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증산도 서양문명론

김현일(상생문화연구소)

2023.04.03 | 조회 2743

2021년가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증산도 서양문명론

 

김현일(상생문화연구소)

 

목차

1. 서론 : 동양과 서양

2. 조선의 개화

3. 동학의 서양 인식

4. 서양관련 천지공사

1) 상제의 탄강 이유

2) 천상문명을 본 딴 서양 현대문명

3) 동양을 위협하는 서양

4) 서양의 문명이기

5) 재주財主 기운을 서양에

6) 관운장을 서양으로 보내어 전란을 일으키게 하다

7) 개벽기의 동서양 전쟁

8) 동서양 운세가 서로 바뀌리라

5. 비교사적 시각에서 본 동서양 문명

6. 맺음말

 

 

국문초록

근대사에서 동양과 서양 문명 간의 관계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동양을 동아시아에 한정해 본다면 동서양 관계는 초기에는 예수회 신부들을 매개로 한 평화적인 문명교류와 제한된 교역활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그 관계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압박으로 인해 급속히 악화되었다. 서양 열강들은 동양의 문호를 강제로 열게 하고 자신들과 통상을 하게 만들었다. 서양의 요구에 대한 저항은 서양의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당했다. 동양이 서양의 지배하에 들어갈 위협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동양의 위기상황은 수운의 글과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와 말씀에도 그대로 번영되었다. 증산 상제의 말씀에 의하면 서양 현대문명의 출현에는 이마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서양문명은 물질과 사리에만 정통하여 삼계를 혼란케 하여 이마두로 하여금 천상의 상제에게 탄원하여 상제가 인간의 몸으로 지상에 내려왔다. 증산 상제는 서양 현대문명이 세상을 혼란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문명이기는 인류에게 유용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또 재주財主 기운을 서양에 둔다고 하였는데 이는 한국이 서구적 근대화를 시작하여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을 예정한 것이었다. 또 조선이 세계의 일등국이 되고 천하의 도주국이 되리라 하였는데 최근 한국의 경제적 비상과 세계의 한류열풍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주요술어

서양문명, 동양과 서양, 천지공사, 서구화, 증산 상제



1. 서론 : 동양과 서양

 

동양과 서양의 관계는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아니 근대사는 동서양 사이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양 근대사의 서막을 여는 것으로 여겨지는 서유럽의 지리상 발견이라는 것도 지중해를 통한 동양무역로가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이 지리상의 발견으로 동양으로 가는 직항로가 열리고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어 서유럽 문명은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동양의 입장에서 보아도 근대사는 서양문명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양은 통상을 요구하고 통상은 곧 기독교의 전파로 이어졌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의 동남아 지역에서는 서양은 초기부터 무력을 동원하여 무역로를 확보하였다. 서양이 진출이라는 것이 제국주의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한국의 동아시아 문명에서는 아직 서양 열강은 제국주의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예수회 선교사들을 필두로 한 가톨릭 선교와 제한된 무역에 그쳤다. 16세기 중반 이후 근 2세기 동안 동아시아와 서양의 관계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관계는 마테오 리치(이마두)로 대변되는 평화적인 동서양 문명의 교류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관계가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한 것은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벌인 아편전쟁부터였다. 이제 서양은 대포를 장착한 기선을 동원하여 동양을 위협하였다. 무력을 앞세워 통상의 문을 열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서양의 이러한 제국주의적 공세로 동양은 급속한 변화의 과정으로 돌입하였다. 동양의 근대화는 바로 이러한 제국주의적 압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 근대화는 서구문물의 도입을 통한 동양사회의 변화를 의미하고 여기에 성공하느냐의 여부가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게 되었다. 즉 근대화는 동양의 입장에서는 죽고 사는 문제가 된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제는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증산 상제가 동방의 조선 땅에서 9년 동안 집행한 천지공사는 선천상극의 세상을 끝막고 상생의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도운 공사와 세운 공사로 나뉜다. 도운은 증산 상제의 도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나갈지를 정한 공사라고 한다면 세운은 이제까지의 역사를 심판하고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를 정한 공사였다. 그런 만큼 세운 공사에서는 조선과 중국, 일본 그리고 동서양의 역사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본고는 서양과 관련된 천지공사와 또 증산 상제가 서양에 관해 한 말씀들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짚어보려고 한다. 증산 상제가 천지공사를 행할 당시 조선은 이미 위로부터의 개화 즉 국가에 의한 서양의 기술과 제도의 도입 정책을 취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아래로부터는 일반 백성들이 물론 일부이기는 하지만 서양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있었다.

본고는 먼저 천지공사의 한 배경으로서 이러한 서구문물의 도입과정을 일별하고 다음으로는 동학에 나타난 서양 인식과 󰡔증산도 도전󰡕에 기록되어 있는 서양에 관한 증산 상제 말씀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최근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동양과 서양을 어떻게 보는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서양과 관계된 천지공사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2. 조선의 개화

 

한국사에서 서양 열강들에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로 인하여 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한국사회의 근대화, 즉 한국문명의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 17세기 초반에 이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등 예수회 신부들이 저술하거나 번역한 서학서들이 유입되어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 널리 읽히기 시작하였고 또 18세기 말에는 이승훈이 북경 주재 예수회 신부들과 접촉하여 세례를 받고 그로부터 조선에 자생적 천주교회가 생겨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남인 학자들을 통한 서학의 도입은 조선의 문명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명(civilization)은 물질생활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 과학과 기술, 상품들이 도입되지 않는 한 조선 문명의 변화란 가능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문명의 변화는 국가와 지배층이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서양 문물의 도입이 불가결하다는 인식이 있기 전까지는 본격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 문물의 도입은 1880년대 미국을 필두로 한 서양 열강들과의 통상조약으로 시작된다. 그 계기는 1870년대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개항 요구와 내정간섭으로 촉발된 일본과 청나라의 대립이었다. 청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양 열강들과의 조약체결을 권고하였다. 일종의 세력균형 정책이었다.

1882년 미국과의 조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영국과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과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에 서양 외교관들과 선교사들, 상인들이 밀려왔다. 서양문명과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서양문물의 도입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위정척사파들은 서양인들을 금수와 같은 존재로 보고 서양문물의 도입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면암 최익현(1833~1907)1876년 일본과의 통상협정에 반대하여 극단적인 복궐상소를 하였다가 흑산도로 귀양을 갔던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서양문물의 적극 도입을 주장하는 개화파를 역적으로 보고 그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개화를 한갓 오랑캐 풍속으로써 중화를 변화시키고 사람을 타락시켜 금수로 만드는 것으로써 능사를 삼으면서 이를 개화라고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위정척사론을 거부하고 문호를 닫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위정척사파 1만명이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해 올린 상소문 때문에 그 소두疏頭인 이만손이 유배되고 조정과 임금을 비판한 홍재학이 처형된 것은 당시 조선 정부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소위 영남만인소 사건인데 그 사건 직후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 정부는 또 동학혁명이 진압된 직후인 18947월부터 18962월까지 광범한 개혁사업을 시도하였다. 소위 갑오개혁(갑오경장이라고도 한다)인데 이는 조선 정부가 본격적으로 근대적 개혁에 착수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많은 새로운 법과 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서양인들과의 소통을 위한 영어, 불어, 일어 등 외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어학교가 세워졌고 양반자제들을 뽑아 일본에 유학시켰다. 또 서양의 달력을 도입하고 의복도 서양식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강제로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하게 만들 단발령도 그 일환이었다.

1897년에 들어선 대한제국 정부는 개혁에 대한 민중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여러 가지 근대적 기술학교들이 설립되고 서양의 기술에 기반을 둔 교통과 통신 사업도 추진되었다. 수도 서울에는 전차가 도입되어 서울은 동양에서는 교토 다음으로 일찍 전차가 놓인 도시가 되었다. 정부는 또 국제행사에도 관심을 가져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고 1900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만국박람회에도 참여하였다. 1903년에는 국제적십자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서구화 정책과 병행하여 민간에서도 물밀듯 밀려온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다. 특히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와 병원의 설립은 서구문물 도입 즉 서구화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1882년 한미수교 직후부터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였는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1886), 스크랜턴은 이화학당(1886), 언더우드는 경신학교(1886), 엘리어즈는 정신여학교(1890)을 세웠다. 1885년에 창덕궁 옆의 재동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세워졌다. 왕립 광혜원이라는 이름의 국립병원이었는데 고종과 친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이 운영책임을 맡았다. 고종 임금은 이 병원이 백성의 치료에 공이 크다 하여 곧 제중원濟衆院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재정이 어려워 미국인 사업가 루이스 세브란스가 남대문 밖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이름도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대학병원으로 계승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한 것은 직접적 포교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86년 한불조약에서는 그 이전 다른 나라의 조약과는 달리 프랑스에 선교를 실질적으로 허용함에 따라 다른 서구열강들도 선교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허용 받게 되었다.

개신교의 경우 미국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정동제일교회(아펜젤러 목사, 1887), 새문안교회(언더우드, 1887), 상동교회(스크랜턴, 1888)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 다수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하여 1900년대 초에는 서울 요지에 장로회 혹은 감리회 소속 예배당이 들어섰다. 신도도 급속히 늘었는데 예를 들어 연동교회의 경우 1904년부터 양반들이 몰려들어 수백 명의 양반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 선교사들의 포교가 활발히 이루어져 개신교가 급속히 조선에서 확산되어 갔지만 서양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일차적 관심은 통상에 있었다. 이는 조불조약을 제외하고는 선교의 자유 문제를 다룬 조약이 없었다는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서양 국가들은 조선의 영토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예외였다.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조선의 영토에 관심이 없었으나 일본이 승전한 이후에는 일본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동아시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소위 러시아가 주도하였던 삼국간섭이 그것으로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를 저지하였다.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은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는데 러시아는 삼국간섭에 대한 대가로서 여순과 대련을 조차지로 만들었다. 1891년부터 건설하고 있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청국 정부로부터 얻어내었다. 동청철도는 러시아령 치타에서 만주리, 하얼빈, 수분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연결되는 노선으로 시베리아 횡단노선과 연결되었다. 러시아는 1898년에는 여순과 대련의 조차와 함께 하얼빈에서 대련까지 연결되는 남만주지선 부설권도 획득하였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건설 중인 동청철도를 공격하자 러시아는 18만 명의 대군을 만주에 출병하고 만주의 요지들을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의화단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철병하지 않고 만주를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조차지로 차지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련항으로 연결되는 항로의 중간기착지로 마산포를 조차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물론 이 시도는 일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1902년 만주철병을 청국과 합의해 놓고도 철병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하는 한편 아무르강 일대와 관동지역을 관할하는 동아시아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그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은 결국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이익을 위협하였다.

증산 상제가 천지공사를 시작하던 1900년경에는 많은 동양인들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위협을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을 통해 심각하게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3. 동학의 서양 인식

 

1860년에 창시된 동학의 태동에서도 서양의 위협이 작용하였다. 수운을 체포하여 심문한 경상감사 서헌순의 장계에 의하면 최복술(수운)은 서양인들의 침략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고 양학이 세력을 떨치자 의관지류로서 차마 볼 수가 없어 하늘을 공경하고 천지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문을 지었다고 한다. 최수운이 남긴 글에도 서양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먼저 포덕문에 나오는 서양의 위협에 대한 언급을 보자. “서양은 전쟁을 일으키면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운세를 타고 났으니 성공치 아니하는 일이 없다. 이런 추세로 천하가 다 멸망하게 되면,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괵나라·우나라의 고사와도 같은 탄식이 우리나라에도 닥치게 될 것이다.”서양은 전쟁을 일으키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한다포덕문의 표현은 청나라가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제2차 아편전쟁에서는 북경이 점령되었던 사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수운은 또 서양 사람들이 기독교를 열심히 포교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경신년에 이르러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평화롭던 동방에 나타난 서양의 사람들은 부귀를 취하지는 않지만 천하를 공격하여 취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당을 부지런히 세우고 그 하느님의 도를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듣고 보니 나 또한 그럴 수 있는가,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당은 천주교당이다. 개신교는 아직 조선에 도래하지 않았다.

동학론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논학문에도 서양인들의 종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聖敎라 하니, 이것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는 당시 민간에서 떠돌던 주장을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천주교에 대한 수운 자신의 비판이 나온다.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하고, 그들이 써놓은 책을 보아도 도무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는 애매한 말만 써놓았다. 그들은 보편적인 종교를 표방한다 하면서 도무지 진정 하느님을 위한다는 단서는 없고, 오로지 자기 한 몸만을 비는 모략만 있다. 그러나 몸에는 생명의 바탕이 되는 기화氣化의 신령함이 없고, 배움에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배제되어 있다. 형상은 있으나 구체적인 자취가 없고 사모하는 것 같지만 진정한 빔이 없다. 도로 말하면 허무에 가깝고, 그 도를 성취하는 배움, 즉 학의 과정에는 하느님이 배제되어 있으니 어찌 오도를 양도와 다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뇨?”

서양의 위협과 서양 기독교에 대한 수운의 이러한 인식이 동학 창도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2세 교주 해월에 와서는 서양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수운의 처형 후 도망자 신세로 자신과 교단의 명맥을 부지하는 데 바빠서였을까? 천지와 인간론, 개벽 등에 대해 깊은 철학적 성찰을 남긴 그가 역사에 대해, 서양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졌던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동학혁명기 동학도들은 서양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물론 체계적인 저술은 없다. 단지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충청감사에게 올린 진정서(의송단자議訟單子)나 길거리에 내걸린 몇 개의 삐라(방서榜書)를 통해 동학도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는 서학과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다. 임진년(1892) 1021일 충청감사에게 올린 의송단자에는 서양 오랑캐의 학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고 왜놈 우두머리의 독수가 다시 외진에서 날뛰니... 이래서 우리들이 절치부심한다고 하였다. 서학의 유포가 물리 쳐야할 악의 하나였던 것이다.

계사년(1893) 210일 전라도 제읍 아문에 붙은 방서는 전봉준이 쓴 것이라 하는데 여기서 서학은 명색은 상제를 공경한다 하나 비는 데만 힘쓰며 말하기는 예수를 믿는다 하나 단지 찬미하는 것으로 법을 삼을 뿐이니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실한 뜻을 가르치는 학은 찾아볼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 서학의 가르침이 동학과는 달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실한 뜻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학은 조선의 전통적인 윤리질서도 위협한다. “또한 말한 대로 실천하는 독행지실도 없다. 말로는 부모에게 효행한다 하면서 부모 생전에 공양하고 순종하는 도가 없으며 돌아가시면 곡하며 장례를 치르는데 절의가 없으니 이를 어찌 사람의 떳떳한 도리라 하겠는가. 혼인 풍속도 절차가 없이 결혼했다가 끝내는 개가하거나 재취하고 만다. 두려워서 말할 수 없도록 이혼하는 폐단이 있으니 어찌 부부의 도리라 하겠는가.” 한마디로 하자면 서학이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와 풍속을 어지럽힌다고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물러가야 하는 것은 조선과 맺은 조약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호조약에서는 상관을 설치하고 전교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속히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우리들 충신지갑주忠信之甲冑와 인의지간로仁義之干櫓는 오는 37일에 성토치죄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위협하였다. 갑오동학혁명기의 동학지도자들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일본뿐 아니라 서양에 대해서도 배외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4. 서양 관련 천지공사

 

증산 상제는 동학혁명이 많은 희생자만 남기고 끝난 후 수년간의 천하유력 끝에 득도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천지공사를 9년간(1901-1909) 행하였다. 천지공사는 지나간 선천 세상의 역사를 심판하고 이 지상에 선경낙원이 건설되도록 역사가 나아갈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었다. 천지공사는 증산 상제 혼자서 한 것이 아니고 그를 따르던 성도들과 함께 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일 성도들의 증언을 통해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천지공사는 본질적으로 과거 역사의 과정을 되돌아보고 또 미래 역사의 운로를 짜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 조선 그리고 조선의 인접국가인 중국과 일본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나온다.

 

1) 상제의 탄강 이유

 

증산 상제는 당신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게 된 경위를 서양사람 이마두(마테오 리치)와 연관시켜 말씀하였다. 이마두는 죽어서는 신명계의 주벽主壁이 된 사람인데 주벽은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증산 상제에 의하면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을 구천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여지상에 직접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2:30) 물론 천상의 상제가 신명들의 하소연을 들은 후 바로 인간의 몸으로 탄강한 것은 아니다. 먼저 영으로서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와 함께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다가 모악산 금산사 미륵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냈다. 상제는 그곳에서 경주 사람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도록 명하였으나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제 스스로 신미년(1871)에 인간의 몸으로 탄생하였다.

 

2) 천상문명을 본 딴 서양 현대문명

 

증산 상제는 이마두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마두는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적폐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마두는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그동안 서로 경계를 넘나들지 못하던 동서양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경계를 넘나들게 하였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지하신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였다.(2:30)

이마두가 동서양 문명 간의 경계를 틔워 동서양 신명들로 하여금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였다는 것은 이마두가 동양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양에 소개하고 또 서양의 수학, 천문, 기술 서적을 한역하여 소개함으로써 동서문명 간의 교류에 기여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마두가 죽은 후에 서양으로 돌아가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으며 이 결과 지하신이 천상에 올라가 천상의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내려 천국의 모형을 본뜬 서양의 현대문명이 태동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서양 현대문명의 기원을 말한 것이다. 요컨대 서양 현대문명은 천상에서 내려온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증산 상제는 근대과학과 정교한 기계로 대변되는 서양 현대문명이 천상문명을 본뜬 것이기는 하지만 이 문명은 물질과 사리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를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자행하여 신도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당시 우월한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타문명을 지배하고 억압한 서양 제국주의의 죄악을 말한다. 이러한 서양문명의 폭압과 죄악으로 삼계가 혼란에 빠지자 구천 상제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3) 동양을 위협하는 서양

 

동양이 서양의 위협으로 인해 그 존립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은 19세기말, 20세기 초 서양제국주의의 전성기에는 많은 동양 사람들이 공유한 것이다. 증산 상제 역시 이러한 서양의 위협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동양이 서양으로 떠넘어간다든지(2:120) “동양의 형세가 누란과 같이 위급하다라는 진단(5:4) 이제 만일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지 않으면 동양은 서양에 짓밟히게 되리라”(5:50)는 등의 말씀은 그러한 인식을 잘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서양인들의 동양 진출은 15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왕실이 아랍인과 이탈리아인이 장악하고 있던 동양무역의 독점을 깨기 위해 인도항로의 개척에 나서 성공하였다. 곧 포르투갈은 인도 서안의 고아와 극동지역으로의 진출로에 위치한 말라카를 점령하여 동양무역의 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서양에서 큰 수요가 있는 후추 등의 향신료를 생산하는 몰루카 제도에 진출하여 무역기지를 세우고 1515년경에는 중국의 광동에 선박을 파견하였다. 중국의 명나라는 서양과의 접촉을 거부하여 포르투갈은 향후 수십 년간 밀무역에 의존하였다. 1557년 명나라는 포르투갈에 마카오 섬을 조차지로 넘겨주었는데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발판으로 일본과의 무역을 시작하였다. 포르투갈 당국은 이러한 극동까지 확대된 무역 루트를 지키기 위한 기항지와 요새들을 확보하였는데 예멘의 아덴, 페르시아 만의 바레인, 오르무즈 섬, 실론 섬의 콜롬보 등이 그 대표적인 기지였다.

중세기 동안 상업을 발전시켜온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의 동양무역 독점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더욱이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의 지배에 대해 반기를 든 형편이어서 스페인과 통합된 포르투갈의 요새들에 대한 공격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VOC)를 조직하여 동양무역과 식민지 확보에 나선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의 동양무역 독점을 분쇄하고 17세기 중반 자신들의 무역망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향신료의 생산지인 인도네시아 지역에 본부를 두고 중국과 일본으로 진출하였다. 또 타이완을 점령하고 일본 나가사키에 무역기지, 즉 상관을 세웠다. 17세기 중엽 조선에 표류하여 후일 조선을 처음 서양에 소개한 하멜과 그 동료들은 모두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다. 18세기 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영국과의 전쟁 끝에 청산된 이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지배에 집중하였다.

극동 지역에 더 직접적인 위협이 된 것은 영국이다. 영국 역시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도로 진출하였다. 마드라스(오늘날의 첸나이)에 본부를 둔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차례로 승리하여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버마도 동인도회사에 의해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9세기 중엽 중국에 대한 영국의 공격도 그 기원은 동인도회사의 무역에서 찾을 수 있다. 아편무역으로 인한 영국과 청나라와의 충돌은 두 나라간의 전쟁으로 비화하였는데 (1차 아편전쟁:1839-1842) 패전한 중국은 영국에 홍콩을 넘겨주고 상하이와 항저우 등의 다섯 항구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프랑스, 미국, 독일, 러시아 등 서양열강들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최혜국 조항 문제로 다시 영국과 청나라의 충돌이 벌어져 청나라는 이번에는 수도인 북경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맛보았다.(1860) 북경 점령은 조선에도 알려져 서양의 위협에 대한 큰 두려움을 자아내었는데 이는 최수운의 글에도 나타난다.

이후 중국은 서양열강들에게 여러 조차지를 내어주고 반식민지半植民地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중국에 대한 서양 열강들의 압박은 일본으로도 향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앞장섰는데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전함을 끌고 와서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였다. 미국 함대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항구를 개방하였다. 1854년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이다. 곧 영국과 러시아와의 조약이 뒤를 이었다.

일본의 번가운데 일부는 서양 세력에 양보한 도쿠가와 막부에 반대하고 서양 선박과 서양인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은 이러한 도발을 용납하지 않았다. 1864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연합함대는 초오슈우(長州) 번의 해안 포대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또 그 전 해에는 영국 함대가 영국인을 살해한 사쓰마(薩摩) 번을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서양의 무력이 동양에 비해 압도적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서양 제국주의의 힘은 극에 달했다. 아시아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독일 등 서양열강에 의해 식민지, 세력권, 조차지 등으로 분할되었다. 이러한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은 때로는 공동의 적에 대해 협력하기도 하였지만 상호간의 경쟁은 피할 수 없었으며 이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전쟁을 낳았다.

 

4) 서양의 문명이기

 

증산 상제는 서양의 뛰어난 과학과 기술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증산 상제가 천지공사를 행하던 시기 이미 조선에는 서양의 기술이 상당히 도입되어 있었다. 동학혁명 때에는 일본군과 관군이 가진 개틀링(Gatling) 기관총이 동학군을 상대로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였으며 천지공사가 행해지던 시기에는 기선과 기차 역시 널리 이용되고 있었다. 증산 상제는 1906(병오년) ‘조선국운을 바로잡는 공사를 행할 때 군산에서 기선을 타고 인천으로 갔으며 일부 성도들은 태전(대전)으로 가서 경부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5:121) 이른바 수륙병진이었다. 물론 증산 상제 일행은 인천 제물포에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로 향했다.

증산 상제는 동학혁명의 경험을 통해 서양의 무기가 얼마나 우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증산 상제는 서양에서 건너온 무기의 폭위暴威에는 짝이 틀려 겨루어낼 것이 없다고 하였다.(5:412)

그런데 이러한 총포를 비롯한 기선과 기차 등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기술은 그 기원이 천상에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마두가 죽어서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 천국건설을 하려고 하자 지하신이 천상의 기묘한 법을 내려받아 나온 것이 서양의 과학과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증산 상제는 서양의 문명이기가 천상에 기원을 둔 것이라 하였으며 그러므로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는 결코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였다. (5:340)

증산 상제는 또 하늘이 서양 사람에게 기예技藝를 주어 성인聖人의 역사役事를 행하게 한다고 하였다.(4:10) 여기서 기예는 과학과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세상에 이롭게 사용될 수 있다. 증산 상제는 서양의 제국주의가 그 우월한 무기와 기술을 기반으로 동양을 위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과학과 기술이 갖는 유용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증산 상제는 또 천지공사를 행할 때 월곡 차경석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서양 사람이 발명한 모든 문명이기를 그대로 두어야 옳겠느냐, 거두어 버려야 옳겠느냐?” 그러자 월곡은 그대로 두는 것이 인간 생활에 이로울 듯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증산 상제는 네 말이 옳으니 그들의 문명이기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니라.”고 하였다.(5:340) 그리고 덧붙여 옛것을 그대로 지키면 몸을 망치고 새 기운을 취하면 몸도 영화롭게 되나니 나의 운은 새롭게 바꾸는 데 있느니라.”고 하였다. 증산 상제는 조선의 옛 제도와 전통을 그대로 지킬 것을 주장하는 일부 전통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5) 재주財主 기운을 서양에

 

증산 상제를 따른 성도들 가운데 전주의 거부 백남신이 있었다. 증산 상제의 말에 따르면 조선 신명을 서양으로 보내 역사케 하기 위해서돈이 필요하였다.(5:23) 그래서 전주 진위대의 장교로 있던 김병욱에게 재주를 천거하게 하니 병욱은 백남신(1858-1920)을 천거하였다. 백남신은 전주진위대 향관餉官으로서 전주진위대의 보급을 맡았던 경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전라북도 몇몇 군의 외획外劃을 맡아 궁내부에 물자를 조달하는 일도 하였다. 외획이라는 것은 일종의 조세청부제도로서 일정한 명목의 세금을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걷고 정부에서 필요한 자금을 상인이 미리 납부하는 제도이다. 그는 또 전라북도 여러 군의 둔전 및 역토 등의 감관監官으로서 도조관리를 맡기도 하였다. 백남신은 이러한 관직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1903년 계묘년 백남신이 증산 상제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재산이 30만냥 정도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수백억 대의 재산이다. 백남신은 그 가운데 삼분의 일인 십만냥을 어음으로 증산 상제에게 바쳤다. 그때 증산 상제는 어음을 무릎에 놓고서 재주 기운을 서양에다 두노니 후일에 서양으로부터 재물을 보급 받으리라고 하였다.

재주 기운을 서양에 둔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는 서양이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를 주도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서양문명이 동양을 앞지르고 세계경제를 확실히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말 산업혁명기부터였다. 산업혁명은 기계를 이용한 생산방식과 더불어 그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에너지(석탄)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는데 19세기 초에는 기선과 철도를 통한 운송과 물류혁명으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산업혁명을 통하여 근대적 산업을 발전시킨 서양문명은 빠른 속도로 자본을 축적하였다. 이러한 자본은 기계와 공장, 항만, 도로 등 가시적 자본으로도 나타났지만 금융자산이라는 비가시적 자본으로도 나타났다. 엄청난 규모의 금융자산은 서양을 넘어 여러 지역으로 투자되었다. 이러한 자본투자는 제국주의 시대 서양의 우위를 나타내는 확실한 지표였다.

증산 상제는 재주 기운을 서양에 둔다고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 서양으로부터 재물을 보급 받을 것이라 하였다.(5:24) 그리고 지금 조선 신명을 서양으로 보내면 나중에 배에 실려 오는 화물표를 따라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말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은 세계경제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적과 같은 일로 평가된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남한은 가장 성공한 예로 꼽힌다. 한국경제발전의 성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지만 외국으로부터의 자본조달, 기술도입, 국제적 분업체계 및 세계시장의 이용 등 개방적 발전경로를 취한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종속이론가들을 비롯한 일부 좌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내부의 자본축적을 통한 발전전략은 한국경제의 폭발적 성장과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서양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였다. 증산 상제는 조선이 상등국이 되기 위해서는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진대 이제 그 신명이 배에 실려 오는 화물표를 따라 넘어오게 되므로 그리하노라고 말했다.(5:389) 이는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서양과의 물품교역, 경제적 교류를 통해 한국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경제발전 과정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만 받아들이고 다른 문화의 유입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 과정에서 다양한 수준에서의 서양 문화 유입도 불가피하였다. 증산 상제가 기유년 여름 용머리 고개에서 천지공사를 하면서 유찬명에게 한 장차 서양 기운이 조선에 들어오리라는 말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7:76)

 

6) 관운장을 서양으로 보내어 전란을 일으키게 하다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에서 관운장을 서양으로 보내어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공사가 있다. 관운장은 조선에서 극진히 공대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공사에 진력 협조함이 옳다고 하였다. (5:166)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조선에 관왕묘가 만들어지고 관왕숭배가 전파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 말씀인 듯하다. 󰡔도전󰡕 기록에 의하면 관운장은 서양에 가서 전란을 일으키라는 증산 상제의 명에 선뜻 내키지 않아 머뭇거렸다고 한다. 그러자 상제 왈 때가 때이니 만큼 네가 나서야 하나니 속히 나의 명을 받들라. 네가 언제까지 옥경삼문의 수문장 노릇이나 하려느냐고 꾸짖으셨다. 그래서 관운장의 신명이 서양으로 갔다고 한다.

전란은 서양 열강들 사이의 싸움을 말한다. 태인 관왕묘에서 관운장의 신명에게 천명을 내리는 공사는 1907(정미) 4월에 있었다. 몇 년 뒤 서양에서 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이를 서양 사람들은 대전쟁’(The Great War)이라고 부른다. 참전국이나 희생자 등 그 이전에는 유례를 찾기 힘든 큰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투르크, 이탈리아 등 유럽 열강들이 해외영토와 유럽 내에서의 대립과 이해관계에 따라 모두 참전하였다. 또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의 영연방 국가들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며 미국과 중국, 일본 등 비유럽 국가들도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참전하였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와 아메리카 등의 30여개 나라에서 7천만명 이상이 참전한 일차대전은 진정한 세계대전이었다. 물론 그 희생자도 엄청난 규모였다. 참전군인 850, 민간인 1,300만 정도가 전쟁을 통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Wikipedia)

일차세계대전은 많은 나라들이 다양한 동기로 참전한 만큼 전쟁의 원인은 다양하다. 서양 열강들 사이의 해외식민지 및 세력권 확대 경쟁, 유럽 내에서의 영토분쟁, 민족주의, 3자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 함께 싸운다는 약속인 군사동맹 등이 결합하여 대전쟁을 연출해 낸 것이다.

일차대전의 원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그 결과였다. 일차대전은 네 개의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러시아 제국은 전쟁 중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전선에서 일찌감치 이탈하였으며 전후에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의 나라들이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였다.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어 오스트리아는 소규모 공화국으로 전락하였고 그 지배하에 있던 헝가리, 체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의 동유럽 민족들은 독립하여 새로운 민족국가들을 건설하였다. 역시 패배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아나톨리아만 남겨놓고 모든 지배 영토를 내어놓아야 하였다. 이 영토들은 전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독일 제국은 동프로이센 지역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상실하는 등 영토가 축소되었다. 네 제국 모두 군주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서양 열강들 사이의 전쟁은 20년 후 다시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이다. 일차대전에서 패전국인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지나친 조처가 독일에서 나치의 대두를 가져오게 만들어 독일은 동쪽으로는 소련, 서쪽으로는 영국과 독일, 미국과 싸웠다. 일본은 이 전쟁을 틈타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려 하였는데 이는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하였다. 일본은 결국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동남아에서 서양의 식민지배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하면서 조선과 대만이 독립할 수 있었다.

증산 상제가 관운장을 서양으로 보낸 것은 서양에서 큰 전쟁을 일으켜 서양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서양제국주의에 의해 위기에 처한 약소국들을 건지기 위함이었다.(5:166) 그리하여 이러한 천지공사를 통하여 천하의 모든 약소민족이 조선과 같이 제 나라 일은 제가 주장하게 될 것이다.”(5:177)

 

7) 개벽기의 동서양 전쟁

 

증산 상제의 말씀에 의하면 개벽기에 동서양 전쟁이 있다. 이 전쟁은 동서양 사이의 전쟁으로 여겨진다. 기울어진 판을 바로 잡으려고 동서양 전쟁을 붙인다는 것인데 여전히 서양의 힘이 우월하다. 그래서 증산 상제는 병으로 판을 고른다고 하였다.(7:34) 이러한 동서양 사이의 전쟁은 병란과 함께 온다고 했으니 아직까지 일어난 전쟁은 아닌 듯하다. 개벽기의 전쟁인 셈인데 이 전쟁의 시작은 삼팔선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한반도에서 남북한 간의 충돌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증산 상제는 이 싸움을 세계 상씨름의 전초라고 하였다. 상씨름은 애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후 오는 최후의 씨름판으로 후천개벽과 연관이 있다.

 

8) 동서양 운세가 서로 바뀌리라

 

증산 상제의 반려자인 고수부 역시 서양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동서양의 운세가 바뀔 것이라는 말이다. “지금은 서양이 잘 살지만 나중에는 동양이 잘살게 되느니라고 하면서 조선과 미국의 운세가 서로 바뀔 것이라고도말하였다.(11:261)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암담한 시기에 조선과 미국의 운세가 서로 바뀔 것이라는 말은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5. 비교사적 시각에서 본 동양과 서양

 

동서양에 대한 비교사적 시각으로 역사를 접근한 학자로는 막스 베버를 들 수 있다. 그는 법제사와 경제사 더 나아가 비교종교사에 관한 탁월한 연구를 남겨놓은 대학자이다. 만년에 그가 매달린 주된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와 국가, 합리적 과학과 법률 등이 다른 곳과는 달리 서구에서 발전하게 된 역사적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죽기 전에 행한 강의에서 그는 서구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도시의 존재와 합리적 자본회계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 합리적 법률체계와 관료제를 가진 근대국가를 강조하였다.

베버는 고대 폴리스와 중세 도시들이 그 경제적 지향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가진 성격이 정치적 선서공동체라고 보았다. 즉 기원으로 볼 때 양자는 모두 공동의 방어를 위해 자비로 무장을 한 시민들 집단으로서 이는 주군(군사지도자) 소유의 무기로 무장한 집단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며 시민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초기에는 말을 동원하거나 중무장을 할 수 있었던 시민들만이 정치적 권리를 독점하였으나 일반 보병들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서민들에게까지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어 민주정이 발전하게 되었다.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일반적 전제로서 합리적 자본회계를 들고 있는데 그러한 합리적 회계는 사적 소유권, 자유로운 시장의 존재, 합리적 기술, 예측가능한 법률,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자유로운 노동대중, 경제생활의 상업화를 포함한다고 보았다.

베버가 생각한 서구 근대국가는 무엇보다 전문적인 능력을 가진 관료들을 보유한 국가이다. 그는 기술적, 상업적, 법률적 훈련을 받은 서구 근대국가의 관료는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고전 지식에만 정통한 중국의 관료와 대비된다고 보았다.

베버는 또 그가 죽기 전에 집필한 󰡔종교사회학논문집󰡕 서론에서 그 외에도 서구 문화의 특징을 여럿 들고 있다. 합리적 증명을 바탕으로 한 기하학, 합리적 실험에 바탕을 둔 과학, 합리적 법학, 합리적 음정계산에 기반을 둔 음악, 합리적 건축, 신문과 잡지, 종합대학, 의회와 정당, 정치적 공법기관으로서의 국가 등.

베버의 이러한 서구의 합리주의에 대한 강조는 유럽중심주의적인 색채를 띠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판적 검토를 필요로 할 것 같다. 대사상가인 베버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목도하였더라면 그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그런 면에서 최근 비교사적 시각에서 동양과 서양의 역사발전과정을 분석한 역사가를 한 사람 소개하려고 한다. 영국 출신의 고고학자로서 스탠포드 대학의 고전학과 교수로 있는 이언 모리스이다. 그는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책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동양과 서양의 발전을 비교분석하였다. 그는 자신만의 사회발전지수를 고안하여 이를 수치화 시켜 동서양의 발전을 비교하였다.

그 연구에 의하면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1770년대부터 서양은 급속히 사회발전지수가 동양을 추월하여 그 수치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서양제국주의는 바로 이러한 높은 수치를 반영하는 현상일 따름이다. 그 이전 수백 년 동안 사회발전지수는 오히려 동양이 더 높았다. 간단히 말해 산업혁명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어 서양이 동양을 능가하고 현재까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15, 16세기의 대서양경제의 발전, 17세기의 스텝지대 폐쇄를 들고 있다. 스텝지대 폐쇄란 주기적으로 동서양의 정착문명을 위협하던 유목민의 세력을 동서양의 대제국들이 꺾어놓고 유목민들을 제국의 지배하에 둔 것을 말한다.

산업혁명은 석탄을 주된 에너지 자원으로 이용하게 만들었고 또 증기기관을 동력원으로 장착한 면공업의 획기적인 생산증대를 가져왔다. 증기기관은 기선과 철도를 낳았고 제철업을 혁신하였다. 우월한 제철업은 성능 좋은 대포제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업혁명은 19세기 중반에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보이는 서양 군사력의 압도적 우세를 뒷받침하였다.

서양의 제1차 산업혁명은 19세기 말에는 제2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전기와 석유에 기반을 둔 여러 가지 전기제품과 자동차가 이 시기에 등장하여 다시 한 번 서양의 발전은 가속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경제적 발전은 해외진출, 해외투자를 일으켜 비유럽 세계도 발전의 가능성을 접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일본은 이러한 가능성을 잽싸게 쟁취한 성공사례였다. 일본은 서양에서 배운 기술로 서양에 도전하여 패배하였지만 일본의 경제적 발전은 중단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 편에 섰다. 일본은 미국의 지원 하에 20년 동안 연평균 10%가 넘는 고도성장을 달성하였다. 1968년에는 미국 다음가는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 다음은 한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네 마리 용의 차례였다. 네 마리 용 모두 대외개방경제를 공통적으로 채택하였다. 비교적 낮은 임금에 고급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노동윤리가 이 나라들의 성공을 뒷받침하였다. 급속히 부유해진 네 마리 용의 뒤를 이어 동남아 국가들이 발전도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등소평 하에서 중국이 여기에 합세하였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중국을 G2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언 모리스는 조만간 2030년이 되면 아마도, 2040년이 되면 거의 확실히 중국의 GDP는 미국의 GDP를 능가하게 될 것으로전망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덧붙여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하고 있다. “21세기 어느 시점에 중국은 후진성의 이점이 바닥나겠지만 그때가 되면 세계의 경제적 무게중심은 아마도 여전히 동양에 머무를 것이며 팽창하여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괄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부와 권력 이동은 아마도 19세기에 일어난 동양에서 서양으로의 이동만큼 불가피할 것이다.”

그리고 모리스 교수는 동양이 서양을 능가하겠지만 사회발전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지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그래프를 바탕으로 그 시기가 2045년과 2103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치솟는 사회발전과 줄어드는 세계로 인하여 동양도 서양도 경계도 혈통도 출생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15,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기 이전에 동서양이라는 구분이 의미가 없었듯이.

 

6. 맺음말

 

역사에서 동서양 관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대 세계사는 동서양 관계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을 동아시아에 한정해 본다면 동서양 관계는 초반 2,3세기 동안은 예수회 신부들을 매개로 평화적인 문명교류와 상업적 교역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그 관계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압박으로 인해 급속히 악화되었다. 증산 상제가 천지공사를 행했던 시기에는 일본이 급속한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국가대열에 합류하여 조선을 집어삼키려 하였다. 중국은 여러 열강들의 세력권으로 분할되어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제국주의의 압박에 대한 대응으로서 동양의 근대화, 서구화가 시작되었다. 서양 국가들에 문호를 상대적으로 늦게 개방한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에는 서양의 기술 뿐 아니라 기독교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증산 상제의 천지공사에는 이러한 서양의 위협과 서구화의 문제 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증산 상제는 서양 현대문명의 기원 뿐 아니라 자신의 지상 탄강에서도 서양 사람 이마두가 한 역할을 강조하였다. 또 당시에 서양의 지배하에 넘어가려는 동양을 건지기 위해 관운장을 서양으로 보내 대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서양 현대문명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내어 삼계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도 하였지만 서양 과학기술의 가치를 긍정하였다. 그러한 과학기술에 바탕을 두고 서양의 경제가 발전하였으므로 재주財主 기운을 서양에 두며 후일 조선은 서양으로부터 재물을 보급 받으리라고 하였다. 증산 상제의 공사대로 한국은 20세기 중반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에 성공하였다. 증산 상제는 장차 조선이 세계의 일등국이 되리라 하였는데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7:83)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이제 현실로 될 가능성이 눈앞에 닥쳐왔다. 증산 상제는 내가 이곳 해동조선에 지상천국을 만들리니 ... 장차 조선이 천하의 도주국道主國이 되리라고 하였다. 최근 갑자기 한국문화, K-culture가 세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많은 세계인들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의 음식과 의복을 좋아하고 한국 젊은이들의 춤과 노래를 따라 하려고 한다. 증산 상제가 천지공사를 행하던 백여 년 전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대학에서 서양사를 배우던 40여 년 전에도 짐작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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