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조선시대 탈성리학적 지식인들의 담론, 상제上帝

강영한(상생문화연구소)

2023.03.15 | 조회 2668

2021년 가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조선시대 탈성리학적 지식인들의 담론, ‘상제上帝
- 다산 정약용, ‘상제로 돌아가라’ -

 

강영한(상생문화연구소)

 

목차

1. 프롤로그 :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 언저리의 다산 정약용

2. 다산의 사상 체계에서 상제의 위상

1) 경학經學에 나타난 상제

2) 경세학經世學에 비친 상제

3. 상제는 어떤 존재인가

1) 상제와 천은 동일한 존재의 다른 호칭

2) 영명주재靈明主宰의 하늘

3) 천지만물을 조화造化·재제宰制·안양安養하는 지고신

4. 모든 길은 상제로 통한다

1) 세상, 썩고 병들다

2) 상제로 돌아가라

3) 왜 상제인가

4) 상제는 어떻게

5. 에필로그 : 다산, 그 이후의 상제

 

 

국문초록

조선 후기에 주자학을 비판하며 고경古經에 관심을 가진 일군의 지식인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주자 중심의 경전 해석을 반대하고 주자학적 사유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학을 중시한다. 이러한 일군의 학자들을 탈주자학 지식인이라 한다면 그 대표적인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이 글은 동북아 문명의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를 구성하는 퍼즐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다산 정약용의 상제上帝 사상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의 맥락에서 보면 상제를 보는 시각과 그 성격, 나아가 왜 상제를 말하는지는 각양각색이다. 다산의 경우 당시 병든 사회를 바로 잡고 개혁하려는 맥락에서 인류 원형 문화의 중심 주제인 상제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다산은 성리학 지식인들이 하늘, , 상제에 대해 감정도 형체도 없는 리, 태극太極, 등 극히 추상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을 비판하며, 당시 사회 현실을 썩어 문드러진 병든 사회라고 진단한다. 나아가 이런 조선 사회가 앓고 있던 병을 고쳐 새로운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상제上帝로 돌아가라는 처방을 내린다. ‘상제로 돌아가라는 처방은 성리학적 가르침으로는 병든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나온 파격적인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처방이다.

다산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리가 아니라 상제를 부각시킨 배경에는 성리학에서는 상대적으로 배제된 상제가 당시의 양반 지배층에 만연한 도덕불감증,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같은 반사회적 행위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다산에게 상제는 현실의 불합리하거나 모순된 사회 제도나 사회 구조를 개혁하고, 인간의 비도덕적 행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절대적 존재이다. 나아가 상제는 상제를 중심으로 한 초월적 질서와 군주를 정점으로 한 인륜적 질서 간의 상응관계를 바탕으로 강력한 왕정 체제 지향을 정당화하는 원천이다.

상제를 모시는 길로 제천과 같은 의례도 있지만, 다산은 계신공구戒愼恐懼의 자세로 하늘을 섬기는 신독愼獨을 중시한다. 다산에게 신독은 상제를 아는[] 것이며, 천명의 소리, 상제의 명령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다산에게 있어 두려워하고 삼가는 공부인 신독은 상제라는 분명한 공경의 대상을 전제로 한다.

주요 술어

상제, 하늘, , 다산, 정약용.

 

 

1. 프롤로그 :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 언저리의 다산 정약용

 

시간은 흐른다. 이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한 변화는 물질문화는 물론 정신문화도 마찬가지다. 흔히 기독교를 서양 문명의 창이라고 하는데, 논자는 동북아 문명에서 정신문화의 키워드는 하늘, 상제라고 본다.

동북아 사람들은 문명 발생 초기부터 하늘, , 상제를 지향하고, 그 가르침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다. 환단고기나 홍산문화, ·서나 <갑골문> 등에는 동북아에서 처음으로 문명을 연 사람들의 하늘을 향한 삶의 흔적이 다양하게 담겨있다. 환국, 배달,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민족과 요·순에 이어 하··로 이어지는 한민족은 모두 비록 그 호칭은 천, 천신, 상제, 삼신, 삼신상제,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 등으로 달랐지만, 같은 존재인 상제를 향한 다양한 의례의 실천은 물론, 받들고 모시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하늘은 흔히 인격적 존재로 천지만물을 주재하고 통치하는 지고신으로 간주되었다.

하늘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었다. 중국 역사에서 은대殷代에 전형적이었던 인격신 상제는 주대周代를 거치며 천으로 대체되고, 춘추 시대에 들어서는 인격신 천을 중심으로 하는 신중심주의적 사상이 쇠퇴하였다. 특히 서주 말부터는 하늘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더니, 공자에 의해 인간중심주의적 사상, 인본주의가 싹트면서 상제·하늘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를 비판하며 전국 시대에는 묵자가 나타나 은대의 상제 모습을 재건하였고, ··당대를 거치면서는 황제들이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하늘을 받드는 천제天祭 전통이 이어졌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상황은 급변하였다. 불교와 도교 사상을 수용하여 성리학이 체계화되면서 유학은 일대 변신을 하였는데, 신유학은 인격적 존재로서 만물을 주재하는 지고신으로서의 하늘·상제의 모습을 간직하였던 원시 유교의 모습을 거의 버렸다. 주자학에서는 하늘을 우주의 근원적 원리, 만물의 보편적 법칙을 의미하는 리로 대체하고, 천즉리天卽理라 하여 하늘을 관념적 추상적인 이치·법칙으로 여김으로써 원시 유교의 특징적인 인격적 초월적 존재인 상제·하늘의 모습을 폐기하였다. 물론 주자가 하늘·천을 그런 맥락에서 말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주자학에서 주변적인 것일 뿐이다.

상제가 잊히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조三聖祖 시대에 삼신상제는 세상일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사람들의 기도에 반응하고 감정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여겨졌다. 상제는 삼신의 조화와 삼신에 내재된 자연의 이법을 주관하여 천지만물을 낳고 다스리는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다. 상제는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님이다. 이 하늘님을 동방 조선의 사람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삼신상제, 삼신하느님, 상제라 불렀는데, 이러한 상제를 향한 천제 전통은 수천 년 간 유지되었다. 동방 조선은 상제를 받들어온 인류 제사 문화의 본고향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민족의 상제문화 전통도 환국, 배달, 조선의 삼성조 시대가 지난 후 열국 시대 이래 크게 변화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 들여온 주자학이 새로운 왕조 조선의 지배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육경보다 사서를 중시하고 공자보다 주자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천은 상제가 아니라 리로 간주됨으로써 고경에 보이던 상제 모습은 잊혀져갔다. 심지어 천제는 천자국의 전유물이므로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거행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강하였다. 그러면서 주자학 지식인들은 사회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점차 유교 사상을 교조화 하고 주자를 절대시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러한 사상적 환경에서는 우주 주재자, 지고의 인격적 존재인 상제가 드러날 수 없었다. 그 결과 주자학 만능주의의 조선에서 상제문화는 거의 빛을 잃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학을 비판하며 고경에 관심을 가진 일군의 지식인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주자 중심의 경전 해석을 반대하고 주자학적 사유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주자학의 절대성을 무너뜨릴 작은 단초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주자학적 정통이 확립된 시기에 그런 틀을 벗어나 고대 경전, 육경으로 돌아가려는 고학적 학풍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군의 학자들을 탈주자학 지식인이라 한다면, 그 대표적인 인물은 미수 허목(1595~1682), 백호 윤휴(1617~1680), 그리고 다산 정약용(1762~1836) 등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고경을 중시하고 거기서 잠자던 상제를 일깨우며 상제를 재발견하였다. 탈성리학적 지식인들의 주요 담론은 상제, , 하늘이었다. 그들은 나아가 리를 중심으로 하는 관념적 철학적 논쟁보다 상제에 관심을 두었고, 당시 사회질서 개혁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다산 정약용이 그 전형이다.

다산은 유교 경전에 대한, 주희와는 다른, 재해석은 물론, 경세학, 즉 정치경제학·정치사회학에 관심을 두면서 당시 사회를 개혁하는데 상제가 절대 불가피함을 강조하였다. 비록 그가 상제를 종교화하거나 종교 공동체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 오랜 시간동안 잊힌 상제를 재발견하여 상제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필자는 동북아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를 총체적으로 밝히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글은 그 일환으로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의 한 언저리를 차지하는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의 상제 사상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다산은 주자 이상으로 유교 사상을 재해석하고, 나아가 천즉리로 상징되는 주자 사상을 비판하기도 하였는데, 상제문화사에서 그의 기여는 바로 고경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바로 잡으며,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천즉리가 아니라 천즉상제임을 만천하에 들어낸 점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사상 체계에서 상제는 어떤 위상을 가질까? 다산에게 상제란 어떤 존재일까? 상제는 왜 절대불가피한가? 상제는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우리의 논의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2. 다산의 사상 체계에서 상제의 위상

 

1) 경학經學에 나타난 상제

 

다산은 자신의 사상이 수기修己[인격 수양]를 위한 육경사서의 경학經學과 치인治人[세상 다스림]을 위한 일표이서一表二書의 경세학經世學이 본말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그의 사상 체계는 경학과 경세학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경학이란 경문을 자세하게 해석하는 연구 활동, 경문에 주석을 다는 지적 활동이다. 주자가 사서집주를 통해 유교 사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이해, 해석을 밝힌 것도 바로 그 하나이다. 주자학이 주자의 유교 경전에 대한 주석을 바탕으로 체계화되었다는 맥락으로 보면, 주자학도 유교 경학의 하나이다. 그렇듯, 다산도 유교 경전에 대한 나름의 재해석을 통해 주자와는 또 다른 경학, 탈주자적 유교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많은 경학 저술을 통해 주자 중심주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특히 주역사전周易四箋, 중용자잠中庸自箴,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심경밀험心經密驗등을 통해 상제를 향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의 상제에 대한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경학 저술은 중용강의中庸講義이다. 이것은 그가 주자학의 우산을 벗어나 새로운 경학 패러다임의 세계를 연 출발점이었다. 그는 중용읽기를 통해 상제의 존재와 인간의 심성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는 주재자로서 상제와 귀신의 존재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다산은 성리학에서 상대적으로 도외시하였던 상제에 관심을 가졌고, 상제를 유교 사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논어와 관련한 글에서도 다산은 주자학, 성리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제거되었던 원시 유교의 상제에 대해 말한다. 특히 그는 상제를 천과 동일시하여, “천은 상제이다라고 한다. 또한 맹자요의에서는 하늘의 주재자는 상제이다라 하였다.

주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통해서도 다산의 상제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데, 관련 대표적 저술은 주역사전周易四箋, 역학서언易學緖言이다. 다산은 역을 통해 상제천에 대한 주자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피력하였다. 다산에 의하면 역은 성인이 자연의 질서와 사물의 형상을 표상한 기호 체계로, 성인이 하늘의 명을 청하여 그 뜻에 따르기 위함이다. 역은 소사상제紹事上帝의 점복占卜을 위한 것이며, 상제의 뜻을 알고 상제의 의지를 따르고 상제의 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인 점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은 하늘을 경외하고 천명을 받드는 방법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점을 치는 행위를 비판적으로 본다. 때로는 미신이니 뭐니 하면서 부정적으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다산에 의하면 점은 비이성적 행위, 술수가 아니다. 점은 개인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이기적 목적으로 치는 것이 아니다. 복서, 점을 치는 행위는 천명을 알기 위한 행위이다. 다산은 상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점을 치지 말아야한다고 본다. 상제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동기에서의 점이 아니라면 복서는 차라리 없애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만일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벌이거나 어떤 일을 행한 후 하늘의 뜻을 살피려고 점을 친다면, 그것은 하늘의 기밀을 엿보고 하늘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니, 큰 죄악이다. 다산은 이러한 경향이 춘추 시대부터 나타났다고 본다. 춘추 시대에 이르러 점은 이미 문란해져 개인의 사적 목적으로 하늘의 뜻을 염탐하는 잡술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다산의 경학은 본질적으로 상제, , 하늘을 재발견한 새로운 주석이다. 상제는 다산 경학의 핵심 코드이다.

 

2) 경세학經世學에 비친 상제

 

다산 사상 체계의 다른 한 축인 경세학은 경학을 기초로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경학이 인격 수양과 세상 다스림을 위한 이론적 토대였다면, 경세학은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과 개혁안을 담고 있다. 그의 경세학은 통치 체제는 물론, 경제, 행정, , 의례 등을 망라한 조선의 총체적 국가 개혁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순시대의 왕도정치로서의 왕정王政의 지향은 물론, 각종 사회 제도를 왕정에 맞게 개혁하려는 것이다.

다산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회현실을 성찰하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고 바로 잡아야 할지, 그 사상적 배경을 상제上帝에서 찾은 듯하다. 다산의 경세학과 관련한 사상에서 상제를 염두에 두고 밝히는 대표적인 사상은 왕권론이다. 당시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하였다. 다산은 왕이 바른 정치, 이상적인 정치를 하려면 왕권의 강화, 왕정의 확립이 절대 필요하다고 보았다.

다산은 왕권 강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경학적 근거를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황극皇極에서 찾는다. 다산은 하늘을 대신하는 지상의 왕권이 절대 강해야 하고,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의 확립을 정당화하는 이념을 왕의 위상을 대변하는 황극 사상에서 찾은 것이다. 다산은 종래의 상수학적 낙서洛書적 해석을 부정하고, 99개로 나눈 토지 구역[전구田區]으로 보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공전公田이 아홉 개의 밭 중앙에 있는 것처럼, 중앙에 있는 황극이 9주의 중심을 이룬다며, “홍범구주에서의 위상은 다섯째 황극皇極이 가장 높다. 먼저 황극을 세우고 난 뒤에라야 나머지 8주 반열의 차례를 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산이 이렇게 강력한 왕권이 필요함을 제시한 것은 조선의 당시 정치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강력한 왕권王權에 대한 정약용의 의향은 실제적 이유가 있었다. 붕당 정치朋黨政治 때부터 발생하던 격렬한 당쟁은 탕평蕩平기에서조차 지속되어서 당시 정치적 안정성과 국가 발전은 어려웠다. 다산은 그런 상황의 원인이 왕권王權이 아직 약하고 신하臣下의 세력에 의해 압도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을 압도할 수 있는 정도로 강화되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신하들 간의 경쟁이 발생하고 심화되면 국가를 위기 국면으로 몰고 간다. 이렇게 되면 국가가 어지러워진다. 군주가 극을 세울 수 없다. 다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극에서 왕정, 왕권 강화의 이론적 근거를 찾았으며, 그 배경에는 궁극적으로 상제가 있다. 상제란 곧 정약용의 경세학經世學’, 특히 그의 정치론政治論 및 일련의 제도개혁론을 성립시키고 추동하는 필수불가결의 인자因子이다.

그렇다면 강력한 왕권에 기반한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왕정을 실현할 참 왕권은 어떻게 창출할 수 있을까? 다산은 현실적으로 새로운 왕권의 혁명적 창출보다는 변법變法을 통해서 중흥을 꾀하는 길, 즉 법제를 고쳐 점진적인 방법으로 왕정을 창출해 나가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을 피력하였다. 이른바 우선 법을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그 강화된 왕권을 통하여 왕정 실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정 실현은 법제를 개혁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다산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정치 구조나 경제 제도는 물론 법률과 행정 체계, 생산 기술과 군사 제도에 이르기까지, 개혁 방법론은 물론 그 방향까지 제시하였다. 이러한 경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 바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등이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의 경학은 성리학이 정착시킨 완고한 패러다임을 청산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이념적 모색의 일환이며, 그 중심에는 상제가 있다. 그리고 그의 경세학 관련 저서는 바로 상제를 축으로 정치, 사회, , 의례 등 사회제도의 총체적 개혁 청사진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다산 사상의 본령은 결국 상제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사상에서 상제를 빼면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 꼴이다.

 

3. 상제는 어떤 존재인가

 

1) 상제와 천은 동일한 존재의 다른 호칭

 

·서경에 의하면 상제와 천은 초인간적 믿음의 대상이다.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이다. 상제는 인간 밖에서 인간의 모든 일에 관여하는 지고신至高神으로 인격적 존재로 그려진다.

유교 역사에서 이런 상제천의 성격이 급격하게 바뀌어 형이상학화 된 것은 송대宋代에 이르러서였다. 이른바 불교와 도교의 형이상학을 수용하여 철학화된 성리학·주자학이 성립되면서 상제나 천을 보는 시각이 대전환하였다. 송대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차별성을 시도하는 가운데, 고대 유교의 인격적 천 개념을 배재시키는 방향으로 유교 사상을 재구성하였다. 그들은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인간 및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등, 현실 세계의 실재와 그 의미를 소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시 유교의 인격적 천을 대신하게 된 것이 성리학에서의 리이다. 성리학에서 리는 시공을 초월한 최고 원리로써 우주만물의 총체적 근원이며,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동인으로써 궁극적 원리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연의 이치, 즉 우주의 이법, 우주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하늘, , 상제를 어떤 관계로 보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는 하늘·천을 상제와 같은 존재로 본다. “천은 상제이다, “하늘의 주재자는 상제이다.”, “상제를 혹은 천이라 칭하고 혹은 호천昊天이라고 칭하는 것은, , “상제를 하늘이라 이르는 것은 . 이런 여러 말을 고려하면 다산은 상제를 천과 동일시한다. 다산이 보기에 천과 상제는 동일한 존재의 다른 호칭이다.

다산이 천을 상제로 보는 배경은 무엇일까?

 

하늘을 주재主宰하는 자는 상제이고 상제를 천이라 말하는 것은 국군國君[나랏님, 임금]을 국[나라]이라 일컬어 감히 직접 가리켜 말하지 못하는 뜻과 같다.”

상제를 혹은 천이라 칭하고 혹은 호천昊天이라고 칭하는 것은 마치 왕을 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승여乘輿라고도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상제와 하늘, 즉 천을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임금을 일컬을 때 나라 이름을 호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 한 나라의 임금을 존중하여 직접 가리켜 말하지 못하고 그냥 나랏님, 국가, 조가朝家로 부르는 것과 같이, 주재자 상제도 마찬가지로 직접 지칭하지 않고 다스리는 공간으로서 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산은 상제를 일컫는 호칭이 여럿이라고 본다. 호천昊天, 황천皇天, 민천旻天, 창천蒼天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산은 주례』「대종백大宗伯을 근거로, “호천昊天이 상제의 바른 이름[正號]이다라며, 상제의 이런 여러 호칭 가운데 호천상제의 호천이 상제의 정호正號라고 말한다.

 

2) 영명주재靈明主宰의 하늘

 

상제는 어떤 신격神格, 어떤 속성을 지녔을까? 그 결론을 지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신이 생각하건대 고명배천高明配天이라고 할 때의 천은 저 푸르고 푸른 형체 있는 하늘을 말하고, 유천오목維天於穆에서의 천은 영명靈明하고 주재主宰하는 하늘을 말한 것입니다.”

 

이로 보면 상제는 영명성과 주재성을 속성으로 한다. ‘영명靈明’, 그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뛰어난 지각 능력과 밝은 지혜를 의미한다. 도덕적 선악 판단을 위한 밝은 지혜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늘이 영명靈明한 존재라는 것은 하늘이 도덕적 선악 판단을 위한 밝은 지혜, 그런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것이다.

상제는 또한 주재성을 속성으로 한다. 무슨 일이든 그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일을 맡아 처리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천지 만물이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하거나 저절로 변화하는 것 같지만 거기에도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가 있다. 주재란 바로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의지적으로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런 일을 맡아서 하는 존재가 주재자이다. 상제가 바로 그 주재자인 것이다. 상제는 자연, 우주 만물, 모든 생명, 모든 신들을 다스리고 감독하는 주재적 권능을 지녔다. 그러기에 주재자는 이를테면 인간의 선악행위에 대해 판단하고 그에 따른 상벌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주자학에서도 주재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그 주재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주재성을 말한다. 어떤 의지적 인격적 존재가 만물을 두루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다. 주재한다는 의미는 이치를 위주로 삼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상제의 주재성은 성리학에서 천을 리로 파악해서 규정하는 리의 주재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리에 의한 주재와 영명한 인격신 상제의 주재는 그 방법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리에 의한 주재일 경우, 즉 천을 리로 볼 경우 그것은 당위적인 도덕법칙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천을 영명한 신으로 볼 때, 신은 인간에게 내려와 살피고 화복을 주관하며, 모든 행동 과정에서 인간에게 경고하거나 명령을 내리게 된다.

성리학에서는 천즉리라 하여 하늘을 이치로 여기며, 궁극적 실재인 리가 인간을 포함한 만물 안에 다 같이 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다산은 성리학의 천, 즉 리는 단순히 우주 운행의 법칙일 뿐이라고 보며, 나아가 무릇 천하에 영이 없는 물이란 주재가 될 수 없다. 하물며 텅 비고 아득한 태허의 일리가 천지만물의 주재와 근본이 된다면 천지 사이에 일이 성취될 수 있겠는가?”라 하여, 리로서의 천은 주재성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다산은 천지자연이 질서를 유지하며 운행하는 것은 모두 상제가 주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해와 달·별이 돌고 사시가 어김이 없고, 바람·서리··이슬이 내려서 만물이 번성하는 것은 이 또한 (하늘의) 묵묵한 주재에 의한 것이다.

상제가 이렇게 영명성과 주재성을 속성으로 한다면 상제는 인격성을 속성으로 할 수밖에 없다. 상제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상제가 의지·감정을 지녔으며, 따라서 어떤 대상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제가 지각 능력이 있고 사랑과 분노와 같은 감정도 지닌 존재, 상벌을 내리고 선악을 구별하는 존재라면, 상제는 인격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산의 상제는 초월적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즉 다산의 상제는 인간과 만물을 주재하는 외적 초월적 존재인 인격천이라기 보다는 윤리적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도덕 법칙적 천으로 볼 여지도 있다. 수신修身 공부라는 면에서 보면, 그는 상제를 초월적 외재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내재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상제는 단순한 외재적 감시자가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나를 사로잡고 나의 행위를 강제하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는 존재, 나의 내면에서 나를 선으로 이끌고 가는 실질적인 동력으로 작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산은 천을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부여해준 천명에 의해 인간 안에 내재할 수 있는 존재, 천명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존재로 본다. 인간 밖에 따로 설정된 절대 존재가 아니라 도심으로 드러나는 엄정한 윤리적 감시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보기에 다산의 상제에 대한 상대적 강조는 초월적이며 인격적 존재로서의 상제이다.

 

3) 천지만물을 조화造化·재제宰制·안양安養하는 지고신

 

다산은 상제를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을 조화造化하고 재제宰制하고 안양安養하는 존재라고도 말한다. 상제는 천지나 귀신 및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그 모든 것을 조화, 재제, 안양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조화란 무엇일까? 다산은 무릇 유형의 것이 무형의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일러 조화라고 한다 하여, 무형의 것으로부터 유형의 것이 나오는 것을 조화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형의 것으로부터 유형의 것이 나온다는 말이 아무 생성 변화의 기미도 없는 무극無極에서 태극-> 음양-> 오행으로 분화되어 만물이 생성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극에서 태극으로 생성과 변화를 반복하면서 일률일려一律一呂하는 우주의 운동을 조화로 본 것이 아니다. 다산은 만물을 낳는 주체가 제[帝者, 生物之主]’라는 왕필王弼의 말에 기대어, 바로 상제가 무형의 존재임을 밝힌다. 즉 상제가 유형의 만물을 낳는 무형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다산이 말하는 조화란 유형의 만물은 무형인 상제로부터 생성됨을 말한다. 상제가 곧 조화주인 것이다. 조화주로서 상제, 그것은 상제가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뿌리, 근본, 주체, 원인임을 말한다.

상제의 조화는 사계절이나 해와 달의 운행과 같은 자연의 변화 모두를 아우름은 물론 이를 뛰어 넘는다. 그리하여 다산은 만물이 상제의 조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조화를 떠나서 만물이 존재할 수 없음을 물속의 물고기에 비유한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 헤엄치고 호흡하는 물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다산은 상제가 조화주로서만이 아니라 이에 더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기르는 존재, 즉 재제하며 안양하는 존재라고도 본다.

나아가 다산은 상제를 세상의 수많은 신들 중 가장 높은 존재, 즉 최고신, 지고신으로 간주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다. 상제, 일월, 성신, 풍사, 우사 등의 하늘 귀신[천신], 사직, 오악五嶽, 산림, 천택川澤 등의 땅 귀신[地示], 선왕, 선공, 선비先妣 등 인귀가 그것이다. 이들 천신들을 본래 형질이 없는 것으로서 상제를 보좌하는 신하이다. 상제는 모든 것을 혼자 다스리지는 않는다. 상제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려 세상을 다스린다. 상제는 모든 신들을 주재하고 그들은 모두 상제의 명을 받는다.

다산은 상제가 천지의 모든 귀신 중 지극히 높고 위대한 존재, ‘만물의 조상이자 백신百神의 종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황천상제는 지극한 하나로서 둘이 없으며, 지극히 높아서 짝이 없다, “호천상제는 유일무이하다, 상제를 지극하고 유일무이한 존재, 지존의 존재라고 본다. 상제는 유·무형의 모든 존재를 자신의 주재主宰 하에 포섭·장악하고 있는 지극히 존귀하고 지극히 위대한 절대적 권능의 유일자唯一者라는 것이다.

 

4. 모든 길은 상제로 통한다

 

1) 세상, 썩고 병들다

 

1762년부터 1836년까지, 영조 시대부터 정조, 순조, 헌종 시대까지. 이것은 한 자연인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때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 안팎의 요인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몸이 큰 병[사회병]이 들어 방방곡곡에서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던 때다. 조선의 위기는 정치, 경제, 사회 그 어느 한 부분에 머물지 않고 총체적이었다.

거시기 자른 것을 슬퍼하다[哀絶陽](1803)라는 시, 여름날 술을 마시다[夏日對酒](1804)라는 시를 비롯한 다산의 많은 시는, 수령과 아전들의 탐욕과 착취로 인한 삼정 문란의 실상은 물론, 궁핍한 민중들의 참담한 삶의 모습을 고발한다.

당시는 정치적으로도 파행적이었다. 파당 정치가 극에 달하여 사회적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다산은 당시 성리학자들의 붕당에 뿌리를 둔 사대부 정치가 사회적 갈등과 분화를 조장하고 있음을 통탄해한다.

당시는 군신 간에 의와 예가 사라진 것도 현실이었다. 왕에 대한 충성심은 더 이상 없었다. 신하가 왕을 죽이려고 하고 왕 알기를 뭐 알듯이 하였으니 왕의 권위는 추락할 데로 추락하였다. 당쟁이 임금까지 부정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왕의 나라가 아니라 신하의 나라였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은 당시 조선가 안고 있던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다산이 보기에 당시의 지배 사상인 주자학도 문제가 많았다. 조선 사회 현실이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자들은 무엇하나 적극적 개혁을 위해 나서는 이 없었다. 지배집단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성찰은 고사하고 오히려 주자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오히려 주자의 경전 해석만을 절대시하거나 주자학적 사유를 유일무이한 대안으로 여기는 경향이 나타났고, 사회질서는 더욱 폐쇄적으로 나아갔다. 조선 성리학계는 현실 대응에 둔감한 채 사상 논쟁에 빠져 경화된 모습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런 당시 사회를 다산은 이렇게 진단한다.

 

세상이 썩은 지는 이미 오래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체로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고치지 않으면 기필코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신체에 비교하여 머리카락 한 올 만큼 작은 것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며, 즉시 손을 쓰지 않으면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조선을 병든 나라 병든 사회로 진단한다. 여기에 서학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졌으니, 그야말로 조선은 인간도 병들고 사회도 병든,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산은 수많은 글, 각종 저술을 통해 조선사회가 직면한 당시의 모순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고발·비판이나 위기를 진단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썩어빠진 조선 왕조 상황을 도저히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어, 그는 각종 법과 제도의 실질적 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한다. 그것이 경세학 관련 저술인 12서로 나와 있는데, 여기에서 다산은 조선 사회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 그 길을 제시한다.

 

2) 상제로 돌아가라

 

다산 사상의 특징 중 하나는 유교 경전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비판하는 경향이다. 주자는 천즉리니 성즉리니 하면서 고경에는 없는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주희 등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재편된 새로운 유교 사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흔히 신유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산은 이런 새로운 유학에 일침을 가한다. 먼저 리는 경전에 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다산은 리의 다양한 쓰임을 추적하여 리가 모두 맥리脈理[], 치리[다스림], 법리[법을 다스림]의 가차의 글자로, 원리·법칙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우주적 차원의 생성 문제에 관여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다산은 고경에서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리기론과 같은 공리공론에 매달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성리학 지식인을 비판한다.

다산은 리의 주재성, 리의 주재 능력도 부인한다. 주자학이 형이상학적 실체이자 만물의 근원으로 떠받드는 리[理致]가 궁극적 실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이 보기에, 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는 속성을 지녔다. 반면 기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 즉 자립자이다. 다산이 보기에, 리는 자립자인 기에 붙어있는 의존자일 뿐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리가 기를 주재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다산이 보기에 리는 또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존재, 아무런 형체도 없는 무형이다. 무릇 주재자는 지각 능력을 지녀야 하는데, 리에는 천하 만물들을 지배하는데 필요한 지각이 없다. 리에는 또한 주재자에게는 필수적인 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감정도 지각도 영명함도 없는 리가 인간과 동물을 주재할 수는 없다. 텅 비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는 천지만물의 주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산은 리를 온갖 사물의 근본으로 내세우는 성리학의 설명은 터무니없는 조작이라고 본다.

다산은 리의 인격성도 비판하였다. 인격적 존재는 사랑, 기쁨, 미움 등 감정을 지닌 인격체다. 이런 존재는 인간이 경계하고 삼가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산이 보기에 리는 인격적 실체가 아니며, 감성과 지각 능력도 없는 무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리가 인간에게 특정 행위를 하게 하거나 그런 동기를 유발할 리는 없다.

다산은 또한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원천이 되는 을 보편적 원리인 로 규정하는 성리학을 비판했다. 성리학에서 천즉리라면 천이 인간의 모든 것을 살피고 선악에 따라 상벌을 주는데, 리는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사람들의 행위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성리학의 리를 비판한다. 추상적 형이상학적인 리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을 리로 보아서는 실천적 행위를 유인할 수 없다. 리는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거나 감독하여 선한 행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외적 강제력을 갖지 못한다. 다산은 특히 아무런 감응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리를 근간으로 한 이론 체계로는 사람들로부터 자발적인 도덕적 삶의 실천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산은 실체가 없는 리로는 사회를 바로 잡고 근본적 개혁을 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리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산은 옛 성인들의 학술에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진실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그는 원시 유교의 경전, 옛날의 학문에서 천하를 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행위의 동기 체계[세계관]를 찾았다.

 

옛 학문은 일을 행하는데 힘쓰고, 일을 행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의 학문은 마음을 기르는데 힘쓰고 마음을 기른다는 것으로써 일까지 폐지한 데까지 이르렀다. 홀로 그 몸만을 선하게 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학문 방법도 좋지만 천하를 모두 구제하고자 한다면 옛날 학문의 방법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경전 해석과 마음 수양을 벗어나 선진 시대의 경전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신유교가 아닌 원시 유교에 천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성리학의 전통에서 지나칠 정도로 확장된 리 개념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지각도 위엄도 없는 리 대신 상제上帝에 주목하였다. ‘털오라기 하나만큼 작은 일이라도 병폐 아닌 것이 없는사회, ‘썩어버린 지 이미 오래된사회, 곧 중병에 걸린 사회를 고치는 병원은 없으니 어떻게 하여야 할까?

다산이 보기에 그것은 단순한 의식의 전환, 도덕의 강조, 세속적 규범의 강화로는 불가능하다. 성리학적 가르침으로는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다산이 보기에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강제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 필요하였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도덕적 의식은 물론 그런 태도를 형성하고 그런 행동을 강력하게 실천하고 스스로 일탈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했다. 그런 존재가 반드시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아닐지라도, 다산이 보기에 당시의 사회병, 관리들의 일상화된 부정부패나 사회적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런 행위를 감시하고 방지하게 할 수 있는 절대적 존재가 필요하였다. 병든 사회를 고치고 사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그런 행위를 근원적으로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속력을 갖는 존재가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찾은 것이 상제이고, 동맥경화 상태의 병든 조선 사회를 바로 잡아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상제로 돌아가라는 아주 특별한 처방을 내렸다.

다산이 상제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양난兩亂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민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쟁만 일삼는 행위를 보면서, 성리학적 인간형은 더 이상 인륜을 실천할 수 없다는 반성에 도달한 결과이다. 그는 당시의 사변적인 성리학적 경향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원시 유교의 주재적 천관을 되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다산은 원시 유교의 인격적 주재자인 상제를 부활시켜 병든 시대를 바로 잡고자 했다. 다산의 상제 부활, 그것은 무너져가는 조선사회를 구하고자하는 그런 실천적 요청에서 비롯되었다.

 

3) 왜 상제인가

 

그렇다면 왜 꼭 상제여야만 하는가? 상제가 불가피한 이유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상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도덕적 행위, 사회적 행위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병든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 보수적인 체제 유지 이념이 되어버린 신유교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던 지식인들은 윤리도덕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실마리를 인성 가운데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본연지성 또는 기질지성 운운하며 인성에 대한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귀결로 이어진 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적인 경우에도 외형적인 결과를 지향하는 인간의 합리적인 도덕적 행동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보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내면적 심리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마음 다스림, 심리적 차원에만 매몰되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정의 심리상태에만 머무는 것일 뿐, 어떤 사회적 행위, 사회적 실천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즉 마음의 다스림에만 머물게 되면 외형적 결과를 드러내는 타인지향적 행위를 발전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나 변화 지향적 사고를 형성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하여 현실 사회에 어떤 문제나 모순이 있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갖게 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을 본질적으로 자신이나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의 문제로 환원시켜 마음을 더욱 정화할 것을 강조한다. 결국 사회변동에 소극적이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시의 조선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층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민중들의 현실 삶의 개혁에 무관심한 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비인간적 비윤리적 행위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당시 사람들은 사회의식이 마비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적 행위 동기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이런 의미에서 주자학 윤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철저하게 준수하고자 해도, 세상을 거부하고 멀리하거나 긴장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그 어떤 동기도 부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긴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배경을 유교 사상과 관련시켜 단적으로 말하며, 형이상학적이고 애증도 희로도 없고, 형체도 이름도 없는 주자학의 최고 주제인 로서는 실천을 위한, 실천을 향한 어떤 사회적 행위도 이끌어 낼 수 없다.

다산은 상제라는 절대자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두려움과 경외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현실적 생활이 규제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산은 리 대신에 상제를 도입하여 상제에 대한 외경심과 도덕적 실천의 추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항상 상제의 존재를 의식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계신공구는 누가 가르치거나 명령해서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생기는 삼가 함이며 두려워함이다.

다산이 보기에 수양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와 이치를 깊이 체득하면 결코 자신을 속이거나 비도덕적 반사회적 행위를 할 수 없다. 더구나 상제가 늘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누가 일탈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일반 백성들은 엄한 법이 있고 위로 엄한 군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결코 함부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한다. 오히려 배우고 공부한 학자라는 사람들이 군주 앞에서 겉으로는 군자인 척 유세를 부리지만 실상은 더 큰 악을 자행하고 있음을 다산은 말한다. 따라서 겉으로 보아서는 결코 죄악을 단죄하기 어려운 권세가들과 지식인들을 향해, 다산은 어느 때든 그들의 죄상을 내려다보고 감시하는 상제의 권능을 강조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군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군주 위에 군림하던 당시 권력자들에게, 그들 자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던 의도의 산물일 수 있다.

다산이 보기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실질적으로 감시 및 규제할 수 있는 존재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리가 아니라 바로 상제이다. 다산이 이토록 상제를 부각시키고자 한 배경은 주자학에서는 상대적으로 배제된 이 상제를 통해, 상제가 인간의 실천적 행동을 가능하게 하고, 특히 상제가 인간의 행위를 감시함으로써 당시의 양반 지배층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 관료들의 비도덕적 행위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산에게 상제는 현실의 불합리하거나 모순된 사회 제도나 사회 구조를 개혁하고, 비도덕적인 인간의 행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의 상제는 무엇보다 위군자僞君子와 가도학假道學이 횡행하는 조선 후기 사회 현실에서 계신공구 하는 도덕적 진정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윤리학의 모색이란 맥락에서 문화적 기획의 핵심이다. 나아가 세도 정치로 대표되는 정치적 난맥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경세학적 기본 관심, 즉 상제를 중심으로 한 초월적 질서와 군주를 정점으로 한 인륜적 질서 간의 상응관계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천권天權의 대행으로서의 유교 정치의 본질과 정신을 재구성하고자 한 정치적 기획을 함축하는 근본 개념이다.

 

4) 상제는 어떻게

 

그렇다면 상제는 어떻게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행위를 지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병든 사회 병든 인간을 바로 잡아 사회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는가? 상제는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다산은 하늘이 영명하듯이 인간 역시 하늘로부터 영명한 지각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본다. 인간에게는 하늘의 영명이 내재함을 말한다. 상제의 영명성이 인간에 내재함으로써 인간은 호선好善, 택선擇善의 도덕적 자각 능력을 갖게 된다. 바로 선을 기뻐하고 악을 미워하며 덕을 좋아하고 더러운 것을 부끄러워한다. 이로 보면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영명스런 마음, 은 선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도덕적 행위, 선을 지향할 수 있다. 그 근거가 바로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준거가 바로 상제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악행을 하거나 비도덕적 반사회적 행위를 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다산은 이럴 경우에도 인간만이 부여받은 내재한 영명한 마음, 도심道心을 일깨움으로써 악이 아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인간이 초월하는 상제의 명령을 직접 받아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선을 기뻐하고 악을 미워하며 덕을 좋아하고 더러운 것을 부끄러워하는 내면에 잠자는 영명성, 내재적 마음인 도심을 일깨워 그것이 하려는 바에 따르면 그것이 곧 천명을 따름이고, 그 결과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제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서 도심으로 은미하게 드러나 윤리로써 주재한다. 그리고 인간의 선악에 대하여 보상을 준다. 이를테면 슬픔, 괴로움, 부끄러움, 기쁨, 자랑스러움 등은 하늘이 내리는 선악에 대한 상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다산의 영명주재자로서의 상제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규율하는 윤리적 자율성의 근원이자 원인으로서 윤리적 주재자이다.

인간에 내재한 하늘의 영명성으로 인해 하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안다. “하늘의 영명靈明은 사람의 마음과 통하므로 아무리 숨은 것이라도 살피지 못하는 게 없고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밝히지 못하는 게 없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은 초월적 존재이지만 인간에게만 부여한 자신이 가진 신령스러운 지각과 밝은 지혜를 통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무엇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상제는 감각적 인식으로는 파악되지 않지만, 인간에게 내려와 그 영명한 지각으로 인간의 은밀한 모든 사고와 행위를 지켜보고 살필 수 있고 인간의 마음도 꿰뚫어 본다.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굽어보고 감시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인간의 마음 내면에서 발생하는 선악의 작디작은 것 까지도 놓치지 않고 파악한다.

이런 능력을 지닌 상제가 자신에게 내재한다면 인간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만일 인간이 상제가 굽어 내려다봄을 믿지 않는다면 반드시 홀로를 삼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상제가 이를테면 방안을 굽어보며 날마다 살피고 인간의 마음을 감시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정말로 안다면 어떨까? 아마도 아무리 대담한 사람일지라도 경계하여 삼가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제는 바로 두려움의 대상이게 된다. 늘 나의 마음을 읽고 감시하고 주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상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상제는 본질적 속성을 같이 하는 인간의 마음과 직접적 소통을 통해 지속적인 명령을 내린다. 곧 상제가 인간의 마음에 천명天命을 내린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마음속에서 분명하게 들리는 천명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 이른바 도심道心의 명령, 상제의 명령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럴 경우 인간은 나쁜 짓은 물론 나쁜 생각도 하지 못한다. 상제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사람의 행동을 살핌에 따라 인간은 늘 상제를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유도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명한 상제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에 대한 처벌이 뒤따르기 때문에 누구나 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고 주변을 살피게 되어 차마 나쁜 짓, 나쁜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곧 상제가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행위, 선한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게 하는 기능이다. 그 결과 인간이 이러한 상제라는 외적 존재를 통해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여 바른 행위를 하게 된다. 즉 자기를 지켜보는 상제라는 존재가 도덕적 사고와 행위의 중요 기제가 된다.

이와 같이 감각적 인식의 너머에 존재하는 상제가 임하여 감시하고 있음에 대한 믿음과 앎은 사람이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선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필수요건이 된다. 여기서 상제의 윤리적 기능, 도덕적 판단과 실천의 근거가 나온다. 상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게 하는 원천이자 동력이다.

그런데 리는 어떨까? 지각도 없고 권능도 없는 리를 과연 사람들이 두려워할까? 리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비인격적인 궁극 실재 리는 지각과 권능이 없어서 선행을 감독하는 계신공구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 마음속의 리라는 것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다. 다산은 양심의 명령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 되려면 그 명령의 주체가 반드시 인간 자신이 아닌 절대적인 상제여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진실로 윤리적 선악에 대한 예민한 지각 능력을 지니려면, 반드시 선악의 경계를 감시하고 분별하는 절대적 기준을 따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어떤 행위를 스스로 하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을 스스로 느끼게 하려면 내적 경계, 양심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양심, 도심道心이 하늘의 소리, 천명임을 깨닫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외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주목할 만 한 점은 다산의 상제가 감시자로서의 기능을 하지만 그렇다고 재이災異와 같은 것을 내려 경고를 하거나 벌을 주는 존재는 아니다. 다산은 동중서 류의 하늘, 즉 하늘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재이가 인사人事에 의해 발생한다는 견해를 비판한다. 사실 이러한 사유는 한 대 이후, 그리고 조선 시대에도 정치권에서 흔했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각종 재이현상이 야기하고, 임금은 이를 하늘의 뜻[天意]으로 여겨 바른 정치를 하도록 힘써야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산은 하늘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은 우레나 바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마음으로 말해주는 것이다라며 이를 비판한다.

 

5. 에필로그 : 다산, 그 이후의 상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다산이 살던 당시에도 세상 사람들은 상제를 잘 몰랐다. 다산은 성리학적 지식인들인 양반 사대부들이 하늘을 감정도 형체도 없는 리, 태극太極, 등 극히 추상적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며, 당시 사회가 썩어 문드러진이유가 상제를 잊고 상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성리학, 성리학자들에 의해 상제가 왜곡됨으로써 원시 유교에 뚜렷하였던 상제를 잃어버려 상제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산은 자신이 살던 조선 사회가 앓고 있던 병을 고치고, 새로운 사회로 거듭나기 위한 처방으로, ‘상제上帝로 돌아가라는 처방을 내렸다. ‘상제로 돌아가라는 처방은 성리학적 가르침으로는 사회 질서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근본적 자각에서 나온 파격적 처방이었다. ‘상제로 돌아가라는 메시지에는 잃어버린 상제를 재발견하여 상제의 존재를 믿고, 상제를 바로 알고 경외敬畏함으로써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하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무너진 사회 질서, 병든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다산은 상제를 섬기고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제천과 같은 의례도 그 하나이지만, 계신공구의 자세로 하늘을 섬기는 신독愼獨을 중시한다. 다산은 신독을 자기만이 혼자 아는 일에 삼가기를 극진히 한다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자기만 아는 내면 공간, 곧 마음에서 삼가함을 극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옷깃을 여미고 반듯이 앉아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는 그런 류가 아니다. 다산에게 신독은 천을 알려고[] 하는 것이며 천명의 소리, 즉 상제의 명령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다산에게 있어 두려워하고 삼가는 공부인 신독은 상제를 분명한 공경의 대상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초월적 하늘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두려워하는 정감적 수양이다. 늘 상제를 경외하며 나쁜 생각을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늘 삼가고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다산은 성인이 되려고 해도 쉽지 않는 데 신독으로 하늘을 섬기고 강서强恕로 인을 구하고 또한 변함없이 오래 하면서 쉬지 않는다면 이것이 성인이다라고 하여, 하늘을 섬기는 것을 성인이 되는 중요한 길의 하나로 본다. 결국 영명주재자인 상제에 대한 극도의 긴장과 반성을 통한 계신공구의 신독의 자세는 인간으로 하여금 상제를 진실한 마음으로 섬길 것과 보이지 않아도 경외하는 마음을 늦추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상제를 제거하였으니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할 상제가 없는데 어찌 삼가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리를 궁극적 존재로 이해하면 홀로 있음에 삼가 하는 신독을 할 수 없다.

계신공구의 자세로 공부하는 신독은 하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진정한 효과는 상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관여를 통해 확보될 수 있다. 상제가 아닌 리로는 거짓 공경과 거짓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상제의 절대 불가피성, 이것이 바로 두려워하고 삼가야 할 공경의 대상을 마음속의 본성으로 제한하고 그것을 리나 도라고 부른 주자학자들과 뚜렷하게 비교되는 점이다. 다산에게 있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삼가고 두려워하는 공부인 신독 공부를 할 때 그 대상은 상제이다.

인간은 공경하고 삼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밝게 상제를 섬기고, 항상 계신공구 하여 치우침을 두려워하고 지나친 행동과 치우친 마음[]을 범하거나 싹틔울까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의 맥락에서 보면 상제를 보는 시각과 그 성격, 나아가 왜 상제를 말하는지는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다산도 인류 원형 문화의 중심 주제인 상제를 말하고 상제의 불가피성을 주장하지만 당시 병든 사회를 바로 잡고 개혁하려는 맥락에서 상제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상제를 대중의 곁으로 대중을 상제의 곁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다산의 상제 사상은 실천적 성격을 지향하지만 종교 공동체 형성으로 까지 발전할 수는 없었다.

다산 이후 다산이 하지 못한 상제문화의 대중화를 실현한 것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 1864)이다. 그는 관념으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상제를 모시고 상제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며, 민중의 일상적 삶을 상제 곁으로 그리고 상제를 민중의 품으로 이끌었다. 경신년(1860) 4월 초닷샛날부터 수운은 상제로부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는 말과 더불어,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상제를 위하도록 가르치라는 천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수운은 상제를 받들고[] 위하는[] 가르침을 온 누리에 펴며 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선언하였다. 동학은 이러한 상제의 천명으로 시작되어 조직을 발전시키며 갑오동학혁명과 같은 실천운동까지 전개하였다.

그러나 수운은 상제의 천명과 동학의 이상세계를 이 땅에서 실현하지 못하고 조선 정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에 수운에게 천명을 내렸던 상제가 인간세계로 내려왔다. 증산도 도전은 천상의 상제가 수운에게 내렸던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축년(1871)에 동방의 전라도 고부 땅 강씨 문중에 인간으로 강세하였는데, 그 분이 바로 강증산甑山 상제(강일순姜一淳, 1871~1909)라고 밝힌다. 증산상제는 나는 옥황상제니라하여, 자신의 신원이 상제임을 밝히고, 가을개벽 시대를 여는 10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하였다.

조선 후기 상제문화 빅 히스토리, 그 사상적 메시지는 상제로 돌아가라’,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나는 옥황상제니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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