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찾기

◈동학과 다시개벽 4회. 동학의 천주

문계석 연구위원

2016.11.09 | 조회 3845

 동학과 다시 개벽 4회

 

 

 

2. 동학의 천주

 

수운은 기존의 종교관에서 제시되고 유지되어온 천주관을 탈피하여 새로운 차원의 천주관을 설파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단언적인 예가 될지 모르지만, 그는 서양의 창조신관을 부정하고 동아시아의 기화론氣化論적 사유와 주재신관을 포섭 융합하여 제3의 천주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천주관은 그가 천주의 본성으로 여겨지는 조화섭리造化攝理를 정의하는 데에서 그 시발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천주의 조화섭리는 두 측면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서양 종교권에서 말하는 창조성과 동양 문화권에서 말하는 주재성에 대응한다는 양가적인 의미가 그것이다. 조화는 창조성에, ‘섭리는 주재성에 배합해서 파악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성은 우주세계 안의 모든 것들에 적용된다는 뜻에서 조물주造物主로서의 천주에 근거하고, 주재성은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인격자라는 뜻에서 주재자主宰者로서의 천주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천주가 모든 창조변화의 내적인 근원이 되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무형無形의 조물주라 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지공무사한 조화의 권능으로써 천지간의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관할하여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유형有形의 주재자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천주의 조화섭리를 무형의 조물주유형의 주재자라는 양가적인 측면으로 파악한 것은 동· 서 신관의 융합이라는 차원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우주에 역사하는 조물주의 창조성이 무질서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님을 밝힐 수 있고, 또한 우주의 순환질서와 창조목적이 천주의 주재성에 근거해서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자 천주의 조화섭리는 천주의 조화권능과 주재권능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수운은 제3의 새로운 천주관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먼저 수운이 직접 체험한 천주가 자신의 저술 속에서 어떻게 기술되고 있는가의 의미 파악에 중점을 두어 상술해볼 것이다. 그런 다음 천주가 어떤 측면에서 창조변화의 근원이 되는 무형의 조물주일 수 있는가를 분석해 보고, 다음으로 천지만물의 전체를 어떤 방식으로 관할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유형의 주재자가 되는가를 논의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절대자 천주에 대해 허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위해 천주가 실재한다는 점을 수운의 저술을 통해 논증해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수운이 제시한 새로운 천주관에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여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 수운이 만난 천주

 

1860년 음력 45, 마침내 수운은 목숨을 건 구도의 과정에서 지존의 절대자를 만나게 됐다. 그 만남은 영적인 신비체험을 통해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처음으로 듣게 됐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존의 절대자는 누구인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어찌 상제上帝를 모르느냐의 기록으로 보면, 지존의 절대자는 다름 아닌 상제이다. 앞서 밝혔듯이, 상제는 지존무상의 절대자에 대한 신의 위격을 뜻하며, 글자 그대로 말하자면 무한한 권능을 가지고 우주만물을 주재하여 다스리는 천상의 임금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은 상제를 친견함으로써 그 이후부터 대도大道의 가르침을 천명으로 받아 내어 새 시대의 시운에 걸 맞는 동학을 창교하게 됐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대도를 내려준 지존의 절대자를 상제만으로 표기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의 저술들에는 절대자에 대한 존칭으로 천주天主,’ ‘상제上帝,’ ‘한울님(하느님)’(‘한울님은 원문에서 한글 고어체로 표기되어 있다. 인터넷 상의 표기로 인하여 한울님으로 대체한다. 이하 동일)등의 개념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天主는 오직 한문으로 표기된 동경대전東經大全에서만 볼 수 있고, ‘한울님은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진 용담유사에만 등장한다. 그리고 상제上帝는 한문으로 표현된 동경대전과 국한문 혼용으로 기록된 용담유사모두에서 볼 수 있다. 지존의 절대자가 신앙의 대상으로 유일신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호칭이 천주’, ‘한울님’,‘상제등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은 후에 동학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여러 갈래로 해석되고 표현되어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천주’, ‘한울님’, ‘상제의 세 가지 표현은 각기 다른 존재를 지칭하여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 가지 위격位格으로 표현했을지라도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가, 그리고 절대자 천주는 우주세계와 어떤 관계인가? 이러한 물음을 보다 명확하게 구명하여 해명하는 것은 수운이 말하는 절대자에 대한 본질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고, 수운의 신앙적 관점 및 그 진리관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을 꿰뚫을 수 있어 우리가 동학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길이라 본다.

 

천주天主는 한민족의 하느님

먼저 순전히 한문으로 쓰여진 동경대전에서 말하는 천주天主는 어떤 의미를 포함하는가를 검토해 보자. 천주는 글자 그대로 표현해 보자면 하늘[]’주인[]’의 합성어로 하늘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천주에서하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수운이 말한 의 개념은 이법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무한히 펼쳐져 있는 푸른 창공의 의미에서 하늘뿐 아니라 존재와 가치 및 인식의 면에서 모든 것의 준거가 되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하늘은 일상적으로 땅에 대비되는 하늘은 물론이고, , 인간 등,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우주 세계에 존재하는 전체를 포섭하면서 절대적인 시금석이 되는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준거의 의미를 담은 개념은 엄밀하게 정의되거나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의 상위가 없는 최고의 유개념이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볼 때, 최고의 유개념은 다른 모든 술어를 포괄하지만, 자체로는 어떠한 술어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수운 자신이 한자로 된 시천주侍天主주문에서 각 글자의 뜻을 해석하면서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데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에 대한 의미를 정의하면서도 주의 주체가 되는 대상[]을 설명하지 않고 완전히 비워둔 것이다. 그 까닭은 전체적이며 근원적인 준거로서의 절대 개념, 즉 하늘이 최고의 유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용해는 우리는 신, 천주를 그 어떤 개념이나 표현으로 제한해서는 안된다. 천은 모든 형상 안에, 모든 사건 안에, 모든 운동 안에 있으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천주인격적 존재를 지칭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수운 자신이 자에 대해 자는 천주를 존칭하여 부모와 같이 공경하여 섬기는 것으로 정의한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천주의 의미를 부모와 같이 존칭하여 하늘을 섬기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에 대한 자구 해석은 부모를 공경하여 섬기듯이 하늘의 주인이 되는 인격적 천주를 섬겨야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절대자 천주는 인격자를 뜻하며, 신앙의 궁극의 대상으로 섬겨야하는,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여 섭리攝理하는 최고의 인격신으로 자리매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최고의 인격신은 고대 중국에서 제사祭祀를 지낼 적에 받들었던 8八神의 하나인 천주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자 천주는 하늘, , 인간 및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인격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에서는 절대적인 인격자라는 의미에서천주를 말하였지만, 이 보다 일찍 쓰여진 용담유사용담가에서는 순수 한글인 한울님으로 표기되고 있다. 우선 한울님으로 말하게 된 까닭을 소개해보자.

동방 한민족은 아득한 옛적부터 삼신하느님을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숭경하여왔다. ‘삼신하느님에서 하느님의 옛 표현은 한울님이고, 여기에 우리 고유의 민족적 정서에서 생명의 근원으로 통용되는 삼신이 결합하여 삼신하느님이 된 것으로 추리해볼 수 있다. 달리 말해서 하느님은 한민족의 상고역사라 불리는 환국桓國, 배달倍達, 단군檀君시대까지는 삼신하느님으로 호칭되었을 것이나 그 이후 시대와 문화의 변천에 따라 호칭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아마도 삼국시대에 접어들자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조선으로 접어들자 유교의 상제, 도교의 옥황상제, 불교의 부처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은 삼신의 의미가 떨어져 나간 한울님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민족 문화의 전통에서 볼 때 한울님은 인간의 생사에 간섭함은 물론이고 만유의 생명을 창조하고 그 변화질서를 섭리하며, 도덕적으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상벌을 주관하는 두려움과 숭경의 대상이었다. 즉 한울님은 인간이 갖는 감정과 정서를 갖추고 있고,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격자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면서 최고의 하늘에 거주하는 지존무상의 존재로서 한민족 정서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옛 표기인 한울님은 수운이 살았던 조선 왕조에 이르러서는 본연의 빛을 잃어가면서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 속에서 겨우 명맥이 유지되어 왔었을 것이다. 순 한글로 저술한 용담유사에서 수운이 한울님을 말한 것은 동방 한민족의 정신 속에 조상 대대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숭경과 신앙의 대상이었던 최고의 절대적 존재, 즉 옛적의 한울님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어의 천주와 우리말 한울님은 표기가 다를지라도 지시대상(reference)이 같은 것은 아닐까? 사실 한울님은 우리말의 과 존칭어자의 결합어이다. ‘자는 인격적으로 아주 존귀하고 소중하게 섬겨야 할 존재를 존칭하여 붙이는 접미어이다. 따라서 천주한울님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제 수운이 어째서 절대적 존재에 대한 호칭을 천주와 한울님, 두 가지로 표현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자.

수운은 한민족의 절대적 신앙의 대상인 한울님을 순 한문으로 쓰여진 동경대전에서는 굳이 천주天主라고 표현하고 있다. 개념의 범주로 볼 때, 천주는 서교의 천주와 외연이 같다. 그런데 그는 권학가에서 저의 부모 죽은 후에 신도 없다 이름하고 제사조차 안지내며 오륜에 벗어나서라고 하면서 서학의 천주교에 대해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천주교에 대한 비판과 배척은 조선왕조의 유학자들에게 조차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수운은 이율배반적으로 천주교에서 최고의 절대자로 언급 되는 천주를 동경대전에서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다. 수운은 왜 그랬을까?

김용옥이 지적한 것처럼, 수운의 천주 표기가 서학을 의식해서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공론화된 개념을 도입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수운이 살았던 조선왕조의 유학자들은 한문에 익숙했고, 이들을 통해서 유입된 천주실의의 천주란 말이 등장하여 유행하게 됐을 때 이를 차용하여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수운이 한글 표기인 한울님을 당시에 유행한 천주天主의 호칭으로 표기한 것은 그가 기존의 종교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천주의 존재를 쉽게 일깨워주기 위한 역설逆說의 수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수운의 천주가 우리의 말 한울님의 한문 번역어라면, 그것은 동학의 천주와 서학의 천주는 의미하는 바가 다름을 시사한다. 즉 그가 말한 천주는 어디까지나 우리 겨레가 조상 대대로 섬겨 믿어온 절대적인 인격적 한울님이지, 그 어떤 딴 나라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구태연하게 서학의 천주와 같은 말을 써서 천주로 표기한 까닭은 우리 민족이 믿어온 한울님을 최고의 믿음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수운은 한문 표기인 동경대전에서 천주를 말했으며, 거기에는 절대적인 한울님을 믿는 최고의 종교를 세우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고 본다.

 

우주에서 활동하는 천주의 양면성

한민족의 한울님, 즉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는 천주는 어떤 존재인가? 최고의 존재가치로서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갖추어야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창조성과 주재성이다. 창조성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성 속에서 우주만물이 무한하게 창조변화되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고, 주재성은 창조된 모든 것들을 관할하여 섭리하는 절대적인 인격자가 그 주체여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런데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창조성과 주재성을 갖춘 절대적인 천주가 시공時空 안에 들어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즉 세계를 초월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수운은 천주가 세상을 초월해 있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세상을 초월해 있는 천주를 신앙한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맹목적인 신앙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상天上에 상제上帝님이 옥경대玉京臺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하니 음양이치陰陽理致 고사姑捨하고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라고 경계한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천주학이 중국에서 조선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수운은 서교에서 주창하는 천주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즉 세상을 초월해 있는 천주는 세상과의 단절을 함축할 것이고, 이는 곧 인간과 천주와는 접촉을 허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초월적인 천주를 신앙하는 자는 천주의 뜻을 자의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只祝自爲身] 결국 허무지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교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천주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고, 말의 형식에 있어서만 천주이며, 그 도는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천주의 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수운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수운은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인 천주가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안으로 들어와 인간과 접촉할 수 있어야 함을 자각했다. 경신년 신비체험 이후 계속적인 천주와의 대화에서 천주의 강화降話는 이를 입증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한울님 하신말씀 개벽후開闢後 오만년五萬年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成功하니”(布德文; 용담가),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 말가.”(교훈가)

의 경우는 천주가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열심히 했으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실존을 알지 못하여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뜻과 다행이도 천주가 수운을 만나 이제부터 성공적인 일을 추진하게 됐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 즉 천주가 인간처럼 말하는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 그리고 세상만물과 단절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천주는 어떤 존재인가? 천주는 세상을 초월해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운時運의 추이에 맞추어 자연계의 무궁한 창조와 그 변화질서를 권능으로써 섭리攝理하는 인격자이다. 섭리는 바로 천주의 주재성主宰性을 의미한다. 즉 천주는 자연계에서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무궁한 창조변화를 전체적으로 관할하여 다스리는 주재자主宰者로서의 천주이다. 주재자로서의 천주는 달리 표현해 보면 바로 지존무상至尊無上의 상제이다. 수운은 주재자 상제를 처음 대면하게 된 상황을 안심가에서 공중空中에서 외는 소리 물구물공勿懼勿恐 하였어라.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라고 피력하고 있다.

주재자 상제는 천상의 호천금궐에 계신다. 천상에 계신 상제는 서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의미의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니다. 여기에서의 천상은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지상과 대비해서 볼 때, 존재론으로 보나 인식론으로 보나 최고의 가치세계를 지칭한다. 주재자 상제는 천상 호천금궐에 계시지만 우주의 창조변화에 관여하고 있고, 모든 것들을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다스리는 지존무상의 절대자인 것이다.

의 경우는 천주가 개별적인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있어서 천주를 신앙하는 각자에게 모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모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천주의 창조성이 내재적인 근원이 돼야함을 뜻한다. 즉 천주의 창조성은 바로 천주가 언제 어디에서나 천지간에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고, 그럼으로써 자연계에서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무궁한 창조변화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전제로 해서 인간은 천주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하고, 또한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와 각자가 모심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천주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에게기화의 신[氣化之神]’이 있기 때문이라고 수운은 주장한다. 뒤에서 심도 있게 논의 되겠지만, 수운은 천주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侍者]’을 풀이할 때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고[外有氣化] 안으로는 신령이 있음[內有神靈]”으로 정의한다. ‘기화의 신은 성경신誠敬信을 다해 천주를 일심으로 모시는 자에게만 발현되는 특권일 것이다. ‘기화의 신이 발현된 인간에게는 밖으로는 (천주의) 영과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강화의 가르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천주를 신앙하면서 기화의 신이 된 인간은 마음 안에서는 천주로부터 부여 받은 신령이 발현이 되고,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을 통해 천주의 지극한 영기와 접촉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곧 천주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받아 내릴 수 있게 된다. 즉 기화의 신이 된 인간에게는 천주가 그 안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천주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기화의 신이 된 인간은 천주의 마음과 합일의 경계에 이를 수 있는 그런 영적 존재라는 것도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에서 밝힌 천주의 주재성과 에서 언급된 천주의 창조성은 천주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신앙의 절대적인 표본으로 삼고 있는 동학의 천주관을 자칫 오해될 가능성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의 주재자로서의 천주를 지칭하는 호천금궐 상제님이 서교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하느님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노선은 결국 서교의 초월적인 유일신관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이는 수운이 본래 의도하고자 한 천주관을 벗어나 있으며, 천주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왜곡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에 대한 설명에서 밝힌, ‘기화의 신의 해석은 자칫 범신론으로 빠져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운이 유일신론이나 범신론자는 아니다. 신앙의 절대적인 대상을 정립하기 위한 수운의 의도는 어느 한쪽을 취하지 않고, 오직 양자를 통섭하여 아우르는 천주관을 말하고 있다. 이는 천주의 조화섭리造化攝理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조화섭리란 조화造化섭리攝理의 합성어이다. 여기에서 조화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여 지을 조변할 화로 이루어진 개념으로 필자는창조변화創造變化(creative change)’를 줄여서 표현한 말로 이해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창조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대상(형상)을 산출하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고, ‘변화란 산출된 대상이 변이되는 상태의 의미를 강조한 뜻이다. 그리고 섭리굳건히 관할하여 질서 있게 다스림을 강조한 뜻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천주의 조화섭리는 양가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창조변화를 이끌어가는 원천으로 규정되는 조물주로서의 천주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질서 있게 관할하는 주재자로서의 천주이다. 결과적으로 천주의 조화섭리는 수운의 천주가 곧 여타의 종교와는 다른 제3의 새로운 천주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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