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한국의 여신 문화

김화경(영남대 명예교수)

2023.05.15 | 조회 1730

2022년 증산도 후천선문화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


한국의 여신 문화

지모신 신앙을 중심으로 한 고찰

 

김화경(영남대 명예교수)

 

1. 머리말

2. 지모신 신앙의 성립

3. 지모신 신앙과 출현 신화

4. 산악신앙과 성모 신화

5. 맺음말

 

국문초록


본 논문은 한국 여신 문화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지모신地母神 신앙의 한 단면을 고찰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한국에서도 서구의 비너스상에 해당하는 소조塑造 임부상妊婦像들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대지가 지모신으로 숭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고고학계에서 이 임부상이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농경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견해를 받아들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간들 사이에 존재하던 아이 팔기민속이 이와 같은 지모신 숭배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모신 숭배에서 창출된 출현 신화出現神話, 곧 대지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하는 신화들을 살펴보았다. 한국에서 이 유형에 들어가는 자료로는 동부여의 금와金蛙와 신라의 알영閼英, 탐라국耽羅國의 세 성씨 시조의 탄생 이야기가 있다. 한국 신화사에서 이들 신화가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이유는, 외국에서는 이것이 왕권 신화로 정착된 예를 찾을 수가 없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이것이 왕권 신화로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이 신화를 가졌던 집단이 뒤에 들어온 수렵이나 유목문화 집단에 정복되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그들과 협력하여 고대국가의 성립에 이바지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다음으로 지모신 숭배가 진전된 산악신앙을 드러내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 신화를 고찰하였다. 성모 전승은 남편이 없이 임신을 하여[不夫而孕] 성스러운 시조始祖를 낳은 성처녀聖處女 신화로, 신라 고유의 산악신앙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선도산 성모의 출자出自가 부여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만약에 이 기록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동부여와 신라가 출현 신화를 가졌던 같은 계통의 농경문화 집단이 왕권을 장악했다고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요청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주요술어

지모신, 임부상妊婦像, 농경문화, 출현 신화, 성모 신화, 환단고기桓檀古記.


1. 머리말

 

가부장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모든 것을 여성이 주도하던 사회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한 사람은 19세기 스위스의 법제 사학자이면서 문화사학자였던 요한 야콥 바흐오펜Johann Jacob Bachofen이었다. 그의 모권제母權制 사회의 존재 가설은 당시의 사회 여건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획기적인 견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와 같은 가설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였다. 바흐오펜은 여성 지배의 지식을 얻는 데 전승의 최초 형태인 신화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모권母權의 흔적이 고대 그리스 세계의 가장 오래된 종족들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권이 현실사회 내에서 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었으므로, 신화에서도 모권이 그에 상응하는 높은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전승의 가장 원초적 형태인 신화에서 모권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가이아Gaia’아프로디테Aphrodite’, ‘아테나Athena’, ‘데메테르Demeter’와 같은 여신女神을 중심으로 하는 신화로부터 여성들이 지배하던 모권제 사회의 잔영殘影을 찾아냈다. 다시 말해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남신男神들의 신화체계를 가졌던 가부장제 사회보다 선행하는 여신들의 신화체계를 갖춘 모계사회가 존재했었던 흔적을 그리스 신화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바흐오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뒤에 김버타스Marija Gimbutas의 연구로 BC 4000년경에 반농반목半農半牧을 영위하는 인도 유럽어족Indo-European languages의 조상들이 이 지역 일대에 침입하여, 여신을 받들면서 살고 있던 사회를 정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는 그러한 예의 하나가 헤카데Hekade나 아르테미스Artemis와 같은 옛 유럽의 여신들이 고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Anatolia 지역에 존재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이들 여신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대지모신Great Mother이 후대에 변형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러자 멀린 스톤Merlin Stone은 남신들보다 여신들이 숭배되던, 여러 지역의 예들을 들어 하느님이 여신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바흐오펜의 주장은 어느 의미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가졌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상정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신의 관념이 대지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지모신地母神 사상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그 타당성이 입증된다. 두루 알다시피 지모신 사상을 대변하는 비너스 상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조형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미 이 시대에 지모신이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신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장구한 가부장제 사회를 거치는 동안에 여신 신화들은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왜곡되는 신격의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런 예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죽음과 불행이 여성들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하는 판도라나 이브 이야기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자는 판도라가 금단의 항아리를 열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불행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후자는 이브가 무화과의 열매를 따서 먹었기 때문에 인류가 낙원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들 신화는 남성들에 의해서 변형된 여신 신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들로, 인간 세상에 비극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을 다 같이 여성으로 표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렇게 죽음과 불행이 여성들로 말미암아 초래되었다고 하는 여신 신화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여신들의 권위가 실추되고 비하된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 한국 사회에서도 여신 신화들이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죽어가는 부모를 살려내기 위해서 저승세계로 여행을 하여 그 약을 구해왔다고 하는 바리공주 신화에서 그녀가 저승 여행의 주체가 되었고, 또 무당들의 조상인 무조신巫祖神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여신의 권위가 실추되어 그에 얽힌 신화도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조선 시대에는 지배 이데올로기 정립의 기반이 된 성리학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활동이 극도로 제한되었었다. 그때 정착된 여성 경시의 풍조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깥과 안의 대립을 남성과 여성으로 대치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대외적인 활동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어 왔다. 이런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활동이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또 이에 따라 여신 신화도 자연히 마모되고 변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 아래서도, 여신 신화들이 면면히 계승되었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전승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남성들이 지배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여신들은 그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얽힌 신화들도 사라지지 않고 전승을 계속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에 남아 있는 여신 신화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 여신들의 원형이었을 것으로 상정되는 지모신 신앙의 성립 과정을 살펴보고, 또 여기에서 창출된 출현 신화를 고찰하기로 한다. 그리고 지모신 숭배가 확장된 산악신앙의 일면을 드러내는 성모 신화를 고찰함으로써, 성모 사상이 신라 고유의 신앙이었다는 사실을 해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의 설정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여신들이 어떠한 신화적 사유에서 창출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라는 것을 밝혀둔다.

 

2. 지모신 신앙의 성립

 

사냥이 주된 경제 형태였던 구석기시대에도 이미 출산이 생명의 탄생이라는 아날로지로 이런 부는 여성, 즉 어머니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의존은 어머니인 자연에의 숭배라는 관념을 낳았고, 자연의 부를 가져다주는 자로서의 대지모신Great Mother에 대한 신앙이 종교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지모신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 구석기시대에 만들어진 비너스 상이다. 이것은 프랑스 피레네산맥으로부터 서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 걸치는 유라시아 대륙의 각지에서 60여 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발견 장소도 동굴 속이나 산꼭대기, 가정의 제단, 초기의 신전 등 상당히 다양한 분포를 보여준다. 종교학계에서는 구석기시대 비너스상의 제조가 대지모신의 숭배와 밀접하게 연계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뷔렌도르프에서 발견된 비너스상


그리고 이것은 BC 35,000년 전부터 돌이나 상아象牙를 쪼아서 만들거나 흙으로 구워서 만들었던 것으로 상정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비너스상의 커다란 유방은 아래로 처져 있고 굵은 허리에 배는 불룩하게 나와 있으며 엉덩이가 매우 잘 발달하여 있다. 이런 모습은 단순한 인간의 어머니가 아니라, 많은 아이를 출산한 뒤에, 젖으로 그 아이들을 길러낸 어머니, 곧 여신女神을 표상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은 비너스상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 중국 요녕성遼寜省 객좌현喀左縣 동상취東山嘴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塑造 임부상妊婦像이다.



요령성 객좌현 동상취 제단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 임부상


대릉하大凌河 유역의 임부상으로 통칭되는 이 임부상도 비너스상과 마찬가지로 배가 앞으로 나오고 엉덩이가 뒤로 처져서 하체가 비대한 모습을 보인다. 이형구李亨求이와 같은 표현은 생명력을 느끼는 모성애의 제스처다. 당시 사람들은 대지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지모신을 제사지냄으로써 만물이 소생하고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었다.”라고 하여, 이를 지모신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함경북도 청진시 농포동農圃洞 유적과 옹기군 서포항西浦港 유적에서 발굴된 소조 인물상이 이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이 신석기시대의 유물, 즉 농경이 시작되고 난 다음에 나온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함경북도 농포동 유적 출토 소조 여인상


이처럼 대지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지모신 사상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널리 존속되었던 것 같다. 이런 추정은 시골에서 아이를 낳으면 땅에다 파는 민속이 남아 있어, 지모신 숭배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땅뿐만 아니라, 바위나 큰 나무에 아이를 파는 민속도 있었다. 여기에서 판다라는 말은 맡긴다라는 의미였을 것으로 상정되는데, 이런 민속은 땅이나 나무, 바위 등이 아이가 무사하게 성장할 수 있게 보호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 이 민속에서는 음력 정월 초승에 정화수를 떠서 소반 위에 놓고 절을 하면서 땅에 판 아이의 무사 성장을 빌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대지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지모신 신앙이 성립되었고, 그런 민속이 근래에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지모신 신앙과 출현 신화

 

대지의 여신을 받드는 농경문화 집단이 일찍부터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정착한 농경문화 집단들 사이에서 창출된 것이 대지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하는 출현 신화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료 1]

이 일(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일: 인용자 주)에 앞서 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산천에 기도를 드려서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였다. 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게 하였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어린아이가 금빛의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한편으로는 개구리를 달팽이라고도 한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거두어 길렀다. (왕은) 그 아이의 이름을 금와라 하고,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이 자료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13 고구려 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에 전하는 것으로, 전반부에서는 금와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문일환文日煥은 이것을 금와가 바위에서 나왔다는 암출 신화岩出神話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이 자료의 밑줄을 그은 곳에서 보는 것처럼, 부여 왕 해부루가 사람들을 시켜서 놓여 있던 큰 돌을 옮기게 하고[使人轉其石], 그 자리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한 아이를 얻은 것으로 되어 있어, 바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위가 있던 땅에서 나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두루 알다시피 큰 돌이 놓여 있던 곳은 땅이 우묵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위의 신화적 기술은 금와가 땅이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 같다

이처럼 금와와 같이 대지에서 태어난 신화적 인물로는 알영閼英이 있다. 알영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배필이 된 신화적 인물이다. 그녀의 탄생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자료 2]

이 날(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 인용자 주) 사량리의 알영정 혹은 아리영정이라고도 한다.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뼈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서 여자아이를 얻었다고도 한다. 자태와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장차 월성의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그로 인해서 그 내를 발천이라고 한다.

일연一然󰡔삼국유사󰡕 1 기이(紀異) 1 신라 시조 혁거세왕 조에 실린 이 신화에서는 박혁거세의 배필이 된 알영이 알영정閼英井이란 우물가에 나타난 계룡의 왼쪽 갈비뼈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계룡은 용과 닭이 상통한다는 신화적 사유에서 창출된 신성한 동물의 하나이다. 이들의 연계성을 이야기하는 자료로는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용계원龍鷄院의 마을 유래담이 있다. 이 유래담에서는 신성수인 용이 닭으로 변해서 견훤甄萱이 전주성全州城을 무사히 공략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신라에도 용과 닭이 서로 통한다는 신화적 사유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이 허용된다면, 󰡔삼국유사󰡕 4 의해義解 5 귀축제사歸竺諸師 조에 그 나라에서는 계신鷄神을 받들어 높이 여겼던 까닭으로 그것을 꽂아서 장식한다.”라는 기록은 이와 같은 신화적 사유를 말해주는 것이 명확하다고 하겠다. 신라의 이러한 계신 숭배 사상은, 당시 많은 승려가 천축국天竺國으로 순례를 했기 때문에 그곳에까지 알려졌던 관습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처럼 계신을 숭배했던 사상은 신라 지방에 살면서 건국에 참여했던 김 씨 부족의 신앙이 그들의 세력이 팽창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자료에서는 이런 신성수인 계룡이 알영정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알영정은 문자 그대로 우물을 의미한다. 한국어에서 우물이란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우묵하게 들어간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런 의미의 우물은 원래 인류사회에서 재생rebirth이나, 원기 회복refreshment 등을 표상하는 여성 원리와 결부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물가에 나타난 계룡에서 나왔다고 하는 알영의 탄생신화는, 우물이란 것이 땅이 우묵하게 들어간 곳을 가리키고 계룡이란 것이 신라 사회에서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신성수神聖獸란 점을 고려한다면, 지중출현地中出現을 이야기하는 출현 신화의 변형이라고 보아도 크게 지장은 없을 듯하다.

이한 출현 신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주도의 삼성 시조 신화三姓始祖神話이다.

 

[자료 3]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 주산主山의 북쪽 기슭에 움이 있어 모흥毛興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그 땅이다. 에서 솟아났다. 맏이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는데, 이들 세 사람은 궁벽한 곳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면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줏빛 흙으로 봉해진 나무 상자[木函]가 동해 바닷가에 떠오는 것을 보고. 그들은 나아가 그것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돌로 만들어진 함[石函]이 있었는데, 붉은 띠를 두르고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와 있었다. 또 돌로 된 함을 여니, 그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와 송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앗이 들어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저는 일본국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이 세 따님을 낳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산에 신의 아드님 세 분이 강탄하여 바야흐로 나라를 세우려고 하지만 배필이 없다고 하시면서,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고 하시기에 왔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오.”라고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신인은 나이의 차례에 따라 나누어서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집으로 거처할 곳을 정하였다. 양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1(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2도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3도라고 하였다. 비로소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게 되니, 날로 백성들이 부유해져 갔다.

 

이것은 󰡔고려사高麗史󰡕 57 11 지리2 탐라현耽羅縣 조에 전해지는 세 성씨 시조의 탄생담으로 탐라국의 건국신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 자료에서는 밑줄 그은 곳에서 보는 것처럼 양을나와 고을나, 부을나 등 세 성씨의 시조가 땅에서 솟아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땅에서 용출聳出했다고 하는 신화소는 출현 신화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형의 출현 신화는 오늘날도 원시 농경민들 사이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든다면 아메리카의 푸에블로 인디언Pueblo Indian들이 그들에게 옥수수 씨앗을 가져다준 도모신䵚母神 이야티쿠Iyatiku가 땅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라든지, 트로브리안드 섬Trobriand Island의 원주민들이 태초에 사람은 지하에 살았었다고 하는 것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중출현地中出現의 신화들은 대지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농경문화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땅의 우묵한 곳을 대지大地의 자궁으로 상정하고, 여기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하는 신화적 사유를 반영하는 것으로,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는 일찍부터 대지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지모신 숭배 사상이 존재했고, 또 그 대지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하는 신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국의 고대사회에서 이 출현 신화를 가졌던 집단이 왕권을 장악하고 지배계층으로 군림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외국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한국문화와 그 신화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하다. 즉 한국의 고대사회에 있어서 대지를 중시하던 농경문화 집단이 뒤에 들어온 수렵이나 유목문화 집단에 정복되어 동화되지 아니하고, 그들과 협력하여 왕권을 확립하면서 고대국가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이들 출현 신화가 말해준다는 것이다.


4. 산악신앙과 성모 신화

 

대지를 어머니로 생각하던 지모신 신앙은 산을 지키는 산신山神마저도 여신이라는 신화적 사유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산신 신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것이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조 기사의 다음에 이어지는 사론史論이다.

 

[자료 4]

정화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 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신 부식이 문한의 임무를 띠고 보좌하며 갔다가 우신관에 나아가 한 집에 여선상女仙像이 놓인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당신 나라의 신인데 공 등은 아는가?”라고 했다. (그러고) 마침내 이르기를, 옛날 황실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자, 이에 바다를 건너가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시조 왕이 되었고, 황실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 여신상이다.”라고 하였다. 신은 또 송의 사신 왕양王襄이 동신 성모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보았는데, “현인을 잉태하여 나라를 처음 세웠다는 구절이 있어 이에 동신이 곧 선도산 성모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을 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상서 이자량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문한文翰으로 따라갔던 김부식이 자신의 견문과 생각을 적은 것이다. 그는 에서 송나라의 우신관에서 여선상을 보고 왕보로부터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으며, 에서 송나라 사신 왕양이 고려에 와서 지은 동신 성모의 제문을 상기하여 동신이 곧 선도산 성모라는 것을 알았으나, 에서 성모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선도산의 성모 전승은 중국 황실의 딸이 남편이 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不夫而孕] 바다를 건너 진한에 와서 낳은 아들이 해동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성모는 외부 세계에서 들어온 외래신外來神으로, 남자와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고 시조라는 성스러운 아이를 출산한 처녀신, 곧 성처녀聖處女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예종睿宗 11(1116) 7월에 송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8월에 돌아왔다. 이에 비해 동신 제문東神祭文을 지은 왕양은 송나라의 사신으로 예종 5(1110) 6월에 고려에 들어왔다가 같은 해 7월에 돌아갔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의 이야기를 듣고, 에서 6년 전에 지은 왕양의 그 제문을 상기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렇게 동신 성모를 선도산 성모로 본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지금 상고하건대,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시초에는 이런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의 출생에 유화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러한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삼국의 초기에 중국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낳은 아이가 시조가 되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동명을 낳은 유화의 고사故事가 중국에 잘못 알려져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하고 추정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김상기는 선도산 여선女仙의 거재지據在地라는 선도산의 명칭을 살펴보면 이는 그 설화가 보여주듯이 도교적인 신선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서 신라 시대의 서악西岳의 별칭이 아니었던 듯한바 아마 김부식의 기록서 묻어나와 서악에 부회된 것이 아닐까 한다.”라고 하여, 선도산이 신라 시대의 이름이 아니라 김부식의 기록으로 인해 붙여졌을 것이라고 하면서, 김부식이 송의 선도산 여선을 내세워 가지고 내지동신 즉선도신성자야[乃知東神 則仙桃神聖者也.]라고 억측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여, 송나라의 선도산 여선을 신라의 그것으로 잘못 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김상기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이유는 위 자료의 에서 송의 관반학사 왕보가 옛날 황실의 딸이 남편이 없이 잉태하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자 바다에 배를 띄워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시조 왕이 되었고, 황실의 딸은 지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었다.”라고 하여, 분명하게 선도산의 성모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김부식이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위의 자료에서 왕보로부터 들은 의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에서 성모의 아들이 어느 때에 왕 노릇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처럼 성모 전승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김부식은 동신사에서 받드는 유화의 제사보다는 왕양이 지은 동신 제문을 더 중시하는 유학자였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가 그 제문에 있는 현인을 잉태하여 나라를 처음 세웠다[娠賢肇國].”라는 구절과 우신관에 모셔진 여선인 중국 황실의 딸이 낳은 아이가 해동의 시조 왕이 되었다고 한 왕보의 설명이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동신 성모를 선도 성모로 보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문제는 어찌 되었든, 김부식이 송나라에 가서 직접 선도산의 여선상을 보았고, 또 그녀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 신라에 전해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형의 이야기가 일연의 󰡔삼국유사󰡕 1 기이紀異 1 신라 시조 혁거세왕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 5]

(1) 설자說者가 이르기를 (박혁거세: 인용자 주)는 서술 성모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의 선도 성모를 찬미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2)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니겠는가!

 

이 자료는 (1) 설자가 성모에 관한 전승을 이야기한 단락과 (2) 일연이 계룡을 서술 성모의 현신으로 본 단락으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설자해설하는 사람’, 곧 서술 성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그는 서술 성모가 혁거세를 낳았다고 하면서, 이것을 증명하는 자료로 중국 사람이 선도 성모를 찬미하여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진술이 사실이라면, 서술 성모 신화는 신라 시조 혁거세의 어머니에 얽혀 전해지던 이야기였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듯하다.

일연은 이런 전승을 근거로 하여, “계룡이 상서를 나타내어 알영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 성모의 현신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혁거세를 낳았다고 하는 서술 성모가 계룡으로 현신하여 알영까지도 낳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가 너무 비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와 같은 논리의 비약은 󰡔삼국유사󰡕 5 감통感通 7 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조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료 6]

(1) 진평왕 대에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에 살면서 새로 불전을 수리하려고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쪽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위로하여 말하기를, “나는 바로 선도산 신모이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고자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보시하여 돕고자 하니, 마땅히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존主尊과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 53명의 부처와 6류 성중六類聖衆 및 여러 천신天神, 5악 신군五岳神君(신라 시대의 5악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 부악父岳 또는 공산이라고 한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계절 10일 동안 선남선녀를 다 모아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삼도록 하라.”고 했다.(고려조의 굴불지의 용이 황제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에 약사도량을 항상 열어서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일이 또한 이와 같다.)

지혜가 곧 놀라 꿈에서 깨어나 여러 사람을 데리고 신을 모시는 사당[神祠]으로 가 자리 밑의 땅을 파서 황금 160량을 얻어 불전을 수리하는 일을 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가 이르는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 사적만은 아직도 남아 있으나 불법의 행사는 없어져 버렸다.

(2) (선도산)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이고,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와서 오래 머물고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아버지 황제가 솔개의 발에 서신을 묶어 보내어 말하기를, “솔개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으라.”라고 했다. 사소가 서신을 받고 솔개를 날려 보내자 이 선도산으로 날아와 멈추었으므로, 드디어 여기에 와서 집을 짓고 지선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하였다. 신모가 오래도록 이 산에 머무르며 나라가 평안토록 도우니 신령스럼고 이상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3三祀의 하나로 삼았으며 등급으로는 여러 명산대천 제사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매를 놓았으나 잃어버렸다. 신모에게 기도하여 말하기를 만약 매를 찾으면 마땅히 작호를 봉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신모를 대왕의 직위에 봉하였다.

(3)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성한 아이를 낳아 동국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인이 태어난 근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룡·계림·백마 등으로 일컬으니 닭은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신모가) 일찍이 여러 하늘의 선녀[天仙]로 하여금 비단을 짜게 하여 붉은 물감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녀의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

(4) 또한 국사에서 사신이 말하였다. 김부식이 정화政和 연간(1111-1117)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갔는데 우신관에 가니 한 사당에 여선상女仙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 분은 당신 나라의 신인데 공은 아는가?”라고 했다.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에 닿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황실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었으니 이것이 그 상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신 성모를 제사하였는데 제문에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지금 (신모가) 능히 금을 보시하여 부처를 받들고 중생을 위하여 향화香火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장생법長生法만 많이 배워서 몽매함에 얽매일 것인가.

 

이것은 (1) 선도산 성모가 지혜의 불사를 도와준 것과 (2) 선도산 성모의 출자出自와 호국 및 이적異蹟 (3) 성스러운 아이의 탄생과 건국, (4)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 등의 네 단락으로 구분된다. 일연은 이런 이 자료의 세 번째 단락 밑줄을 그은 에서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성한 아이를 낳아 동국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인이 태어난 근본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혁거세와 알영이 다 같이 신모로부터 태어났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서술은 앞 자료 3의 단락 (2)에서 알영을 낳은 계룡을 서술 성모의 현신이라고 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위의 자료 단락 (3)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기록한 선도 성모 이야기, 곧 자료 1을 옮겨 적은 것이다. 특히 은 김부식의 견문을 그대로 전사하였다. 그러면서 (1)에서는 서연산에 얽힌 이야기, 중국 황실의 딸인 사소가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왔는데, 황제가 솔개를 보내면서 이 새가 머무는 곳에 정착하라고 했으므로 선도산에 머물며 지선이 되었다는 것을 첨가했다. 이것은 자료 1보다 내용을 한층 더 부연했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 황실의 딸 이름이 사소였고, 또 그녀가 정착한 선도산은 황제가 보낸 솔개가 머문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첨가하면서도, 사소가 아이를 배어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자 그것을 피해서 진한으로 왔다는 내용은 옮겨 적지 않았다. 이처럼 첨삭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이 기록이 신라에도 사소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드러낸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전승에 대한 일연의 생각을 서술한 단락 (2)에서는 일찍이 여러 하늘의 선녀로 하여금 비단을 짜게 하여 붉은 물감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녀의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여, 그녀에게 남편이 존재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 단락 (3) 김부식이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 것과는 분명하게 상치된다. 물론 일연이 기술한 것처럼 당시에 선도 성모에게 남편이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승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일연이 자기 나름대로 김부식의 기록을 윤색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이런 지적은 남편이 없이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신화적 표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연으로서는 하늘의 선녀들이 조복을 만들어준 남편이 있었다고 표현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추정은 자료 4(2)에서 계룡이 알영을 낳은 것을 성모의 현신으로 보기도 하였고, 위의 자료 에서 혁거세와 알영을 다 신모가 낳았다고 하는 등 자기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쉽게 말해 그가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자료를 윤색하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의 선도 성모 신화는 남편이 없이 처녀로 낳은 아이가 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는 시조모의 성처녀 신화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선도산 성모 신화와 비슷한 자료가 가락국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이 󰡔신증동국여지승람󰡕 29 고령현 건치 연혁 조에 실린 정견모주政見母主의 신화에서 확인이 된다.

 

[자료 7]

최치원의 󰡔석이정전󰡕을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인 이비가에 감응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즉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 옛 기록의 여섯 알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 󰡔석순응전󰡕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10대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이며, 신라에 혼처를 구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할 것이 못된다.

 

이것은 최치원崔致遠󰡔석이정전釋利貞傳󰡕󰡔석순응전釋順應傳󰡕에서 인용된 자료이다. 전자의 밑줄 친 에서는 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夷毗訶의 감응으로 인해서 대가야의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다고 하였고, 후자의 에서는 이뇌왕異腦王이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15세기에 노사신盧思愼과 양성지梁誠之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렸다는 사실은 최치원이 생존했던 9세기 무렵에 이것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유사한 모티프의 성모 신화 역시 신라 시대에 존재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정견모주 신화가 성모 신화처럼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신화는 왜 이렇게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경험이 없는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모티프를 차용하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황패강黃浿江은 천으로 상징된 영적 존재인 원부原夫가 영매靈媒를 통하여 체매體媒(여체女體)에 투입되어 육신의 인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화학에서는 이처럼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출생은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계층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사회의 지배계층에게는 보통사람들과 구분되는 탄생담이 요구되었다. 그래야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나 지배계층이 될 수 있었다. 곧 권력을 장악한 집단의 조상들에게는 무엇인가 예사 사람들과는 다른 탄생의 이야기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 조상의 탄생이 보통사람들의 그것과 구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왕이나 지배집단의 우월성과 신성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조상들의 탄생부터가 신비롭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신비한 탄생담을 가짐으로써 지배집단의 조상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갖춘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권력을 장악한 왕은 그 권력의 절대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지영李志映은 선도산 성모나 정견모주와 같이 여산신이 건국 시조를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주족移住族인 지배집단들 사이에 전승되는 신화와는 달리 토착 집단에서는 또 다른 유형의 신화가 전승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이들 신화는 이 일대에 선주先住하던 집단의 전승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따라서 선도산 성모 신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보기보다는 신라 재래在來의 전승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도산 성모 신화에서 그녀의 출자出自󰡔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중국이 아니라, 부여夫餘 황실皇室로 되어 있어 주목을 받는다.

 

[자료 8]

사로斯盧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婆蘇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에 이르렀다. 그때 소벌도리蘇伐都利란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여 성덕聖德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居世干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부여와 신라의 관계를 시사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인정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화 상으로 볼 때 동부여와 신라는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앞의 자료1과 자료2의 고찰에서 본 것처럼, 동부여의 금와金蛙와 신라의 알영閼英은 다 같이 대지에서 나온 출현 신화로 되어 있어서, 이들 신화를 가졌던 두 집단이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졌을 것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김철준의 연구에 의하면, 알영은 닭 토템을 가진 토착 또는 선주先住의 김부족金部族 출신 이었고, 또 동부여의 금와金蛙역시 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시사를 준다. 그래서 이런 추정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대지를 숭상하던 금와 집단이나 신라의 김 씨 부족은 다 같이 선주先住하던 세력이었고, 또 같은 계통의 농경문화를 가졌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농경문화 집단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고대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지장이 없지 않을까 한다.

이제까지 외부에서 들어온 여신이 남편이 없이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시조가 되었고, 그녀는 뒤에 선도산의 지선이 되어 성모 또는 신모로 받들던 성모 신앙과 그에 얽힌 신화가 이미 신라 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러한 성모 전승과 그 숭배는 신라의 영역이었던 한국의 남부지방 일대의 고유 신앙이었을 것으로 상정하였다. 이렇게 상정할 수 있는 근거는 중국에서 사용된 성모란 명칭이 시조모를 가리킨 예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모 신앙이란 시조모인 산신을 숭배한 신라의 고유 신앙이었으며, 이것을 중국의 서왕모 전승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김태식金台植이런 성모류聖母類 신앙들이 실은 서왕모西王母 신앙의 복사판, 즉 그것의 신라식 버전이라는 사실도 쉽사리 간파된다.”라고 하여, 이것이 서왕모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에는 한국에 있었던 성모聖母와 같은 이름으로 숭앙을 받은 산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나가 다카시須永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중국에 있어서 성모 존칭이 사용된 문헌을 본다면, 그 존칭이 빈번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자격을 가진 여성에 대해서 부여되었던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라고 하여, 이 존칭이 한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사례들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측의 성모에 대한 기록과 그 연구 성과를 일별한 다음에, 성모 신앙이 한국 고유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그것이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북 규슈 일대에 분포된 성모 신앙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신라의 선도산 성모 신화와 유사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일본의 자료를 소개한 바 있다.

 

[자료 9]

진단국진대왕震旦國陳大王의 딸인 오히루메大比留女는 일곱 살 때 임신을 했다. 부왕父王이 갑자기 놀라서 너는 적은 나이가 아닌데, 누구의 아이인가?”하고 물으면서 쳐다보니, (딸이) “제가 꿈에 아침 햇빛이 가슴에 비취더니 임신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놀라면서 태어난 아이와 함께 통나무배에 태워 떠내려가 이르는 곳에 살라고 하면서, 큰 바다에 띄어 보냈다. (모자는) 일본의 오스미大隅(지금의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동부지방)에 도착하여, 태자太子는 하치만신八幡神이란 이름으로 모셔지고, 이에 따라 배가 도착한 곳을 하치만 갑八幡崎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게이타이 천황継体天皇 때의 일이다. 오히루메는 치구젠筑前(지금의 후쿠오카현福岡縣의 북서부지방)의 와카스기산若椙山으로 날아가 들어간 뒤에 가시궁香椎宮의 성모대보살聖母大菩薩이 되었다. 태자는 오스미에 머물러서 세이하치만 궁正八幡宮으로 모셔졌다.

 

이것은 스나가 다카시가 ·일의 성모신앙 국경國境의 모신母神을 중심으로란 논문에서 예로 들은 󰡔잇켄비구필기惟賢比丘筆記󰡕의 오스미쇼하치만본연기大隅正八幡本緣起이다. 이 자료에서는 오히루메는 자신이 낳은 아이와 함께 표박漂泊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의 선도산 성모 신화에서는 중국의 황녀皇女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아이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자료가 거의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이 자료와 같이 고귀한 혈통의 여성이 그 아이와 함께 통나무배에 태워져, 바다를 표류하다가 어떤 장소에 표착漂着하여 신이 되었다고 하는 유형의 이야기를 통나무배 설화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유형에 속하는 설화들을 비교 연구한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는 쓰시마對馬島에 전해지는 천동설화天童說話에 속하는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한국의 자료 4와 일본의 자료 9와 같은 유형의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예화例話를 소개하였다.

 

[자료 10]

옛날에 궁중의 뇨인女院이 불의不義 때문에 통나무배에 넣어져 흘러가다가 쓰쓰나이인豆酘內院의 항구에 표착하였다. 그때 이미 회임懷妊해서, 태어난 것이 천동天童인데, 그 탄생지는 나이인內院의 사이야마菜山 하천의 옆이었다.

 

이 자료는 신라 경역의 선도산 성모 신화와 일본의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오스미쇼하치만본연기大隅正八幡本緣起의 오히루히메 신화의 중간에 있는 쓰시마對馬島 쓰쓰나이인豆酘內院에 전해지는 것이다. 미시나는 이들 세 자료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물론 전설의 수록 연대는 반드시 전설의 신고新古를 헤아리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김부식이 수록한 소전所傳 󰡔삼국유사󰡕 성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 조에 보이는 비슷한 소전 등으로부터 보더라도, B형의 전설이 고려 시대에 특히 불교 신앙과 습합習合을 계속하면서 성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짐과 동시에, 당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승려의 왕래가 성행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일광 감응 전설이 일본보다도 조선 쪽에 오히려 일반화되었다는 것 등으로부터 보더라도, 󰡔잇켄비구필기惟賢比丘筆記󰡕와 쓰시마의 그것이 조선의 소전에 관계가 없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통나무배유형의 이야기는 일본 각지에 꽤 많이 분포되어 있는 전설이기 때문에, 일본·조선의 사이에 깊은 교섭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위와 같이 간단하게 전파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하여, 보다 본질적으로 논해야만 할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단지 이 유형의 전설이 조선과도 깊은 교섭이 있었던 것을 주목하는 데 그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그의 견해는 일본 오스미大隅의 오히루히메大比留女 전설이나 쓰쓰나이인豆酘內院의 천동 전설이 한국의 선도산 성모 신화와 관계가 있다고 보면서도, 단순히 전파의 문제로 다룰 것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일본의 전설들이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의 성모 신앙은 신라의 성모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두 나라의 신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이제까지 가부장 제도의 확립으로 변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의 여신 신화들 가운데에서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지모신 숭배 사상과 여기에서 파생된 출현 신화, 그리고 산악신앙의 한 형태로 정착된 성모 신화 등을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얻은 성과들을 요약한다면 아래와 같다.

첫째 한국에서도 비너스상의 잔영인 중국 요녕성遙寧省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 유적의 소조塑造 임부상妊婦像과 함경북도 청진시淸津市 농포동農圃洞 유적의 소조 임부상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고고학계에서는 이들 유적이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고 난 다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중국의 요녕성은 우리 민족이 살았던 곳이었으므로, 이들 임부상은 한국 민족이 일찍부터 지모신을 숭배 사상을 가졌던 증거로 보았다.

둘째 이러한 지모신 숭배 사상에서 창출된 것이 출현 신화라는 사실을 규명하였다. 이 문제는 한국의 신화학계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지만, 한국의 신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출현 신화가 한국에서는 왕권 신화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부여의 금와왕과 신라의 알영, 탐라국의 세 성씨 시조가 다 같이 출현 신화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고대사회에서는 농경문화 집단이 뒤에 들어온 수렵·유목문화 집단에 정복되어 동화되지 않고 고대국가의 성립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례는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므로, 한국문화 내지는 한국 신화의 한 특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셋째 지모신 숭배 사상은 산신 신앙으로 확대되어 산신 신화를 창출하였다. 이들 산신 신화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도산 성모 신화이다. 이 신화는 나라의 시조를 낳은 성모가 남자와의 교접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남편 없이 잉태를 했다[不夫而孕]고 하는 성처녀 신화로, 신라 고유의 산신 신앙이었을 것이라고 상정하였다. 이러한 상정을 하게 된 이유는 신라의 성모 신앙이 중국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견해를 밝히는 데는 스나가 다카시須永敬의 연구에 시사를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그는 중국에서 성모聖母라고 칭한 경우는 (1) 샤먼과 (2) 열녀烈女, (3) 측천무후則天武后, (4) 황태후皇太后, (5) 성모라는 이름을 가진 성모사聖母祠·등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넷째 그러면서 선도산 성모의 출자出自󰡔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중국의 아니라 부여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한국의 출현 신화에서 고찰한 것처럼, ‘금와金蛙알영閼英은 다 같이 땅에서 나왔다는 출현 신화를 가졌으며, 또 선주先住하던 집단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두 집단은 문화적 계통을 같이하는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앞으로 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이러한 신라의 성모 신앙은 일본의 북 규슈北九州로 전해져서 이 일대의 성모 신앙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선도산 성모 신화와 일본의 진단국진대왕震旦國陳大王의 딸인 오히루메大比留女 신화가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은 지모신 숭배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고찰하였으나, 이 이외에도 한국의 여신 문화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젊은 학자들이 이 방면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연구하였으면 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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