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 속의 철학

철학산책 1. 서양철학사상 | 철학은 아무나 하나

문계석 연구위원

2017.08.16 | 조회 4386

서양철학사상 | 철학은 아무나 하나

문계석 / 상생문화연구소 (서양철학부)

현대의 인류는 지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매체를 통해서 원하는 버튼만 누르면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심지어 공영 텔레비전에서는 건강과 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 정치 및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안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토론과 주제별로 유명 인사들이 제공하는 학술 강좌 등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들이 너무도 그럴듯하게 전해져서 시청자들은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도 가끔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구분하기조차 어려울 때도 있다.

언어의 개념이 가지는 본래의 뜻을 남발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발생한다. “나에게도 철학이 있다.”고 운운하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아주 현란하게 언사를 쏟아내는 일이 그것이다. 이럴 때 ‘자신에게 있는 철학’을 말해보라고 질문을 던지기라도 하면, 기껏해야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의 과정 내지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말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철학은 삶의 과정도 아니요 주관적인 생각도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철학은 ‘지혜를 열광적으로 사랑함’이다. 궁극의 목적은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라 본다. 철학자는 지혜를 구하여 지혜가 늘 자신과 함께 붙어있도록 노력하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서 애지자愛智者이다. 그럼 누구나 다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철학한다고 할 수 있으며, 누가 철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1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
“너 자신을 알라”는 말
‘철학’ 하면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BCE 470?~399)이다. 무엇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진정한 철학자라고 부르게 됐을까? 우선 그 배경을 스케치해 보도록 하자.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당시의 서식지를 찾아가다 보면 우리의 상념은 아테네 사람들이 우주의 배꼽이라고 불렀던 델포이Delphoi의 아폴로Apollo 신전神殿에 머무르게 된다. 신전 앞 돌기둥에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 auton).”는 금언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금언은 아폴론 신전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은 불멸의 존재인 신神이 아니라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란 점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는 아마 인간 모두가 자신의 분수를 알아 신의 뜻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금언을 달리 해석하여 ‘너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알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아테네 사회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상황, 즉 자기가 최고의 지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양 지성사에서 진정으로 무지無智를 자각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아 왔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해야만이 지혜를 사랑(愛智)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지혜로운 자도 될 수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철학자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의 대화편(『소피스트』)에서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들여다보자.

“저들(소피스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로 자랑할 만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도 모르고 있는 것을 안다고 자처하지만,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저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안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무지함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지혜를 추구할 수 있음(지혜에 대한 에로스)을 알린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왜 무지에 대한 자각을 말했을까?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당시의 아테네 사정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한 학문에 있어서도 무척 혼란스러웠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출세하기 위해 자신이 다방면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뽐내면서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고 강력하게 설파했다. 소위 지식을 파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통상 소피스트들(Sophists)이라 부른다. 이러한 상황은 동북아 지역에서도 벌어졌다. 중국의 주周나라가 와해되고 춘추전국시대라 불렸던 시기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쟁론들이 그것이다.

지혜로운 자임을 자처한 소피스트들
기원전 5세기경에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자 아테네는 주변국가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이에 부응하여 지중해 연안에 산재해 있던 학문적 탐구의 중심지도 엘레아Elea나 이오니아Ionia 지방에서 아테네Athenae로 옮겨졌다. 그래서 아테네는 정치적 야망에 불타는 젊은이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아테네로 몰려든 젊은이들 중에서 학식이 있다고 자평하는 자의 대부분은 외부출신이었기 때문에 정치에 직접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아테네를 대변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정치활동의 숙련 기술은 논변 내지는 변론에 의해서 그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그 변론은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기술이었다. 이것이 소피스트들이 주창하는 아레테arete이다. 아레테는 그리스어로 각 분야에 있어서 잘 해낸다는 의미의 ‘탁월함’을 뜻한다.

소피스트들의 변론은 참된 지혜의 길로 인도하기보다는 각자에게 필요로 하는 이해득실을 대조해서 원하는 쪽으로 설득해가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한 기술은 단순한 논쟁술이거나 말을 곡해하여 그 상황에 가장 걸맞는 탁월한 논변을 찾는 일이다. 소피스트들은 이런 기술을 영혼을 지도하는 기술이라고 자평하지만, 플라톤은 영혼을 사로잡아 매혹시키는 기술이라고 혹평했다. 다시 말해서 소피스트들은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강해서 비판적인 탁월한 지식인으로 여겨졌을지라도, 사람들을 위해 참된 진리나 아테네의 장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못한 무책임한 지식인들이다.

최초의 소피스트는 압데라 출신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BCE 481~411)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아테네로 들어온 인물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여 주관적이며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내세운다. 즉 우리들 눈앞에 나타난 사물들에 대해서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으며, 나에게는 나에게 나타난 그대로이고 너에게는 너에게 나타난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소위 진위眞僞를 말할 때 각자의 주관에 따라 본 것이 척도尺度가 된다. 이런 주장에 의거하자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 규범, 법률 등에 있어서도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란 없고, 오직 단순히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주장만이 난무할 뿐이다.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참된 영원한 진리에 대해 극단적인 회의주의 입장을 내세운 소피스트도 있다. 레온티노이의 고르기아스Gorgias(BCE 483~375)가 대표적이다. 그는 유명한 웅변가였고, 수사학의 선생이었다. 그는 ‘참된 진리란 없다,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르기아스의 제자 칼리클레스Kallikles와 크리티아스Kritias도 유명하다. 올바른 국가,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그들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고 주장한다. 이는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에서 볼 때,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돈(money)에서 나오고, 돈을 많이 가진 사람만이 그 힘을 이용해서 정의를 행할 수 있다는 믿음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누가 철학을 하는가
소피스트들처럼 오늘날에도 지식을 팔아서 돈이나 권력을 취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는 것을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안다.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이론들은 참된 지혜를 추구한 결과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철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철학자는 자신에게 으뜸이 되는 지혜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최고의 지혜에 대한 에로스를 갖고 있는 자이다.

앞서 말했듯이, 소피스트들은 각 분야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다방면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각자가 갖고 있는 지식이 최고의 지혜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지식이 최고의 지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지혜라고 착각하거나 무엇이 최고의 지혜가 되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소피스트들은 최고의 지혜에 대한 에로스를 가질 수가 없고, 따라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철학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또 있다. 바로 절대 존재인 신(God)이다. 서양의 전통에서 말하는 신은 모든 것을 통시적이고도 공시적으로 다 알고 있고(全知),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으며(全能), 언제 어디서나 시·공의 구애를 받지 않고 현존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래서 신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란 절대로 없기 때문에 에로스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최고의 지혜로 영원히 충만해 있어서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미 최고의 지혜를 완전히 획득하여 소유하고 있는 자, 즉 지혜, 능력, 아름다움, 선함 등을 본성적으로 충만하게 갖추고 있는 자는 지혜를 더 이상 사랑할 필요가 없다. 또한 자신에게 참된 지혜가 없는데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 으뜸이 되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여 완전히 모르고 있는 자들도 철학을 할 수 없다. 오직 소크라테스처럼 지적 만용에 놀아나지 않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여 항상 최고의 지혜를 열광적으로 추구하여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애지자만이 철학을 할 수 있다.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지혜는 아마 어떤 개별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나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서, 혹은 논쟁이나 토론에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획득하는 지식이 아닐 것이다. 또한 최고의 지혜를 욕망하는 것은 지적인 욕구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현학적인 멋을 전달하기 위해 가르쳐 주는 그런 종류의 지식도 아니다. 하물며 정치 무대에 나가서 출세하기 위해 배우는 웅변술이나 궤변적인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애지자가 갖추어야할 덕목이 더욱 아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철학’이 목적하는 본래적인 특성과는 거리가 멀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볼 때 현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대부분 으뜸이 되는 궁극의 지혜, 소위 항구적으로 참된 진리를 찾아내는 데에 있다. 참된 진리는 추호도 거짓이 없는 진상眞相이자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항구적인 존재에 대한 진리는 가장 근원적으로 파악된 선명하고 분명한 것이어서 전체를 망라하는 총체적인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통상 형이상적形而上的 지식이라 불린다.

인간은 영원한 진리를 ‘왜’ 추구하게 되는가?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 우선으로 취급되는 경제적 부유함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 까닭은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영원한 진리를 획득하고자 함은 불멸의 존재에 대한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여 소유하고 있는 한 자신이 불멸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신념, 또는 자신 또한 영원한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항상 충만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희구일 것이다.

2 철학의 꽃, 형이상학形而上學


진리 찾아 떠난 사람
영원한 지혜는 불멸의 진상에 대한 것으로 추호도 거짓이 없는 항구적인 존재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영원한 지혜는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감각적 대상에서는 찾을 수 없음을 먼저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감각에 들어오는 대상들은 생장염장生長斂藏으로 순환하는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 대상에 대한 지식은 개별적이고 일시적이며 탐구하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고, 또한 획득하는 주체의 주관적 사고 능력이 현저하게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지혜는 감각에 주어지는 현상세계 너머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탐구에 대한 체계적인 방안을 제시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천재적인 제자, 플라톤Platon(BCE 427~347)이다. 플라톤은 대화의 형식으로 작성한 『국가(Politeia)』 편에서 영원한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삶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잘 제시하고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의하면, 밝게 빛나는 태양이 있고 태양이 비추는 지상 세계는 온갖 종류의 사물들이 태양 빛에 의존하여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지상 세계 밑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동굴 속은 햇빛이 직접 닿지 않기 때문에 항상 어두컴컴하다. 이 동굴 속에 일상적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손과 발목이 꽁꽁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도 없고, 목 또한 묶여져 있어 고개도 돌릴 수가 없다.

동굴 속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죽기 때문에 오직 앞만 바라보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그들 앞에는 동굴의 벽이 있고, 벽 위에 희미한 그림자가 아른거리며 움직인다. 그 까닭은 밖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이 묶여 있는 사람들의 등을 비추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굴 속의 사람들이 각자 동굴 속에 묶여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거니와 동굴 벽에 아른거리는 것이 그림자라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은 그 동굴 벽에 나타나는 그림자들이 참된 진리라고들 알고 있다.

동굴 속에 사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동굴 벽에 나타나는 감각적 지각들이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들인지를 의심하고, 그림자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그것이 생기게 하는 근원지를 추적해 간다면, 그는 용감하게 온갖 노력을 다해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들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분투적인 노력을 할 것이다. 이는 그가 그림자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참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파헤치려고 노력하는 자임을 시사한다. 결국 그는 온갖 피나는 노력을 동원하여 동굴 밖으로 기어 나와 태양이 비치는 지상 세계의 참된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밝음의 근원이 태양임을 알게 된다.

동굴의 비유가 시사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감각적 지식이란 동굴 속에서의 그림자에 대한 지식들과 같은 차원이라는 것,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는 감각적 지식들에 의존하지 말고 그 배후에 있는 근원에 대한 지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현실세계에서 감각으로 보고 들어서 알게 되는 지식이란 한낱 동굴 속에 꽁꽁 묶여 있을 때 알게 된 것과 유비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며, 감각이 제공하는 일시적이고 변화하는 대상들에 대한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이들 배후에 숨어 있는, 감각적 대상들이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존재 근원으로서의 항구적인 실재實在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자이다. 그런 자만이 밝은 태양과 같은 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래서였던가. 플라톤 철학의 꽃은 현상계 너머에 실재하는 이데아Idea에 있다. 그는 생장염장으로 순환하는 현상세계와 자체로 불변하는 항구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구분하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현상세계는 모두 이데아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데아들은 현실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원형이요, 현상계의 근원적인 존재 근거로서 실재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영원한 지혜를 현실세계에서 찾지 말고 바로 이데아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제1철학은 근원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형이상학)
항구적인 영원한 지식은 자체로 변화하지 않으면서 세계의 모든 변화를 가능케 하고, 또한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질서와 인식 근거를 제공해 주는 제1 원인(aitia)이요 원리(arche)가 된다.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의 탐구 대상은 바로 이런 근원적인 지식에 대한 것이요, 영구히 실재하면서 모든 것들의 생장 변화를 가능케 하는 그런 존재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존재 일반’을 탐구의 주제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곧 개별 과학들이 탐구하여 찾아낸 지식들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와 비판을 기꺼이 하면서도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이며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다 근원의 진리를 찾아내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철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체계적인 학문이 전개되면서 근원의 지혜를 추구했던 철학자들은 소위 인문학의 중심 무대에 위치해 있던 자들이다. 이들이 제일 관심을 갖고 시작한 탐구 분야는 바로 ‘존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존재론(ontology)이다. 요컨대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은 인간은 ‘왜’ 인간으로 존재하며, 왜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것이다. 존재자로서의 존재를 탐구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은 모든 존재의 제1 원리와 원인에 대한 탐구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E 384~322)는 존재론을 제1철학 혹은 형이상학(Metaphysica)이라 불렀다.

학문에서 형이상학의 위상은 무엇인가? 이는 무성하게 자란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해서 그림을 그려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모습은 뿌리와 줄기 및 가지로 구분되는데, 형이상학은 나무의 뿌리에 해당한다. 뿌리는 나무가 생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영양을 빨아들여 몸통과 가지로 보내는 근원처요, 나무 전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바탕이 된다. 나무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첫 단계의 줄기가 소위 물리학, 논리학, 수학이다. 이들 학문에서 탐구된 근원적인 진리는 모두 형이상학의 진리에 의존해 있다.

철학은 형이상학적 진리 탐구로부터 출범했다. 이 노선을 견지한 철학자는 고대 서양에서 신화의 시대를 끝낸 주역들로부터 시작한다. 서양에서 최초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탈레스Thales를 필두로 자연철학자들이 있었고, 학문의 중심 무대가 아테네로 옮겨지면서 다양한 학문적 정초를 이룩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했다. 서양의 중세기에 접어들어서 기독교 신 중심 세계관을 정립한 철학자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가 있다. 새로운 철학의 시대를 열어준 학자로는 근대의 데카르트Descartes, 라이프니쯔Leibniz, 헤겔Hegel, 하르트만Hartmann, 하이데거Heidegger가 있으며, 현대에는 무너진 형이상학을 새롭게 일으킨 화이트헤드Whitehead가 있다. 이들 철학자들은 모두 최고의 지혜를 추구하여 체계화했던 형이상학자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적 진리는 인류가 문명사회로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전승되어 시대마다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의식적으로든 학문적으로든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여타의 제 과학들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것은 바로 철학의 형이상학적 탐구였던 것이다. 제1철학으로 불리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추구했던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개별적인 여러 분과과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양한 사상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3 철학적 탐구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들은 비록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종의 철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의 세계에 주어진 것들의 진상에 대하여 알려고 하거나, 또는 우리가 살면서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체득하려고 한다거나, 혹은 영혼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등을 자문하거나, 아니면 옳고 그르다는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등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그 진상을 밝혀 일종의 확실한 대답을 얻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습관적으로 그렇게 알려고 한다거나 또는 알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진정으로’ 철학을 하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참된 지혜를 추구한다는 것(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단언적으로 대답하기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Socrates가 시도한 철학하는 방법론을 소개하는 것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으로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산파법)
소크라테스는 비록 철학에 대한 강의도, 위대한 저서도 남긴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서양의 지성사에서 진정으로 철학을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을 자기의 제자로 두었기 때문이었을까? 귀족 출신이었고 부유하게 잘 살았던 플라톤은 무엇이 아쉬워서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시게 됐을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조각가이고 어머니는 산파(조산원)였다. 젊은 시절에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훌륭한 조각가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 또한 전쟁이 터지자 아테네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용병用兵에 지원하여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아테네를 끔찍이 사랑했던 그는 유명한 인사들을 찾아가 지식을 배워 소피스트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40세쯤에 그는 신神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 즉 아테네 청년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지도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이후 그는 소피스트들의 주관적이며 상대주의적 진리관에 회의를 품으면서 그들의 사상과 결별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철학적 활동을 시작하게 됐는데, 아테네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렇게 진리 탐구에 매진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의 대화 내용은 탐구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미 알려졌거나 통용되는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다시 캐어물으면서 파헤치고 분석하고 파고들어가 그것의 진면목을 파악하여 선명하고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다.

아테네 청년들과 논쟁을 벌이는 대화의 과정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며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참된 지식을 얻으려는 소크라테스의 열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화법은 ‘문답법’ 혹은 ‘산파법’이라고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이든 무심코 지나치거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고 대답하고, 또 성찰하고 검토하여 분석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결국 진정으로 의미하는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어 이를 올바르게 정의定義(definition)하려고 의도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기소되어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기 약 8년 전쯤에 플라톤은 아테네 광장에서 젊은이들과 대화를 통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던 소크라테스를 보게 된다. 순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내용과 진리 탐구의 방법에 홀딱 반해 스승으로 모셨고, 스승의 학문을 열정적으로 섭렵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전기 대화편들과 중기 대화편 일부는 이를 입증하는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대화를 통한 변증법적 탐구방식(‘성스러움’에 대한 1차 정의)
대화를 통한 탐구 방식을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변증법적 탐구 방식은 플라톤의 대화편 『유티프로Euthiphro』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대화의 주인공은 소크라테스와 유티프로이다. 소크라테스가 유티프로와의 대화를 통해 진리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이끌어가는가를 소략해 보자.

소크라테스는 나이가 70이 되던 늦은 봄에 멜레토스Meletos, 뤼콘Lykon, 아뉘토스Anytos 세 사람에 의해 아테네의 법정에 기소된다. 죄목은 그가 다이모니아Daimonia를 내세워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것과 아테네가 제정한 신神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그가 신성 모독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기소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서식지棲息地를 떠나 아침 일찍 법정에 출두하게 되었는데, 그때 유티프로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당시 유티프로는 훌륭한 가문의 출신으로 종교적 행사와 성스러움(Piety)을 관장하는 전문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티프로는 아테네 시민들 중 어떤 이가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를 고발하기 위해 직업상 법정으로 출두하게 되었던 것이고, 때마침 소크라테스와 만나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먼저 유티프로에게 무슨 일로 법정에 출두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유티프로는 자기 아버지를 고발하기 위해서 왔다고 대답한다. 이에 소크라테스가 깜짝 놀라 무슨 연유로 아버지를 고발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유티프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한다.

부자였던 유티프로의 아버지는 몇몇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어느 날 하인들 중 하나가 술에 만취가 되어 다른 동료와 싸우다 그를 죽이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술에 취한 하인의 손발을 꽁꽁 묶어서 추운 헛간에 가두어 넣고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은지를 몰라서 하인을 시켜 이런 일을 담당하는 승려를 모셔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그런데 승려가 도착하기도 전에 꽁꽁 묶여 있던 술에 취한 하인은 추운 날씨에 그만 얼어 죽고 말았다. 이런 까닭에 유티프로는 자신의 아버지가 술에 취한 하인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에서 아버지를 법정에 고소해야 한다고 했고, 이에 대하여 친척들은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은 ‘성스럽지 못한’ 처사라고 유티프로를 나무랐다. 하지만 유티프로는 친척들이 ‘성스러움’과 ‘성스럽지 못함’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처사를 비난한다고 생각하여 친척들의 말을 무시하고 끝내 아버지를 법정에 고소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현재 신성 모독 죄로 기소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알아 자신을 고소한 멜리토스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다는 취지에서, ‘성스러움’에 대해 전문가인 유티프로에게 ‘성스러움’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배우고 싶다고 청했다. 이 요청에 대하여 유티프로는 ‘성스러움’에 대하여 첫 번째 정의를 내린다.

“성스러운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곧 잘못된 짓을 한 자를 기소하는 것인데, 잘못된 짓들은 살인하거나 사원에서 도둑질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잘못된 짓을 하는 자는 부모나 또는 누구든지 다 마찬가지이므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기소하는 것이 성스러운 일이다.” (Euthiphro, 5d)

‘성스러움’에 대한 2차 정의
1차 정의에서 유티프로는 진정으로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개별적인 실례를 들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사람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에 대하여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소크라테스만 진정으로 사람이고 플라톤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반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에 관한 한 개별적인 실례를 들어 말하는 것은 올바른 정의가 될 수 없다.

‘성스러움’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소크라테스가 바로 사람이게 하는 본성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하는 것처럼, 잘못을 저지른 자를 기소하는 행위를 성스럽게끔 하는 어떤 본성적인 것을 말해야 한다. 이 요구에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정의가 성립되고, 이 정의에 따라서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물음에 대하여 올바른 정의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소크라테스를 통해 알게 된 유티프로는 ‘성스러움’에 대하여 두 번째 정의를 제시한다.

“성스럽다는 것은 신神들에게 기쁨(마음에 쏙 드는 태도)을 주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Euthiphro, 7a)

유티프로의 두 번째 정의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이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성스럽다는 것이 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동일한 행동이라도 어떤 신에게는 마음에 들지만 다른 신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가 발생할 것이고, 따라서 한쪽의 입장에서는 다른 쪽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성스럽지 못한 것으로 취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신들에게서도 의견의 불일치가 있어서 과거에 신들의 전쟁이 있었던 것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특히 옳고 그른 것, 아름답고 추한 것, 선하고 악한 것, 용기 있는 것과 같은 가치의 문제를 다루는 것들에 대하여서는 신들의 의견이 같은 것으로 좀처럼 좁혀지기 어렵다. 따라서 유티프로가 아버지를 기소하여 벌하려는 행위는 제우스Zeus 신에게는 마음에 들지 몰라도 헤라Hera 신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신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근거에서 유티프로의 두 번째 정의 또한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성스러움’에 대한 3차 정의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충분히 들은 유티프로는 ‘성스러움’에 대하여 잽싸게 달리 정의한다.

“성스러운 것은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신들이 싫어하는 것은 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Euthiphro, 9e)

유티프로의 세 번째 정의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신이 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스럽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이 좋아하니까 그것이 성스러운 것인가?” 이 질문의 초점은 신의 마음에 든다는 것과 성스러운 것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구분하려는 것에 있다.

이런 구분은 ‘성스러움’이란 신들이 좋아하거나 말거나 아무런 관계없이 그 자체로 어떤 성스러운 본성이 있고, 신들도 이것을 알고서 성스러운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동일한 대상이듯이, 성스러움과 신이 사랑하는 성스러움은 ‘같은’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성스럽다는 것은 그 행위에 성스러움의 본성적인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신이 좋아해서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정의의 대상으로 성스러움의 본성은 자체로 있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불변적인 참된 지식의 대상이 된다. 이 본성적인 것을 아는 자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대화를 통해 본질적인 지식을 추구해 간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지식은 곧 개별적인 사례들을 열거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개별적인 사례들을 아는 것도 아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개별적인 것들이 바로 그것일 수 있도록 해주는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어 올바른 정의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든 다 아는 것으로 간주하여 우연히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하여 대답을 유도하고, 반론을 제기하여 ‘자체로’ 있는 본성적인 것을 찾아낼 때까지 분석하는 것이다. 근원의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비록 가장 올바른 정의에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대상의 의미를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대상의 본질적인 지식, 즉 참된 지식에 가까이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바로 철학을 하는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 다음호 주제 : 3. 실재(reality)를 찾아나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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