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진표율사와 용신신앙 연구

노종상(상생문화연구소)

2023.01.26 | 조회 10240

2021년 봄 증산도 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진표율사와 용신신앙 연구

 

노종상(상생문화연구소)

 

 

목차

. 들어가기

. 진표율사의 출생지와 용신신앙

1. 벽골제의 용신 신앙과 진표율사

2. 진표율사의 출생지와 용녀龍女 설화

. 진표율사의 사찰창건 연기 용신설화

1. 금산사 미륵전 창건과 미륵장육존상 봉안

2. 금강산 발연사 창건과 용신설화 그리고 미륵불

. 진표율사와 수중세계 교화

1. 진표율사의 용궁 수계授戒

2. 진표율사의 보살행과 용신의 보은

. 미륵경전과 용신 그리고 진표율사

. 나가기

 

 

논문요지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 점찰 교법의 대성자 등으로 평가되는 진표율사(717?)는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행적을 남긴 고승이다. 그와 관련된 설화에서는 특히 용신설화가 많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의 행적에 나타나는 용신신앙을 연구하면 그의 전기적 생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본고의 연구방법을 선행연구와 달리하였다. 선행연구, 특히 사찰창건 연기설화 연구에서는 대부분 용신을 우리 고유의 신교(전통신앙)와 동일체로 상정하고 사찰 창건자(불교)와 갈등 내지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해 왔다. 결과적으로 불교의 승리(창건 연기를 다루는 설화이므로), 신교의 패배로 결론을 내린다. 이와 같은 연구는 대부분 현상적 혹은 역사적인 결과만을 중시하는 불교적 입장에서 논의된 결과이다.

본고에서는 진표율사와 관련된 용신설화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논의하였다. 첫째는 진표율사의 출생지에 전승되는 용신설화다. 이와 함께 그의 전기에 전하는 개구리 사건도 함께 검토하였다. 이 용신설화들은 진표율사의 출가 동기에 부응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

두 번째, 진표율사의 사찰창건연기 용신설화를 검토하였다. 논의 결과, 불교와 신교의 대결적 관점이 아닌 조화, 상생의 의미로 파악되었다. 또한 진표율사 관련 용신설화 속 용신이 궁극적으로는 다름 아닌 미륵불임을 지적을 하였다.
세 번째, 진표율사의 수중세계 교화 용신설화는 그의 보살행, 특히 미륵교법 홍포에 대한 절정이다. 진표의 감화력, 가피력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나아가 수중세계의 생물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용신의 권속들은 스스로 죽어 나와 사람들의 죽음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용신이 진표율사의 보살행에 대해 보은하는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용신설화가 아니라 진표율사야말로 살아있는 불보살임을 보여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륵경전에 나오는 용신을 검토하였다. 이와 함께 용신과 진표율사, 미륵불과의 관계도 논의하였다. 미륵경전에서 용신은 미륵불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용신은 미륵불이 나타나는 장소를 장엄하는 역할을 맡았다. 진표율사가 미륵을 친견하였을 때, 미륵은 그가 앞으로 대국왕의 몸을 받고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다. 수기가 이루어진다면 진표율사는 도솔천 대국왕이 되어 미륵보살의 설법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이 하생할 때, 진표율사도 함께 하생하여 미륵불의 제도를 받을 것이다. 미륵경전에 따르면 미륵이 하생할 때 용신은 전륜성왕과 함께 성안을 장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 들어가기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 점찰 교법의 대성자 등으로 평가되는 진표율사(717?)는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행적을 남긴 고승이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당시에 유행이다시피 하였던 당나라로 구법 유학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다. 비슷한 경우를 꼽으라면 원효(617~686)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진표율사는 원효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원효는 많은 저술을 직접 찬술하였고, 그 저술이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던 인물이다. 반면 진표율사는 단 한 편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그에 대한 최초의 전기적 기록은 국내보다는 중국에서 먼저 문자화되어 송고승전을 비롯하여 몇 권의 중국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그의 미륵신앙에 대한 홍포와 점찰 참회불교의 시절인연, 그리고 교화력이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진표율사의 교화방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륵신앙이다. 그는 단순하게 미륵신앙을 미륵신앙으로만 홍포하지 않았다. 그가 목적하는 것은 미륵신앙이지만, 그 목적지로 가는 길로써 점찰 참회교법을 이용하는 등 다각도의 교화방법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교화방법은 성공적이었다. 그의 행적에 동반하여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많은 설화들 근거다. 한 인물에 대한 설화가 생겨난 이유는 그 인물의 대중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고 또한 신비화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설화란 어디서 누가 이야기하고 누가 듣는 이야기이며, 이야기하며 듣는 상황의 역사적, 사회적 성격을 떠나서는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화는 흔히 있었던 사실이나 기록된 사실의 와전이라고 한다. 설화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허구이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실제로 이야기되는 설화가 어떤 역사적 ·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여기에 집착하는 학자들은 설화를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거나 아예 외면하는가 하면, 심지어 얼굴을 찌푸리기도 한다. 나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도 그런 연구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진표전간관동풍악발연수석기는 모두 황당한 기사로 채워져 있다. … 『송고승전14에도 진표의 전기가 실려 있지만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비판은 설화를 오로지 허구로만 생각하는, 나아가 종교인의 행적에 신이神異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인이기를 포기하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진표 전기에서 신비주의는 불교 나름의 종교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신이의 사설화적 요소들이 넘쳐나는 진표율사의 행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연구자의 몫이다.

진표율사와 관련된 설화에서는 특히 용신龍神설화가 많다. 아니, 대부분이 용신설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신 신앙은 진표율사가 몸담고 있는 불교는 물론 우리 고유의 전통신앙으로 민간신앙, 무속신앙으로 지칭되고 있는 신교神敎, 도교 등 동아시아의 여러 종교현상에서 신앙대상 내지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교의 용신 신앙은 미리, 미르신앙에서 발견된다. 훈몽자회에서 ()’자를 미르 룡이라 하였다. 여기서 용의 우리 고유어가 곧 미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불교의 용신앙이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신교의 용신앙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르는 물[]의 옛말 과 상통하는 말인 동시에 미리[]’의 옛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리’, ‘미르의 어원을 검토할 때 아언각비에도 話龍爲豫 미리 이란 기록을 통해 용이 예시적 동물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용이 등장하는 문헌·설화·민속 등에서 보면 용의 등장은 반드시 어떠한 미래를 예시해주고 있다. 반면 훈몽자회에서의 미르는 그 어근이 로서 의 어원과 같다. 은 수의 고어이고, 물의 향찰을 龍 未尸로 보기 때문에 물과 용(미르)은 상통한다. 서정범은 용은 천신의 사자 또는 천지를 주관하는 신으로서 마리’, ‘ᄆᆞᄅᆞ와 동계의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며, 물은 마리’, ‘ᄆᆞᄅᆞ에 어원을 두고서 애물라우트적인 변화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미르()는 물과 어원이 같다고 주장하였다.미리·미르의 어원을 통해 전통적인 용의 상징적 의미를 분석해보면, 우선 미리 용미래에 대한 예조를 나타내는 예시자적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비상하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힘을 지닌 영물로서 천상의 구조를 유지하며, 하늘을 대신하는 신사神使로 인식된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지상과 해중海中을 왕래하는 신사라 하여 신성시하였다. 한편 용의 예시적 능력은 고소설이나 설화에서 왕이나 영웅, 그리고 비상인물의 탄생과 현현을 알리는 핵심 모티브로 작용한다. 후술하겠으나 용신의 이와 같은 미래 예시적 권능 등은 불교에서 미래불이요, 당래불인 미륵불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용신신앙은 일반적으로 농경 문화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해양지역에서도 용신신앙은 거의 절대적이다시피 할 정도로 성행하였고,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용신의 어원이 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 경우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농경 문화권이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해양국가로서 용신신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용신에 대한 기록은 건국신화부터 등장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신화, 북부여 시조 해모수 신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후 알영閼英신화, 김알지 신화, 탈해왕 신화 등이 그것이다. 용신신앙은 고구려, 신라계 건국신화뿐만 아니라 진표율사의 활동지역인 백제지역 건국신화에서도 발견된다. 백제계 건국신화 가운데 최근에 학계로부터 주목받는 것이 서동설화다. 이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池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서동은 뒤에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재위 600641)이다. 이 설화에 대해 서대석은 일반적인 설화가 아닌 일종의 백제계 건국신화이며 수부지모형水父地母型 신화라고 분석하였다. 이 같은 백제지역의 용신설화 전통은 후백제의 건국신화로 재현된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설화는 일명 야래자설화형夜來者型說話型로서 지룡池龍과 무진주 부자의 딸이 사통을 하여 견훤을 낳았고, 그 견훤이 후에 후백제를 건국했다는 설화다. 두 설화에 따르면 무왕과 견훤은 용의 아들[龍子]이다. 정병헌은 백제 용신설화의 변이 과정을 추적하여 무왕 탄생설화의 용과 견훤의 탄생설화의 지렁이를 비교하면서 백제인의 의식의 변천을 연구하였다.

 

용신 설화는 세계 보편적인 것이지만, 백제의 경우 특이한 성격을 지닌다고 본다. 용신은 호국이나 호법, 또는 퇴치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의 경우,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백제의 경우는 집단의식과 관련되는 용신이 나타나고 있어 용신의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것은 한 집단이 향유하는 사상의 기반 또는 기저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이는 백제 문학의 성격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백제인의 의식 속에 뿌리박혀 있는 용 개념은 타 지역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 또는 그 기반이 되는 지역의 설화적 인식을 드러내기 위하여 백제 설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용신 설화의 변이 과정을 악하고자 한다. 이를 각 단계의 설화가 지향하는 세계관과 관련지어 이해할 때, 우리는 백제 설화의 중요한 한 유형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진표율사와 용신신앙과 관련된 논의에서도 매우 유효하다. 고구려, 신라, 백제 건국신화뿐만이 아니다.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용신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고려사세기世紀 편에 따르면 그의 할머니는 용녀龍女. 또한 일종의 의사擬似 건국신화라고 할 수 있는 조선조의 용비어천가역시 용신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건국신화는 국가 사회적, 절대적인 권위가 요청된다. 따라서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용신은 어떤 신비성을 띤 동물에 그치지 않고 신성성의 권위를 지니는 존재이다. 이러한 권위는 그것을 애기하고 믿는 사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또한, 이러한 신뢰는 일반 백성들의 신앙적 토대를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용신신앙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용이 최고 권위만 상징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용신신앙은 단순히 농경시대의 수신의 역할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용신 신앙의 넓은 의미는 승천昇天, 즉 하늘로 오르는 데 그 함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용신의 역할은 일반 백성에게는 꿈과 희망을 담보하였다. 아기장수 설화는 겨드랑이에 용비늘이 붙어 있으므로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지만 끝내는 막강한 세계의 힘 앞에 굴복하는 설화로서 민중 영웅의 산물이다. 용마龍馬, 용혈龍穴설화 등도 모두 민중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용은 왕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권위 있는 신화적 동물로 간주되었다.

용신은 불전문학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신화적구성요소이다. 특히 동북아에서 꽃을 피운 대승불교에서 용신은 자주 등장한다. 불전 속에서 용신은 매우 이른 시기, 붓다가 성도한 직후부터 등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용신 설화는 신교적 요소가 더욱 강하였다. 원래 신교의 신앙대상이었던 용신이 불교가 전래된 이후 더욱 활기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게 용신설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출생에서부터, 어쩌면 출생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용신신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행적에 나타나는 용신신앙을 이해하면 그의 전기적 생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물론 진표율사는 신라 중대를 대표하는 고승으로서 용신신앙에 대한 신봉자는 아니다. 그의 대한 용신설화는 그의 영향이 미치는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로서 실천적 삶을 살았던 그에게 앞에서 검토한 어떤 권위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므로 미륵신앙의 홍포를 위한 도구로서 용신신앙이 사용되었던 것일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우도 상정할 필요가 있다. 그이 용신설화는 민중지향적인 의미를 내포한 측면이 강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논자는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 논문의 연구 방법은 선행연구의 그것과 달리한다. 선행연구, 특히 사찰창건 연기설화 연구에서는 대부분 용신을 신교(전통신앙)와 동일체로 상정하고 사찰 창건자(불교)와 갈등 내지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한 거의 거의 공식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불교의 승리(창건 연기를 다루는 설화이므로), 신교의 패배로 귀결 짓는다. 심지어 용신이 사찰 창건을 돕는 경우는 착한 용[善龍], 방해하는 경우는 악한 용[毒龍]이 되고 퇴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불교 우의의 입장에서 논의된 결과인 이와 같은 일률적인 논의에 비판적인 지적도 없지 않았다.

 

사찰연기설화에 오면 용은 새롭게 부상하는 불교에 대응하여 기존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다시 말해 사찰의 건립 때문에 기존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는 존재로 사람들에게 타기시된다. 그러나 그 같은 반동적 기능도 이야기의 진행과 더불어 호법, 호불룡好佛龍으로 탈색되다가 마침내 숭앙의 대상으로까지 변화하는 것이 불교설화의 내용적 특징이다.

용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창사에 이른 사찰들로 대참사大懺寺, 불영사佛影寺, 부석사浮石寺, 금산사, 금룡사金龍寺, 청룡사, 쌍계사, 유점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창사담에서 주목할 것은 명당을 놓고 벌어지는 용과 불자들의 대결에서 불자는 승리를 거두고 용은 결국 굴복하거나 패퇴당하는 쪽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그 외 용서를 빌고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일도 적지 않아 흥미롭다. 즉 많은 창사담에서 용들은 이제까지의 악행을 참회한 후 불보살, 고승 등의 문하에 들어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으로 줄거리가 선회한다는 것이다. 사찰건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만 들어 일률적으로 용을 부정적 인간형의 테두리에 넣는 것은 그러므로 적절하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논자는 이 지적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이 논문에서는 선행연구의 시각을 지양하고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논의한다. 그것은 이 연구에서 보여주는, 진표율사와 관련된 용신 설화가 그만큼 다양한 풍경이라는 얘기도 된다.

이 연구의 일차적인 목적은 용신설화를 통해 진표율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에 하나의 시각을 제공하는 데 있다. 용신신앙 자체를 소홀히 하지 않겠으나 아무래도 그것은 진표율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보조역할로서 논의될 것이다. , 설화 연구가 아니라 진표율사 연구라는 점이다. 유가 최고의 경전 주역에서 첫 번째 괘인 건괘에 대해서, “건괘는 용을 상으로 삼았다. 용은 신령스럽고 변화불측하기 때문에 용을 빌어 건도의 변화와 양기陽氣의 소식消息과 성인의 진퇴를 형상한 것이다.”고 하였다. 용이란 존재는 신령스럽고 변화하여 헤아릴 수 없기에 이로써 성인의 진퇴를 상징한 것이다. 진표율사와 용신신앙을 연구하는 동기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용을 상으로 삼는 건괘는 진표율사의 행적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하나의 코드가 될 수 있다.

 

. 진표율사의 출생지와 용신신앙

 

1. 벽골제의 용신 신앙과 진표율사

 

한 인물이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했다고 할 때, 그는 역사, 지리, 사회, 문화 등 온갖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리적, 역사적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러나 진표율사는 출생지조차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진표에 대한 각 전기는 물론 학계의 논의조차 혼선을 빗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서로 다른 지명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방계자료도 찾아볼 수 없다. 학계에서는 진표율사의 출생지가 완산주 벽골군碧骨郡 두내산현豆乃山縣(도방산촌都邦山村) 대정리大井里로서 지금의 만경.”이라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김제시 만경읍에는 대정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논자는 일찍이 현장답사를 통해 진표율사의 출생지를 확정한 바 있다. 오늘날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김제시 순동蓴洞 대리大里마을이 그곳이다. 이 마을은 옛 행정구역명은 김제군 대정면大井面 대정리大井里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순동리, 진관리, 대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해서 순동리가 되었다. 이후 김제시가 되면서 순동으로 바뀌었다. 대리마을은 순동 동남쪽에 위치한다. 이전에는 순우리말 한우물로 불렸다.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서 한우물’, ‘찬우물로 불렀는데 대정大井이라는 한자로 표기된 것이다. 지금도 이 마을 입구를 가리키는 이정표에는 대리마을밑에 한우물을 동시에 표기하고 있다.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김제군 조에는 대정大井에 대해, “동쪽으로 처음이 10, 끝이 15리이다.”라고 기록하였고. ‘대정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 이전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표율사의 출생지인 벽골군, 오늘날의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김만(김제·만경)평야(징게맹경외야밋들)’을 품고 있는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김제군 조에 따르면 김제군은 백제의 벽골군이었다. 진표율사가 활동하였던 통일신라 경덕왕 16년에 김제군으로 개칭되었다. 말하자면 진표가 태어났을 때는 벽골군이었으나 한창 활동하던 때에 김제군으로 바뀐 것이었다. 김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경지역이고, 따라서 용신신앙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지역이다. 농경지역은 물과 불가분의 관계이고, 유사 이래로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용신의 권위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벽골제碧骨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김제군 조에 따르면 벽골제는 신라의 제16대 흘해왕訖解王(재위 310~356) 21년에 처음 둑을 쌓았다. 벽골제 중수비에 따르면 둑의 길이가 6843 자이고, 둑 안의 둘레는 7746보에 이른다. 벽골제의 수원水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金溝縣金 모악산의 남쪽이고, 하나는 모악산의 북쪽에서 나오며, 다른 하나는 태인현泰仁縣의 상두산象頭山이다. 세 수원 가운데 두 개가 진표율사의 활동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이다.

벽골제는 물을 제어하는 국가규모의 수리시설이었으므로 용신과 관련한 설화가 많이 전한다. 대표적인 것이 조연벽趙連壁과 벽골룡碧骨龍 설화다. 김제 토착세력인 김제 조 씨의 씨족시조설화이면서 벽골제 수호신인 벽골룡의 부탁을 받고 벽골제를 빼앗으러 온 변산의 청룡을 활로 쏘아 쫓아 주었다는 일종의 괴물퇴치담이다. 이 설화는 흔히 쌍용추와 벽골룡이라고도 일컫는다.

조연벽은 활쏘기의 명인으로 인근에서 당할 자가 없었다. 어느 날 피 꿈에 흰 수염이 발끝까지 내려온 노인이 나타났다. 자신이 벽골제를 지키는 벽골룡이라고 하였다. 벽골룡은 변산에 사는 청룡이 벽골제를 뺏으러 온다고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내일 자기가 청룡과 싸울 때 화살로 청룡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조연벽은 활과 화살을 들고 벽골제로 달려갔다. 그때 갑자기 먹구름이 일어나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먹구름 속에서 청룡이 혀를 내밀고 불을 토하며 벽골제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또한 벽골제에서 물결이 일어나면서 백룡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벽골제 하늘에서는 청룡과 백룡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조연벽은 청룡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두 용의 싸움은 반나절이나 계속되었다. 백룡이 청룡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조연벽은 활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청룡을 맞출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백룡이 청룡에게 밀려서 도망치고 있는 순간 청룡의 배를 향하여 힘껏 활을 쏘았다. 배에 화살을 맞은 청룡은 순간 어디론가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잠시 후 먹구름 속에서 무엇이 반짝이면서 조연벽의 발 아래로 떨어졌다. 60도 넘는 용 비늘이었다. 조연벽은 힘들게 청룡을 물리친 후, 손에 용 비늘 한 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조연벽의 꿈에 다시 벽골제 벽골룡이 나타났다. 벽골룡은 조연벽의 도움으로 영원히 벽골제에 살게 되었다고 칭송하면서 자기를 살려준 보답으로 조연벽이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게 될 것을 알려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조연벽은 무과에 급제한 후 승승장구하였다. 그의 세 아들도 큰 벼슬을 하였다.

이밖에 조연벽의 아들로서 고려 후기의 문신 조간趙簡은 양쪽 어깨에 용의 비늘이 있어서 벽골제의 용정龍精이라고 믿었는데, 그가 군의 사무원이 되었을 때 하루는 나무에 올라갔더니 읍재邑幸가 낮잠을 자다 꿈에 나무 위에 쌍룡이 엉켜 있는 것을 보고 공부를 시켜 나중에 과거에 급제하였고(충렬왕 5), 그가 살던 곳을 용두동龍頭洞이라 하였다는 설화, 곽진사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강진사의 딸이 석동 방죽에 익사하여 용이 되어 곽총각에게 둑(萩防堤)를 쌓으라고 현몽하였다는 전설 등과 함께 벽골제와 용신신앙을 중심으로 김제지방에 전승되는 단야전설이 눈길을 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의 일이다. 골제를 쌓은 기가 오래되어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되어 김제를 비롯한 주변 7개 주 백성들의 생사가 걸렸다는 지방 관리들의 진정에 따라 나라에서는 예작부禮作部에 있는 국내 으뜸가는 기술자인 원덕랑元德郞을 현지에 급파하여 보수 공사를 하게 하였다. 원덕랑은 왕명을 받고 머나먼 김제 땅에 도착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당시 김제태수 유품由品에게는 단야丹若라는 이름다운 외동딸이 있었다. 원덕랑은 밤낮없이 태수와 독 쌓는 일을 같이 하다 태수의 딸인 단야 낭자하고도 점차 친숙하게 되었으며, 단야 또한 원덕랑을 알게 되면서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원덕랑은 둑 쌓는 일 외에는 한 눈 팔지 않았으며, 특히 고향에 월내月乃라는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더욱 단야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무렵 주민들의 원망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이러한 큰 공사는 반드시 처녀를 용추龍湫에 제물로 바쳐 용의 노여움을 달래야 공사가 순조로운데, 원덕랑은 미신이라 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고 공사를 했기 때문에 완공이 가까운 둑이 무너지게 된 것이라는 백성들의 원망이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이때 서라벌에서 원내 낭자가 남장을 하고 김제까지 약혼자 원덕랑을 찾아왔다. 이 사실을 안 단야의 아비지 태수는 월내 낭자를 밤중에 보쌈 하여 용에게 제물로 바쳐 딸의 소원도 품어주고, 백성들의 원성도 진정시키며, 둑도 완성시키는 일거다득을 노리는 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아비거의 계략을 알게 된 단야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 월내 낭자를 죽인다 해서 원덕낭의 결심이 돌아설 리도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원덕랑을 잊고 다른 곳으로 결혼할 마음은 더 더욱 없었다. 단야는 오래 고민 끝에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의 생명이 제방을 완공하고, 또한 연모했던 원덕랑도 원내 낭자와 결혼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면 더없이 좋은 일이며, 더욱이 압지의 살인까지 막게 되어 효도가 되는 것이란 생각에 미치자 죽음을 결심하였다.

이렇게 되어 단야는 월내 낭자 대신 자기를 희생하게 되었으며, 그 후 보수공사는 완전하게 준공을 보게 되었고, 원덕랑은 월내 당자와 결혼하여 복하게 살았다.

 

이 단야진설은 신라 신라의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 6(790)에 벽골제 보수공사를 하며 단야를 희생으로 바쳤다는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다. 박진태는 이 설화에 대해 자연()/인간(백성), 백제(김제인)/신라(원덕랑), 지방관리(태수)/중앙귀족(원덕랑), 희생자(단야)/ 혜자(월내)의 대립 체계는 8세기 말엽 김제의 빅골제를 무대로 복잡 미묘한 정치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고 지적하였다.

벽골제를 무대로 오랜 역사를 두고 진행되어 온 설화는 현대에 이르러 각종 공연작품의 소재가 되어 그 의미를 확대, 전승하고 있다. 단야전설은 1947년부터 단야제라는 축제 형식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후 김제지방의 뜻 있는 작가들에 의해 단야전설에 쌍용추와 벽골룡설화가 하나의 작품으로 집단 창작되어 벽골제 쌍룡놀이라는 민속놀이로 공연되었다. 이 놀이는 19759월 제1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민속놀이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12월에 전라북도 지방문하재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2. 진표율사의 출생지와 용녀龍女 설화

 

진표율사의 출생지 전라북도 김제시 순동 대리마을에는 한 편의 용신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설화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진표율사다. 김제 시내에서 전주시 이서면 방면으로 가다 보면 김제시 백학동이 나온다. 백학동 선인마을 앞 오른쪽의 나지막한 터, 대리마을에서 큰 길로 나와 왼쪽으로 꺾어 돌면 몇 구의 소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는 작은 동산이 보이고, 동산 아래쪽 도로와 마주한 공터에 일곱 기의 작은 무덤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초입에 서 있는 용자칠총龍子七塚의 유래비(이하 유래비)에는 용자칠총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표陳表라는 고기잡이 노총각은 병든 홀어머니를 오랫동안 봉양하고 있었는데 한겨울에 붕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 가까운 연못에 가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고 있었으나 자라밖에 잡히지 않아 부엌 물독에다 넣어 두었다. 그런데 자라는 여자로 변신하여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놓고 다시 자라로 변하여 숨곤 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진표는 자라부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진표의 효성이 지극하여 하느님이 내려준 선녀의 화신이었다. 그 뒤 자라부인은 잉태하여 십 삭이 되자 진표에게 피신하였다가 삼칠일 후에 들어오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진표는 호기심으로 약속을 어기고 기일 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자라부인이 낳은 일곱 마리의 용은 죽었고 부인은 눈물을 흘리고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전하며 이에 진표는 양지바른 곳에 일곱 마리의 용을 나란히 묻어 주었었고, 후세인들은 이를 용자칠총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진표가 일곱 개의 무덤을 만들어 선인동 마을 뒷산에 묻어 주고 봉래산蓬萊山 월출암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위의 용신설화가 진표율사의 출가동기가 되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봉래산은 진표가 용맹정진 끝에 미륵과 지장 두 보살을 친견하게 되는 전북 부안군 변산을 일컫는다. 변산, 일명 봉래산은 전라북도 고창군과 전라남도 장성군에 걸쳐 있는 방장산(743m),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덕천면·소성면에 걸쳐 있는 두승산(일명 영주산, 444m)과 함께 예로부터 호남의 삼신산으로 알려져 왔다(증산도 도전1:14:4-6).

진표율사와 용자칠총의 주인공 진표陳表와는 한문표기에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용자칠총 이장移葬유래비제작에 관여했던 김병학(1930?) 전 김제문화원장은 원래 용자칠총과 유래비는 한우물(대리마을-인용자) 북쪽 산에 있었다. 지금은 작고했으나 윤관수 씨라고, 대리마을 노인회장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용자칠총이 있었던 산과 대리마을 한우물이 있는 땅 주인이기도 했던 그 사람이 용자칠총을 현재의 도로변원래 있었던 용자칠총 자리에서 북쪽으로 옮기면서 유래비를 제작했다. 당시 나도 개입하기는 했으나 윤관수 씨가 주로 맡아서 진행하였다. 진표陳表라는 한자표기는 잘못된 것이다. 현재는 진씨가 없으니까 진씨라고 한 것이다. 진표眞表가 맞다.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진표율사는 12세에 출가하였으므로 한자표기가 같다고 해서 설화 내용 자체를 사실로 받아들일 때는 용자칠총의 주인공 진표와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표의 효심, 연못과 용신앙, 봉래산 수행 등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용자칠총 전설은 진표율사가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김제 대리마을에 전승되는 용자칠총 설화는 벽골제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많은 용신설화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조동일은 서사 양식의 분류기준으로 자아와 세계와의 상호 관계에서 고찰하고 있다. , 서사양식은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에 의한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신화의 경우 자아와 세계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대결한다. 민담은 자아의 우위에 입각한 자아와 세계의 대결, 전설은 세계의 우위에 입각한 자아와 세계의 대결 양식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용자칠총의 경우는 좀 복잡하다. 아니, 대결이라는 양식 자체가 어디에 기준을 두는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질 수 있다. 진표 총각이 자라부인 즉, 용녀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을 것이라는 미래 결과에 유의한다면, 또한 용녀의 승천에 유의한다면 이 설화는 자아(진표)가 패배한 전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세계(용녀와 일곱 용자)에 유의한다면, 자아의 승리일 수도 있다. 단순히 대결만을 염두에 둘 때 진표는 용녀의 부탁을 그의 의지에 따라 어겼고, 결과적으로 용녀를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천했으며 그녀가 낳은 일곱 용자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았다. 이 경우 이 용신설화는 민담에 해당한다.

결국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설화 이후의 내용과 그 의미이다. 이 경우, 이 설화를 전설이라는 양식으로 볼 때, 세계와의 대결에서 가깝게는 승리했으나 넓게 보면 철저하게 패배한 진표(자아)의 출가 동기가 된다. 같은 의미에서 진표율사의 전기에서 개구리 사건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원연간 중의 어느 날 진표는 사냥을 나가서 짐승을 쫓다가 잠시 밭두렁에서 쉬었다. 그때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본 그는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꿰미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해 물 속에 담가두었다. 장차 반찬을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냥을 하였는데 사슴을 쫓다가 산 북쪽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꿰어둔 개구리를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듬해 봄 진표는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물속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가서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30마리 가량의 개구리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때 진표는 탄식하며 스스로 책망하여 말했다.

괴롭도다. 어찌 입과 배가 저같이 꿰어 해를 넘기며 괴로움을 받았는가.”

이에 버들가지를 끊어 개구리들을 모두 놓아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는 출가의 뜻을 품게 되고, 마침내 깊은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

 

학계에서 이 개구리 사건은 진표율사의 공식적인 출가동기로 받아들여진다. 본고에서는 이 개구리사건을 용신신앙 설화계열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용녀 전설과 같은 양식으로 같은 결말을 초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용녀설화와 개구리사건은 세게 우위에 입각한 자아의 패배하는 전설양식으로 그 결말은 진표율사의 출가 동기가 되었다.

설화는 그 담당자와 향유자에 의해 생성과 전승이 자연발생적인 양식이지만, 진표율사의 입장에서 이 설화는 매우 필연적이라는 구도 하에 생성된 느낌이 든다. 설화에서 자라(용녀)를 잡아온 것은 진표다. 용자칠자를 생산한 아비도 용녀와 함께 진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용녀를 비롯한 용자칠자라는 세계는 진표(자아)가 가둬놓은 세계이다. 이 경우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서 자아가 승리했다고 한다면, 세계의 패배는 이미 시작 단계에서 예고된 결말이다. 개구리사건도 이와 동일한 구조다. 개구리를 잡아 꿰미에 꿰어 물속에 넣어둔 것도 진표이고, 그것을 잊고 집으로 돌아온 것도, 그리고 참회하고 출가한 것도 진표다. 어떤 의미에서 개구리 사건 같은 일화가 용녀 전설로 변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두 사건에서 자아의 우위가 최종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아의 승리와 세계의 패배는 또 다른 자아의 패배를 의미한다. 문제는 자아의 패배(비극)을 초래한 주인공이 자아라는 점이다. 그 패배에 값하기 위해 자아의 참회가 요구된다. 자기가 저질러놓고 자기가 참회하는 매우 작위적인 구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용신설화가 이야기되고 구전된 것은 그가 한국 참회불교의 대성자라는 영향력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진표율사의 불교를 참회불교라고 할 때, 그 출발점은 바로 용자칠자의 설화와 개구리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진표율사의 사찰창건 연기 용신설화

 

1. 금산사 미륵전 창건과 미륵장육존상 봉안

 

진표율사는 12세에 모악산 금산사 숭제법사崇濟法師 문하에 출가하였다. 그리고 진표율사는 나이 27세가 되었을 때,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부사의방은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 자그마한 토굴이었다. 진표는 그곳에서 스승 숭제법사로부터 받은 공양차제비법점찰선악업보경에 기반을 둔 참회수행법으로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다 진표전간에서는 당시 진표가 삼업三業을 닦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계법을 구했다).”고 하였다. ‘망신亡身이라고 할 정도로 혹독한 고행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진표전간석기등 그의 전기를 보면 그가 생사를 걸고 수행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표는 스승이 정해준 목표인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정수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구나.” 지장이 계본을 주고, 미륵이 또 목간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했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를 알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 두 성인은 곧 모습을 감추었다.

 

진표율사는 지장보살로부터 계법을 받고, 미륵으로부터 육신(손가락뼈)를 나누어 받았다. 그리고 미륵은 진표율사에게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일종의 수기授記. 수기란 부처가 수행자에게 미래의 증과에 대하여 미리 지시하는 예언과 약속이다. 진표율사가 지장, 미륵 두 보살을 친견하였고, 지장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은 사건은 스승이 그에게 준 일차적인 목적을 어느 정도 완성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아직은 일차적인 목적 자체를 완전히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미륵의 계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륵을 친견하고 관정을 받았고, 또한 당신의 육신을 나누어 받기까지 했으므로 계법 이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금산사로 갔다. 하산 길은 장엄하였다.

 

율사가 교법을 받은 후에 금산사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왔다. 도중에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렀을 때, 문득 용왕이 나와서 옥가사玉袈裟를 바쳤다. 그리고는 (용왕이) 8만 권속眷屬을 거느리고 율사를 호위하여 금산사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을 주었다. 이에 율사는 시주를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만들고, 또 미륵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양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불상은 갑진(764) 69일에 완성하여 (2년 뒤인) 병오(766) 51일에 금당에 모셨으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이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로 돌아오는 길목에 위치한 대연진에서 용왕이 나와 옥가사를 바쳤다. 그리고 용왕은 8만 권속을 거느리고 진표율사를 호위하여 금산사로 왔다. 이 광경을 보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진표율사는 곧 불사를 일으켰다.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이때 완성된 절은 금산사 미륵전이었다. 금산사금산사 중창이었다고 하였으나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않고 있다. 진표가 금산사를 중창했다는 행적은 여러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인용문을 볼 때, 당시 불사는 금산사 미륵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절을 완성한 후 미륵장육상을 제작하여 봉안하였다는 다음 내용과 함께 읽은 결과가 근거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전에 건너뛸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완공한 모습을 보고, 이 전당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하기 전에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미래의 부처 미륵불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진표율사에게 계법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대목은 두 가지 측면에서 눈에 띤다. 첫째, 진표율사는 비로소 스승이 제시한 일차적인 목적을 이루었다. , 지장, 미륵 두 보살에게 계법을 받으라는 과제를 달성하였다. 진표율사가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따라서 진표의 수행에서 기반이 되었을 밀교의궤 공양차제법(대일경7)에 따르면 제자는 스승을 보면 공경하고 예배하며은근하고 훌륭한 뜻을 일으켜서 공양하고 공급하며 모시고 하는 일을 따라하고 스승의 뜻에 잘 따라서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이에 대해 신라의 금강승金剛乘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찬술한 대비로차나공양차제법소(공양차제법소)에서는 만약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그 문에 들어갈 수 없다. (제자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이 아니면 망령되이 전수하지 못하니, 아직 관정을 받지 않았다면 잠깐이라도 듣는 것을 금지한다. 만일 보고 듣고 정례할 수 있다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죄를 없애고,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한다면 바다와 같은 덕이 그 몸에 모일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공양차제법을 의궤로 하는 밀교에서 스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표율사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둘째, 진표율사는 금산사 미륵전에 봉안할 미륵장육상의 모델을 두 번째씩이나 친견하고 확인하였다. 그만큼 금산사 미륵불은 미륵의 본모습에 가깝다는 얘기다. 당시 진표율사가 미륵보살을 친견한 장면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는 두 가지의 근거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미륵으로부터 계법을 받은 직후부터 미륵장육상을 제작하는 불사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미륵이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는 장면을 미륵전 남쪽 벽의 벽화로 남길 정도였다. 미륵불상은 갑진(764) 69일에 완성하여 병오(766) 51일에 봉안하였다. 이유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제작이 끝난 뒤에도 2년이나 걸려 봉안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와 같이 근거로 당시 진표율사가 불사를 일으켜 완공한 절은 미륵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당시 불사에 미륵전을 포함하여 금산사 중창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금산사 미륵전 창건연기설화에 얽힌 용신설화와 진표와의 관계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금산사 미륵전 창건연기설화는 이전에 진표율사가 화소로 등장했던 용자칠자 설화, 혹은 개구리 사건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용왕이 옥가사를 바치고, 진표율사의 금산사 미륵전을 세우는 불사에 용왕의 8만 권속이 함께 했다는 설화에 대결의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조화요, 상생이 있을 뿐이다. 선행연구에서는 이 용신설화를 대결의식으로 보았다. 심지어 진표율사의 활동지역을 문제 삼아 망국의 백제와 신라 혹은 고구려와 신라 등의 대결의식으로 논의하는 선행연구도 있다. 백제는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는 8년 뒤인 668년에 멸망했다. 진표율사는 신라 제35대 경덕왕 대(재위 742765)에 주로 활동했다. 고구려 멸망 연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80여 년이 지난 뒤였다. 또한 진표의 부친이 신라의 17관등 중 11번째의 계급인 내마奈末(나말, 나마奈麻)였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점들로 미루어 보면 진표율사가 경덕왕과 그 권속으로부터 보시를 받아 불사를 일으킨 사실을 너무 정치적으로, 백제유민(나아가 고구려 유민)과 현 통치 권력인 신라와의 대결로만 해석하는 것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

금산사 미륵전 창건연기 용신설화에는 위에서 검토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연기설화도 전한다.

 

모악산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터가 용이 살던 못으로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 때 조사祖師(진표)가 여러 만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 그 자리에 대전大殿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 네 모퉁이 뜰아래서 가느다란 간수澗水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이 용신 설화는 선행연구들의 표현에 따르면 통도사, 구룡사, 옥룡사 등의 독룡퇴치형설화와 비슷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금산사 미륵전 창건연기 설화에 등장하는 이 용신이 독룡이라는 근거는 미약하다. 적어도 문자화된 기록 자체만 보면, 원래 살고 있는 터전()에서 살고 있다가 쫓겨난 용신을 독룡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이 용신을 독룡이라고 한다면, 불교가 곧 선이며, 신교가 악이라는 신라시대 이래 전제왕권과 그 수하들이 만들어낸 힘의 논리에서 1천 년이 지나도록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이 용신설화에서 굳이 선악을 논한다면, 용을 자기터전에서 쫒아내고 자기 신앙을 수호 내지 홍포하는 전당을 지은 진표율사 쪽이 일 수 있다. 이 지적이 타당하다면, 이런 결과를 의도하고 기록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대결의식을 보여준, 특히 고승 진표율사가 악인으로 등장하는 설화를 문자화한 것은 조선후기 유학자 이중환(16901756), 혹은 숭유억불 정책이 극에 달했던 조선왕조의 역사적, 시대적 산물이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2. 금강산 발연사 창건과 용신설화 그리고 미륵불

 

1) 발연사창건 연기 용신설화

진표율사의 중창에 의해 금산사는 대가람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미륵전과 미륵장육상 봉안으로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그것은 스승 숭제법사로부터 부여 받았던, 아니 미륵으로부터 직접 부촉을 받았던 마지막 과제미륵의 계법을 세상에 널리 펴는 대장정을 실천하는 첫걸음이다. 이후 진표는 금산사에 주석하면서 미륵의 계법을 홍포하교 중생을 교화했다. 진표전에는 해마다 진표율사에게 계를 구하고 참회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많았다고 하였다. 진표전간에서는 진표가 금산사에서 해마다 단석을 열어 법시를 널리 베풀었는데,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한 것이 이 말세에는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고 했다. 이때의 법석은 물론 점찰참회법회였을 것이다. 진표는 점찰법회를 통해 미륵의 계법을 홍포했다.

 

이 뒤에 진표는 미륵불의 삼회설법의 구원 정신을 받들어 모악산 금산사를 제1도장, 금강산 발연사를 제2도장, 속리산 길상사를 제3도장으로 정하고 용화도장을 열어 미륵존불의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 십선업十善業을 행하라는 미륵신앙의 기틀을 다지고 천상 도솔천으로 올라가니라. (도전1:17:18-19)

 

금산사가 사찰규모뿐만 아니라 미륵신앙의 전당으로서 중생교화에 있어서도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진표는 북상 길에 올랐다. 충청도 속리산에 이르러 골짜기에 길상초가 나 있는 곳을 보고 표시해 두었다가 뒤에 제자 영심에게 그곳에 절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당시 절이름이 길상사(오늘날의 법주사)가 그 절이다. 인적이 드문 산을 찾아들어간다거나 길상초가 나는 곳을 수행처로서 중요시하는 것은 역시 스승이 준 공양차제법에 의거한 행동이었다. 그는 다시 동북쪽 강원도로 올라가 금강산으로 향했다. 외금강 신계사 남쪽 25리쯤에 있었던 발연사鉢淵寺. 바로 진표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오늘날 절은 간곳없고 절 이름조차 발연사 터[鉢淵寺址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발연사는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던 미륵전당이었다. 논자를 더욱 아쉽게 하는 것은 남북 분단현실이라는 장벽에 막혀 연구하기조차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발연사를 중심으로 주변 골짜기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리용준·권승안 등이 공동을 저술한 책 금강산 데이터베이스의 내용을 CNC 북한학술정보에서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는 북한지리정보: 금강산 지명유래금강산 외금강 발연소 구역 발연동鉢淵洞의 지명유래가 실려 있다. 이 책의 발연동 항목에는 발연소鉢淵沼, 발연사터, 발연산鉢淵山, 무지개다리[虹蜺橋], 무지개소[虹蜺沼], 구유소, 치폭馳瀑, 폭포암瀑布巖, 폭포내림, 계수란봉바위(桂樹鸞鳳岩), 계봉소桂鳳沼, 발연굴鉢淵窟, 계수대桂樹臺 등의 지명과 그 유래가 개략적이나마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눈에 띠는 것은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는 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나라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용신설화의 공통점은 물(, 바다 등)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발연사 주변에서 금강산이라는 산악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물과 관련된 지명이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위의 데이터베이스에서 13개 항목 중에 11항목이 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지명이다. 대표적인 지명은 발연소. 바로 이 발연소를 중심으로 다른 지명이 파생되었다. 이 책에는 발연소 구역에 있는 골짜기. 발연동은 령신동의 남쪽 룡계천 남쪽 지류의 상류 일대를 포괄하고 있다. 골짜기 안에 발연소(일명 바리소’)라는 아름다운 소가 있으므로 발연동이라고 부른다. 발연동은 집선봉의 동남쪽 줄기 사이에 이루어진 계곡으로서 자기의 독특한 풍치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 자료에서 발연소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발연동에 있는 소. 발연동 골짜기의 남쪽에 있다. 생김새가 물을 담은 바리처럼 둥글고 우묵하므로 발연소’(일명 바리소’)라고 부른다. 소는 커다란 너럭바위의 한가운데가 우묵하게 패이여 이루어졌는데 직경은 긴 쪽이 11m 정도이고 짧은 쪽은 9m 정도이다. 물깊이는 2m 이상이다. 발연소의 웃쪽과 아래쪽에도 각각 소가 있어 상발연’(또는 웃소’), ‘하발연’(또는 아래소’)이라고 부른다. 세 개의 소는 폭포로 서로 련결되여 있다. 소 기슭의 너럭바위에는 봉래도라는 글이 새겨져있는데 양봉래(양사언)의 필적이라고 전해온다. 발연소의 서쪽 발연산 남쪽기슭에 발연사터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발연사는 절 이름은 발연소로는 못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같은 자료 발연사터에는 진표율사에 의한 발연사 창건연기 용신설화의 전승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발연동에 있는 옛 절터. 발연소의 서쪽 발연산 남쪽기슭에 있다. 발연사는 770년에 진표률사라는 중이 세웠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진표률사라는 중이 이 골짜기에 들어오자 발연소에 살던 룡왕이 절터를 잡아주었으므로 발연사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절터의 동쪽에 높이 약 4m의 삼각형바위가 있는데 거기에 발연이라는 글이 새겨져있으므로 발연암鉢淵巖이라고 부른다. 절터 서남쪽에 돌탑이 있다. 옛날 발연사부근에 제석불상을 새긴 큰 바위가 있어 재미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표률사의 어머니는 발연사에서 20여 리 떨어진 송림동 안새미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진표률사는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위하여 매일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마련하여 가져다 드리군 하였다. 그가 하도 어머니를 지극하게 모시는 데 감동된 부처는 이 바위에 구멍을 내고 하루에 한되씩 쌀이 흘러내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바위이름을 재미암在米巖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절터의 서남쪽에 옛 돌탑이 있고 서북쪽의 크지 않은 산등성이를 쥐산이라고 부른다.(밑줄-인용자)

 

이 자료에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준다. 발연사라는 절 이름이 역시 발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발연암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재미암으로도 불렸다. 이 자료에는 두 가지 설화가 요약되어 있다. 하나는 용신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쌀바위설화가 그것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논의한다. 전자에 대해서 지금으로서는 전체적인 설화 내용을 알 수 없어 아쉽지만, 행간 읽기로 어느 정도 보충이 가능하다. 진표율사가 발연사를 창건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특히 석기에서는 진표율사가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다시 개골산皆骨山[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발연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두 진표 전기에는 발연서 창건 연기 용신설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위의 북한 자료에서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는 용신설화는 금산사 미륵전의 그것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를 보여준다. 발연소에 살던 용왕은 직접 절터를 잡아주었다. 이 설화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용왕이라는 존재다. 금산사 미륵전 용신설화에서 등장하는 용신도 용왕이었다. 진표율사와 관련된 세간의 용신설화에서 등장하는 용신은 용녀, 용자, 심지어 개구리’(이 경우 개구리를 용신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같은 축생계열에, 그것도 물과 관련된 동물이라는 점에서 같은 계열로 논의한다)였다. 그런데 출가한 뒤에, 더구나 미륵의 육신을 나눠가진 위격에 올라선 진표율사와, 그를 상징하는 용신은 이미 용왕이다. 용왕이라는 존재는 상대적으로 진표율사의 위격을 반증하는 요소일 수 있다는 얘기다.

진표율사에게 발연사 자리를 잡아준 용왕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산사 미륵전 설화에 등장하는 용왕과 그 권속과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때 용왕의 의미를 선행연구에서 보여준 전통신앙 즉, 신교라고 본다면, 신교를 신앙하는 많은 주위의 민중들이 발연사 창건불사에 동참하였음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추측을 제외한다고 해도 진표율사와 용왕 사이에는 대결의식이 아예 없다. 앞에서 논자가 진표율사 관련 용신설화의 세계가 조화요, 상생이라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다.

그런데 이 용왕은 발연사 창건 이후의 행적까지 추측할 수 한다. 발연사 옆에 있는 비룡폭포飛龍瀑布를 주목한다. 문자 그대로라면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는 폭포다. 우리나라에 비룡폭포라는 곳이 한두 곳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용왕이 터를 잡아주었다는 발연사 인근에 있으므로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논자는 앞에서 미륵을 친견하고, 미륵으로부터 육신(손가락뼈)를 나누어 받은 진표율사는 곧 미륵과 일체가 된 불보살의 위격이라고 지적하였다. 불보살의 위격이란 주역건괘의 상으로 말한다면 구오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이롭다).”는 상이다. 주역대가 대산 김석진 옹은 이에 대해 구오는 하늘의 체즉 천체天體입니다. 하늘로 말하면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상제의 자리이고 나라로 말하면 인군의 자리로서, 공간적으로는 다스리는 자리이고 시간적으로는 우주가 변화하는 자리입니다. 주역은 바꿀 역즉 때가 바뀌는 것이고 하늘은 늘 운행 변화하는 것이죠. 하늘과의 하늘자리이자 군위[君位]이기 때문에, 작게는 인군이 동성상응하고 동기상구하며 중정지도中正之道로 개혁하는 것이고 크게는 천도운행天道運行의 선후천 교역을 이루는 것이 바로 구오입니다.”고 하였다. , 구오 용의 상은 우주를 주재하는 상제요, 나라로 말하면 왕의 자리다. 공간적으로는 다스리는 자리이고 시간적으로는 우주가 변화하는 자리란 무엇인가. 대산은 정지도中正之道로 개혁하는 것, 천도운행의 선후천 교역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다. 금산사 미륵전 창건 용신설화, 그리고 발연사의 그것에 등장하는 용왕은 선행연구의 관점에 따라서 신교, 그 머리가 되는 상제, 불교적으로 말하면 미륵불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문학이론 가운데 욕망의 삼각형Désir triangulaire’은 르네 지라르R. Girard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라는 책에서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의 욕망 체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 용어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이 이론에 진표율사와, 그와 관련된 용신설화의 주인공 용신을 적용하면, 이들은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두 주인공에게 공통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은 무엇일까? 논자는 단연코 미륵불이라고 단정한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과정에서 진표율사가 추구하는 목적도, 그리고 용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도 미륵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라르의 이론에 의하면 삼각형의 욕망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주체와 중개자 사이에 경쟁관계가 없는 경우를 외면적 간접화(médiation externe)라 하고 주체와 중개자 사이에 경쟁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를 내면적 간접화(médiation interne)라 한다. 이 두 가지 욕망 가운데 더욱 비극적인 것은 후자이다. 주체와 중개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기 때문에 주체와 중개자의 구분이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진표율사와 용신설화의 경우, 주체는 진표율사이고, 중개자는 용신이다. 논자는 둘 사이에 경쟁관계가 없는, 조화요 상생관계임을 누차 지적해 왔다. 이른바 외면적 간접화이다. 만약 선행연구에 따르면 이들 사이에 경쟁관계가 성립하는 이른바 내면적 간접화 현상이 일어나고, 그들은 더욱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미륵신앙의 중흥조 진표율사가 지향하는 대상이 미륵불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용신이다. 과연 용신이 추구하는 것이 미륵불일까? 논자는 대답한다. 그렇다! 바로 해명하겠지만 일반적인 용신도 그러할진대, 진표율사와 관련된 용신설화에 등장하는 용신은 말할 것도 없다. 앞에서 논자는 다양한 용의 어원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좀 더 보충하면 용의 우리 고유어는 미르인데, “미르는 물의 옛말 과 상통하는 말인 동시에 미리[]의 옛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말이다. 그것은 용의 등장이 반드시 어떤 미래를 예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용신의 우리 고유어 미르미리[]’의 옛말과도 밀접한 관련 있고, 용의 등장이 반드시 어떤 미래를 예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 논자의 주장은 우리의 주제를 탐구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불교에서 미리 예와 깊이 관련이 있는, 어떤 미래를 예시해 주는 존재로서 미륵불만큼 확실한 대상은 찾기 어렵다. 미륵은 석존 입멸 후 567천만 년을 지나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도하여 3회 설법(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으로써 석존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미래의 부처다. 용이 미륵을 상징한다는 견해는 학계 일각에서 누차 연구되어 왔다. 심지어 미르()가 곧 미륵이라는 견해까지 제시되었다. ‘미래불을 미륵불이라고 할 때, ‘미래불미륵불=미르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한 논자는 이 미리’, ‘미르미력彌力미륵彌勒으로 음이 전환되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 선행연구들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아직은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고 해도 설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자들에 의해 용신이 곧 미륵을 상징한다는 기표는 발연사 옆 비룡폭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폭포 옆 바위에 새겨져 있는 미륵불이라는 새김글이 그것이다. 언제 누구에 의해 새겨졌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비룡폭포 한 쪽면 바위에는 폭포 형상 혹은 용이 승천하는 이미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미륵불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새김글 자체로 보면 북한에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어떤 내막도 알 수 없으나 미륵불로 상징되는 용이 이 폭포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어떤 설화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글새김자에 의해 새겨졌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따라서 발연사 비룡폭포에서 승천한 용왕이 곧 진표율사에게 발연사 터를 잡아준 용왕이요, 따라서 이 용왕이 곧 미륵불을 상징한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2) 백제 미륵사 창건과 용왕 그리고 미륵불

이제 논자는 이 연구의 주제와 관련하여 보단 근원적인 문제 하나를 제기한다. 진표율사는 왜 미륵불 신앙자 내지 구도자가 되었을까? 진표의 전기류에 따르면 그를 미륵신앙으로 인도한 이는 스승 숭제법사다. 문제는 숭제법사가 미륵 신앙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승 숭제법사가 그(진표-인용자)에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배운 적이 있는데, 후에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의 현신에게 감응되어 오계를 받았다.”

 

숭제법사가 직접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짧은 기록에는 몇 가지 정보가 들어있다. 숭제법사는 당나라에 구법 유학한 엘리트 승려이며, 당나라에서 선도삼장이라는 이에게 배웠고, 후에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의 현신에게 계법을 받았다. 논자는 다른 공간에서 선도삼장이 아마타불의 화신으로 불리는 고승이며, 중국 정토종의 대성자임을 논증하였다. 숭제법사는 귀국하여 줄곧 금산사에 주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혹은 충남 예산의 수덕사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599(법왕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한다. 또한 전북 순창 구암사龜巖寺623(무왕 24)에 숭제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기록에 나오는 숭제법사가 진표율사의 스승 숭제법사와 동일한 인물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두 설에서 시대적으로는 백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숭제법사가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의 현신에게 계법을 받았다는 진술도 검토가 필요하다. 중국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성지다. 따라서 이 문장에 따르면 그는 문수신앙인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토신앙인 혹은 문수신앙인이었을 모르는 숭제법사가 그의 제자 진표율사에게는 지장, 미륵을 친견하라고, 특히 미륵신앙의 길을 가르쳤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진표율사가 스승의 가르침과 별도로 미륵신앙인의 길을 선택하여 갔던 것일까? 어느 길도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진표율사는 출생 이후부터 줄곧 주변 환경이 미륵신앙의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금산사와 지척의 거리에 있는 익산 미륵사다.

앞에서 우리는 삼국시대 각 나라의 건국신화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서동설화를 잠시 논의하였다. 서동은 과부인 어머니와 서울 남쪽 못에 살고 있는 용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용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서동설화에는 용의 아들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부부가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후에 서동은 백제 제30대 무왕으로 등극하였고, 선화공주는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설화는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검토가 필요하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모습을 본따 전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국사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이 설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미륵삼존, 용화수(용화산), 미륵(용화)삼회, 탑 등 미륵경전에서나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용신과 미륵경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검토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이 설화는 사찰 창건 연기 용신설화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미륵경전 내용과 신교의 용신설화가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는 구조다. 구조도 그렇지만 이 설화의 내용에도 매우 중층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무왕 부부부가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는 장면이다. 무왕 부부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가 사자사였다는 것부터 의미심장하다. 사자좌獅子座는 부처가 앉는 상좌牀座를 가리킨다. 부처는 인간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므로, 부처가 설법할 때 앉는 높고 큰 상을 사자좌라 한다. 따라서 사자좌는 부처의 위치부처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불린다. 부처도 사자처럼 우뚝 높다고 해서 사자좌라고 한다. 용화산은 당래불인 미륵이 하생하여 성도를 이루는 용화수龍華樹를 상징한다. 사찰에서 미륵불을 모시는 전각을 미륵전혹은 용화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용화산은 미륵불을 모시는 용화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용화산 밑에는 큰 못이 있다. 앞에서 우리는 각종 용신설화의 공통점은 못, , , 바다 등 물과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미륵사창건 연기 설화에서도 이 등장하였다. 그것도 큰 못이다. 이 설화가 용신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다. 용화산 밑의 큰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 이 문장은 어색하다. 못에서 어떻게 미륵삼존불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논의한 설화내용에 따르면 용이 나타났다는 표현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용이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왕이 용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용의 아들이 가는데 용이 나타났다고 한다면, 아버지가 나타났다고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미륵삼존불 자체가 성립될 수 있다. 아버지가 셋일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미륵삼존은 중존이 미륵불, 왼쪽이 법화림 보살法花林菩薩, 오른쪽이 대묘상보살大妙相菩薩로 구성된다. 삼존불은 본존불과 좌우에서 시립하는 보처불보살을 합한 명칭이다. 우리나라의 법당에는 대개 주불이 좌우보처를 거느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러한 삼존불의 관계는 본존불의 권능을 협시보살이 대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물론 미륵삼존불은 봉안되는 성소는 용화전이다. 결론적으로 이 설화는 용의 아들 무왕이 미륵불을 찾아가는 길에 미륵불을 상징하는 용을 만났고, 그곳에 절을 지어 미륵사라고 했다는 미륵사창건연기용신설화로 해석된다. 이 미륵사는 백제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대가람이 되었다. 이 미륵신앙의 전당은 백제 멸망 이후의 망국민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진표율사도 그 미륵신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메시아적 성격이 강한 미륵신앙은 동북아 불교에서 시절이 혼란스러울수록 큰 역할을 해왔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나라가 멸망당한 후 백제 유민에게도 미륵신앙은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륵사와 지근거리에서 출생하고 성장하고, 또 출가한 진표율사가 미륵신앙이라는 영향권에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문제는 이 설화의 시니피앙signifiant(기표)에서 용신이라는 표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용신은 시니피에signifié(기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 기표에 드러나 있는 것은 미륵불이다. 이는 일반적인 문학적 구조와는 다소 이질적이다. 그것은 진표율사와 관련된 이전의 금산사 미륵전, 발연사 사찰창건연기용신설화와는 정반대의 구조이다. 두 설화에서는 용신이 기표에 드러나 있었다. 반면 미륵사 창건연기설화에서는 앞의 두 설화에서 기의역할을 했던 미륵불이 기표에 드러나 있다. 이런 구조는 매우 의도적인 기법 내지 장치로 보인다. 진표율사와 관련된 용신설화에서 용신이 곧 미륵불이며, 미륵불이 곧 용신이었다는, 두 설화가 보여주는 자아와 세계의 관계가 곧 조화요, 상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드는 근거다.

 

. 진표율사와 수중세계 교화

 

1. 진표율사의 용궁 수계授戒

 

주역건괘 구오 비룡재천의 위격에 올라있는 진표율사는 이미 불보살로서 권능을 행사하였다.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진표율사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저절로 부처의 권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화엄경에서 부처는 뒤에서 광명만을 비추어 주고, 그 광명으로부터 가피를 입은 각종 보살이 등장하여 설법을 하는 구조에 비유된다. 이런 해석에 이르게 하는 근거로서 석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떠나 북상 길에 올라 충청도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때 소가 진표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달구지에 탄 사람이 내려와,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영문을 물었다. 진표율사가 나는 금산사의 중 진표라고 하오. 나는 일찍이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眞笙을 받고 길이 수도할 절을 지을만한 곳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이 소들은 겉은 어리석은 듯하나 속은 현명합니다. 내가 계법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다 듣고 말했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 그는 즉시 낫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다. 율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진표율사를 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물론 축생인 소까지도 저절로 감회되었다. 진표율사는 그런 경지에 이른 고승이었다. 소뿐만이 아니다. 진표가 변산에서 하산할 때는 온갖 날짐승 길짐승이 달려와 그의 걸음 앞에 엎드렸다고 했다. 동물뿐만이 아니다. 진표를 보는 것만으로 용왕과 산신과 같은 제천용신諸天龍神이 감화되어 제 발로 찾아와 호위하고, 심지어 풀과 나무와 같은 산천초목조차도 감회되어 진표를 위해 밑으로 드리워 길을 덮었다.

 

(진표율사의-인용자) 풍교風敎의 법화法化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강릉)에 이르니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속으로 맞아들이므로 진표가 불법을 강론하고 계법을 주었다.

 

진표전간에 나오는 이 기록은 석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진표율사가 미륵의 계법을 널리 펴기 위해 강원도 강릉 지역으로 갔을 때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진표는 그 다리를 밟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설법하고 계법을 주었다. 진표율사가 가서 미륵의 계법을 주었다는 바닷속은 어디일까. 논자는 용궁의 세계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 설화는 용신설화이다.

불전문학에서 이와 같은 용궁설화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승불교 최고의 경전으로 평가받는 화엄경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도 일설에 의하면, 불멸 후 700년쯤에 나타나 대승사상을 크게 고취한 용수龍樹(150? ~ 250?) 보살이 용궁 수정방水晶房에서 3년 동안 정진하던 중에 용궁에 들어가서 열람하고 외워 온 경전이라 하고, 또한 송고승전권제4 신라국 황룡사사문 원효전에 따르면 신라에서 성립된 금강삼매경도 용궁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정도다.

진표율사가 동해의 용궁에 가서 어별들에게 불법을 강론하고 계법을 주었다는 설화에서 논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진표율사를 통해 드러나는 불보살의 가피력과 위신력이다. 그 불보살은 물론 미륵불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설화는 진표율사, 나아가 미륵불의 교화력과 신통력을 용신설화를 통해 드러내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설화에서 용신은 미륵창건용신설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뒤편으로 숨어 있다. 대신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용왕이 다스리는 백성, 문학적 장치를 벗겨내면 신라 당시의 민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용신(설화)를 통해 진표율사(미륵불)의 가피력과 위신력을 보여주는 구조이다. , 제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에 따르면 주체는 진표율사, 중재자는 용신, 그리고 대상은 미륵불이 된다. 특기할 것이 있다면, 미륵불이 진표율사 뒤에 숨어있다는 점이다.

 

2. 진표율사의 보살행과 용신의 보은

 

진표율사는 과거의 백제지역, 고구려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명성은 원근지역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마침내 서울까지 알려졌다. 경덕왕이 진표율사에 대한 명성을 듣고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곡식 77천 석을 내렸다. 왕후와 외척들도 모두 계를 받고, 황금과 비단 등을 시주하였다. 진표는 시주를 받아서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이를 보는 학계의 논의는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하나는 비교적 정치적인 해석이다. 삼국통일 이후 대부분의 신라왕들은 왕권강화에 힘썼다. 경덕왕은 더욱 적극적이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진표율사를 후원하였다는 접근이다. 백제의 고토였던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라변방의 백제유민을 포용하려는 경덕왕의 전제왕권 강화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접근은 종교적인 해석이다. 진표율사의 전기에 대한 문면을 놓고 보면 자라와 물고기를 감응시킨 진표율사의 감화력으로 경덕왕이 수계를 받았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덕왕이 시주한 물품들은 진표가 건설하고자 한 사원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권위를 신장시키기에 적극 활용되었을 것이다. 서철원은 진표율사의 전기에 대한 기록이 동물까지 감화시키는 그의 권능이 국왕의 정치적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서 문자화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논자는 이 기록을 진표율사 관련 용신설화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이 용신설화는 이어지는 용신설화와 함께 진표율사의 보살행과 그 성과를 보여주는 절정이다.

 

율사는 그곳(발연사-인용자)에서 7년 동안 살았다. 이때 명주溟州(강릉지역-인용자주)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렸다. 율사가 그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켜서 삼보에 공경을 다하여 예배했다. 얼마 후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서 나왔다.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 양식을 장만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기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논의할 수 있다. 금강산 발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그곳에서 7년 동안 주석하였다는 사실적 기록이다. 이때 강릉 지역에서 흉년이 들었고 사람들은 모두 굶주렸다. 진표율사가 그들을 위해 계법을 설했다. 이때 설한 계법은 물론 미륵 계법이다. 흉년에 허덕였던 사람들은 감동하였고 공경을 다해 삼보에 예배했다. 여기까지는 설화형식이 아닌 역사적 기록이다. 얼마 후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서 나왔다. 굶주렸던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 양식을 장만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기록에서 논자의 일차적 관심 대상은 이다. 짧은 기록이지만 일종의 용신설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설화는 진표율사의 보살행인 에 대한 용신의 보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에서 누구누구는 드러나지 않았다. 행간을 보면 전자의 누구는 진표율사이고, 후자의 누구는 용신 즉, 용왕이다. 이 설화에서도 두 주인공들은 마치 화엄경에서 광명으로 설법하는 보살들에게 가피력을 주는 법신 비로자나부처처럼 문면 뒤에 숨어 있다. 지적했다시피 이 설화는 진표율사 관련 용신설화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불교로 대표하는 진표율사, 전통신앙(신교)로 대표되는 용신의 구분 자체가 망상이다. 조화라는, 상생이라는 관념으로 치장된 언어 자체가 분별망상이다. 진표율사는 진표율사 그대로, 용신은 용신 그대로 부처(미륵불)이다.

 

. 미륵경전과 용신 그리고 진표율사

 

용신은 근본불교 때부터 이미 호법룡으로 등장하였다. 용은 범어로 나가Naga라고 한다. 나가는 으로 한역되었으나 본래는 중국의 용과 다르다. 나가는 뱀, 특히 코브라를 말한다. 뱀신 숭배는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리아인은 고대부터 행하여진 뱀신 숭배를 점차로 수용해서 반신半神의 하나로 보게 되었다. 힌두교 문헌에서 나가, 즉 사족蛇族은 파탈라Pātāla라고 하는 지저계地底界에 산다. 와수키Vāsuki, 기타 용왕이 그 세계를 통치하고 있다. 파탈라의 최하층에는 원초의 뱀 아나타Ananta가 살며, 머리로 전 세계의 무게를 바치고 있다. 나가는 불전에서도 자주 언급되며, 천용팔부 중의 하나다. 팔부중에 속하는 마후라가는 큰 뱀을 가리킨다.

석가모니 부처는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직후 나무 아래 앉아 7일 밤이 지나도록 그대로 앉아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 7일이 지난 뒤에는 당신이 깨달은 법12인연 등을 관찰했다. 7일이 지난 뒤에는 보리수 아래를 떠나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7일 동안 해탈행을 누렸다. 그 후 7일이 지나자 삼매에서 일어났다. 이때 가라迦羅 용왕이 나타나 부처에게 예를 올리고, 잠시라도 좋으니 자기의 궁전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한다. 왜냐하면 과거의 구류손拘留孫 부처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부처가섭迦葉 부처도 그의 용궁에 머물렀던 적이 있고, 석가모니 부처가 그의 용궁에 머물러준다면 네 분의 부처가 그의 궁전을 받는 공덕을 갖추었다고 이름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가라용왕의 궁전을 받았다. 그리고 용궁에 들어가 가부좌를 한 채 7일이 지나도록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 7일이 지난 뒤에 삼매로부터 일어난 부처는 가라용왕에게 삼귀의三歸依5계를 주었다. 부처는 이로써 용왕이 세간 가운데서 축생으로 최초에 우바새優婆塞(남자신도) 이름을 얻었다고 선언하였다.

이 설화에 이어 다른 용신설화가 전한다. 부처가 가라용왕의 궁전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목진린타目眞隣陀 용왕이 나타나 부처에게 궁전을 보시하였다. 부처는 그의 궁전을 받고, 자리를 옮겨 목진린타 용궁에서 깊은 삼매에 들었다.

 

7일 동안 허공에는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크게 일었는데, 7일 동안 잠시도 비가 멈추지 않더니 마침내 추워지고 얼어들었다. 그러자 목진린타 용왕은 궁전에서 나와 그 큰 몸을 일곱 겹으로 둘러 부처님을 옹호해 덮고, 또 일곱 개의 머리를 세존 위에 드리워 큰 일산을 만들면서 의젓하게 머물고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세존의 몸에 추위와 습기와 먼지며 모기, 등에 따위의 어떤 벌레도 부딪치지 못하게 하리라.’

 

7일이 지난 뒤에 삼매에서 일어난 부처는 목진린타 용왕을 찬탄하고 삼귀의와 5계를 주었다. 부처가 성도 직후 최초의 재가제자로 가리용왕을, 이어서 목진린타 용왕을 삼았다는 이 용신설화는 후대의 용신설화의 원형화소가 되었다. 또한 이 용신설화는 이후 불교와 용신과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불전에 호법룡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독룡도 나타난다. 용신들이 불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승불교 경전이다. 많은 대승경전에서 청법대중 가운데 하나로 천룡팔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용신이 등장해 부처의 법을 듣는다. 법화경의 경우에도 대중 12천 인의 성문중, 2천 인의 유학有學 무학無學, 8만의 보살마하살 등과 함께 신중神衆 그리고 천룡팔부, 그 중에서도 용왕들이 등장한다. 그것도 여덟 용왕과 그 권속이 등장하는데 난타용왕難陀龍王발난타跋難陀용왕사가라娑伽羅용왕화수길和修吉용왕덕차가德叉迦용왕아나파달다阿那婆達多용왕마나사摩那斯용왕우발라優鉢羅용왕 등이 각각 백천의 권속들과 함께 참석하여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다.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용신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미륵경전에 등장하는 용신들은 그 존재의 의미가 각별하다. 미륵경전에 등장하는 용신들은 단순히 청법대중이 아니라 큰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낱낱 담의 높이가 62유순이고 두께가 14유순인데, 5백억의 용왕이 이 담을 둘러싸고 그 낱낱 용왕이 5백억의 7보 줄 나무[行樹]를 비처럼 내려 그 담 위를 장엄함으로써 저절로 바람이 불어 이 나무를 흔들자, 나무끼리 서로 부딪쳐 괴로움과 공함과 무상無常과 나 없음[無我]과 모든 바라밀을 연설하리라.

 

석존이 대중들에게 미륵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수기를 설명한 뒤에 제자 아일다阿逸多12년 뒤에 목숨이 끝나서는 반드시 도솔천에 천상에 왕생하게 되는데, 그때 도솔천을 용왕이 장엄하는 역할을 맡게 될 일을 얘기한 것이다.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5백억의 용왕이 도솔천의 담을 둘러싸고 낱낱 용왕이 5백억의 7보 줄 나무를 비처럼 내려 그 담 위를 장엄함으로써 저절로 바람이 불어 나무를 흔드는데, 나무끼리 서로 부딪쳐 대승불법인 괴로움과 공함과 무상과 무아와 모든 바라밀을 연설한다는 내용이다.

 

그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먼 장래 이 나라 경계에 시두翅頭라는 성곽城郭이 있어 그 동서가 12유순由旬이고, 남북이 7유순인 데다가 토지가 비옥하고 인민이 치성하여 거리마다 줄을 이룰 것이며, 그때 성중에 수광水光이란 용왕이 있어서 밤에는 향 비[香澤]를 퍼붓고 낮에는 맑게 개일 것이다.

 

미륵삼부경전 가운데 미륵하생경일부다. 도솔천에서 천상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 미륵이 하생하는 지상은 시두성翅頭城이다. 그때 수광이란 용왕이 있어 성안을 장엄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밤에는 향기로운 비를 퍼붓고 낮에는 맑게 개일 것이라고 하였다.

 

다라시기多羅尸棄라는 대용왕이 있는데 복덕과 위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성 근처의 연못에 용왕의 궁전이 있는데, 7보의 누각이 밖으로 나타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밤에는 항상 신통력으로 사물을 사람으로 변형시켜 길상吉祥의 병에 고운 빛깔의 향수를 가득 채워서 먼지와 흙을 적시니, 그 땅이 윤택한 것이 마치 기름을 발라 놓은 것과 같아 행인이 왕래해도 흙먼지가 일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상 사람들은 복덕이 극치에 달하느니라.

미륵성불경에서 미륵이 하생하는 지상 역시 시두말翅頭末이라고 하는 성이다. 그곳에 다라시기 대용왕이 있는데 복덕과 위력을 두루 갖추었다. 성 근처의 연못에 용궁이 있다. 용왕의 역할은 밤에 신통력으로 사물을 사람으로 변형시켜 병에 고운 빛깔의 향수를 가득 채워서 먼지와 흙을 적시는 일이다. 향수를 머금은 땅은 윤택한 것이 마치 기름을 발라 놓은 것과 같아 행인이 왕래해도 흙먼지가 일지 않는다. 여기서도 용왕의 역할은 미륵불이 하생하기 직전의 시두말성을 향수로 장엄하는 일이다. 마침내 84천의 대신들과 모든 비구들이 미륵불과 전륜성왕인 양거왕을 둘러싸고 시두말성에 들어오는데, 이때 다라시기 용왕을 비롯한 다른 용왕들도 무수한 천룡팔부 중 일부가 되어 함께 입성한다.

 

용왕은 여러 가지 기악을 연주하며 입으로는 꽃을 토해 내고 털구멍에서는 꽃비를 뿜어 부처님께 공양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정법의 바퀴를 굴리셨다.

 

미륵경전에 등장하는 용신은 미륵불이 가는 곳마다 사전에, 혹은 미륵불과 함께 나타나서 성소를 장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본고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용신이 항상 미륵불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진표율사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논의를 전개한 진표율사와 용신과의 관계, 그리고 미륵경전에 등장하는 용신들의 역할에 유의할 때, 진표율사가 변산에서 친견했던 미륵불이 그에게 수기했던 내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복되지만, 그때 미륵은 당신의 육신(손가락뼈)로 상징되는 간자를 전해주면서 말했다.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를 알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 수기는 일차적으로 미륵상생신앙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는. 그러나 미륵상생신앙은 미륵하생신앙으로 이어진다는 면에서 크게 미륵신앙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 미륵상생신앙이 미륵보살이 천상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려는 신앙이라면 하생신앙은 미륵보살이 석가 입멸 후 567천만 년 뒤에 도솔천으로부터 인간세계로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서 성도한 후 3회의 설법으로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중생을 제도할 때 함께 참여하기를 기원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미륵보살이 하생할 때, 그동안 미륵보살로부터 설법을 들었던 도솔천중들도 함께 하생하게 될 것이다. 물론 도솔천의 대국왕이 된 진표율사도 하생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주역건괘 구오는 하늘로 말하면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상제의 자리이고 나라로 말하면 인군의 자리이며, 또한 천도운행의 선후천 교역을 이루는 자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상제는 곧 미륵불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인군은 무엇인가? 진표율사의 전기로 한정한다면, 그는 도솔천 대국왕이다. 정확하게는 진표율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륵불이 곧 진표율사일 수는 없다. 미륵불이 체라면 대국왕은 용의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도솔천 대국왕 진표율사가 미륵보살이 하생할 때 함께 내려온다면, 그때 그는 무엇으로 올 것인가? 미륵경전에서 도솔천 대국왕과 같은 위격이라면 미륵이 하생하는 나라인 시두성을 다스리는 전륜성왕 양거왕에 해당된다. 적어도 수기 내용과 미륵경전의 관련 내용을 재구성한다면 도솔천 대국왕 진표율사는 미륵이 하생할 시기를 맞아 지상에 강세하여 정법으로 통치하면서 미륵의 하생을 준비하는 전륜성왕이 되어야 한다. 전륜성왕은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이다. 그리고 미륵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한 뒤에 전륜왕 진표율사는 미륵불 회상에 출가하게 된다.

 

그때에 84천의 대신들이 양거왕을 공경하여 둘러쌌다. 또한 사천왕이 전륜왕을 화림원花林園 용화수 아래로 보내니, 미륵부처님 앞에 나아가 출가를 구하며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데, 아직 머리를 들기도 전에 수염과 머리카락이 저절로 떨어지고 가사가 입혀지니, 몸은 즉시 사문의 모습이 된다.

 

미륵경전은 이 장면을 장엄하게 묘사하였다. 이때 용왕은 여러 가지 기악을 연주하며 입으로는 꽃을 토해 내고 털구멍에서는 꽃비를 뿜어 미륵불에게 공양한다. 미륵불은 이 자리에서 정법[正法輪]을 굴려 일찍이 석존이 교화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

 

. 나가기

 

본고에서는 진표율사와 관련된 용신설화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논의하였다. 첫째는 진표율사의 출생지에 전승되는 용신설화다. 여기서는 두 가지 측면, 즉 김제 벽골제의 각종 용신설화와 함께 진표를 주인공으로 하는 용녀 설화를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진표율사의 전기에 전하는 개구리 사건도 함께 검토하였다. 이 용신 설화들은 주역건괘 초구의 잠룡의 단계, 즉 진표율사의 출가 동기에 부응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진표율사의 사찰창건연기 용신설화를 검토하였다. 진표율사가 변산 수행처에서 하산하였을 때 용왕이 나타나 옥가사를 바치고 그 8만 권속들이 금산사 미륵전을 세우는 불사를 도왔다는 금산사 미륵전 창건 연기 용신설화, 진표율사가 금강산에 이르렀을 때 용왕이 터를 잡아 주었다는 발연사 창건 연기 용신설화, 그리고 발연사 옆 비룡폭포에서 미륵불에 대한 신앙 흔적이 그것이다. 두 용신설화는 선행연구에서 검토되었던 불교와 신교의 대결적 관점이 아닌 조화, 상생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나아가 두 용신설화 속 자아와 세계를 미륵사 용신설화와 함께 읽었을 때, 진표율사 관련 용신설화 속 용신이 다름 아닌 미륵불이 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또한 두 용신설화에서 용신은 주역건괘 구오의 비룡재천 이견대인의 상을 보여주는데, 이때 구오 용신은 우주를 주재하는 상제요, 나라로 말하면 왕의 자리가 되고, 그 상제는 다름 아닌 미륵불이다. 아울러 구오 용신은 공간적으로는 다스리는 자리이고 시간적으로는 우주가 변화하는 자리는 중정지도로 개혁하는 것, 천도운행의 선후천 교역을 이루는 자리라는 점도 검토하였다.

세 번째, 진표율사의 수중세계 교화 용신설화는 그의 미륵교법 홍포에 대한 절정으로 이해하였다. 진표의 감화력, 가피력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나아가 수중세계의 생물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는 바닷속 용궁에 들어가 그 세계 동물들에게 계를 줄 정도의 권능과 감화력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금산사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그가 금강산 발연사에서 참회계법을 설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회되었고,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바닷가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스스로 죽어 나왔다. 그것은 용신이 진표율사의 보살행에 대해 보은하는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용신설화가 아니라 진표율사야말로 살아있는 불보살임을 보여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로 불교경전, 특히 미륵경전에서 용신의 활동과 진표율사와의 관계를 검토하였다. 미륵경전에 등장하는 많은 용신들의 역할은 미륵불이 가는 곳마다 미리 나타나 그 성소들을 청정하게 장엄하는 일이었다. 당래불 미륵부처가 지상에 탄강하는 그날도 마찬가지다. 이와 함께 진표율사가 변산에서 미륵을 친견하였을 때, 대국왕의 몸을 받고, 뒤에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는 수기 내용의 의미를 고찰하였다. 그리고 진표율사의 행적에서 미륵불을 상징하는 용신(설화)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던 전기 기록을 재구성한 결과 진표율사는 도솔천 대국왕으로 태어나게 되며, 미륵불이 하생할 때 무렵 전륜성왕으로서 지상을 정법으로 통치하게 되며, 미륵불 회상에 출가하게 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한국 미륵신앙의 중흥조, 참회계법의 대성자, 지장신앙의 초전 등 찬란한 업적을 남긴 진표율사는 미륵신앙의 개산조로서 후세에 미친 영향을 컸다. 그의 제자들은 널리 퍼져 각 산문의 개산조가 되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설화는 설화이고, 설화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설화에는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진실의 세계가 상징화되어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연구자가 설화 속에서 알토란같은 진실을, 의미를 캐내는 일이다. 설화 그 자체를 현실세계의 그것으로 읽으려고 하면 황당무계하고 허무맹랑한 사건으로 읽힐 터다. 특히 진표율사의 전기류에 대해 실제로 그런 주장을 펴는 연구자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잘 차려진 음식을 맛도 보지 않고 평가부터 하고 외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진표율사와 용신설화에 대한 연구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미흡한 부분은 후학들의 연구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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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毘盧遮那經供養次第法疏

彌勒大成佛經

彌勒上生經

彌勒下生經

法華經

佛本行集經

佛說彌勒大成佛經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증산도 도전

擇里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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