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트라키아의 대모신大母神 숭배 전통

넬리 루스(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초빙 교수)

2023.06.26 | 조회 3467

2022년 증산도 후천선문화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트라키아의 대모신大母神 숭배 전통

 

넬리 루스(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초빙 교수)

번역: 손경희(상생문화연구소)

 

본고는 유럽 남동부 지역의 토속 신앙에 전해 내려오는 대모신 숭배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지역은 다름아닌 그리스인들이 트라키아라고 부른 지역이다.

트라키아인(Thracians)들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집단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 기록도 존재한다. 트라키아인은 호메로스의 저서 일리아드의 두 번째 노래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트라키아 반도의 인구수를 언급하고 있다. 트라키아인은 같은 문화와 민족성을 공유하는 여러 부족을 집합적으로 함께 일컫는 말이 되었는데 실로 다양한 부족오드뤼시아, 트리발리아, 게티, 에도니, 베시, 비타이니 왕국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세기 경에 한 저술가가 남긴 기록을 통해 90개가 넘는 트라키아 부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트라키아의 영토는 남북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부터 에게해에 이르고, 동서로는 소아시아 북서부로부터 바르다르강에 이른다. 트라키아인들은 그리스인들보다도 먼저 그리스와 에게해 인근 지역에 정착하였다. 트라키아인은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지 못했기에 그들에 대한 기록은 흔치 않으며 주로 그리스어로 쓰여진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트라키아의 종교관에서 중심적 위치를 지니는 신은 바로 대모신, 그리고 남성신이며 최고신인 태양신이었다. 이 중 태양신은 하늘과 지하세계와 모두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 세계의 왕은 바로 이 태양신의 현현으로 여겨졌다. 여성성의 한 부분인 다산과 출산이라는 개념은 신석기 이후의 발칸 반도의 유물에 시각적으로 드러나는데, 유럽 남동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고대 토착 신앙이 트라키아 지역에까지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가리아 남부 지역의 많은 숭배 유적지, 그리고 로도피 산맥 동쪽에 자리한 암벽 사원 유적들이 신석기 시대에 대모신 숭배가 발칸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이후 불가리아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고고학적 발굴로 사람 형상의 작은 점토 조상(彫像)이 수백 여 점 출토되어 위의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들 조상들이 신체를 매우 풍만하게 표현한 점, 그리고 때로 아이를 품에 안은 형태로 묘사한 점을 통해, 출산, 그리고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대모신을 나타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대모신의 역할

 

처음에는 대모신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거나 명시되지 않았다. 뚜렷한 이름을 갖지 않았음에도 다양한 모습과 특징을 지닌 신으로 표현되었다. 금이나 은으로 제작된 많은 유물들이 대모신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불가리아 지역에서 발굴된 트라키아의 통치자와 귀족들의 무덤에 의례의 한 부분으로서 함께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트라키아 예술작품에 드러나는 대모신의 본질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다.

 

초목과 성장을 돌보는 수호신

 

무엇보다도 그녀는 지모신이자 생명의 근원으로서 만물의 시작과 끝에서 늘 함께 한다. 새로 태어나는 이에게는 생명을 부여하고, 죽어서 그녀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온 자를 반겨 맞이한다. 그녀는 또한 성장을 북돋우는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봄의 새로운 시작, 초목의 생장, 영원히 순환 반복되는 부활을 이끈다. 장식물, 귀걸이, 술잔, 유리병, 소품 등에서 대모신의 모습과 식물 문양이 함께 발견된다.

불가리아 루코비트 마을에서 출토된 BC 4세기의 그릇을 보면 그릇의 둘레에 대모신의 모습을 새겨 넣었는데, 식물 문양과 여성의 두상이 번갈아 가며 두 줄의 동심원을 장식하고 있다.

스트렐차에서 출토된 같은 시기의 술잔 역시 비슷한 외형을 가진다. 긴 머리를 한 여성의 두상이 전면에 묘사되어 있고 생명의 나무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 문양이 그 사이에 표현되어 있다.

로고젠 마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도 유사한 그릇이 있다. 4세기로 추정되는 다른 그릇에도 일곱 개의 여성의 두상 아래에 다섯 개의 종려나무 잎 문양을 새겨 놓았다.

이 종려나무 잎 문양의 확장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또 있는데 바로 메제크와 바르빗사에서 발굴된 4세기 경의 흉판이다. 흉판 가운데는 여성의 두상으로 장식되어 있고 측면은 종려나뭇잎, , 그리고 곡선형의 나뭇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같은 문양이 스베슈타리 인근에서 발굴된 3세기 무덤의 여러 여신상 기둥에서도 발견된다. 마치 꽃잎처럼 표현된 여신들의 치마도 흥미롭다.

초목을 자라나게 하는 힘의 원천으로서의 대모신의 역할도 이러한 예술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아리안 족이 남긴 다음의 기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트레이키는 주문과 약초에 통달한 요정이었다. 약초를 사용해 고통을 없애는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반대로 고통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그들은 트레이키의 이름을 따라 나라의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트라키아의 대모신 역시 약초의 여신으로서 모든 초목의 내밀한 기운과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포트니아 테론: 동물의 수호신

 

트라키아 대모신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위가 있는데 바로 모든 동물들의 수호여신(포트니아 테론)이자 사냥의 여신이라는 점이다. 여신과 동물들을 함께 표현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으며 다수의 유물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로고젠에서 출토된 기원전 6-5세기의 물병 역시 그러한데, 물병에 새겨진 여신은 활과 화살을 든 도전적인 모습으로 암사자를 타고 있다. 동물의 제왕으로 일컬어지는 사자를 길들이는 사냥꾼으로 묘사하면서, 어디에서건 존재할 수 있는 신의 편재성과 능력을 야생 자연을 배경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곳에서 나온 또 다른 물병에서는 대모신이 한 동물의 두 앞다리를 잡고 있고 옆에는 켄타우로스가 장식되어 있다. 하단 장식에는 앞다리를 꿇은 자세의 황소 한 마리가 사자 혹은 늑대로 보이는 맹수들에 둘러싸여 있다. 스트렐차에서 출토된 4세기 경의 술잔에는 여성의 두상, 그리고 사자와 숫양이 번갈아 가며 나란히 새겨져 있다. 로고젠의 보물 중에는 날개가 달린 여신의 형상이 장식된 물병도 있다.

동물들의 수호자로서의 대모신의 모습이 가장 다채롭게 나타난 작품을 꼽으라면 브라스타에서 발굴된 4세기 유물인 무릎보호대를 들 수 있다. 사납게 날뛰는 사자, 날개 달린 용, , 그리고 하강하는 독수리들 사이에 대모신이 묘사되어 있다. 동물들을 정확히 좌우 대칭으로 배치한 것은 하늘--지하세계의 공간적 수직 구조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독수리와 용은 하늘을, 사자와 뱀은 땅과 지하세계를 나타낸다.

 

죽음의 여신

 

트라키아의 대모신의 의인화와 그에 부여된 역할은 초목의 생장, 야생동물, 그리고 사냥을 다스리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출산과 작물의 결실을 돌보고, 사람들의 집과 화로를 지키며, 여성과 어머니, 처녀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그녀는 무한한 창조의 능력을 지녔지만 동시에 밤과 죽음의 여신으로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녀는 액운을 막아주는 신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바쇼바 모길라에서 발견된 5세기 유물로서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의 형상이라든가, 4세기 경의 흉판에 새겨진 여신의 형상이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자신의 주인을 적이나 악한 힘, 그리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여겨졌다. 브라스타와 아지골에서 나온 4세기 유물인 무릎보호대를 보면 어딘가를 응시하는 여신의 강한 눈빛은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방해물을 부숴 없애고 주인의 행위를 돕는 것이 그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벤디스, 그리고 트라키아의 대여신의 여러 다른 이름

 

대모신의 외모나 형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대모신은 지역에 따라, 벤디스, 코티토, 바라우로, 제린티아와 같은 다양한 이름들로 불렸다. 이 이름들은 모두 여성성 숭배와 관련이 있는데, 고대 문학에서 트라키아인의 숭배의 대상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대모신은 바로 벤디스이며 관련 자료도 가장 풍성하다.

서기전 430-429년 이후에는 아테네에서도 벤디스 숭배가 공식적으로 자리잡았다. 도도나의 신탁에 의거하여 칙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는 중이던 아테네인들은 오드뤼시아의 왕 시탈케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벤디스 숭배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트라키아의 신을 자신들의 신앙 체계 안으로 받아들이려는 아테네인들의 의지로 인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지중해 지역의 외교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벤디스를 기리는 축제는 벤디디아라고 불렸으며 피레아스에서 개최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벤디디아는 대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벤디스 숭배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기원전 3세기 경에 나오는데 그 이후로 벤디스 숭배 전통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졌다. 벤디스 여신의 동상과 더불어 숭배를 위한 신전이 고대의 요정(nymphs) 신전 터에 지어졌는데, 많은 연구자들이 벤디스 여신과 트라키아 요정들 간의 공통점을 언급하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트라키아 문학 작품은 전무하기 대문에 트라키아 여신 숭배에 관련한 유일한 자료는 그리스의 기록이다. 벤디스 여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프리기아의 여신인 키벨레에 대한 기록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데, 키벨레는 동방의 대자연의 생식력, 즉 생명을 낳는 힘이 형상화된 여신이다. 키벨레는6세기의 시인 히포낙스의 시 한 구절에 언급되고 있는데 히포낙스는 트라키아인들에게는 키벨레가 곧 벤디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의 작가인 히스키야에 따르면 벤디스는 대모신이며 키벨레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이 같은 생각을 지지하듯 스트라보 역시 트라키아의 벤디스 축제를 프리기아의 키벨레 축제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고대의 작가들은 벤디스 여신을 같은 뜻의 그리스어나 라틴어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여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여신이 가진 많은 면모들 중에 어느 한 가지를 강조하였다. 하나의 예로, 폴리엔은 트라키아 부족인 케브레니족과 스카이보이족의 여신을 헤라라고 불렀다. 올림푸스의 여왕이자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의 여신이 최고 지위임을 나타낸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다섯 번째 권에서 벤디스를 트라키아인들과 트라키아 남서부 지역 파이오니아 여성들의 아르테미스 바실레이아(아르테미스 여왕)’라고 정의했다. 헤로도투스는 여인들이 제물을 밀짚에 싸서 아르테미스 여왕에게 바쳤다고도 기록했다. 이것은 출산, 다산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르테미스 여왕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와는 다른 존재역시 벤디스의 또 다른 모습이다. 루코프론은 벤디스 여신을 죽음, , 그리고 달과 연관지어 헤타케라고 불렀다. 디오도루스는 벤디스 여신을 헤스티아가정을 수호하고 화로의 성스러운 불을 지키는 여신라고 불렀다.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는 벤디스를 레아로 지칭했다. 레아는 다름아닌 신들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다양한 이름들은 대모신이 지닌 여러 신성들이 각기 의인화되어 나타난 것이며 대모신이 다양한 역할을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성스러운 혼인을 통한 권력 획득

 

트라키아의 통치자들과 대모신의 관계는 성혼(신성한 결혼)이라는 개념으로 주로 정의된다. 여신과 통치자 간의 결혼통치자는 또한 여신의 아들이기도 하다은 통치자의 영토에 비옥함을 선사하고 계절이 잘 순환되게 하며 통치자의 권력에 끊임없는 부활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트라키아인들은 대모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을 통치자로서의 정통성을 지니는 자로 받아들였다. 왕권에 도전하는 자는 언제나 왕국 외부 출신이었고 그로 인해 여왕과의 결혼이라는 토착적 신념의 구현을 통해서만이 왕은 왕국을 통치하는 권한을 얻을 수 있었다. 통치자에게 왕권이 전수되는 과정은 트라키아 금속 공예품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레트니차에서 발굴된 기원전 4세기의 유물 여러 점을 보면 영웅은 세 개의 머리가 달린 용그 나라의 도착 통치자을 무찌르고 공주그 지역의 지모신의 딸를 구해 그녀와 혼인함으로써 권력의 상징물을 수여 받는다. 결혼한 한 쌍의 부부가 내밀한 관계를 맺는 모습 역시 가감 없이 표현되어 있다. 부부 뒤에는 한 명의 여성이 서서 커플 사이로 나뭇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여성의 왼편에는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하나가 새겨져 있다. 이 장식판에 나오는 두 명의 여성은 사실은 같은 여신으로서,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통치자 권력의 보증인이기도 한, 대모신이 지닌 본질적 특성을 각기 드러내주고 있다. 두 여성은 또한 대모신이 지닌 처녀성과 여성성 두 면모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성은 트라키아의 왕에 대응되는데 여신과의 성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 또한 신으로 격상된다.

카잔루크에 있는 기원전 4세기 무덤의 벽화 장면에도 이같은 관념이 묘사되어 있다. 벽화의 전면에는 해당 지역의 왕과 왕비가 묘사되어 있고 그들 뒤로는, 레트니차의 유물과 마찬가지로, 긴 가운을 입은 채 과일 바구니를 손에 든 또 한 명의 여성이 서 있다. 이 프레스코 벽화는 두 명의 여신들어머니와 딸의 통치자와의 성스러운 혼인을 표현한 것인데, 어머니와의 혼인은 땅에 비옥함을 주고 딸과의 혼인은 왕의 통치를 강화하는 상징성을 가진다.

테오폼푸스가 남긴 오드뤼시아 왕국의 코티스 1세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에도 트라키아인의 종교관이 잘 드러나 있다: “코티스는 연회를 열었는데 아테나 여신과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는 연회 같았다. 코티스 왕은 아테나를 위한 신방을 마련하고는 만취한 상태로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왕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트라키아 반도와 해협에 정착한 아테네인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코티스 왕은 그리스의 세 명의 처녀 여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아내로 고른 것이다. 아테나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아테네의 모신(母神)이기도 했다. 이렇듯 아테나 여신과의 성혼은, 기원전 4세기 초엽 반 세기 동안 아테네와의 관계에서 정치적 상징적 우위를 갖기 위해 왕에게 부과된 의무였다.

서기 전 329년 것으로 피레아스에 있는 벤디스 신전에서 출토된 비상(碑像)(현 코펜하겐 칼스버그 글립토텍 미술관 소장)에도 이러한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전면에는 벤디스 여신과 치유의 힘을 가진 반신반인 델롭테스가 가운데에 함께 서 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숭배자들보다 대략적으로 키가 두 배 정도로 크다. 일반적인 그리스 도상학의 형식을 따라 제작되었으나 트라키아의 상징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벤디스 여신과 델롭테스 신과의 성혼을 표현하고 있다.

사모스 섬에서 출토된 봉헌용 부조 작품은 델롭테스를 신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반신반인 영웅으로 표현하고 있다. 처음엔 신으로 묘사했다가 다음엔 반신반인으로 묘사한 델롭테스를 이 비상(碑像)에서는 평범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통치자를 영웅에서 신으로 점차적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대지의 여신과의 소통을 통해 은혜를 입은 대지의 여신의 아들은 이제 모든 면에서 그 여신과 동등한 존재, 즉 아버지 신이 된다.

 

트라키아 내세관에서의 대모신: 통치자의 영웅화

 

트라키아의 통치자들은 항상 대모신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등장한다. 비상이나 프레스코화를 보면 여신의 앞에 말을 탄 사람(영웅)이 묘사된 경우가 많은데 모두 간접적으로 혼인을 암시하는 것들이다. 트라키아 비석들을 보면 대모신이 영웅이자 왕인 남성에게 화관을 씌워주거나 아니면 그에게 그릇이나 술잔 등을 전해주는 모습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물건들이 왕권의 상징이며, 따라서 이 장면은 통치자가 여신으로부터 왕권을 수여 받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자신의 적들을 모두 무너뜨린 후에 통치자-영웅은 그에 준하는 마땅한 보상을 받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여신으로부터 수여 받는 왕권의 상징물이다.

스베슈타리 마을 인근의 3세기로 추정되는 무덤의 프레스코 벽화에는 대모신이 말을 탄 왕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권력에 신성이 더해지는 것을 상징함과 동시에, 무덤의 벽화임을 감안할 때, 왕이 죽음 이후에 신으로 격상한다는 내세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3세기의 카잔루크와 스베슈타리 무덤의 프레스코 벽화를 통해 우리는 당시 왕권 체제에 생긴대모신을 왕권의 근원으로 인식한두 가지의 발전 양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첫째는, 카잔루크 벽화에도 나타나 있듯, 통치자가 자신의 권력을 인정받고 국민들의 번영을 보장받는 장치가 바로 여신과의 성혼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스베슈타리 벽화에 표현된 바와 같이 왕은 죽음을 통해 불멸의 신으로 격상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삼위두 명의 여신과 한 명의 남신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트라키아에서 기록 문헌은 청동기 말기 이후에 등장하는데 가장 최초의 증거는 오르소야 마을 인근의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여성 형상의 소조이다. 이 유물은 기원전 14세기의 것으로 유물들 중에는 두 명의 여성 우상을 표현한 것도 있다. 오르소야 공동묘지의 출토품들을 통해 초기에도 대모신이 죽음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신을 표현한 다수의 소형 소조 작품이 무덤에 놓여 있었는데, 이것은 죽은 이가 대모신의 자궁으로 다시 되돌아 가게 됨을 상징) 그리고 통치자는 양날 도끼, 그리고 황소와 함께 표현되었는데 여기서 도끼는 왕권의 주요 상징이며 황소는 남성성의 상징이다. 사실 대모신과 통치자를 서로 연결하는 숭배 전통은 더 오랜 고대로까지 그 기원이 올라간다. 발칸 반도에서는 신석기 때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불가리아 남부의 돌노슬라브 마을 인근의 신석기 신전 유적에서 나온 부조 작품을 보면 서기 전 4000년에 이미 그러한 관념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지의 여신이 그녀의 팔에 두 아이를 안은 채로 앉아 있고 그 위로는 남자 한 명이 작게 묘사되어 있는데 비율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높은 왕관을 쓰고 있다. 아마도 높은 왕관은 제사장의 특권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여신과 남성을 하나로 결합해주는 요소로 한 마리의 뱀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 예술에서 나타난 벤디스: 아르테미스, 그리고 아르테미스 모니치아와의 관계

 

고대 그리스의 벤디스 여신 숭배의 특성과 발전 양상은 문학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도상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트라키아 벤디스 여신의 초기 이미지는 기원전 5세기 경 아테네와 아티카 반도에서 처음 생겨났다. 그리스에서의 벤디스 여신의 모습은 트라키아 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 그리스 장인들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고대 그리스의 종교관과 미학을 그 속에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벤디스를 아르테미스 여신에 대응되는 트라키아의 여신으로 보았다. 아르테미스는 야생의 자연과 사냥의 신이며 생명의 수호자로서, 아르테미스와 벤디스를 묘사할 때 쓰이는 도상(圖像) 역시 서로 유사하다.

위에서 한 번 언급한 코펜하겐 글립토텍 미술관이 소장 중인 비상(碑像)을 비롯해 피레아스에서 출토된 기원전4세기 경의 비상(현 대영박물관 소장)에서 벤디스 여신의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벤디스는 벤디디아 축제를 배경으로 나체의 운동선수 행렬과 함께 묘사되어 있는데 운동선수들은 아마도 횃불 경주의 우승자들일 것이다. 벤디스는 창을 들고 서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물을 받기 위해 그릇을 들고 있다. 제물로는 보통 황소의 피가 사용되었다. 그녀는 벨트가 있는 짧은 가운을 입었으며 허리 둘레에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두르고 있다. 모자가 달린 긴 트라키아 망토(zeira)를 걸치고 있는데 모자는 여우의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끝이 뾰족한 형태이다. 신발은 목이 긴 사냥용 부츠를 신었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원전 4세기 점토상을 보면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비슷한 복장 양식으로 묘사했다. 원래 창 하나와 개 한 마리가 점토상과 같이 출토되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없다. 벤디스가 그려진 꽃병 유물도 있는데 다른 신들과 함께 묘사하거나 독립적으로 묘사되었다. 루브르에 있는 기원전 4세기의 종() 모양의 와인병(크라테르), 기원전 5세기의 컵과 술잔 역시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러한 벤디스 여신의 도상은 헤로도투스나 크세노폰이 묘사한 트라키아 복식과도 일치한다. 사냥 나갈 채비를 다 마친 듯한 벤디스의 이러한 외형적 특징들로 인해 그녀는 아르테미스와 자주 동일시되었다.

벤디스와 아르테미스 간의 놀라운 유사성은 고대에서부터 이미 알려졌다. 그 한 예로, 헤로도투스는 그의 저서 역사의 제5권에서 트라키아의 종교를 간략히 설명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이렇게 서술한다. “트라키아인들은 디오니소스, 아레스, 아르테미스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 물론 귀족들은 예외이다. 귀족들은 그들의 조상인 헤르메스도 숭배한다.” 이 구절에서 벤디스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헤로도투스가 사실은 벤디스아르테미스와 종종 동일시된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헤로도투스가 대모신을 벤디스가 아닌 아르테미스로 묘사하게 된 이유는 그의 수많은 그리스 청중을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낯선 트라키아의 여신보다는 익숙한 아르테미스를 떠올리는 것이 청중들에게 개념을 심어주는 데는 더 수월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실, 아르테미스와 벤디스 간의 유사성은 자연과 동물 세계의 수호자라는 벤디스의 의인화된 성격을 유추해야만 성립 가능하다. , 아르테미스는, 대모신인 벤디스가 지닌 다양한 역할들 중의 한 가지가 그리스 방식으로 차용된 형태이며 여신에게 처녀성을 부여한 경우이다.

그리고 대다수 학자들에 따르면 대모신의 이름 벤디스(Bendis)의 어원은 연결하다, 결합하다라는 뜻의 인도유럽어 “bhend”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같은 어원은 혼인의 수호자라는 그녀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성숙한 부인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낸다. 분명한 사실은 벤디스가 부부간의 결합을 수호하고 지키는 결혼의 여신이라는 점이다. 키벨레 역시 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는데 그릇은 생명을 주고 받는 것을 상징한다. 벤디스 여신 역시 그릇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르테미스는 단 한번도 손에 그릇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 바가 없다. 이를 통해 대모신으로서의 벤디스는 아테네의 아르테미스보다는 키벨레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벤디스를 아르테미스가 지닌 특정 요소아르테미스 모니치아와 비교함으로써 트라키아의 여신이 그리스의 문화 배경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피레아스에 세워진 두 여신의 신전이 서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고전 문학과 후대 전통에서 아르테미스는 처녀 사냥꾼이자 야생 자연의 신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모니치아(Artemis Mounychia)는 이 이미지와는 달랐다. 이 특정한 아르테미스에 대한 숭배는 사실 달의 여신 헤카테 숭배와 그 양상이 더 닮아 있다. 트라키아에서 헤카테는 대모신이 지닌 또 하나의 본질을 대변하는 여신이었다. 헤카테는 벤디스와 똑같은 형상으로 나타난다. 벤디스 역시 달의 여신으로 여겨졌으며 돌에 새겨진 많은 부조 작품에서 초승달로 자신의 머리를 장식한 벤디스 여신을 볼 수 있다. 아르테미스 모니치아는 여성을 달의 순환 주기와 이어주는 여신이면서 결혼과 다산, 인간의 생명과 자연을 보호하는 신이었다. 벤디스 신전은 아르테미스 모니치아의 신전과 가까울 뿐 아니라 두 여신을 기리는 축제 모두 달의 변화 주기, 그리고 횃불과 연관되어 있었다. 아르테미스 모니치아 축제 행렬에서는 작은 횃불을 올린 둥근 케이크를 여신에게 바쳤는데, 벤디스 축제에서는 횃불 경주를 열어 여신을 기렸다. 횃불은 달과 밤의 여신을 의미하므로 벤디스를 표현하는 중요 상징물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카빌인들(Kabyle)의 동전에는 벤디스가 횃불 두 개를 든 모습으로 나오거나 그게 아니라면 한 손에는 횃불, 다른 한 손에는 그릇을 든 모습으로 표사되어 있다. 그리고 암피폴리스의 주화는 벤디스를 횃불과 방패, 그리고 트라키아 모자를 쓴 모습으로 표현한다. 횃불은 헤타케 여신의 상징물이기도 한데 실제로 벤디스와 헤타케는 자주 동일시되었다.

 

두 개의 창을 든 벤디스

 

문학 작품에서 벤디스는 두 개의 창을 든 자로 불린다. 그리고 다수의 유물에서도 그녀는 두 개의 창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두 개의 창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사냥을 상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희극 <트라키아 여인들>에서 크라티누스는 벤디스를 두 개의 창을 든 자로 불렀는데 그 이유가 그녀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경외하늘과 땅의 경외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녀가 두 가지의 빛벤디스 여신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달의 빛과, 그리고 태양의 빛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신이 태양 및 지하세계와 연관된 서로 다른 두 가지 본성을 지닌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서기전 3세기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1세가 주조한 동전 등에는 두 개의 창을 든 벤디스가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두 개의 창을 들고 왼손에는 칼을 들고 있으며 방패는 바위 옆에 세워져 있다. 벤디스는 비티니아 대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소아시아 일대에 많이 모여 살던 트라키아인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이 쓰는 달력에 벤디디오스(Bendideios)라고 명명한 달()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 기간에 그들은 벤디스를 기리는 호화로운 축제와 제례를 열었다.

칼리니쿠스가 쓴 성() 히파티우스의 전기에 따르면, 히파티우스 성인이 아르테미스 축제 기간 중에 비티니아를 지날 때 남자 10명의 키 만큼 큰 여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여신은 실을 잣으면서 돼지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벤디스가 아르테미스라는 형태로 대모신으로서 존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돼지는 제물이면서 다산을 상징한다. 그리고 인간의 수명이 주로 실에 비유되는 바, 그 실을 잣고 있었다는 것은 대모신이 인간들의 삶의 시작과 끝을 정하는 바로 그 존재임을 나타낸다.

 

트라키아 예술에 나타난 벤디스

트라키아의 벤디스 숭배 전통은 문헌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주로 유물들을 통해 관련 역사가 연구되고 있다. 트라키아 영토의 변방에서 출토된 벤디스 여신의 부조에는 두 가지의 주된 도상학적 형식이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화된 아르테미스벤디스이다. 후대의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 유행한 묘사로, 아르테미스를 그리스의 사냥의 여신으로 그린다. 아르테미스벤디스 부조는 불가리아 남서부, 스트루마 계곡, 바르다르 강, 메스타 강, 그리고 서부 로도피 산맥, 필리포폴리스(오늘날 플로브디프) 인근에서 출토된 비상(碑像)에도 나타나는데 그 시기는 대체적으로 기원후 2-3세기 경이다. 여신은 도상학적으로 그리스식 아르테미스 부조와 닮아 있다. 짧은 드레스를 입고 긴 부츠, 털 모자를 쓴 모습이다. 많은 수의 비상이 사냥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데 벤디스 여신은 사슴을 타고 멧돼지를 쫓는 모습이며 옆에는 한 마리가 개가 함께 있다. 한 손에는 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등에 매단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으려 하고 있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이 부조가 <트라키아 기마병>에 묘사된 사냥 장면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점이다.

두 번째 도상학적 형식은 벤디스를 대모신으로 표현하는 형태이다. 전형적인 예는 로도피 산의 신전에서 나온2세기 경의 비상에 나타난 묘사인데 이러한 형식은 그리스 이전 시대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로마 시대까지도 꾸준히 이어졌다. 문헌이나 금석문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여신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다른 여신들포트니아 테론, 프리기아의 키벨레과 비슷한 도상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대모신으로서의 벤디스는 결혼, 출산, 다산 숭배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동물과 초목, 자연을 보호하는 역할과도 밀접하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시대의 아르테미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헤로도투스가 전한 트라키아와 파이오니아의 처녀들의 다산 숭배에 나오는 아르테미스 바실레이아가 지닌 특징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도상학적 유형으로 보자면 벤디스는 때때로 다산 숭배의 상징물과 함께 표현되는데 예를 들면 솔방울이라든가 옥수수의 낱알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녀는 많은 경우에 코티토, 키벨레, 헤타케와 같은 밤의 신과도 동일시된다. 이 여신들은 생명의 순환, 여성의 출산과도 연관이 있었으며 한밤중의 떠들썩한 춤과 축하연으로도 유명했다. 또한 흑마술과 저승세계와도 관련이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 <렘노스의 여인들>에서 렘노스 섬에 사는 대여신 렘노스의 숭배자들은 흑마술을 부리고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고 언급했다. 렘노스 여신과 벤디스는 예로부터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렘노스에서 출토된 고대 항아리 파편에 묘사된 사냥의 여신이 그 증거이다.

 

실을 잣는 대모신

() 히파티우스의 전기에 묘사된 대모신 벤디스의 실을 잣는행동은 중요한 신화적 의미를 지닌다. 예로부터 뜨개질, 베짜기, 방적 등의 활동은 여성들이 도맡은 일이었으므로 대모신과 방적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고대의 작가들은 실을 잣는 활동에 우주생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물레를 돌리는 것은 세계를 수직적으로 구성하는 걸 뜻하며, 솜뭉치(tow)는 구름을 닮았기에 천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은 가운데 세계를 상징하며 동시에 중재자 역할을 한다. 물레가락은 지하세계”, 죽음을 뜻한다. 인도-유럽어 문화권에서 물레를 돌려 실을 잣는 행위는 항상 인간의 생명에 비유되었다.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그리고 슬라브의 전통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들은 모두 물레를 돌리는 여신들이었으며 위대한 여신은 언제나 물레가락을 몸에 지녔다.

일반적으로, 실패와 물레가락이라고 하면 여신 키벨레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작은 소조, 부조 유물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물레가락은 무덤의 합장품으로도 발견되는데 매장된 자가 여성이라는 걸 알려주는 단순한 의미에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영생불멸의 관념과 연관된 깊은 신화적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물레를 돌리는 벤디스도 여신들의 모습 중 하나이며, 이 같은 모습에서 평범한 경제 활동이 더 깊은 신화적 의미로 변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신은 또한 자신이 감독하는 사회질서를 침해한 범법자를 속박하는 데에 실을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다.

덧붙여 물레 돌리기와 베짜기는 사냥에 필요한 무기그물 등를 제공하는 활동이란 점에서 사냥과도 종종 연결된다. 빌립보에서 발굴된 바위 부조에서 벤디스는 그물에 걸린 사슴을 잡는 사냥꾼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사냥이라는 하나의 상징성만 가지고는 그물이 지닌 다채로운 의미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실을 잣는 벤디스는 도상학적으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사냥이라는 요소는 이미 활과 창을 통해 표현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실을 잣는 것을 그녀의 이름이 가진 어원적 의미결혼을 통한 연결과 결합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요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라시아 대모신 숭배 전통에서 본 트라키아 대모신 숭배

트라키아 대모신 숭배는 유라시아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대모신 숭배의 일부분이다. 대모신 숭배의 기원은 구석기 후기로 소급되는데 이 시기의 주된 유물로는 사암이나 매머드 뿔로 만든 작은 조각상들이 있다. 대모신 숭배 전통을 입증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들은 크게 두 형식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으로 대표되는 형식으로, 서 있는 모습의 풍만한 여신상이다. 빌렌도르프 비너스상이 발굴된 곳은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변이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곳은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연대는 서기전 3만 년에서25천 년 전이다. 비슷한 형태로는 보로네슈 인근의 코스텐키 후기 구석기 유적(빌렌도르프-코스텐코프스카야 문화권)에서 발견된 여신상이 있다. 후대에도 풍만한 신체의 여신상이 터키의 하실라(서기전 7040), 카탈후육(서기전 7400-5600)에서 출토된 바 있다. 후기 신석기 그리고 금석병용기에도 다양한 형태의 여신상이 만들어졌다.

두 번째 형태는 여성의 이미지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얼굴의 이목구비 등은 정교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의 후기 구석기 유적지인 말타와 부레에서 출토된 많은 수의 여성 입상(入像)이 대표적이다. 매머드의 상아가 재료이며 연대는 기원전 22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각상은 허리를 앞으로 살짝 구부린 자세이며 가슴과 어깨를 강조하고 두 손은 축소해 표현했다. 이 입상들 바닥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이를 통해 고대인들이 이것을 부적처럼 몸에 착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타에서 발굴된 한 소년의 유골에서 체취한 DNA 정보는 현생 인류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오래된 게놈 정보에 속한다. 이 소년은 현대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먼 친척 뻘이다. 놀랍게도 같은 자세(앞으로 구부린 자세)의 여성 입상이 흑해 북서쪽 지역(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몰도바)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쿠쿠테니-트리필리아 신석기 유적지로서(또는 트리폴리에라고도 불림) 유적지 연대는 기원전 5500년에서 2750년이다. 시베리아에서 흑해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전승은 여성 입상 말고도 만자(卍字) 문양, 그리고 토기에 새겨진 유사한 형상과 문양 등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또한 DNA 분석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데 연구에 의하면 구석기 시대에 시베리아 남부에 정착해있던 많은 인구가 수 천 년에 걸쳐 남쪽 경로를 따라 알타이 지방에서 출발해 히말라야 산맥, 북인도, 이란 고원, 아나톨리아를 거쳐 최종적으로 소아시아에서 발칸반도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로써 유라시아 전체 지역에 퍼졌던 대모신 숭배는 어떤 특정한 집단에 의해 먼저 생겨났으며 그들이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함에 따라 다른 문화권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트리폴리에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들의 장식 문양은 중국 황하 유역에서 발달한 신석기 시대 앙소문화(仰韶文化) 토기들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 점은 유라시아의 대모신 숭배 집단과 앙소문화 집단이 이주 시기 이전에 동일 지역에 함께 거주하며 포괄적인 다산 숭배 문화를 탄생시켰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트리폴리에 유적지와 앙소문화 유적지의 토기의 동일한 상징들은 여신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며, 이는 대모신 숭배 전통이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무엇보다도 WM 형태의 줄무늬들이 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대모신의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서, 트리폴리에 유적을 비롯해, 기원전 3천 년 경 앙소문화와 함께 존재했던 마가요 (馬家窯)문화에서 출토된 그릇들에도 같은 문양이 있다. WM 형태의 문양은 동물의 수호자로서의 대모신을 단순화한 표현이다. 또한 대모신은 곰(bear)으로도 대변되는데 앙소문화에서 출토된 토기에는 곰의 발바닥이 묘사되어 있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트리폴리에 유적과 앙소 유적의 토기의 장식은 공통적으로 대모신의 신체를 단순화 도식화하여 나타냈다. 불연속적인 선들로 몸통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녀의 팔과 다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성이 출산할 때의 자세를 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덧붙여 대모신 숭배의 중요한 상징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가운데에 점이 하나 찍힌 마름모꼴 문양이다. 이 상징은 씨앗이 뿌려진 밭을 뜻하며 앙소문화와 트리폴리에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식이다.

이런 놀라운 유사성은 주로 유럽 남동부에서 나타나는 대모신 숭배 전통대표적으로 트라키아의 대모신 숭배를 들 수 있다이 유전학적으로도 동아시아 지역의 서왕모 또는 마고 대모신 숭배의 본질과 이어져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대모신 숭배는 결과적으로 후대 유럽에서 그리스도교의 동정녀 마리아를 성모(聖母)로 추앙하게 되는 데에 큰 토대로 작용했다.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불교에서 원래는 남성이었던 보살이 여성성을 얻게 된 것도 이러한 대모신 숭배 전통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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