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조선후기에 유행한 신선도(神仙圖)의 전개 양상과 도교적 생명관 1

김정은(성균관대학교)

2023.03.28 | 조회 2633

2021년가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조선후기에 유행한 <神仙圖>의 전개 양상과 도교적 생명관

 

김정은(성균관대학교)

 

목차

1. 서론

2. 조선후기 사회와 <神仙圖>의 유행

3. 조선후기 <神仙圖>의 전개 양상

4. 조선후기 <신선도>의 도교적 생명관

1) 불사약의 주인 서왕모

2) 인간의 이상적 모델 신선

3) 신선의 거주지 낙원에서 자연과 교류

5. 결론

 

 

국문요약

본고는 조선후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중세봉건사회에서 근대로 이행되는 과도기이다. 이시기 신선사상의 불로장생에 의미를 지닌 <신선도>가 사대부와 백성들에게까지 민화 형식으로 확산된 요인을 도교 문화적 맥락에서 생명관을 중심으로 파악해 보았다. 조선 후기에는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이 생기고 북학北學·실학實學사상 등에 의하여 자주적 문화 의식이 성장하면서 진경산수眞景山水의 화풍이 생겨나고 풍속화風俗畵가 그려진다. 그리고 이시기에 도교적 사유가 내재된 <神仙圖>가 유행하였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정신적 외상外傷, 당시풍唐詩風의 유선시遊仙詩로 인한 유토피아적 환상 유포되었다. 그리고 시대적 징후가 벽사辟邪·길상吉祥의 취지를 지닌 세화로 <신선도>가 유행하였고 궁중에서 궁중회화로 그려졌다. 이후 이러한 그림은 사대부와 일반백성들에게 민화의 형식으로 확산되었다. 본고는 이러한 그림의 주류를 이루는 소재들을 중심으로 서왕모 신선 그리고 자연물을 나누어 장수길상의 근거인 도교의 생명의식을 살펴보았다. 첫째, 서왕모는 󰡔산해경󰡕 신화와 전설을 통해 죽음의 신에서 불사의 여신으로 변화되며 아름다운 도교의 최고 여신으로 등극한다. 신화가운데 괴신에서 시작하여 조선후기에는 <신선도> 가운데 <요지연도>의 아름다운 여선으로 의 모습은 인간은 생사의 경로에서 곧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영속되며 죽음을 극복하고 현세에서 영속하기를 바라는 도교의 현세 복락적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신선도>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그 어원에서 새처럼 산을 이리저리 나는 존재로서 표현하고 있다. 새는 동방의 신조로서 토템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신선들의 조력자가 이다. 그리고 󰡔列仙傳󰡕󰡔神仙傳󰡕 등의 설화 신선이 지닌 특징들은 현실에서도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기의 수련을 통하여 불사와 인격을 갖춘 신선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도교의 이러한 생명사유는 원시 도교의 최초의 경전인 󰡔태평경󰡕의 기의 개념을 근거하여 갈홍이 󰡔포박자󰡕을 통히여 양생론을 펼쳤다. 셋째, 신선도에 표현된 자연물의 속성은 원시신화를 통하여 세계관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유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천인합일의 근거가 되며 도교의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을 통하여 천지음양사시(四時)만물의 순서로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천지 자연가운데 태어난 자연과 인간은 기운이 같거나 비슷할 경우 더욱 서로 잘 응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천인상감(天人像感)의 관계성을 맺는다.

그러므로 도교의 생명관은 자연과 인간은 기의 작용에 의해 태어난 존재자로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개체 생명으로서 또한 자연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보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천인합일의 생명관이 내재되어있다.

조선후기 이러한 <신선도>의 유행은 유교사회의 역기능의 결과 생명질서가 균형을 잃게 되어 비롯된 현상이며 생명의 위기에서 인간 본래의 생명의 본향인 자연으로 돌아가 치유하고 싶은 바램이 생명 미의식으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 서론

 

조선후기 성리학적 이념을 기본으로 한 유교국가에서 도교의 교의가 내재된 <신선도>가 유행하였다. <신선도>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위한 불로장생의 이상향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신선의 모습과 신선이 사는 선계를 주로 표현한 그림이다. 이러한 도교적 그림의 유행은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소망해 마지않는 장수와 풍요로운 삶에 대한 보편적 감정이 내재되어있는 것이다. 본래 신선, 도교 사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동북아시아에 넓게 분포해 있는 샤머니즘과 신선사상에서 비롯한다. 고대 문헌인 󰡔산해경󰡕이나 󰡔위지󰡕 「동이전등을 보면, 고대국가의 왕은 족장의 직능을 겸하고 있다. 그리하여 부여의 영고迎鼓·동예의 무천舞天·고구려의 동맹東盟·삼한의 단오제端午祭·상달제上達祭와 같은 제사 의례에는 샤머니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시조 탄생의 천제 강림설이나 치세의 신, 불로장생 및 신화, 승천 등으로 표현되는 신인神人 동화同化의 모습은 신선사상으로써 도교적인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도교는 무속과 민속 그리고 신종교의 밑바탕에 깊은 영향을 드리우고 있으며 유교·불교 속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같이 조선이 유학을 근간으로 세워졌다고 하더라도 도교는 한국문화의 내면이나 잠재의식에 녹아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에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활발하게 재현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예로부터 이 때문에 <신선도>가 조선 후기 이후 활발하게 그려지고 향유된 이유를 고찰하면서 단지 그 시대의 사상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본고는 먼저 유학의 나라에서 조선후기 <신선도>가 유행한 사회적 원인과 배경을 살펴볼 것이며 이 그림들이 주로 궁중에서 제작된 목적과 쓰임새를 살펴본 뒤 전개되고 양상 된 과정을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상을 근거한 장수 길상의 생명사유를 <신선도>의 소재로 구성된 불사약을 지닌 서왕모, 이상적 인간의 모델 신선, 지상의 낙원 자연(동물류, 광물류, 식물류)로 분류하여 도교적 생명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며 일회성으로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오복五福 가운데 그 첫 번째는 수로 여겼다. 현대는 초 과학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는 공기오염과 질병으로 귀중한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생명의 원천인 자연의 소중함과 인간생명의 존귀함을 환기시키는 계기를 기대한다.

 

2. 조선후기 사회와 <神仙圖>의 유행

 

조선시대(1392~1910)는 성리학性理學을 이념으로 한 유교儒敎 국가이다. 또한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근세로 설정되어 중세와 근대의 사이에 위치되어 있다. “시대구분에 있어서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의 양란을 경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하며 15세기를 조선 초기, 16. 17세기를 중기로, 18. 19세기를 후기로 설정하고 있다. 16세기는 인간의 심성을 수양하는 심론心論이 발달하여 수기에 치중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제기되는 수기에 치중하였는데, 17세기에는 실천윤리 사회윤리로서 치인에 비중을 둔 예론이 발달하여 조선후기 성리학은 한층 더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성리학은 학통을 고수하면서 18세기 전반에 진경 문화를 완성하였는데 이 시기는 조선 사회가 중세농경사회에서 근대적 상공업사회로 전환하는 때였다.

조선 후기는 신분제도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노비와 평민은 구분이 모호해지게 되었으며 양천의 구분이 노비 신공을 바치는가 아니면 양역을 부담하는가 하는 차이밖에 없었다. 중앙정부는 1778년에 노비 추쇄법(推刷法)을 폐지하기에 이르렀고 1801년에는 왕실재정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 노비와 중앙 각 기관의 공노비를 해방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양란 후 최대의 과제였던 빈곤의 극복은 중앙정부의 수취체제 개편 등으로 시도되었지만 뚜렷한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그 효율적인 치유책은 민중에 의한 생산기술력의 향상과 유통망의 확대로 제시되었다. 농업과 상업에 있어 관영 경제체제를 민영경제 체제로의 전환하여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과 수공업에 있어서 매뉴팩처의 등장 등은 조선의 경제를 도약의 발판 위에 올려놓은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와 같은 경제적인 발달은 사회적 변화에서 평민 부농층이 생겨나고 상인단의 형성, 산업노동자 계층의 배출은 전근대적인 사회질서를 크게 동요시켰다. 수많은 평민과 노비들이 제도의 혼란을 타고 혹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신분 상승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결국 신분제를 와해시켰다. 이 신분제의 붕괴는 근대사회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뚜렷한 신호였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조선은 구질서를 탈피하여, 자연히 새로운 사회를 지도해 나갈 새로운 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성리학이 권위를 상실하고 새로운 근대지향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실학이 대두하게 된 것은 이 시기 당연한 귀결이었다.

18세기 중반 북학자인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등은 청의 건륭(乾隆) 문화를 목도하여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고자 북학(北學) 운동을 제창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성립은 이런 자주적인 문화 의식뿐만 아니라 실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사회적 기풍을 촉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실학은 자연스럽게 조선 후기 문예 부흥의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비판적 태도를 보였던 실학이 영조(1725~1776)와 정조(1777~1800)를 거쳐 순조(1801-1834) 조에 이르는 동안 성행하였다. 이러한 실학의 대두는 조선 후기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문예 부흥을 일으킨 군주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화원들의 그림을 직접 관리하기도 하였는데 1783(정조 7)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라는 직제職制를 설치하고 도화서圖畫署 화원들을 선발하기도 하였으며 규장각에 소속시키는 등 특별대우를 하였다.이들이 그린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한 장식화는 <일월오봉도>, <모란도>, <십장생도>, <곽분양도>, <요지연도>, <백동자도>, <가도>등이다. 이도상은 장식성이 뛰어나며 왕실의 안위와 번영, 부귀와 장수 등 길상의 의미를 담은 주제이다. 이런 장식화의 일부는 오랜 전통을 지닌 경우도 있고 조선후기와 말기에 정립된 사례도 있다. 이러한 궁중화풍의 장식화는 18세기 후반부터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풍속화는 당대의 서민들의 풍습과 일상생활을 주로 묘사하여 조선후기사회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화가는 궁중화원으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16)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1813)이다. 이 시기에는 궁중을 중심으로 <신선도>가 많이 그려졌는데 신선도는 조선시대 세화의 용도로 사용되어 기념일에 선물하기 위한 축수용 및 궁중 장식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신선도>가 세화의 소재 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 의미가 장수를 상징하는 신선의 의미와 부합하기 때문에 생일선물이나 장식물로 쓰이는 축수화로 그려졌다.

 

3. 조선후기 <神仙圖>의 전개 양상

 

한국에서 신선도는 도교의 교단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고대의 벽화에서 등장한다. 한반도에 남겨진 가장 오래된 장생도는 B. C. 108년 낙랑의 고분들과 평양 채협총 전실 벽 기마 인물도에 표현된 비천 신선神仙과 신수神獸, 신금神禽, 운기문雲氣紋, 산기문山氣紋 등이 채색화들로 신선이나 동식물에 신적인 힘을 가한 장생사상이 내포된 그림이다.<1> <2> <3>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가 되면서 관청과 의례등이 축소되거나 폐지되면서 도화존상화로 그려졌던 신선그림도 자취를 감췄다. 다만 수성은 국가 차원에서 그려져 국가의 평화와 군주의 장수를 상징 한다고 믿어져 국왕의 수성제사에는 왕실의 공식적인 의례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장수를 상징하는 의미상 특성 때문에 세화나 축수화로 일반에까지 애호되었다. 수노인도의 도상적 특징은 작은 키에 벗겨진 머리의 정수리 부분이 길고 앞 이마가 돌출한 모습이며 도복 차림이다. 지팡이나 복숭아, 영지, 호리병 등을 들고 있기도 하고, 사슴이나 학, 거북이, 박쥐, 또는 동자를 대동하기도  한다.


  

<1> 輯安 오회분 4호묘 日中三足烏

<2> 고구려 6세기 전반 5회분 4호묘

<3> <西王母像>, 고구려 龕神塚


단독상 이외에 복성(福星), 녹성(祿星)과 함께 삼성도로 그려지기도 하며, 군선도에 포함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군선도의 경우 팔선경수도(八仙慶壽圖)는 수노인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고, 요지연도(瑤池宴圖)는 참석자로 그려졌다.<4> 



<4> <瑤池宴圖> 壽星老人 부분,

絹本彩色, 134.2cm47.2cm,

19세기, 경기도 박물관

<5> 張承業, <秋南極老人圖>, 紙本淡彩, 641.1cm134.7cm, 19세기, 간송미술관

<6> 張承業, <春南極老人圖>, 紙本淡彩, 641.1cm134.7cm, 19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때 규장각 소속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하였던 장승업은 국왕의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그림을 진상했는데, 이는 봄을 상징한 춘남극노인(春南極老人)과 가을을 상징한 추남극노인(秋南極老人)이란 작품으로 두 첩의 대련(對聯)에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졌다. <5> <6> 여기에 등장하는 남극노인은 수성노인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도교의 신선이자 별자리이다. 이 별이 나타나면 국가가 편안해지고 또한 왕의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는데 반면 보이지 않게 될 때는 전란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로 추분(秋分) 새벽과 춘분(春分) 저녁에 사람들은 남교(南郊)에서 수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남극성이 보이면 임금이 오래 살고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南極見, 則人主壽昌, 天下治安) 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고종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여 그려졌음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도교는 한국에서 자리 잡지 못한 가운데 유교를 숭상하고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면서 <신선도>는 조선시대에는 도교적 종교화로서 기능보다 주로 세화나 축수화로 궁중의 중요한 행사에 길상화로 그려졌다. 이같이 장생의 상징이 그려진 세화 <십장생도>는 고려시대 이색李穡(1328-1395)목은집牧隱集의 기록으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이색은세화십장생歲畵十長生 : 日雲水石松竹芝龜鶴鹿일운수석송죽지구학록라는 화찬畵贊을 짓고 . 구름. . . 소나무. 대나무. 지초. 거북. . 사슴의 열 가지 장생물에 대해 읊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십장생도>는 아직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고 십장생문 銅鏡<7>에서 <십장생도>의 이미지를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하여 십장생과 같은 장생물은 벽사의 의미를 지닌 신물가운데 표현되었으며, 병중에 장수를 바라는 화찬가운데서도 표현되고 있다. 십장생의 소재들은 장수를 상장하는 해 달 구름 산 돌 물 학 거북 소나무 대나무 영지 천도 복숭아등 모두 10여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圖7> 고려시대, 십장생 동경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17, 18세기 중반까지 <십장생도> 병풍은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비의 혼례식 때 설치되었는데, 1802년 이후로는 왕실 어른의 축수를 비는 진연, 진찬의, 또는 세자의 탄생과 건강을 비는 왕세자 탄강, 강복 등의 진하에 활용되었다.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 의하면 이러한 규모의 <십장생도> 병풍은 궁중 잔치인 가례에 사용 되었다고 한다. 이 병풍은 불로장생의 유토피아가 상징인 산수도山水圖로 표현되어 있고 산과 계곡을 배경으로 십장생의 여러 자연이 등장한다. 이것은 현실세계를 벗어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신선사상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오리건 대학교박물관 소장 <십장생병풍> 모두 10첩으로 그중 8첩에는 화려한 청록산수로 십장생도가 그려졌고 나머지 2첩에 관직과 이름이 기록된 座目(좌목)이 있다.<8> 이 좌목을 통하여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추론하는데 이 병풍에 기록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 등 14명의 인물은 1879년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이 천연두에 걸렸을 때 진료에 참여했던 의약청의 구성원이었다. 따라서 이 병풍은 왕세자 천연두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왕세자 두후평복진하계병王世子痘候平復陳賀契屛을 형성하고 참여하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각자가 가질 수 있도록 제작한 병풍을 가르킨다.  

이처럼 궁중에서는 십장생도를 무병장수의 종교성이 깃든 길상화로 사용되었을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도교적 이상세계인 십장생에 새로운 도상인 반도蟠桃, 즉 복숭아나무가 추가되어 주류를 이루어 나타나게 된다. 한국의 십장생도는 소나무가 전체 구조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이 그림은 가운데 복숭아나무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십장생도가 표상하는 선계 이미지는 구체적으로 삼산산과 관련이 있다. 삼신산은 봉래 방장 영주라고 부르는 도교의 낙원이다. 이러한 도교적 낙원을 표현한 도상은 <해학 반도도><요지연도>가 등장하게 된다.<9> <10>



                                                  <8> 십장생병풍. 1880. 비단에 채색, 201.9X52.1cn오리건대학교 박물관


 

<9> 作者未詳, <瑤池宴圖>, 絹本彩色, 134.2cm47.2cm, 19세기, 경기도 박물관 소장



<10> 作者未詳,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10첩 병풍, 絹本彩色, 166.0cm416.0cm,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먼저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는 바다, , 반도중심제재가 되는 장생도의 한가지로서 십장생도의 물가부분이 독립되어 확대된 양상이다. 이 그림은 십장생도병과 비교하면 육지의 비중이 대폭 축소되고 대부분의 공간은 바다와 서운이 감도는 하늘이 차지하는 구성이 다르다. 십장생도가 육지의 장생도라면 해학반도도는 바다의 장생도이다. 그리고 또한 바다의 장생도가운데 해반도도가 있는데 해반도도는 4첩병풍이 한 쌍을 이루는 형식인데 모든 동물이 배제되고 오직 해와 달 산 복숭아나무가 대칭으로 포치된 원대한 바다풍경이다. 그림은 일월 오봉도를 연상시키는데 왕권의 우위를 나타내는 일월오봉도가 복숭아나무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시기 신선도교사상이 유행하였음을 말해준다. <11><12>



<11> 作者未詳, 日月五屛峰圖, 8첩 병풍, 絹本彩色, 162.5cm337.4cm,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



<12>일월반도도 8첩병풍 조선19세기후반, 보물 제1442, 국립 고궁 박물관소장


십장생도의 열세가지의 장생물중에 바다 산, 복숭아나무 구리고 학으로 조합된 해반도도의 구성은 <요지연도>의 배경이 되는 서왕모의 거처를 연상시킨다. 중국에서는 이 주제의 그림을 <반도회도(蟠桃會圖)>라고 부르지만, 내용 구성에서 조선시대 <요지연도>와는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연회에 촛점을 둔 <요지연도>라는 제목의 그림을 찾기 어려우며 <요지헌수도(瑤池獻壽圖)><군선회축도>처럼 연회보다는 서왕모의 축수를 강조한 제목의 그림들이 많다.

그림의 내용에서는 서왕모를 배알하는 주목왕, 하늘로부터 강림하는 서왕모를 맞이하는 신선들, 서왕모에게 헌수하는 불보살과 군선 등 서왕모에 대한 축수의 행위에 초점이 모여 있다. <요지연도>에 이러한 것들에 대한 실제 작품의 사례는 1800년대에 그려진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正廟朝王世子冊禮契屛)><순묘조왕세자탄강계병(純廟朝王世子誕降契屛)>등 서문과 좌목 등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역사성이 입증되는 작품들이다. 이 그림의 특징은 해상 군선의 비중이 많이 차지하고 있으며 1800년 왕세자 순조의 책봉을 기념하여 선전관청에서 만든 책례계병이나 순조의 원자가 1812년 왕세자를 책봉될 때 과거 산실청에 일했던 관원들이 만든 탄강계병에서 볼 수 있다. 현재 전하는 국립박물관 소장을 통해 원래 모습을 알 수 있는 예이다.<13> 


<13> <正廟朝王世子冊禮契屛>, 絹本彩色, 115.0cm48.0cm, 180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처럼 군선이 도해하는 장면은 <신선도>의 한 종류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그림은 팔선이 각기 지물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며 바다를 건너는 장면인데, 중국에서는 팔선과해八仙過海라 부르고, 그것을 묘사한 그림을 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라고 한다.<14> 한국에서는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같이 바다를 건너는 군선들은 팔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八仙宋代 이후로 중국에 새로이 등장한 민간의 신선들로,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철괴鐵拐 李, 장과노張果老, 하선고何仙姑, 남채화藍采和, 조곡구曺國舅, 한상자韓湘子를 가리키며 이들은 원대 이후 중국의 대표 적인 신선들이 된다. 송대까지 이들은 민간에서 개별적인 신선들로 존재하였으며, 원대에 이르러 팔산八仙이라는 집합체가 형성되었다. <팔선과해도>는 송나라에 유행한 <도해도><도강도>의 도상에 원나라 때 형성된 팔선 이야기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후기 다방면의 그림에 두루 천재성을 드러낸 김홍도의 명성은 무엇보다 <신선도>에서 비롯된다.


<14>김홍도 I ‘군선도(群仙圖)’ 비단에 수묵담채 132.8×575.8cm 1776(부분화). 국보139.


그가 그린 <신선도>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군선도群仙圖에 등장하는 신선들은 재세 연대와 무관하게 함께 등장시켜 그렸는데, 신선이 된 때문인지 중국에서는 도교적 종교성이 드러난 인물로 괴이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홍도는 유교적 선비의 모습이 가미된 우리 민족의 미적정서가 표현되어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상당수 제작되었던 <요지연도> 등에서 팔선과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궁중화풍의 장식화는 18세기 후반기부터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궁 밖으로 전해진 궁중양식은 신흥 부유층의 구매와 수요에 의해 높은 화격을 유지한 그림으로 전래되었다. 반면 서민층으로 확산된 궁중양식은 점차 소박한 화풍으로 그려져 민화의 양식으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15>


<15> 作者未詳, <神仙古事圖> 8첩 병풍 중 4, 絹本彩色, 106.0cm28.5cm, 19세기, 국립 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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