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증산도 ‘대인대의大仁大義’와 보천교 교리 ‘인의仁義’

유철(상생문화연구소)

2023.04.04 | 조회 2926

2021년가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증산도 대인대의大仁大義
보천교 교리 인의仁義

 

유 철(상생문화연구소)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유교의 인과 의

3. 병세문과 대인대의大仁大義

4. 보천교의 교리 인의

5. 대인대의와 인의

6.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이 글의 주제는 인의仁義이다. 인의는 인과 의를 강조한 공자와 맹자에 의해 시작된 사상으로 유교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인의는 유불선을 통합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연 증산상제에 와서 대인대의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새롭게 설정되었다. 그 후 증산상제의 종도이자 일제시대 보천교라는 교단을 창시한 차경석에 의해서 인의는 교단의 가장 중요한 이념인 교리가 되었다. 그 셋은 서로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무엇이 같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논자가 이 주제를 연구한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대인대의, 즉 인의가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검토하는 데 있었다. 그러기에 먼저 유교에서 인의가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유교의 인과 의에 대한 분석은 이글의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증산상제의 대인대의가 후천문화가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의와 대인대의가 유교적 색채를 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교나 불교나 도교는 선천 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증산상제의 대인대의는 선천 선의 한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교는 새로운 유교로 후천선문화의 한 토대로 습합되는 것이다.

한편 차경석은 보천교를 개창하고 인의로 교리를 삼았다. 물론 차경석에 의해 보천교의 교리가 된 인의 역시 유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보천교 연구가들은 차경석이 증산상제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스스로 유교적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았다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천교 연구자들의 해석은 정당한가? 논자는 보천교 교리 인의가 보천교, 혹은 차경석의 신로변경, 혹은 보천교의 유교화의 결과로 드러난 것인지 아닌지를 보천교 문서들을 통해서 좀 더 논리적으로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는 의외로 보천교의 인의는 증산상제의 종도로서 차경석이 선택한 결과이지 신로변경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보천교의 인의는 새로운 유교, 후천 선의 한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할 대인대의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호간의 맥락을 분석하여 그 원래의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니다.

사실 증산도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일반적으로 보천교에 대해서도, 차경석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만일 그에 대해 연구한다면 일제하 민족종교로서 보천교가 700만의 교도를 거느리면서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는 등 깊이 관여했다는 점이나 일진회, 대동회 등 당시 사회단체들의 활동 등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주제가 될 것이다. 논자는 이와 달리 보천교의 교리를 통해 보천교의 뿌리와 이념, 이상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증산상제의 종도로서 차경석의 보천교를 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차경석도, 보천교도 모두 증산상제와의 관련 하에 대중 앞에 그 전모를 드러내고, 독립운동이나 사회단체와의 관계가 아니라 증산상제의 가르침이 선포된 한 맥락에서 그 교리도 신앙도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논문은 그러한 목적의 한 시도이다.

 

2. 유교의 인과 의

 

유교에서 인의는 공자의 인과, 이를 이어받은 맹자의 인의仁義 사상의 종합이다. 그리고 그 두 철학자의 인사상의 근원은 이다. 동양 고대사상에서 하늘은 모든 질서의 바탕이며 행위의 근원이다. 공자와 맹자에 있어서도 하늘은 물리적 하늘이 아니라 완전하고 선하고 어질고 아름다운 것의 본체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생성의 근원 역시 하늘이기에 인간은 하늘을 본받아 살아가며, 인간의 정치와 도덕 역시 하늘의 본성을 토대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하늘의 형이상학적 특성을 천도天道로 이름할 수 있다면, 인간의 형이상학적 특성은 인도人道로 규정된다. 즉 하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본받은 인간의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은 인간의 실천도덕에도 해당한다. 그래서 천도를 본받아 인도를 완성하고 이를 실천하는 자가 유교에서 완성된 도덕적 인격체, 즉 성인聖人 혹은 대인大人인 것이다.

공자에 있어 윤리적 삶의 내적 근거는 바로 인이다. 그런데 논어에서 하늘이 나에게 덕을 심어두었다고 한 것처럼 인간의 내적 본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므로 인을 구하는 것은 내 마음 속의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과 같다. 즉 인을 실현하는 것은 내 본성에 내재한 하늘의 도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혼란한 세상을 이상적인 세상으로 만드는 조건을 사람의 도덕적 실천에서 찾았기에 인은 도덕적이며 이상적인 삶의 근거로 규정되었다. 즉 올바른 세상은 올바른 인간에서 찾아지므로 혼란한 현실 속에서 올바른 인간의 완성이 그 목적이며, 이는 바로 내면에 깃는 인의 실현이며 실천이다. 비록 인이 천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 인은 형이상학적 도식적 인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실현될 삶의 도리이며, 인간 사이의 올바른 법도이며, 실천 규범으로 나타난다.

맹자 역시 인을 구하는 것은 천도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공맹사상에서 그 핵심은 모두 바로 인과 인의이다. 그 구조는 공자가 天道로 표방하였다면 맹자는 공자의 인의 도가 발현한 도덕적 인간을 내세워 인을 세상에 구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 두 철학자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비교된다.

 

공자는 인으로써 의지의 입법성을 긍정하는 도덕 철학의 기본 방향을 열었고, 맹자는 이를 계승하여 심선心善으로써 성선性善을 증명하였으며, 또한 인의 내재로써 심학 이론의 초보적인 완성을 이루었다.

 

즉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는 하늘의 이치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아 그 도덕적 성품을 결정하며, 따라서 인간의 성품은 원래부터 하늘의 본성을 본받아 선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것이 맹자 성선설의 논리적 결론이며 공자의 인과 만나는 지점이다. 中庸에 나오는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는 유명한 구절은 맹자의 철학과 결코 다르지 않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의 출처를 하늘로 보며, 당연히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본성과 같아 그 속에 도덕적 씨앗을 품고 있으며, 그 도덕적 본성이 행위로 드러나 인이 실현된다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같은 길에 서있다.

맹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 맹자孟子는 동양 4대 고전古典에 속한다. 그 첫 장이 양혜왕梁惠王편이다. 여기에는 맹자가 자신의 도덕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방문한 나라인 양나라의 왕과 올바른 정치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 담겼는데 그 첫 구절은 바로 인의仁義에 대한 것이다.

 

맹자께서 양혜왕을 만나보시었다. 왕께서 말씀하시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마다않고 찾아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시었다. “왕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인의에 대한 맹자의 강조는 유가 심성론의 확립과 왕도정치의 강조, 그리고 인의를 근거로 한 의와 리의 구분이라는 맹자철학의 세 가지 공헌 중 하나다. 그럼 맹자의 인의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은 모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측은지심을 인이라 하고, 수오지심을 의라 하고, 공경지심을 예라 하고 시비시심을 지라 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밖에서 나에게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단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맹자의 말은 곧 인의예지는 인간 고유의 본성이며, 그것은 이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네 가지 착한 마음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 사단四端이 성숙, 발전하여 마음의 규범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인의예지가 우리의 본성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즉 맹자에 있어 인의는, 사단四端이 본래적인 것으로 천도가 사람에게 내재한 선한 심성인 것처럼, 그 자체 은폐된 사람의 본성이다. 간단히 말해 측은지심은 인간이 원래 품부받은 착한 마음이며, 이 측은지심이 발현되어 드러나게 되면 인이 하나의 도덕규범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즉각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그러나 그 마음만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즉각 그 마음이 실천으로 옮겨져 아이를 구해야한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인이 실현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으로 하늘이 심어준 인의는 사단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니 사단은 인의예지에 실천적으로 선행하지만 논리적으로 인의예지가 먼저이다.

 

과 심은 도덕 이성인 동시에 내용상 천도와 관통하는 초월자이다. 인과 심을 단순한 추상적인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도덕의지는 논리적인 사변보다는 진실한 도덕 실천을 통하여 체증體證된 것이어서 현상화될 때 반드시 구체적인 정감情感을 수반하여 표출된다.

 

이러한 말은 논자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래서 인의의 인식근거는 측은지심이며 수오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맹자는 인의예지는 마음에 근원을 둔다고 한 것이다. 이때 마음이란 사단이다. 이 은폐된 인을 실현하여 세상에 온전히 드러냄이 바로 올바른 인도人道인 것이다. 이 사람의 본성이므로 맹자는 은 인이라고 하였고, 그 둘을 합하면 라고 하였다.

맹자에 있어 인과 의는 서로 합해질 때 인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래서 맹자는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라고 하였다. 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깃든 본성이고, 는 그 인을 가진 사람이 본래 가야할 마땅한 길이다. 즉 인간의 마음은 본래 인이고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도덕적으로 본래 선한 존재이다. 그 인이 몸을 통해 그대로 발현될 때 그것이 바로 의이며, 그래서 의는 인의 마땅함이며, 올바름이며, 선함이다. 그렇다면 맹자의 인의仁義는 곧 올바른 인도人道인 셈이다.

인의는 사람이 본래 가야할 올바른 길이며, 그것은 천도天道를 본받은 것으로 인도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인도를 걷는 사람이 유가의 완성된 인간인 대인大人이다. ‘선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맹자는 뜻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였고, ‘뜻을 높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인의가 바로 그것이라고 대답한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이 아니며, 남의 것을 취하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 다음 구절은 인과 의에 관련된 맹자의 유명한 말이다.

 

에 거하고 의를 따른다면 대인의 삶이 갖춰진 것이다.

 

죄없는 자를 죽이거나 남의 것을 취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그 각각을 인과 의로 구분했지만 모두 올바른 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의 본성으로 본래 주어진 길인 의로義路를 갈 때 그는 바로 대인大人이며, 완전한 도덕적 인격체이다. 이와 연결되는 말이 다음의 구절이다.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올바른 길이다.

 

이 사람의 편안한 집이므로 거기에 살아야 하며, 는 사람이 따라야할 행위이므로 올바른 길(正路)이다. 집과 길은 사람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필연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인도 의도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비록 맹자의 서로 다른 부분으로 나뉘어져 나타나고 있지만 인의를 말함에 있어 반드시 서로 연관해서 살펴보는 구절인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맹자의 인의는 사람의 본성이자 행해야할 마땅한 도덕적 규범으로 원래부터 하늘이 인간에 내린 사단의 발현에서 드러나는 인간 윤리의 극치이다. 그래서 이를 온전히 발현하는 사람이 유가의 이상적 인간이며 도덕적 완성체인 군자이며, 성인이며, 대인大人이다.

 

3. 병세문과 대인대의大仁大義

 

증산상제의 언행을 기록한 도전에는 유가적 인격체인 군자, 성인, 대인에 대한 구절이 많이 들어있다. 그 이유는 증산상제의 가르침이 유불선을 회통하는 새로운 선, 즉 후천선後天仙으로 통일되기 때문이다. 그 중 유가의 이상적 인간상인 대인 혹은 성인 역시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후천선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다음의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 삼도三道를 통일하느니라. 나의 도는 사불비불似佛非佛이요, 사선비선似仙非仙이요사유비유似儒非儒니라.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에 붙여 놓았느니라.(도전4:8:7~9)

유불선 삼도가 통일된 즈산상제의 가르침은 불도인 듯 불가가 아니고, 유도인 듯 유가가 아니며, 선도인 듯 선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불도의 형체, 유도의 범절, 선도의 조화 등 유불도의 핵심을 뽑아 선(후천선)에 붙여놓았다고 하였다. 유도의 핵심은 범절凡節인데 이러한 도덕적 규범 역시 후천의 새로운 도인 선도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며, 후천선은 곧 유도가 내포된 선도인 것이다.

증산상제는 유도의 핵심 이념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에 대해 새로운 풀이를 하였다.

 

치우치게 사랑하고 미워한다 평받지 않음이 참된 어짊()이요 모두 옳다거나 그르다 평 받지 않음이 바른 의이며 너무 뻣뻣하거나 편의를 따른다 평 받지 않음이 옳은 예이고 방자히 총명을 뽐낸다 평 받지 않음이 성숙한 지혜로움()이며 함부로 낭비하고 욕심부린다 평 받지 않음이 진정한 믿음이니라.(도전8:94)

 

오상에 대한 증산상제의 가르침은 유도와는 다른 새로운 평가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오상의 진정한 덕목은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길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19세기 당시 위정자들의 행태를 비판하여  부유腐儒니라.”(도전3:106:13)고 하였지만 유도의 본질적 가치는 후천의 새로운 가르침의 바탕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인의와 관련하여 증산상제의 가르침이 명확히 표현된 구절은 바로 대인대의이다. 그럼 유가의 인의와 달리 증산도에서 대인대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를 분명히 알기위해서는 증산도 도전에서 대인대의가 언급되는 부분을 검토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도전속에서 대인대의는 두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도전2:17:1~9의 내용을 보자.

 

나의 도는 상생相生의 대도이니라. 선천에는 위무威武로써 승부를 삼아 부귀와 영화를 이 길에서 구하였나니, 이것이 곧 상극의 유전이라. 내가 이제 후천을 개벽하고 상생의 운을 열어 선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리라. 만국이 상생하고 남녀가 상생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화합하고 분수에 따라 자기의 도리에 충실하여 모든 덕이 근원으로 돌아가리니 대인대의大仁大義의 세상이니라. 선천 영웅시대에는 죄로 먹고살았으나 후천 성인시대에는 선으로 먹고살리니 죄로 먹고사는 것이 장구하랴, 선으로 먹고사는 것이 장구하랴. 이제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 먹고살 도수度數를 짜 놓았노라. 선천은 위엄으로 살았으나 후천 세상에는 웃음으로 살게 하리라.(도전2:17:1~9)

이 성구에서 보이는 대인대의는 후천선경의 도덕적 특성을 규정하는 말로써, 모든 덕이 근원으로 돌아가 인과 의가 완전히 실현된 세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대인대의는 인의의 큰 실현, 인의로 살아가는 삶, 인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성숙한 인간 등을 뜻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후천 세상을 상징하는 개념으로서 대인대의는 유교적개념이다. 특히 증산 상제의 말씀에서 모든 덕의 근원’, ‘성인시대라는 표현에서 유교적 함의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대인대의의 세상은 결국 상생의 세상과 같은 뜻이다. 후천의 도는 상생의 대도이며, 상생의 세상은 모든 덕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대인대의의 세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도전 인용문의 대인대의는 유도적 인의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상생의 도로서 모든 덕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후천의 생활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증산상제의 대인대의는 유도의 인의가 후천선경의 실천원리로 확대된 새로운 개념으로 규정된다.

두 번째로 대인대의가 나타나는 곳은 병세문인데 그곳에서는 대인대의大仁大義 무병無病이라고 하였다. 대인대의의 경지에서는 병이 없다는 뜻이다. 이 대인대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세문이 어떤 글인지를 설명해야한다. 병세문病勢文현무경玄武經과 함께 남겨진글인데 도전에서는 그 성격과 출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유(己酉 : 道紀 39, 1909)년 설날에...안내성의 집에 가시어 사시巳時에 현무경玄武經을 쓰시고 말씀하시기를 현무경에 천지이치와 조화의 오묘함을 다 뽑아 놓았느니라.” 하시니라. 이 때 양지 두 장에 글을 쓰시어 심지처럼 돌돌 말아 작은 흰 병 두 개에 한 장씩 나누어 넣으시고 병 입을 종이 마개로 막아 방 한쪽에 세워 놓으신 뒤 그 앞에 백지를 깔고 현무경과 작은 칼을 놓아 두시니라.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경석이 병 하나를 들어 그 속에 든 작은 심지를 빼어 보니 흉화개흉실凶花開凶實이라 적혀 있고 다른 병에서는 길화개길실吉花開吉實이라 적힌 종이 심지가 나오니라...경석이 현무경을 펴보매 부와 여러 글이 써 있으니 이러하니라.(도전5:345-346)

 

현무경에 적힌 글인 <병세문>의 내용은 매우 함축적이고 비유적이어서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인의가 포함된 그 <병세문>의 내용이다. 그 중 중요한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病有大勢하고 病有小勢하니 大病無藥하고 小病或有藥이라 이나 大病之藥 安心安身이요 小病之藥四物湯八十貼이라...大病 出於無道하고 小病 出於無道하니 得其有道則大病勿藥自效하고 小病勿藥自效니라...忘其君者無道하고 忘其父者無道하고 忘其師者無道하니 世無忠 世無孝 世無烈이라 是故 天下 皆病이니라 有天下之病者用天下之藥이라야 厥病乃癒니라...大仁大義 無病이니라...知天下之勢者有天下之生氣하고 暗天下之勢者有天下之死氣니라...(도전5:346:2~12)

 

이 문서는 첫 문장의 내용 病有大勢 病有小勢를 따서 병세문으로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병심신의 병과 함께 인간사회의 병을 아우른다. 왜냐하면 대병이든 소병이든 병의 원인을 무도無道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도로 인해 천하의 모든 것이 병이 들었다(天下 皆病)<병세문>은 진단한다. ‘무도란 인간의 심신과 사회를 건전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올바른 법도이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무도로 인한 병은 전 사회에 해당하기에 이는 소병이라기 보다는 대병에 속한다. 그리고 소병에 대한 약이 사물탕이라는 약제라고 한다면(이는 심신의 병) 대병에 대한 치료약을 안심안신安心安身(마음과 몸을 평안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 다음에 나오는 병에 대한 처방과 일맥상통한다. 즉 도를 얻으면(得其有道) 대병도 소병도 자연스레 낫는다는 것이다.

그럼 증산상제가 말한 병의 원인인 무도無道와 병의 처방인 유도有道는 무엇일까? 그 다음 구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즉 군사부君師父의 은혜를 잊는 것, 혹은 군사부에게 예를 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무도라는 것이며, 현재 세상에는 충신, 효자, 열녀가 없다는 판단은 곧 세상 전체가 무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천하개병天下皆病’, 즉 온 천지가 모두 병들었다는 진단이다. 그렇다면 그 병을 치유하는 유도즉 올바른 도는 무엇일가? 이에 대한 증산상제의 답이 바로 대인대의이다.

<병세문>에서 대인대의는 인간의 사회적 법도 혹인 인륜과 관련된 개념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무도인 무충, 무효, 무열에 대비해서 유도인 대인대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대인대의는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와 상통하는가? 논자는 <병세문>의 무도가 충효열이 없는 것이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병들었다고 본 점에서 분명히 유교적 범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병세문>이 온전히 유교적 맥락에서 기록된 것은 아니다.

<병세문>의 그 다음 구절은 유교적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천하대세를 아는 자는 살고, ‘천하대세를 모르는 자는 죽는다는 구절에서 증산상제는 병세에서 시세時勢를 언급하고 있다. 즉 천하가 처해있는 급박한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곧 삶(생명)의 길()이며, 모르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한다. 여기서 삶의 길은 천하대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물론 이때 천하의 대세는 유교가 말하는 정치적 윤리적 대세는 아니다. 증산상제에 있어 천지병과 천지공사는 단지 인간의 윤리적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가을개벽과 상극의 이치 등 우주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인대의는 유교적이라기보다는 우주원리적 관점에서의 병에 대한 처방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병세문>의 마지막 대목은 의통에 대한 가르침이고 이는 유교의 범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상이다.

 

(성인은) 천하의 직책과 천하의 업무를 우선으로 삼나니 직은 (병들어 죽어 가는) 삼계를 살리는 일()이요 천하의 업은 삼계문명을 통일하는 일()이니라. 성스러운 직이요 성스러운 업이니라.

 

<병세문>이 병의 크기와 그 원인 및 처방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그 병을 치유하는 최고의 법방에 대해 <병세문>은 의통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의통은 성인의 직업이라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성인이란 유교의 완성된 도덕적 인격체를 지칭한다기기 보다는 증산상제 자신을 가리키고, 의통으로 치유하는 병 역시 천하의 병으로 단지 도덕적 무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천지병은 선천 5만년동안 상극의 이치가 낳은 원과 한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병의 범주는 인간계뿐 만 아니라 천지우주와 신명계 모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병세문>에서 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유교적인 면도 있지만 그를 넘어서는 것이다. ‘안심안신’, ‘유도有道’, ‘천하대세에 대한 인식등과 대인대의는 모두 증산상제가 내린 병을 치유하는 처방으로 서로 상통하는 개념이다. 즉 증산상제가 <병세문>에서 말하는 대인대의’, 즉 인의는 병에 대한 처방이며, 그 병은 단지 신체적 병만이 아니라 천지의 병, 혹은 천하의 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유교적 이념인 인의와 완벽히 합치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안의의 도덕적 규범과 실천으로 올바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유교의 가치와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가야할 올바른 도덕적 길인 인의를 초월하여 천지자연과 시대와 신명과 신간의 모든 병을 치유하는 개념이 바로 대인대의이다.

증산상제의 대인대의 사상은 춘무인 추무의’, ‘춘생추살이라는 구절에서 더 잘 드러난다.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 농가에서 추수한 뒤에 곡식 종자를 갈머두는 것은 오직 토지를 믿는 연고니 이것이 곧 신로信路니라.

천지의 대덕大德이라도 춘생추살春生秋殺의 은위恩威로써 이루어지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의로움()이 있는 곳에 도가 머물고, 도가 머무는 곳에 덕이 생기느니라.” 하시니라.

 

춘무인이면 추무의봄에 어짐이 없으면, 가을에 의로움이 없다는 뜻이다. 즉 봄과 가을의 덕성을 인의로 풀이한 것이다. 그럼 봄의 어짐과 가을의 의로움은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춘생추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춘무인은 곧 봄의 생성의 덕이 ’, 즉 어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추무의는 가을 들녘의 추수하는 덕목은 즉 정의로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인과 의의 뜻은 각각 춘생추살에 담겨있다. 인은 봄에 만물을 낳는 생명탄생의 덕이며, 의는 가을이 되어 알곡은 추수하고 쭉정이는 버리는 행위에 담긴 올바른 심판의 덕목을 말한다. 증산상제는 이를 춘생추살의 은위라고 하였다. 봄에 만물을 낳는 덕목인 인은 천지의 은혜이며, 가을에 만물을 추수하는 덕목인 의는 엄정하고 정의로운 천지 심판의 위엄이다.

춘무인이면 추무의에서 인의는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고 추수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때의 정신이며 덕목을 말한다. 뭇 생명을 낳는 것은 사랑과 어짐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천지의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것은 냉엄한 판단과 정의로움이 없이 불가능하다. 비록 천지가 만물을 낳고 추수하는 것과 관련하여 인의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지만 그 속에 깃든 뜻은 유교적 가치인 인의와 통하는 면이 엿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천지만물을 낳고 추수하는 법도로서 인과 의는 바로 대인대의로 풀이되어야 한다. <병세문>에서 말하는 대인대의와 상통하는 부분이다.

 

4. 보천교의 교리 인의

 

1911, 증산상제의 종통을 이어받은 고수부는 대흥리 차경석의 집을 본소本所로 하여 교단道門을 개창하였고 차경석은 자연스럽게 고수부의 교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교단이 태을교, 훔치교 등으로도 불렸던 선도교仙道敎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차경석은 증산상제로부터 종통대권을 전수받아 그 가르침을 신봉하는 신앙단체인 선도교를 연 고수부의 휘하에 있었다. 그러나 차경석은 자신의 집이라는 이점과 이종사촌누이인 고수부와의 인간적 관계를 이용해 고수부의 교단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자리한 고수부의 교단은 그 실권이 차경석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고, 결국 고수부는 대흥리 교단을 떠나게 된다. 이때가 1918년이었다.

1918, 최초의 증산신앙계열인 대흥리 교단은 차경석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교단으로 바뀌었고, 그 다음해 차경석은 교의 핵심 간부 60(60方主)을 임명하면서 명실상부한 자신의 교단이라는 정당성을 얻기 위해 천제天祭를 지냈다. 2년 뒤인 1921년에 다시 천제를 지내 하늘에 고한 교의 이름이 보화교였으며, 그 이름은 곧 보천교로 바뀌었다. 차경석은 일제하 수백만의 신도를 거느린 보천교의 교주가 된 것이다.

보천교 교주 차경석. 그는 방대한 조직과 수많은 신도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보천교에 맞는 새로운 교리敎理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새로운 교리는 일찍이 그가 믿고 따르던 증산상제의 가르침과는 다른 색체를 띄고 있었다. 증산상제의 가르침과 같은 듯 다른 차경석의 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신종교 연구자들은 1928년 무진년 초에 이루어진 차경석의 도훈道訓무진설법戊辰說法을 계기로 공식화된 보천교 신로변경神路變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대부분의 보천교 연구자들은 차경석의 새로운 교리가 유교적儒敎的이라고 평가했다. 차경석의 유교적 교리는 곧 그의 변심變心을 상징한다고도 했다. 그럼 보천교의 교리 인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 그 교리가 과연 유교의 교리와 일치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보천교의 역사와 활동, 사상을 기록한 대표적인 문서가 보천교 교전敎典이다. 이외에도 보천교연혁사普天敎沿革史도훈道訓, 대도지남大道指南등의 서적들이 있다. 이중 보천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교전敎典이다. 보천교 교전은 보천교 신앙의 대상인 증산상제의 행적과 가르침을 담은 천사편天使編과 차경석의 출생과 행적, 그리고 가르침을 담은 성사전聖師典으로 구성된다. 이중 천사편은 증산상제의 탄강과 생애 그리고 천지공사와 화천化天 등 모두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전천사편을 앞에 두고 있고 그 분량 역시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보천교의 신앙대상이 증산상제이고 가르침의 근원이 증산상제에게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교전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증산천사는 상제의 권능을 임의로 전행專行하시고 우주를 개조하사 래세의 선경락원을 창설하신 고로 천사는 비인성非人聖이요 신성神聖이시다. 증산천사께옵서 선천의 운을 폐하시고 후천의 운을 여실 새 신명공사를 행하사 만고의 원을 풀고 상생의 도를 개명하사...후천 오만년 조화선경을 건설하시니 그 조화능력과 기행이적을 인간으로 난측難測하오며..

이로 볼 때 보천교의 신앙대상은 증산상제이며 그 가르침은 해원, 상생, 후천선경이며, 교도들은 증산상제의 천지공사를 믿으며, 비록 천사天師라고 하였으나 증산상제를 인간이 아닌 상제로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성사전에서도 증산상제의 핵심 가르침들이 곳곳에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사전의 첫 장은 짧지만 차경석의 탄생에 대한 비화秘話를 소개하고 바로 차경석과 증산상제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차경석의 종교적 뿌리를 증산상제에게서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성사전에서도 해원解寃, 상생相生, 일심一心, 후천선경後天仙境에 대한 증산상제의 가르침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보천교는 차경석의 보천교이다. 그리고 보천교의 교주인 차경석은 보천교의 교리를 스스로 설정하고자 하였다. 그 새로운 교리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천사 선화하신 후 월곡성사께옵서 그 명령을 받어 인의仁義의 교리와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윤正倫, 애인愛人 사대강령四大綱領으로 국경의 제한과 인종의 차별이 없이 천하창생을 가리쳐 화케하사 상생의 주의主義로 대동선경의 락원에 영원한 행복을 한가지로 누리게 하셨으니 이것이 보천교의 목적된 취지이다.

 

보천교의 새로운 교리가 선포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월곡성사 즉 차경석이 증산상제가 어천한 후 그 명령을 받아인의의 교리와 사대강령을 만들었다고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교리를 열거하면서 그 교리의 기원을 차경석 본인이 아니라 증산상제의 명령을 받아 한 것이라고 했다.

교전에서든 도훈에서든 보천교의 교리는 분명히 유교적 개념인 인의이며, 사대강령인 경천, 명덕, 정윤, 애인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유교의 주요 이념들이다. 그런데 보천교 주요 문서들은 차경석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모두 증산상제의 명령에 의해서, 혹은 유훈에 따라 교리를 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왜 그럴까? 과연 차경석이 교리로 설정한 인의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193331일 오후 1시에 다음과 같이 교리를 설법하였다.

 

인의, 사대강령, 상생, 대동을 명심하라...사람이 물을 때 보천교는 어떠한 주의主義냐 하면 답 왈 우리 주의는 상생 두자라 하라...이 주의를 가지고 전 세상을 같이 살아가자는 주의이다. 상생을 하자면 어떠한 법으로 가르치고 배우느냐 하면 우리 교는 사대교강이 있으니 일왈 경천, 이왈 명덕, 삼왈 정륜, 사왈 애인이다...그러면 교리는 무엇인고 왈 인의仁義. 인의는 대인대의大仁大義니 오교리이다. 목적은 무엇인고 대동이다.

 

여기서 차경석이 말하는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인의를 대인대의라고 한 점이다. 교리가 인의인데 그 인의는 바로 대인대의, 결국 보천교 교리가 대인대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인대의는 차경석이 스스로 말한 바 증산상제의 유훈이었다. 새로운 교리를 만들고 이를 공표하면서 제일 중요한 교리에 대해 인의라는 유교적 개념을 거론하였지만 그 인의를 다시 설명하기를 대인대의라고 하면서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차경석은 교리 인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인의, 으로써 생하고 의로써 성하나니 인을 행하고 의를 행함은 사람의 도에 시함과 종함이다. 우리 보천교는 인의를 주장하여 어진 일과 좋은 일로써 이 세상에 잘살아가자는 주의요 장래 대동세계 극락선경을 건설하자는 목적이다. 극락선경은 도덕의 세상을 이름이니 온 세계가 도덕으로 화하여 평화로운 생활을 후천 오만년에 영구히 행락하자는 것이니라.

 

인으로 생하고 의로써 성한다는 구절은 인의에 대한 차경석 특유의 해석이다. 모호하긴 하지만 그 뜻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인간의 생명은 천지의 인이 내재한 것이며, 삶의 모든 과정은 의로움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천이 심어준 인으로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인으로 생한 모든 일의 결과는 의로써 이룬다는 뜻이다. 어느 것이든 인간의 삶과 인의는 불가피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과 의를 행하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길을 걷는 것으로, 그 시작과 끝, 즉 모든 것임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생과 사, 그 중간의 삶 전체가 인의니, 인간 삶의 시종이 바로 인의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의의 실천으로 만드는 이상향이 대동의 극락선경이며, 이것이 보천교의 목적이며, 그 목적으로 하는 극락세계는 바로 도덕적 이상향이다

1928년 무신설법으로 신로변경 후 새로운 교리를 집대성한 책이 대도지남이다. 19345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차경석의 유교적 교리인 인의중심의 혁신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으로써 생하고 의로써 성하니 인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은 인도의 시종이다.

 

교리 인의에 대한 설명인데 교전의 인의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인의를 행함은 인도, 즉 사람다운 삶,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다. 교전도훈, 대도지남에서 차경석의 인의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 뜻은 으로서 생하고 의로써 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차경석 특유의 설명이며, 그래서 보천교 교리로서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인의에 대한 이러한 풀이는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유가, 특히 맹자의 인의사상과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즉 맹자가 말하는 인과 의의 관계인 인에 거하고 의로 길을 삼는다는 말과 유사하다. 차경석이 말하는 뜻은 즉 인은 생명의 시작이며 의는 생명의 완성이라는 것으로 인간 삶에서 인의를 행함은 그 삶 자체의 목적인 바와 같다는 것이니, 맹자가 인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의로써 삶을 유지한다고 한 거인유의居仁由義와 다르지 않다. 또한 이는 맹자가 말하는바 인간이 인의 집에 살고 의로써 그 삶을 유지한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차경석의 인의에 대한 설명은 차경석 특유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숨은 뜻은 맹자의 길을 따르고 있다.

특히 인의에 대한 철학은 그 중 가장 근본이다. 맹자는 인간이 금수와 다른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의라고 하였다.

 

사람은 금수와 다른 점이 극히 적다. 서민은 인륜을 버리지만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 은 모든 사물의 도리에 밝고, 인륜에 밝았으니 그는 인의에 따라서 행동을 한 것이요, 인의를 미덕으로 생각하여 행한 것이 아니다.

 

이는 맹자』 「이루離婁편 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여기서 맹자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매우 적다고 하면서 오직 작은 차이점이 그 양자를 구별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맹자의 생각을 차경석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1936년에 행한 도훈에서 차경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吾道第一先動者는 도덕이요 오교는 仁義爲主하니 인의로 근본삼으라. 사람이 当思其持身이니 若不然則近於禽獸. 禽獸와 사람이 다름은 사람에게 오륜五倫이있음이니 이 오륜을 실행하는 것이 곧 사람이요 행하지 않는 것은 禽獸. 그러므로 만물 중에서 오직 사람이 최고 귀하니라.

 

비록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오륜’(이는 맹자』 「등문공편 상에 나오는 다섯 가지 윤리, 즉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오륜을 말한다.)에서 찾고 있으나 그 오륜의 바탕은 인의이다. 따라서 차경석은 완전히 맹자의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1935년 사월에 행한 도훈의 다음 구절은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다.

 

사람은 인과 의니 인은 곧 씨라. 종자에 비하면 그 종자가 발아하면 맹아萌芽는 위로 올라오고 뿌리는 하착下着하며 줄기는 중으로 서서 정직하니 곧 천지 중에 서서 사람의 길에 들어감이니 인도人道상 인의 공부가 있는 줄 알고 의로 머뭄이 있는 줄 안 뒤에 그 지지유정知止有定의 이치를 깨우칠 것이다.

 

이 역시 차경석 특유의 인의관이다. ‘인은 종자사람은 중이라는 새로운 해석이다. 은유적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천지의 중으로 인간을 설정하고 그 인간의 본질을 인의로 규정함은 분명하다. 위의 구절을 간단히 하면 사람은 인과 의니 인은 씨고 그 싹은 곧 중으로 바르고 곹으니(正直) 라는 말이다. 인의가 사람의 본성인데 그 중 인은 사람의 핵심인 종자이고 그 종자인 인에서 싹이 트면 그 맹아가 곧 정직正直한 의라는 것이다. 사람은 인의 씨앗으로 의의 줄기를 키우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차경석의 인의에 대한 비유적 설명은 맹자가 말하는 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차경석이 말하는 교리 인의는 특유의 정의와 해석을 하고 있지만, 결국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인의와 다르지 않다. 그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인의관을 다음과 같이 말하여 공맹의 인의와 일치시킨다.

 

인의는 고원高遠이 아니면 행하기 어려운 것이라. 사람이 본래 성명性命의 가운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포기하여 행하는 자가 드물다. 사람이 인의를 모르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인의 역시 사람이 아니면 인의라고 할 수 없으니 인의가 하늘에 있어서는 원이고 리가 되고, 사시에 있어서는 봄과 가을이 되며 사람에 있어서는 측은惻隱과 수오羞惡이니, 사람의 삶과 죽음이 그 이치에서 벗어남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사람의 도를 세우는 것을 인과 의라고 하였고, 맹자는 인의仁義라고 하였다.

 

인의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며, 그러므로 인의를 행함은 바로 인간이 인간된 바의 조건임을 강조한 것이며, 이러한 인의는 우주자연의 법도가 인간의 심성에 내재한 것으로, 공맹 사상에서 말하는 인도를 세우는 궁극적 가치로서의 인의와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인과 의에 대비시키는 것은 맹자의 철학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결국 차경석은 인의의 도덕적 해석을 통해서 그 소자출을 공맹사상의 인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니 유교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5. 대인대의와 인의

 

증산상제의 가르침인 병세문의 대인대와 차경선의 보천교가 설정한 교리 인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1928년 차경석의 무진설법 후 새로운 교리 인의를 선포하고 그 이전 교리(일심, 상생, 거병, 해원, 후천선경 등)를 부정하면서 보천교 교리의 유교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는 보천교 연구가 대다수가 인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교리의 유교화에도 불구하고 정작 차경석은 자신의 교리가 유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차경석은 193410, 촌산지순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증산상제의 교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증산교조께서 봉착逢着하신 삼년만에 교통敎統을 전하시고 천화天化하셨다니 그 때에 교통전하였음으로 교주가 된 것인즉 그 때 제자 중에 수제자가 된 때문에 교통을 받았는가 또한 교통을 전할 만한 자격이 있어 전하였는가?”라는 물음에 차경석은 자신이 교통을 받은 것에 대한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이러한 교통의 전수를 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교리 역시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는 것과 같다. 이 역시 촌산과의 대담에서 확언한 바이다. 즉 촌산이 지금 보천교의 정당한 교리는 무엇입니까?...교리를 인의仁義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차경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리는 인의요 교강은 경천·명덕·정윤·애인이라 합니다. 교조의 유훈遺訓에 대인대의는 무병이라 하신 말씀이 계신대...

 

이렇게 본다면 차경석이 교리라 한 인의는 단지 유교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은 증산상제의 가르침인 대인대의에서 찾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대인대의 무병이란 구절은 앞에서 살펴본 <병세문>에 나오는 구절 그대로이다. 일본인 종교학자 촌산의 이러한 물음은 모두 차경석(보천교)과 증산상제와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차경석의 대답은 자신의 종교적 근원과 보천교의 정체성이 모두 증산상제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대강령인 경천敬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촌산은 경천은 상제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차경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은 따로 있으니 천이라 함은 신도 아니요 인도 아닌 물이라. 천이 있고 상제가 있다. 우리 교는 삼단三檀이 있는데 제일 단은 천이요, 제이 단은 상제이니, 주체는 상제이고 위에 천이 있다. 상제만 말하면 천은 별개물이 되지만 경천이라 하면 포함된 것이다...천은 본시 허무한 것이요 주체는 옥황상제이니 총재總宰하는 권리가 있다.

 

이 대답의 핵심은 상제의 존재에 대한 차경석의 분명한 긍정과 믿음에 있다. 천은 결코 신이 아니라 물이라고 한 것은 상제의 존재성을 물리적 천과 구분하여 인격적, 주재적으로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즉 차경석은 새로운 교리 중 경천이라는 유교적 개념으로 상제에 대한 특별한 정의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천이란 말로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님을 존숭한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대강령의 하나인 경천에 대한 설명은 분명히 도덕적 개념보다는 옥황상제의 위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차경석을 유교에 함몰된 종교가로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상제를 신앙하고 그 가르침을 따른 증산상제의 종도였다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차경석은 교리와 교강을 정하기 이전에 있었던 보천교의 처음 교리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촌산의 질문에 앞뒤가 맞자 않는 대답을 한다. 즉 촌산은 증전曾前에 교리를 일심·상생·거병·해원·후천선경이라고 한 말이 있는데 정당한 교지敎旨가 아닙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차경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당한 교지가 아닙니다. 이상호의 말인데 교조께서도 선경仙境이란 말씀은 계셨지만은 증년增年에 나는 은둔하여 있고 이상호가 량해를 득할 시에 자의로 교지라고 名目한 것입니다.

 

이러한 차경석의 대답은 증산상제의 주요 가르침인 해원, 상생, 일심, 후천선경 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이들 개념들이 정당한 교리가 아님을 강조한 것일 뿐이지 그 가르침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교조께서도 선경이란 말씀을 하셨다는 구절은 그 외 나머지 구절들 역시 증산상제의 가르침임을 인정한 것이다. 즉 이들은 비록 증산상제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이를 자신이 만든 보천교의 교리로 설정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차경석의 의도는 분명하다. 유교의 정통 이념을 교리로 선정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개념인 신화, 일심, 거병, 해원, 후천선경 등은 자신의 보천교에서는 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 교리를 부정한 것은 자신의 유교적 교리를 선포하기 위해 이전의 교리를 부정하는 계획적 부정이다. 또 전기의 보천교를 허영선전하고 신통묘술에 몰두한다고 비판한 것 역시 초기 보천교의 신앙양태나 증산의 가르침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초기 보천교 신도들의 미신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거나, 보천교의 새로운 방향인 동양 정종의 도덕과 대비시켜 그 의미를 폄훼하려는 의도적 비판이라고 봐야한다. 왜냐하면 교리를 변경한 후에도 차경석은 결코 증산상제에 대한 신앙심을 잃지 않았으며, 태을주 수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경석의 태도는 한편으로 증산상제에 대한 신앙심과 그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한편 증산상제의 핵심 가르침들을 교리로 정한 것을 부정하는 등 매우 이중적이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인의에 대한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차경석이 보천교의 교리로 정한 인의가 비록 말년에 도덕적 개념으로 풀이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발단에서 볼 때 근원은 증산상제의 가르침인 대인대의에서 찾아야 한다. 즉 교리 인의는 유교적이면서 비유교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차경석은 인의에 대해서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아니 실제로 이러한 태도는 이중적인가? 논자는 여기서 차경석의 이중적 태도를 변호하고자 한다. 그가 비록 교리를 유교적으로 바꾼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새로운 교리가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연유한다고 하면서, 다시 공맹의 유교적 의미로 해석하는 이중적 태도가 아니라 초지일관 증산상제의 가르침 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다는 논자의 판단이다. 즉 후일에 인의인의도덕이라는 유교의 도덕적 이념으로 치우쳤지만 이 역시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증산상제는 유가의 폐습을 비판했다. “유는 부유腐儒라는 것이 증산상제의 유교에 대한 인식이었다. 물론 불교와 기독교, 선교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비록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보냈느니라고 하였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참된 도를 전하지 못하고 여러 적폐를 드러내자 이를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유불선 전체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증산상제는 유도, 불도, 선도의 정수를 뽑아 통합하여 새로운 도를 내세운다.

 

불도는 형체를 주장하고, 선도는 조화를 주장하고, 유도는 범절을 주장하느니라. 천지의 허무한 기운을 받아 선도가 포태하고 천지의 적멸한 기운을 받아 불도가 양생하고 천지의 이조하는 기운을 받아 유도가 욕대하니 이제 성숙의 관왕冠旺 도수는 도솔천의 천주가 허무() 적멸() 이조()를 모두 통솔하느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술수術數는 내가 쓰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니라.” 하시니라.

선도, 불도, 유도의 핵심인 허무, 적멸, 이조를 모두 통솔하여 새로운 도가 나오니 이것이 바로 증산상제의 무극대도이다. 즉 증산상제의 도는 선천 종교인 유불선, 기독교의 진수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을 비롯한 동서 인류 문화를 그 근본에서 통일하는 무극대도이다. 특히 유도와 관련하여 증산상제는 범절’, 사회의 규범이 되는 도덕적 이념을 강조하며, 그 유교의 이념을 인정하고 있다.

 

이제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의 삼도三道를 통일하느니라. 나의 도는 사불비불似佛非佛이요, 사선비선似仙非仙이요, 사유비유似儒非儒니라.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선에 붙여 놓았느니라.

나의 일은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이라야 옳게 가느니라.” 하시니라.

 

유불선을 통합하여 새로운 가르침은 내는데 그것은 삼도통일의 무극대도인 (선도)이다. 위 인용문에서도 유교의 범절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더욱 강조하여 증산상제의 새로운 일, 즉 천지공사를 통해 후천의 새 세상을 여는 일은 유지범절이라야 올바르게 이루어진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증산상제는 자신의 새로운 가르침인 통일의 선도仙道유교와 비슷하지만 유교가 아니다고 하는 것이다. 유교와 비슷한 이유는 바로 유교의 범절인의도덕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안경전 증산도 종도사는 증산도의 진리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유교는 천지질서에 도덕의 뿌리를 두고 인간의 본성을 파악합니다. 그리하여 천도의 도덕정신으로 인륜의 푯대인 예의범절을 정립함으로써 세상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평천하를 목적으로 합니다.

 

증산상제의 가르침이 이러하다면 차경석이 교리 인의를 정하면서 증산상제의 가르침을 받들었다고 한 것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들이다. 물론 증산상제의 명령을 받아서 인의를 교리로 정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으로 볼 수 없다. 증산상제가 차경석에게 명하여 인의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차경석의 인의도덕이 증산상제의 가르침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차경석이 교리 인의로서 증산상제의 가르침을 이었다고 말하면서, 공맹의 인의도덕설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이중적 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방금 살펴보았듯이 공맹의 인의도덕설은 증산상제가 유도의 옳은 방향이라고 인정한 유지범절과 같은 범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존의 연구가들에게서 차경석의 신로변경과 유교적 교리변경에 대한 많은 주장들을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들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틀림이 없었다. 차경석은 분명 유교적 이념인 인의를 사용했고, 사대강령인 경천, 명덕, 정윤, 애인은 모두 유교의 핵심 가르침들이다. 목적을 유교의 이상사회인 대동이라고 했으니 차경석이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완전히 유교적 이념으로 돌아섰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차경석이 촌산과 인터뷰에서 한 진실한 고백이나, 그 이전 <경고문><12계명>을 선포할 때 보였던 신앙심은 유교적 교리라는 큰 이벤트에 묻혀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의에 대한 교리를 말하면서 늘 증산상제의 대인대의를 거론하고, 교전도훈에서 증산상제의 가르침을 받들고’, ‘명령을 따라인의의 교리를 정했다는 차경석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경석은 전기의 교리들을 부정하면서 인의의 교리를 내세웠지만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증산상제의 가르침에 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5. 맺는 말

 

차경석의 보천교 교리 인의 속에는 증산도 대인대의 사상과 유교의 인의 사상, 그 양자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 보천교를 세운 차경석이 증산상제의 종도로서의 삶과 신앙을 버리고 스스로 유교화 되었다거나 신로를 변경했다고 하는 것은 겉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실재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을 통해 어느정도 입증되었다. 차경석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보천교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유교화로 비쳐지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유교화의 진정한 의도나 그 속에 깃든 의미는 결코 유교화가 아니었다는 것이 논자의 결론이다. 증산도의 대인대의나 보천교의 인의는 유불도 삼도를 통합하여 새로운 가르침 무극대도를 내는 증산상제의 가르침에서 유교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도와 다른 유도적 개념이며, 우주 1, 가을개벽, 천지공사라는 일련의 증산도적 진리 속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개념들이다. ‘사유비유似儒非儒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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