 우리 민족의 천제문화나 제사문화, 기우제나 산신제 등은 모두 신명대접의 한 모습이다. 에는 항상 제물祭物이 따르며, 그 제물을 신명이 흠향歆饗한다고 믿는 것이다.

증산 상제의 조화법은 신을 부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로 말씀으로 신을 부리지만 대부분 말씀과 부적符籍을 함께 사용한다. 부적은 신과 통하는 문서인 셈이다.

 

상제님께서 밤에 혼자 계실 때도 자주 문명을 써서 불사르시며 공사를 행하시는데 아침이 되면 그 재를 형렬에게 치우도록 하시니라.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글이나 부적을 쓰시어 공사를 행하신 후에는 모두 불살라 버리시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나타남()으로 알고 귀신은 불사름()으로 아느니라. 내가 옥황상제로서 천지공사를 행하는 고로 반드시 불살라야 하느니라. 는 귀신의 길이니라.” 하시니라.(도전4:67)

 

천지공사는 부적을 그리고 이를 불사름으로써 신명을 부리고, 신명조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현실화 된다는 것이다. ‘부적은 귀신이 조화를 행하는 길이라는 말씀이 생소하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이러한 공사의 구체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다.

 

태인 덕두리德斗里에 사는 최덕겸崔德兼의 부친이 학슬풍鶴膝風으로 앓아 누웠거늘 덕겸이 상제님의 신이하심을 듣고 마침 새울 최창조의 집에 머물고 계신 상제님께 약을 구하러 찾아오니라. 그러나 덕겸이 아무리 기다려도 약을 지어 주시지 않으므로 포기하고 돌아가려 하니 그제야 상제님께서 물으시기를 네가 약을 지어 주지 않는다고 그러느냐? 그럼 내가 병을 낫게 해 주면 쌀 열 섬을 내겠느냐?” 하시거늘 너무도 반가운 말씀이라 덕겸이 ! 쌀 열 섬을 사람 목숨에 대겠습니까? 병만 낫게 해 주신다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니라. 이에 다짐을 받으시고 부적을 써서 청수에 적셔 불사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에 가 보면 알 것 아니냐.” 하시거늘 덕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부친이 생기를 얻어 일어나 있는지라 너무 반갑고 놀라워 부친께 회복된 시각을 물으니 바로 상제님께서 부적을 쓰신 시각이더라.(도전3:177)

 

1907년 어느 날 증산 상제의 언행을 기록한 내용이다. 이 증언의 기록에서 우리는 증산 상제의 신이함이 당시 조선의 전 지역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덕겸은 부친의 병고에 한없이 걱정하다가 전라도 땅에서 때론 신인으로, 때론 하느님으로 불리던 증산 상제를 찾아갔다. 그러나 병을 치유할 약은 내리지 않고 부적을 써서 불사르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집에 오니 부친의 병이 완치되어 있었다. 이 하나의 장면에서 우리는 증산 상제의 치병에서 신명조화와 신명대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부를 그려 신명을 부리고, 그 신명조화로 병을 고친 것이며, 쌀 열 섬은 신명대접을 위한 제물이었다.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강세하여 행한 9년 천지공사 역시 신명과 함께, 신명을 부려서 도수를 짜는 것이므로 신명공사라고도 한다. 그 당시 천지공사를 볼 때 수종을 든 많은 종도들은 공사가 곧 신명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다. 다음은 천지공사 중 ‘49일 동남풍공사의 한 장면으로 신명조화가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는 분명한 예다.

 

상제님께서 전주에 계실 때 천지대신문을 열고 날마다 공사를 행하시며...성도 서너 명을 거느리고 남고산성南固山城으로 가시어 만경대萬景臺에서 49일 동남풍 공사를 행하시니라....이어 상제님께서 너희들은 바람이 불거든 오라.” 하시고 남고사南固寺로 들어가시매 과연 조금 후에 동남풍이 크게 부는지라 성도들이 들어가 아뢰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차길피흉此吉彼凶이로다.” 하시고 산성을 내려오시니라. 그 후 상제님께서 49일을 한 도수로 계속하여 동남풍을 불리실 때 미처 기한이 다 차기도 전에 먼 곳에서 한 여인이 찾아와 자식의 병을 고쳐 주십사 애걸하거늘 상제님께서 공사에 전심하고 계시므로 병욱이 상제님께 아뢰지 못하고 돌려보내니 그 여인이 한을 품고 돌아가매 갑자기 동남풍이 그치는지라 상제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급히 그 여인에게 사람을 보내어 공사에 전심하심으로 인해 미처 대답지 못한 사실을 말하여 안심하게 하시고 곧 자식의 병을 고쳐 주시니 즉시 바람이 다시 일어나거늘 한 사람의 원한이 능히 천지 기운을 막는다.” 하시니라. 그 뒤로 과연 일러전쟁이 일어나더니 일본 군사가 승세를 타고 해륙전에서 연속하여 러시아를 물리치니라.(도전5:53)

 

이 공사에서 우리는 신과 사건의 전개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천지공사가 신명과 함께 하는 공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증산 상제는 천지대신문을 열고 신도를 통해 공사를 행하며, 이 공사로 인해 신명조화가 일어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아이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상제님을 찾아온 한 여인의 한이 천지에 사무처 신명조화가 흐트러져 공사에 차질이 생긴 것에서 그 여인의 한은 결국 그 여인과 함께 하는 신명의 한으로, 천지공사에 억울한 하나의 신명이라도 있다면 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천지개벽을 해도 신명 없이는 안 되나니 신명이 들어야 무슨 일이든지 되느니라. ...파리 죽은 귀신이라도 원망이 붙으면 천지공사가 아니니라.”(도전4:48)고 하였다.

 

증산 상제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공사에서 늘 말씀하기를 개벽도 천지공사도 신명 없이는 안 된다.’고 하였다. 더구나 억울하게 죽은 파리귀신의 원망이라도 있으면 공사가 불가한 것처럼, 신명이 원한을 품으면 어떤 공사도 조화를 일으킬 수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는 신명과 함께 하며 신명조화를 일으키지만, 또한 인간을 공사에 참여시켜 그 정성과 기운으로 조화를 내기도 한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하운동 이환구李桓九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 환구에게 이르시기를 네 아내가 49일 동안 정성을 들일 수 있는지 잘 상의하여 보라.” 하시므로 환구가 아내에게 그 뜻을 물으니 그의 아내는 형렬의 누이동생으로 상제님의 신성하심을 익히 들은 터라 굳게 결심하고 대답하거늘 상제님께서 다시 다짐을 받게 하시고 날마다 목욕재계한 후에 떡 한 시루씩 찌게 하시니라. 여러 날이 지나매 그 아내가 괴로워하며 불평을 품으니 이 날은 나무 한 짐을 다 때어도 떡이 익지 않는지라 환구의 아내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상제님께서 환구에게 이르시기를 떡이 익지 않는 것은 성심誠心이 풀린 까닭이라. 네 아내가 심히 걱정하는 듯하니 내 앞에 와서 사죄하게 하라. 나는 비록 용서하고자 하나 신명들이 듣지 않느니라.” 하시니라. 환구가 아내에게 말씀을 전하니 아내가 깜짝 놀라 사랑에 와서 상제님께 사죄하고 다시 부엌에 들어가 시루를 열어 보니 떡이 잘 익었더라. 이로부터 일심으로 정성을 들여 49일을 마치니 상제님께서 친히 부엌에 들어가시어 그 정성을 치하하시니라. 이에 그 아내가 한결같이 정성을 들이지 못하였음을 송구스러워하거늘 상제님께서 위로하시며 너의 정성이 하늘을 움직이고 신명을 감동시켜 이제 신명들이 너의 공덕을 기리고 있느니라. 믿지 못하겠거든 저 달을 보라.” 하시매 하늘을 쳐다보니 오색채운五色彩雲이 달무리를 이루고 있더라.(도전5:12)

 

환구의 아내가 공사에 참여하여 49일 동안 떡을 찌고 그 떡을 매개로 공사를 행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떡을 찌는 여인의 불평이 신명에게 닿아 아무리 불을 때도 떡이 익지 않는 사태를 낳았고, 결국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으나 상제님께 사죄하고 정성을 다하매 떡도 익고 공사도 잘 진행되었다. 불을 때도 떡이 익지 않는 것도 조화이며, 마음을 깨우치자 다시 떡이 익는 것도 조화이다. 이 모든 과정이 신명조화로 이루어졌음을 다시 하늘의 오색 구름으로 그 조화를 확인해 보여주고 있다.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는 모두 천지조화와 신명조화로써 행해지고 그 결과 역시 조화로 입증된다. 즉 천지공사는 신명이 함께 후천개벽을 주재하여 병든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 후천 새 세상을 이 땅에 만드는 것이다. 천지공사도, 개벽도, 후천의 새 세상이 오는 것도 모두 조화의 산물이다. 그래서 신명조화로 새롭게 열리는 후천 선경을 조화선경이라 부른다.

 

내 세상은 조화선경이니, 조화로써 다스려 말없이 가르치고 함이 없이 교화되며 내 도는 곧 상생이니, 서로 극하는 이치와 죄악이 없는 세상이니라...후천은 온갖 변화가 통일로 돌아가느니라.(도전2:19)

선천은 기계선경機械仙境이요, 후천은 조화선경造化仙境이니라.” 하시니라.(도전7:8)

 

후천선경을 조화선경이라고 한 것은 후천의 우주만물은 조화주 상제의 통치하에 모든 것이 조화로 열리기 때문이다. 그 조화의 세상은 모두가 모두를 살리고 잘되게 하는 조화 상생의 세상이며, 그러므로 죄악도 범죄도 없는 완전한 조화 도덕의 세상이다. 나아가 천지만물이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어 어떤 변화도 분열과 대립이 아닌 통일로 돌아가는 조화造化통일의 세상이다. 결국 신명공사, 조화정부, 신명해원공사나 천지조화 신명조화는 모두 조화선경을 위한 것이며, 이로써 후천의 모든 인류는 상생과 조화와 통일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VI. 맺는 말

 

도전의 첫 장에서 시작된 증산도 조화사상은 도전전체에 흐르는 중심 주제이다. 그래서 그에 담긴 함의를 읽지 못한다면 도전의 일점 일획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증산 상제는 조화주이며, 조화대권을 써서 조화공사인 천지공사를 집행하였고, 그 결과 후천의 이상적인 세계인 조화선경이 이땅에 열리게 된다.

증산도 우주론, 상제관, 인간관, 구원관, 수행관 등 모든 진리체계에 대한 설명에서 조화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천지만물의 본성이 신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현상이 물질적이지만 그 현상의 이면에 담긴 본래의 존재성은 신성神性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현상에 몰두하지만 종교는 신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두 관점의 차이가 시작된다. 과학이 존재의 본성을 물질에서 찾고 그 변화원리를 물리법칙에서 찾고 있는 한, 과학은 물질적, 경험적 한계 밖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칸트가 말하듯 인간은 감각적으로 경험된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 현상 너머에 있는 물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침묵해야 한다. 반면 종교적 관점에서 현상은 현상일 뿐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이 현상으로 존재하고 변화하도록 하는 신의 작용이다. 그러한 관점을 설명하는 가장 분명한 용어가 조화인 것이다. 증산 상제의 언행을 기록한 도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의 존재성을 밝혀주고 있으며, 그 세계의 모든 변화가 신에 의한 것이며, 그래서 그 변화가 곧 조화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마디로 조화는 만물의 생성소멸에 관련된 신적 설명이다. 그렇다고 조화가 물리적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 변화 역시 신에 의한 변화로서 조화임을 말하고 있다.

 

한 성도가 여쭈기를 “‘다가오는 세상 난리는 신명의 조화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사온데 과연 그러합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개벽을 해도 신명 없이는 안 되나니, 신명이 들어야 무슨 일이든지 되느니라내 세상은 조화의 세계요, 신명과 인간이 하나 되는 세계니라.” 하시니라.(도전2:43:4-6)

 

한 성도의 물음이 바로 현대 과학의 물음과 같다. 세상의 난리는 곧 개벽을 의미할 것이다. 개벽은 우주 만물의 총체적 변화를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자연과 문명과 인간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그래서 그 원인과 결과를 진단하고 치유하는 방법을 과학으로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증산 상제의 해답은 오직 신명의 조화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증산도 조화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조화가 일어나길 바란다. “시천주 조화정!”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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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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