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두광정의 수도론

김태용(한양대 철학과)

2023.03.20 | 조회 2950

2021년가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두광정의 수도론

 

김태용(한양대 철학과)

 

목차

1. 서언

2. 형신쌍수

3. 양성

4. 수심

5. 결어

 

 

국문초록

도교의 양생론은 형신쌍수, 양성, 성명쌍수 등 세 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친다. 두광정의 수도론은 양성에서 성명쌍수로 전환하는 시기의 도교의 양생론을 대표한다. 그는 인간이 로부터 생명만이 아니라 본성도 품수 받기 때문에 형명쌍수와 양성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형신쌍수의 실천방법으로서 도기를 형상기초로 하는 양기설을 제시하고, 양성의 실천방법으로서 도성를 형상기초로 하는 섭정반성설을 제시한다. 그는 이 두 방면의 수도론이 최종적으로 모두 수심의 문제로 귀결됨을 강조하고, 그 실천방법으로서 심적망경과 중현을 제시한다. 그의 수도론은 형신쌍수와 양성의 종합 시도이며, 이러한 시도는 성명쌍수의 선구가 된다.

주요술어

두광정, 형신쌍수, 양성, 수심, 중현

 

 

1. 서언

 

두광정의 자는 빈성賓聖, 도호道號는 동영하東瀛子이다. 당선종唐宣宗 대중大中3(850)에 처주處州에서 태어나 후당명종後唐明宗 장흥長興4(933)에 청성산淸城山 백운계白雲溪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의종唐懿宗(재위 859~873) 때 관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발분하여 천태 도사 응이절應夷節의 제자가 되어 처음으로 도술을 배웠다. 당희종唐僖宗(재위 873~888)은 두광정이 의례서를 정리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를 불러서 자의상간紫衣象簡을 하사하고 인덕전문장응제麟德殿文章應制라는 관직을 주어 도교의 영수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숭앙하고 도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천하에 그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희종이 촉지방으로 난을 피하러 가자 그를 따라갔다가 성도成都의 청성산 백운계에 은거했다. 희종은 수도로 돌아간 뒤 그를 불러 재초를 행하게 했으며 왕건王建이 전촉前蜀을 세웠을 때 그를 불러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때 왕건은 한대漢代에는 사호四皓가 있었지만 자신은 두광정선생 하나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에게 광성廣成선생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 채국공蔡國公에 봉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청성산으로 돌아가 도경 정리에 노력하다가 933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두광정은 도교사가들에 의해 승선계후承先啓後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학술활동은 기존 도교사유체계에 대한 반성과 분석을 통해 당시 도교계의 요구에 부합하는 이론 체계를 정립하는데 집중되었다. 특히 그의 수도론은 이러한 사상적 특징을 잘 나타내준다. 도교의 양생론은 크게 세 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는 형신쌍수形神雙修의 단계로 동한 말엽부터 위진시기 까지를 말한다. ‘형신이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의미한다. 도교가 희구하는 신선은 기타 종교에서 추구하는 영적 존재가 아니다. 신선은 정신과 육체 즉 자연생명을 갖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선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하고 왕성한 생명력을 가져야하기 때문에 을 함께 수련해야 한다. 두 번째는 양성養性의 단계로 육조에서 수당시기 까지를 말한다. 도교에서 가 인간의 몸 안에서 체현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본성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와 합일하여 신선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단계로 당말 이후의 도교의 수련방법을 말한다. ‘성명은 본성과 생명 혹은 정신과 육체를 의미한다. 즉 인간은 로부터 본성과 생명을 품부 받아 현세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두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이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광정의 수도론은 양성에서 성명쌍수로 이동하는 전환기의 도교양생론을 대표한다. 그의 수도론에는 형신쌍수양성이라는 두 이론이 병립해 있다. ‘형신쌍수양성의 병립은 당말 이후 도교양생론을 대표하는 성명쌍수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2. ‘형신쌍수

 

두광정은 인간의 태어남이라 에 인하여 을 품수하고 그 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에서 생명을 얻는데 이 생명은 육체와 정신 즉 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형신쌍수의 양생을 강조한다.

 

세상 사람들이 수도함에 마땅히 밖으로는 그 형을 공고히 함으로 유를 보배같이 귀히 여기고, 안으로는 그 신을 보존함으로 무를 조상같이 근본으로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점진적으로 묘무에 계합하고 도와 합일하여 장생할 수 있다.”

두광정에 따르면, ‘의 통일체인 인간의 자연생명에 대한 수련은 수형修形수신修神을 병행해야 한다. ‘수형을 통해 즉 육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여야 하고 수신을 통해 즉 정신을 보존하여야 한다. 만약 수형수신가운데 어느 한 측면이라도 제대로 수련되지 않으면 장생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자相資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양생에서 을 수련하여 을 보존하면 그 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을 수고롭게 하여 을 부린다면 을 지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에 인하여 생성하고 로부터 품수하기 때문에 이 함께 보전되어야만 인간은 와 합일할 수 있다. 이처럼 두광정은 의 상생상성相生相成을 강조하여 의 상자적 수련을 통해 와 합일하는 경계에 이르기를 희구한다.

당말오대에 내단內丹사상이 중흥하기 이전에 도교 양생가들은 외단外丹을 양생의 주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도사들이 처음에 복식한 것은 선약仙藥이라는 것으로 주로 초목이나 균과에 속하는 식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약은 복용 후에 병을 치료하고 몸을 보호하는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식물을 이용한 양생은 치병治病과 보신保身의 효과는 있었지만 도교가 목표로 하는 장생불사의 효과는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금속류의 약물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납이나 수은 성분이 포함된 단약丹藥은 오히려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도사들이 금석류의 단약의 독성을 없애기 위해서 광천수나 해독성식물을 이용해 중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여전히 단약을 복식한 후에 사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특히 당대의 왕족들은 도교의 장생술과 복단술服丹術을 지나치게 미신하여 중독사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두광정은 이러한 형신수련의 전통적 양생방법인 외단술에 대해 만약 양생을 너무 지나치게 하거나 혹은 금석류의 단약을 복용하여 중독되면 도리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여 복단을 통해 신선을 희구하는 방법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양기술養氣術을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양기술의 근거는 도와 인간을 관통하는 생성론적 공통본질인 도기道氣에 있다.

두광정에 있어 허무虛無로 하고 통생通生을 그 으로 하여 천지만물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순수한 허무는 만물을 생성할 수 없다. 두광정이 말하기를 허무는 만물을 생성할 수 없다. 만물은 허무미묘지기虛無微妙之氣를 얻어야만 자생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만물은 순수한 공무空無에서는 생성될 수 없고, ‘허무미묘를 존재적 특성으로 물질적 근원 즉 원기元氣를 품수하야만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광정은 허무지기虛無之氣라고 말한다.

 

도는 허무지기다. 혼돈과 건곤의 근원이며 유가 될 수도 있고 무가 될 수도 있어 천지를 포괄한다. 도는 본래 무형이고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무형지형은 진형이라 부르고 무상지상은 진상이라 부른다.”

 

여기서 허무지기허무를 존재적 특성으로 하는 원기를 말한다. 두광정에 있어 허무지기이고 무형지형無形之形이며 무상지상無象之象이다. 노자의 는 인간의 감각기관이나 사유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천지만물의 생성 근원으로서 는 공무나 영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이다. 그러나 이러한 는 구체적 사물처럼 형체를 가지고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모습 없는 모습’, ‘형상 없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두광정은 이러한 허무지기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감각기관과 사유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허무이지만 천지만물의 생성 근원으로서 원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기는 일정한 형체를 갖추거나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허무지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광정에 있어 이러한 허무지기는 바로 도기道氣이다.

 

하늘의 높음은 도기가 덮어주고, 땅의 두터움은 도기가 실어주고, 만물의 많음은 도기가 두루 미쳐준다. 대도가 기를 운용하지 않으면 누가 그 높고 넓음, 두텁고 큼, 많음의 공적을 이룰 수 있겠는가?”

아주 작은 사물이나 매우 많은 종류의 사물들 모두 도기에 의거한다. [도기에] 힘을 빌은 연후에 생성할 수 있다.”

 

도교에서 도기선천기先天氣또는 조기祖氣를 의미하는 것으로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근본을 말한다.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에서 말하기를 도기는 항상 위 아래로 움직이며 천지의 안과 밖에서 두루 선회한다. 따라서 보려 해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아주 맑고 작기 때문이다.”천지 사이에 도기는 충만하다. 아주 맑고 작아 볼 수 없다. 혈육이 있고 생명이 있는 생물은 [도기를] 흠모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 󰡔승현경昇玄經󰡕에서 말하기를 도기가 인간의 몸 안에 있지 않으면, 인간의 몸은 텅 빈 것이다. 인간의 몸이 이미 텅 비어 있는데 어떻게 장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도기는 우주에 건곤乾坤이나 음양陰陽이 분화되기 이전에 혼돈混沌의 상태에 있는 를 말한다. ‘도기는 천지 만물의 정기精氣이며, 이것의 흩어짐[]과 모임[]에 따라 천지 만물의 생성 변화가 일어난다. 따라서 도기란 물질적 근원을 의미하며, ‘도기의 보존 여부는 생명의 생사 여부와 직접적 연관성을 가진다. 두광정은 이러한 도기관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도는 통(두루 통달함)이다. 두루 통달하여 기로 만물을 생성 변화한다. 만물을 생성하기 때문에 만물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여기서 허무, ‘통생으로 하는 의 보편적 본원성을 말한다. 그리고 원기이다. 원기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본래 내재되어 있는 우주생성의 물질적 근원이다. 원기가 분화하여 이의二儀, 삼재三才, 오행五行, 만물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도기원기를 본래 내포한 이면서 인 천지만물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의 높음과 두터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사물,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사물 등 천지만물은 도기를 생성 근원이며 변화발전의 동인動因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광정은 물은 대략 볼 수 있는 형질이 있는 것을 말한다. 동은 비늘이나 껍데기가 있는 것, 깃이나 털이 있는 것, 사람, 날거나 달리는 것 등의 부류를 말한다. 식은 산천이나 초목 등의 부류를 말한다. 유정은 형체가 있고 감정과 의식이 있는 것을 말한다. 무정은 형체는 있으나 감정과 의식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물의 많음은 수 억조의 종류에 이르지만 충화도기의 작용을 얻지 못한다면 생성할 수 없다고 한다. 는 우주 조화(造化)의 근본이고 동물과 식물,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은 모두 충화도기(沖和道氣)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도기에 의해 육체와 정신 즉 이 형성되기 때문에 양생에서 수련이 중요하다.

 

생명을 받는 처음에 도는 기를 부여하고, 천은 신을 부여하고, 땅은 정을 부여한다. 세 가지가 상합하여 형을 생성함으로 인간은 애정, 양기, 존신을 하면 장생을 할 수 있다. 만약 하나라도 산란하면 착란하여 질병이 생기며 다 소모되어 죽음에 이른다. 이 세 가지를 아끼지 않는 것은 흐트러지고 버리는 것이다. 기가 흐트러지고 신이 떠나버리면 인간은 죽는다.”

무릇 현은 천이며 인간에서 코가 된다. 빈은 땅이며 인간에서 입이 된다. 광화의 기와 혜조의 신은 인간의 신체 중에 코와 입으로 출입하며 호흡이 상응하여 신체를 양육한다. 그러므로 곡신이라고 한다. 또한 천의 오기는 코로 들어온다. 그 신을 혼이라 하는데 위로 하늘과 통한다. [반면] 땅의 오미는 입으로 들어온다. 그 신을 백이라 하는데 아래로 땅과 통한다. 인간이 식기하면 하늘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래도록 지속한다면 장생할 수 있다. 양이 음을 이기는 것이다. [반면] 식미하면 땅과 한 무리가 되어 오래도록 지속한다면 병이 생겨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음이 양을 이기는 것이다. 노군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기르고 형을 보배같이 여기게 한다. 절곡과 식기는 불사의 도이다.”

 

인간의 생명은 ‘‘’, ‘’, ‘등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이루어지며, 인간이 죽음에 이르지 않고 장생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을 반드시 보존해야한다. 그런데 ’, ‘’, ‘이란 ’(‘도기’)가 응변應變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장생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두광정은 수련 방법으로 절곡식기법絶穀食氣法을 제시한다. 그가 볼 때, 하늘은 장생의 무리인 반면 땅은 죽음의 무리이다. 만약 인간이 하늘의 기를 먹기를 오래한다면 하늘과 한 무리가 되어 장생할 수 있지만, 반대로 땅의 곡식을 먹기를 오래한다면 땅과 한 무리가 되어 병을 얻어 죽게 된다. 그리므로 그는 식기절곡을 불사의 길이라고 말한다.

 

3. ‘양성 


는 시공을 초월하며 만물보다 선재한 존재이다. 따라서 절대적이며 독립적인 무대無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상공은 도의 본성은 자연이기 때문에 본받을 바가 없다도성자연道性自然관념을 제출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자 혹은 문장구조에서 보면 도법자연道法自然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라고 해석되어진다. 이는 도법자연의 앞 구절 즉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가운데의 자가 모두 본받다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당대 초엽의 불교사상가들은 이 해석방법을 견지하여 를 핵심으로 전개되어지는 도교 교리와 교의의 이론체계의 허구성을 공격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불교계의 비판이 일부 도교사상가에 의해 수용되어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현영은 도는 적이고, 자연은 본이다. 본으로 적을 거두어들인다. 따라서 법(본 받다)이라고 말한다고 해설하고, 서승경허무가 자연을 생성하고, 자연은 도를 생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도법자연이라는 한 구절에 대한 해석상 방법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자라는 도교의 최고경전에서 가 차지하는 지위 및 나아가서 를 최고의 범주로 상정하고 전개되는 도교의 교리와 교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의미한다. 만일 도법자연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라고 해석한다면, 도의 존재성은 자연에 의거하게 된다. 즉 도는 무대가 아니라 유대有待이다. 따라서 도성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의 수도실천은 그 형이상학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두광정은 도가 자연을 본 받는다는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의 본성이 자연임을 천명한다.

 

만약 자연이 도의 위에 거한다면 우주 사이에는 자연을 포함하여 다섯 가지 큰 것이 있다. 또한 도는 자연과 무위의 자손이 된다. 이 모두는 망령된 견해이다.……대도는 허무를 체로, 자연을 성으로, (통생)를 묘용으로 삼는다. 나눠서 말하면 하나가 셋이 되는 것이고, 합쳐서 말하면 셋이 융합하여 하나가 된다. 이를 통칭해서 허무자연대도라고 한다. 하나의 체로 돌아가니, 서로 생성하고 본받는 이치나 서로 선후와 우열의 차별이 없다. 자연이 아니면 도의 본성을 밝힐 수 없고, 허무가 아니면 도의 체를 밝힐 수 없고, 통생이 아니면 도의 용을 밝힐 수 없다.”

 

두광정의 비판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만약 노자가 자연을 하나의 실체로 간주했다면 우주 사이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우주 사이에 다섯 가지 큰 것이 있다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도의 운용법칙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하나는 허무, (통생) 및 자연은 대도의 체, 용 및 성(본성)의 속성일 뿐이지, 그들 사이에 생성이나 본받음의 관계, 또는 선후, 우열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노자는 자연관념을 이용해 도의 본성을 설명할 뿐 이다. 따라서 도법자연은 도가 자신의 자연본성에 따라 운행함을 의미한다.

두광정은 의 자연본성은 영원히 그 청정성을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성은 본래 청정함을 구하며 자연히 사물에 응한다. [도가] 세간에서 항상 작용함에 [세간에] 물듦도 없으며 [세간의 사물이] 달라붙음도 없고, [세간의 사물에 의해] 때가 끼지도 않고 먼지가 묻지도 않는다. [청정한 본성을 유지하며] 계기에 따라 변화한다.”

 

두광정에 따르면, ‘의 생성작용은 도체道體와 도용道用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휘된다. ‘적연부동寂然不動적 도체는 무위無爲이고 감이수통感而遂通적 도용은 무불위無不爲이다. 말하자면 도체는 무위하지만 사물에 감응하여 그 잠재적 운동성을 드러내고, 그 작용에 의해 모든 만물은 생성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물의 생성은 의 체와 용 즉 무위무불위가 상자하여 그 작용을 밖으로 드러냈을 때 가능하다. 만약 무위의 상태 즉 도체에 머무르며 작용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만물의 생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 잠재적 운동성이 현실화 되었을 때 즉 도체가 도용으로 전화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생성을 말할 수 있다.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 ‘적연부동한 도체만이 청정한 것이 아니라, ‘감이수통한 도용도 세간의 사물에 의해 염오染汚되지 않고 청정한 본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청정을 본성으로 하는 가 계기에 따라 작용을 일으켜도 그 본성은 영원히 본구本具적 청정성을 잃지 않는다.

두광정은 이러한 청정한 자연본성은 단지 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의 보편적 본성임을 주장한다.

 

도는 본래 자연을 본성으로 함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없고, 우주에 도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따라서 하늘 아래에 모든 것은 도의 조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준동함생은 모두 도성이 있다. 만약 이것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득도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준동함생蠢動含生, 개유도성皆有道性은 불교의 준동함령蠢動含靈, 개유불성皆有佛性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영을 가졌으니 모두 불성이 있다는 말을 차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생명을 가졌으니 모두 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의 산물이고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두광정에 따르면, 이러한 인간의 본성 즉 도성은 본래 청정淸靜하고 무잡무진無雜無塵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본성의 청정함을 본받으면 본래 도와 합일한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 염욕이 생기어 그 참됨을 더럽히고 어지럽혀 와 멀어진다. 두광정은 이러한 인간 본성의 천이遷移관념을 이용해 설명하고, 섭정반성攝情返性을 강조한다.

 

도에서 품수 받은 것을 성이라 부르고, 성이 옮겨진 것을 정이라 부른다. 인간이 정을 거두고 념을 끊어서 본성을 회복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면 지극한 덕의 선비가 된다. 지극한 덕의 근본은 바로 묘도이다. 따라서 성을 닦고 덕으로 돌아감을 유에서 무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정으로 옮겨진 것은 유이고, 정을 거두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이다. 망령된 정을 이미 끊었으면 바른 본성으로 돌아간다.”

념을 쫓아 사악함이 생기는 것이 도를 잃는 것이다. 묘도를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자신으로 돌아가 부드럽고 고요한 품행과 돈후하고 조화로운 품성을 지켜서 정을 제어해야 한다. 정은 말이고 성은 본이다. 성으로부터 정이 생긴다는 것은 경을 쫓아 욕심이 생기는 것이고, 정으로부터 성을 양육한다는 것은 념을 끊고 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으로 돌아가면 오욕이 생기지 않고 육근이 움직이지 않으니……묘본의 도는 자연히 자신에 이른다.”

 

여기서 로부터 품수 받은 것은 이고, ‘이 염오되어 천이한 것이 이다. 즉 인간이 와 합일할 수 있는 근거가 에 있고, 인간이 본성과 를 잃는 원인이 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념을 끊어 버리고 본성을 회복한 이후에야 비로소 로 회귀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고 이다. 인간이 외재사물을 좇아 욕심이 생길 때 에서 이 생긴다는 하는 것이고, 인간이 외재사물에 대한 사념을 끊고 근본으로 돌아갈 때 을 양육한다는 것이다. ‘을 거둬들여 을 회복하면 즉 에서 ’, ‘에서 로 회귀하면 와 자연스럽게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를 깨달게 되는 근거는 인간 밖에 있는 것이다. ‘와 인간을 관통하는 공통본질인 도성에 있다. 따라서 성선이란 외재적 를 획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 즉 에 의해 가리어진 내재적 도성을 체득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4. ‘수심

 

당대 도교에서 로써 를 해석하는 두광정에 있어 인간은 득도성선하기 위해서 형신쌍수양성이라는 두 방면의 양생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두광정의 이 두 가지 양생은 최종적으로는 수심修心즉 마음 수련으로 귀결된다. 두광정이 형신관계에서 의 작용을 강조해 말하기를 인간의 생성은 모두 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신이 오래 지속되면 사는 것이고 신이 단절되면 죽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이미 생성되었으면 신기에 의해 운동한다. 신기가 온전하면 살 수 있고 신기가 없어지면 죽는다, “수신의 도는 모두 양신에 있다고 한다. 이처럼 두광정이 형신이론에서 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성선이라는 것이 유형有形에서 무형無形으로의 복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는 묘무로써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자연이라 부른다. 물이 물을 생성하고 형이 형을 생성하는 것을 인연이라 부른다. 물의 형체는 큰 것은 천지와 같고 작은 것은 곤충과 같다. 모두 자연묘도의 기화에 의해 이루어진 후에 형과 류에 인연하여 상생상성하는 것이다. 수도자가 마음을 허정하게 하고 일()을 안고 원으로 복귀하면 장존할 수 있고 유형에서 장생불사의 경계에 이를 수 있다. 형이 도과 합하여 무형으로 돌아가 변화는 그 시기에 맞고 생사가 괴롭힐 수 없으면 유에서 무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무형인 가 유형인 만물을 생성하고 유형인 인간 또한 무형인 로부터 생성된다. 따라서 와 합일을 최종목표로 하는 수도실천은 유형에서 무형으로 돌아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형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비로소 유형에서 비롯된 생사의 국한을 넘어설 수 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수형修形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수형은 인간의 유형을 보존하고자 하기 때문에 유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무형적 도와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신修神을 통해서 그 유형적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실제로 두광정은 수형을 중시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43200일 즉 120년 정도뿐임을 인정하고 육체생명의 불멸불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한성을 극복하고 불생불멸적 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가운데 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두광정은 심의 소이는 신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고 말한다. 즉 형신쌍수의 근본적 방법은 바로 수심修心인 것이다.

두광정은 양생의 제왕帝王이며 장부藏府가 제후諸侯일 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심왕心王을 청정하게 하여 와 합일한다면 천지원정天地元精가 저절로 몸 안으로 들어와 옥장감로玉漿甘露가 되어 삼일三一과 자아가 그것을 함께 마시면서 상수相守하고 상응하게 된다. 말하자면 토납吐納등 기타 도교의 전통적 양생방법을 사용하는 번거로움이 없이도 수심을 통해 우주의 이 자연스럽게 인간의 신체와 소통하고 화해하여 수도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형신쌍수수심으로 귀결된다.

또한 두광정은 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이 참 도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 감정과 의식에 의해 염오되고 망동됨이 있기 때문이다. 망령됨에 생각하는 것이 있고 생각함에 응감하는 것이 있다. 감이란 감정에 응하여 느껴 의식에 망동함이 있고, 생각에 의식의 움직임이 있어 마음에 망령됨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만약 망령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자연히 청정하다. 또한 말하기를 망동은 잃음이다라고 한다. 모두 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경을 쫓아 감정이 망동하면 그 마음은 이로 인해 참 도를 얻지 못한다

 

두광정에 따르면, 인간은 감정의 망동妄動함을 제거하면 자연청정의 도성으로 회귀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에 있어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다. 불변적 도성이 그 내재적 본질을 상실하기 때문에 와 합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 인심人心에 의해 감정이 생기고 이에 의해 본성이 가려지기 때문에 와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두광정이 이 영험하면 가 강림하고, ‘가 강림하면 이 영험하고, ‘이 영험하면 성인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양성또한 수심으로 귀결되어진다.

이처럼 두광정에 따르면 자연생명 중 육체보다 정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형신쌍수에서 수형보다 수신더 중요하고, ‘수신의 근본적 방법은 수심이다. 또한 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와 멀어지는 것은 으로 천이하기 때문이고, 그 천이는 바로 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신쌍수양성즉 양생의 도는 무엇보다 먼저 그 을 다스리는데 있으며, ‘도과道果를 얻는 것은 모두 을 수련함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광정은 몸을 다스리는 도는 먼저 심을 다스리는데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수도란 바로 수심이라는 것이다.

두광정에 따르면 은 일단 제어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의 망상과 전도된 생각은 모두 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은 쉽게 움직이기 때문에 안정시키기 어렵다. 은 그 작용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은 청색도 아니고 적색도 아니고 백색도 아니고 황색도 아니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다. 큼으로 말하면 천지를 포괄하고 세밀함으로 말하면 호망毫芒에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이 이러한 을 제어하여 청정상태를 유지하면 를 얻어 장생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을 제어하지 않고 제 멋대로 작용하게 하여 발광하면 죽게 된다. 말하자면 수심은 득도의 지름길이지만 은 일정한 실체도 없고 그 작용 또한 일정한 법칙이 없기 때문에 마음 수련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두광정은 수심의 방법으로 심적망경心寂忘境의 명제를 제시한다.

 

성을 수양하여 회복하나 법에 머무르지 않고 행상의 가운데에 또한 집착하지 않는다. 다음 오는 것을 닦고, 다음 닦는 것을 멸한다. 공을 멸하고 유를 떠나니 청정함과 같다. 따라서 심적을 볼 수 없다. 안에서 말하면 심이며 심이 이미 고요하다. 밖에서 말하면 경이며 경 역시 잊었다. 따라서 심이 고요하며 경을 잊었으니 두 길에 집착하지 않는다. 심에서 깨달으니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혜조慧照즉 인식주체이고 의 인식대상이다. ‘이 능동적 주체이기는 하지만 이 없으면 하나의 지식[]’도 형성할 수 없다. 즉 지식의 측면에서 보면 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 올바르면 도 올바르고, ‘이 올바르지 않으면 도 올바르지 않다. 또한 인생의 고락생사苦樂生死길흉화복吉凶禍福도 결국 인식주체인 심이 어떤 외부대상 즉 을 좇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두광정은 심의 혜조는 무와 유를 두루 관통하고 천지에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계기에 인하여 움직이고 경에 따라 질주한다. 청정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염욕으로 빠져든다. 이미 염욕에 빠져 들었으니 온갖 악이 생겨난다. 온갖 악이 생겨나면 과실이 발생한다. 노군은 이를 경계하여 명하기를 세척洗滌하고 제리除理하여 욕심을 제거하라고 하니 심의 혜조가 청정하면 병이 없다고 말한다. 즉 인간이 도성을 깨달지 못하는 것은 을 제어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 때문이니, ‘을 잊고 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곧 심적경망(心寂境忘)’이다.

그런데 두광정은 심이 고요하며 경을 잊었으니 두 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심적하고 경망하려는 것 또한 하나의 집착이기 때문에 심적경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광정에 따르면, ‘심적경망두 길에 집착하지 않을 때만이 자신에게 본래 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다름 아닌 중현重玄 이다. ‘중현도덕경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玄之又玄을 간략히 한 개념이다. ‘중현은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체득하는 방식으로서 이중부정二重否定의 인식방법이다. 본제경에서 중현에 대해 올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먼저 모든 유[諸有]를 공이라고 하여 유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는 공을 부정하니, 공하려는 마음 또한 맑아진다. 이것을 겸망兼忘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를 부정하고 공까지도 부정했지만 마음은 아직 가장 순수한 맑음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공과 유를 대비시켜 다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현이라는 것은 사방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현의 의미를 다한 것이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공이나 유 모두에 집착함이 없는 것이 현이다. 그리고 이 현마저도 부정해서 아무 것도 얻는 바가 없게 된다. 그래서 중현중묘지문重玄衆妙之門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지우현의 첫 번째 라는 현상계의 모든 것이 이라는 것을 깨달고, 다시 이러한 도 부정하여 이라고 생각하는 마음도 맑게 하는 것이다. 모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은 첫 번째 이 비록 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만, 이러한 집착하지 않으려는 것 또한 하나의 집착이기 때문에 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통해 가장 순수한 맑음에 이르는 것이다. 즉 집착하지 않으려는 것에 다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현쌍견雙遣이나 불체에 대한 불체[不滯於不滯]’라고 한다. 두광정은 중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무릇 적을 다스리고 이름을 잊으면 이미 그 묘를 체득한 것이지만, 묘에 집착할까 두려워 다시 그것을 잊으라고 한다. 본과 적을 모두 잊고 또 잊으라는 것은 도와 합일한 것을 잊으라는 것이다. 유욕을 이미 제거하고 다시 무욕을 잊으니 유와 무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중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도와 서로 꼭 맞으면서도 그것을 잊는 것이다.”

 

두광정에 따르면 일현一玄즉 현상을 잊고 즉 근본을 체득한 자가 근본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여 그 근본마저도 잊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현又玄은 현상과 근본을 모두 잊고 와 합일한 자가 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여 그 와 합일한 것조차도 잊으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현은 무욕한 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의 실상이 중도비유비무임을 깨닫는 것이고, ‘우현무욕을 통해 깨달은 자가 다시 무욕마저도 잊음으로써 중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현상을 잊음으로써 우리는 본체를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본체에 집착한다면 와 합일할 수 없다. 현상을 잊고 다시 본체를 잊음으로써 이 경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불충분하다. 현상과 본체를 잊었다는 사실도 다시 잊어야만 완전히 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현의 경계란 끊임없는 잊음의 연속적 과정을 통해 도달하는 하나의 종교적 경계이다. 이는 즉 현상계 혹은 즉 객관대상에 대한 잊음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즉 본체계 혹은 즉 주체자아에 대한 잊음을 의미한다. 두광정은 이러한 철저한 내외적 사물에 대한 잊음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초탈함으로써 와 합일하는 경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중현을 양생의 최고단계이면서 최고경지로 이해한다.

 

5. 결어

 

도교의 기본교지는 장생구시長生久視와 득도성선이다. 성립시기 도교 양생론의 복약服藥, 연형練形, 연단煉丹 등 불로장생술에 편중되었다. 남북조 이후 도교는 불교의 자극과 전통적 불로장생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심성의 문제를 점차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도교학자들 특히 중현학자들이 마음수련을 통한 득도를 중시하였다. 당대도교학자들은 대부분 도성을 수도론의 형상기초로 삼았다. 그들이 말하는 득도란 정신적 초탈 즉 중현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론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양생술과 이를 통한 육체적 장생의 추구에 대해 비판적 혹은 비관적 태도를 견지한다. 비록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정신적 자유와 초탈의 경계에 가깝다고 하지만, 장생구시를 추구하는 도교의 근본정신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불교의 정신해탈경지와 유사하다. 두광정은 이러한 당대도교사상과 도교중심사상의 간극 그리고 도교의 불교화에 주목한 것으로 논자는 생각한다. 두광정은 도성뿐만 아니라 도기를 형상기초로 하는 생명도 인간이 반드시 지키고 수련해야하는 중요한 대상으로 여긴다. 이를 근거로 두광정은 중현과 전통적 양생술, 정신적 초탈과 육체적 장생을 본말本末적 관계가 아닌 상보관계로 간주하고, ‘심성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당대도교사상과 생명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도교사상을 분리적 관점이 아니라 융합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말하자면, 그의 양생론은 당대도교사상을 계승하고 동시에 도교의 전통적 양생이론을 부활시킴으로써, 정신적 초탈을 중시하는 시대적 요구와 육체적 장생을 추구하는 근본적 이념을 하나의 이론체계로 종합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수도론은 성(도성)과 명(생명)을 동시에 닦는다는 수도론을 정립하여, 북송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성명쌍수적 양생론 즉 내단 심성학의 이론기초를 제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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