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증산도의 조화사상 1

유철(상생문화연구소)

2023.02.27 | 조회 3611

2021년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증산도의 조화사상

-도전11장을 중심으로-

 

 

목 차

I. 들어가는 말

II. 조화調和와 조화造化

III. 신교와 선과 조화

1. 신교와 선

2. 선과 조화

3. 근대의 신교, 동학의 조화사상

IV. 증산도의 조화사상

1. 신교의 맥, 참동학 증산도

2. 도전11장에 나타난 우주 생성의 조화

3. 조화성신의 조화

4. 조화주 상제

V. 조화의 근원, 신명조화

1. 천지조화 신명조화

2. 조화주 상제의 조화법

VI. 맺는 말

 

 

논문요지

조화造化는 창조와 변화의 합성어이다. 보통 창조적 변화로 해석된다. 증산도 사상에서 조화는 가장 핵심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일단 증산도 도전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용어이면서 증산도 사상을 이해하는 주요 개념이다. 증산도 우주론, 신관, 구원관, 이상세계론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화라는 개념을 통해야한다. 무엇보다 조화는 신과 관련된다. 조화작용의 주체가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우주생성과 변화는 삼신 혹은 조화성신이 주체가 되는 변화이며, 인간의 삶과 역사와 문명은 신명의 조화작용이 드러난 결과이다. 이는 존재와 변화의 궁극을 신으로 삼는 우주론에 바탕한다. 즉 증산도 우주론은 신도우주론이며, 이러한 우주론의 결론은 신과 우주, 신과 만물이 서로 같은 존재성을 갖기 때문에 가능하다. 신이 곧 만물이며, 만물이 신이므로 천지만물의 생성변화작용은 모두 신의 손길로 일어나며, 이를 과학적 인과작용과 달리 조화작용이라고 부른다. 이 논문은 증산도 도전11장을 통해 증산도 조화사상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I. 들어가는 말

 

증산도 사상은 1871년 인간으로 강세한 상제, 증산 상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 가르침은 천지인 삼계의 본성과 그 변화법칙, 궁극 목적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이때 천지인 삼계의 본성은 바로 신이며, 그 변화법칙은 조화造化, 그 목적은 선경이다. 그런데 신의 작용이 조화造化이고, 후천선경 역시 조화선경으로 불리므로 증산 상제의 가르침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조화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증산도 도전11장을 읽어보면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태시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은 곧 일신이요 우주의 조화성신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도전1:1:1-3)

 

이 성구에서 문득’, ‘홀연히’, ‘낳음등의 개념들은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개념들이 지시하는 생성의 또 다른 표현이 바로 조화이다. 조화의 산물이 바로 우주이며, 주화의 주체는 삼신, 일신, 조화성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화의 주체와 객체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일체적 관계에 있다. 그래서 도전은 이러한 조화작용을 낳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조화는 또한 우주 주재자 상제의 행위를 나타내는 무위이화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제 온 천하가 큰 병이 들었나니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조화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의 선경을 건설하려 하노라. 나는 옥황상제니라.(도전2:16:1-3)

 

이 인용에서 증산상제의 강세와 천지공사 그리고 개벽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조화임을 알 수 있다. 조화는 우주의 변화를 신도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면서, 인간으로 강세한 증산 상제의 권능의 특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며, 또한 증산도 이상향의 특성을 설명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논문으로 논자는 증산도 사상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개념으로서 조화의 의미를 분석해서 천지변화의 숨겨진 질서를 확인하고자 한다.

 

II. 조화調和와 조화造化

 

증산도 도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 조화造化이다. 그 말은 조화를 사용하지 않고는 증산 상제의 언행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잘 아는 것처럼 우리말 조화는 다의적인 개념이다. 특히 조화調和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는 해원시대解寃時代. 이제 앞으로 모든 참혹한 일이 생겨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신명을 조화調和하여 만고의 원을 끄르고 상생의 도로써 조화도장造化道場을 열어 만고에 없는 선경세계를 세우고자 하노라.(도전2:23:1-2)

내가 이제 신도를 조화調和하여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열고 모든 일을 도의道義에 맞추어 무궁한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도전4:4:2-3)

 

도전에서 조화調和와 조화造化가 함께 쓰인 곳이다. 그런데 신명(신도)을 조화調和하여조화造化도장(정부)’이 무슨 뜻인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일단 도전을 명확히 읽기 위해서라도 양자의 사전적 구분은 필요하다.

평소에 우리가 사용하는 조화調和라는 단어는 자연과 조화調和를 이루는 도시’, ‘현실과 이상의 조화調和등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조화造化가 아닌 조화調和이다. 사실 조화造化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가끔 무언가 신비스러워 이해하기 힘든 사태를 표현할 때 등장한다. ‘도깨비 방망이가 조화를 부린다.’거나 비가 오다 눈이 오다 이게 뭔 조화래?’ 등과 같은 문맥에서 사용하는 조화는 조화造化이다. 그럼 그 둘은 어떻게 다를까?

일단 사전에서 양자의 의미를 찾아보면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조화調和어긋나거나 부딪힘이 없이 서로 고르게 잘 어울림이라고 정의하며, 조화造化는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는데 하나는 그 내막이나 이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신통하거나 야릇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이다. 이렇게 볼 때 조화造化가 담고 있는 의미가 훨씬 복잡하고 추상적이다.

이를 좀 더 분명히 정리하면, ‘조화調和‘AB의 올바른 관계로 얻어지는 화합이라는 뜻으로 이때의 조화調和하모니(harmony)’이다. 오케스트라에서 모든 악기가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그 전체가 어우러져 훌륭한 음악이 되는 것이 하모니이며 조화調和이다. 이처럼 조화調和라는 단어는 둘 혹은 다수 사이의 잘 배합된 관계를 뜻한다.

반면 조화造化는 과학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신통한 일을 뜻하며, 이는 증산도 주요 개념인 신명조화, 천지조화 등에서 말하는 조화造化창조적 변화(creative change)’를 뜻한다. 즉 이 조화造化는 조화調和처럼 다수 사이의 관계(relationship)’가 아니라 존재의 특별한(신통한) ‘변화’(change)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조화造化의 사전적 의미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라고 한 것은 좀 특이하다. 조화를 창조라고 하면서 이를 대자연의 이치로 정의한 것이다. 사실 창조와 대자연의 이치 혹은 법칙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대자연의 이치는 변화의 과학적 인과법칙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를 조화造化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것은 신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생성 변화작용이므로 그야말로 조화調和와 다른 조화造化의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이 정의는 대자연의 변화를 창조의 과정으로 보고, 창조하고 기르는 것의 변화를 조화로 판단한 것인 듯하다. 이는 증산도에서 조화를 번역할 때 창조적 변화(creative change)”라고 하는 것과 상통한다. 물론 이러한 사전적 정의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판단된다.

그럼 창조적 변화(현재 증산도 도전에서 조화에 대한 영어 번역어인 ‘creation-transformation’ 역시 우리말로는 창조적 변화로 읽힐 수 있다.)는 어떤 변화를 말하는가? 모든 변화는 질적이거나 양적인 차이, 혹은 그 양자 모두의 차이를 가져온다. 차이가 없다면 변화가 아니다. 그 차이는 물질적일 수도, 화학적일 수도, 심리적일 수도 있다. 이 변화는 이성적 측면에서 볼 때 과학적 변화이다. 그런데 조화는 창조적 변화라고 하였다. 창조와 변화를 동시에 뜻하는 조화造化는 그래서 일상적인 물리적 변화나 심적인 변화와는 다른 종류의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창조적 변화는 물리적, 심리적 변화와 다른가? 그렇지는 않다. 창조적 변화 역시 변화이며, 그 변화는 물리적, 심리적, 영적 변화 등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창조적변화를 조화라고 하는 이유는 조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변화하는 것을 창조적변화, 즉 조화라고 하는가? 무목적적, 인과적 변화현상(과학적 관점에서의 변화)과 달리 창조적 변화는 변화의 과정과 목적이 정해져 있어서 그에 따른 목적 지향적 변화를 한다. 그래서 비록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는 아니지만 새로운 목적을 향해 자화自化 혹은 무위이화적 변화를 하므로 이는 인과적 변화와 달리 창조적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현상을 과학적 눈으로 보는 것과 일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서로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극심한 가뭄이 올 때 기우제를 지냈다. 요즘도 가뭄이 지속될 때 시골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기상청에 근무하는 사람은 비가 오는 원인을 대기의 변화로 보지만 조선시대나 시골의 농부는 신의 작용으로 이해한다. 또한 긴 가뭄 뒤에 비가 내리면, 그 비는 과학적 관점에서는 대류현상의 결과이지만 종교적 관점에서는 신의 작용과 그 결과이다. 이때 비를 대류현상의 결과로는 보는 것이 무목적적이며 인과적 변화작용으로 파악하는 것이라면, 신의 작용과 그 결과로 본다면 이는 창조적, 목적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주의 참 모습을 신의 현현으로 보는 증산도 우주관에서 모든 변화는 신의 조화작용이 아닐 수 없다.

 

III. 신교와 선과 조화

 

한민족은 본래 신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열고 백성을 다스리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의 배경에 신교神敎가 있다. 신교란 신으로서 가르침을 베푼다.’는 뜻의 이신설교以神設敎에서 온 약자로 인류 시원종교의 명칭이다. 도전11장은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神敎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온 인류 제사문화의 본고향이라.(도전1:1:6)

 

신교의 종주국이란 신교를 바탕으로 정치와 삶을 조화롭게 영위한 시원국이자 중심국이란 뜻이다. 특히 신교의 나라 조선은 상제를 신앙하고 하늘에 기도하는 제사문화, 즉 제천문화가 국가 경영의 중심에 자리잡은 나라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교의 중요한 특성이 바로 선이며, 선의 중요한 특성은 또한 조화이다. 증산도 조화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신교와 선

 

신교神敎가 신의 가르침이라면 신교의 본질은 신이다. 그렇다면 신교에서 말하는 신은 어떤 신인가? 물론 자연신이나 인격신에 속하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신들을 통틀어 우리는 신이라고 하며, 신교는 그러한 모든 신들에 관한 종교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신의 가르침이라고 할 때 신은 우주의 통치신으로서 최고신인 상제를 가리킨다. 즉 신교는 상제를 신앙하고, 상제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종교양태를 말한다. 환단고기에서는 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환웅천황께서 펼치신 신시개천의 도는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풀어,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며 나를 비워 만물을 잘 생존케 하여 능히 인간 세상을 복되게 할 따름입니다. 천상의 상제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릴 때는 도를 널리 펴서 백성을 이롭게 하여 한 사람도 자신의 타고난 성품을 잃지 않게 하여...

 

신시 배달시대 환웅천황께서 나라를 여실 때 이미 신의 가르침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고 삶의 규범을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신시교以神施敎는 곧 이신설교以神設敎와 같은 말로서 신교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특히 신의 가르침으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할 때 그 신은 곧 천신天神, 즉 상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환웅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고(以三神設敎)”라는 구절에서도 분명하다. 삼신은 곧 삼신상제를 말한다.

삼신상제를 신앙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간 인류 시원종교인 신교에 대한 기록과 유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일단 신교는 하늘에 계시는 최고신 상제(혹은 천제)에 대한 제사문화, 즉 천제天祭에서 찾을 수 있다. 천제의 흔적은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인 홍산문명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제천단이다.

 

홍산 우하량 유적에서는 3원 구조로 된 거대한 제천단이 발굴되었다. 이는 그 길이가 동서로 160미터, 남북으로 50미터나 되는 대형 제천단이다. 특히 이 제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하다는 사상을 담은 천원지방형 구조로 되어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알려져 있다. 홍산의 유물 유적 등으로 볼 때 그 지역에는 고국古國이 있었고, 그 고국은 곰과 관련된 유적이 많은 것으로 보아 곰 토템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곰 토템에서 환웅과 웅녀 등이 신화의 형태로 남아있는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은 홍산문화의 주체가 동이족이면서 고조선을 세운 족속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이족의 제천단은 상제를 모시는 제사의 증거로서 신교를 상징하는 유적이다.

또한 신교의 제천의식은 동북아의 패권을 상징하는 천자국의 고유 권한이었다. 천제天帝의 아들로 상제의 가르침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대행자가 바로 천자天子이며, 그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천자국이다.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에 기록된 천제지자天帝之子는 곧 고구려가 북부여의 맥을 이은 천자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일전에 천신天神이 나에게 강림하여 이르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이곳에 건국케 하려하니 너희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동해 가에 가섭원이란 곳이 있으니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에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다고 하여 천신의 자손이 나라를 세운다고 하였다. 이는 홍산문화에서 보이는 제천문화를 고구려가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맥의 태백일사』 「환국본기에서는 조대기를 인용하여 삼신께 올리는 천제가 이미 환국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환인이 계셨다. 천산에 내려와 거처하시며 천신께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셨다. 백성의 목숨을 안정되게 보살피고, 세상의 뭇 일을 겸하여 다스리셨다.

 

천신께 지내는 제사가 곧 천제이며, 천제는 곧 신교의 상징이다. 환국의 지도자인 환인에 의해 천제가 지내지고 있음은 이미 신교가 백성을 다스리는 바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대기는 환국시대 신교에 대해서 기록할 뿐 아니라 신교가 어떤 종교인가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이 많고 살림은 넉넉하였다. 처음에 환인께서 천산에 머물며 득도하여 장생하시고 몸을 잘 다스려 병이 없으셨다. 하늘을 대행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이 없게 하시니...

 

조대기의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데 삼신 상제에게 천제를 올리며 신교를 받았던 환인은 제사장이자 통치자로서 천산에 머물며 수도하여 득도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득도장생이나 치신무병은 모두 선가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즉 신교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삶을 살았다는 것은 곧 선을 바탕으로 수행하여 도를 얻어 무병장수하는 종교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민족 전통의 신교가 곧 선과 연관됨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신시씨의 일을 듣는 사람들은 대개가 많은 의심을 하며 지금까지도 단군만을 높일 줄 알고 그 이전에 신시씨가 개천開天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근본 유래를 알지 못하고 단지 중국책에 의지하여 선교仙敎는 황로黃老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고 하나,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푸는 신교神敎가 신시시대 때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북애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단군만 알뿐 그 기원인 신시를 모르듯이, 중국 문헌을 통해 황노의 선만 알뿐 그 기원인 신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선은 배달 신시시대 신교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신교와 선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말하건데 신교의 종교적 특성이 바로 선이라고 할 수 있다.

 

2. 선과 조화

 

신교의 종교적 특성이 바로 선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한국의 역사에서 볼 때 신교와 선은 서로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치원이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 노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요, 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말없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주나라 주사柱史의 근본이요, 모든 악을 만들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축건 태자竺乾太子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최치원이 지은 난랑비서의 일부가 실려 있어 그나마 신교와 선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풍류도는 신라의 국교로서 그 가르침의 뿌리는 선사에 기록되어 전해온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최치원이 신라 말의 인물이지만 그가 말하는 풍류도는 예부터 전해오던 고유의 가르침으로서 신교라고 할 수 있다. 선사仙史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신교와 선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고, 그 가르침 속에 이미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신교에서 유불선 삼교의 가르침이 흘러나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고대사학자인 이도학은 1988년 초에 대종교와 근대민족주의사학이라는 논문에서 일제하 민족종교로 자리매김한 단군교와 대종교의 뿌리를 최치원의 삼도통합의 풍류도와 그 이전의 선교仙敎적 전통에서 찾고 있다.

 

대종교의 국사인식과 서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선교仙敎였다... 이 선교는 고유 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였는데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 현묘지도라고 언급한 풍류도이기도 했다.

 

이도학의 이러한 주장은 선교가 신라보다 훨씬 이전(고조선 및 배달국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의 종교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 사서인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단군이 1908세를 살고 산신山神(신선)이 되었다는 고기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평양은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고 하여, 선교의 맥이 고조선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선교의 원류는 바로 신교이다. 도전은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며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불지형체佛之形體요 선지조화仙之造化요 유지범절儒之凡節이니라 불도는 형체를 주장하고 선도는 조화를 주장하고 유도는 범절을 주장하느니라. 수천지지허무受天地之虛無하여 선지포태仙之胞胎하고 수천지지적멸受天地之寂滅하여 불지양생佛之養生하고 수천지지이조受天地之以詔하여 유지욕대儒之浴帶하니 관왕冠旺은 도솔兜率 허무절멸이조虛無寂滅以詔니라. 천지의 허무(無極)한 기운을 받아 선도가 포태하고 천지의 적멸(太極)한 기운을 받아 불도가 양생 하고 천지의 이조(皇極)하는 기운을 받아 유도가 욕대 하니 이제 (인류사가 맞이한) 성숙의 관왕冠旺 도수는 도솔천의 천주가 허무() 적멸() 이조()를 모두 통솔하느니라.(도전2:150)

 

도전구절에서 우리는 유불선 삼도를 모두 포함한 관왕의 도가 바로 증산 상제의 가르침이며, 관왕의 도는 이를 모두 통솔한다는 것이다. 최치원이 풍류의 뿌리인 신교에서 삼교가 나왔다고 했다면, 이제 가을 개벽의 때에 이르러 앞으로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왕의 도로서 증산 상제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왕의 도는 곧 후천의 선도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증산 상제가 선의 특성을 조화로 규정한 것이다. 불도의 특성이 형체이고 유도의 특성이 범절이라면 선도의 특성은 곧 조화.(선지조화仙之造化)라는 것이다. 선의 특성이 조화라는 것은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풍류도를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규정하였다. ‘현묘한 도라는 것은 무언가 규정할 수 없는 심오한 가르침으로서 앞에서 말한 조화의 특징이며, 따라서 현묘지도는 조화지도라는 말과 통할 것이다. 즉 현묘지도는 곧 조화지도로서 선도를 말함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도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기록되어 내려온 것이다.

현묘지도를 풍류라고 이름한데서도 신교와 선도의 특성을 유추할 수 있다. 풍류風流는 글자그대로 보면 바람의 흐름으로 해석되지만 이 해석이 현묘지도를 일컫는 풍류도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풍은 신으로 해석되거나 신의 상징으로 쓰인다. 따로 한 곳에 머물지 않지만 가지 않는 곳이 없는 바람에서 신을 떠올리는 것이다. 예컨대 신이 일으키는 조화의 활력을 신바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해보라 보이지 않고, 없는 곳이 없는 신의 특징을 바람으로 잘 묘사한 것이 바로 풍류의 내포된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고유의 도인 현묘지도를 풍류라고 부른 것 역시 신도의 조화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신선神仙, 혹은 신이라는 글자 역시 조화와 연관된다. 신선은 신령스러운 선인仙人이라는 뜻이다. 혹은 신의 능력을 가진 선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여기서 신과 연관된 인간을 부르는 신선은 결국 신의 조화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렇게 선인을 신선으로 부른 것과 함께, 선인仙人에서 선이라는 글자를 보아도 그 속에 내포된 조화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으로 산에 사는 사람을 지시한다.

 

선인의 선자는 산과 인이 합쳐진 데에서 나온 글자라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선인들은 산에 살고 있다고 믿어져 왔다...그래서 예부터 선인이 사는 산은 여러 이름들이 알려져 왔으나 그 중에서도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고 하는 곤륜산이라든지, 태산泰山을 비롯한 오악五岳, 진의 시황제가 불사약을 구하였다고 하는 봉래, 방장, 영주 등의 삼신산三神山이 유명하다..

 

왜 산에 사는 사람을 으로 표현하는가는 분명하다. 도시의 시장과 가장 대비되는 장소는 깊은 산속이다. 즉 산은 복잡하고 계산적인 현실적 세상과 대비되는 고요하고 이상적인 장소를 의미한다. 지리산智異山이나 속리산俗離山, 묘향산, 삼신산 등의 산명을 보아도 그 탈속적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또한 명산의 고봉을 천왕봉, 혹은 천황봉이라 부르니 이 또한 천신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그 신성성을 상징하기 위해 붙인 이름일 것이다. 결국 산에 붙은 이름이 사징하는 신성한 곳, 속세를 등진 곳, 신묘한 기운이 있는 곳 등은 바로 선의 특징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환인이 천산에 내려와 득도하고 오래 살았다태백일사』 「환국본기의 기록 역시 이를 말함이다. 그것은 바로 이성과 논리가 아닌 신성과 조화의 특징을 말한다.

 

신선사상이란 인간이 스스로가 개발한 신선방술에 의해서 불사의 생명을 향유하는 동시에 신과 같은 전능의 권능을 보유하여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 우유優遊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불사의 생명도 조화요, 신적인 능력 역시 조화이며, 어디에 억매이지 않는 절대적 자유 역시 조화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은 곧 신이며, 자유이며, 조화이다.

 

3. 근대의 신교, 동학의 조화사상

 

동학의 창도자인 수운 최제우는 당시 조선의 몰락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를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여러 직업을 가졌으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장사에 종사하여 조선 팔도를 다니면서 수운은 당시 민중의 참혹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의 생활고와 민중들의 억압받는 삶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과 미래의 희망을 갈구하게 된다. 표영삼은 이를 수운의 과제로 표현한다. 수운은 30대 후반의 늦은 나이지만 비참한 인간의 삶을 벗어날 법도를 찾기 위해 여시바윗골에서부터 천성산, 그리고 다시 용담정으로 와서 수행과 기도에 전념하게 된다.

19604월 초, 그날도 수운은 지성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있었다. 마침 조카의 생일이라 초대되어 갔지만 어쩐 일인지 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수년간의 기도와 수행에 대해 응답하듯 하늘에서 선어가 들려왔다.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어찌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수운과 상제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수운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하늘에 기도하였고, 그 기도에 응답하여 선어가 들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선어의 주인이 상제라는 사실이다. 유교의 국가 조선에서 오랫동안 등한시 되던 상제신앙이 19세기 말 수운에 의해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수운에게 스스로의 위격을 상제로 밝힌 후 내려진 것은 바로 신교, 즉 신의 가르침이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너는 무궁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상제는 수운에게 무궁한 도(무극대도)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도를 닦고 글(주문)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며 무극대도의 진법을 바르게 펴라는 천명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신의 가르침으로 신교이며, 수운은 천명에 따라 새로운 법으로 무극대도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제의 가르침이 수운에 의해 주문으로 완성되었으니 그 21자 주문은 다음과 같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

 

이 주문은 주문의 첫 세 글자를 따서 시천주 주문이라 부른다. 시천주는 천주, 즉 상제를 모신다.’는 뜻이지만 이 때 모심은 곧 지극한 마음으로 상제를 신앙하는 것이다. 그 신앙의 결과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곧 조화이다. 이 주문에서 본 논문과 관련하여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조화정에 있다.

수운은 동경대전』 「논학문에서 시천주 주문 전체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다. 이 중 조화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 한다.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이러한 수운의 해석에 따르면 무위이화는 조화의 다른 표현이다. 즉 조화는 하고 하지 않고의 의지적 선택없이 그 자체 스스로 그러함이다. 시천주를 통해 모심의 마음이 지극에 이르면, 내가 받고 받지 않음에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생겨나는 것이 조화이다. 상제에 대한 지극한 신앙은 상제의 조화가 내게 무위이화로 내려지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위이화로서 조화가 인간에게 정하여 짐을 수운은 合其德定其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 덕에 합하여 그 마음을 정한다는 뜻이다. 결국 시천주 조화정상제를 지극히 모시면 상제의 조화가 무위이화로 내려져 나의 덕은 그 덕에 합하고 내 마음은 그 마음에 정해진다.”라는 문장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그 덕그 마음은 분명하다. 바로 상제의 덕과 상제의 마음이다. 그러나 상제의 덕과 상제의 마음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덕과 마음에 합하여 내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 뜻이다. 수운의 해석은 곧 상제의 존재를 깨닫고 그 존재를 지극히 모심으로 신앙한 결과 나에게는 특별한 신비체험이 발생하는데 그 신비체험이 바로 조화정이다.

신교의 맥을 이어 상제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21자 주문으로 완성하면서 수운은 조화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왜 조화였을까? 그것은 간단히 천주를 모시고 조화를 정하니로 풀이되고 있지만, 그것이 조화인 것은 신앙의 신비로 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산도 도전에서는 이를 인간 세상에 오신 천주를 모시고 무궁한 새 세계의 조화를 정하나니’(도전4:141:3)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조화정은 무궁한 새 세계의 조화를 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수운은 자신의 지극한 기도에 응답한 상제를 신앙하고, 상제에 대한 신앙과 그 가르침의 결과로 새로운 나’, ‘조화의 경계에 이른 나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동학연구가인 조동일교수는 이를 이처럼 시천주로서만 가능한 인간의 창조적 참여로서의 이 조화정에 있어서는...천덕과 인덕이 다를 리 없고 인심과 천심이 둘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새로운 나는 조화무위이화로 상제와 하나 되어(합기덕, 정기심) 새로운 세상, 즉 조화의 세상을 열어나가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수운은 신(상제)과 합일된 경지에서 내려지는 신비로운 권능과 그 실현을 조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수운에 있어 조화는 시천주로 상제와 하나 된 인간이 갖게 되는 새로운 경계이며, 이 조화의 경계에서 무위이화로 열리는 조화의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조화에 대한 수운의 믿음은 동경대전첫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발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로되

 

즉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는 모두 상제님의 조화력이 만들어낸 조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수운이 상제의 자취를 모두 조화라고 말하는 것은 신교와 선의 상관성을 밝힌 앞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즉 수운은 동경대전의 곳곳에서 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오랜 수행과 기도로 천상 상제의 응답을 들을 때 이를 선어仙語라고 표현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의 그 현묘함과 초월함에 어리둥절하여 신선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나아가 상제가 내린 신령스러운 부적은 곧 선약으로 받아들인다. 수운은 이 선약으로 장생하리라는 상제의 말씀대로 영부를 받아써서 물에 타서 마셔보니 몸이 윤택하여져 이를 선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부가 몸을 윤택하게 하니 이 또한 수운에게는 상제의 조화가 나타난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상제는 수운에게 말하기를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 될것이니 지상신선 네아니냐고 하였다. 즉 상제의 가르침인 천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이 지상신선으로 화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약을 먹고 난 후 선풍도골 내아닌가...불로불사 하단말가라고 하였으며, 오만년 운수를 받으니 나도 또한 신선이라고도 하였다. 수운에게 있어 신교와 선과 조화는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는 관계에 있다.

 

동학에서 말하는 후천개벽은 앞으로 이 지상에 일체의 죄고罪苦가 없는 천국을 건설한다는 것인데 이 지상천국을 곧 지상선계라 한다. 이 지상선계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신선으로 화하여 장생불사하는 세계를 건설하는 데 있다.

수운에게 있어 신교와 선도와 조화는 천도이며 그 가르침은 동학이었다. 수운은 하늘의 가르침을 받아 도를 통했다는 소문이 나서 찾아온 선비들이 수운이 받은 도가 무엇인지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답하기를 천도이니라...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나는 것이요...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나 학인 즉 동학이라

 

수운이 자신이 받은 도를 천도라고 한 것은 하늘에 기도하여 하늘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천도는 동경대전용담유사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곧 무극대도를 의미한다. 수운이 자신이 받은 도를 무위이화라고 하고 상제의 가르침으로 자연한 가운데 화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곧 조화를 의미한다. 신의 가르침으로 신교를 이은 수운이 그 가르침을 이름하여 동학이라 하였고, 동학이 추구하는 상제 신앙의 핵심, 즉 시천주는 새로운 조화세상을 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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