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인간개벽, 홍익인간과 상생

황경선(상생문화연구소)

2023.02.17 | 조회 4755

2021년봄 증산도 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인간개벽, 홍익인간과 상생

 

황경선(상생문화연구소)

 

 

목차

. 머리말

. 상생의 의미

1. 살림, 생의 의미

2. 신유학新儒學에서 생의 의미

3. 살림의 성격

. 홍익인간

1. 살림의 겨레 동이

2. 인즉선人卽仙

3. 성통공완性通功完

. 증산도의 상생 사상

. 맺음말

 

 

논문요지


어느덧 정치, 경제를 포함 다양한 분야의 담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상생相生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깊숙하고 시원적이다. 우리는 ’, ‘살림에 대한 문자적, 철학사적 분석을 통해 그 본연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러한 의미에서의 상생이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구현되고 또 증산도의 상생 사상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수렴되고 있음을 밝힌다. 살림[]은 우주 만물로 하여금 제 본성대로 살도록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림은 언제나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상생으로써 수행된다. 상고 이래 한민족을 이끌어온 홍익인간은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인간, 나아가 만물을 그들의 본질대로 존재하도록 지키고 살리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의 본질이란 참나로 거듭나 천지의 신성과 하나 되어 하느님을 섬기며 성통공완性通空完으로써 조화와 장생을 얻는 선[人卽仙]의 삶이다. 증산도 사상에서 상생은 인간으로 강세한 상제의 가르침을 통한 우주론과 신관 등의 바탕 위에서 역사적이 되고 구체화된다. 우주의 질서가 바뀌는 개벽의 길목에서 치러야 하는 대환란에서 상제의 가르침으로써,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사역으로서 나타난다. 상생과 함께, 상생으로써 조화와 장생을 얻는 후천선경이 열리게 된다. 인즉선의 오래된 약속이 상생으로써 상생의 세상을 여는 이들에게 새롭게 도래하는 것이다.


. 머리말

 

상생相生. ‘서로 상살릴 생이니 문자적 뜻은 서로 살림이 되겠다. 언젠가부터 정치와 경제 분야에 쓰이기 시작하던 이 말은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혀 낯설게 들리지 않을 만큼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서로 양보해서 상대를 위하고 그랬을 때 자신에게도 이익이다.’라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상생을 영어로 ‘win-win’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또한 상생의 그런 뜻에 주목한 번역이리라 싶다. 이같은 이해에서는 상생이 더러 누이 좋고 매부 좋고혹은 너도 이익 나도 이익이라는 다소 잇속의 개념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상생의 의미는 그러한 계산적 사유가 접근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숙하고 시원적이다. 물론 이 주장이 얼마만큼 타당한지는 앞으로 밝혀져야 문제이다. 이글은 바로 그 확증의 작업을 시도한다.

이러한 의도 아래 우리는 ’, ‘살림에 대한 문자적, 철학사적 분석을 통해 그 본연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러한 의미에서의 상생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통해 한국 상고 시대의 정치와 교육 등 인간 삶을 이끌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드러난 상생의 본래적, 시원적 의미는 증산도의 상생 개념에 이어지고 나아가 수렴되고 있음을 밝힌다. 이를 통해 상생은 전략적 경영 방식이거나 정치적 구호, 나아가 인륜적 덕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완성, 인간 구원의 문제와 연관돼 있음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천지공사를 통해 새 세상을 열고자 한 증산 상제의 핵심 가르침인 상생이 전통적 상생 개념을 온전히 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우주적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 상생의 의미

 

1. 살림, 생의 의미

 

먼저 살리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써 논의를 시작해 보자: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 또는 식물이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하여 죽거나 죽어 가는 상태에 있는 것을 생명체로서 제대로 생명 현상을 이어 나가는 상태가 되게 하다.

가족의 생활을 돌보다, 먹여 살리다.

사람이 꺼지려고 하는 불 따위를 다시 타게 하거나, 스스로 동력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것에서 동력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 힘을 잃거나 힘이 줄어든 상태에 있는 것을 제대로 돌아가는 상태가 되게 하다.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어떤 것이 효력을 잃거나 자기 기능을 제대로 못하던 것을 효력을 발휘하거나 제 기능을 가진 상태가 되게 하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어투를 그대로 흉내 내다.

감옥이나 교도소에서 형기를 보내게 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일을 하게 하다 .

 

위의 용례에서 확인되듯, ‘살리다가 가리키는 의미의 스펙트럼은 꽤 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여러 뜻들은 같은 하나의 말이 지시하는 것인 만큼 마땅히 일정한 의미 내용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의적多義的이면서 일의적一義的이어야 한다. ‘살리다원형의미또는 시원적 의미라 할 그것은 저 다양한 확장의미들이 출발하는 단초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저 여러 의미들이 함께 공유하는 사태를 찾아 분석해 보면, 그 근본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살리다는 근본특성에서 어떤 것이 변형, 위축, 훼손, 오염, 소멸되지 않고 본래대로, 온전하게, 있어야 할 그것의 고유함대로 있도록 지킴, 다시 말해 그것의 본질로 머물도록 함의 사태다. 살림에 대한 다음의 규정도 그 의미에서 비켜나지 않는다. ‘살리다살아 있음의 상태를 바람직한 가치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여 살아 있는 것이 그 살아 있음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보살피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살리다의 반의어反意語죽이다’, ‘죽임은 그 반대의 사태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죽이다의 원형인 죽다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이렇다: 생명이 없어지거나 끊어지다/ 불 따위가 타거나 비치지 아니한 상태에 있다/ 본래 가지고 있던 색깔이나 특징 따위가 변하여 드러나지 아니하다/ 성질이나 기운 따위가 꺾이다/ 마음이나 의식 속에 남아 있지 못하고 잊히다/ 움직이던 물체가 멈추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다/ 경기나 놀이 따위에서, 상대편에게 잡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다/ 글이나 말 또는 어떤 현상의 효력 따위가 현실과 동떨어져 생동성을 잃다 등. 이에 비춰볼 때 죽이다의 근본 사태는 ‘~을 본질대로, 제 기능대로 있지 못하게 함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죽임의 의미는 우리의 살림규정을 반증해줄 것이다.

이러한 살림 규정은 아직은 잠정적인 것으로서 이후 논의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돼야 할 것이다. 이 규정을 충분히 유념하면서, 다음으로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살림, 삶을 가리키는 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의 최초의 자전字典이라할 설문해자에서 은 나아감을 뜻하며 풀과 나무의 씨앗이 싹으로 줄기, 가지로 땅 위에 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서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살림, 생은 제작이나 산출 등과 같이 자기 밖의 어떤 앞선 원인이나 근거에 의해 일어나는 인과적 사건과 다른 차원에 있다는 점이다. 살림, 생은 살려야 할 대상 자체가 지닌 저의 고유한 본질이나 가능성을 스스로부터 펼치는, 다시 말해 스스로 그것인 바 그것이 되는 발현發現[자현自現; 자화自化]의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컨대 초목에서 생이란 씨앗이 머금고 있는 자신의 본질[성숙한 초목]을 스스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다. 반대로 씨앗이 토양의 척박성, 수분 공급의 부적절함 등 어떤 이유로든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줄기와 잎이 밝은 생명의 빛을 잃고 시든다면, 즉 그 자신의 가능성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동사로서의 생, 살리다와 그것의 명사형인 살림은 비호되는 대상이 스스로 그것인 바 그것으로, 그의 고유함으로 있도록 해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유위有爲보다 근본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살림은 대상 자체가 지닌 본질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왜곡하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무위無爲이다. 예컨대 농부의 농사짓기가 그와 같은 것이다. 농사는 경작지에 무엇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자체에 은닉된 본질의 가능성을 스스로 펼쳐 성숙하고 결실을 맺도록 지켜주고 살리는 것이다.

 

2. 신유학新儒學에서 생의 의미

 

여기에 더해 우리의 관심 범위 안에서 중국의 신유학에서 생명, 살림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와 관련된 주제어는 인이다. 인은 생으로 이해된다. 동양 유학에서 인은 처음에 삶의 이상’(공자), ‘보편적 선천적, 내재적 본성’(맹자) 등 인간 덕성의 측면에서 주로 논의된다. 그러다 북송北宋(960~1127) 시기 이정二程(신종神宗 때의 학자인 정호程顥, 정이程頤를 말함)과 주자朱子 등에 의해 전개된 신유학에 이르러, 인은 천지天地의 마음, 천지의 덕으로 이해가 확장된다. 그리고 이 인을 매개로 한 천지와 인간의 합일에 대해 얘기한다.

주자에 따르면 천지는 만물을 생하는 것을 그 마음과 덕성으로 한다. 천지의 마음이 소가 말이 아닌 소를 낳고 복숭아나무에서는 오얏꽃이 아닌 복숭아꽃이 피는 이유가 된다. 만물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닌 그 자신이 되도록 낳는 천지 마음의 덕성은 인이다. 이때 인은 곧 생, 살림의 의미인 것이다. “천지는 만물을 낳음[生物]을 마음으로 삼고, 사람과 물의 생명은 각기 그 천지의 마음을 얻어 각기 제 마음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마음의 덕에 대해 말하면, 한마디로 인일 따름이다.”대개 인이란 만물을 낳는[生物]천지의 마음이다.”인은 낳으려는[] 이고 낳으려는 뜻이 인이다. 천지는 생의生意를 품은 개별 생명으로 하여금 그것이 지닌 고유한 명대로 생장하도록 하는, 즉 살리는[] 존재이니, 그 자체가 인이라고 할 수 있다.

천지가 개별 생명을 산출하는 그 순간부터 천지가 지닌 생명을 살리는 이치와 기운은 그대로 사람을 비롯한 모든 자연존재들에 깃들게 된다. 생 혹은 인은 천지와 인간과 물을 하나로 모으는 근본바탕이고 통로가 된다. 인을 중심[]으로 그것을 사이[], 천지와 인간 만물은 하나로 합일하는 것이다. 모든 개별 생명은 천지의 도인 인에 뿌리를 두고 각자의 생명운동을 통해 그 인을 실현해 나간다.

그렇지만 인간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이 한 근원인 천지로부터 나눠가진 생생生生의 인은 그 정도에서 구별된다. 그것이 개별자들이 서로 차이 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우주의 마지막 진화의 꽃, 가장 신령한 인간은 치우침이 없이 가장 탁월하게 품수한다. “무릇 하늘이 물을 낳음에 길고 짧은 것이 있고 크고 작은 것이 있다. 군자는 그 큰 것을 얻었으니 어찌 작은 것으로 하여금 크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이란 명칭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인 때문이다. “인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지 않으면 이치가 머무른 곳을 볼 수 없고, 사람을 말하되 인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은 단지 한 덩이 피와 살에 지나지 않는다. 반드시 둘을 합해서 말해야 비로소 도리가 성립됨을 볼 수 있다.” 주자의 이 말은 살림의 이치는 인간 안에 본성으로 내주하며, 그것이 비로소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는 것이다.

신유학이 보기에 이러한 길고 짧고 크고 작은존재자적(ontisch) 차이 덕분에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존재론적으로(ontologisch)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지닌다. 그 소임은 제 본성을 온전히 발현함으로써, 즉 살림으로써 생성 변화하는 천지화육에 참여하는 데 있다. 생의로 가득한 생명들이 약동하는 피시스(physis), 그 존재발현에 들어서 모든 것이 하나의 통일적 질서 안에서 각자의 고유함으로 있도록 살리는 것이다. 여기엔 인간이 살림으로써 천지 화육에 그 책임을 다하는 길이 동시에 그 자신을 살리는 것이란 점이 뚜렷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포함돼 있다. 천지의 짝이 돼 자신과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됨을 온전히 구현한 인간이 군자君子’, 곧 동양 유가에서 추구된 본연의 인간, 이상적 인간이다.

이렇듯 신유학의 문맥에서 인을 둘러싼 생의 논의도 그 살림의 뜻이 어떤 것을 그 본질에 이르도록 함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또 그러한 살림은 언제나 남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서로 살림이란 점이 드러난다. 천지, 만물과 인간은 서로 살리며 조화를 이룬다. 생의의 인 그 하나가 모든 것을 관통하는[一以貫之] 것이다.

또한 신유학에서 다뤄지는 살림으로서 인이나 생 역시 외적인 작위作爲가 아니란 점이 확인된다. 인의 살림 역시 살려야 할 바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제 자신의 본질과 고유한 질서대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이란 본심本心의 온전한 덕을 보존하고 잃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가 스스로 질서와 조화를 지니게 된다.” 그럼으로써 또한 인의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최상의 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의 인은 사랑의 이치다. 살림으로서 인이란 천지에서는 쾌연히 만물을 낳는 마음이며 인간에서는 따뜻이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다.”

 

3. 살림의 성격

 

사전적 용례와 의미를 통해 확증을 시도한 살림규정은 그 자체로부터 살림의 사태와 관련하여 사유돼야 할, 몇 가지 것들을 이미 지시하고 있다. 먼저 살림이란 어떤 것을 인위적으로 그 고유한 본질의 질서 밖으로 끌어내거나 개조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살림은 살리고자 하는 것이 이윽고 스스로 지닌 본성[]에 따라 있도록 하는, 다시 말해 품부된 바의 자기 질서에 따라 제 구실을 하고 제 모습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 보면 살림은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무위無爲는 어떤 것을 비로소 참되게 있게 한다는 점에서 최상의 함이다.

이러한 살림은 또한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상통할 것이다. 사랑에 대해 흔히 말하기를, 상대방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소망하는 정서라고 말한다. 이때 최선의 것, 가장 바람직한 선은 무엇일까? 일찍이 서구 시원의 사유 공간에서 선은 쓸모가 있다’, ‘유익하다를 의미했다. 이에 따라 다시 물으면, 그렇다면 상대를 위해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것인 바 그것이 되도록 하는, 자신의 본질, 참됨[眞理]에 이르도록 하는, 즉 살리는 것이다. 그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유익은 없다. 그래서 사랑은 살림이다.

예컨대 하이데거에 따르면 플라톤에서 이데아는 존재자의 원형原形과 같은 것으로서 존재자가 무엇인 바에서 나타나고 그렇게 존속하도록 하기에 이롭다, 곧 선하다. 나아가 모든 이데아를 하나의 이데아로서 쓸모 있게 하는, 즉 이데아의 본질을 가능케 하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인 최고 이데아는 가장 선한 것[最高善]이다. 최고선은 모든 보일 수 있는 것을 보이게 하는 태양에 유비된다. 그런 의미로 살림은 단적으로 선한 것이며 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에 따르면 이 글에서 다루는 홍익인간은 인간, 나아가 접하는 모든 것을 살리는[接化群生] 것이기에 가장 소망스러운 선이자 지극한 사랑이 될 것이다.

이런 선의 의미는 동아시아 사상에서도 발견된다. 주역은 천지가 음양陰陽 운동을 통해 만물을 낳는 것을 도, 이 도를 계승하는 것을 선이라 한다. 천지의 도는 음양 운동을 통한 생명 살림이며, 그 도를 이어받아 현실 가운데 생이 실현되는 것이 선이다[繼之者善也]. 살림, 생이 곧 선이라는 것이다. 중용은 인간의 길을 선한 것 하나를 굳게 지키는 것[擇善固執之者也]이라고 가르친다. 이때 선한 것은 천지의 근본을 이루며 온갖 사물을 지성무식하게 낳고 낳는 살림의 성이며 중이다. 중용역시 끊임없는 생의生意의 천도天道와 그것을 굳게 지키는 정성[誠之者]을 선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밖에도 살림은 뚜렷이 말하지 않아도 언제나 이미 서로 살림이다. 살림은 유기체든 무기체든, 우주 한 생명에 관여하는 모든 것들에 미친다. 여기에는 이미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동일한 존엄과 가치를 갖고 하나로 어울려 있다는 존재론이 전제돼 있다. 그와 같은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들이 오직 하나의 그물망에 서로 얽혀 조화를 이루며, 또한 오직 그렇게만 존립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 자연과, 사회, 이웃 등 타자를 살리는 것은 그 자신을 살리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본질이 살림에 있다면 말할 나위가 없다. 이 경우 타자를 살리는 것은 곧 제 본질을 다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 자신을 살리는 것이 된다. 결국 살림 그 하나가 천지, 만물과 인간 등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살림은 모든 것을 함께 불러 모으는 중심[]이며 모든 관계들의 관계가 되는 하나이다. 살림은 천지의 도며 로고스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사전에서 밝히는 살림의 의미와 용례, 그리고 동양의 신유학에서 생과 관련된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살림의 성격을 예비적으로 규정하고, 또 이를 확인해 보았다. 이렇게 해서 드러난 규정들은 이제 홍익인간과 증산도의 상생 사상을 살림으로서 다루는 논의를 앞서서 밝히는 전이해 혹은 선입견의 구실을 할 것이다. 동시에 전자는 후자 안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확증될 것이다.

 

. 홍익인간

 

1. 살림의 겨레 동이

 

홍익인간은 대체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또 단군 왕검이 나라를 연 건국 이념으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홍익인간의 출처에 관한 기존 이해는 환단고기에 따르면 아주 틀린 정보는 아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다. 환단고기는 홍익인간이 단군이나 환웅에 앞서 환인에게서 전해 내려온 것이라 밝힌다. “홍익인간 이념은 환인천제가 환웅에게 내려준 가르침이다.” 사실 삼국유사또한 홍익인간이 환인에 연원을 두고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환인은 인간 세상을 구하기를 늘 원했던 환웅에게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땅’[백두산]을 골라 주어 한민족의 최초 국가 배달을 열게 했다. 그 후 홍익인간은 배달을 이은 단군 조선의 개국 이념으로 지속되었다.

상고 개천開天의 정신이었던 홍익인간을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홍익인간을 살림으로 해명하려는가?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일정하게 시사된 바 있다. 그 설명을 다시 환기해 보자. 우리의 논의에서 본래적 의미의 살림이란 어떤 것을 혹은 누구를 비로소 그의 본질대로 있도록 지켜주는 것으로서 밝혀졌다. 그리고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이로움은 단지 인간을 위험에서 건지거나 권익과 복지를 늘리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실질적 이로움을 포함하여, 아니 그것을 능가하여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비로소 그 자신으로, 즉 저의 참됨으로 있도록 돌보고 간수하고 지켜주는, 즉 살리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익인간은 살림이다.

또 일부 해석에 따르면 홍익인간은 인간을 더욱 넓게 늘리는 것이다. 이때 증가해야 할 인간은 당연히 본래적 인간, 제 본질에 이른 인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해석도 홍익인간을 동일한 뜻으로 읽고 있다. 널리 이웃을 비로소 인간, 그 자신이게 하라, 그런 참 인간을 무한히 넓혀라. 물론 홍익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 인물, 즉 인간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것이다. 접하는 모든 것을 살리는[接化群生] 것이다. 그래서 홍익인간은 가장 크고 참된 사랑이고 선이다.

그렇다면 살림으로서의 홍익인간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그 이념이 삶을 이끌던 시대에 인간의 살려야 할 본질이나 제 모습 혹은 참나[眞我]’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드러나야 한다. 이를 위해 방법적으로 먼저 동이東夷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그들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동이란 산동, 요동, 한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동방문화권의 주인공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용산문화와 통하는 농경문화를 가졌고 체질상 북몽고 인종, 언어학상으로 알타이어 족에 속하며 천손족天孫族 사상, 태양 숭배 사상 및 난생 설화, 무격巫覡 신앙을 지녔던 무문토기 無文土器인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같은 특성을 지닌 이들은 한민족의 뿌리 겨레를 이뤘을 것으로 받아들인다.

중국인들이 또한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한 기술들을 동이전이니 동이열전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하, , 주 삼대 이전부터 일찍이 발달한 비한어족非漢語族 동이의 문화는 시기나 지역에 있어 우리 민족의 시원 국가인 환국-배달-고조선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토템의 동질성을 비롯하여 문화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예컨대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예와 백을 거론하면서, 예족은 호랑이를 숭상하고 백족은 곰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산동반도 지역에서는 단군신화가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 동이족이 고유한 흑도문화를 향유했다는 사실도 동이가 우리 민족의 뿌리임을 담보해 주는 문화적 증거에 속한다. 동이족이 창조한 흑도문화는 황하강 중하류 유역, 산동반도, 양자강 하류유역, 한반도 등에 분포된 것으로서 서방의 채도문화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기록에 나타난 중국인들의 동이관을 살펴보자.

동방을 라고 한다. ‘근본이 되는 뿌리’[]란 뜻이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해 만물이 대지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천성이 유순하여 도덕이 펼쳐지기 쉬워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東方曰夷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

는 동방의 사람을 말하며 의 합성이다. 오직 동이만이 대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질면 장수하므로 동이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다. 생각건대 하늘은 크고 존귀하며[] 땅도 크고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 존귀한 것이다. ‘는 사람의 형상을 본뜬 것인데 의 옛 글자는 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듯이 군자君子는 동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동이들처럼 행동하면 복이 내린다.[東方之人也 從大從弓 惟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 而夷篆從大 此與君子如夷 有夷之行降福]”(설문해자說文解字)

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地理書산해경山海經)에서도 동이를 군자국 사람들이라 부르며 군자국이 [한반도] 북부에 있는데, 사람들은 의관을 하고 칼을 찼으며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를 않는다[君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其人好讓不爭].”라고 밝히고 있다.

인용이 많아 다소 번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 더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공자의 말이다. 논어에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기를 바라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곳은 누추할 텐데 어쩌시렵니까?’ 공자 왈, ‘군자가 사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子欲居九夷 或曰 陋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한다.” 여기서 구이는 동이를 말한다. 공자가 군자가 사는 어진 동이에 가서 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사료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부子部에는 구이가 바로 동이며 동이는 기자조선으로 공자가 살고자 했던 곳이라고 나와 있다. 사고전서경부에도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살고 싶어 하던 곳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뒤이은 구절은 동이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한다. “君子居之 .”에서 공자가 스스로를 군자로 칭했을 리가 없다고 보면 그 뜻은 군자들이 사는 나라인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란 뜻으로 새겨야 되는 것이다. 이 해석은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 “군자국이란 위의 규정들과도 통하는 것이다.

예기는 이는 어질어서 만물을 살리기를 좋아한다고 적고 있다. ‘란 글자 자체에 이미 그 뜻이 담겨 있다. 이 결합된 사람’, ‘어질다’[], ‘활을 잘 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의 옛 글자는 어질다’, ‘크다의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가 오랑캐의 의미로도 쓰인 것은 중국 한나라가 동방족을 사방으로 밀어내고 중화주의 역사관을 정립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후한서』「동이전은 동방東方을 이라고 밝히며, 예기의 구절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이때의 살림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고 있다. 란 근본이 되는 뿌리[]란 뜻으로서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만물이 대지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만물이 대지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은 그 자체 본성의 발현이다. 우리의 살림 규정에 따르면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인은 인에서 유래하며, ‘자의 원형인 갑골문자는 동이를 가리킨다. 또 중국학자 라오간은 동이는 군자국으로 추앙받았기에 후대 중국에서 동이족을 뜻하는 자를 차용하여 인류人類라는 보통명사로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러한 설명은 단군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곰이 사람이 되고자 했고 사람은 곧 동이이기에, 신화의 얘기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웅족이 동이족으로 편입하고 싶다는, 즉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꼴[人形]을 갖추었다는 것은 수행 등의 일정한 통과의례를 거쳐 이제 비로소 동이처럼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 같아야 사람이지.’ 웅족은 마침내 사람[동이]같아서 사람[동이]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 중국 문헌의 기록을 보면, ----이 한 문맥으로 통하고 있다. 정리하면 동은 리, 즉 인[]이고 인은 인이며 인은 동이다. 인간은 본래 동이를 말하는데, 이들이 사람인 것은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해서다. 살림은 무엇을 그 고유함으로 있도록 지켜줌을 가리킨다. 이 경우 이가 근본이 되는 뿌리라는 말은 어진 겨레 동이란 인간과 만물을 그 시원의 본성으로 되돌아가 진정한 자신이 되도록 하는, 즉 살리는 일을 삶의 중심에 둔다는 뜻으로 읽힌다. 또한 이러한 이해 아래 설문해자의 다음과 같은 내용도 보다 확실해진다. ‘동이의 풍속은 어진데 어질면 장수하므로 동이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으며 군자는 동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고 동이들처럼 행동하면 복이 내린다.’ 동이처럼 행동하면, 즉 사람 살리는 삶을 살 때 군자, ‘임금의 아들이 되어 장수하며 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선 제기된 물음은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동이, 어진 그들이 지키고 살리고자 했으며 웅족이 갖추고자 했던 사람꼴’’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상고시대의 본래적 인간상 혹은 인간의 본질을 구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길은 후자가 사실상 전자에 속함으로써 하나의 길이다. 먼저 상고 삼성조三聖祖 시대에 지극한 인간, 즉 인간됨을 온전히 실현한 인간의 전범이었으며 죽어서 신으로 존숭된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삶을 알아본다. 이들이 몸소 보여준 삶의 척도나 목표는 곧 인간이 무릇 실현해야 할 인간의 본질일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완전한인간들의 가르침, 특히 삼일신고를 통해 본래적 인간 삶을 다시 확인한다.

 

2. 인즉선人卽仙

 

먼저 환인은 천계天界, “천산天山에 머물며, “아버지의 도[父道]”로써 천하에 법도를 정해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게 했다. 더불어 사람들이 수행을 하여 지극한 선에 이르러 마음을 밝게 열고 하는 일마다 길상吉祥하게 되며 세상에 쾌락하게 머물게 했다.” 환인 자신도 도를 얻어 장생하며 몸에 병이 없었다.” 신의 뜻에 따라 가르침을 폈던 환인은 장생과 무병의 경계에 이르는 선의 복락을 누렸다는 것이다. 또 환인은 늘 인간 세상을 구하기를 원했던 환웅에게 인간을 이롭게 할 땅을 골라주며 홍익인간의 이념을 전수했다.

인간은 널리 이롭게 할 땅으로 정한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고 배달나라를 열었던 환웅은 환인의 명에 따라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在世理化]. 이때를 일러 지극한 덕이 펼쳐진 시대[至德之世]”라 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인용된 조대기朝代記에 따르면 환웅은 하늘의 계율을 지키는 백성’[환족]이 되고자 하는 웅족과 호족에게 수행과 금기의 가르침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홍익의 과업을 강조한다.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고루 구제하여 사람의 모습을 갖춘 대인大人이 되리라.” 여기서 대인은 동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군자의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환웅은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한 심법心法이라 할 염표문念標文에 홍익인간을 새긴다. “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 한편 환웅은 삼칠(21)일을 택하여 천신에게 제사 지내며 바깥일[外物]을 금기하여 삼가 문을 닫고 수도하였다. 주문을 읽고 공덕이 이뤄지기를 기원했으며, 선약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 를 그어 미래의 일을 아시고, 천지조화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신명을 부렸다.”

환인, 환웅의 가르침을 받들고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나라를 연 단군왕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지극히 신성한 덕과 성인의 인자함을 겸하고 현묘한 도를 깨쳤으며, 두 손을 맞잡은 채 단정히 앉아 함이 없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아 다스렸다. 단군왕검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다음과 같은 홍익의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교화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야 너희들의 복록이 무궁하리라.”너희 무리는 오로지 하늘이 내려 주신 법을 지켜 이 통하고 공이 이루어지면 하늘에 이를 것이다.” 단군왕검은 환인, 환웅과 마찬가지로 하느님[天神]을 섬기며 현묘한 도를 깨친 선의 삶을 산 것이다. ‘단군이란 호칭 자체가 천제天祭를 주관하는 제사장을 가리키는 동시에 선 또는 신의 의미를 갖는다.

한민족 뿌리 국가인 환국, 배달, 조선을 차례로 건국한 주인공들[三聖祖]로서 한국 고대에 본래적 인간의 표상인 환인, 환웅, 단군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고대 사유 공간에서 지향한 인간됨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참나[眞我]로 거듭 나 하느님을 섬기며 성통공완하여 장생長生과 조화의 복락을 누리는 선의 삶이다. 하느님 신앙과 성통공완을, 말하자면 그것을 섬돌과 문으로 삼아 이르게 될 궁극의 경계를 선[人卽仙]으로 이해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일신 신앙과 성통공완이 한국 고대 사상의 핵심을 차지하며 그것은 인즉선의 인간됨을 향한 것이다.

 

3. 성통공완性通功完

 

이제 그같은 인간됨이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가 내려준 가르침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삼일신고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삼일신고는 일면 저 인즉선의 인간됨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밝히는 방법론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우리가 주로 문제 삼는 것은 삼일신고의 제3천궁天宮이 시작되는 첫 구절이다. “성을 통하고 공을 이룬[性通功完] 자만이 천궁에 들어 영원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는 이미 환웅과 단군의 가르침으로 언급된 바 있다.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고루 구제하여 사람의 모습을 갖춘 대인大人이 되리라.”; “너희 무리는 오로지 하늘이 내려주신 법을 지켜 성이 통하고 공이 이뤄지면 하늘에 이를 것이다[朝天].” 영원한 즐거움을 얻고 하늘에 오르는 일은 인간이 이윽고 온전한 인간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선의 경지일 것이다.

그런데 위의 가르침들은 이를 위해서는 성통이 공완과 짝을 이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완수해야 할 공업이란 마땅히 하늘이 부여한 천명天命 혹은 신의 뜻이 될 터다. 그럼으로 신의 뜻을 역사하는 공완이 성통과 함께 할 때, 인간이 인간됨을 얻고 조천朝天에 이르는, 즉 하느님 신앙이 또한 비로소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성통, 공완, 하느님 신앙은 서로가 서로를 통해 완성되고 서로로부터 참되게 펼쳐지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지키고 완수해야 할 천명은 신의 아들이나 대행자로서 하늘의 뜻을 폈던 삼성조의 가르침에 따르면 홍익인간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성통性通은 본성을 틔운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이란 삼신으로부터 내려 받은 것이다. 삼신은 우주의 충만한 신령한 기운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만유 생명의 근본이 된다. 영구생명지본. 만물은 오직 삼신이 지은 바. 따라서 은 또한 ‘[이미 주어진 것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성통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내주하는 신성을 틔워 혹은 되찾아 저 생명의 원천인 신성과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성통, 인간의 본성은 신의 의미와 함께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신의 본질, 참됨은 광명이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일()을 하나의 광명(光明)으로 보는 동시에 신()으로 본 것이다. 육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신령한 기운은 곧 겉도 속도 비어서 있지 않은 데가 없고 감싸지 않는 것이 없는빛이라는 것이다. “크고 텅 빈 가운데 빛남이 있으니 그것이 신의 모습이다.” 모든 것은 신의 광휘 안에 간수됨으로써 무가 아닌 유로서 존립한다. 신에게서 내려 받은 인간의 본성 역시 마땅히 밝음일 것이다. 그럼으로 인간이 제 본성을 찾는 것은 인욕과 분별로 가려지고 어두워진 본성을 밝게 틔우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신성의 빛을 만나, 그것과 하나 됨으로써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통은 곧 우리의 본성으로 내주하는, 내 안의 가장 밝은 것과 저 생명의 원천인 천지 신성의 빛이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性通光明].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도통道通의 요체를 밝히는 가운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몸 속에 본래 있는 조화의 대광명은 환히 빛나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감응感應하고, 이것이 발현되면 도가 통한다.”

그렇게 보면 신의 빛은 우주를 존립케 하는 존재의 빚이면서 또한 나를 인간으로 깨어나게 하는 영성의 빛, 깨달음의 빛인 것이다. 그 빛 머물면 존재하고 느끼면 응한다. “오직 생명의 근원 되는 기와 지극히 오묘한 신은 그 자체 집일함삼으로 있는데, 광휘로 충실하다. 그것이 비치면 존재하고 느끼면 응한다.”

한국 고대 사유에서 신의 의미와 관련하여 반드시 이해해야 할 또 다른 특징은 신이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도문헌에서 신이며 기인 일자一者를 가리키는 삼신은 양의적으로 쓰인다. 삼신은 한 뿌리의 기운으로서 천지조화의 바탕자리를 이루는 무형無形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또한 동시에 세상일을 다스리며, 인간의 기도에 감응하고, 제사를 받는 인격신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삼일신고는 무형의 신성으로서 삼신을 하늘이나 허공으로 부르는 한편, 주재적 인격신을 일신一神으로 호명한다. 이 두 궁극자는 삼일신고1(‘허공’)2(‘일신’)에서 따로 다뤄진다.

이에 따르면 허공[하늘]은 없는 곳이 없고 감싸지 않음이 없는 우주의 본체로 설명된다. 반면 일신은 위없는 으뜸의 자리에 머물며 무수한 세계를 주재하는, 밝고 신령하여 감히 이름 지어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신으로 규정된다. 행촌 이암은 삼일신고의 유래와 구성에 대해 밝히며, 허공(또는 하늘)은 외허내공한 것으로서 늘 만물의 중심으로서 머무는 것이며 일신은 만물의 존립과 변화를 다스리는 주재자라고 풀이한다. 그는 또 허공은 하늘의 바탕이며 일신은 하늘의 주재라고 함으로써 허공과 일신, 일신과 허공은 하나의 동일한 것에 속함을 밝힌다.

하나의 이 무형의 신성과 최고의 인격신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것은 무형과 인격의 두 신격神格이 다르지만 동일함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양자는 어떻게 동일함을 이룰까? 적어도 주어진 설명을 가지고 말하면, 모든 것을 감싸지 않음이 없는 무형의 삼신과 모든 것보다 위에 있는 으뜸의 인격신 일신은 개념상 서로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함께 속하고, 그런 의미로 동일해야 한다.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의 소략에 그친다.

그와 같이 신은 언제나 인격적 실재와 비인격적 실재의 일체로 있는 만큼, 인간의 본성을 틔우는 성통과 관련하여 적어도 다음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신을 향한 성통은 인격적 일신을 소리쳐 부르는 것만으로도, ‘신 없이비인격적 신성을 체득하여 그것과 하나 되는 것만으로도 이뤄지지 않는다. 단순히 신중심적인 신앙만으로도 인간중심적인 수행만으로도 올바른 성통이 되지 않는다. 그 둘 모두다.

이는 삼일신고일신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성기원도聲氣願禱 절친견絶親見 자성구자自性求子 강재이뇌降在爾腦.” 먼저 두 번째 구절 절친견에서 친견의 대상은 장의 주제인 일신, 곧 우리가 인격적 실재로 파악한 최고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끊다는 뜻도 있고, 또한 절대란 말이 있듯이 쓰임새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의 의미도 들어있다. 이런 이중적 의미에 따라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자성구자 강재이뇌’, 네 본성을 찾아 신과 하나 되는 일심 자리에서 성기원도’, 소리와 기운으로 기도하면 절친견’, 일신을 반드시 친견하리라’. 혹은 그 한마음을 얻지 못하고 성기원도만 해서는 일신을 친견하지 못한다’. 어느 쪽으로든 위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다.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 신성으로부터 나눠 가진 본성을 회복하여 그와 하나 되는 마음에 일신이 임하며 오직 그곳에서 일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을 본질대로, 참되게 있도록 살리는 성통은 신의 의미, 특히 그것의 양의성에 따라 내 안에 심어진 신성인 본성을 되찾아 우주의 신령한 한 기운인 신과 하나 돼 그 마음자리에서 주재신 일신을 받드는 것으로서 밝혀졌다. 인간 살림은 성통과 하느님 신앙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의 길은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다시 3장의 가르침을 환기해보자. “성통공완한 자만이 천궁에 들어 영원한 즐거움을 얻으리라.” 성통은 공완과 함께해야 한다. 성이 통하고 공이 이뤄져야 하늘에 들 수 있고,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고루 구제할 때 마침내 참 인간으로 새로 난다. 여기서 완수해야 할 공, 공업功業이란 신으로부터, 천명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과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하듯 그 천명의 핵심은 홍익인간에 있다.

그리고 홍익인간에서 널리 이롭게 함은 근본적인 것으로서 남들로 하여금 되어야 할 바 그 자신이 되도록 베푸는, 즉 살리는 일이다. 환웅이 웅녀에게 그랬듯, 진정한 인간의 모습[‘사람꼴’]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성통과 함께 신의 뜻에 따라 홍익의 과업을 완수하는 것은 또한 나를 참인간으로, 인간됨으로 이르게 한다. 즉 나를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으로 하여금 본래의 인간됨으로 살도록 베풀고 이끌 때 우리 자신 또한 자기완성과 영원한 즐거움에 이르는 것이다. “삼신을 지극히 공경하여 백성들과 친하게 지내면 그대들 복록이 끝이 없으리라.” 곧 홍익인간의 공업은 위아爲我로써 위타爲他를 삼고 위타로써 위아를 이루는 상생의 실천이 된다.

그리고 성통공완으로써 하느님 신앙이 완성돼 길이 즐거움과 복락을 누리는 천궁은 반드시 따로 떨어진, 예컨대 하늘에 있는 어떤 곳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삼일신고 1장에서 하늘은 푸르고 푸른 아득하고 아득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일신이 머물고[一神攸居] 선으로 섬돌을 쌓고 덕으로 문을 삼는 천궁은 허공이나 천, 즉 삼신과 하나 되어 일신을 받들며 그 뜻을 완수하는 인간됨의 성취에 있을 것이다. “진아眞我가 일신이 머무는 궁궐인 것이다. 이곳에 영원한 즐거움, 즉 인즉선의 복락이 있다. 성통공완의 진아가 선약仙藥인 셈이다.

홍익이 미치는 대상은 오직 인간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한 울, 한 생명을 이루는 만물에 이른다. “스스로 참을 이루고 만물을 평등하게 구제한다. “인물동출삼신人物同出三神인간을 비롯하여 하늘, ,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모두 삼신이란 동일한 포태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상은 그 하나가 맺어준 조화의 유대로, 그야말로 천륜天倫으로 우주 일가一家. 그 때문에 홍익인간은 그 자체로부터 사회적 우주적으로 확장돼, 만물이 하나의 조화 안에서 각자의 고유함대로 있도록 한다. 훗날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 한국의 옛 신교인 풍류도를 설명하며 밝힌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참 뜻도 거기서 구해야 할 것이다.우주 신성과 감응하며[接化] 뭇 생명을 살린다[群生].’

최치원은 또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상고의 풍()을 일으켜서 영원히 대동(大同)을 이루어 무릇 생명 있는 모든 존재에게 자비를 베풀어 해탕하게 한다.”라고 한다. 여기서도 그는 상고의 풍으로써 모든 생명으로 하여금 비본래성의 굴레에서 해방돼 참됨에 이르고 자유를 얻도록 한다고 밝히고 있다. 먼 옛날의 풍은 풍류도가 지닌 홍익인간, 접화군생의 정신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에 우주 진화사에서 가장 늦게 등장한 인간의 존재론적 책임 혹은 우월함이 있다. 그의 소임은 제 본성을 온전히 틔워 생의生意로 가득한 생명들이 약동하는 피시스, 그 존재 발현에 참여하여 모든 것들이 하나의 통일적 질서 안에서 참되게 있도록 살리는 것이다.

이로써 홍익인간의 존재론에서 모든 것을 모든 것과 연결하는 고리, ‘관계들의 관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살림으로서 드러난다. 살림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어울림 속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중심이며 하나다. 살림은 하늘이며 도.

이제 다음 장에 들어서기 전에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두고자 한다. 홍익인간은 인간을 그의 고유한 본질로 있도록 지킴이라는 의미의 살림이다. 그리고 인간됨, 인간의 참됨은 삼성조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성통공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신의 의미와 천명을 고려할 때, 이는 신성과 하나 되는 가운데 신을 섬기고 그 뜻에 따라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의 근원[삼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존재론에 따라 이 살림은 서로 살림의 상생으로서 전개되며 그 완성은 만물을 고르게 구제하여 우주 한 생명 안에서, 각자의 고유함으로 살게 하는 데 있다. 상생은 우주 한 생명, 우주 일가에서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또한 홍익인간은 그와 같이 우리의 시원적 인간됨이기에 그리로 이르는 것은 가장 오랜 것으로 새롭게 돌아가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유래는 언제나 미래로 남는다. 삼성조의 삶과 그들의 가르침은 인간이 성통공완으로써 참인간을 이룰 때, 장생과 조화, 즉 선의 삶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나아가 홍익인간의 살림은 천지만물의 연결고리, 즉 중심이며 도였다. 이같은 정리는 또한 동시에 다음 장의 논의를 이끄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 증산도의 상생 사상

 

이제까지의 논의를 유념하면서, 마지막으로 증산도 사상에서 상생을 살펴보자. 증산도에서 상생은 우리가 맞이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우주와 인간 삶을 규정하는 천명天命 혹은 도에 해당한다. 증산도 우주론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세상은 분열, 발전하는 시기로서 계절로 보면 봄, 여름에 해당한다. 선천으로 불리는 이때는 상극의 이치가 우주 만물을 주도한다. 상극이 선천의 정신이고 율법인 셈이다. 이에 따라 선천은 경쟁과 승패의 상극 속에서 생존 진화하며, 양적量的으로 발전한다.

내 도는 곧 상생이니”(도전2:19:2) 반면 상생의 도가 지배하는 세상은 후천 가을로서 모든 것이 안으로 성숙하고 통일하여 열매를 맺는 때다. 열매는 결실이면서 씨앗으로서 새로운 생명의 근본이 된다. 그리하여 우주의 가을은 곧 근본으로 돌아가 제 모습, 제 자리를 찾는 때인 것이다.

상극의 봄과 여름이 확장과 발전이라는 동질적同質的 의 과정이라면, 성숙과 통일의 계절인 가을은 수렴의 시기, 의 시기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봄, 여름에는 각기 목화木火의 기운이 지배하고 가을을 이끄는 것은 수렴과 결실의 금기운이다. 가을은 지나온 앞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이다. 때문에 가을로 들어서는 전환의 국면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그것과는 달리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가을 우주로 들어서면서 천지 질서가 극적으로 바뀜에 따라 자연의 격변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이와 함께 선천 봄, 여름 동안 누적된 인류사의 온갖 병적인 요소들이 병으로, 전쟁으로 터져 나온다. “천지의 만물 농사가 가을 운수를 맞이하여, 선천의 모든 악업이 추운(秋運) 아래에서 큰 병을 일으키고 천하의 큰 난리를 빚어내는 것이니”(도전7:38:5). 이러한 미증유의 비극적 재앙은 참혹하지만, 동시에 복본復本 혹은 개벽의 새날을 맞는데 따른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희생들이다. 성장과 분열의 극단인 구를 지나 ’[]로 열리는 세상을 앞두고, ‘아홉수에 걸린 우주의 동요가 부득이 빚어내는 것들인 셈이다.

상생이 새롭게 맞이하는 후천 세상을 지배하는 도요 천심天心이라면 상생을 지키는 삶은 천도에 부합하여 덕을 이루고[與天地 合其德], 천지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상생은 앞서 살려야 할 것을 제 모습대로, 제 본질에 따라 있도록 해주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나 또한 그런 참됨으로 살도록 하는 일이라고 규정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생의 의미가 증산도 사상에서, 무엇보다도 대환란을 지나 가을에 들어서는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증산도 사상에서 상생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방법에 따라 먼저 증산도에서 살리고 살려야 할 인간의 제 모습, 제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천지에 가득 찬 것이 신()이니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도전2:45:1)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도전4:62:5)

사람마다 몸 속에 신이 있느니라. 너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고 그것이 없으면 죽느니라.”(?도전? 3:116:4)

 

증산도 사상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여기서도 성통, 즉 인간의 본성을 찾는다는 것은 곧 자신에 내주한 신성을 틔우고 신성과 하나 되는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증산도 사상이 말하는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그 사상의 신관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인용 속의 신은 우주 만물에 두루 내재된 바탕 자리로서 구체적 형태를 지니지 않은 비인격적, 자연적 신성이다. 딱히 고정된 장소를 갖고 있지 않지만, 혹은 바로 그렇기에 또한 없는 곳이 없다. 먼 고대로부터 삼신으로 불렸던 그것은 대우주에 충만한 성령, 신령한 순수 영기靈氣와 같은 것으로서 우주 만유의 숨이나 얼이라 할 만하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 하나의 보편적 신성을[] 나눠 갖고 있는 분신分身들이다. 초목이 피고 지고, 조수가 날고 달리고, 기물이 열고 닫히고 이뤄지고 부서지는 등 천지간 온갖 생성과 변화는 이 신의 조화가 아님이 없다.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들과 신들의 신 상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보편적 신격은 근원, 으뜸, 바탕이란 뜻의 자를 써서 원신으로 규정되고, 또 없는 곳이 없고 하지 않음이 없는 조화를 강조하여 조화성신”, “조화성령이라고도 불린다.

한편 이 무궁한 조화의 신성을 써서 우주를 다스리는 인격적 최고신이 있다. 우주 주재자 상제이다. 원신과 비교하여 주신, 물론 최고의 주신으로도 불린다. 상제는 저 천지에 가득한 원신의 신령한 조화를 통해 함이 없는 함으로써 우주를 주재한다. 비인격적, 자연적 신성인 원신의 편에서 보면, 주신인 인격신 상제의 주재함이란 씀[]을 통해 비로소 모든 생성과 변화의 힘과 능력으로서 그 위력을 드러낸다.

 

一氣混沌看我形일기혼돈간아형하고 엄엄急急如律令엄엄급급여율령이라. 천지에 가득한 기운은 혼돈 속에 나의 모습을 보고 율령을 집행하듯 신속하게 처리하라.”(?도전? 4:143:3)

 

주재자 상제의 손길이 없이는, 다시 말해 원신 홀로는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지어내는 조화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은 가능성을 머금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원신을 주재하는 상제의 씀[]이란 인과적 사태 같은 것이 아니란 점이다. 즉 원신을 쓰는 상제의 주재함이란 상제가 처음으로 비로소 원신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며, 무로부터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도 아니다. 또 임의로 무엇인가를 덧붙여 전혀 새롭게 하거나, 함부로 뒤바꾸는 것도 아니다. 그 씀은 우주 원신이 스스로의 질서[자연이법]에 따라 우주의 근본 힘으로서의 자신을 구현해 가도록 하는 것이다. 즉 원신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게 함으로써 상제는 직접적 함이 없이 우주 만물을 통어한다.

이같은 사정은 무위이화의 말놀이를 통해 이렇게 표현될 수 있겠다. 상제는 스스로의 이법에 따라 지공무사至公無私하게 자신을 실현해 가며 신묘한 공을 이루는, 즉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원신을 쓰는 신도의 주재를 통해 우주 만물과 만사를 무위이화無爲以化로써, 맡아 다스린다. 상제와 원신, 우주에서 가장 높은 신과 상제마저도 포괄하는 가장 넓은 신성은 그와 같이 전자는 후자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후자는 전자를 통해 제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함께 속하며 하나를 이룬다. 이러한 신관의 구조는 홍익인간을 삶의 중심으로 살던 때의 신관에 연맥되는 것이다.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이 문득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三神)은 곧 일신(一神)이요 우주의 조화성신(造化聖神)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도전? 1:1:1~5)

 

이에 따라 증산도 사상에서 우리의 본성으로서 내주한 신성을 틔우는 일 또한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수행된다. 우리는 감춰져 있는 밝은 본성을 틔워 우주의 충만한 신성과 하나 되는 가운데 상제를 섬긴다.

다른 한편 증산도 신관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고대의 신관과 차이를 보인다. 증산도 신관에 따르면 신은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일정한 때에 최고의 주신인 상제가 인간으로 강세한다. 이 두 특징은 사실상 한 가지다. 또 이러한 신관에 따라 인간의 본질도 구체화되고 역사적이 된다.

우주의 충만한 조화기운인 원신은 우주 이법으로써 만물을 다스리는 상제의 주재를 통해 때에 맞춰 신령한 공능을 실현한다. 우주를 규제하는 이법理法, 로고스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이다. “내가 천지를 주재하여 다스리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쓰나니 이것을 일러 무위이화라 하느니라.”(?도전? 4:58:4) 은 만물을 낳는 봄의, 은 만물을 기르고 가르쳐서 성장 발전하게 하는 여름의, 은 만물을 성숙 통일시키는 가을의, 그리고 장은 근원으로 복귀하여 휴식하는 겨울의 정신을 말한다. 천지의 신령한 기운은 이 우주 사시四時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를 전개하는 역사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사시가 생장염장의 질서에 따라 순환하는 가운데, 기는 만물을 싹 틔우는 방, 만물을 길러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탕, 만물을 성숙케 하는 신그리고 본체로 환원하는 도의 성격을 갖는다.

 

春之氣춘지기는 放也방야요 夏之氣하지기는 蕩也탕야요 秋之氣추지기는 神也신야요 冬之氣동지기는 道也도야니 統以氣主張者也통이기주장자야라. 봄기운은 만물을 내어놓는 것()이고 여름기운은 만물을 호탕하게 길러내는 것()이요 가을기운은 조화의 신()이며 겨울기운은 근본인 도()이니라. 내가 주재하는 천지 사계절 변화의 근본기강은 기()로 주장하느니라.”(?도전? 6:124:9)

 

이 가운데 가을에 이르러 성숙과 통일의 시원적 본성을 회복하여 신의 변화성을 지닌 천지 기운을 지기至氣라고도 부른다. 이 가을의 천지 기운은 거두면서 통일하고 죽임으로써 결실을 얻게 하는 개벽의 기운이다. 가을 우주를 지배하는 화복 양면의 기운이다. 생장염장 사의四義로써 기의 변화성을 다스리는 상제는 특히 성숙과 통일의 가을 세상을 앞둔 개벽의 때에 이 지상으로 강세한다. 농부가 가을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들녘으로 나아가듯, 우주 가을에 들어 상제는 직접 인간으로 내려와 만방에 새 기운, 가을의 지기를 돌려 심판과 구원을 주재한다. 분열의 화와 가을의 금 기운이 상극으로 부딪힐 때 토로 임하여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으로써 금과 화의 교역交易이 순조롭게 이뤄져 가을의 새 세상이 열리도록 한다.

또한 우주 주재자 상제의 가을 주재는 인간의 참여와 협력 속에 이뤄진다. 이는 모사재천 성사재인의 원리로써 설명된다. “모사謀事는 내가 하리니 성사成事는 너희들이 하라.”(?도전? 5:434:4) ‘모사재인하고 성사재천이다.’이란 전래傳來의 말에서 의 자리를 맞바꾼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말놀이가 아니라 하늘의 율법을 새로 정한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이 점이 상제가 지상으로 강세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성숙과 통일의 가을 세상을 열기 위해 상제는 인간의 호응을 받고 인간과 짝을 이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증산도 사상에서 인간됨, 본래적 인간에 이르기 위해 성통과 더불어 완수해야 할 공업, 천명이 놓여 있다.

어느 날 증산 상제께서 원평이란 곳을 지나는데 문둥병에 걸려 흉한 형상을 하고 있는 한 병자가 달려와서 눈물로써 호소한다. 이생에 죄를 지은 바 없는 자신이 전생의 죄 때문에 이같은 형벌을 받는 것이라면 그 중죄를 용서하고 용서하실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내려달라고 통곡하며 증산 상제의 일행의 뒤를 따른다. 잠시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증산 상제는 내가 너를 고쳐 주리니 여기 앉으라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그를 둘러싸고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신민在新民이라는 구절을 계속해서 외우게 하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되었으니 그만 읽고 눈을 뜨라는 말에 모든 성도들이 읽기를 멈추고 눈을 떠 병자를 바라보니 완전한 새 사람(新民)이 되어 앉아 있었다. 병자는 기뻐 뛰며 춤추고, 성도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한 성도가 문둥병은 천형(天刑)이라 하여 고칠 길이 없는데 글을 읽게 하여 고치니 어떤 연고입니까 하고 묻는다. 증산 상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도()는 천하의 대학(大學)이니 장차 천하창생을 새 사람으로 만들 것이니라.”(도전2:79:14) 또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증산 상제는 이렇게 말한다. “재신민(在新民)이라 하였으니 새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도전9:186:6)

자신의 도는 신민, 즉 갱생, 상생에 있음을 알린 이 공사公事에서 또 다른 함의를 새긴다. 상제는 대학지도 재신민을 직접 읽지 않고 성도들로 하여금 계속 외우게 한다. 어쩌면 이것은 앞으로 하여금 인간의 손으로 갱생과 신민의 새상을 열게 될 것을 시사하는 혹은 그 갱생의 기운을 인간들에게 불어 넣는 뜻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김일부의 다음과 같은 말도 그런 인간의 존귀함을 얘기하고 있다. “누가 하늘의 조화공덕이 인간을 기다려 완성됨을 알겠는가誰識天工待人成”. 서경에 나오는 天工 人其待之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만물을 낳고 기른 천지의 뜻이 혹은 천지의 기획이 마침내 성숙한 인간 안에서, 그를 통해, 그와 함께 완성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다음의 구절과도 상통한다. “천지는 일월이 없으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이 없으면 빈 그림자니라天地無日月空殼 日月無至人虛影.” 또한 그런 인간이 상제가 수운 최제우에게 일렀던, 상제에겐 보람이 되고 스스로는 득의의 기쁨을 얻는 자다. “나도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만나 성공하니 나도성공 너도득의 너희집안 운수로다.”(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가)

이는 천지의 자녀인 인간이 가을을 맞이하여 제 본성을 틔워 천지를 위해 천지를 갱생更生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이 제 생명의 원천인 천지부모天地父母에 보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 하늘, 새 땅 위에 상생과 조화의 새 세상이 열려나가는 것이다. “이 때는 사람이 가름하는 시대니라.”(도전3:14:1) 이제는 인인인지인천人人人地人天”(도전9:185:4)의 때다. 후자는 천지인의 새로 남을 노래하는 갱생주更生呪의 마지막 구절인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에 앞서 있다. “천갱생天更生 지갱생地更生 인갱생人更生 갱생更生 갱생更生 갱생更生 천인천지천천 지인지天人天地天天 지인지지지천地人地地地天 .”

천지인의 개벽이란 천지인이 마치 세 개의 거울이 서로 되비추듯, 서로에게 속하면서 일체를 이루는, 즉 자신의 시원적 본질[천지인 일체]을 마침내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사건은 성숙한 인간을 기다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증산도 사상에서는 천지인 일체 그 큰 하나[太一]를 이루는 인간을 또한 태일太一이라 부른다. 그와 같이 스스로 태일이 되어 태일의 세상을 여는 인간은 하늘, 땅만큼 아니 그보다 존귀하다.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인존시대人尊時代니라 이제 인존시대를 당하여 사람이 천지대세를 바로 바로잡느니라.”(도전2:22:1~2); “천갱생 지갱생은 다 끝났으니 인갱생人更生이 크니라.”(도전11:205:4) 인갱생을 중심으로 천갱생, 지갱생의 섭리는 성사되는 것이다.

갱생’, ‘신민으로 말해지는, 개벽기 인간의 사역은 혹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명時命은 하늘, , 인간과 만물이 선천의 비본래성에서 회복되어 하나의 조화 속에 각기 저의 고유함, 마땅함으로 있도록 하는 살림이다. 그리고 이 살림은 인간을 중심으로 천, , 인이 하나를 이루기에 서로 살림으로써 수행된다. 증산도 우주론, 신관에 따르면 하늘, ,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태[원신; 삼신]에서 나온 동포同胞이다. 이 우주 한 생명에서는 타자를 살림이 없이 자신이 살 수 없고 자신의 살림은 타자를 살리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상생은 오직 우주 한 생명, 그 큰 하나 속에 완성될 수 있다. 새로운 천지와 인간 삶의 문법인 상생은 곧 모든 것이 한 뿌리로 돌아가 성숙, 통일하여 제 모습을 찾도록 서로 살려, ‘우주 일가라 불리는 대일통大一統의 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상생을 이끄는 정신 또한 원시반본이라 할 수 있다.

그같이 천지성공을 이루는 일이 새로운 천명인 상생에 부합하는 삶[與天地 合其德]이다. 이 삶은 내 본성을 틔워 태일의 성숙한 인간이 되고 그 진리로 이웃을 새 삶으로 인도하여, 즉 나를 살리고 남을 살려 큰 하나의 세상을 여는 상생의 실천으로 전개된다. 그러한 삶의 성취가 증산도 사상에서 지키고 살려야 할 인간됨, 본래적 인간이다. 그리하여 증산도 사상에서 홍익인간은 그런 가을의 성숙한 인간 혹은 태일의 인간을 늘리는 일이다. “전 인류가 상제님의 도로써 성숙한 가을 인간으로 거듭”(도전199쪽 측주)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 살리고 통일하는 일은 의통醫統이라고 불린다. 는 살린다는 의 자며, 은 도로써 새로운 문명세계를 통일하고 경영한다는 통 자다. 그러기에 의통은 성업聖業이 아닐 수 없다. “대저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도전2:75:9)에 속하는 것이다. “職者직자는 醫也의야요 業者업자는 統也통야니 聖之職성지직이요 聖之業성지업이니라. 천하의 직은 병들어 죽어 가는 삼계를 살리는 일()이요 천하의 업은 삼계문명을 통일하는 일()이니라. 성스러운 직이요 성스러운 업이니라.”(도전5:347:17)

성스러운 직업, 즉 의통에 사역하는 우주 가을의 본래적 인간을 통해 상생의 질서로 갱생한 신천지 위에는 후천의 선경 세상이 펼쳐진다. 나와 이웃이 시원의 참됨을 찾아 모두가 선으로 사는 인즉선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장수와 조화의 복락을 누리는 새로운 거주가 땅 위에 들어서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같은 인간 성숙은 본성을 틔워 천주를 모시고 조화성신과 하나 되는 가운데 하늘, , 인간이 조화 속에 각자의 고유함을 비로소 얻는 천지성공에 사역함으로써 이룩되는 것이다. 천지성공과 인간성공은 서로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후천 선경세계는 가가도장家家道場이요, 인신합덕人神合德으로 인인人人이 성신聖神 되어 만백성이 성숙하고 불로장생하는 무궁한 조화낙원이라.”(도전7:1:5)

상생의 도로써 조화도장造化道場을 열어 만고에 없는 선경세계를 세우고자 하노라.”(도전2:24:3)

후천에는 덕을 근본으로 삼아 이 길에서 모든 복록과 영화를 찾게 되느니라.”(도전7:4:6)

너희들은 살릴 생() 자를 쥐고 다니니 득의지추得意之秋가 아니냐.”(도전8:117:1)

 

인류를 구원하고 후천선경을 건설하는 상생의 실천, “통일천하가 그 가운데 있고 천지대도가 그 가운데에 행하여지며 만세의 영락(榮樂)이 그 가운데서”(도전7:50:5) 이뤄진다. 도성덕립된 태평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천지의 갱생과 더불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들은 불로장생(도전2:19:9)의 새 몸으로 환골탈태”(도전7:4:5)하며 이치에 활연관통하고 천지조화를 짓는 선의 삶을 얻게 된다. 상생으로 열리는 새 세상은 모두 선관”(도전11:299:2)이 되어 동귀일체同歸一體하고 상생 도술(도전11:313:8) 무궁한 낙원의 선세계(仙世界)”(도전7:5:6)인 것이다. 상생의 삶이 약속하는 것은 증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불로장생, 환골탈태, 선의 삶, 선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개벽의 목은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지는 위험한 관문인 동시에 지상선地上仙의 복락을 차지할 수 있는, 호작선연好作仙緣의 호기인 셈이다.

이와 관련 증산 상제가 집행한 일련의 두 도수는 의미심장하다. “상제님께서는 형렬에게는 신선神仙 도수를 붙이시고, 자현에게는 의원醫員 도수를 붙이시니라.”(도전3:313:1) 후자의 의원도수는 개벽기 사람을 살리는 재생의세, 의통의 도수다. 여기서 도수란 상제가 우주 주재자의 권능으로 신인합일의 사역을 통해 현실에서 일어날 변화를 짜놓은 섭리와 같은 것이다. 두 도수가 짝을 이루고 있다는 데서 우리는 의원도수를 성취함으로써, 즉 개벽기 사람을 살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함으로써, 그 상생 혹은 홍익인간의 공덕에 따라 선을 얻는다는 뜻을 읽을 수 있다. “오직 성품을 트고 모든 공덕을 잘 닦은 이라야 나아가 길이 쾌락함을얻는 것이다.

또한 증산도 사상은 그 개벽과 구원의 중심지, ‘역사의 큰 문이 상제를 섬기고 천부天符를 지킨 우리나라임을 밝힌다. 상제가 강세한 이 땅은 개벽이 먼저 닥치고 개벽 기운이 온 나라로 퍼져나가는 위험한 곳이면서 구원의 도가 있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희망의 장소다.

내가 이제 해동조선에 지상천국을 만들리니 지상천국은 천상천하가 따로 없느니라. 장차 조선이 천하의 도주국道主國이 되리라.”(도전7:83:7~8) “인신합덕人神合德으로 인인人人이 성신聖神되어...성숙하고 불로장생하며, “천지가 내 마음과 일체가 되고 삼교三敎를 두루 쓰며,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바가” (도전7:6:5) 없는 우주일가宇宙一家의 조화선경”(도전7:1:3)이 이 땅으로부터 펼쳐진다. 여기서 어질면 장수하고 동이처럼 행동하면 복이 내린다(설문해자)는 옛 말이 새롭게 들린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증산도에서 상생은 우주 가을의 때 주어진 하늘의 이치[천명; 시명時命]에 따라 나를 살리고 남을 살려 모두가 선의 삶을 얻게 되는 후천의 새 세상 건설의 역사役事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거슬러 홍익인간에 닿으며, 나아가 그것의 구현이다. 즉 환웅천황이 남긴 염표문이 가르치는, “일신이 참마음자리를 주어 성품은 광명하게 트이게 하고 세상을 이치로 다스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는 명법命法의 실현이다. 홍익인간은 각자가 인이 되어 널리 이웃을 인이게 하는, 다시 말해 인간 열매를 크게 거둬들이는 것이다. 홍익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 보다 정확히 말해 선으로서의 인간[人則仙]을 무한히 늘리는[弘益] 것이다.

 

. 맺음말

 

동이라 불리던 한민족의 뿌리 겨레는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했다. 이 동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동이는 타인과 만물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상생의 겨레란 뜻이다. 은 누구도 갖지 못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마음으로 동이에 속한다. 또 그래서 인간은 고유하게 동이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어질 인자는 너희들에게 붙여 주리니 다른 것은 빼앗겨도 어질 인자는 뺏기지 말라.”(도전5:177:9)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인은 우주 만물로 하여금 제 본성대로 살도록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림은 언제나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상생으로써 수행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질고 살리는 삶으로써 대인이 되고 군자가 되어 장수하고 복을 누렸다. 이 말을 풀어 말하면 동이는 이웃과 더불어 선을 성취하는 것을 인간 삶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얘기이다. 그들에게는 선의 삶이 본질적, 이상적 인간의 삶이며 인간됨이다. 인즉선, 이는 인간의 본질은 선이며 또한 역사 현실에서 그런 인간됨에 이르면, 다시 말해 어질고 살리는 삶을 살면 선의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다. 살리는 삶에는 선이 약속돼 있는 것이다.

이는 환인 천제 이래 한민족을 이끌어온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다시 확인된다. 홍익인간은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인간, 나아가 만물을 그들의 본질대로 존재하도록 지키고 살리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의 본질은 참 나로 거듭나 천지의 신성과 하나 되어 하느님을 섬기며 성통공완으로써 조화와 장생을 얻는 선의 삶이다. 이것은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상생으로써 수행된다. 홍익인간의 표상인 환인, 환웅, 단군은 상생의 덕으로써 하늘에 이르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고 가르친다.

또 홍익인간은 증산도 사상에서 상생으로써 새롭게 반복된다. 그 만큼 홍익인간의 이념이 연년세세年年歲歲 끊임없이 이어와 증산도 사상에 이르렀다고 혹은 증산도 사상이 한국인의 삶을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이끌어온 홍익인간의 이념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하겠다. 증산도 사상에서 상생은 인간으로 강세한 상제의 가르침을 통한 우주론과 신관 등의 바탕 위에서 역사적이 되고 구체화된다. 우주의 질서가 바뀌는 개벽의 길목에서 치러야 하는 대환란에서 상제의 가르침으로써,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성사재인의 사역으로서 나타난다. 상생과 함께, 상생으로써 조화와 장생을 얻는 후천선경이 열리게 된다. 인즉선의 오래된 약속이 상생으로써 상생의 세상을 여는 이들에게 새롭게 도래하는 것이다.

 

어질면 장수하고 동이처럼 행동하면 복이 내린다.’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造化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선경仙境을 건설하려 하노라.”(도전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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