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메이지의 신도행정・신도와 조화삼신

이시하라 야마토(石原和)

2022.11.10 | 조회 6437


2021년 봄 증산도 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메이지의 신도행정신도와 조화삼신

 

이시하라 야마토(石原和, 리츠메이칸대학 강사

 

 

. 들어가며

 

일반적으로 일본신화의 조화삼신이란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天之御中主神타카미무스비노카미高御産巣日神카미무스비노카미神産巣日神를 말한다. 이 조화삼신은고사기古事記서문의 세분의 신은 조화(창조)의 머리를 이룬다라는 기술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러한 천지창조 신화는고사기상권 중에서도 가장 후대에 삽입되고 부가된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후대 부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로는고사기가 완성된 지 8년 후의일본서기日本書紀일서사一書四에는 일서에 이르기를이라는 인용형식으로 쿠니노토코타치노미코토(國常立尊) 생성 후 또 이르기를 타마마가하라高天原에서 태어난 신이라고 기술 되어 있으며 이 삼신은 보조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조화삼신 개념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선진시대 상제 개념이 알려진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육조도교의 원시천황의 영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화삼신은 일본 외부에서 들어온 개념으로 동아시아적인 성격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형태에 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기술이었던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에 통용되는 정사로 편찬되었다고 하는일본서기에는 보다 구체적인 특징이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앞 부분에는 고사기에는 없는 중국에서 유래한 개벽신화가 회남자淮南子삼오역기三五歴紀를 발췌하여 편집한 형태로 실려 있다. 이것은 당시의 일반론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사기일본서기의 신화는 동아시아 세계의 보편성을 갖춘 것이었다. 백강전투(663)와 임신의 난(壬申, 672) 후를 경험한 7세기 초에 동아시아 보편성에 입각하는 것이 스스로의 지배 정통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조화삼신이 삽입된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후 중세가 되면일본서기에 독자적인 신화와 해석을 추가한 중세일본기中世日本紀가 전개 된다. 이때에는 대외적으로 정통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들의 사찰이나 신불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내용이 보인다. 조화삼신에 관해서는 그 중에서도 이세신도적 입장에서 도요우케노오오미카미豊受大御神는 미나카누시노카미天之御中主神라는 설이 주장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등에 보이듯이 전근대의 이세신도설은 외궁의 신직神職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자신이 모시고 있는 도요우케노오오미카미를 내궁의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와 대등한 황조신이라는 것을, 천손을 강림시키는 주재신으로서 미나카누시노카미과 도요우케노오오미카미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점차 도요우케노오오미카미는 미나카누시노카미라는 인식으로부터 도요우케노오오미카미는 쿠니노토코타치노미코토(國常立尊)라는 인식으로 이행하게 된다.

근세가 되면 국학 연구자들은 중국서적을 인용하여 개벽을 묘사한 후 타카마가하라高天原로 이야기가 진행되는일본서기대신 천지개벽을 이야기하지 않고 타카마가하라로부터 시작되는고사기(古事記)의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이러한고사기에 대한 주목에서 나온 것이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宣長의 사상 전개이다. 근세후기에 살았던 그는 중국적인 것漢意을 배제하고 일본의 독자적인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사상사적 전개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화삼신에 관해서는 핫토리 나카츠네服部中庸삼대고三大考에 천지개벽으로부터 천황천의 분리를 나타낸 그림이 보이고 노리나가와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로 계승되어 간다. 노리나가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를 중심으로 하는 신관념을 제시했지만 아츠타네는 이 조화삼신, 특히 미나카누시노카미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주창하게 된다. 그리하여 원래는 후대에 기술된 조화삼신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이 과정에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부여하기 위한 조화삼신에서 일본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한 조화삼신으로의 전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생긴 것은 어디까지나 근세 후기의 일부 국학자와 그 영향을 받은 인물들 사이에서의 제한적인 동향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대 우리들의 신관념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은 메이지기 이후의 신도 행정이나 히라타 아츠타네의 신도관神道觀과 연결된 종교인들의 활동과 관련된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성을 억제하지 않은 채 조화삼신이라는 시점에서 동아시아의 신관념을 단절하기는 어렵다. 본 논문에서는 조화삼신이 어떻게 국가적, 국민적 인지를 얻게 되는지를 메이지 시대의 신도의 전개와 관련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근대 동아시아에서 조화삼신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도 제시하고 싶다.

 

. 신기관 체제 속의 조화삼신

 

메이지 정부는 출범 초부터 제정일치 국가체제를 목표로 신도를 중심으로 한 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을 전개해 나간다. 예를 들면 근세 신사와 신직을 관할했던 요시다가문吉田家, 시라카와가문白川家이라고 하는 전통적 신사체제를 해체하고 그 대신 고대 율령제를 본떠 신기관神祇官을 부흥시켜 신기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메이지 4[1871]). 또한 신사의 내부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에도시대 이전에는 함께 섞여 있었던 신사와 사찰을 분리하고 신사를 국가제사의 일부로 규정하는 체제를 준비했다(이른바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 1868). 또한 결국에는 근대적 호구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실제 도입은 보류되었지만 신사와 국민을 연결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사찰의 단가檀家로 관리하는 사단제寺壇制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우지코(氏子)로서 신사에서 관리하게 하는 우지코시라베氏子調(모든 인민의 강제적 신사 귀속 정책)라는 구상도 있었다.

이러한 신사의 지위 확립과 대국민 접근책 동향과 병행하여 메이지 2(1869), 신기관에 교도국教導局과 선교사宣教使가 설치되었다. 전자는 칸나가라노미치惟神之大道(천황을 중심으로 한 제정일치)’를 체계화하고 교화하기 위한 기관이며, 후자는 그 이념을 국민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은 직책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신기관 교도국-선교사체제에서는 쵸슈번長州藩 출신인 오노 노부사네小野述信, 츠와노번津和野藩의 후쿠바 비세이福羽美静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다만 이 당시에는 아직까지는 어떠한 신도가 새로운 국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완수할 것인가, 어떠한 교리를 확립해 갈 것인가 같은 문제로 논쟁이어서 교도국·선교사의 교무에 대한 회의는 대혼란에 빠졌다.

그 중에 조화삼신에 대한 의미에 관한 발언도 나오므로 토코요 나가타네常世長胤신교조직이야기神教組織物語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토코요는 오노가 제창하는 신에 대한 관념(이세파伊勢派)에 부정적인 입장인 히라타파국학平田派国学 계보(이즈모파出雲派)였으며 여기서 언급하는 발언은 그러한 입장에서 오노의 발언에 대한 비판적 기록을 남긴 것이다.

당시 오노를 지지하는 세력은 조화삼신의 신덕神德도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国主神(이즈모의 제신으로 사후 세계의 주재신으로 간주되었다)의 역할도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로 일체화하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교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을 공인 교학으로 창출하려고 했다. 즉 황조신으로서의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를 중심으로 하는 신도체계를 제시하고 아마테라스의 현신인 천황을 중심으로하는 국가상이라는 개략적인 개념이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토코요는 오노이 주장 즉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하여 조화삼신에 기반하지 않으며 다만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만을 지존으로하는 신관념에 대해 그것은 원래 유교적 견해에서 나온 교지라고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비판의 배경에는 오노와 같이 황조신皇祖神=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 이데올로기화를 지향한 이세파신도伊勢神道와 종교적 안심安心으로서의 내세성·종교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의 제정일치를 주장하는 입장의 창조신인 조화삼신, 저승의 주재자인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神를 중시하는 히라타파신도(이즈모츠와노의 신관념에 대한 대립이 있었다. 이 회의는 결론이 나지 않았고 최종적으로는 메이지 3(1870) 12월 신도행정에서 히라타파를 지지하는 세력이 배제된다. 그 결과 천황에 대한 충성만을 강조하여 절대화하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를 황조신으로서의 신격으로 확정해 가는 방향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상의 전개에서 조화삼신에 대해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은 주류파가 된 아마테라스 중심의 신도에서는 조화삼신이 중시되지 않았으며 조화삼신을 중시한 히라타파 국학 관계자는 배제되었다는 되었다는 점이다. 이 메이지 2(1869) 단계에서는 근대국가구상 속에서 조화삼신의 지위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 교부성 체제와 조화삼신

 

이리하여 아마테라스 중심의 신도를 중심으로 하는 방향이 정해지고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력 복고신도가復古神道家의 협력을 얻지 못함으로써 교화 담당자가 부족하였고 불교의 반발을 받아 구상대로 진행되지 않아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4(1871) 말기에 후쿠바와 오노를 지지한 쵸슈계 관료인 키도 타카요시木戸孝允와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 등이 서양 시찰을 가게 된다. 이들을 대신한 임시대행정부에는 사츠마계 관료가 진출하여 이지치 마사하루伊知地正治의 영향 아래 히라타파신도의 색채가 짙은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다.

메이지 5(1872) 3월의 신기성神祇省 폐지와 교부성教部省 설치는 본래는 서양시찰 전의 쵸슈계 관료가 계획한 것이었지만 서양시찰 후에는 이세파 신직이 배제되고 히라타파의 영향을 받아 전개되어 간다.

이 교부성의 사명은 기존의 여러 종교 사무를 총괄하고 신교 및 유교 불교 모두 각각 교정을 두고 학생을 교육하고 인민을 선도하는것으로 공화정치학을 강의하고 국체를 멸시하고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며 민심을 선동하는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직과 승려를 교도직에 임명하여 국민교화 담당자로 삼았다. 또한 교화의 기본이념으로 신에 대한 공경과 나라사랑을 명심할 것’, ‘천리인도天理人道를 밝힐 것’ ‘천황을 받들고 그 교지를 준수할 것이라는 삼조교칙三条教則을 반포하여 교화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또한 불교의 각 종파도 이에 호응하여 가담하였고 불교 각 종파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도직 육성기관인 대교원大教院을 설립하게 된다. 이 대교원은 도쿄에 설치되었고 부와 현에 중교원, 소교원을 두고 교도직 육성과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신불합동포교가 시작되는데 거기에는 신도와 불교 간의 주도권 다툼이 전개되어 가게 된다.

메이지 6(1873) 1월에 도쿄부의 전 기이번紀伊藩 저택에서 대교원 개원식이 열렸으나 불과 1개월 후에 시바증상사芝増上寺로 이전하게 된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대교원 설립은 불교 각 종파가 원하던 것으로 이러한 불교 측의 압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부성에서도 사찰에 신전을 설치함으로써 불교 측의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일환으로 교부성은 대교원과 함께 시바대신궁芝大神宮을 이 증상사로 이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있다.

실제로 시바대신궁은 이전되지는 않았지만 증상사 본당에 조화삼신이 합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교화를 실시할 수 있다고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즉 교부성 아래에서 신불 양파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있었던 가운데 증상사는 그 최전선에 있었던 것이다. 그중 신도파는 그곳에 합사되어 있던 조화삼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주도권을 확립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조화삼신을 기초로 대교원 체제 안에서 신도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던 것은 교부성의 구상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는 네 신에 대한 존숭은 정교의 기본으로서 교도직 등원 시에는 이에 배례하고 그 후에 설교에 종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기관 체제에서는 아마테라스로 일원화된 질서였던 것에 비해 교부성 체제에서는 조화삼신이 추가되게 되어 있다. 이는 구상에 머무르지 않고 메이지 6(1873) 6월에 완성한 대교원신전大教院神殿에는 실제로 이 네 신이 모셔진 것 같다. 그것은 메이지 610월에 정해진 대교원규칙大教院規則별책에서 교도직이 대교원을 들어가고 나갈 때에는 축사를 해야 하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부터도 엿 볼 수 있다. 또한 이 신전은 교도직 외에도 일반인의 참배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신전의 권위나 조화삼신·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천황에 대한 경의를 국민에게 침투시키는 것이 기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메이지 6년 말엽부터 교도직이 활동 할 때의 교화계몽이념으로서 십칠겸제十七兼題가 추가되었다. 그 영향으로 조화삼신과의 관계에서 도덕 준수를 강조하는 설교가 두드러지게 된다. 예를 들면 가시마신궁鹿島神宮의 아요야기 타카토모青柳高鞆사람된 자는 조화삼신에 의해 태어나’,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의 오륜의 도를 만들면서 준비해 주셨기때문에 항상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하여 군신의 도를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조화삼신이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설교가 전개되었다.

이상에서 히라타파 국학의 영향 하에서 진행된 신기관 폐지로부터 교부성 설립이라고 하는 흐름 안에서 신불 합동 포교가 시작되어 그 속에서의 불교 측과의 주도권 싸움을 거치고, 신기관 체제하에서 배제된 조화삼신이 재부상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화삼신은 대교원의 제신祭神이자 정교의 기본이며 교도직이 공통으로 경배하는 대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대교원이 참배 문호를 넓히고 교도직이 행하는 설교 속에서 도덕적 근거가 됨으로써 일반인들 사이에도 퍼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부성 체제는 조화삼신의 침투·정착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체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신불합동포교라고 하면서도 폐불적인 자세를 숨기지 않는 히라다파 국학을 기반으로 하는 신도에 치우친 여러 정책에 대해 불교 측의 비판이 높아져 결국 대교원에서 불교 각 종파가 잇달아 이탈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양 시찰에서 돌아온 쵸슈계 관료들이 다시 실권을 잡게 된다. 또한 서양의 정교관계를 배우고 대교원에서 이탈한 불교 각 종파의 주장을 대변하는 입장에 선 시마지 모쿠라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자유론과 정교분리론이 고조되게 된다. 이리하여 신도 중심의 국가체제 자체가 비판받게 되어 메이지 8(1875) 대교원이 해체되고 메이지 10(1877)에 교부성이 폐지되어 내무성 사사국内務省社寺局으로 이관되게 된다. 이후 국민교화는 교육-교육칙어(教育勅語등을 통해 신도를 매개하지 않는 방법으로 전환한다.

 

. 교파신도와 조화삼신

 

메이지 10년대에 들어설 무렵부터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 아래 신도를 둘러싼 정책은 수정되어 간다. 그 일환으로 메이지 15(1882)에 교도직과 신사신직의 겸임이 폐지된다. 이전에는 신직이 교도직 역할을 맡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히라타파 국학에 기초한 종교적 신도관 하에서 제도화된 교도직이 신직에서 분리되는 것은 종교활동과 신사의 분리를 의미하고 있었다. 즉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 아래에서도 신사와 국가(천황)가 국민과 연결되는 통로로 두기 위해 신사에서의 종교행위는 허락되지 않는 행위로 여겨졌다. 이렇게 해서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이루면서 신사를 매개로 한 국민통합을 도모하는 이른바 일본식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신사는 종교성이 박탈되고 국가 제사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이 궤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논리를 가능케 한 것은 근대적 종교개념과 종교의 자유론에 기초한 신사 비종교론이었다. 원래 종교라는 단어는 전근대 일본에는 없었던 것으로 메이지 이후에 서양에서 온 religion의 번역어로 탄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religion에서 종교로 언어가 대체된 것이 아니라 religion이 갖는 문화적 시대적 배경도 함께 일본에 이입되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계 여러 나라를 문명국, 반문명국, 미개국이라는 3종류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국가주권의 유무를 설파하는 만국공법체제 아래 문명국의 지표로 여겨졌던 기독교적 종교관과 결합하여 이 용어가 성립된 것이다. 이때 문명국 종교의 바람직한 모습은 성경과 같은 경전에 기초한 교리신앙=belief 중심주의적인 모습이었다. 서양국가들과의 조우 속에서 식민지화를 회피하면서 자신의 주권을 확보하려고 했던 일본에서는 종교라는 단어의 이입은 근대화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이 단어의 이입에 의해서, 생활 속에서 관습화한 practice=의례 중심이었던 기존의 일본의 종교는, 교리=belief 중심주의로 변모시켜 가게 된다.

일본 근대화의 과제 속에서 생겨난 이 종교라는 단어는 근대 한어漢語(중국 宗教zong jiao’ / 한국 종교 jong gyo’ / 베트남 ‘Tôn giáo’)로 유학생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 등을 통해 동아시아를 석권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문명론적·기독교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어 새롭게 이입된 지역의 종교계에 변화를 재촉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belief 중심주의적인 종교개념을 전제로 하면서 신사 비종교론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물론 몇 몇의 신도론과 사상이 전개되었음은 틀림없지만 근세까지의 신도는 신기신앙神祇信仰 즉 의례적인 측면이 컸다. ‘종교개념의 이입에 있어서는 신도에서도 교리화를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신도의 교리화 실패를 역이용하여 신도를 교리신앙 즉 종교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신도의 장소인 신사에서의 활동을 의례로 한정지었다. 이렇게 신사에 대한 숭배는 종교행위가 아닌 도덕행위로 간주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본형 정교분리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제도적 측면이었다. 여전히 신사는 종교행위의 장이었으며 신도는 저세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직들도 있었고 일반 국민에게도 그러한 신사가 더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면, 히라타파·이즈모파, 진구교神宮敎의 후신인 신궁봉재회神宮奉斎会 관계자가 중심이 되어 종교로서의 신도의 활동거점 설치를 호소하는 신기원神祇院 설치운동과 그것을 지지하는 역할도 담당한 전국신직회가 전개되어 갔다. 물론 이러한 종교성 유지 지향은 종교인의 긍지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정교분리 원칙 속에서 신사의 역할이 제한되어 가는 가운데 당초에는 정액 경비가 지급되던 관사官社조차 메이지 19(1986)에 자사자영自社自営의 방침이 세워져 다음 해부터 대폭적으로 금액을 줄인 보존금을 지급하게 되었다(官国幣社保存金制度). 이러한 가운데 메이지 10년대에는 그보다 하위에 놓인 여러 신사나 신직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이 되었다. , 교부성 체제 해체 속에서 국가에서 신사로의 자금이 유입이 중단되어 자립화가 절박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종교인들에게 종교활동은 수입을 올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일반 국민은 아무리 메이지로 세상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전근대부터 계속해서 신사, 신직에게는 현세이익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신도로부터 종교를 분리하는 국가 방침 아래, 어떤 방법으로 종교 활동이 유지되어 왔는지를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파신도화

 

우선 첫째로 교파신도로서 독립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메이지국가는 국민통합에 뜻을 두고 종교성을 배제한 의례로서의 신도를 창조했지만,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현세 이익과 후세 안심에 대한 수요와 갈망이 쉽게 억제될 수 없다는 현실과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국가와 연결되는 의례로서의 신도와 신도의 종교적 측면을 이해하여 교파신도로서 독립시키는 방침을 취하게 된다. 그에 따른 대표적인 사례로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의 대응을 들 수 있다. 이즈모다이샤는 히라타파국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도의 종교성을 주장하는 입장에 있었다. 메이지 15년 신사와 종교활동이 분리된 후 종교활동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이즈모다이샤는 그해 안에 국가의 제사를 담당하는 이즈모다이샤로부터 종교활동의 영역을 분리해 이를 오오야시로교大社教로 독립시키고 있다. 이세신궁과 부적 및 이세력伊勢暦 배포 등을 담당한 진구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모든 종파가 이러한 신사와 종교활동 분리라는 형태로 교파신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람들이 요구한 종교활동의 수용자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완수한 교파신도 교단으로는 쿠로즈미교黒住教, 신토슈세이파神道修成派(1876년 공인), 진구교神宮教, 오오야시로교大社教, 후소교扶桑教, 짓코교実行教, 타이세이교大成教, 신슈교神習教(1882년 공인), 미소기교禊教, 신리교神理教(1894년 공인), 콘코교金光教(1900년 공인), 텐리교天理教(1908년 공인)가 있었으며 여기에 신도대교神道大教(신도본국)을 더해 13파가 된다. 이들 교단은 무조건 공인된 것이 아니라 활동 공인화를 위해 국가의 신화체계와 모순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변용시킬 필요가 있었다. 변용 시에는 신도의 종교성을 강조하는 히라타파 신도를 바탕으로 하는 교단도 많았으며, 이를 통해 조화삼신이 교리에 편입되는 예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근세에 발생한 후지코富士講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시바타 하나모리柴田花守가 창립한 짓코교의 교리 중에는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와 그 신으로부터 탄생한 타카미무스히노카미, 카미무스비노카미라는 조화삼신을 주재신으로 하고있으며 자신들의 교리에서는 후지산에 그러한 주재신이 임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후지코적 신앙이 교파신도화될 때 히라타파 신도가 메이지 초년 이래 강력하게 주장했던 조화삼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후지코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시시노 나카바宍野半가 개창한 후소교와 그 외에도 닛타 구******츠新田邦光의 신토슈세이파, 요시무라 마사모치芳村正秉가 개창한 신슈교, 이노우에 마사카네井上正鉄의 미소기교에서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를 중심으로 타카미무스히노카미, 카미무스비노카미를 더한 조화삼신을 주재신으로 하는 종파를 볼 수 있다.

 

2. 교파신도 산하 종교인화

 

그렇지만 모든 종교인이나 신앙집단이 교파신도화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파신도로 공인받기 위해서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를 주신으로 하는 쿠로즈미교와 같이 국가 신도와의 교리적 친화성이 있던지 교조가 근왕지사였던 신토슈세이파와 같이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등의 정부요인과 연결되어 있던지 혹은 근본 교리를 국가 신도에 맞추어 수정한 텐리교와 같이 교파신도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과 희생이 적지 않게 필요했다. 당연히 일반 민간종교인들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교파신도(혹은 불교 교단) 산하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경로는 남아 있었다.

교파신도 아래에는 그 활동을 보조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코샤講社를 두는 것이 인정되고 있었다. 메이지의 종교정책 아래 폐업 위기에 처해 있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코샤 별로 혹은 스스로 교파신도 산하로 내려감으로써 종교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신토슈세이파나 온타케교와 같은 산악계 교파신도가 그 수용체가 된 예를 볼 수 있다. 이 때 비교적 자유롭게 이전 활동을 지속한 예도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종교인 수용이 종교활동 현장에서 더욱 확산되는 사례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나가사와 카츠타테長澤雄楯의 이나리코샤稲荷講社가 있다. 나가사와는 히라타파 국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른바 혼다영학本田霊学을 대성한 혼다 치카아츠本田親徳의 제자로 진혼귀신鎮魂帰神을 중심으로 한 활동을 하는 종교자였다. 또한 메이지 초년의 신도의 형태에 대한 논의 중에서도 신도의 종교성을 호소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이런 논의 중 관계를 맺은 오오야시로교 관장 센게 타카토미千家尊福와의 인연으로 오오야시로교의 교사가 되었고 오오야시로교 하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이나리코샤를 일구었다고 생각된다. 여기까지는 다른 교파신도-코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었던 현상이지만 이 이나리코샤의 경우 그 산하에 다른 종교인이나 교회를 관할한 예가 보인다. 그 관할 아래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종교자로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가 있다. 나중에 오오모토교大本教의 교주가 되는 그는 메이지 30년대 전반에 종교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활동 공인을 받기 위해 다양한 교파신도 산하로 내려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온타케교에서 활동하다 실패하고 다이세이교에서도 실패하여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먼저 총본부를 찾아갔고 이나리코샤 산하에서 종교 활동을 실현시켜 가게 된다. 그리고, 오오모토교의 전신인 킨메이레이각카이金明霊学会도 이 코샤의 관할에서 활동을 전개시켜 가게 된다. 이나리코샤 자체도 오오야시로교 아래에서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상과 같이 교파신도코샤관할교회라는 조직 중 어딘가에만 들어가면 종교활동을 실현할 수 있는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어서인지 나중에는 교파신도하에서의 활동 허가를 받기 위한 노하우를 쓴 책도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그 당시는 물론 교파 신도와 코샤 특유의 논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나리코샤와 그 아래 관할 교회 간에도 그러한 관계가 있었으며 활동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형태나 규약이 이나리코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했다. 이 집단의 경우는 영술이라는 매우 실천적인 종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대정신大精神인 타카미무스비로부터 소정신小精神인 영혼 즉 타카미무스비의 분령分靈을 받고 있다라고 하는 영혼관에 입각한 실천이었다. 이 코샤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나 그 산하 교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 영술을 공유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이를 통해 조화삼신의 기능에 대한 이미지가 일반인들 사이에도 퍼졌다고 생각된다. 교파신도 중에는 조화삼신을 주재신으로 하는 신들이 많아 그 산하에 많은 종교인과 신자들이 모여 있었으므로 국가신도의 교리에서는 배제된 조화삼신은 교파신도의 신앙을 통해 민간=종교활동 현장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동아시아의 조화삼신이라는 시점을 향하여

 

이상 메이지 국가의 종교정책 속에서의 조화삼신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조화삼신은 국가정책의 핵심과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히라타파의 신도론을 형상화 한 교파신도에 의해 민간으로 전개되었다.

사실은 이 외에도 여전히 종교 활동의 실현 수단은 있었다. 3의 방법으로는 해외에서의 종교 활동이 있었다. 왜냐하면 외지에서는 내지와 다른 종교 법제가 취해져 있었기 때문에 종교 활동을 실시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타이완총독부 하에서는 다이쇼 12(1923)까지 신사행정과 종교행정이 미분리 상태였고 조선총독부 하에서는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 ‘포교규칙布教規則이라는 양대 신사 종교행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신직자들은 신관과 교도직 겸직 폐지는 내지에서도 예외가 있다. 즉 부현사府縣社 산하에서이다. 또한 예외적인 예를 넓히면 정부는 타이완에서의 신도포교의 편의를 도모하여 타이완에서 신설해야 하는 관국폐사官国幣社 산하의 신관은 당분간 교사일을 겸직함이 매우 시의에 적절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아가 종교활동 실천을 위해 신직자들 중에는 메이지 30년대(1897-1906) 일본 재야 신도자들 사이에 신도를 세계적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종교 활동의 실천을 바라는 이들은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호소하며 부임했다.

일본신도의 해외 포교의 효시가 된 것은 메이지 16(1883) 신토슈세이파의 조선포교였다. 이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교파신도의 해외 포교와 식민지 신사 정책에는 연속성이 있었다. 메이지 23(1890)부터 쿠로즈미교는 조선의 경성에서 기도와 병치료를 시작하게 되고 일본영사관은 이에 찬동하고 있다. 쿠로즈미교는 그 거점인 경성대교회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경성신사京城神社의 전신인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변화해 간다. 교파신도의 포교가 공설 신사로 되어 가는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부산의 용두산신사龍頭山神社에도 신슈교의 해외포교와 관련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타이완의 경우에는 전 진구교 교사로 타이완신사 초대궁사인 야마구치 토오루山口透의 활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예들은 모두 종교성을 우선하면서도 식민지 포교가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들이 담당한 역할이나 거기에서 보이는 조화삼신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여 어디까지나 전망을 제시할 수밖에 없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의 담당자를 고려하면서 근대 일본으로부터의 확산에 대한 전망을 말하면서 본 논문을 마치려고 한다.

교파신도를 포함한 신직자들의 활동에서 조화삼신이 강조되고 있는 예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삿포로와 사할린을 포함한 식민지에서는 국토를 수호하는 총진수総鎮守로 개척삼신을 모신 것은 주목해 볼만하다. 어떤 이유로 이 삼신이 선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함에 있어 천손강림에 앞서 국토를 정비한다는 신화의 역할을 기대하는 맥락에서인지 국토 개벽에 나서는 조화삼신과 같은 삼신이라는 형식이 취해진 점에서는 이러한 연속성이 상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고사기의 시점에서는 동아시아의 보편성 속에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는 논리였던 조화삼신이 근대에 식민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전환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조화삼신은 조선에서는 총진수総鎮守에 관한 논의 중에서 제신 후보에 조차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삼한정벌에 기초한 침략과 결부된 신공황후 및 일선동조론과 관련된 스사노오素戔嗚命소시모리曽尸茂梨 일체설에 기초한 스사노오 제신화에서 볼 수 있는 신화적 통합이 더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조화삼신이 일본제국주의에 휩싸인 근대 동아시아의 저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식민지 포교를 진행한 교파신도에는 앞서 서술한 대로 주재신으로 조화삼신을 규정하는 경우도 많았다. 교파신도가 아니어도 오오토모교처럼 적극적으로 대륙의 종교인들과 교류한 교단도 있다. 식민지에서 일본 종교는 문명론적인 맥락에서의 근대적 종교로서 식민지인들과 대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내지에서 기독교가 그러했듯이 한편으로는 위로부터의 계몽적 태도를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곳의 근대화를 위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 종교와의 대치 속에서 천도교와 보천교의 문명화가 진전되었다. 그들은 또한 문명의 담당자로서 민간종교를 계몽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된 조화삼신이 근대적 종교의 모형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은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일본어원문)


明治神道行政神道造化三神

 

石原和(立命館大学)

 

 

はじめに

一般的日本神話において、「造化三神とは天之御中主神高御産巣日神神産巣日神三神のことをいうこれは、『古事記序第一段三神造化となりられていることを典拠としているこの天地創造神話古事記上巻でもしく挿入されたり付加されたりした箇所えられているこうした付加説裏付ける事例として、『古事記完成8年後、『日本書紀一書四においては、「一書という引用形式国常立尊生成、「又曰高天原所生れますとしてこの三神補足的記述されているにぎないことがあげられるえて造化三神には中国書影響があり先秦上帝観念られて以降成立したものとする見方六朝道教元始天王影響があるとえられているこうした意味において造化三神もともと外部的存在でありアジア性格付与されたものであるといえるすなわち中国中心とする文明にはまっていくことを志向していく必要とされた記述だったのだ事実アジアに通用する正史として編纂されたとされている日本書紀にはより具体的にそうした特徴があらわれているその冒頭には古事記にはない中国由来開闢神話具体的には淮南子』『三五歴紀連綴加工する掲載されているこれは当時における一般論として提示されたものであったという意味において記紀神話アジア世界普遍性えたものであった白村江いや壬申乱後経験した7世紀初頭においてアジアの普遍性ることがらの支配正統性すものとして機能したのであるなからず造化三神挿入はそれにわるものだった

その中世になると、『日本書紀独自神話解釈えた中世日本紀展開していくこととなるこのときには対外的正統性すというよりもらの寺社神仏正統性展開がみられる造化三神してはその伊勢神道文脈において豊受大御神天之御中主神というえられる一般的神道五部書などでみられるように前近代伊勢神道説外宮神職中心展開したものでらがっている豊受大御神内宮天照大神皇祖神であることを天孫降臨せしめる主宰神として天之御中主神豊受大神同一視することで主張したものだったただしそれも次第豊受大神天之御中主神から豊受大神国常立尊へと移行してくこととなる

近世になると国学文脈において中国書引用によって開闢いたのち高天原へと日本書紀にかわり天地開闢らず高天原からまる古事記価値上昇していくこの古事記への注目動向たる本居宣長思想展開である近世後期きた、「漢意排除によって日本独自価値見出そうとする思想史的展開中心的役割たした造化三神しては服部中庸三大考天地開闢から分離したされ宣長平田篤胤へとがれていく宣長においては天照大神中心とした神観念提示されたが篤胤においてはこの造化三神天之御中主神中核えたいわゆる復古神道かれるようになるこうしてもとはあとからえられた造化三神地位急激上昇していったこの過程アジア的普遍性付与するための造化三神から日本独自性主張するための造化三神への転回見出せようしかしこうしたきがじたのは近世後期一部国学者やその影響けた々のであってあくまでも限定的動向であったということも見逃してはならない現代たちの神観念につながるのは明治期以降神道行政平田篤胤神道観宗教者たちの活動わった側面きいと筆者えているそのためこうした歴史性えないままに造化三神という視点アジアの神観念ることははばかられる以下ではいかにして造化三神国家的国民的認知ていくのかを明治期神道展開関連付けながらみていくこととしたいその近代東アジアにおいて造化三神をいかにえうるか展望したい

 

1. 神祇官のなかの造化三神

 

明治政府発足当初から祭政一致国家体制目指神道中心とした国家づくりにけた政策展開していくこととなるえば近世神社神職機能した吉田家白川家といった本所解体わりに古代律令制神祇官復興させ神祇行政担当させた明治41871])。さらに神社内部にも変化こす江戸時代以前相互混交状態にあった寺社ただし神社をその境内にある神宮寺社僧所管するなど仏教優位とする神社国家祭祀一部位置づける体制準備めたいわゆる神仏判然令慶応4-明治元年1868])。また最終的には近代的戸籍制度採用によって実際導入見送られたが神社国民びつけるため領民寺院檀家として管理する寺壇制わり国民氏子として神社管理させる氏子調構想もあった

こうした神社地位確立国民への接近策動向並行して明治21869]、神祇官教導局宣教使設置設置された前者惟神之大道」(天皇中心とした祭政一致体系化教化するための機関後者はその理念国民える役割ったとして位置づけられたものであるこの神祇官教導局宣教使体制においては長州藩出身小野述信津和野藩福羽美静中心的役割うこととなるただしこの当時はまだどのような神道しい国家において中心的役割たすかをどのような教義確立していくかをっていた段階にあり教導局宣教使教務めぐる会議大混乱った

そのなかに造化三神についての位置づけにする発言てくるので常世長胤神教組織物語からその内容をみてみようなお常世小野提唱する神観念伊勢派否定的平田派国学系譜する立場出雲派にありここでげる発言その立場から小野発言嘲笑的げたものである

 

小野氏上古ニモナキ教官シタル功績比類ナシト元来儒見ヨリシタル教旨ナレバ造化三神只天照大御神志尊トシ又神魂帰着テハ其善ナルハ高天原其悪ナルハ夜見国ヒヤラハルヽノ私説主張教官アリテ使中教官此病根ニノミメラレタリ。(「神教組織物語

 

当時小野らは造化三神神徳大国主神出雲祭神幽世死後世界主宰神とみなされた役割天照大神一体化するような天照大神教とでもいうべき神学公認教学としてそうとしていたすなわち皇祖神としての天照大神中心とする神道体系提示この現世でのあらわれとして天皇中心国家像のラフスケッチがされていたのだったこれにして常世小野える天照中心造化三神只天照大御神志尊する神観念してそれは元来儒見ヨリシタル教旨批判えているこの批判背景には小野のように皇祖神天照中心とした国家のイデオロギーした伊勢派神道宗教的安心としての来世性宗教性強調する文脈での祭政一致主張する立場から創造神である造化三神あの主催者としての大国主神重視する平田派神道出雲津和野神観念対立があったこの会議はもつれ最終的には明治3187012神道行政から平田派らが排除されることとなった結果天皇への忠誠して絶対化天照大神皇祖神としての神格限定していく方向定着していくこととなった

以上展開造化三神について確認しておきたいことは主流派となった天照中心神道においては造化三神重視されずそれを重視した平田派国学関係者下野することとな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この明治21869段階では近代国家構想において造化三神地位付属的なものでしかなかった

 

2. 部省造化三神

 

こうして天照中心神道中心とする方向まり宣教開始されることとなるしかし実際には有力復古神道家協力られなかったことで教化にあたる不足したことや仏教からの反発けたことによってりにはまず路線変更余儀なくされることとなるさらには明治41871福羽小野支持した長州系官僚である木戸孝允島地黙雷らが渡欧することとなるらにわる留守政府には薩摩系官僚進出伊知地正治影響のもと平田派神道政策へと転換していくこととなる

明治518723神祇省廃止教部省設置本来渡欧前長州系官僚計画したものであったが渡欧後には伊勢派神職退けられ平田派影響けて展開していくこととなる

この教部省使命在来諸教道事務総管セシメ神教及儒仏共各教正生徒教育人民善導セシムことで、「共和政治国体蔑視新政主張民心煽動スルのをぐこととされたこれにづいて神職僧侶教導職じて国民教化としたさらに教化基本理念として、「敬神愛国スヘキ」「天理人道ニスヘキ」「皇上奉戴朝旨遵守セシムヘキ三条教則発布教化体制整備めていったさらに仏教各宗もこれに呼応してわり仏教各派提案をいれて教導職育成機関として大教院設立されるこの大教院東京かれ府県中教院小教院をおいて教導職育成組織化がなされたこのようにして神仏合同布教まるがそこには神道仏教主導権争いが展開していくこととなる

明治618731東京府元紀伊藩邸大教院開院式われたがそのわずか1月後には芝増上寺移転されるとなるこの背景には大教院設立んだのが仏教各派であったこととわって仏教側からきかけがあっただけでなく教部省としても寺院神殿くことによって仏教側から主導権意図もあったとされるその一環として教部省大教院とともに芝大神宮をこの増上寺移転したいている

 

芝大神宮御遷座件正院伺案

               考証課

今般芝増上寺大教院移転相成候付而大神宮奉祀敬神教正中ヨリ願出候右寺院元来芝大神宮御遷座之旧蹟候間本堂御遷宮之上造化三神御合祀有之施教之方法速相立候様致度依之芝大神宮旧蹟考証別紙相添此段奉伺候也。[以下略

 

実際には芝大神宮移転はならなかったがこの増上寺本堂造化三神合祀されているためすみやかに教化うことができるとしていることは注目するすなわち教部省下神仏両派主導権争いがあった増上寺はその最前線にあったのであるその神道派はそこに合祀されていた造化三神立脚してらの主導権確立させようとしていたのであるそれはこの造化三神をもとに大教院体制神道勢力主導権ろうとしていたことは教部省のような構想にもあらわれている

 

造化三神及皇祖大神尊崇スルハ政教基本ナレハ本教宣布大道講明セントスル先四神スヘキ所以会得スヘシ教導職等登院此四神拝礼シテ報本感格祈請シテ各説教従事スヘシ

ここでは四神尊崇政教基本として教導職登院にはこれに拝礼して説教従事すべきとしているこのように神祇官体制においては天照一本化した秩序であったのに教部省体制においては造化三神え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るこれは構想にとどまることなく明治618736完成した大教院神殿には実際にこの四神られたらしいそのことは明治610められた大教院規則別冊において教導職大教院入退院するには掛巻母恐支天之御中主神高皇産霊神神皇産霊神天照大御神能大前乎謹美敬比皇大御国能本教等高支功蹟表令立給倍止恐美恐美母乞祈奉久斗白須祝詞べることとされたことからもえるまたこの神殿教導職にも一般々の参詣していたその背景には神殿権威造化三神天照大神天皇への敬意国民浸透させることが企図されていた

また明治6年末ころより教導職活動教化啓蒙理念として十七兼題えられたその影響から造化三神との関係から道徳遵守説教目立つようになるえば鹿島神宮青柳高鞆、「タル造化三神ツテ」「君臣父子夫婦兄弟朋友五倫レナガラ御備サレたのだから、「心得クテハナラヌ君臣についてべているこのように造化三神られたものであるから道徳的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する説教展開することとなった

以上をみてみると平田派国学影響下んだ神祇官廃止から教部省設立というれの神仏合同布教まりそのでの仏教側との主導権争いを神祇官体制下排除された造化三神再浮上してくることがわかるそれは大教院での祭神として政教基本として教導職共通対象としてだけでなく大教院参拝門戸げたことや教導職説教道徳根拠とされたにより一般々のにもがりつつあったその意味教部省体制造化三神浸透定着一定役割たしたとえられる

しかしこうした体制きはしなかった神仏合同布教といいながらも廃仏的姿勢さない平田派国学基盤とする神道傾斜した諸策して仏教側からの批判まり最終的には大教院から仏教各宗相次いで離脱していくこととなったさらには欧米視察からった長州系官僚再度実権っていくまた欧米政教関係んだ立場大教院から離脱した仏教各宗主張代弁する立場った島地黙雷らを中心とする信教自由論政教分離論まっていくこととなるこうして神道中心国家づくり自体批判されていくこととなり明治81875大教院解体明治101877教部省廃止内務省社寺局への移管へとかっていくこととなる以後国民教化神道媒介しない方法教育教育勅語転換していく

 

3. 派神道造化三神

 

明治10年代から信教自由政教分離原則のもと神道をめぐる政策修正されていくその一環として明治151882教導職神社神職兼補廃止される従来神職教導職についていたがそれはもはやかなわないこととなる平田派国学づく宗教的神道観のもと制度化された教導職神職からされることは宗教活動神社分離意味していたすなわち信教自由政教分離原則のもとにおいても神社国家天皇国民びつけておく経路としておくために神社での宗教行為されない行為とされたのだったこうしてタテマエでは信教自由政教分離たしながら神社紐帯とした国民統合いわゆる日本型政教分離げられたのだったその結果神社宗教性剥奪され国家祭祀最前線つことになった

この詭弁ともいえる論理可能ならしめたのは近代的宗教概念信教自由論づく神社非宗教論であったそもそも宗教前近代日本にはなかったことばで明治以降になって西洋からやってきたreligion翻訳語として誕生したものである重要なのはただreligionから宗教へとことばがえられたのでなくreligionのことばが文化的時代的背景もともに日本移入されたということである具体的には世界諸国文明国半文明国未開国3つに分類それにじて国家主権有無万国公法体制のもと文明国指標とされたキリスト教的宗教観れてこの言葉成立したのであるこのとき文明国宗教のありとされたのは聖書など経典によった教義信仰ビリーフ中心主義的なありであった欧米諸国との出会いの植民地化回避しつつらの主権確保しようとしていた日本においては、「宗教という移入近代化問題直結するものだったのであるこのことばの移入によって生活慣習化したプラクティス儀礼中心であった従来日本宗教教義的ビリーフ中心主義的なものへと変貌させられていくこととなる日本近代化課題まれたこの宗教近代漢語中国宗教zong jiao」/朝鮮半島종교jong gyo」/ベトナムTôn giáo」―として留学生日本植民地支配などをじてアジアへも席巻していくこととなるいうまでもなくそこには文明論的・キリスト教的含意まれておりたに移入された地域宗教界変化るものとして機能することとなる

こうしたビリーフ中心主義的宗教概念前提にしつつ神社非宗教論展開されたのである無論いくつもの神道論思想展開したことは間違いないが近世までの神道神祇信仰すなわち儀礼的側面きかった。「宗教概念移入にあたっては神道でも教義化られていくこととなるしかしそれがうまくいかない状況いていたこうした神道における教義化失敗逆手にとり神道教義信仰すなわち宗教ととみなさないことで神道である神社での活動儀礼限定していったのだったここにおいて神社への崇敬宗教行為でない道徳行為とみなされるようになるこうして日本型政教分離ったのだった

ただしこれはあくまでも国家制度としてであった依然として神社宗教行為であり神道はあの問題わるものだとえる神職らもいたし一般国民にとってもそうした神社のありのほうが一般的だったえば平田派出雲派神宮教後身となる神宮奉斎会関係者中心となって宗教としての神道活動拠点設置える神祇院設置運動やそれをえる役割った全国神職会展開されていったむろんこうした宗教性維持への志向宗教者としての矜持のみならず現実的問題ともわっていた政教分離原則神社役割限定されていく当初定額経費支給されていた官社でさえも明治191986自社自営方針され翌年以降大幅らした保存金支給されることとなった官国幣社保存金制度)。こうした明治10年代それより下位かれた諸社神職経済的困窮する状況となっていたすなわち教部省体制解体国家からの神社への資金られるようになり自立化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たのだったそうした宗教者たちにとって宗教活動収入重要手段だったのである一般国民いかに明治わろうとも依然として前近代から神社神職には現世利益役割期待されていたのだった

 では神道から宗教国家方針のもといかにして宗教活動維持されたのか以下ではその手段げることとしたい

 

 

 

3-1 教派神道化

 

まず第一教派神道として独立することがあげられる前述明治国家国民統合して宗教性排除した儀礼神道創造したが々の宗教する現世利益後世安心への需要渇望簡単にはえられないものであるという現実にもわざるをえなかったその国家とつながる儀礼としての神道神道宗教的側面腑分けし教派神道として独立させる方針るようになるそれをうけた代表的事例として出雲大社対応があげられる出雲大社平田派国学影響をうけながら神道宗教性主張する立場にあった明治15神社宗教活動分離宗教活動維持できなくなった出雲大社そののうちに国家祭祀出雲大社から宗教活動領域をわけそれを大社教として独立させている伊勢神宮とその大麻伊勢暦拝察った神宮教関係同様のものであるむろんすべての宗派においてこうした神社宗教活動分離という教派神道としてなったわけではないが当時きる々がめた宗教活動になったというでは共通していた

こうした役割たした教派神道具体的教団には黒住教神道修成派明治9年公認)、神宮教大社教扶桑教実行教大成教神習教明治15年公認)、禊教神理教明治27年公認)、金光教明治33年公認)、天理教明治41年公認)、これに神道大教神道本局えた13があるこれらの教団無条件公認されたわけではなく活動公認化けて国家神話体系矛盾のないものへとらの変容させる必要があったその変容には神道宗教性強調する平田派神道下敷きとするものもくありそれをじて造化三神教義まれるられたえば柴田花守創立した実行教ではのようにべている

 

 ずる多神ならず古典るに天地生発単独真神あり天之御中主神天地万物主宰するにして天地ちてなきものなり此一真神大元霊発動して男女徳性備へたる二神高御産巣日神神産巣日神二神一真神天之御中主神ならずして又一神するなり造化三神づけ教徒父母れりして主宰神所在日本帝国名山富士山となすものなり。(『神道実行教

 

この実行教近世こった富士講富士山万物もとの父母崇拝する信仰系譜教団であるその教義天之御中主神とそこからじた高御産巣日神神産巣日神造化三神主宰神としてたちの教義では富士山にその主宰神所在するとここではべられているここに富士講的信仰教派神道化する平田派神道明治初年以来強主張していた造化三神まれていることをることができる

 またじく富士講系統つぐもので宍野半いた扶桑教それ以外でも新田邦光神道修成派芳村正秉いた神習教井上正鉄禊教天之御中主神中心高御産巣日神神産巣日神えた造化三神主宰神としている宗派がみられる

3-2 教派神道配下宗教者化

ただしどんな宗教者信仰集団教派神道化することが可能だったわけではないそれをなすには天照大神主神とする黒住教のように国家神道との教義的親和性教祖勤王志士であった神道修成派のように岩倉具視政府要人とつながり根本となる教義国家神道わせて修正した天理教のような教派神道化への不断努力犠牲なからず必要となった当然一般民間宗教者たちのではなしう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しかしらにはまだ教派神道あるいは仏教教団傘下活動するという経路されていた

教派神道にはその活動補翼するための組織として講社くことがめられていた明治宗教政策のもと廃業危機にひんしていた宗教者たちはらの講社ごとあるいは自身教派神道のもとにることで宗教活動維持することができたえば神道修成派山岳系教派神道御嶽教がそのとなったがみられるそのには比較的自由従来活動けられたもみられた

またこのような宗教者宗教活動現場でさらにがっていく事例もみられたその事例として長澤雄楯稲荷講社をあげたい長澤平田派国学影響けながらいわゆる本田霊学大成した本田親徳弟子同門副島種臣)、鎮魂帰神中心とした活動宗教者であった明治初年神道のありする議論でも神道宗教性える立場していたはこの議論のときに関係った大社教管長千家尊福とのから大社教教師となり多数補任状されている)、大社教下活動開始稲荷講社んだとえられるここまでは教派神道講社事例でもみられた現象であるがこの稲荷講社場合さらにその宗教者教会所管したられるその管下活動した代表的宗教者出口王仁三郎がいるのちに大本教主となる明治30年代前半宗教活動めた活動公認るためにさまざまな教派神道傘下ろうと奔走していたしかし、「御嶽教運動致して失敗大成教ニて失敗是非なく総本部先達参上稲荷講社のもとで宗教活動実現させていくこととなるそして大本教前身となる金明霊学会もこの講社管下活動展開させていくこととなる稲荷講社自身大社教下での活動からまったにもかかわらずである以上のように教派神道講社所管教会という組織のどこかにさえれば宗教活動実現することが可能体制となっていた

こうした体制念頭いてかては教派神道下での活動許可るためのノウハウ登場するようになっているそれはそのには無論教派神道講社特有論理をある程度受れる必要があったことを反映しているともいえる稲荷講社とその所管教会とのにもそうした関係がありその活動められるためには教会規約稲荷講社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の集団場合霊術というめて実践的宗教活動をしていたそれは人間大精神天之御中主神のこと広義には天地創造された天之御中主神高御産巣日神神産巣日神所謂造化御三神たる産霊大神から小精神たる霊魂産霊大神分霊っているとする霊魂観づいた実践となっていたこの講社参加する々もその傘下教会参加する々もこの霊術共有実践していたことからこれをじて造化三神きについてのイメージが一般々のにもがっていったとえられる教派神道には造化三神主宰神とするものがそのもとにくの宗教者信者ったとえれば国家神道教義においては後景退けられた造化三神教派神道信仰じて民間宗教活動現場れられていくこととなったといえよう

 

 

4. アジアの造化三神という視点けて

 

以上明治国家宗教政策での造化三神行方簡単みてきた造化三神政策中枢からはざかっていくこととなるが平田派神道論にした教派神道によって民間展開していくこととなったのだった

はまだ宗教活動実現手段はあった第三方法として海外での宗教活動があったというのも外地では内地宗教法制がとられていたため宗教活動をおこなうことが可能状況いていたえば台湾総督府下では大正121923まで神社行政宗教行政未分離状態であったし朝鮮総督府下では神社寺院規則」「布教規則二本立ての社寺宗教行政がとられていたこうした背景をもとに神職たちは神官教導職兼補廃止内地いても例外あり府県社以下例外政府台湾島ける神道布教便同島新設すべき官国幣社以下神官教師はしむるを時宜れりとする認識していたというさらには宗教活動実践けて神職たちのには、「明治三十年代日本在野神道者間神道世界的宣布しなければならぬとの気運つてゐたというこうして宗教活動実践たちは積極的海外への進出赴任していった

日本神道海外布教嚆矢となったのは明治161883神道修成派朝鮮布教だったこのるように教派神道海外布教植民地神社政策連続性があった明治231890から黒住教京城祈禱病気直しをめるようになる日本領事館はこれに賛意していた黒住教はその拠点として京城大教会けるがこれが京城神社前身である南山大神宮変化していく教派神道布教公設神社へとなっていくがここからみられる釜山竜頭山神社にも神習教海外布教わっていたとされる台湾場合元神宮教教師台湾神社初代宮司山口透活動代表的となるいずれも宗教性優先されながら植民地布教んだことをすものであろう

らがった役割そこにみられる造化三神展開について史料的不足しているためあくまでも展望すことしかできないが明治期以降考慮しつつ近代における日本からのがりについての見通しをのべて本稿えることとしたい

教派神道神職たちの活動造化三神強調されているはまだえていないしかし植民地札幌樺太含において総鎮守として開拓三神国魂神大巳貴命少彦名命かれたことは注目していようにえるどのような理由をもってこの三神ばれたかは不明であるが新領土くにして天孫降臨先駆けて国土えるという神話役割期待する文脈からか国土開闢造化三神三神という形式がとられたにはらかの連続性想像できるそうした意味では、『古事記時点ではアジアの普遍性のなかにらを位置づける論理であった造化三神近代には植民地主義える論理へと転化していると評価できようかただし留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肝心朝鮮においては総鎮守する議論祭神候補にすらあが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むしろ三韓征伐づく侵略けられた神功皇后日鮮同祖論関係づけられた素戔嗚命曽尸茂梨一体説づく素戔嗚命祭神化でみられる神話的統合のほうがより直接的意味があったとえられるその意味では造化三神日本帝国主義われた近代東アジアの底流にどのようにいたのかをえていく必要があろう

また積極的植民地布教めた教派神道には先述主宰神造化三神位置づけるものもかった教派神道にならずとも大本のように積極的大陸宗教者交流した教団もある植民地において日本宗教文明論的文脈における近代的宗教として植民地々と対峙することとなったであろう日本内地においてキリスト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一方ではからの啓蒙的態度りながらその一方では当地近代化のための憧憬対象とされたであろう日本宗教との対峙天道教普天教文明化むことになるらはまた文明として民間宗教啓蒙していくこととなるこうした過程において日本近代化過程において下野していった造化三神近代的宗教のひなとしてがった可能性てきれないのではなかろ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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