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조선조 유학자들의 신선문화에 관한 연구

조민환(성균관대학교)

2023.03.30 | 조회 2458

2021년가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조선조 유학자들의 신선문화에 관한 연구

 

조민환(성균관대학교)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신선 존재 부정과 불로장생 비판

3. 신선처럼 산다는 것의 의미

4. 人境에서의 신선 추구적 삶 지향

5. 仙境不遠人 사유

6.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霞明洞裏初無路 하명동 안에는 애초에 길이 없었는데

春晩山中別有花 늦 봄 산중엔 기이한 꽃들 피었네

偶去眞成搜異境 우연히 갔다가 좋은 기이한 경치를 찾았으니

餘齡還欲寄仙家 늘그막에 돌아가 신선같은 집을 짓고 살리.

 

위 시는 조선조 유학자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이단 배척의식이 강했던 退溪 李滉42세 때 어느 늦은 봄날에 꾼 꿈을 읊은 시[足夢中作]. 이황은 현실에서는 를 중시하면서 철저하게 유가 윤리지향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꿈속에서는 神仙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 이같은 이황의 시는 조선조 유학자들이 마음속으로 품은 신선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사후의 천당을 상정하는 기독교의 생사관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현실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인들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實理에 입각해 天道를 이해하는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불로장생의 신선을 부정한다. 李珥神仙策에 대한 답에서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가 성인 차원의 長生不死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이황의 시에서 보듯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바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유학자들이 천도를 실리 차원에서 이해할 때 역대 신선의 존재 유무는 논란 거리에 해당하지만 중국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神仙傳에는 이른바 신선으로 추앙받는 많은 인물들을 揭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선에 대한 열망은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선전 등에 거론된 인물들의 실질적인 삶을 보면 실제 불로장생 차원의 신선이기보다는 신선이 상징하는 삶을 산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불로장생 차원에서의 신선의 존재 유무를 논하지 않고 말한다면 신선처럼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추앙은 있었는데, 신선처럼 사는 삶은 유학자들이 추구한 은일적 삶과 일정 정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갈홍이 말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 노동하면서 청빈함을 기준으로 한 은일적 삶을 사는 것하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신선처럼 사는 것은 차이가 있다. 유학자들이 신선처럼 사는 것은 추구하는 것은 이미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적당한 때에 그런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연산수공간에서 은일 지향적 삶을 사는 양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이 신선 되는 근본이라고 하는데, 관료지향적 삶을 살면서도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조선조 유학자들이 추구한 신선풍의 삶은 都城 혹은 人境에 살아도 마음먹기에 따라 신선처럼 산다고 여긴 心仙의 경지를 추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신선처럼 사는 삶과 관련된 神仙境陶淵明桃花源記에서 말한 이상형을 실제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 및 공간선택과 관련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고는 이런 점을 조선조 유학자들이 바란 신선경과 추구하고자 한 신선문화에 맞추어 논하고자 한다.

 

2. 신선 존재 부정과 불로장생 비판

 

황현(黃玹, 1855~1910)梅泉集6王素琴壽序에서 신선의 존재 유무 및 유학자들이 추구한 신선의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정리한다.

 

세상에는 과연 신선(神仙)이 있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는 정말 신선이 없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어째서 있다고 하는가? 전기(傳記)에 실려 있는 악전(偓佺)이나 팽조(彭祖) 같은 인물들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신선 역시 사람일 뿐이다. 어찌 옛날에만 있고 지금은 없다면 그래서 없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선의 유무는 어디에서 결정되는가? 그대는 잠시 그 유무를 말하지 말라. 가령 진짜 있다 해도 나는 그게 하잘 것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가? ‘오래 사는 것을 신선이라 하는데, 오래 사는 데에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처자식과 잘 지내고 예전처럼 봉양을 잘 받으며, 예전처럼 친구와 잘 지내면서 내 육신을 지탱하고 내 욕구를 발산하는 데 있다. 그래야 오래 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황현이 신선의 존재 유무에 대해 언급한 간단한 글은 중국철학사에서 논의된 것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것에 해당한다. 황현이 신선의 존재 유무를 잠시 말하지 말라는 것은 그 존재 유무는 유학자들의 관심사가 아닌 점도 있지만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오래사는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신선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그 신선처럼 사는 것의 핵심 중의 하나는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가이다. 이같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벗어나지 않고 관계 지향적인 삶과 욕망 표출을 통한 즐거움을 누리면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것은 도교 차원에서 말하는 홀로[]’ 궁벽진 자연공간에서 불로장생을 추구하면서 사는 신선의 삶과 차별화된 사유에 속한다.

조선조 科擧시험인 策問에서도 신선의 존재 유무와 불로장생과 관련된 논의가 출제된 적이 있다. 이런 점을 李珥신선에 대한 책문[神仙策]’에 대해 행한 답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신선책의 질문 요지를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策問: 불로장생하면서 영구히 천지의 변화를 지켜본 이는 몇사람이나 있는가. 그것을 낱낱이 지적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熊經鳥伸, 喣噓呼吸, 玉醴金漿, 交梨火棗가 과연 蟬蛻羽化의 도리에 보탬이 있는가. 삼청진인의 여덟가지 行仙법을 낱낱이 열거하여 다 셀 수 있겠는가. 정신을 편안히 하고 성품을 기르며 목숨을 연장하는데 어찌 다른 방법이 없겠는가.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음은 주야의 필연적인 것과 같고, 의 당연한 귀결이라 여기서 스스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이이는 책문에 대한 답에서 일단 천지의 이치는 기본적으로 實理라는 입장에서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울러 신선술과 관련된 일체의 것을 부정한다.

 

천지의 이치는 實理일 뿐이다. 사람과 만물의 생성함은 실리에 의하지 않음이 없으니, 실리 이외의 설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깨닫는 군자의 믿을 만한 바가 아니다... 만약 불로장생하면서 영구히 천지의 변화를 실제로 지켜본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정도에 어긋난 서적과 근거가 없는 학설을 모두 다 믿을 수가 있겠는가? 이른바 정호에서 단정이 이루어지고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필시 후세의 迂怪한 선비가 그 邪術을 펼치고자 하여 황제를 칭탁한 것이니, 천하의 이치로 볼 때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實理를 통해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유가가 제시하는 전형적인 신선관이다. 그렇다면 생사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가? 이이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의 聚散과 관련된 논의를 통해 불로장생의 신선 존재를 부정한다.

 

! 낮과 밤은 죽음과 삶의 도리입니다.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삶이란 기가 모인 것이요 그 죽음이란 기가 흩어진 것이다. 자연적으로 모이고 자연적으로 흩어지는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인위적인 힘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態經鳥伸, 呼吸喣噓는 반드시 그런 도리가 없어도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玉醴金漿, 交梨火棗는 반드시 그런 사물이 없어도 죽음을 면할 수 있다. 어찌 선태와 우화의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이는 결국 죽고 사는 것의 문제는 하늘에 달려 있을 뿐이지 인간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는 人命在天 사유를 강조한다. 인위적 차원에서 행하는 도교의 다양한 수련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수명연장이나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기의 취산을 거론하는 것은 莊子가 기의 취산에 의한 生滅을 강조하는 것과 일정 정도 통한다. 차이는 장자는 기의 취산을 통해 우주자연의 변화를 설명하지만 유가는 그런 기의 취산 이외의 의 세계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이는 결론적으로 모든 자연 현상과 변화가 천지의 실리 아닌 것이 없다는 입장에서 유가의 導氣法을 제시하고 도교에서 행하는 양생법을 부정한다.

 

대저 하는 바가 있어 인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이요, 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늘이다...죽고 사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하늘에 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이 거기에 무슨 관여할 바가 있겠는가. 천지가 영원히 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사시가 차례를 바꾸고, 육기가 혼자서만 운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음양이 가지런히 유행하는 것이다. 해가 가면 달이 오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며 왕성함이 있으면 쇠퇴함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은 모두가 천지의 實理 아닌 것이 없다. 하늘에서 기운을 받고 땅에서 형체를 받아 이 이치의 범주 안에 들어 있으면서 理數의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어찌 잘못된 판단이 아니겠는가. 다만 사람의 혈기에는 왕성함이 있고 쇠약함이 있는데, 그것은 保養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형기가 왕성하면 정기가 풍족해지고 정기가 풍족해지면 외부의 질병으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長壽하는 방법이다. 공자는 소년 시절에 여색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 시절엔 싸움을 경계해야 하고, 노년 시절엔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우리 유가의 導氣法이다. 하필 구부리고 우러러보고 굽혔다가 폈다 하기를 팽조같이 하여야만 양생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혈기의 保養과 수양론 차원의 유가 導氣법을 통한 도교 양생법에 대한 비판은 유가가 지향하는 몸건강 철학의 핵심에 해당한다. “하늘에서 기운을 받고 땅에서 형체를 받아 이 이치의 범주 안에 들어 있으면서 理數의 밖으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어찌 잘못된 판단이 아니겠는가라는 발언은 아닌 를 통한 총체적인 세계판단을 제시했한 것은 노장과 구별되는 우주론이다. 결론적으로 이이는 천지만물은 나와 한몸이라는 사유를 제시하면서 유가 차원의 장생불사에 대한 견해를 밝혀 단명과 장수로 그 생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들은 바에 의하면,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 몸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나의 기운이 화평하면 천지의 기운도 화평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제왕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천하를 바르게 하며, 그 마음을 화평하게 하여 조정을 화평하게 하고, 조정을 화평하게 하여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천지는 제자리를 자리잡고 만물은 화육이 된다. 일월은 이것으로 법도를 따라 순행하고, 사시는 이것으로 절후에 따라 순응한다. 음양은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는 제 때에 온다. 천재·시변과 곤충·초목의 재앙은 모두 사라지고 온갖 복된 물건과 상서로운 일들이 모두 이르러서 내 한몸의 덕이 마치 하늘이 만물을 덮어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고 땅이 만물을 싣고 있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고 협찬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게 존재할 것인데, 어찌 단명과 장수로 그 생사를 논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유가 도리의 장생불사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이가 강조하는 유가 차원의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고 천인합일을 통한 장생불사는 도교 신선술이 제시하는 장생불사가 한 개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과 다르다. 이이는 이밖에 醫藥策에서 제시한 신선술과 관련된 답에서도 앞과 동일한 사유를 제시한다. 醫藥策의 질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책문: 신선의 무리는 뼈를 바꾸고 몸을 가볍게 하여 대낮에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는데, 무슨 약을 먹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금단을 정련하고 이슬을 먹는 법은 또한 무슨 학설인가.

 

이이의 이런 질문에 대해 기본적으로 천지간에는 실리가 있다는 점과 일음일양의 이치 및 사계절의 운행을 통해 도교에서 신선되기 위한 핵심인 금단을 정련한다는 사유를 비판한다.

 

: 낮과 밤이란 것이 생사의 이치다.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이니 그 죽음은 약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고 오래 사는 방도라든지, 매미처럼 허물을 벗고 뼈를 바꾸는 방술이 어찌 있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대낮에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사람도 결코 없을 것이요, 영단으로 원기를 되돌린다지만 그런 약도 반드시 없을 것이다. 황금을 단련해서 약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슬을 먹을 수 있겠는가. 천지간에는 실리뿐이다. 이치 밖에 있는 말은 공격할 것없이 저절로 부숴지는 것이다.

 

이이와 유사하게 實理天道를 통해 신선술을 비판하는 것은 尹鑴朱熹齋居感興을 거론하면서 인용한 何文定[何瑭. 1474~1543]의 말에도 나온다.

 

何文定이 이르기를, “나면 죽음이 있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천도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그 천도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신선이 되겠다는 자들은 세상사 다 버리고 구름 짙은 산에 숨어 살면서 죽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괴로운 수련을 쌓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그들의 정체를 살펴보면, 사실 죽기가 무서워 살기를 탐하고 자기 사리를 위해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지 무슨 이치를 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자기 할 일을 하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은 성현들이 천명을 지키는 일이고, 수련을 통해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는 것은 道家에서 살기만을 탐하는 일인 것이다.” 하였다.

 

유가 성인의 立命과 도가에서 신선되기를 통해 偸生하는 것의 차이점의 핵심은 바로 천도의 항상됨을 따르는 이른바 順理적 삶이다. 이이가 신선책의약책등에 대한 답에서 보인 신선술에 대한 비판은 유학자들에게는 공통적인 것에 해당한다.

이밖에 군주의 입장에서 본 신선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확인할 수 있다. 태조실록을 보면 태조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유경(劉敬)學仙한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을 윤허해 달라는 것에 대해 충효의 논리에 입각해 군신관계와 부자관계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한 것이 그것이다. 이런 발언은 마치 유학자들이 老佛을 비판한 것과 유사함이 있는데, 유가윤리 입장에서 본 신선에 대한 대략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

이이가 모든 자연 현상과 변화가 천지의 실리 아닌 것이 없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신선의 존재 유무 및 도교의 장생, 양생과 관련된 것을 부정하는 이같은 견해는 유학자의 신선관의 기본에 속한다. 그런데 이이는 신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선술과 관련된 장생불사 등은 기본적으로 부정하지만 현실에서 신선처럼 사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선과 관련하여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것은 신선처럼 사는 것은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 신선처럼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자.

 

3. 신선처럼 산다는 것의 의미

 

앞서 黃玹이 신선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신선처럼 오래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화두로 제시한 것을 보았다. 황현은 신선처럼 사는 사람의 예를 들어 신선처럼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신선은 바람과 기운을 타고 세상 밖으로 날아가 노닐며, 일체의 인간사를 혹덩이나 쭉정이로 여기면서 전부 다 버리는 존재이다. 그것이 비록 천지보다 뒤에 사라지고 해와 달과 별보다 늦게 시든다 해도 사실은 귀신일 뿐이다. 귀신에게 무엇을 부러워할 게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항용 눈앞의 쾌락을 즐기는 자를 일러 신선이라고 한다. 그 논리가 제법 근사하기는 하나, 그것은 잠깐은 몰라도 오래 지속될 수는 없으며, 그 일이 끝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황현은 지금의 신선이 지향하는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그 핵심으로 일체의 인간사를 가볍게 보고 方外적 삶을 사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 삶을 귀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현실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과 괴리된 삶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황현은 과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신선의 즐거움을 누리고 산 인물인가를 찾고자 하는데, 이런 사유에는 신선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가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고금을 넘나들면서 그런 사람을 찾아보려 하였다. 한말의 두 사람이 있는데, 공문거(孔文擧)가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자리에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동이에 술이 비지 않으면, 내 소원은 그것으로 족하다하였느니, 이것은 하나의 쾌락이다. 또 중장공리(仲長公理=仲長統)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근심은 천상(天上)으로 부치고 걱정은 땅속에 묻었다. ‘六合의 안에서 오직 나는 이 세상에서 내 하고 싶은 대로 한다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쾌락이다. 아아, 이 말들을 극대화시켜 보면 어찌 실로 신선이 아니겠는가.

 

인간관계망을 유지하는 가운데 세상만사 걱정거리 하나 없이 술과 함께 쾌락적인 삶을 극대화하면 결국 신선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은 신선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삶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사는 것이냐 하는 것과 관련된 삶의 지향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方外적 공간이 아닌 六合[天地四方]方內적 공간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깃든 삶을 유지하면서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바로 신선이라는 것이다. 중장공리(仲長公理=仲長統)樂志論에서 말한 부모가 살아계시고 가산이 풍족한 상태의 풍요롭고 안락한 은일적 삶은 전형적인 풍요로운 가운데의 은일적 삶이라는 점에서 후대 청빈한 삶과 연계된 은일적 삶과는 구별된다. 이것은 도교에서 방외적 공간에서 신선이기를 바라는 것과 다른 영역에서의 신선같은 삶을 추구한 것인데, 황현은 이런 점을 현재 상황에 적용하면 素琴이란 인물이 즐긴 삶이 바로 그것이라고 논증한다.

 

내가 형으로 모시는 벗 중에 소금(素琴)이라는 노옹(老翁)이 있다. 그는 신선에 대한 설()을 믿지 않고 세상 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신선이라 생각한다. 태평하고 호탕하며 자잘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다. 소싯적부터 술을 좋아하고 도박을 좋아하고 잠을 즐겼다. 멀리 유람하기를 좋아하고 협객(俠客)의 신의를 좋아하였다. 당세의 큰 책략(策略)을 말하기는 좋아해도 부패한 유자(儒者)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술이 얼큰히 취하면 수염을 휘날리며 말하기를, “남자라면 모름지기 반정원(班定遠=班超)처럼 만리를 평정하여 후()에 봉해질 정도는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나라 현자(賢者)들의 고사(故事)대로, (阮籍이 한 것처럼) 왼쪽에는 300섬의 술을 놓아두고 마시며, 오른쪽에는 100만 전의 판돈을 놓고 저포(樗蒲)를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지금은 이미 늙어 성취할 수 없게 되었어도 그 뜻만은 여전히 꺾이지 않고 당당하다. 그런데 금년 11월 초하루가 바로 그의 61세 생일이다. 그의 조카 장환(章煥)이 나에게 축수하는 글을 청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세상에 신선이 없으면 모르지만, 있다면 자네 숙부일걸세. 쓸데없이 신선에게 무슨 축수를 한단 말인가.”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신선이라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과거 신선의 불로장생 등과 같은 학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도교에서 말하는 연단법이니 양생법이니 하는 것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는 식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도교의 신선이 지향하는 삶은 세속적인 것과의 단절을 의미하는데, 황현이 생각하는 신선의 삶은 다르다. 황현이 素琴의 성격 및 행동거지를 신선과 연관지어 거론한 태평하고 호탕하며 자잘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으로서 소싯적부터 술을 좋아하고 도박을 좋아하고 잠을 즐겼다. 멀리 유람하기를 좋아하고 협객(俠客)의 신의를 좋아하였다라는 것은 敬畏의 마음가짐을 통해 愼獨 차원의 戒愼恐懼를 추구하면서 유가의 예법을 지키고자 하는 선비의 행태와 전혀 관계 없는 일종의 호걸풍 신선에 해당한다. 이런 신선풍은 張維가 만년에 李惟侃의 소유자재하는 삶을 신선처럼 사는 삶으로 보는데, 그같이 소요자재하는 현재적 삶 이전에 누렸던 長壽多福, 풍부한 家産, 고위 官職 역임, 자식이 잘됨 등을 거론한 신선풍과 관련이 있다. 장유가 읊은 이유간의 신선처럼 사는 삶은 모든 유학자들이 바라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해당한다.

황현이나 장유가 제기한 신선처럼 사는 것 혹은 신선 경지는 은일 지향의 담박함이 담긴 신선풍과 차이가 있는 사유로, 유학자들이 신선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에 해당한다. 특히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호걸풍의 신선처럼 산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상의 발언은 청빈함을 기본으로 하는 은일자가 지향한 삶과 더욱 차별화된다. 이제 이런 신선처럼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 신선경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4. 人境에서의 신선 추구적 삶 지향

 

산천은 본래 신선이 사는 곳이다[山川自是神仙窟]”라고 하지만 산천에 산다고 다 신선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 본래 신선굴이라, 신선들이 사는 곳[洞府]은 극히 맑아 인간 세계 아니네라고 읊는데, 어디 금강산이 쉬이 갈 수 있는 곳인가. 그곳에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런 점에서 신선굴은 우리 곁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유가 나타나고, 아울러 蓬萊·方丈만이 신선굴이 아니라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人境에서의 신선처럼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립(崔岦, 1539~1612)은 징영당(澄映堂=高參議)이 남산에 두채의 집을 짓고 사는 정경을 신선처럼 사는 삶이라 기술하고 있는데, 이런 기술에는 궁벽한 자연공간이 아닌 人境에서 추구한 신선처럼 사는 삶의 정황을 잘 말해준다.

 

이 세상에서 이른바 신선(神仙)을 본 사람이 누가 있기야 하겠는가마는 신선이 사는 곳이야말로 그지없이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의 정경을 극구 묘사하는데, 안개와 노을에 잠겨 아스라이 떠 있는 바다 속의 삼신산(三神山)이라든가 궁실이 영롱(玲瓏)하게 솟아 있는 땅 위의 각종 동천(洞天)에 대한 기록을 접하면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일 수도 있으나, 가령 신선이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이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이 이 세상의 진애(塵埃)와 동떨어진 기이하고 수려한 산수(山水)의 어떤 구역을 만나면 그곳을 일컬어 선경(仙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멋진 곳을 차지하고서 혼자 살 만한 그윽한 집을 짓고 종신토록 소요(逍遙)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일컬어 지선(地仙)이라고 한다. 진짜 선경이 어떠한 곳인지 알지도 못하는 판에 선경과 비슷한 곳인지 어떻게 알 것이며, 천선(天仙)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는 판에 그가 지선(地仙)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마는, 가령 신선이 없다고 한다면 몰라도 만약 있다고 한다면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점만은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다.

 

신선이 있다는 전제 조건에서 출발했을 때 가장 의문시 되는 것은 신선이 누리는 즐거움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신선이 누리는 즐거움은 신선이 사는 공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의 진애(塵埃)와 동떨어진 기이하고 수려한 궁벽진 산수(山水) 공간이라고 설정한다. 문제는 그런 산수 공간에 살더라도 어떤 삶을 영위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난점(難點)이 있다. 일천 바위 일만 골짜기 속에 수목(樹木)이 울창하고 샘물이 뿜어 나오는 곳을 은자(隱者)가 얻었다 할지라도, 겨우 머리 하나 덮을 만한 띳집을 짓고 산다면 누대(樓臺)에서 거처할 때와 같은 툭 터진 경지를 어떻게 맛볼 수가 있을 것이며, 문과 창마다 안개와 구름이 서리는 곳에 허공 속으로 우뚝 솟아 수면(水面) 위로 그림자를 던지는 누대를 현달(顯達)한 귀인(貴人)이 세웠다 하더라도, 종신토록 여기에 와서 거처하지 않는다면 멀리 오랫동안 세속을 떠난[長往]’ 높은 흥치(興致)를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두 가지 난점을 모두 극복하고서 두 가지 흥치를 모두 갖춘 분이 실제로 계시니, 징영당(澄映堂) 선생이 바로 그분이시다. 선생의 저택은 도성(都城)의 안에 있으면서도 바로 남산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신선처럼 살고자 할 때의 산수공간이 반드시 인경과 거리가 있는 궁벽진 공간일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같은 산수공간에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신선처럼 사는 것에 해당하는 가이다. 즉 옹색한 공간이 아닌 전망이 툭 터진 경지, 어쩌다 와서 지내는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항상 살지만 세상을 피해사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두가지 여건이 갖추어졌을 신선처럼 살 수 있는 흥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신선 공간이 있더라도 결국 그 공간에서 어떤 삶을 영위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都城 안의 남산이 그런 공간에 해당한다고 진단하는 것은 신선경은 인경과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공간에서 사는 인물이 이전에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알면 유학자들이 신선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일면을 잘 알 수 있다.

 

, 선생은 무려 사십 년 동안이나 조정에서 맑게 봉직(奉職)하였으니 현달(顯達)한 귀인(貴人)이라는 이름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밖으로 반 걸음도 나가지 않아서 그지없이 아름다운 땅을 얻어 은자(隱者)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툭 터진 누대(樓臺)의 전망(展望)을 함께 감상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꼭 멀리 오랫동안 세속을 떠난[長往]’뒤에야 높은 흥취를 느끼게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선생과 같은 분이야말로 세상에서 말하는 지선(地仙)과 같은 분이요, 또 세상에서 말하는 선경(仙境)을 만난 분이 어찌 아니라고 하겠는가. 신선(神仙)의 즐거움을 나는 다행히도 여기에서 보았다고 하겠다.

 

현달한 귀인을 중심으로 하여 신선처럼 사는 삶을 기술한 이런 발언은 청빈함을 근간으로 하는 피세 차원의 長往[=長往而不返]’의 은사의 삶과 차원이 다른 신선의 삶의 삶을 규명한 것에 해당한다. ‘피세 차원의 장왕에 대해 유학자들은 자칫하면 潔身亂倫의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이 지리산의 靑鶴洞을 읊으면서 潔身亂倫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는 仙境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이 담겨 있다. 신선처럼 사는 삶과 관련해 먼저 현달한 귀인으로 산 것을 언급한 것은 조선조 유학자들의 신선처럼 사는 문화를 이해하는 한 관건이 된다. 기본적으로 신선처럼 산다는 것은 방내적 공간에서 관료적 삶을 살고자 했던 삶의 방식을 버린 상황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함부로 관료적 삶을 포기할 수 없고 아울러 장왕할 수 없는 상태에서 기껏해야 曾點浴沂詠歸식의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유학자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都城의 인경에서도 신선처럼 살 수 있는 자연공간을 선택해 그곳에서 탈속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이처럼 인경과 방내 영역에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사유는 특히 神仙窟로 여겨지는 관동지역의 자연정경 및 정자 등과 관련되어 읊어지는 경우가 많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읊은 平海八詠越松亭을 보자.

 

편평한 백사장 십 리는 흰 담요 깔아 놓은 듯 平沙十里鋪白罽

하늘에 닿은 장송은 옥창 끝처럼 가느다랗네 長松攙天玉槊細

쳐다보니 밝은 달은 황금 떡과도 흡사한데 仰看明月黃金餠

맑은 물 같은 푸른 하늘은 가없이 넓구나 碧空如水浩無際

손이 와서 퉁소를 한번 쥐고 불어대니 客來一捻吹洞簫

그 풍류가 모두 신선의 무리들이로다 風流盡是神仙曹

나는 그들을 따라서 요지연에 가려는데 我欲從之讌瑤池

마침 파랑새가 벽도를 물고 날아오누나 飛來靑鳥銜碧桃

 

평해팔영중 월송정 앞에 펼쳐진 자연 정경과 밝은 달이 뜬 밤에 정자 안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는 무리들을 신선의 무리라고 규정하는 것은 방외 차원의 신선 문화와 거리가 있다. 이서(李漵, 1662~?)三日浦를 신선경이라고 한다. 이런 신선경이 있으면 당연히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생각이 날 것이다. 선경이라 일컬어진 관동팔경을 그림으로 그려진 이유 중 하나다.

이밖에 자연산수공간에서 신선경을 찾을 수 없는 경우 자신이 거처하는 공간에서 이른바 마음의 신선[心仙]’을 꿈꾸기도 한다. ‘산과 계곡에 마음과 뜻을 자유스럽게 내팽개치면서 언젠가 숲 아래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을 버린 선비를 만나게 될 때 이 책을 꺼내 가지고 서로 즐겨 읽고자 한 내용을 기록한 許筠閑情錄에서는 이같은 심선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揭載하고 있다.

 

書齋는 그윽한 것이 좋고, 난간은 굽이진 것이 좋고, 수목(樹木)은 성긴 것이 좋고, 담쟁이 덩굴[薜蘿]은 푸르게 드리워진 것이 좋다. 궤석(几席난간·창문은 가을 물처럼 깨끗한 것이 좋다. 좌탑(坐榻) 위에는 연운(煙雲)이 떠 있는 것이 좋다. 묵지(墨池)와 필상(筆牀)에는 수시로 꽃향기가 풍겨져 있는 것이 좋다...독서하는 데 이상과 같은 호지(護持)를 얻는다면 만권(萬卷)의 서책에 모두 다 환희를 느끼게 되어서, 琅嬛仙洞이라도 부러워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無故하면 琴書를 곁에서 놓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독서인으로서 문인사대부들은 서재를 꾸미고 기타 예술적 삶을 향유하는 과정 속에서 신선경 못지 않은 아취와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였다. 이런 점은 독서인으로서 문인사대부들의 지향한 심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유학자들은 신선처럼 살 수 있는 신선경은 굳이 궁벽진 자연산수공간일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신선처럼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여겼고, 그런 삶은 때론 쾌락 추구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결과적으로 선경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仙境不遠人]는 사유로 나타난다.

 

5. 仙境不遠人 사유

 

신선처럼 살고자 한다면 일단 人境을 떠나 窮僻진 산수공간에서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을 모색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산수공간에서 신선처럼 살 수 없는 정황에 처한 유학자라면 주위에 신선의 정경을 느낄 수 있는 정자나 정원을 조성하고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속내를 모색하면 된다. 이처럼 외적 환경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인위적 공간을 조성하여 신선처럼 사는 방식도 있지만 유학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살고 있는 공간이 신선 공간이라 여기는 사유를 강조한다. 이런 사유와 관련하여 먼저 李珥의 신선풍 삶과 관련된 시를 보자.

 

신망군 응시 황목백 경문 정욱과 함께 호연정에 올랐는데, 다시 중추에 달을 구경하자고 약속하였다.

좋은 곳 골라 신비의 경치 열었고

풀 베고 푸른 산꼭대기 개척하였다

하늘과 땅은 사방이 탁 트였고

창과 문은 반공중에 매달렸네

조수 펀펀하니, 물이 바로 하늘일세

삼신삼도 찾을 것이 없다.

여기서 살면 곧 신선이 되거니

한 등성이 좋은 경치 독차지하여

날을 듯한 누국 높은 꼭대기 걸쳐 있네

저멀리 사해를 모두 눌렀고

북두성이 수평으로 바라보인다.

환한 모래는 햇빛에 반짝이고

푸른 봉우리는 아득하게 하늘에 떳다

여기에 바람과 달을 얻는다면

아마도 선경에 사는 신선 되겠지.

 

도교에서는 신선이 사는 공간으로 흔히 蓬萊山·方丈山·瀛州山과 같은 삼신산을 거론한다. 하지만 자신이 사는 공간의 자연 정경이 삼신산과 같은 선경이라고 여기면 굳이 삼신산과 같은 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청풍계동에서

새친구에 옛벗과 동반하여

손을 맞잡고 천진한 놀이 즐기네

비 온 뒤라 온 봉우리 깨끗하고

소나무 사이엔 한 오솔길 그윽하구려

신선 사는 곳 겨우 반나절이건만

속세의 세월로는 정녕 3년이 되겠네

봉래산이 바로 지적에 있는데

무엇하러 바다 밖에서 찾을 것인가

 

이이는 한성 성안의 청풍계동이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인경에서 살면서 그 인경에서 조금만 벗어나 산수공간에 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연 정경이 마련된 상태에서 신선처럼 사는 것은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홍유(李弘有, 1588~1671)는 인간에는 스스로 신선경이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경치 좋은 산수공간에서 嘉遯의 삶을 살면서 세속적인 걱정거리를 다 끊어버리고 책을 읽고 술 한잔 마시면서 사는 것이 바로 신선경이라는 것을 말한다.

신선처럼 산다는 것은 구름낀 산에서 바람과 달을 가슴 가득히 살면서 세상사 공명을 초월하는 삶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삶의 경지는 세속적인 권력·명예·재물 등을 누려본 사람이 말할 때 설득력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면호(趙冕鎬, 1803~1887)는 바쁜 일이 없는 것이 신선경이라고 한다. 이직(李稷, 1362~1431)은 마음이 편안하면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신선의 땅[신선경]’이라고 한다.

 

어찌 하필 천태산에 은거하리오 : 隱居何必天台嶺

마음이 평안하면 그곳이 바로 신선의 땅이지 : 心安卽是神仙境

남은 여생의 경영은 고향 땅에서 늙어 가리라 : 會營菟裘老桑鄕

다행히도 선조가 남겨 준 십 경의 밭뙈기가 있다네 : 幸有先人田十頃

 

최소한의 경제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고향 땅에서 마음 편히 살면 그곳이 바로 신선경이란 이런 사유는 청빈함과 직접 경작을 요구하면서 은일을 추구하는 문화와 차별화된 된다. 이런 정황에서 추구하는 부귀관도 다르다. 구름 낀 산에 머물면 신선이라고 읊는 아래 시어는 세속적인 부귀를 누려본 이후의 경지를 읊은 것이다.

 

장난삼아 성력서에 적다 戲題星曆書

사람들 화복은 별자리에 매여 있다 하지만 : 人言禍福繫星躔

나는 인심에 절로 천명이 있다 말한다오 : 我說人心自有天

바람과 달 가슴에 충만함이 참된 부귀이니 : 風月滿懷眞富貴

구름 낀 산에 머물면 이것이 신선일세 : 雲山住跡是神仙

한가로운 가운데 사업은 천고에 이어지고 : 閑中事業能千古

세상사 공명이야 백년이면 끝나는 것을 : 世上功名祗百年

이런 생각 전해도 누가 믿으려 할까 : 此意欲傳誰信得

책 덮고 미소 지으며 홀로 기뻐하네 : 掩書微笑獨欣然

 

세상사 공명이야 백년이면 끝나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누려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다. 즉 공명을 이루기 위해 바쁜 삶을 살다가 이제는 벗어나 한가로운 가운데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삶은 이미 공명을 누리고 난 이후의 경지다. 따라서 이같은 신선경에서 사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도연명이 飮酒5에서 읊은 心遠 차원에서 신선 풍류를 추구하는 것이다. 李珥가 벼슬자리 사직을 통한 逸趣를 선풍과 연결한 것은 그 하나의 예다.

 

자유롭게 은둔해 사는 정취는 아는 이 누구인가
그대의 신선풍류 내가 본받을 점이라네

가을 하늘 기러기 돌아가는 시절에

신무문에 갓을 걸고 사직했구려

술상 앞에서 헤어짐을 슬퍼하니

꿈속에서도 그리워 산천이 보이리

언제나 밀칠한 나막신을 신고

담쟁이 덩굴 오솔길을 함께 거닐며 즐거워할 것인가.

 

임금이 계신 쪽인 신무문에 갓을 걸고 사직했다는 말은 그동안 관료로 산 삶을 정리한 것을 의미한다. 陶淵明彭澤의 관리를 그만두고 歸去來辭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은일적 삶을 산 적이 있다. 이런 정황에서 관료의 부임지가 神仙窟宅으로 알려진 관동 지역이면 신선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관료적 삶을 그만두고 자유롭게 은둔의 삶에 대한 지향을 신선풍류로 이해하는 것은 유학자들이 추구한 신선처럼 산다는 것의 한 전형에 해당한다. 이밖에 이른바 도연명의 桃花源境을 신선과 연계하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겹쌓인 물과 산에 한 줄기 길이 뚫려 : 水襲山重一路通

도리평 담장 따라 붉은 꽃이 싱그럽네 : 桃坪籬落翳新紅

이웃 마을 사람들과 평소 왕래 없으니 : 不緣鄰社常來往

아마도 이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나 : 應恐神仙住此中

이상 거론한 내용을 보면 유학자들은 불로장생의 신선을 추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신선처럼 사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도리어 嘉遯의 삶과 관련된 신선경에서 신선처럼 사는 것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유학자들은 선경이란 人境과 떨어진 궁벽진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욕과 허정의 마음 상태에서 자신의 주위 환경을 선경으로 여기냐의 여부에 있음을 강조한다. 즉 방내적 공간과 인간관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유학자들은 仙境不遠人의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 일종의 道不遠人사유의 신선적 삶에 대한 적용이다. 아울러 이런 정황은 금강산 등과 같은 산수공간을 여행할 수 있는 경우가 되면 다양한 遊仙風의 시를 통해 나타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6. 나오는 말

 

자연의 변화를 포함한 인간의 생사를 천지의 實理 및 기의 취산으로 이해하는 유학자들에게 신선의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이처럼 理氣論의 입장에서 신선의 존재유무를 결정하는 유학자들에게 이른바 唐代 吳筠(?~778)이 말한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신선이 될 수 있다[神仙可學論]’라는 것과 같은 논의도 없다. 莊子』「讓王에서 몸은 강과 바다 가에 은둔해 있어도 마음은 큰 궁궐의 임금 아래에서 벼슬하는 것에 있다[身在江海之上, 心居乎魏阙之下]”라고 말한 것은 중국 뿐만 아니라 조선조 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莊子』「讓王의 말은 흔히 몸은 산림에 은둔해 있어도 마음은 임금이 있는 궁궐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있다[身在山林而心存魏闕]”는 표현으로도 응용되는데, 이같은 정황에 은일 문화와 관료문화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아울러 신선처럼 사는 문화도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즉 산림과 강호에서 사는 삶에 본고에서 논하고자 한 신선처럼 사는 문화가 개입될 수 있는데, 문제는 산림과 강호에서의 은일 및 신선처럼 살 수 없는 정황이다. 이런 정황에서 유학자들은 방내적 공간에서의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문화를 추구하였다.

유가가 제시한 삼강오륜 및 예법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조선조 유학자들은 도교에서 추구하고자 한 方外적 신선문화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교의 신선관에서 제시하는 장생불사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逸趣 및 탈속을 통해 신선처럼 사는 즐거움을 찾고자 했다. 그런 즐거움은 때론 호걸풍 신선의 쾌락 차원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청빈을 기본으로 하는 은일적 삶과 세속에서 신선처럼 사는 삶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핵심이다. 이에 方外 차원의 궁벽진 자연산수공간이 아닌 方內 차원에서 都城 혹은 人境에서 신선경에 해당하는 자연산수공간을 찾고자 하거나 주변 꾸미는 것을 추구하였고, 때론 仙境不遠人心仙이란 사유를 제기하였다. 이밖에 주자학의 권위가 일정 정도 약화되는 18세기 이후 瑤池宴圖등에 표현된 신선풍은 유학자들이 암암리에 추구하고자 한 삶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선문화에 대한 바람에는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만 관련하여 말해진 것이 아닌 경우도 있다. 간혹 신선처럼 사는 것을 통해 현실의 고통이 멈추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조선조 유학자들의 신선문화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된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정황은 다양한 그림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였다.



청풍계(淸風溪)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종로구 청운동(靑雲洞) 54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楓溪)라 불렀는데 병자호란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한다.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71개(2/8페이지)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