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자유와 인내와 관용의 나라 불가리아 Bulgaria

김현일 박사

2019.12.26 | 조회 125

[세계지역문화탐방]

자유와 인내와 관용의 나라 불가리아 Bulgaria

불가리아는 북방 유목민 계열인 불가르족이 세운 나라로서, 비잔틴 제국의 지배에 이어 500년간의 터키 지배를 겪고서도 독립을 이뤄낸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와 인내와 관용의 민족으로 표현한다. 이 나라는 독립 후 공산화가 되었다가 1990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을 했지만 여러 여건의 불비로 인해 경제 운영 등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고유의 민족적, 문화적 자산과 저력을 바탕으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우리와 여러 모로 친숙한 점이 많은 불가리아를 만나본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불가리아Bulgaria는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서 남쪽으로는 그리스, 터키, 동쪽으로는 흑해, 북쪽에는 루마니아, 서쪽에는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와 접한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넓은 11만㎢ 정도이나 인구는 우리보다 훨씬 적다. 2014년 통계로 692만 명 정도로 남한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는 소련의 위성국가의 하나로서 우리에게는 머나 먼 나라였다. 1989년 소련이 무너지고 난 후 이 나라는 급속히 서방 진영에 가까워졌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전의 종주국 러시아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

직사각형 모양의 불가리아는 두 개의 큰 평원과 두 개의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루마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다뉴브 강을 따라 다뉴브 평원이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그 평원 남쪽으로 동서로 뻗어 있는 것이 발칸 산맥이다. 발칸 산맥은 세르비아와의 국경 지역부터 동쪽 흑해 연안까지 560㎞ 가량 길게 뻗어 있는데 발칸 반도라는 지명도 이 산맥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발칸 산맥은 고대에는 ‘하에무스 산’이라고 불렸다. 이는 이곳에 오랫동안 살던 트라키아 인들의 이름인데 불가리아 사람들은 이 산맥을 ‘스타라 플라니나’라고 부른다. ‘오래된 산’이라는 뜻이다. 발칸 산맥 남쪽에 동쪽으로 세모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평야가 트라키아 평원이다. 그리스 역사서에도 많이 등장하는 트라키아 지방이 바로 이 평원을 말한다. 또 하나의 산맥인 로도페 산맥은 그리스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길이가 240㎞이다. 로도페 산맥 서쪽 끝에는 또 릴라 산지가 높이 솟아 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높은 무살라 산(2925m)이 있다. 이 산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불가리아의 유명한 릴라 수도원 역시 릴라 산맥 깊은 골짜기에 있다.

불가리아 땅은 상당한 높이의 산맥들이 가로지르기때문에 산지의 비율도 높다. 고도 600m 이상의 산지가 국토의 30%를 점하며 여기에 높이 200~600m의 구릉지대를 합치면 그 비율은 70%나 된다. 수도 소피아 역시 큰 산에 인접해 있다. 비토샤 산이라는 이름의 높은 산이 소피아를 감싸고 있는데 그 높이가 2,300m에 달하는 덩치가 큰 산이다. 그러나 높은 산에 인접한 소피아에서부터 트라키아 평원이 시작된다. 이 트라키아 평원은 동쪽으로 뻗어 터키 이스탄불까지 이어진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소피아(당시 이름은 세르디카였다)에서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군사도로가 놓여 있었다. 유럽 대륙에 큰 제국을 세웠던 훈족이 몇 차례에 걸쳐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였을 때 이용하였던 도로가 이 군사도로였다.

불가리아는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발칸 산맥은 대륙의 기단들이 넘어오는 데 방벽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북쪽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이 크고 남쪽은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은 영하로 살짝 내려가는 정도이며 여름 7,8월의 평균기온은 20도를 살짝 넘어선다. 연평균 강우량은 630㎜로 우리의 절반 정도이다. 장마나 태풍처럼 많은 비를 내리는 기상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강우량의 분포 역시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겨울은 월평균 40~55㎜, 여름은 30~45㎜ 로서 지중해의 영향으로 여름보다 겨울이 조금 많지만 대체로 연중 골고루 비가 내리는 편이다.

불가리아의 역사
북방 유목민에 의해 세워진 나라 불가리아
고대 불가리아 지역에는 약 2만년 전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트라키아Thracia인(불가리아인의 조상)이 최초로 거주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CE 480년경에는 트라키아인에 의해 도시국가가 건설되었고, BCE 46년 로마제국이 트라키아인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대다수 트라키아인들이 모에지아 및 트라키아 지역에서 이탈해 분산되었다. 로마제국의 몰락 후에는 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으로 발칸지역이 황폐화되었다.

‘불가리아’라는 나라를 세운 주체는 불가르Bulghar족이다. 불가르족에 대한 언급은 480년 비잔틴의 제노 황제가 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동원하였다는 비잔틴 사서의 기록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 불가르족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었던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유목민이라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기원은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신용하 교수 같은 경우 불가르족이 부여夫餘족이었다는 주장도 내어놓고 있다. 4세기 후반 부여족의 일파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프카즈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불가르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체로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사료상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단지 부여가 ‘부르’라고도 불렸다는 등 몇 가지 명칭이 유사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좌우간 7세기 이전에는 카프카즈 북부로부터 흑해 북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과 약탈, 비잔틴 제국의 용병 등으로 활동하며 살았던 불가르족은 7세기에 들어와 동유럽 역사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불가르족의 한 우두머리인 쿠브라트Kubrat라는 인물이 불가리아라는 이름의 나라를 635년경에 세웠던 것이다. 비잔틴 역사가들의 기록에는 쿠브라트가 세운 나라를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라고 부르고 있다. 그 영토가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흑해 북안의 땅에 세워진 나라였다. 대불가리아가 세워질 당시 이 일대는 무주공산이 아니라 또 다른 아시아 유목민인 아바르Avar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바르인들은 그 이전의 훈Hun족처럼 6세기 중반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으로 들어와 흑해 북안에서부터 헝가리 평원 일대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는데 바로 이 아바르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불가르인들이 세운 나라가 대불가리아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비잔틴의 한 연대기 기록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에 발견된 『불가리아 칸 명부』라는 문서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아틸라Attila 왕의 후손이다. 옛 슬라브어로 기록되어 있는 이 문서에서는 쿠브라트 가문이 아틸라로부터 전해져 왔으며 2대가 아틸라의 막내 아들인 이르니크이고 4대가 바로 쿠브라트라고 한다.

아틸라가 453년 돌연사 한 후 그 지배하에 있던 게르만 족속들이 대거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거대한 훈 제국이 무너졌는데 아틸라 왕의 세 아들들에 대한 기록이 라틴 사서들과 비잔틴 사서들에 남아 있다. 그 기록들에 의하면 이르니크(혹은 에르나크)는 형들과는 달리 비잔틴 제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세력 보존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다뉴브 강 하구 도브루자 지역에 정착하여 조용히 세력을 확대해갔는데 그 후손이 쿠브라트였던 것이다. 7세기 말에 씌어진 이집트 콥트파 주교 요한의 기록에는 쿠브라트는 어릴 때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그곳 황궁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쿠브라트는 비잔틴 사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훈족의 양대 부족인 우티구르 훈족과 쿠트리구르 훈족을 통일하여 그를 기반으로 대불가리아를 세웠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브라트의 사후인 670년경 하자르Khazar인들의 공격으로 대불가리아는 멸망하였다. 그 아들들은 불가르족을 이끌고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장남은 볼가 강과 카마 강 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라는 나라를 세웠다. 쿠브라트의 3남 아스파루크Asparukh는 다뉴브 델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앞에서 말한 그의 선조 이르니크가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이 불가르족 집단이 다뉴브 강을 넘어 도브루자 지방으로 진출하자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 4세는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패한 콘스탄틴 4세 황제는 681년 아스파루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도브루자 지방의 점령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다뉴브 강과 발칸 산맥 사이에 위치한 모에시아 주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불가르족의 나라가 세워졌다. 이것이 ‘다뉴브 불가리아’ 혹은 ‘불가리아 제1 제국’이다. 발칸 반도의 이 불가르족 국가는 9세기 말에 마자르Magyar족에 의해 세워진 헝가리Hungary와 더불어 대표적인 북방 유목민 국가였다. 불가리아는 정확히 말해서 유목민 출신의 군사엘리트인 불가르족과 일반 백성을 이룬 슬라브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러나 그 지배층이 훈족의 후예인 기마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성격 역시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 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의 왕은 아시아 유목민들의 왕 호칭인 ‘한汗(칸Khan)’으로 불렸다.

9세기 초에는 영토가 서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드디어 유럽의 최강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크룸Krum(그리스 사서에서는 ‘크루모스’라고 한다) 칸은 아바르인들, 비잔틴 제국과 싸워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그리하여 당시 불가리아 제국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의 영토를 포괄하여 남쪽으로는 비잔틴 제국, 서로는 프랑크 제국과 어깨를 겨루는 큰 세력이 되었다.

슬라브화와 기독교화
불가리아에는 슬라브Slav족의 수가 꾸준히 늘어갔다. 슬라브족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슬라브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언어도 슬라브어가 주된 언어가 되었다. 지배층인 불가르 귀족들(볼리야르Bolyar)은 전통적인 천신(텐기르) 신앙을 하였지만 슬라브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소수 지배층인 불가르족의 통치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수용이 불가피하였다. 861년 보리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불리한 전세를 벗어나기 위해 비잔틴 황제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는 몇 년 뒤 자신의 가족들 및 일부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양에서는 기독교권 내부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틴 정교회 간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보리스Boris 1세는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적 지위를 얻어내었다. 기독교의 도입으로 불가리아 칸의 권력은 일층 강화되었다. 예전에는 칸은 불가리아 부족 연합의 우두머리 성격을 띠었으나 이제는 신의 지상 대리자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을 하나의 불가리아 인민으로 통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927년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는데 이는 세르비아 정교회 독립보다 300년 앞선 것이며 러시아 정교회보다는 600년 앞선 것이다. 그리하여 불가리아 총주교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 이은 여섯 번째 총주교좌가 되었다.

보리스 칸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종교를 통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한 그리스 성직자들이 불가리아의 성직자 양성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보리스 칸은 모라비아 왕국으로부터 추방된 키릴Cyrill과 메토디우스Methodios의 제자들을 적극 환영하고 그들에게 불가리아 성직자들의 교육을 맡겼다.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는 그리스 출신으로서 슬라브 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에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사후에 그 제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모라비아로부터 추방되었던 것이다.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슈카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오리드에 각각 학교를 세워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칸의 명에 따라 그리스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교육을 하였다. 또 불가리아의 공식문자도 그리스어가 아닌 키릴문자Cyrillic alphabet를 채택하였다. 키릴문자는 855년 키릴이 슬라브어로 된 기도문을 적고 바이블을 번역하기 위해 만든 글라골릭 문자를 개량하여 만든 문자로 피레슬라브 학교에서 창안된 것이다. 프레슬라브 학교는 예전에 플리슈카에 있던 학교로 보리스 1세가 귀족의 반란 때문에 수도를 플리슈카에서 프레슬라브로 옮기면서 따라 이전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몽골에서 사용하는 키릴문자는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불가리아는 1018년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Basilius 2세에 의해 정복되어 독립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불가리아는 공식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불가리아 속주(테메)가 되었는데 그 수도도 지금의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Skopje로 옮겨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지배는 불가리아 인들의 저항과 외침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1185년 아센Asen 형제가 일으킨 반란으로 제국의 지배는 종식되어 불가리아는 다시 부활하였다. 수도는 타르노보Tarnovo에 세워졌다. 이것이 제2 불가리아 제국이다. 아센 왕조가 지배하던 불가리아 제국은 발칸 반도의 태반을 지배한 강력한 국가였으나 봉건영주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위협이 재개되었다. 또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몽골족의 간섭도 빈번해지면서 일시적으로 몽골족이 지배한 적도 있었다.(1300년 차카의 지배)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에 진정한 위협이 된 것은 중앙아시아부터 소아시아를 차지하고 발칸으로 진출한 투르크Turk족이었다. 투르크인들의 발칸 침공은 134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1396년 최종적으로 불가리아를 멸망시켰다. 이후 불가리아는 ‘루멜리아 총독관구’로서 술탄이 파견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루멜리아Rumelia는 로마인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관구의 수도는 처음에는 오늘날의 터키 국경도시인 에르디네(고대의 아드리아노폴리스)에 두었으나 후일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sofia로 이전되었다.

오스만 투르크Osman Turk는 불가리아를 여러 개의 군(빌라예트vilayet)로 나누어 태수(산자크베이sanjakbey)를 보내 다스렸다. 그리고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크기에 따라 ‘티마르Timar’ 혹은 ‘지야메트Zeamet’라고 불린 봉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봉토는 봉토보유자가 죽은 후에는 그 점유권이 술탄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투르크의 지배는 근 500년간 계속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무슬림보다는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져야 하였다. 문화적 엘리트인 기독교 성직자들은 투르크의 지배를 피해 대거 인근의 슬라브 국가로 망명하였다. 투르크 당국은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을 비잔틴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두었다.

불가리아의 독립과 발칸전쟁
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가리아 인들의 항거는 여러 차례 무장반란으로 터져 나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불가리아의 독립은 18세기 이후 같은 그리스 정교를 믿는 제정 러시아의 세력이 발칸 반도로 뻗쳐오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1768~1774년간의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토만 지배하에 있는 발칸 반도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얻어내었다. 이는 오토만 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권리였다. 1876년 4월에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있었는데 이 봉기는 잔학하게 진압되어 3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다시 투르크와 전쟁을 하여 산스테파노San Stefano 강화조약(1878)을 체결하였으며 그 결과 불가리아는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가 큰 나라로 독립하는 것을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같은 강대국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해에 열린 열강들의 베를린 회의에서 불가리아로부터 동루멜리아East Rumelia, 마케도니아Macedonia를 분리하여 별개의 나라로 만들었다. 동루멜리아는 불가리아의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몇 년 뒤에는 불가리아에 합쳐졌다. 모두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공국이었다. (이 시기부터 2차 대전 직후까지 불가리아는 줄곧 왕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물론 입헌군주제였다. 왕정 초기에 불가리아인들을 독일인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반투르크 봉기를 계기로 1908년 투르크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12년에는 그리스, 세르비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하였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이다. 발칸 동맹국의 승리로 발칸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사라졌다. 제2차 발칸전쟁(1913)은 영토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그리스와 세르비아 그리고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으나 이 전쟁에서는 져서 제1차 발칸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러시아와 사이가 크게 나빠진 불가리아는 적의 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공산화와 민주화의 정치 과정
영토상의 불만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섰던 불가리아는 결국 패전국이 되었고, 1919년 승전국과 맺은 뇌이Neuilly 조약으로 영토의 일부를 상실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30년대 이후 독일과의 밀접해진 경제관계 때문에 독일 편에 서게 되었다. 그 결과 1944년 9월 소련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소련군의 침공에 맞춰 불가리아의 좌익 진영인 ‘조국전선’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46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공산당은 조국전선의 모든 세력들을 축출하고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마침내 1946년 9월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소련헌법을 모방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농업과 산업이 국유화되고 불가리아는 이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소련의 가장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동구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소련 군대가 직접 주둔하지는 않았다.

공산당의 지배는 소련의 붕괴로 인해 종식되었는데, 1989년 11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있은 후 공산당은 일당독재를 포기하고 35년 동안 불가리아를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 공산당 서기장을 퇴진시키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민주화를 수용했고 당명도 사회당(BSP)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불가리아의 민주화 혁명은 루마니아의 유혈혁명과 구분지어 ‘푸른 혁명’이라고 불린다. 1990년 6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으며, 1990년 11월에는 국명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1990년 10월 민주세력동맹에 대한 지지율이 사회당의 지지율을 웃돌고 사회 정치적 불안이 가중됨에 따라 루카노프Lukanov 총리가 퇴진하였으며, 12월 포포프Popov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전후戰後 최초의 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1991년 7월에는 민주주의 신헌법을 채택하고 1991년 10월 신헌법에 의한 총선 및 지방 선거에서 민주세력동맹(UDP)이 승리하여 필리프 디미트로프Philip Dimitrov가 총리에, 공산주의 시절의 반체제 인사였던 젤류 젤레프Zelyu Zhelev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취임하는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다. 불가리아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서방진영으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1999년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신청을 하여 2007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당시 유럽연합은 경제의 민영화를 비롯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

불가리아 정부와 불가리아 국민들은 유럽연합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불가리아는 친서방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서방진영에 가담하였지만 불가리아는 아직도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천연가스를 러시아에 85%를 의존하고 핵발전소 연료의 경우 100% 의존하는 형편이다. 공산주의 몰락 후 불가리아의 경제는 레슬러 출신의 사업가들에 의해 대거 장악되었는데 이들은 폭력이나 부패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러시아는 이들 반불법적 기업가 집단과 밀접히 연계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논자들은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에 이러한 새로운 방식으로 불가리아에 영향력을 행사는 것을 일컬어 ‘러시아 신제국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많은 불가리아 인들은 불가리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경제가 급속히 좋아질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그 때문에 많은 불가리아 인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 현재 불가리아는 서유럽에 비해서는 경제수준이 아직은 크게 뒤떨어진다. 일인당 명목 GDP는 7,400 달러 정도로 유럽연합 평균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그래서 불가리아는 현재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서 최빈곤 국가라는 오명을 듣고 있다. 불가리아는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통화동맹에는 가입되지 않아 유로화를 쓰지는 않는다. 불가리아 화폐는 ‘레브’(복수는 레바)라고 한다. 현재 1유로에 1.95레바로 고정환율제를 시행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불가리아는 1947년 인민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공산정권이 붕괴된 이후인 1991년에는 자유 민주주의 신헌법을 제정했다. 현행 헌법에 의하면 불가리아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혼합형의 의회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 중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주요 권한으로는 총선실시권(대통령이 총선 이후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 대해 3차례의 조각을 의뢰했으나 모두 실패할 경우, 의회 해산 및 총선실시권 행사), 법률 거부 및 공포권(의회에서 통과되어온 법률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으나, 의회 재통과시에는 대통령이 이를 공포), 기타 군 통수권, 외교사절 임명접수권, 사면권 등이 있다. 현재 불가리아 대통령은 2012년에 취임한 로센 플레브넬리에프Rosen Plevneliev이다.

행정부
총리는 정부의 수반으로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놓고 제1당, 제2당, 자신이 지명하는 정당에 대해 차례로 정부 구성 권한을 부여하는 바, 동 권한을 받은 정당은 총리와 내각 구성원(각료) 명단을 의회에 제출해 동의를 받아야 하며 의회 재적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면 내각이 성립된다. 내각(Council of Ministers)은 국가의 내정 및 외교 정책 이행을 총괄하고 공공질서와 국가안보를 보장하며 명령(Decree), 포고(Ordinance), 결의(Resolution) 등을 채택하고 시행한다. 민주화 이후 불가리아는 여러 차례의 총선을 통해 내각이 교체되어 왔는데, 최근 2014년 10월 치러진 총선 결과 유럽발전시민당(GERB)과 개혁블록(RB)의 연립정부 출범이 결정되어 11월에 보이코 보리소프Boyko Borisov(유럽발전시민당GERB)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지방행정
불가리아는 28개의 지역(region)으로 구분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가교 역할을 하는 각 지역별 지사(governor)는 내각에 의해 임명된다. 각 지역은 1개(소피아시) 또는 1개 이상의 자치 단체(municipality)로 구성되는데, 자치단체는 시장(mayor)과 지방의회(council)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시장과 지방의회 의원은 해당 지역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입법부
의회는 단원제로서 4년 임기의 의원 240명으로 구성된다. 선출 방식은 비례 대표제(209) 및 다수 대표제(31)가 혼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주요 정당들로는 유럽발전시민당(GERB), 사회당(BSP), 권리자유당(MRF), 불가리아부흥대안(ABV), 아타카Ataka당, 애국전선(PF), 검열없는 불가리아당, 개혁블록(RB), 푸른연대(The Blue Coalition), 사회정의당(OLJ)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독립적 국가 기관이며, 법관의 독립이 헌법에 근거하여 보장되고 사법부의 예산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사법제도는 3심제로 운영되고 일반적으로는 시·군법원(Regional Court), 지방법원(District Court), 항소법원(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단계를 밟는다. 행정사건의 경우에는 항소법원과 대법원 대신 최고행정법원(Supreme Administrative Court)이 그 역할을 하며, 군사 사건의 경우에는 군사법원(Military Court), 군사항소법원(Military 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절차가 적용된다. 이외에도 특정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최고사법위원회, 검찰(Prosecuting Authorities), 수사기관(Investigation Services)을 사법부 내에 설치해 운영한다. 대법원장, 최고행정법원장, 검찰총장은 7년 임기로 임명되고 중임이 불가하며, 법관에 대한 임명, 승진, 파면 등의 인사 조치는 최고사법위원회에서 담당한다.

경제구조와 동향
경제구조
불가리아의 경제구조는 국내총생산 가운데 서비스업이 54.3%, 공업이 32.1%, 농·임업이 13.6%를 차지하는 형태(2006 기준)로 이뤄져 있다. 불가리아의 농업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감소하고 있으나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작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곡물류와 채소· 과일 등 외에 장미유薔薇油 생산은 연간 약 1,000kg으로 세계 제일이다. 어업 외에 축산에서는 전통적인 양돈이 유명하다.

1989년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도입 이후 농·공업부문의 생산 비중이 감소된 반면 서비스 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관광업도 성장 가능 산업으로 중시되고 있다. 석탄 석유 철 망간 납 아연 등의 광업은 개발 가능성이 높다. 전력電力은 90%가 화력발전이며, 에너지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가스 원유 석탄을 수입한다. 기계, 화학(비료 황산 등), 경전기輕電機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였으며, 경공업은 면직을 중심으로 모직 견직 등의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이 두드러진다.

경제동향
불가리아는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늦게 경제개혁에 착수한 나라였다. 후발 주자였던 데다가 공산권 시장의 붕괴, 높은 외채비율, 중요 교역국인 이란 이라크 리비아 등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해 여러 가지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1989년에는 채무 상환의 어려움으로 지불 유예 조치를 선언했고 1987년부터 루세, 부르가스 등에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해 외국의 투자를 유도했으나 1990년대 초반까지는 불안정한 경제개혁으로 외국인 투자는 미미했다.

세계은행의 국가진단보고서(2015년 7월)에 의하면 불가리아는 1997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1998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바뀌면서 소비증가, 소득증대, 고용확대가 계속되었고, 국내정치 및 경제가 안정된 2000년에서 2008년 사이에는 외국인 투자와 고정투자의 급증으로 PPP GDP(구매력평가 국내총생산) 9.1%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 위기의 해인 2008년 이래 경제발전은 부진하고 빈곤은 증가하였으며, 최하 40%의 소득 증가는 미미한 상태로서 현재 불가리아는 EU내 가장 빈곤이 심한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2009년 세계 경제 위기는 유로존의 위기와 자본 유입과 은행 대출을 활성화시키던 불가리아 투자붐을 중단시켰다. EU 통계청(Eurostat) 자료에 따르면 2008~2013년 불가리아의 PPP GDP(구매력평가 국내총생산) 성장이 1.2%까지 둔화되었다(같은 시기 주변지역은 평균 1.6% 달성).

불가리아가 경제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기업 자원과 산업 분야의 잘못된 분배와 그 정도의 심화 때문이다. 불가리아의 경우 산업 분야가 다양하지 않으며 2000년 이후 생산성이 낮은 분야인 산업 및 서비스업 분야에 고용이 증가했다. 타 국가의 경우 수출 분야의 증가가 많은 변화를 초래해 왔으나 불가리아는 1990년 중반 이후 이 분야 역시 침체되어 있다. 불가리아는 중/고 첨단기술의 활발한 수출에도 불구하고 그 수출량과 수출의 생산성 증가는 제한이 되어 있다.

경제 개선책 및 향후 전망
불가리아는 더욱 신속하고, 보다 포괄적이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 포괄적인 개혁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 보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모든 국가들의 장기 성장에 대한 주요 결정요인인 높은 생산성 증가가 요구된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2015년 국가 경쟁력 분석 자료에서는 불가리아가 법인세 등 저렴한 세금, 안정적인 생활비 수준, 경영인력 임금 수준 등은 강점으로 평가되지만, 경제탄력성 부족, 경쟁력 강화 입법 미비, 금융 규정 준수 취약, 대학교육, 교육경영 및 지식교류 저조 등은 약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2014년 은행위기, 정부지출 증가도 경쟁력을 약화시킨 요소로 평가되며, 실업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으나 여전히 높은 편에 속한다. 더불어 2015년 불가리아의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극복해야할 과제로는 부정부패 척결, 공공행정 효율성 향상, 혁신-성장을 추구하는 교육개혁, 에너지 복지 및 에너지원 다원화, 국가브랜드 구축 등을 들었다.

2015년 불가리아의 경제성장률에 대해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는 1.7%, IMF는 1.2%, EBRD(유럽재건개발은행) 및 EU 집행위원회는 1.0%로 각각 전망했다. 성장 요인으로는 유로존으로부터의 해외수요 증가, 낮은 국제유가, EU 자금 흡수 증가 등이 있으며, 성장 저하 요인으로는 그리스 사태, 높은 실업율, 저조한 국내수요, 높은 대출금리 등이 존재한다.

교역현황
불가리아는 2014년 무역 적자 79억 레바를 기록했다. 수출이 전년 대비 0.7% 감소한 432억 레바, 수입은 전년 동기대비 1.2% 증가한 511억 레바였다. 한국과 불가리아의 2014년 교역규모는 총 3억 788만 달러로, 한국의 대對불가리아 수출은 1억 1780만 달러(합성수지 승용차 폴리에스텔섬유 타이어 및 기타 전자응용기기 등), 대對불가리아 수입은 1억 9008만 달러(판유리 사료 직물제의류 및 곡류 등)였다.

사회와 문화


인구, 언어 및 민족 특성
불가리아의 전체 인구는 692만 명(2014 통계)이다. 이는 EU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하며 EU 내 16위에 해당한다. 인구의 69%가 도시 거주로 집중돼 있으며 주요 도시별 인구는 소피아 120만 명, 플로브디프 34만 명, 바르나 33만 명 등이다. 평균 수명은 남자 70.6세, 여자 77.6세를 기록하고 있다.

불가리아의 언어는 불가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러시아어와 영어, 불어, 독어, 터키어, 마케도니아어 등은 상용어로 쓰이고 있다. 불가리아어를 구사할 경우, 슬라브 민족 나라의 국민과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한 편이며, 최근 젊은층에서는 영어 구사자가 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불가리아는 북방유목민의 자취가 남아서인지 제천문화의 전통과 가족 단위의 유대감, 언어의 구조와 풍습 등에서 우리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또한 불가리아인은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반점(일명 몽고반점)이 있는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종교 및 교육
종교 분포는 인구 중 83%가 불가리아 정교이며, 12%는 회교, 기타 카톨릭 및 개신교로 구성된다. 종교적 차별 또는 분규는 없으나 개신교에 대해 비교적 배타적인 성향이 있다. 불가리아의 교육시스템은 16세까지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는데, 취학 이전의 교육과 초등(1~7학년) 및 고등 교육으로 구분이 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교육은 경영, 경제, 금융, 회계, 관광, 서비스 분야 2년의 과정으로 수료자에게 자격증(diploma)이 부여되며, 해당 분야 취업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대학교육은 전국 50여 개의 대학이나 전문 고등교육기관(Academy,Institute)에서 실시되는 바, 각 대학이 독자적으로 학생 수, 입학시험을 포함한 제반사항에 대해 결정하며, 각 과정은 시험 등 소정의 절차를 거쳐 입학한 이후에 각각 4년, 1년-2년, 3년 이상의 수학이 필요하도록 되어 있다.

한-불 문화교류
한국과 불가리아는 문화 협정과 한국과 불가리아 간 청소년 분야 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양국 간에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불가리아에서의 한국학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한국학 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교에 한국학 센터를 두고 있으며, 매년 한국학 학생 교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고, 동유럽 한국어 교육학회 학술대회를 지원한다. 또한 불가리아 4개 도서관에 한국 소개 기초 자료를 배포하고 있으며, 18번 외국어고등학교에 한국어반을 개설하였다.

그밖에도 한국 정부는 최초로 불가리아에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 사업을 시행한 바 있으며, 2008년과 2010년 불가리아 국립문화궁전이 개최한 국제영화제에 한국 영화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정보통신협력센터(ITCC, Information Technology Cooperation Center)에서는 2011년 6월부터 매주 수요일 한국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한국과 불가리아의 관계


북한과는 공산주의 시절부터 외교관계를 맺어왔던 불가리아는 1990년 한국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2년 후에는 한국어강좌가 소피아대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한국학과도 설치되어 있다. 최근 한류의 영향 때문에 한국학과도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아직 양국 사이의 경제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양국 간의 무역액은 3억 달러 정도이며 한국은 불가리아의 중요한 무역상대국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한국인들에게 점차 관심을 끌고 있다. 얼마 전부터 동유럽이 관광지로서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불가리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동유럽 진출을 원하는 삼성, LG 등 몇몇 대기업들이 이곳에 진출해 있다. 2013년 12월 현재 한국 교민의 수는 170여 명(공관원, 지상사원, 선교사, 유학생, 자영업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불가리아의 뿌리가 중앙아시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양국 간의 문화적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문화적 및 경제적 교류확대로 이끌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 생각된다.

2015년 5월 14일, 로센 플레브넬리에프 불가리아 대통령은 한국과 불가리아 수교 25주년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 정상은 현재 양국 교역이 연간 3억 달러 규모에 불과하고 투자도 미흡한 상황이지만, 한ㆍEU FTA 및 양국간 보완적 산업구조 등을 감안할 때 교역과 투자가 확대될 여지가 크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10월 양국 정부간 제1차 경제 공동위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4년째 개최되지 않고 있는 양국 산업부처간 산업협력위도 조속히 개재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양 정상은 교육ㆍ투자 등 실질협력 확대를 위해서 민간 차원의 협력 강화가 중요하다는데 공감하며 2004년 이후 중단된 한ㆍ불가리아 민간경제협력위원회도 재개되도록 양국이 관심을 갖고 노력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더불어 과학기술 MOU를 체결하고 기초과학이 뛰어난 불가리아와 응용과학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한국이 서로 윈-윈할수 있는 협력모델을 구축해 나가기로 했다. 양국 정상은 불가리아의 에너지, 교통, 물류, 전자정부 분야 각종 대형 인프라 사업에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 인식을 같이 했다.



불가리아의 한류 바람
불가리아에는 한류 바람이 불고 있다. 신맹호 주불가리아 대사가 지난 5월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불가리아의 한류는 학교교육과 밀접하게 엮여 있어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국립 소피아 대학에 한국학과가 있고 석박사 과정도 개설되어 있다. 또 불가리아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공립학교에는 2011년 고등과정에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공부하는 반이 생겼고, 초등과정에도 2013년 한국어반이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의 유수한 지방대학 세 군데에 한국어 과정이 개설되어 있고, 전국에서 세 번째 큰 지방 고등학교에서도 주말 한국어반을 조만간 정식 한국어반으로 개설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에 개인적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다. 소피아에 2013년 세종학당이 생겼는데 수강생이 70명에서 100명으로 늘었으며, 한국어만 가르치는 사설학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큰 이유에 대해 신맹호 대사는 불가리아가 역사적으로 주변국들로부터 시달림을 많이 받은 데다 가족 간 유대가 강한 문화가 있어서 우리와 감정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휴대폰 등 한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와, 한국의 빠른 경제발전에 대한 경이감도 작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한류는 문화적 현상일 뿐 아니라, 우리의 기술과 경제력까지 결합된 종합적 현상이며, 서양의 문화적 틀에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 자본과 기술을 조화롭게 섞어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장미, 요구르트, 포도주의 나라 불가리아
우리나라에는 불가리아가 장미의 나라, 요구르트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불가리아 인들은 장미를 관상용이 아닌 향유생산을 위해 대량으로 재배한다. 발칸 산맥 남쪽 산록에는 ‘장미계곡’이라는 장미생산지가 있어 많은 양의 장미를 재배한다. 카잔라크 시 근처의 장미계곡은 기후로 볼 때 장미재배에 적합하다. 장미꽃은 5, 6월에 집중적으로 채취하는데 이 시기에는 장미축제가 열려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불가리아는 세계적인 장미유 생산지로서 전세계 생산량의 7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불가리아에 향유용 장미가 도입된 것은 오스만 시대 초기에 투르크인들이 이란으로부터 들여온 것이라 한다. 불가리아의 장미유는 그 품질이 세계 최고로 이 때문에 불가리아의 장미유 산업은 중요한 산업의 하나가 되었다.

요구르트(Kiselo Mlyako; Bulgarian Yoghurt)는 불가리아 인들의 주된 음식 가운데 하나이다. 불가리아는 요구르트를 자신들이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인이 어렵지만 불가리아에서 세계 최고의 요구르트가 생산되는 것은 맞다. 이는 불가리아가 유목민족에 의해 세워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가리아는 포도주로도 유명하다. 아마 유럽에서 가장 포도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오래 된 나라일 것이다. 고대 트라키아 인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축제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현재 질 높은 포도주가 생산되어 수출되고 있다.

수도 소피아와 플로브디브
수도 소피아Sofia는 유럽에서 매우 오래된 도시로 꼽힌다. 신석기 시대인 7천년 전의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소피아라는 이름은 투르크 시대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 도시에 있는 오래된 성소피아 성당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고대에 이 도시의 이름은 세르디카Serdica였다. 이는 세르디 부족이라는 이 지역에 살던 트라키아 부족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세르디카는 필립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다.(BC 29) 그 후 트라키아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가 로마식 도시로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 (98~117) 때였다. 로마식 광장과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신기두눔(현재의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과 비잔티움을 연결하는 군사도로 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3세기에는 다키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중요한 도시이다 보니 로마 황제들도 몇 명 배출하였다. 3세기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갈레루스 황제가 이곳 출신이다. 갈레루스 황제는 311년 기독교 박해를 끝내는 칙령을 이곳에서 발표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동로마의 수도를 정할 때 여러 후보 도시들을 고려하였는데 그 가운데 세르디카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세르디카는 447년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한 세기 뒤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 시대에는 근 4세기 동안 루멜리아 총독관구의 수도였다.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의 지배 하에서 소피아는 오스만 풍의 도시가 되어갔다. 성소피아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모스크로 탈바꿈하여 17세기에는 100 개 이상의 모스크를 헤아리게 되었다.

1878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불가리아를 오스만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소피아 시내에 있는 큰 성당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은 바로 투르크와의 이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라는 이름은 키에프 시대에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러시아를 지킨 인물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반열에 오른 러시아의 영웅 이름이다. 이 성당은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성당으로 불가리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꼽힌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성당이 성소피아 성당이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당과 비슷한 시기인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지어졌다. 소피아는 그리스 말로 지혜라는 뜻으로 지혜를 신격화하여 숭배한 초기 기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소피아 성당은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래서 내부 건축도 이슬람 양식으로 개조되었는데 그 자취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에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20세기에 복원한 것이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걸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면 대통령 궁이 나온다. 대통령 궁 근처에는 국립고고학 박물관이 있는데 청동기시대 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고고학 발굴을 통해 얻은 로마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피아 교외 비토샤 산 밑에는 또 국립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시내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는 달리 널찍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가리아의 최고 명문대학 소피아 국립대학이 있다. 1888년에 설립되었지만 이 대학의 정식 명칭에는 중세 때의 인물인 ‘성클리멘트 오리드스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성 클리멘트 오리드스키’는 오리드의 성클리멘트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보리스 칸 때에 성직자 양성을 맡았던 두 개의 학교 가운데 하나인 오리드 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오리드는 지금은 인접 국가인 마케도니아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불가리아에 속했던 도시로 한 때는 365개의 성당이 있어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도시이다. 오리드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 뿐 아니라 중세 불가리아 시대의 성벽과 성당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는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소피아 대학교는 처음에는 규모가 아주 작아서 일곱 명의 교수와 49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역사문헌학부와 수학물리학부로 출발하여 법학부, 의학부 등이 추가되어 현재는 16개 학부가 있으며 24,000 명 이상의 학생이 여기서 학문을 연마하고 있다.

수도 소피아가 인구가 122만에 달하는 도시라면 불가리아 제2의 도시인 플로브디프는 인구가 34만 정도의 도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소피아에 뒤지지 않는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이다. BCE 4천년의 신석기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이 도시는 트라키아인들의 도시였는데 BCE 6세기 말에는 다리우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어 페르시아의 지배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트라키아인들은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 필리포스 대왕이 이 도시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필리포폴리스’라고 부른 것이다. 플로브디프라는 현재의 이름은 필리포폴리스의 트라키아식 지명인 ‘풀푸데바’에서 왔다.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의하면 이 도시는 필리포스 대왕에 의해 추방된 범죄자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트라키아 인들 마케도니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위에서 실질적으로 이 도시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1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트리몬티움’(세 언덕의 도시)이라고 불리게 된 플로브디프는 트라키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세운 공공건축물들이 즐비한 도시가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구시가지에는 극장, 경기장, 수로 등 다양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로마시대에는 교역도 매우 번창하였는데 노예무역이 번창하여 ‘노예들의 도시’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이다. 많은 고대 유적지들을 가진 유수한 역사의 도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플로브디프는 번영을 구가하는 주요한 상공업 도시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상공업의 번영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유입된 해외자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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