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최치원의 선도 사상

김현일(상생문화연구소)

2023.08.23 | 조회 3793

2022년 증산도 후천선문화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최치원의 선도 사상

 

 

국문초록

태모 고수부님은 증산도 교단을 처음 세우신 분이다. 상제님이 어천 한 2년 뒤인 1911년의 일이었다. 성도들이 태모님에게 교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지 여쭈었다. 고수부님은 천하를 통일하는 도인데 아직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진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고 하였다. 선도라는 것은 신선을 추구하는 길이 아닌가? 또 태모님은 내가 하는 일은 다 신선이 하는 일이니 우리 도는 선도니라고도 하면서 너희들은 앞으로 신선을 직접 볼 것이요, 잘 닦으면 너희가 모두 신선이 되느니라.”고 증산도가 신선되는 것을 추구하는 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신선이란 어떤 존재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닦아 신과 같은 존재가 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옛 한국에는 이러한 신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의 도교도 이러한 한국의 신선문화에서 영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기록된 ?태백일사?에 의하면 중국 도교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황제 헌원에게 도를 전해준 사람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이었다. 자부 선생은 헌원에게 ?삼황내문경?이라는 책을 전해주어 헌원으로 하여금 마음을 닦아 의로운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신선 사상은 신라의 화랑도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도 그 명맥이 살아 있었지만 고려에 들어서는 크게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 와서는 조선 단학파로 이어져 많은 선인들을 배출하였다.

고운 최치원(857-?)은 이러한 한국의 선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도 유명한데 고려 이전까지 가장 많은 글을 남겨놓은 사람이다. 중국에서 쓴 글들로 이루어진 ?桂苑筆耕?, 신라에 돌아와 왕명으로 편찬한 네 선사들의 전기를 기록한 ?四山碑銘?, 그리고 기타 다양한 여러 글들을 모은 ?孤雲文集?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학자이자 관료, 정치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명성은 중국 사서인 ?신당서? 「藝文志에 그의 저서가 소개되어 있을 정도이다.

학자로서의 고운은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니 유교경전을 통달했던 것은 물론이고 불교에 대해서도 무척 해박하였는데 ?四山碑銘?을 비롯하여 그가 쓴 여러 고승들의 전기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의 도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을 위해 쓴 여러 재사齋詞들이 남아 있다. 고변은 도교를 무척 좋아하여 주변에 도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가 몰락한 것도 도교에 탐닉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16년을 살다가 28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에 온 후 우리나라에도 도교와 비슷한 사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옛적부터 있었고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면서 유불선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仙史?라는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풍류의 원천에 대한 서술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선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풍류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풍류가 백성을 교화하는 도로서 충효와 겸손, 선행을 가르쳤던 것은 분명하니 풍류가 결코 현실도피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하겠다. 신라가 풍류를 화랑도의 조직이념으로 삼은 것은 풍류의 그러한 현세적 성격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것과는 달리 한국의 선도가 중국 도교에서 연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7세기 초 한무외라는 사람이 지은 ?해동전도록?이 그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데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그대로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신라 말의 김가기, 최승우, 그리고 승 자혜가 중국도교 8대선인 가운데 으뜸가는 인물이었던 종리권으로부터 도를 배웠으며 그 가운데 최승우는 그 도를 최치원에게 전했고 이 도는 조선 중기의 한무외, 남궁두 등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 자신은 중국의 도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이러한 도의 전수에 대한 언급은 최치원의 저술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해동전도록?의 전반적인 서술이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보기는 힘든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책은 후대의 조선 단학파들이 자신들의 연원을 중국 전진교의 시조와 연관을 짓기 위해 만든 문헌으로 보인다.

?해동전도록?과 비슷한 시기인 조선 중기에 편찬된 도가서 ?청학집?에는 그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선도는 환인으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환웅과 단군을 거쳐 후대에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선도는 후일 여러 파로 갈라졌는데 이러한 선파의 하나가 물계자勿稽子 파였다. 그는 3세기 초의 인물로 포상팔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전공을 인정받지 못해 불만을 가졌던지 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청학집?에 의하면 진평왕 때의 선인인 대세와 구칠, 그리고 후대의 불교승려 도선과 원효 모두 물계자의 유파였다고 한다. 그리고 최치원 역시 이 유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조선의 선도가 한국 고유의 사상이었다는 것은 고려 시대의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고려 중기의 시인 이규보는 우리나라의 선풍仙風은 중국의 주나라나 한나라, 그리고 가까이는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것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귀국해서는 신라 조정의 명을 받들어 많은 문한을 작성하는 일을 하였다. 894(진성왕 8)에는 진성여왕에게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10조의 개혁안을 올렸지만 정적들의 견제로 실현되지 못하여 그는 지방 태수직으로 밀려났다. 여러 군의 태수를 역임하던 그는 수년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가솔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책과 자연을 벗하고 살았는데 민간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그곳에서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고운은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을 하였을 텐데 어떠한 수련을 하였을까? 도교문헌을 연구한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에 의하면 최치원은 중국에서 수련법을 배워왔으나 귀국해서는 잊어버려 그의 외삼촌인 현준으로부터 새로운 수련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 수련법을 가야보인법이라 하였는데 정확히 어떠한 수련법인지는 모르나 그 이름으로 짐작하건대 가야 시대부터 내려오던 고유한 수련법이 아닌가 싶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의 유교와 불교, 도교를 배웠지만 신라에 돌아와서는 우리고유의 선도를 접하고 그 수련법을 배웠던 것이다. 뜻과는 달리 흘러가는 신라의 정치에 관여하기를 포기하고 그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 같은 삶을 살았다. 당시 신라는 중앙의 권력이 붕괴되고 곳곳에서 난적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상태였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그는 전국의 명승지를 떠돌며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보인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 그의 행각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사료

 

1.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46권 열전

최치원은 자가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서울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의 기록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의 집안 내력은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어려서부터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어 배편으로 당에 들어가 유학하고자 할 때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노력하여라!”

 

치원은 당에 도착하여 스승을 좇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건부乾符 원년 갑오(서기 874)에 예부시랑 배찬裴瓚 아래에서 단번에 급제하여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고, 그 치적의 평가에 따라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이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게 되었는데, 치원을 불러 종사관으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표문表文, 장계狀啓, 서한書翰, 계사啓辭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28세가 되자 귀국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당 희종僖宗이 그의 뜻을 알고 광계光啓 원년(서기 885)에 그에게 조서를 가지고 신라를 예방하게 하였다. 본국에 머물며 시독侍讀에 겸하여 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이 되었다.

치원은 중국으로 유학한 이래 얻은 바가 많다고 생각하여 돌아온 뒤에는 자기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이러한 생각이 용납되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 대산군大山郡 태수가 되었다.

당 소종昭宗 경복景福 2(서기 893)에 납정절사병부시랑(納旌節使兵部侍郞) 김처회가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 국내의 일을 당에 보고하는 사신)로 삼아 보냈다. 이때 치원은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그즈음 당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해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치원은 당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그의 문집에는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올리는 편지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마한馬韓, 변한卞韓, 진한辰韓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 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 , , 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입니다.(중략)”

 

여기에서 말한 태사시중의 성명은 또한 알 수 없다.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에도 모두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처신하기가 어렵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유유자적 노닐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산림이나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을 베개 삼아 읽고 풍월을 읊조렸다.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경남 창원)의 별장과 같은 곳이 다 그가 노닐었던 곳이다.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定玄 대사와 도우道友를 맺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노년을 마쳤다.

처음 서쪽으로 가서 유학할 때 강동江東 시인 나은羅隱과 서로 알게 되었다. 은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잘난 체하여 좀처럼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노래와 시 다섯 묶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같은 해에 급제한 고운顧雲과도 잘 사귀었는데, 치원이 돌아오려 할 때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 (중략)

신당서? 「예문지에는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주에는 최치원은 고려인으로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이와 같이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또한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처음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일으키려 할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인물이므로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임을 알았다. 이런 까닭으로 태조에게 글을 보내 문안하였는데, 그 글에 계림雞林은 누른 잎이오, 곡령鵠嶺은 푸른 솔이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개국 초기에 조정에 와서 높은 벼슬에 이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顯宗이 왕위에 있을 때, 치원이 은밀히 태조의 왕업을 도왔으니 공로를 잊을 수 없다하여 교서를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했고, 14년 태평太平 2년 임술壬戌 5월에는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2. 신선이 된 최치원

 

1) 조여적, ?청학집? (17세기 전반)

최치원은 문장이 정밀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탁월하였다.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28세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중 정현, 현준과 도우가 되었다. 그가 지나간 곳으로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의 영산, 함주의 청향산, 지리산의 쌍계인 듯한데, 이런 곳들은 모두 명승지이다. 만년에는 가야산에 들어가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은 곧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의 유파이다.

대세와 구칠 : ?삼국사기? 진평왕조. 신선이 되고자 하여 중국으로 갔다.

 

2) 홍만종, ?해동이적? (1666)

최치원의 자는 고운으로 신라 사람이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열여덟 살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황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병마도통사 고변이 최치원을 불러 종사관 자리를 맡기니, 한동안 모든 격문과 장첩이 공의 손에서 나왔다.

스물여덟 살에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머물러 시독, 병부시랑, 서서감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물러나 태산 및 부성의 태수를 지냈다. 서쪽의 큰 나라 당으로 유학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어지러운 세상에 때를 만나지 못함을 상심하였다. 하릴없이 산수간을 방랑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일찌감치 집을 나서 숲 속에 신발을 남겨둔 채 간곳없이 사라졌으니, 신선이 되어 날아간 것이다. 절의 승려들은 이날을 공의 기일로 여겨 제사 지낸다.

공은 구름 같은 수염에 옥 같은 뺨을 지녔는데, 늘 흰 구름이 공의 머리 위에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지금도 독서당에 남아 있다. 독서당에서 마을 입구 무릉루까지는 약 10리쯤 된다. 무릉루 주변은 붉은 절벽 푸른 산 마루에 소나무와 회나무가 우거졌는데, 바람과 물이 세차게 부딪쳐 절로 종소리와 경쇠 소리가 울린다. 공은 이곳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시냇가 바위에 새겨놓았다.

 

바위 사이로 우르르 콸콸 온 산을 포효하니

지척의 사람 말도 못 알아듣겠네.

이러쿵저러쿵 시비 따지는 소리 들릴까 봐서

일부러 물소리로 산을 둘렀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 바위를 가리켜 최공이 시를 쓴 돌이라고 말한다.

임억령이 쌍계사를 읊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최치원은 신선이라

표연히 세상을 떠났네.

어디에도 무덤은 없네.

혼탁한 세상에 잠시 왔으나

홀로 푸른 하늘의 학 같았지.

높은 산 어찌 우러러보리

여기 맑은 향에 고개를 숙일 뿐.

 

지리산 쌍계사에도 고운이 책을 읽던 곳이 있다.

 

3) 이원조李源祚, 낭산 독서당 유허비狼山讀書堂遺墟碑 (1850)

선생은 신라 시대 사람인데, 세대가 멀어서 상세히 알아볼 수가 없다. 선생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으로 말하면 성인의 사당에 올랐고, 문장으로 말하면 문단의 맹주가 되었으며, 생애로 말하면 백이伯夷처럼 세상을 피하였고, 자취로 말하면 자방子房(장량張良)처럼 선도仙道에 의탁하였다. 선생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4) 전병훈, ?정신철학통편? (1920)

동방의 어진 선진仙眞 최치원 선생은 단군 천부경 81자는 신지의 전서로 옛 비석에서 보고서 그 글자를 해독해서 백산에 공경히 새겼다.”고 말씀하셨다. 저 병훈이 생각하건대 최선생님은 당나라 진사 출신으로 한국에 돌아와 신선이 된 분이다. 이 천부경은 지난 정사년(1917)에 처음으로 한국의 서쪽 영변군 백산에서 출현했는데, 계연수라는 한 도인이 백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산속까지 들어갔다가 석벽에서 이 글자를 발견하여 베꼈다고 한다.

최고운 선생이 고려인으로 당나라에서 진사가 되었다. 이름은 치원이며, 뒤에 신선이 되었다. 신선이 사는 자부紫府는 마음을 닦아야 이를 수 있으며, 현관玄關은 힘으로 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계원필경?에 있다), 나는 이로 인해서 최공께서 이미 현관을 알았으며 난을 피해 숨어 수련해서 신선을 이루었다고 본다.

 

3. 도교의 전파

 

1) 한무외, ?海東傳道錄? (1610)

당나라 개원(현종대 713-741)에 신라사람 최승우와 김가기, 중 자혜 세 사람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가기는 먼저 진사과에 급제하여 화주참군華州參軍을 거쳐 장안위長安尉로 전보되었고 승우도 또한 진사에 급제하여 대리평사가 되었다. 일찍이 함께 종남산에 놀러갔더니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廣法寺에 살고 있었다. 자혜도 마침 이 절에 우거하고 있어서 매우 친절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그의 소개로 매양 서로 찾아다니며 친밀하게 지내더니 하루는 겨울이 깊고 산길에 눈이 쌓여서 두 사람이 산에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 조용한 이경이 되었는데 원지가 별안간 하는 말이 종리장군鍾離將軍이 오시오하더니 한 사람이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데 쳐다보니 뺨엔 구레나룻이 나고, 배를 불쑥 내놓은 채 띠도 안 띠고 신도 안 신었으며 기세가 대단했다. 세 사람은 일어나 창문 밑으로 가서 엎드렸다. 장군이 말하기를 어디서 온 손들인가하니 원지가 대답하기를 모두 신라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장군은 세 사람에게 명하여 자리에 앉게 하고 차를 내오게 하여 대접하였다. 원지가 말하기를 불교는 널리 퍼져 삼한에 이미 알려졌으나 오직 우리 청정淸淨의 교는 아직 전파되지 못하였으니 또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보건대 이 세 사람은 모두 신선의 골격이 있으니 가히 가르칠 수 있겠습니다. 오늘밤에 도형께서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장군이 이르기를 내가 세 사람을 보고 이미 다 알았소. 다만 신라국은 도교가 인연이 없어서 다시 팔백 년을 지나야 마땅히 돌아오는 운이 있어서 그때에 그곳에 선양될 것이오. 그 후로부터 도교가 더욱 성하고 불교는 쇠퇴하여지며 지선地仙2백이나 생기고 집을 나서 승천하는 사람도 있어서 대교가 퍼지게 될 것이니 이 세 사람은 그때를 맞추어 나지는 못하였소. 그러나 만약 신선의 도를 배우고자 하여 중화에 머물러 있다면 내가 마땅히 지도하여 주리라.” 하였다.

원지는 이 말을 듣고 세 사람에게 이르기를 대사의 말씀이 지당하시니 자네들은 각각 하늘에 맹세하고 교훈을 받으라.” 하였다. 세 사람이 즉시 일어나 북두성에 절하고 두병斗柄을 밟으며 하늘에 축원하고 맹세하였다. 장군이 이르기를 세 사람은 함께 미성微星으로 인간세계에 적강하였으니 신선이 안 되면 장상이 될 것이다. 자네들 각각 정성을 다하여 법을 지키고 힘써 행하여 게을리 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는 청화비문영보, 팔법금고, 인두오악결, 내관옥문보록, 천둔연마법 등 책을 내주고 또 구결을 전수한 뒤에 소매를 떨치고 나갔다.

원지는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세 사람을 석실 안에 두고 내단을 수련시키되 물자를 몸소 공급하니 무릇 삼년 만에 단이 성공되었다. 가기와 자혜는 나오지 않고 승우는 서경에서 이덕유李德裕의 종사가 되어 염철판관을 겸하였다. 수년 후에 이공이 애주로 귀양가니 그로 인하여 벼슬을 내놓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자혜도 따라 돌아왔다. 그러나 가기를 굳게 마음을 먹고 돌아오지 않았다.

팔월에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별안간 회오리바람을 만나서 어느 큰 섬에 표착하였다. 한 지절선관이 뱃머리에 마중하며 말하기를 정양진인이 두 분께 편지를 부쳐왔습니다.”하고 서신을 내주었다. 받아보니 종리의 편지였다. “공부하던 책을 도로 돌려보낸다. 너희들은 인연이 적어서 스스로 천도를 무너뜨리니 다시 무엇이라 말하리요. 그러나 동국은 8백년 후에라야 대도가 크게 밝아질 것이니 반드시 이를 전수하면 가히 선문에 들어가리라. 너희들에게 준 경결經訣과 백양참동계, 황정경, 용호경, 청정심인경등 세상에 행하는 것은 불교와 서로 결부되어 명맥을 전할 수 있으며 너희들은 이 공을 힘입어 상진인으로 뛰어오르리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다섯 종류의 선전仙典을 절하며 받았는데, 언뜻 머리를 들어보니 선관도 없고 섬도 없어져 버렸다.

이내 귀국하자 혜공은 오대산으로 들어가고 승우는 관계로 나아가 여러 차례 승진되어 태위太尉에 이르러니 구결로 문창후와 이청에게 전수하였다. 청은 두류산으로 들어가 수련하여 득도하였고 승우는 구십삼세에 죽으니 다섯 종의 신서는 모두 청에게 전승되었다. 청이 죽은 뒤에 그 제자 중 명법이 배워가지고 의심나는 점을 혜공에게 물어서 그 뜻을 모두 잘 알게 되었다. 혜공은 145세를 살다가 태백산에서 죽었고 법공도 32세에 죽으면서 법을 상락군 권청에게 전수하였다. 청은 거짓으로 미친 체하고 가짜 중이 되어 수련을 쌓아 도를 통하여서 두류산에 숨었다. 고운학사孤雲學士와 함께 이 산에 있으면서 숨고 나타남이 일정함이 없었다.

 

2) 이규경, ?五洲衍文長箋散稿? (19세기)

최고운도 당 나라에 들어가 환반還反하는 학설을 얻어 전하여 아울러 우리나라 단학丹學의 시조가 되었으니, 그 가장 뛰어난 것은 참동계16가지 구결이다. 단학파 중에 저서하여 전수한 것으로 정염鄭?단가요결丹家要訣, 권극중權克中참동계주해, 이지함李之菡복기문답服氣問答, 곽재우의 복기조식진결服氣調息眞訣이 그 관건이며, 근세에 허미許米가 단학에 대한 공부를 깊이 깨달아 도교의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단학의 시말始末이다.

또 시해尸解의 일파가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시해가 다섯 가지인바, 곧 금토 다섯 가지의 시해이다. 신라의 석현준釋玄俊이 당 나라에 들어가 그 법을 배워 보사유인步舍游引하는 술을 저술하였다. 최고운 역시 중국에 유학하여 그 법을 얻었으나 우리나라에 돌아온 다음 잊어버렸다. 그리하여 현준玄俊에게 배우니, 현준은 바로 그의 외삼촌으로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을 저술하였다.

그 전도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종리권鍾離權이 신라 사람 최승우김가기와 중 자혜에게 전수하였으며, 최승우는 최고운과 이청李淸에게 전수하였고, 이청은 명법明法에게 전수하였으며, 명법은 다시 자혜에게 전수하여 그 요점을 모두 얻었다. 자혜는 권청權淸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원나라 설현偰賢에게 전수하였으며, 설현은 김시습에게 전수하였고, 김시습은 홍유손洪裕孫에게 천둔검법天遁劍法연마진결鍊魔眞訣을 전수하였으며, 또 옥함玉函에다가 단약을 만드는 요점을 기록하여 정희량鄭希良에게 전수하였고, 참동계》ㆍ《용호경의 비지祕旨를 윤군평尹君平에게 전수하였다. 윤군평은 곽치허郭致虛에게 전수하였고, 정희량은 중 대주大珠에게 전수하였으며, 대주는 정염鄭?과 박지화朴枝華에게 전수하였다. 홍유손은 밀양密陽에 사는 과부 박씨朴氏 묘관妙觀에게 전수하였고, 묘관은 강귀천姜貴千과 장도관張道觀에게 전수하였으며, 곽치허는 한무외韓無畏에게 전수하였다. 권청은 남궁두南宮斗에게 전수하고 또 조운흘趙云仡에게 전수하였다.

 

4. 최치원의 도교 재사齋詞

 

1) 중원재사中元齋詞 ?계원필경집? 15

도 대대로 이어 온 공훈을 잘 계승하고, 참다운 지위에 높이 승진하여, 연각煙閣과 운대雲臺에 모습을 남기고, 지전芝田과 혜포蕙圃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쇠를 주조鑄造하여 추억한 성주聖主의 은혜를 끝까지 영광되게 하고, 돌에게 소리치며 한가롭게 노닌 선인仙人의 도술道術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소서. 참으로 지나친 소망이 아닐진대, 어찌 감히 정성껏 수행하지 않겠습니까. 신 모는 그지없이 은혜를 빌고 허물을 사죄하며 경건히 기도하는 간절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2) 중원재사中元齋詞 ?계원필경집? 15

신은 태평성대에 태어나 진인眞人의 풍도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어찌 구시久視의 문을 탐내는 것이겠습니까. 경쾌하게 날아다니는 길을 소망할 뿐입니다. 다만 행동은 위태롭지 않게 되는 것不殆이 우선이요, 덕은 여유가 있는 것이 귀한 법입니다. 그래서 매양 일기一氣를 경건히 닦으며 생각을 모으고 있으니, 삼원三元의 명절에만 공경을 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3) 황록재사黃籙齋詞 ?계원필경집? 15

신은 몸이 세상의 일에 얽매어 있으나, 뜻만은 진리의 세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지극한 도는 깊고 어두워서 형상形象을 통해 얻을 수가 없으나, 정성된 마음으로 착실히 간절하게 구하면 반드시 감통感通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양 향을 사르며 수행에 힘쓰고 있으니, 어찌 감히 잠시라도 안일하게 보내겠습니까.

 

5. 최치원이 발견한 한국 고유의 현묘지도

 

1) ‘난랑비서鸞郎碑序’, ?삼국사기? 진흥왕조

최치원은 난랑비鸞郞碑서문에서 말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삼교를 포괄하여 뭇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공자)의 가르침이고,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말없는 가르침을 실천함은 주나라 주사柱史(노자)의 뜻이며,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모니)의 교화이다.”

 

2) 김대문, ?화랑세기?

 

3) ?고려사? 의종 22(1168)

仙風遵尙하라. 옛날 신라는 선풍이 크게 성행하여 이로 말미암아 龍天歡悅하고 백성과 만물이 평안하였도다. 그러므로 祖宗 이래 그 풍습을 숭상한지 오래인데, 근래 兩京(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는 날로 옛 모습을 잃어가면서 그 유풍이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 지금부터는 팔관회는 미리 兩班으로 가산이 풍족한 자를 택하여 仙家로 정하고 고풍대로 하도록 하여 사람과 하늘이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하라

 

4)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후집 9

仙風은 멀리 ·때도 들을 수 없었고 仙風舊莫聞周漢

가까이로는 ·에서도 아직 찾아보기 어렵구나. 近古猶難覩宋唐

이 나라에는 네 화랑이 진정 옥과도 같아 國有四郞眞似玉

萬古에 전하는 그 명성, 笙篁처럼 울렸어라. 聲傳萬古同如篁

 

5) ?고려사? 94 서희전

(이지백이) 청하오니 금은과 보물을 소손녕에게 뇌물로 주어 그의 뜻을 살펴보시옵소서. 게다가 경솔히 국토를 적국에 할양해 버리는 것이, 선왕들께서 설치하신 연등회·팔관회·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거행하며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 전해온 괴이한 법을 행하지 말아서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룩하는 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여기신다면 먼저 천지신명께 고하고 난 뒤에 싸우거나 강화하는 것은 오직 주상께서 결정하셔야 하옵니다.”

 

6) ?고려사? 104 민적전

민적閔頔은 자가 낙전樂全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외조부 유천우兪千遇가 그를 보고 기특히 여겨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니 이모부인 전 재상 김군金頵이 그 말을 듣고 자기 집에서 길렀다. 나라 풍속에 어릴 때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가서 글을 익히게 되어 있었는데, 얼굴과 머리털이 아름다운 남자는 승려든 속세 사람이든 모두 그들을 받들어 선랑仙郞이라고 불렀다. 따르는 무리들이 어떤 경우에는 천이나 백에 이르기도 했는데 그 풍습은 신라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민적은 열 살 때 절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천성이 총명하여 글을 가르쳐 주면 바로 그 뜻을 깨달았으며 미목이 수려하고 풍채가 빼어나서 한번 본 사람은 모두 사랑하였다. 충렬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보고는 그를 가리켜 국선國仙으로 지목했다.

 

 

참고문헌

 

고운국제교류사업회 편, ?고운 최치원의 역사관?, 문사철, 2010.

고운국제교류사업회 편, ?고운 최치원의 철학·종교사상?, 문사철, 2010.

김대문 저, 이종욱 역저, ?화랑세기?, 소나무, 1999.

김윤경,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도교관’, ?도교문화연구?, 53, 2020.

서영대, ‘한국 선도의 역사적 흐름’, ?선도문화? 5, 2008.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이규경, ?五洲衍文長箋散稿?, 한국고전번역원, 1977.

이능화 저, 이종은 역, ?조선도교사?, 보성문화사, 1992. ·

이석호 역주, ?한국기인전 청학집?, 명문당, 1990.

이종운 역주, ?해동전도록 청학집?, 보성문화사, 1986.

임채우, ‘최치원과 도교의 관계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고유선도와 중국도교의 관계를 중심으로?선도문화? 10, 2011.

전병훈 저, 임채우 역, ?완역정신철학통편?, 인월담, 2021.

정유진 편역, ?우리 신선을 찾아서 홍만종전집?, 돌베개, 2010.

정재서, ?한국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증산도도전 편찬위원회, ?증산도도전?, 대원출판사, 2003.

차주환, ?한국의 도교사상?, 동화출판공사, 1984.

최영성, ?譯註崔致遠全集 1 四山碑銘?, 아세아문화사, 1999.

최영성, ?譯註崔致遠全集 2 孤雲文集?, 아세아문화사, 1999.

최영성, ?최치원의 철학사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최치원 저, 이상현 역, ?계원필경집 1,2?, 사단법인 올재, 2013.

한국사학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신라최고의 사상가 최치원 탐구?, 주류성, 2001.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71개(1/8페이지)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