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벵골어를 지키며 세운 나라 방글라데시

양재학 연구위원

2018.10.04 | 조회 35

벵골어를 지키며 세운 나라 방글라데시


아시아 서남부에 자리를 잡은 방글라데시는 세계 제일의 인구 조밀국이자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고대에 인도 대륙 왕조와 이슬람왕조, 무굴제국의 지배를 거쳐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47년 동파키스탄으로 독립을 했으며, 다시 현재의 파키스탄(서파키스탄)과 유혈 전쟁을 벌인 끝에 1971년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이후 쿠데타와 정치폭력 등으로 혼란한 정국을 이어 오고 있는 방글라데시는 정치 안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함께 외국 원조에 의존하는 저개발형 경제구조의 혁신을 이루기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하고 있어 점차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이 가시화되고 있다.

시詩를 사랑하고, 행복지수가 가장 높으며, 모어母語인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삶의 희생도 감수하는 민족성을 지닌 방글라데시인들은 오늘도 벵골민족 중심의 문화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묵묵히 전진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방글라데시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는 아시아 서남부 인도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으로, 남쪽엔 벵골만에 접해 있고 여기를 통해 인도양으로 향할 수 있다. 국경의 대부분이 인도와 접해 있지만, 동남쪽에는 미얀마Myanmar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고, 가까운 주변국으로는 네팔Nepal, 부탄Bhutan, 중국China 등이 있다.

국토의 면적은 143,998㎢로 그다지 큰 편은 못 되지만 인구는 약 1억 6,895만 명으로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꼽힌다. 인구 밀도가 1,173명/㎢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울산광역시, 경기도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방글라데시 국토 전체가 삼각주이므로 인구부양력이 높은 벼농사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50년이면 인구가 2억 5,000만 명까지 증가한다는데, 그러면 인구밀도는 1,736명/㎢가 되고 2050년의 러시아보다 인구가 많게 된다. 인구 밀도가 모나코, 싱가포르, 바티칸, 바레인, 몰타, 몰디브에 이어 7위이나, 적어도 국토면적 1만㎢를 넘는 국가 혹은 인구 1,000만 이상인 국가 중에서는 부동의 1위를 차지한다.

영토 대부분이 평야지역인데다 국토 면적의 60% 이상이 농토이기 때문에 경지면적당 인구밀도는 한국이나 대만보다 낮다. 방글라데시는 1970년대만 해도 한 집당 6.6명이라는 가공할 출산율을 보였다. 이는 당시 중국의 5.1명이나 인도의 4.5명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출산율이 크게 낮아져, 흔히 세대교체율이라 불리는 2.1명을 약간 웃도는 수준(2.3명)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방글라데시의 자연경관은 갠지스Ganges 강,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자무나Jamuna 강), 메그나Meghna 강 등이 합류하면서 형성된 수계水系와 그 주변지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 갠지스-브라마푸트라 삼각주 평원의 동부 3분의 2에 해당되는 지역을 차지한다. 북쪽으로는 갠지스 강과 브라마푸트라 강의 합류점 위쪽에 쐐기 모양으로 펼쳐진 3각형 지대, 동쪽으로는 수르마Surma 강의 유역 평원까지 포함한다. 수르마 강 유역의 충적평야 동쪽 끝은 남북으로 뻗은 능선으로 연결되며, 남동부 미얀마와의 경계선은 산 능선을 이룬다. 방글라데시는 옛 충적층에 있는 소규모의 고지대를 제외하면 평원은 아주 완만한 땅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지형은 국토의 90% 이상이 평지이다. 평원과 함께 호수, 습지, 늪지대 등도 방글라데시 지형의 특색이다. 기복이 적은 평지에는 강들이 둔덕을 형성하면서 수많은 지류로 갈라져 흐른다. 우기에는 범람으로 인해 수백㎢에 이르는 지역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 특히 중남부는 강의 옛 삼각주 지역에 해당하는 서부와 퇴적 및 생성작용이 활발한 강에 의해 새로 형성된 삼각주가 자리잡은 동부로 이루어져 있다. 남부 해안지대는 소금기가 많은 작은 연못들이 많으며, 나무들이 울창하게 뻗은 지역이 흔하다.

방글라데시는 전형적인 열대 몬순의 고온다습(연평균 기온 26.6℃, 습도 75%)한 기후를 갖고 있다. 대체로 겨울, 여름, 우기로 크게 나눠 볼 수 있는데, 10월부터 3월까지는 날씨가 좋으며(15~26도 정도), 4~6월 사이에는 더운 날씨(30~35도 정도)가 지속되다가 7~9월은 우기로서 매우 고온 다습한 날씨가 이어진다. 또한 영토 자체가 비가 많이 오는 곳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자연환경 훼손까지 겹쳐서 해마다 엄청난 대홍수를 겪는 국가이다. 연평균 1.6건이 발생하는 사이클론과 대홍수 때문에 하구의 비옥한 삼각지가 다 쓸려나가서 농산물 생산량에 큰 손실이 생긴다. 그래서 홍수가 한 번 날 때마다 영토가 줄어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매년 약 0.4%씩 영토가 줄어들고 있다. 해마다 대략 서울특별시 면적 정도가 물에 잠기는 셈이다.

이 때문에 부레옥잠(water hyacinth)해상 농법을 시험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부레옥잠은 관상용이나 수질정화용으로도 기르지만,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가축 먹이로도 나쁘지 않다. 홍수로 늘어나는 호수에서 아예 집을 짓고 부레옥잠밭에서 식용 호박류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그것을 팔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농민도 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는 코끼리나 코뿔소, 물소 등 큰 짐승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거의 멸종하고 중소형 짐승들 정도만 남아 있다. 현재는 가장 큰 포식자인 호랑이도 50~75kg 수준으로 작아져 먹이사슬이 무너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밖에 사슴이나 멧돼지, 원숭이 등과 황새를 비롯한 민물조류도 서식한다. 습지 주변에는 악어도 있다. 이런 기후상황 때문에 2030년까지 적어도 2,000만 명의 기후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불행한 경고가 나와 있다.

방글라데시의 역사


근대 이전
방글라데시 역사의 근대 이전은 옆 나라 인도 벵골 지방의 역사와 겹친다. BCE 6세기경 아리아인이 갠지스 강 하류 벵골 지방(현 방글라데시)에 진출하여 선주민인 드라비다족과 함께 벵골인을 형성하였다. BCE 5세기 중엽 이후에는 마우리야Maurya 왕조나 굽타Gupta 왕조, 팔라Pala 왕조 등 인도 대륙 왕조가 지배하였는데, 마가다Magadha 왕조(BCE 5세기) 이후 이슬람교 왕조가 성립(CE 13세기 초기)되기까지 불교 문화가 융성하였다. 그 당시 방글라데시는 인도와 구분되지 않았으나, 12세기 아랍인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해 이후 벵골 동부는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260년에는 이슬람교 왕조인 벵골 술탄국이 수립되어 벵골 지역을 지배함으로써 이 지역에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성립하였다. 1352년부터 1576년까지 존속된 이 나라는 인도의 무굴Mughul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고, 이후 무굴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굴 제국이 쇠퇴하면서 독립을 선포하고 벵골 나왑nawab국이 되었다. 나왑은 이슬람인 귀족이다. 서양식으로 번역하자면 대공국大公國 정도로서 영어로는 nawab of Bengal이다. 1717년부터 1818년까지 존속된 나왑국은 인도 북부의 패권을 손에 쥔 마라타Mahratha 동맹에 의해 정복당했고, 이 마라타 동맹은 인도 지역에 진출한 유럽 열강 세력 중 영국에 의해 패배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
1757년 영국은 벵골 지방을 포함하여 인도 전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이후 이곳은 영국의 기계·면제품 시장화, 황마 및 차 생산지로 전락한다. 초창기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식민 지배를 시행하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후 명목상으로 남겨 두었던 무굴제국을 멸망시키고 영국 정부에 의한 인도의 직접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1877년에 식민지 인도에 세워진 것이 인도제국Indian Empire이며, 벵골 지역도 인도 제국의 일부로써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 통치는 현지인들의 많은 반발을 초래하였는데 특히 벵골 지역의 주민들이 반영反英 운동을 벌이며 심하게 저항을 했다. 이에 영국은 1905년 반영 운동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벵골 지역 분할령’을 선포하였다. 영국은 벵골 지역을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면서 분리 목적이 행정 편의라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영국의 경제적 이익과 인도 민족의 분열이 목적이었다. 당시 벵골 서부는 힌두교 신자들이 많았던 반면 현 방글라데시 지역인 동부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많았다. 당시 벵골 주민의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슬람교 신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와 경제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힌두교 신자들은 벵골 동부가 이슬람교 신자들의 중심이 되자 벵골 분할 정책에 맹렬히 저항하였다. 반면, 벵골 동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교 신자들은 분할을 환영했다. 이러한 문제로 힌두교 신자들과 이슬람교 신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벵골 분할령이 발표되자 벵골 주민들은 인도 국민 회의파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할령 반대 운동을 거세게 일으켰다. 이것이 인도 전역으로 퍼지자 결국 영국은 1911년에 벵골 분할령을 철폐할 수밖에 없었다. 벵골은 다시 하나의 주가 되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분쟁은 피할 수 없었다. 힌두교도가 주도하는 국민회의가 이슬람교도를 무시하자 이슬람교도들은 ‘전인도이슬람교도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940년경부터 인도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였고, 결국 1947년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이 영연방에 속한 자치령으로 각각 분리ㆍ독립되었다. 이 때 벵골 서부는 인도의 한 주가 되었고 벵골 동부는 파키스탄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인도 영토를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서로 1,600㎞나 떨어진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이라는 두 영토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동파키스탄 시대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동벵골)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의 11개 주 가운데 1개 주로 독립하였다. 벵골 지역 힌두교도들은 벵골 지역(동·서벵골)이 하나의 국가로 독립할 경우 이슬람교도가 다수가 되는 상황을 우려하였으며, 벵골 지역 이슬람교도들은 인도로부터 독립하지 않을 경우 소수 힌두교에 의한 다수 이슬람교도가 지배되는 상황을 우려하였다. 그 결과 상이한 종족과 언어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공통점 때문에 동·서벵골 지역은 한 나라로 독립하게 되었고, 면적이나 인구 규모에서 상대적으로 큰 서파키스탄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파키스탄(동벵골)과 서파키스탄(서벵골)은 영토가 너무 멀리 분리되어 있고, 내부적으로도 파키스탄 정부(서파키스탄)가 동 벵골(방글라데시) 주민들을 차별대우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은 언어까지도 서로 달랐다. 파키스탄의 지식인들이 우르두어가 파키스탄 사람들의 공식 언어라고 주장하며 방글라데시에서 많이 쓰는 벵골어 대신 파키스탄의 우르두어를 쓰라고 하자 다카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소위 ‘언어운동’이라 불리는 반발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는 1952년 2월 21일에 일어났는데, 이날은 현재 방글라데시의 주요 국가 기념일 중 하나이자 유네스코에서 세계 모어母語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다. 이 시위를 서파키스탄 군인들이 폭력으로 누른 것이 방글라데시인들의 저항을 불러왔고, 벵골인들이 아와미 연맹을 결성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와 대립 등으로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시작하였다.

1954년 3월 동파키스탄 주의회 총선에서 야당이 대승을 거두었고, 1969년 3월에는 파키스탄의 모하마드 아유브 칸Mohammad Ayub Khan 정부에 대한 벵골인들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1970년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를 준 열대성 저기압인 사이클론 볼라가 방글라데시를 덮쳐 약 5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파키스탄 정부가 세계 각국에서 받은 원조 물자를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방글라데시인들은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1970년 12월에는 파키스탄 독립을 주창해 온 아와미연맹AL(Awami League)이 총선에서 압승하고, 국회 개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 당시 아와미연맹은 동파키스탄 국민회의 162석 중에서 160석을, 동파키스탄 주의회 300석 중에서 289석을 차지하였다. 방글라데시의 인구는 현재 1억 5,600만 명으로 2억 100만 명의 파키스탄의 인구보다 적지만, 당시엔 방글라데시의 인구가 더 많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 벵골 지역에서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지자 파키스탄 대통령은 방글라데시와 아와미 연맹의 당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Sheikh Mujibur Rahman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파키스탄군이 만행을 저지르는 가운데 결국 아와미 연맹의 당수 라만은 19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했다. 파키스탄군이 라만을 체포하자 방글라데시인들은 독립군을 결성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일으켜 서파키스탄인들을 공격해 방글라데시 일대를 장악했으나, 결국 파키스탄군에게 진압당하고 국경 지대로 밀려났다.

방글라데시로 진입한 파키스탄군은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방글라데시 측은 이 때 30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파키스탄 정부 측은 26,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세계 각국의 기자들은 대략 50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독립군이 인도 국경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함에 따라 파키스탄이 인도 영토의 독립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힌두교를 믿는 벵골인 1,000만여 명이 전쟁을 피해 인도로 피난을 오는 사태가 벌어지자,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 개입을 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카슈미르Kashmir 지역 영유권을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쳐 이미 전쟁을 치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다시 3차로 전쟁을 벌였고, 인도가 2주일 만에 서파키스탄군을 제압하면서 끝이 났다. 전쟁의 결과 서파키스탄이 패하면서 동파키스탄은 국호를 방글라데시Bangladesh(‘벵골 국가’라는 의미)로 하여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1971.3.26)하였고, 서파키스탄은 현재의 파키스탄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시대
1972년 1월 아와미연맹AL 당수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Sheikh Mujibur Rahman이 독립한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의 초대 총리에 취임해 내각책임제 정권을 수립하였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정권은 사회주의경제, 비동맹 중립노선을 선언하였다. 1973년 3월 제1차 총선에서 아와미연맹이 승리한 후, 1975년 1월에는 대통령중심제로 개헌을 단행해 ‘노동자·농민 아와미연맹BAKSAL(The Bangladesh Krishak Sramik Awami League)’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체해 1당 독재를 실시했다.

그러나 1975년 8월 쿠데타가 일어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대통령은 피살되었고, 지아우르 라만iaur Rahman 육군참모총장이 정권을 장악하여 1978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1년 3월 해외 망명 중이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귀국하여 아와미연맹AL 당수로 취임하여 대정부 투쟁을 강화한 가운데 1981년 5월에 발생한 군부 쿠데타로 지아우르 라만 대통령도 피살되었다.

이후 1982년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후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Hussain Muhammed Ershard가 권력을 장악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86년에는 에르샤드가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7년 11월 야당 측의 반정부운동인 ‘다카 시지 프로그램Dhaka Siege Programme’을 시작으로 에르샤드 정권 퇴진 투쟁이 격화되었고, 1990년 10월에는 전국 규모의 정권 퇴진 운동이 확산되어 결국 같은 해 12월 에르샤드 대통령은 사임하고 민정으로의 전환에 성공하였다.

1991년 3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 당수인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가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신정부를 출범시켰고, 1991년 9월에는 내각제 개헌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으며, 10월에는 아브도르 라만 비스와스Abdour Rahman Biswas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1996년 3월에는 베굼 칼레다 지아 정부가 정국 혼란으로 퇴진하고 중립과도정부가 구성되었으며, 6월에 치러진 총선으로 아와미연맹 당수인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총리로 취임하여 21년 만에 아와미연맹이 재집권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사하부딘 아메드Shahabuddin Ahmed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1년 10월에는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 총리가 재집권하였고, 2001년 11월에 바드루도자 초두리Badruddoza Chowdhurry 대통령이 취임하였다가 다음 해 사임하자 이아주딘 아메드Iajuddin Ahmed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베굼 칼레다 지아 정부는 2006년 10월 반정부 시위 사태가 격화되면서 퇴진하고 과도정부가 구성되었으며, 2007년 1월 파크루딘 아메드Fakhruddin Ahmed가 임시정부 수반으로 취임하였다.

2009년 1월 아와미연맹AL의 당수인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가 재집권에 성공하여 총리로 취임하였고, 2월에는 모하마드 질루르 라만Muhammed Zillur Rahman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2011년 6월 제15차 개헌을 통해 과도중립정부 제도가 폐지되었다. 2013년 3월 질루르 라만Zillur Rahman 대통령이 질병으로 사망하자 직전 국회의장인 압둘 하미드Abdul Hamid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BNP 등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2014년 1월 5일 치러진 제10차 총선에서는 아와미연맹AL이 300석 중 232 석을 획득하며 승리하였다.

최근의 방글라데시 정세
방글라데시는 2014년 제10차 총선을 둘러싸고 여야간 갈등이 증폭되면서 정국불안이 지속되고 이에 따른 정치폭력 사태가 전국적으로 빈발하면서 치안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다. BNP 등 야당연합은 중립과도정부(Caretaker Government) 복원을 주장하면서 ‘하탈Hartal(시위 또는 총파업)'과 '봉쇄' 등 폭력시위를 선동하고 있고, 정부 여당은 폭력 선동을 이유로 야당 주요 인사들을 대거 구속시키는 등 탄압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2013년 초부터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과정에서 발생한 집단학살 강간 등 인도적 범죄의 주범으로서 야당 연합의 주축이자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당(Jamaat-e-Islami)의 주요지도자들에 대한 전범재판 결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면서 여야간 정치 갈등이 보다 심화되고 종교적인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어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

한편 2012년 11월 타즈린 화재사고(118명 사망)에 이어 2013년 4월 다카 교외지역에서 의류공장이 입주되어 있었던 건물(라나플라자)이 붕괴되면서 1,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이로 인해 방글라데시의 근간 산업인 의류 섬유(RMG) 산업의 근로환경 문제, 노동권 보장 문제, 최저임금 문제가 불거지고 이와 관련된 의류노동자들의 시위가 빈발하면서 정세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지속적으로 정치 폭력사태를 비난하고 여야간 대화를 통해 문제해결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2014년 총선 이후에는 미, 영 등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여야 참여하에 공정하고 자유로운 총선을 다시 개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더불어 방글라데시의 RMG 산업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미국은 2013년 6월 관세 특혜(GSP) 철회 및 권고사항(Action Plan) 제시, EU는 2013년 7월 방글라데시 정부-ILO-EU 3자간 합의(Sustainability Compact) 등을 통해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2015년에는 IS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까지 발생하여 나라가 온통 혼돈 상황을 겪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현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지만, IS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라고 공식으로 주장함에 따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처럼 방글라데시의 내정은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치 및 행정


방글라데시의 국가 형태는 입헌공화국이며, 정치 체제는 내각책임제다. 1972년 1월 내각책임제로 출발했다가 1975년 1월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그러다 1991년 9월에 개헌을 통해 다시 내각책임제로 복귀하였다. 1972년 12월 26일 헌법이 공포되었고, 2011년 6월 제15차 개헌을 했다.

행정부
방글라데시는 내각책임제이므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교와 국방에 관한 형식적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1회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한다. 내각 총리는 행정권의 수반으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고 내각의 연대책임을 진다. 의회 다수당 총재가 총리가 되고, 내각은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각료의 90%는 국회의원 중에서, 10%는 국회의원 피선거권자 중에서 임명한다.

2006년 10월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 정권 퇴진 후 차기 총선을 둘러싼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과 아와미 연맹 사이에 극한 대치 상황이 지속되었고, 전국적인 유혈 사태로 인해 군부 후원하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총선 때까지 정국을 관리할 과도정부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과도정부는 헌법상 총선 전 3개월만 존속하도록 되어 있으나, 총선이 2008년 말까지 연기됨에 따라 약 2년간 과도정부가 방글라데시를 통치하였다. 과도정부는 당초 부패 척결과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베굼 칼레다 지아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당수와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아와미 연맹 당수를 배제한 새로운 정치 질서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을 대체할 정치 세력 형성이 시기상조라는 점이 분명해짐에 따라 이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2008년 12월 29일 총선을 실시했다.

총선 결과 셰이크 하시나 당수가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총 300석 가운데 230석을 획득하여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을 누르고 압승하였다. 2009년 1월 6일 정식 출범한 셰이크 하시나 정부는 과도정부 기간 동안 폭등하였던 쌀값을 안정화하는 한편 만성적인 전력 및 교통난 해소를 위한 다양한 국가사업을 추진하였다. 2016년 11월 현재, 방글라데시의 대통령은 압둘 하미드Abdul Hamid(2013년 4월 취임)이고 총리는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2014년 1월 재취임)이다.

지방행정
방글라데시의 지방행정 조직은 우리의 도道에 해당하는 Bibhag(또는 Division), 군郡에 해당하는 질라Zila(또는 district), 읍邑에 해당하는 우파질라Upazila, 리里에 해당하는 유니언Union으로 분류된다. Bibag(Division)은 바리살Barisal, 치타공Chittagong, 다카Dacca, 쿨나Khulna, 마이멘싱Mymensingh, 라지샤히Rajshahi, 랑푸르Rangpur, 실렛Sylhet 등 8개로 구성된다.

각 Bibag의 행정책임자는 Divisional Commissioner(도지사)로서 정부에서 임명한다. 전체 Bibag은 총 64개의 Zila(또는 District)로 구성되는데, Zila 지방행정기관은 Zila Parishad(District Council)이며, 행정책임자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Deputy Commissioner(군수)로서 Zila Parishad 의장(Chairman)을 겸임한다.

이하 Upazila, Union의 지방행정기관은 각각 Upazila Parishad(Upazila Council), Union Parishad(Union Council)이며, 행정책임자인 의장 및 부의장(Chairman, Vice-Chairman)은 각각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임기 5년). Upazila Parishad 행정총괄인 UNO(Upazila Nirbahi Officer)는 정부에서 임명되나 선출직인 Upazila Chairman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아울러, 주요 인구 밀집 지역에 우리의 시市에 해당하는 City(우리의 광역시 해당) 또는 Municipality가 있다. City는 현재 총 11개로 행정기관은 City Corporation(광역시청)이며 행정책임자인 시장(Mayor)은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임기 5년). Municipality는 현재 총 309개로 행정기관은 Municipal Corporations(Pourashava)이며 행정책임자인 시장(Mayor)은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임기 5년).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Jatiya Sangsad)이며 의석은 350석이다. 350석 중 지역대표가 300석(소선거구제), 비례대표가 50석(전원 여성)이다. 주요 정당은 아와미연맹AL(Awami League),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Bangladesh Nationalist Party), 자티야당Jatiya Party이다. 그 밖에 자티야 사마지탄트리크당Jatiya Shamajtantrik Dal, 자마티이슬라미당JI(Jamaat-e-Islami), 노동당Workers Party 등이 있다.

사법부
영국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방글라데시의 법률체계는 관습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방글라데시 사법부의 구조는 대법원, 지방법원, 특별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법원(Supreme Court)은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Dacca에 소재하고 있으며, 상소부(Appellate Division)와 고등부(High Court Division)로 구성된다. 대법원장 및 상소부, 고등부 판사는 총리 및 법무장관의 권고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들의 정년은 65세이다. 대법원 판사의 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만큼 임명할 수 있다. 상소부 판사는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7명이며, 고등부 판사는 32명이다.

지방법원은 각 군(district)마다 설치되어 있다. 지방법원에는 형사 사건만을 담당하는 치안판사(magistrates)와 형사·민사 사건을 모두 담당하는 판사(judges)가 있다. 특별법원으로는 행정법원과 노동법원이 설치되어 있다.

경제


방글라데시의 경제 개황
방글라데시의 경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로 출발했다. 차 및 황마생산을 중심으로 근대공업이 시작되었으며, 전형적인 저개발농업국가 구조를 특성으로 하고 있다. 인구 밀도 세계 1위의 국가로서 전체 인구의 약 50%가 농업에 종사하며, 농업이 국내 총생산의 21%를 차지한다. 그리고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제조업 및 기간 시설이 낙후되어 있다. 방글라데시의 주요 생산물은 황마, 피혁, 미곡, 홍차, 사탕수수이다. 그리고 주요 자원은 천연가스, 석회석, 고령토가 있으며, 도량형은 미터법과 영국식 도량형을 혼용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경제인구 구성의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인구가 과밀할 뿐만 아니라 1.29%에 이르는 높은 인구증가율(2009년 기준)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인구 1%에 해당하는 상류층이 국민 총생산의 의 90% 이상 점유하고 있으며, 2008년 재무부 경제 보고에 따르면 1일 1달러 소득 미만인 극빈자가 전체 인구의 41.3%를 차지한다. 또한 통계국은 방글라데시의 문맹률을 47.5%라고 발표했는데, 실제 문맹률은 그보다 훨씬 높은 60%에 달한다.

또한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성이 기후 조건이나 전기 사정에 좌우될 만큼 불안정하다. 그리고 경제 발전 및 인프라 구축 등에 필요한 투자 재원을 외국 자본 및 원조에 의존하고 있으며, 무상원조는 갈수록 줄어들고 상환 부담은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밖에도 여야 간의 극한 대립으로 인한 정치 불안정이 잦은 파업으로 이어져 수출산업 등 제조업 분야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존 자원의 부족으로 산업에 필요한 원부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아 만성적인 무역수지를 해외근로자 송금으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장규모는 매년 확대되고 있지만 낮은 국민소득으로 실질 구매력 증가가 높지 않으며, 수도 다카를 중심으로 치타공, 쿨나, 라샤히 등 주요 도시에 신흥부촌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대규모 도소매상이 없으며, 에이전트들의 활동이 활발한 특성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의하면, 2016년 명목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의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은 2,263억 달러(세계 43위)이고, 1인당 GDP는 1,286 달러(세계 146위)이다. 2014년을 기준으로 수출은 284억 달러, 수입은 416억 달러로 총 교역량은 670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수년간 연 6%대의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개발계획
2005년 이후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은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정권이 집권했을 당시 ‘빈곤 감소 전략보고서PRSP(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라는 명칭의 프로젝트로 2007년까지 3년간 시행되었다. 그리고 과도정부 기간 동안에는 빈곤 감소 전략 프로젝트가 2008년까지 1년간 연장되었다.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정권의 국가경제위원회는 2차 PRSP(2009년 7월~2011년 6월) 3개년 계획을 마련하여 7.2%의 경제 성장률을 목표로 농업 및 발전 분야를 중심으로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경제 인프라
전력 설비 현황: 송전망 시설이 9,530C-㎞(서킷킬로미터), 배전망 시설이 26만㎞로 전체 인구 중 전력 사용 비율은 47%에 달한다. 전기 공급이 비교적 안정적인 도시에서도 잦은 정전으로 산업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2014년까지 전력 수요량이 약 8,000MW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전력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방글라데시 정부는 해외민자발전사업 등으로 2015년까지 5,300MW의 추가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통신: 통신 인프라에서 고정 전화선은 국영 기업인 방글라데시 통신공사에 의해 거의 독점되고 있으나, 현재 회선수는 100만 회선에 불과하여 인구 1000명당 7대에 불과한 상황이다. 휴대폰 서비스의 경우 1989년 민간 업체에 최초 허가된 이후 현재까지 5개사가 서비스 중으로 2008년 말 4000만 가입자를 돌파하였다. 국제통신은 방글라데시 통신공사에 의해 위성이 연결된 4개의 지상중계소를 통해 독점 서비스 중이다. 철도청에 의해 현재 광케이블이 전국적으로 네트워크화되고 있다.

도로 운송: 내륙 운송화물의 63%, 내륙 승객의 73%가 도로망을 이용한다. 그리고 자무나 대교(Jamuna Bridge)의 완공으로 방글라데시 도로 운송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으며, 이어 파드마 강의 쿨나Khulna-룹샤교 등이 완공되어 동서 교통이 원활하다. 도로망과 더불어 총연장 2,880㎞의 철도는 바리살Barisal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방의 주요 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며, 다카Dacca와 자무나 대교 간 42㎞ 철로가 2005년 말 완공되어 국토의 동서 연결이 가능하다. 내륙 운송화물의 30%, 내륙 승객의 20%~25%가 철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46개의 상업용 열차(우편, 특급, 지방)가 운영 중이며, 이 가운데 26개의 열차편이 민영화되었지만 대부분의 열차가 50년 이상 되어 노후화가 심각하다.

산업 정책과 동향
방글라데시는 매 3년~5년마다 산업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정책의 주된 내용은 식량 자급을 목표로 농업의 발전 관련 공업 부문에 대한 중점 투자, 수출 품목 다변화를 위한 트러스트thrust 산업에 대한 지원 확대, 산업 입지의 분산을 통한 지역 간 균형 발전 도모, 수입대체산업 육성 등이다.

방글라데시는 점차 전통적인 농업 위주 산업구조에서 탈피하여 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으나, 아직까지는 의류산업 이외에 뚜렷한 전략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입으로 대체하는 수준이다. 제조업은 기초산업의 부재로 대부분의 자본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제조업 가운데 섬유(봉제) 산업이 전체 수출의 79%를 점유하고 있다. 기타 의약품, 냉동 어류, 황마, 차, 가죽 등을 수출한다. 최근에는 식음료 및 담배, 화학 및 고무 플라스틱, 제지 및 인쇄출판 등 분야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다.

향후의 전망
IMF는 2016년 10월 초 발표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방글라데시가 2016년에 6.9%의 성장을, 2017년에도 6.9%의 성장(GDP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방글라데시의 7년 연속(2010년부터) 6%대 경제성장과 2006년(6.9%) 이후 가장 높은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IMF는 방글라데시의 2017년 각 경제지표에 대해 GDP성장률 6.9%, 1인당 GDP 1,508달러, 인플레이션 6.9% 등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망은 방글라데시 최대산업인 봉제업의 수출이 다소 회복된 가운데 농업생산과 해외근로자 송금 호조가 이어지고, 2015년 하반기 이후 정정이 다소 안정됨에 따라 내수 및 신규투자도 더디나마 회복되는 추세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1인당 GDP가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향후 방글라데시 국내 소비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전망인데, 특히 화장품 등 미용 관련 산업, 현대식 식품유통망, 프랜차이즈 등 식품과 소비재 및 연관 산업분야에 대한 기업의 투자가 확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은 여전히 현지 협력업체를 통한 간접 진출을 선호하고 있으나, 성장일로에 있는 내수소비시장을 잡기 위해서는 안테나숍의 운영 등 직접 진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방글라데시의 인터넷 사용 인구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어서면서 새로운 산업과 소비 양상을 만들어가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방글라데시 대기업들은 내수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를 추진하고 있으나 신제품 설비를 들여올 여력이 없어 중고설비 및 기술 수입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특히 직접적인 가격 비교에 노출되지 않는 생산라인의 일괄 수출의 경우 높은 수익성도 함께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와 문화


문화예술의 특징

방글라데시의 문화예술은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과 방글라데시 고유의 것, 그리고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근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방글라데시 기층 문화로서 음악과 춤 중 일부는 인도문화와 접목이 되어 있다. 대표적인 전통음악으로는 바티아리Bhatiali, 바울Baul, 마르파티Marfati, 무르쉬디Murshidi, 바와이야Bhawaiya 등이 있다. 음악과 춤에 사용되는 악기들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 드럼 등 다양하며, 여러 가지 악기의 아름다운 협주를 통한 연주가 청중을 사로잡는다.

특히 방글라데시인들은 시詩에 대한 열정이 높은 편이다. 라론 샤Lalon Shah, 하손 라자Lason Raja 등의 걸작이 있다. 20세기 작가인 카디 나즈둘 이슬람은 방글라데시의 국민시인이며, 방글라데시 사람인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1913년 노벨상을 받았다. 타고르의 시 ‘우리의 황금 벵골’은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세계에 널리 알려진 시성詩聖 타고르도 방글라데시 출신일 정도로 온 국민이 시를 사랑하며, 그 때문인지 몰라도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손꼽힌다.

수공예는 방글라데시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예술품이다. 중세 시대의 수공예품은 주로 직물, 금속물, 보석가공, 목각품, 대나무 목각, 토기 제작 등이었으나 이후 가죽이 수공예품의 재료가 되었다. 낙쉬 칸타Nakshi Kantha라는 자수품이 가장 대중적인 수공예품이다.

민족의 구성
방글라데시는 벵골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일 민족국가라 할 수 있다. 소수민족 구성비가 낮아 비교적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가 분할되는 과정에서 다른 지방의 무슬림인(특히 비하르 주 출신의 비하리인)들이 소수 이주해 오긴 했으나, 원래부터 벵골인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더욱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때 다른 민족의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으로 이주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비하리인은 전쟁 직전에는 100만여 명이 살고 있었으나, 상당수가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나머지 15만 명은 피난을 갔다가 난민촌에 살면서 파키스탄 국적 혹은 방글라데시 국적도 얻지 못한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2009년에 대법원 판결에 의해 국적을 부여받았다. 그 결과 현재 동부에 거주하는 불교계 소수 민족 원주민들이 비하리인보다 많아졌다. 방글라데시 내 소수 민족은 약 1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치타공 시의 구릉지대CHT(Chittagong Hill Tracts)에는 독특한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100만 명의 13개 소수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종교와 교육
방글라데시는 국민의 83%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그 밖에 힌두교가 16%를 차지하고, 불교 0.7%, 기독교 0.3% 등이다. 1988년 6월 8차 헌법 개정 시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언하였다. 방글라데시 이슬람교 종파는 수니Sunni파이다. 전국적으로 20만 개 이상의 이슬람사원(Mosque)이 있고 수도 다카에만 2,000개의 이슬람사원이 있다. 방글라데시의 이슬람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이 지대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미약한 편이다.

방글라데시는 정부의 노력으로 1990년 초부터 초등학교 취학률이 높아져 현재는 97%에 이르고 있으나, 교육수준은 전반적으로 낮다. 방글라데시의 #교육 정책#은 이슬람교 이념과 가치 전수에 중점을 두는 한편,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고급 기술 인력 및 기능 인력 수요 충당을 우선으로 삼고 있다.

학제는 초등 5년, 중등 5년, 고등 2년, 대학 2년~5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은 컬리지College와 유니버시티University로 나뉜다. 컬리지는 2년 과정이며 일반교양 과목을 이수하여 졸업하면 문리학사를 취득할 수 있다. 유니버시티는 3년 과정인데, 컬리지 졸업 후 유니버시티 진학을 위해 자격시험을 치러야 하며, 유니버시티를 졸업하면 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방글라데시를 대표하는 대학교로는 다카 대학교University of Dhaka, 노스사우스 대학교North-South University, 치타공 대학교University of Chittagong, 방글라데시 농업대학교Bngladesh Agricultural University, 라지샤히 대학교University of Rajshahi, 쿨나 대학교University of Khulna, 방글라데시 엔지니어링 대학교Bangladesh University of Engineering and Technology, 개방 대학교Open University 등이 있다.

언론
방글라데시는 언론의 자유가 비교적 잘 보장되어 있으며 신문사가 상당히 많다. 20여 개의 언론기관이 있으며, 150종 이상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다. 총 발행 부수는 160만 부에 이른다. 그 가운데 다이닉 인킬라브Dainik Inqilab와 다이닉 이테팍Dainik Ittefaq이 유력지인데, 둘 다 벵골어 신문이다. 영자 신문으로는 더 데일리 스타The Daily Star와 더 방글라데시 옵서버The Bangladesh Observer가 유명하다.

현지어 라디오 방송은 방글라데시 베타Bangladesh Betar, 라디오 투데이Radio Today, 라디오 푸르티Radio Foorti, ABC 등 4개 채널이 운영되고 있다. TV는 국영으로 운영되는 방글라데시 TV와 11개의 민영 케이블 방송이 있다. 케이블방송은 채널-I, ATN 방글라Bangla, NTV, RTV, 방글라 비전Bangla Vision, STV, 바이사키Baishaki TV, 마이My TV, 채널 원Channel One, 디간타Diganta TV, 이슬라믹Islamic TV 등이다.

통신사로는 국영 방글라데시 상바드 상스타BSS(Bangladesh Sangbad Sangstha)와 방글라데시 유나이티드 뉴스UNB(United News of Bangladesh)가 있다. 그리고 로이터Reuters, AP, AFP, 신화사 등 외국 통신사 현지 에이전트가 주재하고 있다.

관광
방글라데시의 관광지는 이슬람교적 배경 및 경제활동 부진 등의 이유로 거의 개발이 안 된 상태이다. 주요 관광지는 유네스코가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한 순다르반Sundarban, 치타공Chittagong 남부 지역에 위치한 세계 최장 해안선인 콕스 바자르Cox’s Bazar 해안, 랑가마티Rangamati 지역에 있는 카프탈 호수Kaptal Lake, 치타공 구릉지대Chittagong Hill Tracts 소수 민족촌, 북부 실렛Sylhet 차농원 등이 있다.

한국과 방글라데시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은 1972년 5월 방글라데시 정부를 승인했으며, 1973년 9월 영사 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같은 해 12월 양국간에 정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1975년 3월에는 주 방글라데시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으며, 1987년 2월에는 주한 방글라데시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방글라데시는 과거 비동맹 중립외교 노선을 표방하면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1990년대 이후 한국과의 실질 협력관계가 심화됨에 따라 북한과의 관계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방글라데시는 북한 핵문제 및 남북한 관련 사안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2009년에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2차 핵실험에 대해 북한 비난 정부 성명을 발표하였다. 현재도 방글라데시는 국제 협약에 따라 한국의 입장을 적극 대변해 주는 우방국이다.

경제 관계
한국과 방글라데시는 2014년 기준으로 15.9억 달러의 교역량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대對방글라데시 수출은 12.4억 달러이고 주요 수출품목은 합성수지 경우 열연강판 등이며, 대對방글라데시 수입은 3.5억 달러이고 주요 수입품목은 의류 섬유 가죽 등이다.

한국의 대對방글라데시 투자는 2015년 9월까지 누계를 기준으로 6.02억 달러(신고금액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1978년 (주)대우에서 방글라데시 정부와 봉제 합작투자를 한 것이 시초인데, 이는 방글라데시 섬유산업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영원무역의 합작투자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방글라데시는 의류생산기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기업의 대 방글라데시 투자는 한국의 임금이 급상승했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본격화되었고, 1994~1999년 사이의 기간 동안 피크에 달했다. 1997년 방글라데시 정부가 섬유쿼터 확보 목적의 단순가공 분야의 투자를 제한하고 섬유 전후방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조건부 투자를 허용하면서 우리나라의 방글라데시 투자 진출은 감소세를 보였다. 2002년 이후 방글라데시에 대한 연간 투자액은 1990년대 중후반에 비해 훨씬 적은 수준을 보였다. 그러나 2010년부터 투자가 다시 증가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사상 최대(4,483만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 베트남 등의 생산비용 상승에 따라 방글라데시와 같은 저임금국에 대한 진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우리나라는 섬유 및 의류 등 제조업에 투자가 집중되어 있으며, 일본과 함께 이 분야 최대 투자국의 하나이다. 방글라데시 투자통계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우리나라는 섬유 의류 분야에서 최대 투자국(2억 9,534만 달러)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연구개발센터(삼성전자), 은행(우리은행) 등 새로운 분야로 우리기업의 투자가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대對한국 수출은 한국의 대對방글라데시 특혜관세 공여 품목 확대로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현재 방글라데시 정부는 석탄발전소(15억 달러), 원전(20억 달러), Sonadia 심해항(140억 달러), LNG 터미널 건설(10억 달러)등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데 한국 기업은 파드마대교 시공감리, 복합화력발전소 건설, SASEC 도로 시공감리 등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2014년 1월 방글라데시 방산품목 조달등급이 상향 조치가 된 이후 우리 방산제품의 수출도 증가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공동위원회 및 친선단체
1985년 6월 에르샤드 방글라데시 대통령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체결된 양국 대통령 간 공동성명(제9조)에 따라 매년 서울과 다카Dacca에서 양국 외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하여 무역, 투자, 기술협력 등의 사안을 다루기 위한 공동위원회를 교대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86년 다카에서 제1차 공동위원회가 열렸고, 1987년 제2차 공동위원회, 1993년 제3차 공동위원회가 열린 바 있다.

양국 간 친선단체로는 1988년 결성된 ‘한국-방글라데시 의원친선협회’와 1985년 결성된 ‘한국-방글라데시 경제협력위원회’, 그리고 1980년대 말 창립된 ‘한국-방글라데시 문화친선협회’가 있다. 이밖에도 ‘한국-방글라데시 국제협력단 연수생 동창회’와 ‘한국-방글라데시 친선협회’ 등 정부에 등록하지 않은 단체들이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재외동포 현황
2014년 1월 현재 우리나라 재외국민으로 방글라데시 체류자는 약 1,100명이며, 주로 섬유봉제 투자자, 기술자, 상사주재원, 자영업자, 비정부기구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 종사자, 선교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인단체로는 1982년 12월 10일에 창립한 재 방글라데시 한인회, 1978년 1월에 창립한 다카 한인교회, 다카 선교교회, 한국민간문화원 등과 더불어 섬유회, 투자자협의회, 상사협의회, 자영업회(요식업 및 숙박업) 등도 있다. 2012년 기준 인적 교류 현황을 살펴보면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한국인은 7,578명이고, 한국을 방문한 방글라데시인은 5,423명으로 집계되었다.

북한과의 관계
방글라데시와 북한은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77년 5월 주방글라데시 북한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방글라데시는 북경에 있는 주중국 공관이 북한을 겸임하고 있다. 초기에는 양국이 같은 비동맹회원국으로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실질 관계에는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2년 에르샤드Ershad 대통령 집권 이후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와의 경제협력을 중시하며 남북한 등거리외교정책 노선으로 전환하였고, 2008년 집권한 하시나Hasina 총리 정부가 경제 발전에 우선 순위를 둠에 따라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심화되는 반면 북한과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져 가는 추세이며, 방글라데시 정.재계 및 언론에서도 북한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경제 통상 관계에 있어서 양국은 1997년 구상무역협정(Barter Protocol)을 체결하였지만 무역 실적은 미미한 편이며 특별한 경제협력관계 또는 무상원조 실적도 별다른 것이 없다. 북한의 대표적인 대對방글라데시 투자 사례로는 마드하파라 지역 경석 광산 개발 사업에 약 1억 5,800만 달러를 투자한 것을 들 수 있고, 방글라데시의 대對북한 투자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7/2008년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의 대對북한 수출은 8,701만 달러, 수입은 1,281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2010년 2월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에 진출한 북한 인력은 북부 Dinajpur지역 경석 채굴 공사장에 근로자 및 기술자 27명과 다카 시내 북한식당 ‘평양관’에서 상주하는 종업원 및 요리사 등 총 10여 명, 그리고 다카 지역을 중심으로 나가 있는 북한인 한의사 3명 등이다. 방글라데시 내 친북한 단체로는 ‘방-북한 친선협회’와 ‘방글라데시 주체사상연구소’ 등이 있다.





샤히드 디보쉬 Shahid Dibosh (모국어의 날)


매년 2월 21일은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로 ‘샤히드 디보쉬Shahid Dibosh’라 불리는 ‘언어 수호의 날’이다. 이 날은 유네스코가 정한 ‘국제 모국어의 날’(Internatianal Mother Language Day)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인들에게 이 날은 국가의 독립 및 언어와 관련하여 특별한 역사와 더불어 민족적 자부심을 갖는 날이다. 여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757년 이래 오랜 시간 동안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방글라데시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파키스탄의 11개 주 가운데 1개 주(동東 파키스탄 또는 동東 벵골)로 독립을 하였다. 당시 동서 뱅골 지역은 종족과 언어가 달랐지만 이슬람이란 종교적 공통점 때문에 파키스탄과 묶여 동 파키스탄으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서 파키스탄)는 동 벵골(방글라데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공공연히 경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하였고, 그러한 차별로 인한 불만들이 점점 누적되어 극에 달했을 시점에서 파키스탄 정부는 동 벵골인들에게 비수를 꽂는 결정적인 조치를 발표하게 된다. 동 벵골에 대한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벵골어를 말살하고 파키스탄의 우르두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한 것이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벵골어를 제외시키고 문학에서도 모국어 표현을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 벵골의 다카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소위 ‘언어운동’이라 불리는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과 많은 시민들은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벵골어가 파키스탄의 공식 언어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부상이나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들의 삶을 바쳤다. 방글라데시 역사에 길이 남을 이날이 1952년 2월 21일이었다. 이날의 시위에 대해 서파키스탄 군인들이 폭력 진압으로 대응하면서 이 사태는 방글라데시 독립 운동 개시의 촉매 역할을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결과 1956년 드디어 벵골어가 국가 공식 언어로 정식 공표되는 결실을 이루게 되었고, 1971년 3월 2일에는 방글라데시가 파스키탄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1999년 11월 17일, UN의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2월 21일을 ‘국제 모국어의 날’로 지정하였다. 이는 방글라데시 언어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수용하여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 다언어多言語의 사용, 그리고 각각의 모국어를 존중하자는 뜻에서 지정된 기념일이다. 모어母語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자 권리를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방글라데시Bangladesh라는 국명은 벵골어를 뜻하는 ‘방글라Bangla’와 나라를 뜻하는 ‘데시desh’가 합쳐진 이름으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나라’를 뜻한다고 한다. 이 국명을 보더라도 방글라데시인들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알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 대학 캠퍼스와 마을의 입구에는 샤히드 미날Shaheed Minar이라 불리는 기념비가 위치해 있다. 이것은 파키스탄의 벵골어 말살 정책에 대항해 싸우다가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매년 2월 21일 되면 많은 사람이 가까운 샤히드 미날을 찾아 꽃을 바치며 희생된 이들을 추모한다. 특히, 다카대학교 캠퍼스의 샤히드 미날에는 대통령이나 총리, 많은 정치인뿐 아니라 전국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온종일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에는 관련된 기념 행사나 공연 등이 온종일 이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이라 하여 세종 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반포를 기념하기 위한 국경일로 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여러 연구 등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방글라데시인들만큼 모국어에 대해 자부심과 존중심을 갖고 있는지 한 번쯤 자문해 보았으면 한다.

문화적 금기 사항

방글라데시에서는 기본적으로 이슬람교의 계율에 반하지 않게 행동할 필요가 있으며 문화적으로 금기시되는 사항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우선 악수를 하거나 물건을 받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며, 왼손은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므로 사용에 유의해야 한다.

여성들은 허리 위 부분의 노출은 할 수 있으나, 허리부터 발끝까지는 철저히 가려야 한다. 여성이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성적으로 문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방글라데시에서 여성이 반바지를 입는 경우는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인사할 때도 여성과는 악수를 하지 않는다. 여자를 빤히 바라보는 것도 실례가 된다.

또한 발끼리 부딪히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므로 남의 발을 밟았거나, 부딪혔을 때에는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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