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고수부의 생애와 사상

노종상(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23.06.02 | 조회 3410

2022년 증산도 후천 선문화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고수부의 생애와 사상

 

노종상(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서론

. 고수부의 생애

1. 불도와 동학 체험

2. 증산 상제와 만남, 그리고 대도통

3. 고수부의 크나큰 세 살림

. 고수부의 신도사상

1. 수부, 우리 고유의 신교神敎의 근대적 출현

2. 고수부 사상의 뿌리, 신도사상

. 고수부의 해원사상

. 고수부의 진법사상

1. 난번과 진법

2. 정음정양 진법과 고수부

3. 수부, 천지공사로서 정해진 진법

4. 진법 도운의 표상, 고수부

. 결론

 

 

.서론

 

수부首婦 고판례高判禮(1880~1935)는 근대 전환기인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종교 지도자이다. 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신앙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인간으로 와서 초월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수부라고 불렸고, 불리는 인물이다. ‘수부란 증산 상제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사전적 의미로 는 머리·시초始初··임금·우두머리·칼자루·비롯하다·근거하다·절하다·곧다·머리를 향하다 등의 뜻이고, ‘는 여자·며느리·아내·주부 등의 뜻이다. ‘수부라는 용어 자체는 머리가 되는 여자· 뭇 여성의 우두머리(Head woman), 칼자루를 쥔 여성·심판하는 여성(의 우두머리) 등 다양한 의미가 된다. ?도전?에 의하면 수부란 선천 세상에 맺히고 쌓인 여자의 원과 한을 풀어 정음정양의 새 천지를 여시기 위해 세우신 뭇 여성의 머리요 인간과 신명의 어머니.”(6:2:6)이다. 이밖에도 고수부에 대한 정의는 많다.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님은 억조창생의 생명의 어머니이시니라. 수부님께서는 후천 음도陰道 운을 맞아 만유 생명의 아버지이신 증산 상제님과 합덕하시어 음양동덕陰陽同德으로 정음정양의 새 천지인 후천 오만년 조화 선경을 여시니라.(11:1:1-3)

 

태모님께서 당신을 수부로 내세우신 상제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의 종통을 이어받아 대도통을 하시고 세 살림 도수를 맡아 포정소布政所 문을 여심으로써 이 땅에 도운의 첫 씨를 뿌리시니라. 태모님께서는 수부로서 10년 천지공사를 행하시어 온 인류의 원한과 죄업을 대속하시고 억조창생을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니라.(11:1:5-7)

 

전자는 이론이 바탕이 된 고수부의 삶에 대한 정의이고, 후자는 실천적 행위가 바탕이 된 고수부의 생애를 함축한 내용이다. 본고는 이 두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고수부에 대한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이다. 인간과 초월자의 삶을 살았던 고판례 수부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고수부에 대한 문헌자료는 몇 가지가 있다. 1, 2차 자료에 해당하는 초기경전으로 ?대순전경?을 비롯하여 ?선정원경?(고민환, 1960), ?고사모신정기?(이용기, 1968), ?고후불전?(전선필 구술, 김경도 씀, 1960년대 말) 등이 있다. 수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경전 중에는 ?증산도 도전?이 백미로 꼽힌다. 이 경전은 초기 경전과 그 후손들의 증언, 현장답사를 거쳐 종합, 정리한 문헌자료이다.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도전?에서 11편 태모 고수부님전체가 수부관 관련 내용이다. 이밖에 증산도 지도자인 안경전 종도사가 직접 저술한 ?증산도의 진리?, ?관통증산도? 등에 실려 있는 고수부 관련 내용도 1차 자료에 버금가는 중요한 자료다. 고수부에 대한 초기 연구는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가 대표적이다. 이후 고수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서 노종상의 논문 수부, 천지의 어머니, 증산도의 수부관과 연구논저 ?수부, 고판례?, 유철의 ?어머니 하느님 -정음정양과 수부사상-? 등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증산상제에 관한 학위논문과 일반논문이 1백 편 이상 나온 점에 유의한다면, 이런 현상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본고의 논의 전개방법은 편의상 세 장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고수부의 생애를 검토한다. 둘째는 고수부의 사상 편이다. 여기서 고수부의 전체적인 사상을 논의할 수는 없다. 이 경우 두 가지 논의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하나는 고수부의 사상에 대한 윤곽만을 논의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사상을 고려하되, 그 기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부분을 논의하는 방법이다. 두 가자 방법 모두 아쉬움이 없지 않겠지만, 본고는 후자의 방법으로 논의한다. 고수부의 신도사상과 해원사상, 그리고 진법사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신도사상은 신교사상과 신도사상으로 구분하여 논의한다. 본고의 논의에는 위에서 살펴본 모든 자료가 귀중하지만, 특히 ?도전?과 안경전 종도사의 연구업적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한다.

 

. 고수부의 생애

 

1. 불도와 동학 체험

 

고수부는 1880년 음력 326일 전라도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무이동면無伊洞面 도리道里(현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成道里) 고비산高飛山(463.2m) 아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택長澤이다. 아버지는 고덕삼高德三,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이름은 판례이다. 고수부가 태어난 무정 성도리는 앞뒤로 미륵불상이 둘러싸고 있다. 성도리 초입에는 담양 오룡리 미륵입상이 성도리 마을을 향해 서 있다. 성도리 뒤편 안골에도 미륵이 서 있다. 마을 앞뒤로 미륵불상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이 마을이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고수부는 유아기를 보냈다. 유아기란 만 1세부터 6세까지의 어린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중심성, 정서성, 구체성이 나타나며 만 3세까지의 전기에는 일상어의 습득, 생활 습관의 확립 따위가 이루어지고 후기에는 개성이 뚜렷하여진다고 한다. 한 인간의 생애를 탐구할 때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에 부딪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고수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고수부의 경우는 특히 심하다. 결과론이지만, 미륵신앙의 분위기에 싸여 있는 성도리에서 유아기를 보낸 고수부의 경우, 어떤 필연이 작용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1885년 고수부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아직까지 사망원인이 밝혀진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민초의 삶이지만 가부장주의家父長主義가 횡행하던 시기, 아버지의 사망은 어린 고수부에게 불운의 출발점이었다. 고수부는 어머니를 따라 외외가外外家 송씨의 집으로 옮겨가 살아야 했다. 어머니의 친정도 아니고 어머니의 외가로 옮겨 살아야 했다면 행간에는 여러 가지 풍경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더 이상 밝혀진 것은 없다. 고수부의 외외가는 절집이었다. 고수부는 자연스럽게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훗날 증산 상제는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선에 붙여 놓았느니라.”(4:8:9)라고 하였고, 증산 상제의 도의 반려자가 된 고수부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그것은 하나의 불도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수부가 언제 외외가로 옮겼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도전?에는 여섯 살에 부친상을 당하시고 이로부터 모친을 따라 외외가 송씨의 승문僧門에 귀의하여 수행하시니라.”(11:3:1)고 하였을 뿐이다. 만약 아버지가 사망하던 해에 외외가로 옮겨갔다면, 3년 동안 불교체험을 한 것이 된다. 1888, 아홉 살 되는 고수부는 절집을 떠났다. 고수부는 다시 어머니아 함께 정읍현井邑縣 남이면南二面 대흥리大興里(현 전북 정읍시 입암면笠岩面 접지리接芝里 대흥마을)에 사는 차치구車致九(1851~1894)의 집으로 다시 옮겨가 살았다.

차치구는 고수부에게 이모부였다. 그는 동학접주로 알려졌다. 그러나 뒷받침할 근거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동학신도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는 갑오년(1894) 동학혁명 당시 정읍지역의 큰 두령이었다. 동학혁명 1차 봉기 때 녹두장군 전봉준과 함께 고부관아 습격을 사전 모의했던 20인 방중의 한 명이었고, 2차 봉기 때는 정읍에서 5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장령(군단장급)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동학농민전쟁 가운데 가장 큰 전투로 기록될 공주 우금치전투 당시 전봉준후군대장全琫準後軍大將으로 활동하였다.후군대장의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검거되기 전날까지 함께 행동했던 핵심인물이었다.

차치구 집안으로 이사하였으므로 고수부에게는 그가 가장인 셈이었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도전?에서는 이로부터 이모부를 좇아 동학을 믿으시며 시천주주侍天主呪 수련을 하시니라.”(11:3:3)라고 하였다. 고수부가 동학신도가 되어 천주를 모셨다는 내용이다. 그 후 열다섯 살에 이모의 권유로 같은 동네에 사는 동학 신도 신씨에게 출가하였다. 고수부가 열다섯 살이라면, 동학혁명이 발생한 다음 해가 된다. 동학혁명이라는 소용돌이가 한 바탕 몰아친 다음해, 신씨와 인연을 맺었다. 혼인생활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슬하에 태종이라는 딸 한 명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혼인한 지 13년 만에 고수부는 남편을 사별하였다.

 

2. 증산 상제와 만남, 그리고 대도통

 

정미년(19078) 10, 증산 상제는 차경석 성도에게 천지에 독음독양은 만사불성이니라. 내 일은 수부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참으로 일을 하려거든 수부를 들여세우라.”(6:34:1-2) 하였고, 경석이 이종사촌 누님인 고수부를 천거하였다. 고수부가 증산 상제를 처음 만난 것은 혼자된 지 불과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해 동짓달 초사흗날,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 수부 책봉의 예식이 거행되었다. 이 때 증산 상제는 내가 너를 만나려고 15년 동안 정력을 들였나니 이로부터 천지대업을 네게 맡기리라.”(6:37:5)고 하였다. 고수부에게 종통대권을 전한다는 선언이다. 증산 상제가 고수부에게 종통을 전하는 공사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후 증산 상제는 모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고수부와 함께 처결하였다. 또한 고수부를 주인으로 하는 공사도 행하였다.

좀 길지만 ?도전?에서 관련 말씀 몇 가지를 근거로 제시한다.

 

상제님께서 수부님께 수부의 법도를 정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서신西神이니라. 서신이 용사用事는 하나, 수부가 불응하면 서신도 임의로 못 하느니라.” 하시고 여러 가지 공사를 처결하실 때 수부님께 일일이 물으신 뒤에 행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부의 치마 그늘 밖에 벗어나면 다 죽는다.” 하시니라.(6:39:1-4)

 

상제님께서 수부님께 말씀하시기를 신축년(1901) 이후로는 세상일을 내가 친히 맡았나니 이제 사절기四節氣는 수부가 맡고 24방위는 내가 맡으리라. (6:40:1-2)

 

하루는 상제님께서 남을 등지고 북을 향하여 서시고 수부님으로 하여금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서게 하신 뒤에 그 가운데에 술상을 차려 놓게 하시고 수많은 글을 써서 술상 위에 놓으시고는 수부님과 함께 서로 절하시니라. 이어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와 나의 합덕으로 삼계를 개조하느니라.” 하시니라.(6:42:1-3)

 

무신(1908)년에 하루는 상제님께서 성도 10여 명을 뜰아래 늘여 세우신 뒤에 수부님과 더불어 마루에 앉으시어 수부님께 말씀하시기를 네 나이는 스물아홉이요, 내 나이는 서른여덟이라. 내 나이에서 아홉 살을 빼면 내가 너 될 것이요, 네 나이에 아홉 살을 더하면 네가 나 될지니 곧 내가 너 되고 네가 나 되는 일이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와 나의 합덕으로 삼계를 개조하느니라.” 하시니라.(11:6:1-5)

증산 상제는 고수부의 앞날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예를 덜어 다음 공사가 그것이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세숫물을 올리고 나가는 경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수부님께 일러 말씀하시기를 저 살기(殺氣)를 보라. 경석은 만고대적萬古大賊이라. 자칫하면 내 일이 낭패되리니 극히 조심하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금구金溝(, 김제군 금산면-인용자)로 가면 네 몸이 부서질 것이요, 이곳에 있으면 네 몸이 크리니 이곳에 있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앞으로 내가 없으면 크나큰 세 살림을 네가 어찌 홀로 맡아 처리하리오.” 하시니라. (11:8:1-5, 밑줄-인용자)

 

특히 앞으로 내가 없으면 크나큰 세 살림을 네가 어찌 홀로 맡아 처리하겠느냐는 우려의 표시는 증산 상제가 어천한 후 고수부의 앞날에 대한 천지공사이다. 기유(1909)624, 증산 상제가 김제 금구군 구릿골 김형렬金亨烈(1862~1932)의 집 사랑방에서 어천하였다. 이 때 고수부는 30세였다. 당시 고수부는 증산 상제의 어천 장소에 있지 않았다. 증산 상제의 어천 후에도 차경석을 비롯한 성도들은 청국에 공사를 하러 가 계신다는 등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고수부가 증산 상제의 어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개월이 지난 후였다. ?도전?에 의하면 19109월초 고수부가 주문을 읽었는데 신안을 통해 구릿골 대밭 끝에 초빈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다음날 저녁에는 증산 상제가 나타나 내가 죽었는데 네가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보지 않느냐?” 책망하였다(11:13:5).

이튿날 새벽에 고수부는 신안을 통해 보았던 구릿골로 갔다. 80리나 되는 먼 길을 한나절 만에 당도한 고수부는 곧바로 구릿골 김형렬의 집 뒤 대밭 끝에 있는 초빈 앞에 이르렀다. 과연 증산 상제의 어용御容이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고수부는 증산 상제의 가슴에 옥황상제玉皇上帝라 쓴 명정을 덮어 주었다.

신해(1911)4월에 고수부는 차경석과 류응화柳應化와 응화의 둘째 아들 석남錫湳을 데리고 모악산 대원사으로 갔다. 대례복을 갖추어 입으시고 증산 상제의 성령과 혼례식을 올렸다. 이 날부터 대원사 칠성각에서 49일 동안 진법주眞法呪 수련을 하였다. 이곳은 증산 상제가 천지대신문을 열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 뒤에 고수부는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 운산마을에 있는 신경수申京守(1838~1923) 성도의 집에 가서 집 윗방에서 100일 동안 수도하였다.

 

수부님께서 공부를 마치시매 이로부터 활연대각하시어 삼계의 모든 이치를 통하지 않으심이 없더라.(11:17:6)

 

그해 920일 아침에 고수부는 마당을 거닐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넘어졌다. 집 안 사람들이 방안으로 떠메어다 눕히고 사지를 주물렀으나 소생하실 가망이 없자 모두 둘러앉아 통곡하였다.

 

수부님께서 이렇게 네댓 시간을 혼절해 계시는 중에 문득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한 가운데 큰 저울 같은 것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오는지라 자세히 보시니 오색찬란한 과실이 높이 괴어 있는데 가까이 내려와서는 갑자기 헐어져 쏟아지거늘 순간 놀라 깨어나시니 애통해하던 집 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니라.(11:19:3-5)

 

고수부가 대도통을 하는 순간이었다. ?도전?에서 전하는 당시의 광경은 다음과 같다. 이 때 고수부는 일어나 앉으며 갑자기 증산 상제의 음성으로 차경석을 향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경석이 놀라며 경석입니다.” 대답하였다. “무슨 생이냐?” “경진생입니다.” 이에 고수부는, “나도 경진생이라. 속담에 동갑 장사 이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 장사 하자.” 하고, 다시 생일을 물었다. 경석이 유월 초하루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고수부가 말했다. “내 생일은 삼월 스무엿새라.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秋收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11:19:6-10) 이것은 단순한 문답이 아니다. ‘증산 상제의 음성으로행하는, 다시 말하면 증산상제가 행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공사로 줄임말도 병행). 내용은 후천 오만년 종통맥과 추수할 사람을 정하는 공사이다. 고수부를 통해 증산 상제가 행하는 공사이지만, 고수부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직접 행하는 첫 번째 천지공사라고 할 수 있다.

천지공사가 무엇인가? 증산 상제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워낙 큰 담론이므로 여기서 상세한 내용을 논의할 여유는 없지만, 천지공사란 한 마디로 우주일가宇宙一家의 조화선경낙원을 여는 신천지의 새판을 짜는 일이다. 삼계대권을 주재하는 조화옹 하느님인 증산 상제가 천지이법과 천지기운을 바탕으로 병든 천지 질서를 바로잡아 심판해 놓은 인류 역사의 설계도요 이정표이다. 과연 누가 이런 천지대업을 할 수 있는가. 우주 주재자인 증산 상제만이 가능하다. 아니, 또 한 사람이 있다. 증산 상제의 도의 반려자인 고수부이다. 고수부는 10년 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 ?도전?은 이 때부터 고수부가 성령에 감응되어 수부로서의 신권神權을 얻고 대권능을 자유로 쓰며 신이한 기적과 명철한 지혜를 나타내 천하 창생의 태모太母로서 증산 상제 대도의 생명의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하였다. 천직공사를 행하였다는 얘긴데, 후술하겠으나 고수부의 본격적인 천지공사를 병인(1926)년부터 시행된다.

 

1) 도운의 첫째 살림, 정읍 대흥리 도장

천지공사의 역사적 전개 방식은 크게 도운공사와 세운공사로 구분된다. 도운은 증산 상제 도의 운로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종통 계승의 운로라고 할 수 있다. 세운은 세계질서의 움직임, 운명을 천지도수로 정하여 인사로 전개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증산 상제의 종통 계승자인 고수부는 도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그해(1911) 10, 고수부는 증산 상제를 직접 모신 성도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신도神道로써 포정소布政所 문을 열고 도장 개창을 선언하였다. 증산 상제 어천 이후에 방황하던 성도들이 다시 크게 발심하여 고수부를 모셨다. 고수부는 대흥리 차경석의 집을 본소로 정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각기 사방으로 보내 포교에 힘쓰게 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비로소 상제님 무극대도의 포교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신도들이 구름 일듯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그 후 3년 만에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와 서남해의 모든 섬에 태을주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게 되니라.(11:28:6-7)

 

때는 나라가 일본과 합병당한 지 1년 뒤였다. 망국의 백성이 된 민초들은 갈 길을 몰라 방황했고, 고수부가 개창한 무극대도는 그들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되었다. 도세는 날로 흥왕하였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다. ‘은 내부에 있었다. 바로 이종사촌동생 차경석이었다. ?도전?에 의하면 경석은 기국이 워낙 커서 다른 성도들과 품은 뜻이 다르더니 마침내 교세를 움켜쥘 욕심을 갖게 되었다. 경석의 야심을 간파한 성도들이 모두 분개하여 더러는 도문을 떠나고 지방 신도들과 연락하여 따로 문호를 세우기도 하며, 일부는 경석을 따돌리고 본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치복李致福(1860~1944) 성도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차경석은 치밀하였다. 을묘乙卯(1915)년에 이치복의 본소 이전 운동을 저지한 경석은 이 해 동지절에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한 다음 심복들로 하여금 24방주方主로 임명한 뒤에 교권敎權을 집중시켰다. 이 때부터 경석은 고수부가 옆에 있는 것조차 불편하게 여겼다. 그는 고수부가 거처하는 방을 영실靈室이라 칭하며 방문에 주렴을 걸어 놓고는 예문禮門이라 하여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을 못하게 하고, 아내 이씨李氏에게만 수발을 들게 하였다.

무오(1918)620일에 고수부는 딸 태종을 정읍군 우순면 초강리雨順面 楚江里 연지평蓮池坪 마을 박노일朴魯一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919일에 증산 상제 성탄치성을 봉행한 다음 대흥리에서의 모든 일을 정리한 후 21일 새벽에 대흥리를 떠나 김제군 공덕면 공덕리孔德里 송산松山 마을 천종서의 집으로 옮겼다가 다음 달 중순에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白山面로 옮겨갓다.

 

2) 도운의 둘째 살림, 김제 조종리 도장

백산 조종리는 증산 상제와 동종同宗 간인 진주 강씨들이 150호 정도 사는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서 강응칠姜應七(1871~1941), 강사성姜四星)(1885~1691), 강원섭姜元聶(?~ 1950 추정) 등 대여섯 명이 신도였다. 고수부는 중조中祖 마을에 있는 오두막집에 임시 거처를 정하여 한 달간 머물렀다가 하조下祖 마을 강응칠의 집으로 옮겼다.

이 무렵 고수부는 뜻하지 않는 옥화獄禍를 당하였다. 내막은 이러하였다. 1917년 고수부를 몰아내다시피 하여 교권을 독차지한 차경석이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후 대흥리 교단에는 불미스런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1918년 동짓달에 제주 신도 문인택文仁宅이 성금 10만여 원을 면화 포대 속에 감추어 육지로 나오다가 목포에서 발각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차경석 교주의 아우 윤칠輪七을 비롯한 간부급인 방주方主 18명이 체포되어 목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 차경석의 교단에서 식자층으로 꼽히는 이상호李祥昊(1888~ 1967)가 사건 해결의 담당자로 나서 모든 책임을 고수부에게 떠넘겼다. 동짓달 25, 고수부는 강응칠과 함께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튿날 목포경찰서에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므로 강응칠은 섣달 12일에 석방되고, 고수부는 38일 만인 이듬해(1919) 정월 초사흗날에 석방되었다. 이를 일러 무오년 옥화라 하였다.

종교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무오옥화는 고수부가 무엇인가를 대속하여 스스로 받은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석방된 후 고수부의 마음은 편치 않았던 것 같다. 이로부터 고수부는 농사에 마음을 두고 몇 년 동안 한가로이 지내실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한가로움은 웅크린 사자의 그곳에 다름 아니었다. 병인(1926)35에 고수부는 여러 성도들을 도장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천지공사를 시행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증산 상제님께서는 9년 공사요, 나는 10년 공사이니 내가 너희 아버지보다 한 도수가 더 있느니라.’(11:76:1-3)고 덧붙였다. 이후 고수부는 10년 동안 본격적인 천지공사를 행하게 된다. 종통대권자로서, 온 인류의 진멸 위기인 후천 개벽을 앞두고 온 천하창생의 어머니로서 단 한 명의 자식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였다.

 

3) 도운의 셋째 살림, 김제 용화동 도장

 

(1) 왕심리 도장

기사(1929)921일 고수부는 몇몇 성도들과 함께 조종리를 떠나 순흥 안씨順興安氏 집성촌인 정읍 왕심리旺尋里로 옮겨 갔다. 옮긴 배경은 이러하였다. 고수부의 둘째 살림인 조종골 도상 시절, 고민환高旻煥(1888~1966)이 입도하였다. 본관 제주. 도호는 성포聖圃. 전북 옥구 출신인 고민환은 어려서 동진童眞출가한 경험이 있었다. 그후 환속하였다가 1919년경부터 조종골 도장에 출입하였다. 병인년(1926)부터 그는 대부분의 공사에 수종을 든 고수부 교단의 수석성도가 되었다. 그는 고수부를 대행하여 교단 운영과 병자 치료를 맡았다.

강응칠과 강사성 등을 주축으로 한 조종리 강씨들은 불만이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공로를 내세우며 행동으로 나섰다. 도장에 속한 소작답 24두락을 끊어 버리는 등 도장 운영을 방해하였다. 특히 강응칠은 고수부가 거처하는 조종리 도장 건물을 자신의 명의로 돌렸다가 도장 아래에 사는 오두막집 주인에게 팔아 버렸다. 뒤늦게 우두막집 주인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수부는 도장을 떠나지 않았다. 도장은 여러 신도들이 공동 모금으로 건축한 건물이었다. 이에 오두막집 주인이 강응칠을 전주지법에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강응칠이 패소하여 벌금형이 내려졌고, 그 아들 대용大容이 벌금 대신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왔다. 사람들은 이것을 도집 재판 사건이라 하였다.

강응칠은 물러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다시 도장을 팔아넘길 속셈으로 김제 청년 혁신파와 합세하여 고수부를 경찰서에 밀고하였다. 고수부는 경찰서에 출두하는 따위로 온갖 수모를 감내하였다. 그 사이에 많은 신도들이 도장을 떠났다. 고수부는 조종리 강씨 신도들의 무도함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해 919일 고수부는 증산 상제 어진을 모시고 조종리 도장을 떠났다.

고수부가 왕심리로 옮긴 것은 단순히 조종리 강씨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하창생의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읍 왕심리는 대흥리와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었다. 이 무렵 대흥리 교단에서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고수부를 밀어내고 교권을 장악한 차경석은 1921년 일본 경찰의 체포령과 감시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함양 황석산黃石山(1192.5m) 기슭에서 천제를 올리고 교명을 보화普化로 선포하였다.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탁월한 조직가였다. 그는 일제 당국에 쫓기면서도 보천교의 교세를 한껏 키워나갔다. 보천교 안팎에서 6백만 보천교, 7백만 보천교라는 말이 떠돌았다. 때는 식민통치 권력이 서슬 퍼렇게 날뛰었던 일제 강점기. 총독부 당국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 만무하였다. 총독부는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차경석은 신출귀몰할 정도로 신변을 감추면서도 교세를 더욱 확장하였다. 무진년(1928), 기사년(1929) 사이에 보천교 각 지방 신도들이 본소가 있는 정읍 대흥리로 이사하여 신앙촌을 이루었다. 나라 잃고 갈 곳을 몰라 방황하던 망국의 백성들은 한 줄기 빛을 찾아드는 나방처럼 대흥리로 몰려들었다. 갑자기 수천 가구가 이주해 왔으므로 보천교 신도들과 그 가족들은 대부분 생계까지 곤란하게 되었다. 교주 차경석이 구제 방편으로 벽곡방문辟穀方文을 공포하고 벽곡을 장려하였으나 그로 인한 독과 기아로 죽는 자가 속출하고 남은 사람들도 굶주림에 시달렸다.

고수부는 이미 보천교가 처한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보천교의 씨를 뿌렸던 주인이다. 인간사를 떠나서 고수부라는 존재 자체가 천하 창생의 살리는 어머니가 아니던가. 어머니가 어느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고수부가 왕심리로 옮겨 온 배경 중의 하나였다. 고수부가 왕심리에 옮긴 이후, 보천교 신도들이 매일 수십 명씩 와서 굶주림을 호소했다. ?도전?에는 이때 왕래하는 자가 무려 만여 명이 되었고, 고수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을 거두어 구제하였다고 기록하였다(11:274:5). 창생을 구제하는 일은 진행되고 있었으나 도장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원래 고수부의 교단 신도들은 대부분 조종리 인근 사람들이었다. 조종리에서 왕심리까지 거리가 멀었으므로 신미년(1931)에 이르면 신도들의 내왕이 점점 줄어들고 도장 형편도 매우 어려워졌다.

 

(2) 용화동 도장

1931년 동짓달 14일 고수부는 전라북도 김제 금산면 용화동龍華洞 동화교東華敎 교단으로 옮겼다. 당시 동화교 통정統正은 이상호였다. 전라남도 해남 출신인 그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만주·북경 등을 유랑하다가 28세 때 대흥리 교단에 입교하여 1919년 차경석이 보천교를 조직할 때, 총령원장까지 피임되었다. 그러나 차경석 교주와의 불화로 동생 이성영李成英(1895~1968, 후에 이정립李正立으로 개명) 등과 보천교 혁신운동을 주도하다가 탈퇴하였다. 1925년 김형렬의 미륵불교로 옮겼으나 역시 탈퇴하였다. 그 사이에 증산 상제의 제자들을 방문하여 행적을 수집, 정리하여 ?증산천사공사기?(1926)를 출간하였다. 증산 상제의 행적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이었다. 1928년 이상호는 동생 정립과 임경호林敬鎬 등과 함께 동화교를 세우고 통정에 올랐다. 그리고 ?증산천사공사기?를 대폭 수정, 보완하여 ?대순전경?(1929)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화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통정 이상호를 비롯한 동화교 간부들은 보천교를 비롯한 다른 교단들처럼 증산 상제를 직접 모셨던 성도들이 아니었으므로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누구보다도 이상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약점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인물이 고수부였다. 동화교는 1930년부터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그 뜻을 밝혔다. 심지어 통정 이상호가 직접 찾아와 고수부를 설득하였다.

결국 고수부를 정점으로 하는 조종리 교단과 용화동 동화교 통합 교단이 출범하였다. 고수부는 치성을 마친 뒤 도장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여 선포하였다. 고수부 주재 아래 대교령大敎領 한 사람과 부교령副敎領 두 사람을 두어 도장을 운영케 하고, 대보大保 한 사람과 아보亞保와 찬보贊保 각 두 사람씩으로 구성된 보화원保華院을 두어 도무를 돕게 하는 조직이었다. 대교령에는 홍원표洪元杓, 부교령에는 이성영과 전준엽, 대보에는 이상호, 아보에는 임경호와 고찬홍, 찬보에는 김환金丸과 이근목이 각각 선임되었다. 면면을 보면 조종리 신도들과 동화교 신도들이 분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증산 상제가 고수부에게 붙인 크나큰 세 살림가운데 마지막 셋째 살림인 용화동 도장 시대가 열렸다.

 

(3) 오성산 은둔과 선화仙化

용화동 도장 시절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유교의 틀에 매여 있는 이상호와 성영 형제는 고수부의 신도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고수부는 두 사람의 심법을 들여다보고 신도가 내릴 때마다 이놈, 저놈하며 담뱃대로 때리기 일쑤였다. 두 사람은 맞는 것이 두렵고 체면도 손상되었으므로 고수부를 피해 다녔다. 원래 이상호·성영 형제가 고수부를 모신 의도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고수부의 신권을 바탕으로 교세를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막상 모시고 보니 고수부가 신도로써 행하는 천지공사의 진행 방법과 언행이 단순한 무당 짓으로만 여겨졌다. 그들은 아예 고수부가 거처할 방을 따로 정하여 모셨다. 겉으로는 높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행동반경과 출입을 제한하려는 것이었다. 고수부는 과거 대흥리 도장에 이어 다시 용화동 도장에서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계실 때 천지에서 신도가 크게 내리매 여러 차례 용봉龍鳳을 그려 깃대에 매달아 놓으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용화동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 다시 용봉기龍鳳旗를 꽂아 두시고 이상호에게 이르시기를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하시고 용봉기를 꼭 꽂아 두라.” 하시며 다짐을 받으시니라. (11:365:1-3)

 

계유년(1933), 고수부가 용화동을 떠나기 전에 행한 공사는 이것이었다. 이 공사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할 여유는 없다. ?도전?에서는 이 공사의 제목을 용봉을 그려 종통 도맥을 전하심이라고 붙였다. 그해 동짓달 5일에 고수부는 도운 세 살림의 파란곡절을 뒤로하고 용화동을 떠났다. 옮겨간 곳은 전라북도 옥구군 오성산五聖山 도장이었다. 일종의 은거였다. 물론 은거 중에도 인류 진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후천 개벽기를 맞아 죽어가게 될 창생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공사를 멈추지 않았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공사였다.

 

태모님께서 9월 상제님 성탄치성 전날에 무수히 개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자손들을 어찌하면 좋으리오. 죽게 되면 저희들이나 죽지 애매하고 불쌍한 우리 창생들을 어찌하리.” 하시며 성도들을 동쪽으로 향하여 벌여 앉히시고 해마주解魔呪를 읽게 하시며 이르시기를 살려 내자, 살려 내자!” 하시니라. 이는 장차 일본 제국주의의 칼날에 수없이 죽어갈 이 땅의 백성들을 구제하시기 위한 공사이더라.(11:385:1-4)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차 괴질이 군산 해안가로부터 들어오느니라.” 하시고 그 괴질의 기세가 워낙 빨라 약 지어 먹을 틈도 없을 것이요, 풀잎 끝에 이슬이 오히려 더디 떨어진다.”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소병, 대병이 들어오는데 죽는 것은 창생이요, 사는 것은 도인이니 오직 마음을 바르게 갖고 태을주를 잘 읽는 것이 피난하는 길이니라.” 하시니라.(11:386:1-4)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을주는 천지 기도문이요, 개벽기에 천하 창생을 건지는 주문이니라.” 하시고 이 뒤에 병겁을 당하면 태을주를 많이 읽어 천하창생을 많이 살려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태을주의 훔치 훔치는 천지신명에게 살려 달라고 하는 소리니라.” 하시니라.(11:387:1-3)

 

하루는 태모님께서 공사를 보실 때 억조창생을 부르시며 불쌍하다! 불쌍한 놈만 죽게 생겼다.” 하고 통곡하시더니 담뱃대를 좌우로 두르시며 살려 내자!” 하시고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공각空殼이요, 일월도 무용無用이라.” 하시니라.(11:388:1-3)

 

인간으로 와서 마지막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천하창생을 구원하기 위해 몸 바쳤던 고수부는 마침내 마지막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고수부는 홀로 목욕을 한 뒤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요에 누웠다. 수석성도 고민환을 불러 머리맡에 앉혔다. 두어 시간 후에 문득 성도들에게 너희들이 마음만 잘 고치면 선경세계를 보게 되건만, 선경세계가 바로 눈앞에 있건만.” 하고, “증산 상제님이 오시면 나도 올 것이요, 내가 오면 상제님도 오시리라.” 하더니 증산 상제 어진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너희 아버지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 하고 세 번 거듭 말한 뒤에 눈을 감았다. 고수부가 선화仙化한 순간이었다. 신시개천神市開天 5833, 단군기원 4268, 을해(도기道紀 65)106일 축시丑時, 서력기원 1935111일이다. 고수부의 성수聖壽56세였다.

 

. 고수부의 신도사상

 

1. 수부, 신교神敎의 근대적 출현

 

신도神道사상은 고수부의 바탕을 이룬다. 고수부의 모든 행위, 나아가 사상은 신도사상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신도사상은 고수부의 여러 사상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만, 나아가서 본고에서 논의하게 될, 혹은 논의하지 못한 고수부의 모든 사상의 기본이 된다. 신도사상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고수부의 어떤 행위, 사상을 논의할 수 없다는 얘기다. 본고에서 신도사상을 고수부의 첫 번째 사상으로 논의하는 이유이다.

고수부의 신도사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먼저 고수부와 우리 고유의 신앙인 신교神敎의 관계를 검토한다. 증산 상제와 그의 도의 반려자인 고수부야말로 신교의 총체이며 정점으로서 근대적 출현이기 때문이다. 신교가 무엇인가? ‘신교의 문자적 의미는 신의 가르침이다. 신교는 태고시대 인류 문명의 보편 종교를 가리킨다. 신교는 신으로써 가르침을 설했다[以神設敎]’,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以神施敎]’ 등에서 나온 용어이다. 조선 후기의 역사가 이종휘李種徽(1731~1797)?동사東史? 「신사지神事志에서 환웅천황 시절에는 신시 시대에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神市之世, 以神設敎]”라고 하였다. 또한 공자는 ?주역? 관괘觀卦 단전에서 성군들이 신도로써 교화를 베풀었다[以神道設敎].”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은 삼신三神을 가리킨다. ?규원사화? 「태시기太始記에는 以神設敎에 해당하는 원문이 신시씨神市氏(환웅천황을 가리킨다-인용자주)가 임금이 되어 신으로서 가르침을 베풀었다이며, 같은 책 단군기역시 신시씨는 진실로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서 우리나라는 신인神人이 교화를 베푼 것이 오래 전부터 풍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단군세기?이신시교以神施敎의 본래 문장은 그러므로 환웅천황께서 펼치신 신시 개천의 도는 신도(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이며, 모두 주어가 환웅천황으로서 이신설교한 내용을 가리킨다. 원동중이 편찬한 ?삼성기?에는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이를 근심하던 차에 환웅께서 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고[以三神設敎]”라고 하였으며, 조선 초기의 문신 이맥李陌(1455~1528)?태백일사?에서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이를 근심하던 차에 환웅께서 삼신의 도로써 가르침을 베풀고[以三神設敎]”, “옛적에 환웅천황께서 천하가 광대하여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천황께서 삼신(상제님)의 도로써 가르침을 세우고[以三神立敎]”라고 하였다. 앞의 이신설교와 같은 내용을 이삼신설교로 표기한 것이다. , 신은 삼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천상 세계에 문득삼신이 계셨으니 곧 한 분 상제[三神卽一上帝]이다. 주체는 일신이니,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다.

 

일신一神이지만, 각기 따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으로 보면 삼신이다. 삼신은 세 분의 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동일한 한 신이 만물의 변하작용을 세 가지 신성으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 본성을 조화造化·교화敎化·치화治化라고 한다. 삼신은 조화신으로서 만물로 하여금 성품을 트이게 하고, 교화신으로 목숨을 열고 천명을 알게 하며, 치화신으로서 정기를 보존하여 스스로를 다스리게 한다. 이렇듯 삼신은 세 가지 신성으로 우주 만물의 생명을 주관하는 한 조물자 하나님을 표현한다. ?태백일사?에 의하면 일신 즉 삼신이요 삼신 즉 일신[卽一卽三]이 되는 창조 원리(삼신일체 신관과 우주 생명관)”이다. 삼신은 곧 만물이 생겨나고 자라고 성숙되는 삶의 전 과정을 이끄는 우주의 근본 힘이다. 세 가지 신성으로 우주 만물의 생명을 주관하는 한 조물자 하나님을 표현한다. ··치의 신성은 삼신이 우주 만물을 다스림에서 작용하는 혹은 자신을 드러내는 세 가지 방식에 속한 것이다. 이른바 일즉삼 삼즉일一卽三三卽一의 논리로 하나 속에 셋이, 셋 속에 하나가 전제돼 있다는 것이다. 로 모으면 하나고 용으로 펴면 셋이다. 삼일三一은 그 체이고 일삼一三은 그 용이다. 삼신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삼신에서 생겨나고 삼신이 바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조상[一源之祖]이다.

 

태시에 하늘과 땅이 문득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은 곧 일신一神이요 우주의 조화성신造化聖神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도전? 1:1:1-5)

 

환웅천황이 삼신의 가르침 즉, 신교로서 백성들을 가르쳤다고 하였을 때, 삼신은 인격신으로서 발현된다. 삼신은 곧 일신이며, 그 일신은 삼신상제, 삼신하느님, 상제이다. 삼신오제본기(?태백일사?)에 의히면 삼신상제는 조화로 만물을 빚어내고,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지만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가장 높고 높은 하늘에 앉아계시고, 그곳은 천만억토이다. 이 삼신상제는 우주의 주재자이며 통치자로서 하느님이다.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 제사 문화의 본고향이니라.(1:1:6)

 

동방의 한국은 신교의 종주국이다. 우리나라가 상고시대에 신교의 나라였다는 기록과 선행연구는 많이 축적되었다. 황경선 박사는 신교는 먼 옛날 환국, 배달, 고조선의 삼성조 시대 이래 한민족 삶의 중심이 되어온 생활문화를 일컫는다.”고 지적하면서 김교헌의 ?신단민사? 중에, “먼 옛날에 정치가 종교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미풍양속이 신교에 대한 일밖에 없었다. 신단민족神檀民族은 신교문화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신교는 우리 겨레의 삶을 규제하는 이념이나 원리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삶의 다양한 양태의 총체이며 종교, 정치, 예술, 사상이 갈라지기 이전 그것들을 포함하는 원형문화였다는 것이다. 도광순은 신교는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특한 민족적 종교요, 사상이요 문화형태였다고 지적하였다.

신교는 우리 민족만의 종교로서 한정되지 않는다. 신교는 이후에 성립된 모든 종교의 뿌리가 된다. 일찍이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은 저 유명한 난랑비서문鸞郞碑序에서 신교는 유불도 삼교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삼국사기? 4신라본기진흥왕 37년조의 기록이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풍류도는 신교를 가리킨다. 풍류의 ᄇᆞᆰ을 이두 문자로 표기한 것이고 밝음은 신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풍류는 신교의 이음동이의에 해당한다. 또한 삼교포함에서 포함包含은 단순히 밖으로부터 휩쓸어 싸다는 의미의 포함包涵이 아니라 본래부터 함께 그 속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최치원은 풍류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고유한 도인 신교의 실재를 증언한데 이어, 그 안에 애초에 유··선 삼교의 종지가 심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 자하선인紫霞仙人 이고李橰(1351~ ? )와 그의 제자 팔공진인八空眞人 류성성柳成性(1308~)이 강론한 내용을 정리한 ?신교총화?에서 신교는 뭇 종교의 근원이며 어머니 되는 뿌리 진리이다.”고 하였다.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 한족과 일본에 의한 상고 역사의 왜곡으로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 상제님께서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도로써 인류 역사의 뿌리를 바로잡고 병든 천지를 개벽하여 인간과 신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으로 강세하시니라. (1:1:7-8)

 

본래 유···기독교[西仙]는 모두 신교에 연원을 두고 각기 지역과 문명에 따라 그 갈래가 뉘었더니 이제 성숙과 통일의 가을시대를 맞아 상제님께서 간방 땅 조선에 강세하시매 이로써 일찍이 이들 성자들이 전한 천주 강세의 복음이 이루어지니라.(1:6:1-3)

 

신교의 맥은 종주국인 동방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19세기 말 조선을 비롯한 동양 각국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폭압에 굴복당해 갈 무렵, 신교 또한 권위를 잃고 그 명맥이 희미해졌다. ?도전?에는 바로 이때, “하늘에서 동방의 이 땅에 이름 없는 한 구도자를 불러 세워 신교의 도맥을 계승하게 하고 후천개벽으로 새 세상이 열릴 것을 선언토록 하였다.”(1:8:4) 그가 곧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였다.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와 인문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2:30:14-17)

 

이 경우, 심도 있는 종교적 읽기가 요구된다. ?도전?에 의하면 최제우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리고, 다시 거두어들인 것은 천상의 상제였다. 고종 8년 신미(1871), 상제가 직접 지상에 인간으로 강세하였다. 바로 증산 상제이다. 190177, 증산 상제는 전주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무상의 대도로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열었다. 그리고 증산 상제는 나는 옥황상제니라.”(2:11:12) 하고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옥황상제는 신교에서 삼신상제, 삼신하느님, 상제로 지칭되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다. 본고에서 증산 상제가 신교의 정점이라고 지적하는 이유이다.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강세한 8년 뒤인 1880년 음력 326, 증산 상제의 도의 반려자 고수부가 탄강하였다. 그리고 10년 뒤인 1911920일 아침에 고수부가 성령을 받고 대도통을 한 순간, 혼절했다가 깨어나 일어난 고수부가 갑자기 증산 상제의 음성으로 후천 오만년 종통맥과 추수할 사람공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생애 편에서 검토한 바와 같다. 고수부가 증산 상제의 음성으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증산 상제를 대신하여, 증산 상제의 이름으로 공사를 행한, 고수부 역시 신교의 한 정점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증산 상제와 고수부는 신교의 정점으로서 근대적 출현이다.

2. 고수부 사상의 뿌리, 신도사상

 

고수부의 신도사상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편의상 증산 상제의 그것을 논의하는 것이 편리한 방법일 수 있다. 증산 상제와 고수부는 음양관계로서 도의 반려자이기 때문이다. ?도전?은 증산 상제가 대도통을 한 그 순간을 천지대신문을 열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대부터 삼계대권을 주재하고 우주의 조화권능을 뜻대로 행하였다고 하였다(2:11:4). 천지대신문이 무엇인가? 왜 천지대신문을 열었는가? 삼계대권은 무엇인가? 먼저 천지대신문을 열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천지의 신도의 큰 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삼계는 하늘[]과 땅[]과 인간[] 세계를 가리킨다. ‘삼재三才라고도 한다. 여기서 하늘은 신명세계를 일컫는데 신도神道라고 한다. 즉 신명세계는 천지조화의 주재 위격이 되며 신도를 통칭 하늘[]이라 한다. 따라서 삼계대권이란 천도와 지리와 인사를 상제가 임의대로 집행할 수 있는 대권능을 가리킨다. 증산 상제는 신도로 삼계를 주재, 통치한다. 그리고 고수부는 증산 상제의 도의 반려자로서 권한을 갖게 된다.

증산 상제와 고수부는 하늘사람을 보통 이나 신명이라 하였고 때로는 귀신은 천리의 지극함이니, 공사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귀신과 더불어 판단한다고 하여 귀신이란 말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4:67). 신은 천리의 지극하고 오묘한 인격 화현체이자 생명체[道體]이다. 그러므로 신은 천지의 창조 변화 운동 원리인 우주 생명의 신비스러운 창조 법도[三極之理]를 스스로 지니고 있으며, 천지와 만물을 창조한 주인(성신)으로서 우주를 운행시키는 생명의 근본 주체가 된다.

증산 상제가 삼계대권을 주재할 때, 혹은 고수부가 증산 상제의 성령을 받아 삼계대권을 주재할 때는 그때그때 다수의 신 또는 신명이 상제의 명을 집행하여 현실적인 자연의 변화와 지상의 인사(인간 역사의 운로)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므로 신교의 신관은 증산 상제와 고수부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 다신관一元的多神觀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신이 개입해야 증산 상제와 고수부의 행위(천지공사)가 가능하다. 아니, 증산 상제와 고수부의 행위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 자체에 신이 개입한다. 심지어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모두 신명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모든 인사에는 신이 개입한다. 신의 작용이 있어야 일이 이루어진다. 증산도에서는 이를 이신사理神事의 원리라고 한다. 증산 상제는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신도로써 다스리면 현묘불측玄妙不測한 공을 거두나니 이것이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4:5)라고 하였다. 천상의 신도를 주재하여 하늘사람들을 뜻대로 부리고, 또한 호출하여 기적을 행하게 하는 것은 삼계 우주의 통치자인 증산 상제와 그의 도의 반려자인 고수부만이 가진 절대 조화 권능이다.

 

태모님께서는 천지의 신도를 받으시어 신의 조화와 권능을 다 쓰시는 생명의 어머니시니 공사를 행하실 때는 바람과 이슬과 서리와 눈과 우레와 비를 일으키시고 혹은 일월성신日月星辰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나게 하시며 천지조화를 뜻대로 쓰시니라. 가뭄이 심할 때는 청수로 비를 풍족케 하시어 기아를 면하게 하시고 창생들의 화액禍厄을 끄르실 때는 상제님께 몇 마디 말씀을 아뢰거나 혹은 치성을 드리시며 병고에는 손으로 환부를 어루만지시고 마를 다스려 완쾌되게 하시니라.(11:81:1-6)

 

고수부는 천지의 신도를 받으시어 신의 조화와 권능을 다 쓰시는 생명의 어머니이다. 물론 고수부의 천지공사는 신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수부는 신도로써 천지공사를 행하자니 노고스러울 때가 많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11:267:2). 본고는 신도야말로 고수부를 이루는 바탕이라고 지적하였다. 신도는 고수부의 알파와 오메가the Alpha and the Omega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수부의 동정어묵動靜語默이 모두 신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고수부는 신도로 경계하여 사람을 가르친다고 밝혀 주었다(11:1:2).

 

. 고수부의 해원사상

 

증산 상제와 같이 고수부의 근본이념은 원시반본과 보은·해원·상생이다. 고수부는 신도를 바탕으로 원시반본의 정신에 따라 보은·해원·상생의 이념으로서 천지공사를 행한다. 이를 본고의 주제에 맞게 표현하면 고수부의 신도사상은 천지공사 사상의 바탕이 된다. 천지공사 사상뿐만이 아니다. 고수부의 개벽사상, 선도사상 등 모든 사상의 바탕이 신도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고수부의 각 사상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의할 여유가 없다. 다른 기회로 보류하고 신도사상을 뿌리고 하여 고수부 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사상 하나를 개략적으로 검토한 뒤에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그것은 고수부의 해원사상이다.

 

상제님께서 선천 억음존양의 건곤을 바로잡아 음양동덕陰陽同德의 후천세계를 개벽하시니라. 수부는 선천 세상에 맺히고 쌓인 여자의 원과 한을 풀어 정음정양의 새 천지를 여시기 위해 세우신 뭇 여성의 머리요 인간과 신명의 어머니시니라.(6:2:1-6)

 

해원사상이 고수부의 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수부이기 때문이다. 수부가 무엇인가? 상제가 선천 억음존양의 건곤을 바로잡아 음양동덕의 후천세계를 개벽하는 우주 주재자라고 할 때, 고수부에게는 선천 억음존양의 건곤을 바로잡아 음양동덕의 후천세계를 개벽하는 우주 주재의 절반의 사명이 있다. 수부는 선천 세상에 맺히고 쌓인 여자의 원과 한을 풀어 정음정양의 새 천지를 열기 위해 세운 뭇 여성의 머리이다. 그리고 수부는 인간과 신명의 어머니이다.

해원과 관련하여 고수부에게 네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인간으로 온 고수부 자신의 해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위에서 지적하였다. 둘째는 뭇 여성의 머리로서 여성해원이다. 셋째는 인간과 신명의 어머니’, ‘천하창생의 어머니로서 인류 원한의 해원이다. 물론 여성해원은 인류의 원한 해원에 포함된다. 그럼에도 별도로 논의하는 것은 유사 이래 맺힌 여성의 원한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신명의 해원이다.

먼저 고수부 개인으로서의 해원의 실천적 삶을 보자. 고수부는 자신의 삶에서 참으로 많은 한과 원의 삶을 살았다. 고수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체험했다. 여섯 살 때 가장인 아버지를 잃고 늦가을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떠도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열다섯 어린 나이에 조혼하였고, 또 남편과 사별하여 청춘과부의 삶을 체험기도 하였다. 한 여성으로서 그 엄혹한 시대의 삶을 살면서 한과 원이 쌓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고수부 자체는 그런 원과 한을 해원하는 실천적 전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수부의 천하창생의 어머니로서 온 인류의 해원 문제. ?도전?과 증산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수부가 인간으로 온 시기는 우주 시간대로 선천 말대이다. 우주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간대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여유는 없으나 후천 가을개벽에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말해 주듯이 온 인류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거나 열매가 되는 두 가지 기로에 처해 있는 때이다.

 

상제님께서 하루는 세간에 전해 오는 백조일손百祖一孫이라는 말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면서 열매를 맺는 법이니라. 그러므로 이 때는 생사판단을 하는 때니라.” 하시니라.(2:44:1-3)

 

증산 상제는 백조일손이라는 전해오는 말을 가지고 공사를 보았다. 백조일손이란 문자 그대로 백 명의 조상 가운데 단 한 명의 후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겠다. 증산 상제는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공사를 보았다.

 

대저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편할지라. 오는 일을 아는 자는 창생의 일을 생각할 때에 비통을 이기지 못하리로다. 이제 천하창생이 진멸盡滅의 경계에 박도하였는데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이끗에만 몰두하니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오. 장차 십 리 길에 사람 하나 볼 듯 말 듯한 때가 오느니라. 지기至氣가 돌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콩나물처럼 쓰러지리니 때가 되어 괴병이 온 천하를 휩쓸면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눈만 스르르 감고 넘어가느니라. 그 때가 되면 시렁 위에 있는 약 내려 먹을 틈도 없느니라.(2:4)

 

천하창생이 진멸의 경계에 이른 후천개벽을 앞두고 억조창생의 어머니의 실천적 삶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자식들인 천하 창생을 살리는 일이이다. 고수부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난의 삶을 살았다. 고수부는 곤도坤道를 바탕으로 10년 천지공사를 행하여 상생의 도로써 지난 선천 세상의 원한과 악척이 맺힌 신명을 해원하고 만백성을 조화하여 후천 오만년 지상 선경의 성스런 운로를 밝게 열어 준 인물이다(11:76). 한 개인이든 인류라는 역사적 축적물이든 원과 한을 그대로 두고 살아갈 수는 없다. 해원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의 역사는 해원은커녕 원한을 키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증산 상제가 진단하는 그 결과는 참담하다.

 

선천은 상극의 운이라 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하늘과 땅에 전란이 그칠 새 없었나니 그리하여 천하를 원한으로 가득 채우므로 이제 이 상극의 운을 끝맺으려 하매 큰 화액禍厄이 함께 일어나서 인간 세상이 멸망당하게 되었느니라. 상극의 원한이 폭발하면 우주가 무너져 내리느니라.(2:17:1-5)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증산 상제는 이에 천지신명이 이를 근심하고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고자 하였으되 아무 방책이 없으므로 구천에 있는 나에게 호소하여 오매 내가 이를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내가 큰 화를 작은 화로써 막아 다스리고 조화선경造化仙境을 열려 하노라.”(2:17:6-8)고 하였다. 이 말씀은 고수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증산 상제는 이 때는 해원시대라.”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이제 앞으로 모든 참혹한 일이 생겨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을 끄르고 상생의 도로써 조화도장造化道場을 열어 만고에 없는 선경세계를 세우고자 하노라.”(:2:24:1-3)고 하였다. 모든 종교는 이상향을 제시한다. 고수부 역시 종교적 이상을 제시하였다. 후천 조화선경이 그것이다. 고수부는 천하 창생을 모두 해원시켜 후천 선경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목표를 제시하였고, 이에 따른 실천적 삶을 살았던 온 인류의 어머니이다. 해원은 보은·상생과 함께 후천 선경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안전한, 빠른 지름길이다. 그러나 선천에 쌓이고 쌓인 원한을 그대로 갖고 후천으로 갈 수는 없다. 반드시 해원을 통해 가야 한다.

고수부가 인간으로 온 시기는 상극의 운이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선천 말대이다. 원한이 천하를 가득 채워 인간 세상이 멸망하게 되었다. 이 상극의 원한이 폭발하면 우주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다. 고수부는 천하 창생의 어머니인 수부로서 이 원한을 풀어내는 일에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것이 곧 수부사명 중의 하나였다. 물론 고수부도 자신의 사명 중의 하나가 해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계유(1933)624일 증산 상제의 어천치성을 올린 후 고수부는 성도 수십 명을 벌여 앉히고 박종오 성도에게 지필을 들이라.”고 자신이 이르는 대로 받아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舊天地 相剋 大寃大恨 新天地 相生 大慈大悲이라고 쓰게 하고, 다시 성도들로 하여금 뒤를 따르게 하시어 왼쪽으로 열다섯 번을 돌며 구천지 상극 대원대한이라 읽히고 오른쪽으로 열다섯 번 돌며 신천지 상생 대자대비라 읽힌 다음 이어 서신사명西神司命 수부사명首婦司命이라 열여섯 번을 읽혔다(11:335). 고수부가 얼마니 깊이 천하창생의 원과 한을 풀어내는 일해원에 목말라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공사의 한 장면이다.

 

. 고수부의 진법사상

 

1. 난번과 진법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설득력 있는 이유다. 동양의 운명학인 명리학은 오행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오행의 관계 속에서 그 인간의 운수가, 길흉화복이 결정된다. 한 인간의 운명이 그러할진대, 인간들이 모인 사회 역시 관계성을 벗어날 수가 없다. 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사회는 일정한 규칙 즉 법이 필요하였다. 인간사회가 조직사회이고, 또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며, 그 본성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규제의 법이 필요하였다.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정일치 시대의 법은 종교적 신앙이 바탕이 되었다. 그때의 신앙의 대상은 자연의 법 그 자체였다. 하늘에 제사 지내고 땅의 고마움을 받들었다. 인류역사가 발달하면서 제정이 분리되었다. 국가는 힘에 의한 다스림이 필요하였다. 이때부터 인위의 법이 만들어졌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사전적 의미는 다양하다. 법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국가 및 공공기관에서 제정한 강제적인 모든 규범을 일컫는다. 이 경우에 법은 어떤 사회에 있어서 일정의 강제력을 갖춘 행위규범이다. 모든 행위는 법에 비추어 타당한지(합법) 타당하지 않는지(불법)로 구별된다. 법은 규칙의 일종이다. 따라서 법은 위반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위협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법은 권력자()의 명령이라는 형태로 전화되었다. 그리고 법전法典으로서 기록되었다. 법을 의도적으로 변경하고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형태를 빌어 종교법이라는 주목할 만한 형태가 나타났다. 유대교, 이슬람교는 신의 명령이라는 형태로 사회생활에 관한 행위규범을 상세하게 구성한다. 법의 준수는 신에 대한 의무로서 의미된다. 유대법, 이슬람법은 경전(토라, 코란)의 정통적인 해석의 조직적이고 광대한 체계를 구축하였다. 증산도에서 법이란 무엇인가? 안경전 증산도 종도사는 ?관통 증산도?에서 법에 대해 증산도의 입장에서 법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법이란 증산 상제의 진리를 보고, 체험하고, 깨닫고, 실천하는 일체의 구도행위와 신앙의 정신자세와 신앙의 목적, 방법과 도리를 말한다. 나아가 증산 상제가 말하는 법의 정신은 천지공사의 개벽정신의 법으로서, 우주 통치자의 위치에 위치한 증산 상제의 통치정신과 역사정신을 일체로 하여 새 시대를 열어가는 창조정신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인간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서 큰 병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일을 풀어놓아 각기 자유행동에 맡기어 먼저 난법亂法을 지은 뒤에 진법眞法을 내리니 오직 모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라. 거짓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니라. (4:32:1-4)

 

도운 공사의 관점에서 증산 상제는 먼저 난법을 지은 뒤에 진법을 질정해 놓았다. 본고의 진법에 대한 논의방법도 이 공사정신에 의지한다. 난법이란 무엇인가? 난법에는 크게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먼저 증산 상제의 진리를 오도하고 왜곡시키는 그릇된 가르침과 구도의 행위를 하는 법이다. 이 경우 난법은 문자 그대로 어지러운 법이라는 뜻이다. 증산 상제의 진리를 잘못 보고, 잘못 행하고, 잘못 전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과 거짓 점이 있는, 해답이 없는 법이 바로 난법이다. 도리에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법인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인간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서 큰 병을 이루므로그 병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증산 상제가 공사 차원에서 예정해 놓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뒤에서 다시 논의한다). 이 경우 난법은 증산 상제의 대도로 광구천하를 실현해 나가는 과도기 과정에서 진법을 드러내기까지 나타나는 도법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용어이다. 난법은 그 시대 역사의 제반 상황이 낳은 시대적 산물로서 참법의 씨앗과 더불어 커 나가면서 일면 새 시대를 맞기 위한 그 나름대로의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의 난법은 진법이 나오기 위한 고통스러운 성장과정인 것이다.

난법은 증산 상제의 도의 판 안과 판밖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후술하겠으나 증산 상제의 도운공사에 의해 차경석 성도를 필두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판 안의 난법과 개인 신앙으로 출발했으나 판 안의 난법세력인 증산 상제의 성도들과 연원관계를 맺은 판밖의 난법세력이 있다. 이 경우 역시 난법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난법 판이라고 해서 모두 증산 상제의 가르침을 왜곡하기만 하는, 반드시 제거도어야 하는 악의 집단으로만 볼 수 없다. 난법은 그 시대 역사의 제반 상황이 낳은 시대적 산물이다. 난법은 진법의 씨앗과 더불어 커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긍정적 역할도 하여 왔다. 증산 상제의 대도가 창명하고 진법이 드러나는 과도기의 발전과정에 있는 것이 난법이다. 상제님을 모신 성도들, 또는 판 밖에서 개인 신앙인으로 출발했던 난법 신앙의 개창자들도 대부분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로 한 생애를 바쳐 열심히 신앙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진법이 무엇인가? 대체로 난법과 반대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진법은 참법이며 정법이다. 증산 상제가 대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어 가을 대개벽기에 세계를 구원하고 지구촌 문화를 통일하는 도법이다. 이는 인류 문화를 개벽할 수 있는 고도의 능력과 실천의지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다. 진법 사상과 관련하여 고수부(의 사상)은 몇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세 가지 관점으로 접근한다. 첫째는 정음정양으로서 진법이다. 둘째, 천지공사로서 정해진 진법이다. 셋째, 증산 상제의 대도의 정통 맥으로서 진법이다. 이밖에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본고는 편의상 이와 같은 관점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2. 정음정양 진법과 고수부

 

진법 태동은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이 땅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증산 상제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먼저 최수운에게 진법을 열게 하였으나 유교의 한계 때문에 실패하였으므로 직접 진법을 열기 위해 인간으로 왔다는 밝힘은 앞에서 검토하였다(2:30:14-17). 다른 장소에서 증산 상제는 만법이 머무는 법이 없으며 증산 상제 자신이 낸 법이 진법이라고 하였다(2:132:6). 그런데 진법을 펴기 위해 증산 상제는 홀로 인간으로 온 것은 아니다. 아무리 우주의 주재자라고 해도 단독으로 올 수는 없다. 증산 상제가 수부를 맞아들인 것은 정음정양 도수를 인사로 성취케 하시기 위한 것이다. 증산 상제와 수부는 천지의 부모이다. 온 인류의 생명의 부모이다. 증산 상제는 천지의 아버지이고 수부는 천지의 어머니이다. 증산 상제가 인류의 생명의 아버지이고 수부는 인류의 생명의 어머니이다. 증산 상제는 후천 정음정양 도수를 여는 첫 공사로서 인륜의 음양질서를 바로잡는 공사를 집행하기도 하였다(5:195).

증산 상제는 선천은 억음존양의 세상이라고 진단하였다(2:52:1). 증산 상제는 여러 차례 정음정양 공사를 행하였다. “예전에는 억음존양이 되면서도 항언에 음양이라 하여 양보다 음을 먼저 이르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오. 이 뒤로는 음양그대로 사실을 바로 꾸미리라.”(2:52:4-5), “남녀동권 시대가 되게 하리라.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 구별 없이 쓰리라. 앞 세상에는 남녀가 모두 대장부大丈夫, 대장부大丈婦이니라.”(2:53:2-6) . 억음존양의 시대였던 선천은 자연의 인식이 천도(양도) 편중이었다. 땅보다 하늘을 높이고 인간보다 신을, 여자보다 남성을 더 높이 받들었다. 물론 증산 상제는 단순히 공사 재료로서 정음정양 공사를 행한 것은 아니었다. 정음정양이란 하나의 이치다. 진리다. 그 누구도 이 이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주의 주재자인 증산 상제도 예외일 수 없다.

정음정양의 이치에서 벗어나면 난법이다. 따라서 증산 상제에게 수부가 있어야 다는 것은 하나의 이치다. 증산 상제가 독음독양이면 화육이 행해지지 않나니 후천은 곤도의 세상으로 음양동덕의 운”(2:83:5)이라 하였고, 또한 내 일은 수부가 들어야 되는 일”(6:34:2)이라고 천명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검토하였다. ?도전?에서 증산 상제는 몇 차례에 걸쳐 독음독양을 경계하는 말씀을 남겼다. 그것도 대부분 수부가 없으면 증산 상제가 행하는 천지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의 표출이다. 때로는 직접적인 언설로써 내 일은 수부가 들어야 되는 일”(6:34:2), “천지공사에 수부가 있어야 순서대로 진행할 터인데 수부가 없으므로 도중에 지체되는 공사가 많으니라.”(6:34:3)고 토로하였다.

증산 상제에게는 세 명의 수부가 있었다. 첫 번째 수부는 정치순鄭治順(1880~1908) 수부였다. 두 번째 수부는 김말순金末順(1890~1911) 수부였다. 그리고 세 번째 수부가 고수부였다. 이 가운데 수부도수를, 수부사명을 완성하는 인물은 고수부였다. 고수부야말로 진법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위에서 진법 태동이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이 땅에 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때, 진법 태동의 완성은 바로 고수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고수부의 언술에 의하면 증산 상제와 고수부는 인간으로 오기 이전에 이미 반려자였다. 고수부는 자신의 신원에 대해 삼십삼천三十三天 내원궁內院宮의 용화교주龍華敎主 자씨慈氏의 부인慈氏婦人 천지가 정한 위의 수부손님”(11:171:3)이라고 밝혀 주었다. 여기서 용화교주 자씨는 미륵불로서 증산 상제를 가리킨다. 물론 자씨의 부인은 고수부 자신을 가리킨다. 고수부는 다른 장소에서 증산 상제와 함께 인간으로 온 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주었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금산사 미륵전 남쪽 보처불은 삼십삼천 내원궁 법륜보살이니 이 세상에 고씨인 나로 왔느니라. 내가 법륜보살로 있을 때 상제님과 정한 인연으로 후천 오만 년 선경세계를 창건하기로 굳게 서약하고 세상의 운로에 맞춰 이 세상과 억조창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상제님을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왔느니라.” 하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에 오려고 모악산 산신으로 내려와 있던 중에, 상제님께서 오시기에 금산 미륵불로 인도하고 시종하다가 상제님께서 개 구자 아홉 드는 구구지九狗地의 중앙인 시루산 아래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태어나시기로 나는 9년 만에 담양 땅 고씨문高氏門에 태어나서 신씨와 인연타가 상부喪夫를 당한 후에 수부공사로 상제님과 만났을 적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노라. 수부, 잘 만났구나. 만날 사람 만났으니 오죽이나 좋을쏘냐.’ 하셨느니라.” 하시니라.”(?도전? 11:20:1-8)

 

학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 고수부는 미륵불인 증산 상제가 삼십삼천 내원궁에 머물렀을 때 법륜보살로서 모셨고,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왔을 때 미리 모악산 산신으로 와 있다가 증산 상제를 금산사 미륵불로 인도하고 시종하였으며, 증산 상제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태어나므로 고수부 자신은 9년 후에 담양땅 고씨 문중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부공사로 증산 상제와 만났을 적에 증산 상제는 수부, 잘 만났구나. 만날 사람 만났다고 했다는 것이다. 고수부의 이 회고는,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도전? 2:15:6-8)고 자신의 신원을 밝힌 증산 상제의 언술로 뒷받침된다. 결국 증산 상제와 고수부는 만날 사람 만남으로써 정음정양의 진법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수부, 천지공사로서 정해진 진법

 

고수부는 증산 상제가 행한 천지공사로 정해진 진법의 주인공이다. 1907년 증산 상제는 차경석 성도에게 천지에 독음독양은 만사불성이고, “내 일은 수부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참으로 일을 하려거든 수부를 들여세우라.” 명을 내렸던 일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때 경석이 이종사촌 누님인 고수부를 천거햇을 때 증산 상제는 수부감을 지척에 두고 못 정했구나.” 하고, “속히 주선하라.”고 재촉하였다. 경석은 조심스러웠다. 당시 이종누님인 고부인은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된 지 불과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경석이 고부인에게 우리 선생님께서 지금 천지공사를 보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 수부공사라는 것이 있으나 수부가 없으므로 못 보고 계신다 하니 누님이 그 수부공사를 맡아봄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을 꺼냈을 때, 고부인께서 뜻밖에 흔쾌히 승낙하였다. 증산 상제와 고수부의 만남이 공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제님께서 구릿골 약방에서 천지대신문을 여시고 대공사를 행하실 때 성도 아홉 사람을 벌여 앉히신 뒤에 이르시기를 이제 도운을 전하리라.” 하시고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일 년 중에 가장 빨리 자라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시니 모두 대나무입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말씀하시기를 []의 기운이 만물 중에 제일 크니 그 기운을 덜어 쓰리라.” 하시니라. 이어 갑칠甲七에게 푸른 대 하나를 뜻대로 잘라 오라.” 하시어 그 마디 수를 헤아리니 모두 열한 마디이거늘 한 마디를 끊게 하시어 무릎 밑에 넣으시고 남은 열 마디 중 끝의 한 마디를 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한 마디는 두목頭目이라. 왕래와 순회를 마음대로 할 것이요 남은 아홉 마디는 구궁 도수九宮度數로 교받는 자의 수효와 맞는도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도운道運의 개시開始가 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를 이루리라.” 하시니라.(6:106:1-13)

 

?도전?에 의하면 도운의 개창자와 추수자공사이다. 증산 상제는 도판의 운세가 벌어져 나갈 형세를 대나무 열한 마디 공사로써 천지에 질정해 두었다. 이 공사에서 증산 상제는 열한 마디의 대나무를 공사재료로 사용하였다. 이 공사는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증산 상제는 먼저 대나무 한 마디를 끊게 하여 무릎 밑에 넣었다. 둘째, 대나무 남은 열 마디 중 끝의 한 마디는 두목이다. 셋째, 남은 아홉 마디는 교 받는 자이다. 증산 상제와 고수부가 신도사상을 바탕으로 집행한 천지공사를 학문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공사에 대해 안경전 증산도 종도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 공사에서 대나무 열 마디는 상제님 대도의 운로가 후천을 상징하는 10무극無極수로 시작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열 마디는 상제님을 추종하는 초기 교단의 분열 수를 뜻하고, 그 열 마디 가운데 그 끝의 한 마디는 모든 교단의 두목으로서 상제님께 친히 도통을 받으신 수부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이 열 마디와 별도로 무릎 밑에 넣으신 한 마디는 후에 판 안의 난법 도운을 통일하여 진법 도운을 열 진리의 큰 스승이신 대두목(1태극)’을 상징합니다. 이 한 마디를 따로 분리하신 이유는, 대두목이 역사하는 시간대가 나머지 열 마디의 주인공들과 시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공사를 마치면서 증산 상제가 도운의 개시가 초장봉기지세를 이루리라고 하였을 때, 이 공사말씀은 다른 자리에서 나의 일이 장차 초장봉기지세로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 잡화전 본을 이루리라.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진법이 나오게 되리라.”(6:126:3-4)는 공사 내용과 관련이 된다. 증산 상제 어천 후, ‘초장봉기지세로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 잡화전 본을 이루게 될 대나무 아홉 마디는 다름 아닌 판 안의 난법을 상징한다. 역사 속에 이루어지는 판 안, 즉 증산 상제의 성도들에 의해 개창된 교단은 다음과 같다.

증산 상제는 대나무 열한 마디 가운데 남은 열 마디 중 끝의 한 마디를 잡고 이 한 마디는 두목이라. 왕래와 순회를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두목으로 상징되는 고수부는 신해(1911)년 음력 920일에 도통을 받았다. 그리고 증산 상제를 대행하여 성도들을 불러 놓고 정읍 대흥리에서 교단창립을 선언하였다. 중산도의 진법의 씨를 뿌린 것이다. 그 첫 교단을 세상 사람들은 태을교, 선도교 등으로 불렀다. 병진(1916)년으로부터 차경석 성도가 고수부의 교권을 장악한 이후 보천교가 전면에 나오고, 이후 8개의 교단이 독자적으로 생겨났다. 공사말씀 그대로 도운의 개시가 초장봉기지세를 이루었다.

 

증산 상제의 성도들에 의해 개창된 교단

교명

개창자

개창일

비고

선도교

고수부

신해(1911)

일명 태을교

태을교

박공우

갑인(1914)

 

미륵불교

김형렬

을묘(1915)

 

보천교

차경석

기미(1919)

원래 교명, 보화교

증산대도교

안내성

갑인(1914)

임술(1922)년 교명 바꿈

제화교

이치복

 

 

고부파

문공신

 

 

도리원파

김광찬

 

 

김병선교단

김병선

 

 

용화동 통합교단

고수부

신미(1931. 11.)

이상호 동화교단 흡수

 

도운의 개창자와 추수자공사에서 증산 상제가 대나무 열한 마디 가운데 한 마디를 끊어 무릎 밑에 넣어둔 한 마디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안경전 종도사는 이 한 마디를 끊은 것은 단절을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개창의 과정, 원리, 시간, 장소 문제가 다른 열 마디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뜻한다.대두목(1태극)’으로 상징되는 이 한 마디야말로 장차 초장봉기지세로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 잡화전 본을 이룬 뒤에 나오게 될 진법이라는 것이다. 고수부가 씨앗을 뿌린, 곧 이어 논의하게 될 고수부의 진법 맥에 연원이 닿아 있는 진법이다.


4. 진법 도운의 표상, 고수부

 

고수부가 진법 자체를 직접적인 언설로써 토로한 적은 거의 없다. ?도전?에는 고수부가 정읍 대흥리 도장 시절, 성도들이 교단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하겠느냐고 질문했을 때, “천하를 통일하는 도인데 아직은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다시 진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11:29:2)고 한 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산도 진법사상과 관련하여 고수부가 갖는 무게를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법 사상과 관련하여 고수부가 갖는 마지막 하나의 의미는 고수부라는 그 존재 자체로서 증산도 진법의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진법의 근원인 증산 상제로부터 신천지 진법 도운의 종통맥을 전해 받은 인물이 고수부이기 때문이다. ?도전?은 진법이 펼쳐지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상제님께서 선천 억음존양의 건곤을 바로잡아 음양동덕의 후천세계를 개벽하시니라. 이에 수부님께 도통을 전하시어 무극대도를 뿌리내리시고 그 열매를 수화水火(坎離)의 조화 기운을 열어 주는 태극과 황극의 일월용봉도수日月龍鳳度數에 붙이시어 신천지 도정道政의 진법 도운을 여시니라. 상제님의 도권道權 계승의 뿌리는 수부도수에 있나니 수부는 선천 세상에 맺히고 쌓인 여자의 원과 한을 풀어 정음정양의 새 천지를 여시기 위해 세우신 뭇 여성의 머리요 인간과 신명의 어머니시니라.(6:2:1-6)

 

이 내용에 의하면 진법이 전개되는 과정은 증산 상제고수부진법 도운 열림이다. 고수부는 진법도운의 뿌리이다. 증산 상제는 고수부에게 도통을 전하여 무극대도를 뿌리내렸다. 인용문에서는 진법도운의 열매가 열리는 과정에 대해 수화水火(坎離)의 조화 기운’, 태극, 황극, 일월용봉도수日月龍鳳度數 등 심오한 동양 사상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으나(여기서 이 용어들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좀 거칠게 해석하면 고수부를 통해 진법 도운이 열리는 공사를 집행하여 놓았다는 내용이다. 증산 상제의 도권 계승의 뿌리는 수부도수에 있기 때문이다.

증산 상제의 천지대업에는 정음정양 원리로서 도의 반려자인 수부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증산 상제와 고수부가 1907년 동짓달 초사흗날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 30여 명의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부 책봉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증산 상제가 내가 너를 만나려고 15년 동안 정력을 들였나니 이로부터 천지대업을 네게 맡기리라.” 하여 고수부에게 천지대업의 종통대권을 전한공사는 행하였다는 것은 앞의 생애 편에서 검토하였다. 이밖에도 여러 장소에서 증산 상제는 고수부에게 수부 도수와 종통 대권을 전하는 공사를 행하였다. 고수부 자신도 자신이 종통전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루는 태모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통해 평천하를 이루시고 수부 도수로 천하 만민을 살리는 종통대권은 나의 수부, 너희들의 어머니에게 맡긴다.’고 말씀하셨느니라.” 하시니라.(11:345:6-7)

 

이 공사에 의하면 고수부가 종통대권을 전해 받은 것은 수부 도수이다. 도수가 무엇인가? 문자적 의미는 변화의 진전 정도[]의 수이다. 동양 역학사상의 상수象數 원리에 근거하여 일정한 시간의 마디를 가지고 전개되는 천지와 인사의 변화질서를 뜻한다. 수부도수에는 증산 상제의 후계자로서 종통계승과 도통의 연원문제의 열쇠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고수부는 자신의 존재가 갖고 있는 종통 맥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고수부가 대도통을 하던 날, 증산 상제의 음성으로 차경석에게 나는 낙종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 물을 맡으라. 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11:19:6-10)라고 행한 공사에서 추수할 사람’, 또한 셋째 사림도장 용화동을 떠나면서 이상호에게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11:365:3)고 했던 바로 그 일후에 난 사람이야말로 진법을 펼칠 주인공이다. 증산 상제는 내 일은 삼변성도三變成道니라.”(5:366:4)고 하였다. 도운 공사의 전개과정도 마찬가지다. 고수부가 씨앗을 뿌리고[낙종], 차경석이 옮겨 심고[이종], 마침내 추수할 사람이 나와 진법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따라서 고수부는 진법의 뿌리가 된다. 고수부는 증산 상제의 무극대도의 진법의 표상이 된다.

 

. 결론

 

지금까지 고수부와 생애와 사상을 논의하였다. 고수부에대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포괄적, 종합적인 정리가 되는 셈이다. 논자는 이미 같은 주제의 작업을 몇 번에 걸쳐 시도하였다. 굳이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이유는 학계의 무관심 때문이다. 물론 과거의 작업에 수정, 보완하는 의미도 있다. 본론에서 우리는 고수부의 생애를 먼저 검토하였다. 고수부의 행적이 그렇지만, 아무래도 도운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인간은 복합적인 동물이다. 한 인간이 어느 한 가지 사상만으로 고착되어 살아가기는 어렵다. ‘사상이라는 용어 자체가 인간들이 생활하면서 지니게 되는 세계관을 총칭해서 부르는 역동적인 개념이다.총칭이라는 말은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모인 전부를 한데 모아 두루 일컫는 용어이다. 수부가 무엇인가? 증산 상제가 처음 사용한 수부라는 용어에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고수부는 억조창생의 생명의 어머니이다(11:1:1). 만유 생명의 어머니라고도 한다. 고수부는 온 인류의 어머니로 부르도록 공사를 집행하기도 하였다(11:93:1). 또 고수부는 신도와 인도人道의 천지 어머니 공사를 집행하기도 하였다(11:226). 나아가 후천 대개벽을 앞두고 절멸의 위기에 처한 인류의 고통을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대속하는 공사를 행하기도 하였다(11:324). 이와 같이 다양한 정의는 무엇인가? 확장하면 고수부의 생애와 사상은 억조창생의 그것을 포괄한다. 고수부의 수부사명 가운데 하나는 선천에 쌓인 억조창생의 원을 풀어주는 어머니의 그것이다. 어머니는 어느 자식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자식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모정母情이 아니던가. 그러할진대, 고수부의 사상은 여러 가지를 분석할 수 있다.

서두에서 미리 밝혔지만, 본고는 고수부의 모든 사상을 고려하되, 그 기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고수부의 신도사상과 해원사상, 진법사상이 그것이다. 신도사상은 고수부의 모든 사상의 기본이 된다. 본고에서 고수부의 신도사상은 신교사상과 신도사상으로 구분하여 논의하였다. 두 주제는 별도의 장을 두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신교사상에서는 고수부가 우리 고유의 종교사상인 신교의 근대적 출현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신도사상에서는 신도야말로 고수부를 이루는 바탕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신도사상이야말로 고수부 사상의 뿌리임을 밝혔다. 고수부의 신도사상은 고수부의 모든 행위와 사상의 바탕이다.

해원사상은 고수부의 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사상이다. 본고에서는 고수부의 해원사상을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첫째, 인간으로 온 고수부 자신의 해원이다. 둘째, 뭇 여성의 머리로서 여성해원이다. 셋째, 천하창생의 어머니로서 인류 원한의 해원이다. 넷째는 신명의 어머니로서 신명 해원이다. 이 가운데 본고에서는 앞의 세 가지를 논의하였다. 결과적으로 고수부야말로 해원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고수부의 진법사상에 대해 논의하였다. 고수부의 많은 사상 가운데 굳이 진법사상을 논의한 이유는 고수부의 현주소와 함께 고수부가 맥을 이어준 미래 진법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고수부의 진법사상은 세 가지로 구분하여 논의하였다. 첫째, 정음정양 진법과 고수부. 둘째, 천지공사로서 정해진 고수부의 진법, 셋째, 진법 도운의 표상으로서 고수부이다. 세 가지로 구분하였으나 그것은 곧 결론에 다름 아님을 확인하였다.

본론에서도 지적하였으나 고수부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포괄적인 제목을 갖고 출발한 본고에서는 고수부의 많은 사상을 논의하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한정된 지면에 고수부의 사상을 모두 논의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고수부의 사상을 논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기회를 기약한다. 나아가서 학계에서 고수부의 사상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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