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조선시대의 신선문화

정재서(영산대 석좌교수)

2023.03.23 | 조회 5329

2021년가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 


조선시대의 신선문화
-서왕모(西王母) 신앙을 중심으로

 

정재서(영산대 석좌교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서왕모 신화의 성립과 한국으로의 전래

2.1 서왕모 신화의 성립

2.2 서왕모 신화의 한국으로의 전래

3.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서왕모 수용

3.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수용 양상

3.2 고려시대의 수용 양상

3.3 분석

4. 조선시대의 서왕모 수용

4.1 문학에서의 수용 양상

4.2 예술에서의 수용 양상

4.3 분석

5. 왜 한국에서 서왕모인가?

6. 맺는말

 

 

1. 들어가는 말

 

서왕모는 중국 신화의 저명한 여신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중화권에서 숭배되고 있는 신령이다. 이 신은 고대 신화에서는 여신이었으나 후대에 도교가 성립되자 여선(女仙)으로 변모한 궤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잊혀진 이 여신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전통 시기 한국문화의 각 방면에서 끊임없이 출현해왔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한국과 중국은 상고시대부터 간단(間斷) 없는 문화적 교섭 관계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신화, 도교적 존재가 한국문화에 수용된 사례는 매거(枚擧)하기 어려울 정도이고 일부 존재는 무척 빈번하게 나타나나 서왕모처럼 전통 시기를 통관(通貫)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 싶다. 필자는 중국 신화서 산해경(山海經)의 한국문화에서의 수용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을 일종의 문화적 흐름으로 파악하면서 한국에서의 서왕모 현상을 집중적으로 논구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기왕의 국내 학계에서도 서왕모 현상에 착안하여 고전문학, 미술사, 고전무용 방면 등에서 서왕모 스토리와 모티프를 중심으로 수용의 양상을 다룬 논문들이 적게나마 존재하고 있음은 다행이라 하겠다. 이들 논문은 한국 서왕모 수용의 의미를 도출해냄에 각 분야에서 나름의 선구적 작업을 한 것으로 긍정된다. 다만 왜 한국에서 서왕모인가?” 하는 문제의식은 서왕모 수용 전반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가능할 터인데 서왕모 모티프에 대한 기존의 분야별, 개별적 논의에서는 발출(發出)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된다.

본고에서는 상술한 과거의 업적들을 참작하면서 한국의 서왕모 현상탐구에 대한 1차 작업으로 우선 서왕모 신화의 성립[역사적 변천을 포함한], 한국으로의 전래 등에 대해 약술(略述)한 다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한국의 전통 시기 전반에 걸친 서왕모 수용의 개술(槪述) 및 분석을 통해 그 전모를 드러냄으로써 거시적, 통합적 시야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러한 안목을 토대로 왜 한국에서 서왕모가 지속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는지 그 심층적 요인(要因)을 여러 측면에서 검토하고 결론을 맺게 될 것이다.

 

2. 서왕모 신화의 성립과 한국으로의 전래

 

2.1 서왕모 신화의 성립

 

서왕모 신화의 성립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거론되는 자료는 산해경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다.

 

다시 서쪽으로 350리를 가면 옥산이라는 곳인데 이곳은 서왕모가 살고 있는 곳이다. 서왕모는 그 형상이 사람 같지만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하고 휘파람을 잘 불며 더부룩한 머리에 머리꾸미개를 꽂고 있다. 그녀는 하늘의 재앙과 오형을 주관하고 있다.

(又西三百五十里, 曰玉山, 是西王母所居也. 西王母其狀如人, 豹尾虎齒而善嘯, 蓬髮戴勝, 是司天之厲及五殘.)



                                                          주목왕과 서왕모의 이별. 천문도(天問圖).



  서해의 남쪽, 유사의 언저리, 적수의 뒤편, 흑수의 앞쪽에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을 곤륜구라고 한다. 사람의 얼굴에 호랑이의 몸, 꼬리에 무늬가 있으며 모두 흰 신이 여기에 산다. 산 아래에는 약수의 깊은 물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바깥에는 염화산이 있어 물건을 던지면 곧 타버린다. 머리꾸미개를 꽂고 호랑이 이빨에 표범의 꼬리를 하고 동굴에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름을 서왕모라고 한다. 이 산에는 온갖 것이 다 있다.

(西海之南, 流沙之濱, 赤水之後, 黑水地前, 有大山, 名曰昆侖之丘. 有神, 人面虎身, 有文有尾, 皆白, 處之. 其下有弱水之淵環之, 其外有炎火之山, 投物輒然. 有人, 戴勝, 虎齒, 有豹尾, 穴處, 名曰西王母. 此山萬物盡有.)


이러한 기록들을 토대로 중국과 해외의 다수 학자들이 서왕모의 정체, 신적 속성 등을 두고 많은 쟁론을 벌여왔다. 서왕모의 정체에 대해서는 우선 신으로 보느냐 서방의 종족 혹은 나라로 보느냐의 분별이 있으며 신적 속성에 대해서는 형신(刑神), 지모신(地母神), 월신(月神), () 토템 등으로 보는 입장들이 있으나 형신의 직능을 지닌 서방의 여신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여기까지는 서왕모의 원시적 형상에 의거한 가설들이나 서왕모는 춘추, 전국시대부터 그 신성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주목왕(周穆王)의 서방 여행을 다룬 목천자전(穆天子傳)에 이르면 서왕모는 천자를 환영하고 그와의 이별을 애달파 하는 시를 짓는 여신으로 전변된다. 양자가 수창(酬唱)하는 시에서 서왕모가 자신을 천제의 딸로 칭하고 주목왕이 죽지 않고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통해 서왕모가 과거의 형신 곧 죽음의 여신에서 불사(不死)의 여신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규지(窺知)할 수 있다. 아울러 용모에 대한 묘사는 없으나 문맥을 통하여 반인반수에서 아리따운 여인으로 변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왕모의 이러한 변신은 이후 가속화되어 한대(漢代)에 이르면 화상석(畫像石)에서 익히 보이듯이 옥토끼, 구미호(九尾狐), 두꺼비, 삼족오(三足烏) 등의 신화적 동물과 배우신인 동왕공(東王公) 및 우인(羽人)을 동반하여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불사의 여신 이미지가 굳어지고 도교가 성립된 이후에는 요지(瑤池) 호숫가에서 불로장생의 복숭아 과수원인 반도원(蟠桃園)을 소유하고 세 마리 청조(靑鳥)와 선녀들의 시중을 받는 최고의 여선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다. 위진(魏晉) 이후에 지어진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을 보면 서왕모는 강력한 제왕 한무제마저도 질타하는 존엄한 여선이 되어 주목왕의 귀환을 고대했던, 목천자전에서의 가녀린 여신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였다. 이후 도교가 국교였던 당대(唐代)에 서왕모 숭배는 절정에 달하였으며 청말(淸末)에 이르기까지 전통 시기 내내 가장 인기 있는 여선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서왕모. () 임훈(任薰)요지예상도(瑤池霓裳圖).


  결국 서왕모는 반인반수의 죽음의 여신에서 아름다운 생명의 여선으로 변모한 것이 분명한데 이 극적인 변모의 동인(動因)을 설명해 줄 역사적 자료나 합의된 가설은 아직 없다. 서왕모가 처음에는 죽음의 여신이었지만 이 때문에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녔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장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소망에 따라 생명의 여신으로 거듭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을 보다 심층적으로 사유하면 근본적으로 서왕모 여신 자체에 삶과 죽음의 이원성이 내재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상기되는 것은 일찍이 프로이트가 인간의 본능 속에 삶을 지향하는 에로스(Eros)적 충동과 죽음을 지향하는 타나토스(Tanatos)적 충동이 공존해 있다고 갈파한 대목이다. 프로이트는 생물의 생명 과정에 내재한 건설적, 동화적(同化的, assimilatorisch) 작용과 파괴적, 이화적(異化的, dissimilatorisch) 작용에 착안하여 생명의 연장을 향해 압력을 가하는 성적 본능과 죽음을 추동하는 자아 본능으로부터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의 공존을 가정하였다. 신화에서 신성은 우리 무의식 깊은 곳의 본능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서왕모는 삶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처럼 지닌 인간의 본능적 충동을 보여주는 여신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궁구(窮究)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서왕모에게 잠재된 양면성이 처음에는 죽음의 면모만 부각되었다가 춘추, 전국시대 이후 삶의 측면이 강화되었는가? 우리에게 내재된 본성은 동일할지라도 역사적, 환경적 요인에 따라 각자 발현되는 특성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서왕모 신화에 대해서도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문명 초창기, 요하(遼河) 유역의 신석기 문명으로부터 이를 계승한 은대(殷代)의 청동기 문명에 이르는 시기에는 동방 지역의 정치, 문화적 비중이 서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컸다. 이에 따라 당시의 방위 관념에 따르면 해가 뜨는 동방을 이상화하고 해가 지는 서방을 죽음의 기운이 지배하는 곳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은 및 동이계(東夷系) 종족의 문화를 농후하게 반영하고 있는 산해경에서 극서(極西)의 지역에 거주하는 서왕모를 죽음의 여신으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그러나 이는 서왕모에 내재한 삶과 죽음의 양면성 중에서 죽음의 충동만 끌어낸 것이었다. 서왕모가 거주한 곳이 옥산(玉山)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죽음뿐만 아니라 삶의 충동도 담지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옥은 인간과 우주를 조화롭게 하는 생명의 기운을 품은 광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 은주(殷周)의 왕조 교체는 왕국유(王國維)가 적절히 말한 바 있듯이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중국문화, 관념상의 극변(劇變)이었다. 서방에 연원을 두고 있는 주족(周族)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방위 관념도 바뀌게 된다. 주족의 본향이자 이상향인 서방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기운이 지배하는 음산한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귀소(歸巢)해야 할 낙원이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다. 죽음의 여신 서왕모에 내재해 있던 삶의 충동은 이제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밖으로 이끌려져 나왔다. 그리하여 주목왕이 만나게 된 여신은 반인반수의 형신이 아니라 아리따운 여성의 모습을 한 생명의 여신이었던 것이다. 주와 이를 계승한 한()으로 중국 정치, 문화의 정통 라인이 형성되면서 마침내 서왕모는 더 이상 살벌한 죽음의 여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장수와 복락(福樂)을 가져다 주는 생명과 길상(吉祥)의 여신으로 정착되었다.


 2.2 서왕모 신화의 한국으로의 전래

 

서왕모 신화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한국에 전래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면에서 탐색해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서왕모에 관한 원시적 모습을 기록한 산해경의 전입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서왕모가 도교에 편입되면서 종교 전파에 의해 많이 확산되었으므로 도교의 이입(移入)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방면의 경우 백제 고이왕(古爾王, 234-286) 때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산해경을 전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이 책이 읽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19-18)이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의 사랑싸움에 낙심하여 불렀다는 황조가(黃鳥歌)산해경에 등장하는, 질투를 없애준다는 황조(黃鳥) 모티프와 상관되는데 이것까지 감안하면 산해경의 전입 연대는 삼국시대 초로 훨씬 올라간다. 그렇다면 산해경에 실린 원시 서왕모의 존재 역시 한국에 상당히 일찍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 방면의 경우 문헌상 도교의 공식적 이입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624)에 당 고조(高祖)가 도사를 파견하고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보내온 일인데 사실상 이보다 이른 시기에 한국에 도교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우선 대략 6세기로 편년(編年)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승조신선(乘鳥神仙) 등의 존재라든가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발굴된 매지권(買地卷), 동경(銅鏡)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 산경문전(山景文塼) 등의 유물에서 농후한 도교의 기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대를 훨씬 거슬러 낙랑(樂浪) 시기의 출토물인 동반(銅盤), 동경에 서왕모가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대의 원시 도교 혹은 초기 도교가 이미 낙랑에 들어왔고 후일 고구려에 병합되면서 낙랑의 도교문화 혹은 서왕모 숭배 습속이 일찍부터 고구려에 수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隣接)했기 때문에 낙랑의 도교와는 별도로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 도교가 민간을 통해 이입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하겠다. 이러한 도교 수용의 바탕 위에서 한국 최초의 서왕모 숭배를 보여주는 감신총(龕神塚) 벽화가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3.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서왕모 수용

 

삼국시대는 중국 도교가 한국에 전래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서왕모에 대한 초보적 인식과 수용이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와 백제의 금동대향로 등에서 보이는 도교 예술의 수준 높은 경지는 이 시기에 이미 서왕모 수용이 궤도에 올랐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농후한 선불습합(仙佛褶合)의 분위기 속에서 문학, 예술은 물론 종교 방면으로도 폭넓게 서왕모 수용이 이루어져 조선시대에 이르러 개화(開花)하는 기반이 된다.

 

3.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수용 양상

 

삼국시대의 서왕모 수용은 현전하는 문헌 및 유물 자료가 많지 않아서 손에 꼽을 정도라 하겠다. 우선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5세기 초로 편년되는 평양의 고구려 감신총 벽화를 들 수 있다.  북한 진남포시에 위치한 감신총의 앞방 궁륭부(穹隆部) 서측(西側)에는 T자형 대()의 가로대 위에 정좌한 서왕모 추정 인물과 좌우의 시녀, 뾰족한 산봉우리, 새를 탄 여인, 새구름 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피장자가 서왕모의 곤륜(崑崙) 세계로 승선(昇仙)하기를 기원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그러나 이후의 고구려 고분에서 비상(飛翔)하는 신선은 다수 등장하나 서왕모의 형상은 보이질 않는다.백제의 경우 서왕모와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서왕모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10세기에 성립된 일본의 연희식(延喜式)》〈축사(祝辭)에 인용된 왕인(王仁), 아직기 계통 인물의 주문(呪文)에 나열된 신들의 명호(名號) 중 동왕부(東王父)와 더불어 서왕모가 보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왕모는 백제에서도 일찍부터 잘 알려진 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감신총 벽화의 서왕모


신라 및 통일신라의 경우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 전설과 관련하여 몇 가지 모티프가 선도성모를 서왕모로 추정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즉 선도산은 곧 서악(西嶽)인데 이는 곤륜산을 암시하고 선도는 곧 서왕모의 반도이며 선도성모의 사자인 솔개[]는 서왕모의 시중을 들었던 청조(靑鳥)와 맹금류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렇다면 신라에서 서왕모 신화는 상당히 깊고 넓게 받아들여져 토착화의 단계에까지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는 좀더 논증이 필요하며 신라의 서왕모 신화 수용은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에 이르러서야 확증된다. 최치원은 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근무했는데 도교 신봉자인 고변의 막부(幕府)에는 도사들이 활동하고 있어 도교를 접하기 쉬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무외(韓無畏)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서는 입당(入唐) 유학생들이 도인 종리권(鍾離權)으로부터 내단학(內丹學)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한국 선도 계보상의 비조(鼻祖)로 최치원을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은 문집에 상당한 양에 달하는 도교 제문 곧 청사(靑詞)를 남기고 있고 금모(金母), 요대(瑤臺), 요지, 반도 등 서왕모와 관련된 어휘들이 시문에 보인다.

 

나중에는 응당 요지의 모임에 가실 것이니......홀로 장생을 누리시다 문득 신선의 지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다스림을 잘해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고, 술을 마시며 서왕모에게 노래를 청하시게 될 것입니다.

(後當去會瑤池.....獨保長生, 却登眞位. 調鼎佐玉皇之命, 銜杯請金母之歌.)

 

통일신라시대는 도교 제국인 당과의 문화적 교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으므로 전술한 사항들 이외에도 더 많은 서왕모 관련 자료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유감스럽게도 현존하는 자료는 극히 드문 형편이다.

 

3.2 고려시대의 수용 양상

 


                                                                           〈청자 도교 인물 주전자.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에 이르면 송의 진종(眞宗)과 휘종(徽宗)의 도교 숭신(崇信)과 그 영향, 고려 예종(睿宗)의 복원궁(福源宮) 도관 건립 등으로 인해 서왕모 수용의 여건이 무르익는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서왕모 숭배의 기풍이 진작되었다는 점이다. 송서(宋書)의 기사에 의하면 고려인들이 정월에 서왕모 신상(神像)을 만들어 모시는 습속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민간에서도 종교적으로 서왕모를 신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 있는 유물로는 12세기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청자 도교인물 주전자가 있다. 이 청자 도교인물은 봉황이 장식된 관을 쓰고 선도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있는 여성의 모습으로 미루어 서왕모로 추정된다. 이 도교 여성상은 당시 서왕모 신상을 모셨다는 습속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고 송으로부터 대성악(大晟樂)이 들어오면서 전입된 악무(樂舞) 헌선도(獻仙桃)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도 보인다.

말이 나온 김에 고려시대 서왕모 수용의 사례를 보여주는 악무로서 헌선도(獻仙桃)오양선(五羊仙)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서왕모가 임금에게 선도를 바쳐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 후자는 선도를 바치지는 않으나 역시 서왕모가 임금의 장수를 송축(頌祝)하는 내용을 담은 악무인데 이들은 송으로부터 전입된 이후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행사에서 연행되었다.

문학 작품에 수용된 서왕모의 사례로서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의 작품을 효시로 들 수밖에 없는 것은 중국에서 간행된 그의 문집이 현존하는, 한국 문인의 가장 오래된 문집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과거제의 도입으로 한문학 저변이 확대되고 뛰어난 문인들이 배출되면서 도교적 상상력은 그들의 좋은 창작 소재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 문인들의 작품에서 서왕모는 더없이 친숙한 존재로 등장한다. 무인 정권 시기 불우한 삶을 살았던 천재 시인 임춘(林椿)은 이렇게 노래한다.

 

我夢乘風到月宮, 꿈속에 바람을 타고 월궁에 이르러,

排門直捉姮娥問. 문을 밀치자 곧장 항아를 붙들고 물었네.

奈何使爾司春桂, 어찌하여 그대에게 계수나무를 맡겼더니,

與奪不公人所慍, 주고 뺏음이 불공평해 사람들이 성을 내나.

低頭再拜謝我言, 머리 숙여 재배하고 내게 사과해 말하기를,

妾不愛憎皆委分. 제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분수대로입니다.

紫府今書君姓字, 천상에는 지금도 그대 이름이 쓰여있거니,

曾陪王母遊閬苑, 과거에는 왕모를 모시고 곤륜산에서 노셨지요.

也爲輕狂多負過, 경박한 짓 하고 잘못 많이 저질러,

帝令譴謫方知困. 상제의 명으로 귀양 보내져 고생 좀 하게 된 것이지요.

從此文星不在天, 이때부터 문창성이 하늘에서 사라졌지만,

世人誰識塵中隱. 세상의 누구도 속세에 숨은 것을 알아보지 못했답니다. (하략)

 

과거에 낙방한 시인 임춘은 계수나무를 꺾어[折桂] 급제자를 점지한다는 항아(姮娥)의 입을 빌려 자신이 결코 실력 없는 문인이 아니라 전생에 곤륜산에서 서왕모를 모시고 놀았던 문학의 신 곧 문창성(文昌星)이었는데 잘못을 저질러 하계에 적강(謫降)한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외에도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일원인 이인로(李仁老) 역시 복숭아 익자 서왕모 시켜 바치게 하고, 고상한 노래 나오자 항아 보고 전하게 하네.(桃熟已敎金母獻, 曲高新自月娥傳.)”라고 서왕모의 반도 고사를 노래한 것을 비롯, 이규보(李奎報), 최자(崔滋), 이제현(李齊賢) 등의 작품에서도 서왕모 관련 모티프가 등장하여 고려 문인들에게 서왕모는 이미 상용하는 소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3 분석

 

감신총 벽화의 서왕모로 미루어 여신 숭배와 샤머니즘적 성향이 농후한 남북조시대의 상청파(上淸派) 도교가 고구려에 전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도 무녕왕릉의 매지권, 동경 등을 통해 도교사상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데 상청파 도교가 성행했던 남조(南朝) ()과의 빈번한 교류를 고려하면 그 가능성이 커진다. 감신총 벽화에는 중국의 서왕모 벽화에서 늘상 보이는 동왕공이라든가 구미호, 옥토, 두꺼비, 삼족오 등의 이미지 요소들이 없어 고구려 서왕모 벽화만의 특성인지 다른 요인 때문인지 검토의 여지가 있다. 아울러 새를 탄 여성 이미지는 후대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승조신선의 이미지와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 고구려의 신선사상을 잘 구현하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선도산 성모를 서왕모의 신라판 본지수적(本地垂迹)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종래 경주 유적 나아가 신라 문화를 불교 중심 일변도로 해석해왔던 경향에 대해 선불습합(仙佛褶合)의 견지에서 다시 들여다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불국사를 비롯한 경주 일원의 사찰들이 이러한 요소를 적지 아니 지니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삼국시대에 창건된 불사(佛寺)들 상당수가 지금까지 온존하고 있는 특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도산 성모 곧 신라 서왕모는 아마 고래의 이러한 습속을 바탕으로 탄생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신라시대의 자료로서 한 가지 더 거론할 것은 근래 발견된 김대문(金大問)화랑세기(花郎世記)에 실려 있는 청조가(靑鳥歌)이다.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실연(失戀)하여 불렀다는 이 노래에서 청조는 헤어진 옛 연인으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의 메신저로 볼 수도 있다. 화랑세기(花郎世記)는 진위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문헌이므로 이 책에서 등장하는 청조를 신라 시가에서의 서왕모 수용 사례로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4. 조선시대의 서왕모 수용

 

조선시대에는 강력한 유교 통치가 행해졌음에도 전기에 소격서(昭格署)와 단학파(丹學派)를 중심으로 한 사족 계층의 도교 수련 기풍, 후기에 관제(關帝) 신앙을 비롯한 민간도교의 흥성, 그리고 산해경열독(閱讀)의 확대, 명대(明代) 신마(神魔) 소설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문학, 예술 방면의 서왕모 수용이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도 활발해진다.

 

 4.1 문학에서의 수용 양상

 

먼저 시가 방면을 살펴보면, 전기에는 김시습(金時習)옥황이 강림하는 곳엔 향그러운 안개가 깔리고 서왕모가 올 적엔 아름다운 난새를 타고 오네.(玉皇降處圍香霧, 金母來時駕彩鸞.)라는 시구를 비롯, 홍유손(洪裕孫)한 잔 들고 요지연에 참석하여, 삼신산을 굽어보니 제비 알과 같네.(擧參宴瑤池, 俯視三山如燕卵.)라고 노래했듯이 단학파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서왕모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후 특기할 만한 현상은 낭만적인 당시풍(唐詩風)의 부상과 단학파의 영향으로 16,7세기 시단을 압도한 유선시체(遊仙詩體)가 등장한 것이다. 온갖 신선, 도교적 모티프를 구사하는 유선시에서 중심 인물은 단연 서왕모였다. 많은 유선시 작가들 중 허초희(許楚姬)는 무려 99수의 유선시를 지었다. 그녀는 단순히 창작뿐만이 아니라 서왕모 여신 자체를 선망했고 심지어 자신을 여신으로 상상하기까지 했다. 망선요(望仙謠)는 이러한 그녀의 심경이 표현된 작품이다.

 

瓊花風軟飛靑鳥, 옥꽃 위로 미풍이 불자 파랑새가 날고,

王母麟車向蓬島. 서왕모의 기린 수레 봉래섬으로 향하네.

蘭旌蘂帔白鳳駕, 목란 깃발 꽃술 배자의 흰 봉황 수레를 몰거나,

笑倚紅欄拾瑤草. 붉은 난간에 기대어 옥풀을 줍기도 하지.

天風吹擘翠霓裳, 푸른 무지개 치마 바람에 날릴 새,

玉環瓊佩聲丁當. 옥고리 패옥(佩玉) 소리는 댕그렁댕그렁.

素娥兩兩鼓瑤瑟, 선녀들 쌍쌍이 옥거문고 타자,

三花珠樹春雲香. 삼주수(三珠樹) 주위에 봄 구름이 향기롭네.

 

허초희 이외에도 이춘영(李春英), 이수광(李睟光), 신흠(申欽), 권필(權韠), 허균(許筠), 허봉(許篈), 정두경(鄭斗卿) 등이 그들의 유선시에서 서왕모를 노래했다. 이들 이외에 정지승(鄭之升)은 서왕모의 청조 모티프를 수용하여 열렬한 애정시를 빚어냈다.

 

梨花風雨掩重門, 배꽃 비바람에 흩날리고 겹겹이 문은 닫혔는데

靑鳥飛時見淚痕. 청조 날아올 제 눈물 자국을 보았네.

一死可能忘此別, 한번 죽어 이 이별을 잊을 수 있다지만,

九原猶作斷腸魂. 저승에서 오히려 애끓는 넋이 되리라.

 

서왕모의 시중꾼인 청조는 후일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나 편지를 상징하게 된다. 여기서 청조는 불의에 헤어진 연인이 보내온 편지를 뜻하게 된다. 당시(唐詩)에서 유선시는 애정시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이는 유선시의 중심 인물인 서왕모가 천상과 지상의 중재자로서 신성한 결합을 위한 정열의 권화(權化)로 간주되었는데 그러한 메카니즘이 쉽게 남녀 관계에 암합(暗合)되었기 때문이다. 시가 속의 서왕모 모티프는 한시 이외 시조, 민요, 서사무가 등에서도 그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사족 계층은 물론 일반 민중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다음으로 소설 방면을 살펴보면, 시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왕모 여신 자체, 청조, 요지, 반도, 약수 등의 이미지가 소설의 인물, 정신세계, 주거 환경, 상황 등을 묘사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령 한문소설 중 운영전(雲英傳)을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보인다.

 

진사(進士) 사례(謝禮)하여 가로되……동방삭(東方朔)으로 좌우에 모시게 하고 서왕모로 천도(天桃)를 드리게 함 같으니 이러함은 두보의 문장(文章)으로 가히 백체(百體) 구비(具備)타 이르리이다.……첩이 봉서(封書)로써 던지니 진사가 집어 집에 돌아가 떼어 보고 비불자승(悲不自勝)하여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고 생각하는 정이 전보다 더하여 능히 자존치 못한 듯한지라 이에 답서를 써 부치고자 하나 청조(靑鳥)의 신()이 없는지라 홀로 탄식할 따름이더니

(進士謝曰,……則如使東方朔侍左右,西王母獻天桃, 是以杜甫之文章, 可謂百體之具矣,……妾以封書, 從穴投之, 進士拾得歸家, 拆而視之, 悲不目勝, 不忍釋手, 思念之情, 倍於曩時, 如不能自存, 欲答書以寄, 而靑鳥無馮, 獨自愁歎而已.)

 

서왕모와 동방삭(東方朔)의 반도 고사, 청조 모티프 등을 활용하여 김진사의 심정과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서왕모 모티프를 수용한 한문소설로는 운영전이외에도 구운몽(九雲夢), 최척전(崔陟傳), 강로전(姜虜傳), 위경천전(韋敬天傳),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홍환전(洪睆傳), 오유란전(烏有蘭傳)등을 들 수 있다.

국문소설의 경우에도 이러한 경향은 마찬가지인데 심청전, 숙향전, 춘향전, 소대성전, 강태공, 이대봉전, 적성의전, 임씨삼대록, 소현성록등 허다한 작품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춘향전을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방자 분부 듣고 춘향 초래 건너갈 제 맵시 있는 방자 녀석 서왕모 요지연에 편지 전하던 청조(靑鳥)같이 이리저리 건너가서, “여봐라, 이 애 춘향아.” 부르는 소리에 춘향이 깜짝 놀래어, “무슨 소리를 그따위로 질러 사람의 정신을 놀래느냐.” “이 애야, 말 마라. 일이 났다.” “일이라니 무슨 일.” “사또 자제 도련님이 광한루에 오셨다가 너 노는 모양 보고 불러오란 영이 났다.”

 

특히 청조는 고전소설 속에서 빈번히 출현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물(信物)을 가져다주거나 편지를 전하기도 하며 주인공의 길을 인도하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고전소설에 애정 주제가 많기 때문에 청조 모티프가 자주 활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소설 방면 역시 한문소설에서 판소리계 소설에 이르기까지 서왕모의 수용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여신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보편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2 예술에서의 수용 양상

 

예술에서의 서왕모 수용을 먼저 회화 방면에서 살펴보면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요지연도(瑤池宴圖)와 십장생도(十長生圖), 신선도(神仙圖) 등을 들 수 있다.


요지연도. 조선 19세기 경기도박물관.


 요지연도는 서왕모가 요지 호숫가에 주목왕 및 여러 신선, 불보살 등을 초대하고 선녀들이 영지(靈芝), 반도 등을 제공하는 연회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불사의 여신인 서왕모에게 장수와 부귀영화를 기구(祈求)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지연도는 궁중이나 반가(班家)는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는데 숙종(肅宗)은 친히 그 제발(題跋)을 짓기도 하였고 병풍의 형태로 제작되어 혼례식에 길상화(吉祥畵)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독특한 길상화 양식인 십장생도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성행하는데 이전과 달리 서왕모 신화의 영향으로 반도가 추가되어 큰 변모를 보인다. 반도는 신선도,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등에도 많이 등장한다. 김홍도(金弘道)낭원투도(閬苑偸桃)는 동방삭이 서왕모의 반도원에 들어가 복숭아를 훔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아울러 문인들이 상용하는 반도 형태의 연적(硯滴)은 공예 분야까지도 서왕모 모티프가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인····신을 이미지화한 문자도(文字圖)의 경우 ()’에 해당하는 이미지로 인면조(人面鳥)와 더불어 청조를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춤의 경우 서왕모와 관련된 것으로 궁중에서 공연되었던 당악정재(唐樂呈才)로 국왕의 장수를 기원했던 헌선도오양선이 있는데 이들은 전술하였듯이 고려시대에 송으로부터 전입되었던 악무들이다. 이중 헌선도는 지방에서 헌반도(獻蟠桃)로 곡명을 바꿔 공연될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4.3 분석

 

조선시대에는 문학, 예술 각 방면에서 서왕모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고 수용의 정도가 심화되어 그 운용이 자재(自在)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전술했듯이 유교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단학파의 활동과 후기 민간도교의 유행이 배경을 조성하였고 16.7세기 당시풍의 부상으로 인한 유선시체의 흥기와 산해경은 물론 서유기(西遊記), 동유기(東遊記), 봉신연의(封神演義)등 명대 신마 소설의 영향이 보다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축적된 서왕모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상술한 여건을 맞아 확대, 심화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왕모 수용의 심화는 중국과는 다른 변용 혹은 독창적 활용을 낳게 되는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경우 자료의 한계로 그 뚜렷한 특성을 감지하기 어려우나 조선시대의 경우 그 추이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파악된다. 가령 시가 방면에서 정두경은 금강산을 음영(吟詠)함에 단학파의 민족 선도적 입장에서 종래의 서왕모 수용과는 다른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東海三神在, 동해의 삼신산이 이곳에 있으니,

中原五嶽低. 중원의 오악도 낮아 보인다.

群仙爭窟宅, 뭇 신선들 자리 잡고 싶어 안달이니,

王母恨居西. 서왕모도 서쪽에 거주함을 한탄하리.

 

단학파 후예인 정두경의 눈에 비친 금강산은 동방에 있다는 삼신산이며 중국의 오악보다도 더 신령스러운 곳이다. 따라서 서왕모도 이곳 동방에 거주하고 싶으리라는 발언은 한국 선도의 주체적, 반존화주의(反尊華主義)적 이념을 표명한 것이어서 이채(異彩)를 발한다.

<헌선도> 역시 중국의 악무였는데 고려 때 전입된 후 무인 정권 시기에 최충헌(崔忠獻)이 개작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미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변용의 과정을 거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중국과 달리 대중화, 통속화된 것은 한국 <헌선도>의 특성이라 할 것이다. 요지연도도 남송 이후 명청(明淸) 시기에 걸쳐 형성된 중국의 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 군선경수반도회(群仙慶壽蟠桃會)등의 그림이 전입되어 조선 후기에 성행한 것으로 등장인물, 구도, 지향 의미 등에서 변용을 거쳐 당연히 한국문화의 고유한 특성을 구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서왕모와 관련된 여러 모티프 중, 문학 방면[특히 소설]에서 청조 모티프의 수용이 빈번함에 비하여 예술 방면에서는 반도 모티프가 다수 등장하는 것도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이것은 문학 방면의 경우 애정 주제가 비교적 많아 사랑의 메신저로 청조가 요청되고 예술 방면의 경우에는 주로 송축과 벽사(辟邪)의 목적에 반도가 적합하여 선택된 것에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5. 왜 한국에서 서왕모인가?

 

소략하나마 한국의 전 시기를 통관하여 서왕모 수용을 개관한 후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은 왜 한국에서 서왕모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산해경열독이나 도교의 전파 같은 현상적 요인으로 충족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고 문화의 심층에 닿는 보다 근원적인 설명이 필요한 물음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한국 전통문화에서 서왕모는 역사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흐름의 느낌은 중요하다. 질베르 뒤랑(Gilbert Durand)은 한 문화 혹은 사조의 형성과 추이를 물과 강의 은유를 사용해 스며 나옴에서부터 델타로 남기까지 일련의 흐름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그러한 현상을 의미의 물줄기로 명명한 바 있다. 이처럼 중단되지 않는 흐름에는 마르지 않는 샘 곧 수원(水源)이 있듯이 서왕모 흐름의 현상 이면에는 불변의, 보편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왕모 흐름의 심층적 요인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가설적인 견지에서 몇 가지 견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산신도(山神圖). 작자 및 연대 미상.


 첫째, 서왕모의 신격과 관련하여 그녀를 형신과 같은 직능신이 아니라 지모신(地母神)으로 보는 견해를 긍정한다고 할 때 선도산 성모까지 포함한 고대 한국의 여신인 지리산 성모, 가야산 정견모주(政見母主), 각지의 노고(老姑) 등과의 공통점이 찾아진다. 이들 한국의 여신들은 서왕모와 마찬가지로 산신인데다가 본래는 지모신의 성격을 지닌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간신앙적 토대 위에서 서왕모가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대에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억압으로 여성 산신에 대한 신앙이 음사(淫祀)로 배척될 때에 비교적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외래의 서왕모 신앙이 토착 지모신의 역할을 대리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둘째, 인류 심리의 근저에는 모태 회귀본능이 있고 이는 여신을 근원적 힘의 원천으로 숭배하는 관념을 낳는다. 따라서 부권제 사회 성립 이후 남신이 최고신으로 군림했다 하더라도 여신을 통해 완전한 행복을 얻거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은 변함이 없었다.[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모든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언명했던 것을 상기하자.]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 불교의 관세음보살이 남성 유일신 혹은 최고신이 존재함에도 크나큰 신앙적 인기를 누렸던[현재도 누리고 있는] 것은 상술한 이유에서였다. 다시 말해 서왕모는 성모 마리아, 관세음보살과 등가적 지위에 있는 동아시아 토착의 여신이었던 것이다. 주목왕이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서왕모를 찾아가고, 한무제가 불멸의 육신을 얻기 위해 서왕모를 초빙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오래 살고, 복을 받기 위해 서왕모에게 기도했던 것은 바로 이 여신이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근원적 힘의 원천[그 힘의 표현이 불사약이거나 반도]이기 때문이었다. 서왕모는 바로 이러한 인류 보편의 여신 숭배 본능 때문에 장구한 역사 동안 한국에서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셋째, 상술한 두 가지 요인들의 경우와 달리 신화적, 지리적 차원에서의 요인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신화 시대 중국의 영역은 지금보다 훨씬 협소하였다. 산해경》 〈서산경(西山經)등의 원시 서왕모가 출현했을 당시의 시공간은 최소한 은대(殷代)와 동이(東夷) 문화권을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갑골문에 이미 서왕모를 지칭하는 서모(西母)’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모신 발생의 시점으로 보면 은대 이전 신석기 시대를 상정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용산(龍山) 문화와 대문구(大汶口) 문화, 더 이르게는 홍산(紅山) 문화까지 소급될 수 있고 지역적으로는 하남성(河南省)에서 산동성(山東省) 및 요녕성(遼寧省)에 이르는 동이계 종족의 활동 무대가 포괄될 것이다. 중국 학계 일각에서 서왕모를 동이의 형신으로 보고 그 지망(地望)을 산동성으로 비정(比定)한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는데 상술한 관점에서 검토해볼 만한 견해라 하겠다. 서방에서 흥기한 주족이 은을 멸하고 주 왕조를 건립한 이후 중국의 영역이 현재의 서방까지 확장되면서 서왕모는 황하의 근원으로 상상되는 극서 지역으로 옮겨져 재차 좌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시 서왕모를 동이 문화권에서 발생한 여신으로 볼 때 산동의 대문구 문화, 발해만 연안의 홍산 문화와 친연성(親緣性)을 지니는 한국 상고 문화의 지모신적 여성 산신은 서왕모와 어떤 면에서 특성을 공유할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표미호치(豹尾虎齒)”의 서왕모를 호랑이 토템 혹은 호신(虎神)의 징표로 보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참작하면 한국 산신도에서의, 산신이 호랑이를 동반하는 전형적인 구도와 비교해 볼 여지가 있다. 남성 산신의 원형이 모권제 시기 여성 산신임을 추리하여 산신도의 상고 실상을 호랑이를 동반한 여성 산신으로 가정해볼 때 호랑이 이미지를 지닌 서왕모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서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닐 수 있다. 이 또한 외래의 여신 서왕모를 한국에서 거부감 없이 수용하게 된 심층적인 요인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6. 맺는말

 

본고에서는 한국의 서왕모 수용을 하나의 문화적 흐름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1차적 연구로서 서왕모 신화의 성립 및 전래 그리고 전반적 수용 양상과 요인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제2장에서 서왕모 신격이 죽음의 여신에서 생명의 여신으로 바뀐 것을 은주 교체로 인한 문화적 극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고, 낙랑 시기 혹은 삼국시대 초기에 산해경의 전래 및 중국 도교의 유입에 의해 서왕모 신앙이 도래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어서 제3장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서왕모 수용 양상을 살펴보았는데 고구려 감신총의 서왕모 벽화, 신라의 선도산 성모, 고려의 한시와 헌선도악무 등을 통해 선불습합, 상청파 도교의 전입, 복원궁 건립 등의 배경하에 서왕모 수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임을 추찰(推察)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제4장에서는 조선시대의 서왕모 수용 양상을 살펴보았는데 단학파의 성립 및 민간도교의 대두, 명대 신마소설의 전래가 서왕모 수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여 문학 방면의 경우 16,7세기 유선시 성행을 필두로 시가, 소설에서의 서왕모 모티프 활용이 눈에 띄며 예술 방면의 경우 요지연도, 십장생도, 신선도 등의 광범한 유행은 서왕모 수용이 왕실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축적된 서왕모에 대한 인식과 수용이 조선 시대에 이르러 확대, 심화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5장에서는 상술한 전반적 인식을 바탕으로 왜 한국에서 서왕모 수용이 넓고 깊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그 심층적 요인에 대해 숙고하였다. 숙고의 결과 첫째, 서왕모와 한국의 상고 여성 산신들이 지모신적 성격을 공유함으로써 서왕모가 이 땅에 무리 없이 정착할 수 있었고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탄압받았던 여성 산신들의 지위와 역할을 대리했을 가능성, 둘째, 여신을 근원적 힘의 원천으로 보는 보편적 심리에 의해 불사의 여신 서왕모에게 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 같은 구원의 여신과 비슷한 신격을 부여하여 기복(祈福)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 셋째, 원시 서왕모의 시공간이 신석기 시대 동이 문화권의 서방이었다가 주대 이후 중국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극서로 이동한 것으로 간주할 때 서왕모의 호() 토템적 성격이 호랑이를 동반한 한국 남성 산신의 원형인 상고 여성 산신과 상합(相合)하여 집단무의식적 측면에서 서왕모에 대해 친연성을 느꼈을 가능성 등 세 가지 가설을 제시하였다. 이 가설들은 서로 상치(相峙)되지 않으며 한국에서 장구한 역사 동안 서왕모가 환영을 받아온 이유를 상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앞에서 언명하였듯이 본고는 서왕모 수용에 대한 1차적 연구의 성격을 띤다. 수용 양상 논술에서 미처 망라하지 못했거나 오인한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사계(斯界) 연구자들의 가르침이 있길 바란다. 졸고를 디딤돌 삼아 한중 서왕모 수용의 비교, 그로 인한 변별성 및 고유성의 추출 등 보다 본격적인 탐구가 이어지기를 희망하면서 논의를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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