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돌아온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김현일 연구위원

2016.07.05 | 조회 7257

'돌아온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독특한 민족이다. 유대인들은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항하다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수 세기 동안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았다. 이른바‘ 디아스포라Diaspora(유대인의 이산離散)’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서든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지키며 살았고, 끝내는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이라는 작지만 강고한 나라를 건설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및 주변 아랍국들과 대립하며 생존을 위한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유대인이 지닌 힘과 문화에 대한 엇갈린 평가 속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


 

시원민족과 왕국의 형성

이스라엘Israel 지역은 고대에 가나안Canaan이라 불리우는 땅이었다.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인 가나안족은 BCE(기원전) 7000년 경부터 농경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지역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위치하여 두 문명이 자주 충돌했던 관계로 셈족, 히타이트족 등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BCE 17세기에 족장 아브라함이 이끄는 히브리족(헤브라이족, Hebrew)이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의 시원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데, 히브리족은 엄청난 기근 때문에 이집트의 나일 강 하류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집트에서의 탄압과 노예 생활에 견딜 수 없었던 히브리족은 BCE 13세기 경 다시 모세Moses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출애굽 사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후 BCE 1020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Saul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이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David 왕과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설한 솔로몬Solomon 왕이 뒤를 이으면서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로마의 지배와 유대인의 추방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위 다툼으로 인하여 BCE 930년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E 722년에 앗시리아 왕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E 586년 신新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면서 유대인(유태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바빌론 유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 때 유대인들은 풀려나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E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해 그리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속주屬州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BCE 1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동방으로 세력을 뻗치던 로마가 유대 왕국의 내란에 개입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대 왕국은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유대 지방이 로마의 정식 속주가 되어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CE 6년이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와 전통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유대인들은 66년에 로마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수년 동안 벌어지다 결국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으나 일부 극렬파 유대인들은 사해 인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까지 저항을 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73년 집단자결로 끝이 났다. 이 전쟁 때 이스라엘 왕국의 도성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신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 이 성전이 사라져 하나님에게 예배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이후 유대교는 회당(시나고그) 중심의 종교가 되었다. 131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고 옛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터에 로마의 주신 유피테르를 제사하는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유대 속주의 이름도‘팔레스티나’로 바꿔버렸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시몬바르 코크바를 지도자로 하여 맹렬히 저항하였으나 반란은 진압되었다(CE 135년).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었다.

시온주의Zionism 운동의 등장

로마의 탄압 속에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고향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 벌어졌을 때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수는 수만 명에 불과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종교 때문에 현지인들에 잘 동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게토ghetto(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 강제 격리를 위해 만든 거주 지역)에 모여살고 직업선택에 제한을 받는 등 천민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살던 곳의 주민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것은 프랑스혁명기부터였다. 프랑스는 혁명의 주된 이념인 자유와 평등에 입각하여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것이 유대인 해방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서유럽에서는 점차 철폐된 반면 동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더 나아가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논의와 운동이 19세기말 시작되었다. 이러한 운동을‘시온주의Zionism’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에서 온 말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60-1904)에 의해 명확한 강령과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896년 『유대 국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세계 시오니스트 총회가 스위스 바벨에서 개최되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영국 정부가 추천하는 아프리카의 우간다, 시나이 반도에 있는 엘 아리쉬 등이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오로지 팔레스타인만이 유대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그리고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 실용주의적 입장이 우세해져 일단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정착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 초에 들어 유럽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주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것은 러시아 유대인들이었는데 당시 러시아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유독 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이 등장할 무렵 팔레스타 인에는 유대인들이 3만 5,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물결이 있었는데 도합 45만명 정도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고 추정된다.

이스라엘의 건국

유대인들의 이민과 건국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측에 가담하였는데 그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싸웠던 영국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용의가 있음을 선언한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이 전쟁에 협력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인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를 맡은 영국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이주는 계속되었다. 특히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독일에서 많은 난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영국 위임 통치 당국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발생 하였다. 유대인들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영국과 싸워 결국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유엔UN(국제연합)에 위임하였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어 독립시킨다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아랍 국가들은 모두 이 안에 반대했지만 소련이 적극 찬성하고 동구권 국가들도 찬성표를 던져 안건이 쉽게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는 소련이 소수민족의 독립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소련은 이스라엘이 친미 국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미소의 냉전이 조금만 일찍 시작되었더라도 소련과 동구권의 반대로 이 스라엘의 건국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국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곧 바로 전쟁이 시작되었 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 주변 아랍권 국가 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75만명 정도였는데 주변의 아랍국가들 인구는 3천만이 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일 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호언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뒤엎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점령하였다. 전쟁은 유엔의 중 재로 다음 해 봄에 끝이 났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그 후에도 서너 차례 이상 계속되었다. 시나이 전쟁(1956), 6일 전쟁(1967), 욤 키푸르 전쟁(1973)이 있었고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여 일어난 소규모 레바논 전쟁도 있었다. 이 다섯 차례의 전쟁 가운데 독립전쟁과 욤키푸르 전쟁을 제외하면 나 머지는 모두 이스라엘의 선공으로 일어났다. 6일 전쟁은 단 6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을 통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구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골란고원Golan Heights은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이 있는 높은 산지로 이스라엘의 방어를 위한 전 략요충지로서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시 리아에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점령하고 있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상실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복수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 때 이집트는 수에즈운하까지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1979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하였다.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문제로 남부 레바논을 공격, 점령한 전쟁으로 이전 전쟁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존립이 문제된 것은 아니었다.

1988년에는 이스라엘의 건국에 의해 내쫓긴 팔 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선언하였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회담을 통해 국가의 지위를 달성하였다(2012년). 그 전까지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 았으나 그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이스라엘이 점 령하고 있던 요르단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자 치권을 획득하는 타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 해결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하마스 Hamas 같은 단체가 테러 활동을 그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속함으로써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영토와 자연환경


이스라엘의 지형은 평원, 산악, 사막, 해안으로 이루어진 좁고 긴 형태(남북 470km, 동서 135km)로 되어 있다. 현재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지구(동예루살렘 포함)은 팔레스타인의 자치영역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지역들을 제외하면 이스라엘의 영토면적은 2 만 평방킬로미터 정도로 우리나라의 경상북도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다. 그런데 이 땅 중에서도 적지 않은 부분이 황무지다. 황무지는 ‘네게브’라고 하 는데 히브리어로 건조하다는 뜻이다. 식물이 살기 힘든 이런 황무지가 이스라엘 영토의 절반을 넘는다. 기독교 바이블에 나오는 유대 광야가 바로 이 곳에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비옥한 지대가 없지 않다. 예수의 고향 마을 나사렛이 위치한 갈릴리 지방이 대표적인 곳이다. 골란 고원에서 시작 된 계곡의 물이 모였다가 흘러나가는 갈릴리 호수가 있는 이 지방은 수자원이 풍부하여 농업에 아 주 유리한 곳이다. 또 갈릴리 지역으로부터 서쪽의 카르멜 산지까지 길게 뻗어 있는 이즈르엘 평원도 비옥한 농경지대이다. 건조지대에 위치한 이 스라엘에는 요르단강을 제외하면 강이 거의 없 다. 요르단 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왕국의 경계선을 이루며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중요한 수자원 노릇을 하고 있다. 요르단 강은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사해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해수면보다 300m 나 낮은 곳에 위치하여 물이 흘러들면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다. 그리하여 물이 흘러들 뿐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염도가 매우 높다. 보통 바다보다 대여섯 배나 염도가 높다. 그래서 사해에는 소금이 둥둥 떠다닐 정도인데 이 때문에 소금을 원료로 하는 화학공장들이 부근에 여럿 들어 서 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수도는 예루살렘이지만 경제중심지는 지중해에 면한 현대식 도시인 텔아비브이다. 인근에 오랜 항구도시인 야파가 있었는데 20세기 초부터 유대인 이주민들이 몰려들어 텔아비브에 도시가 형성되고 독립 직후에는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합쳐졌다. 금융과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중동에서는 두바이 다음가는 경제중심지이다. 이스라엘은 서쪽 해안지대는 대체로 평탄한 반면 동쪽으로 가면 지대가 높아진다. 예루살렘은 고도가 750m에 달한다. 그리고 온통 바위투성이 산지이다. 적어도 예루살렘을 보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이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세계적인 종교중심지였다. 유대교의 성전이 있었고 또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고 또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성지일 뿐 아니라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마호메트가 이곳에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현재 구예루살렘에 있는 알 아크사 모스크는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곳에 세워졌다.

예루살렘은 옛 이스라엘 왕국의 2대 왕인 다윗 때부터 수도가 되었는데 다윗은 이 도시를 여부스 인들이라는 이방 족속으로부터 뺏었다고 한다. 여부스 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 한 다윗은 이곳에 성과 궁전을 세웠으며 그 아들 솔로몬 왕은 화려한 성전을 건립하였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으로부터 치 자면 적어도 3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로 따지자면 이보다 훨씬 오랜 도시가 있다. 바로 여리고(영어로는 ‘제리코’)이다. 여리고는 구약성서의 여호 수아(BCE 14세기) 이야기에 나오는 도시인데 광야에서 방랑하다가 가나안으로 들어 온 이스라엘인들이 원주민들로부터 빼앗 은 첫 번째 도시였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여리고에는 BCE 9,000년 전으 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성이 있었다. 성벽 과 탑의 유적이 그것을 말해준다. 여리고는 현재는 팔레스타인의 서안 지구에 속 하는 곳이다.

이스라엘은 지중해를 제외하고도 바다에 면한 곳이 있다. 홍해에서 북쪽으로 쑥 들어온 아카바만이 이스라엘의 영토이다. 정확히 말해 이 지역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이 몰려 있다. 홍해로 나가는 요충지인 이곳 에는 고대로부터 유명한 항구가 있었는데 요르단의 아카바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유명한 휴양도시 에일라트가 있다.

정치 및 행정


이스라엘의 정치체제는 의회민주주의 공화정이며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나라이므로 유대인의 전통 및 유럽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영향을 받아 각종 이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표출하는데 익숙하며, 주변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의회민주주의가 잘 정착되어 있다. 입법부인 이스라엘 의회 크네셋Knesset의 의원 선거는 의원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정당을 뽑는 방식이다. 크네셋은 전국을 하나의 선거구로 하여 정당별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선출된 12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각 정당은2%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의원을 낼 수 있고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최근 총선으로 구성된 18대 의회에는 14개 정당이 의회에 진출할 정도로 이스라엘에는 정당들이 난립해 있다. 의회에는 절대다수당이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여러 정당들이 연립하여 정부를 꾸리게 된다. 주요 정당은 리쿠드당과 노동당으로 전자는 민족자유주의(보수), 후자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진보)을 가지고 있다. 양당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형태는 1965년에 갖추어졌다. 2013년 총선에서는 리쿠드-베이테 이누 연합을 제1당으로 하여 연립정부(총 68석)가 구성되었고, 중도성향의 예쉬 아티드, 노동당, 극우성향의 유대인 가정당Jewish Home이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행정부인 정부수반은 제1당에서 선출된 총리가 맡으며 국가수반인 대통령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권한만을 갖는다. 대통령은 개인적 위상과 국가에의 공헌도를 기준으로 선정된 후보 가운데 의회의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며, 임기는 7년이고 연임은 금지되어 있다. 2013년 현재 이스라엘의 대통령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2007~현재)이며, 총리는 리쿠르당의 당수인 벤야민 네탄야후Benjamin Netanyahu(2009.3~현재)이다. 네탄야후 총리는 역대 수상 가운데서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수상이라고 한다. 그 동안의 수상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으로 온 이주민들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행정부는 국가의 안보를 포함한 국내외 관련 업무 등을 관장하는데, 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은 매우 방대하여 법에 의해 위임받지 않은 다른 기관의 업무도 수행토록 되어 있다. 의회와 마찬가지로 내각도 4년을 임기로 하며 총리의 사임이나 서거, 의회의 불신임으로 임기가 단축될 수 있다.

사법부는 독립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법관은 대법원 판사, 법조계 인사, 공직자(장관, 의회 의원 등)로 구성된 특별 지명위원회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법관의 정년은 70세이다. 법원은 치안판사재판소(판사 1명), 지방법원(판사 1명 또는 3명), 대법원(홀수의 판사), 특별법원(판사 1명), 종교법원(판사 1명 또는 3명)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지방자치 단체는 교육, 문화, 보건, 사회복지, 도로관리, 공원, 상수도, 위생, 소방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법률을 보완하기 위해 내무부 승인을 받은 조례에 따라 기능을 수행한다. 일부 지자체는 조례를 어긴 사람들을 심리하는 특별 법정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는 법률상 세 종류의 지자체가 있는데, 시municipality는 인구 2만 이상, 군local council은 인구 2천 내지 2만, 면regional council은 여러 개의 부락을 관할한다. 현재 69개의 시, 141개의 군, 54개의 면이 있다. 각 지자체는 시장과 지방 의회가 관리하며, 의원의 수는 관할지역의 인구에 따라 내무부가 결정한다. 지방선거는 매 5년마다 비밀 투표로 행해지며, 시장과 군수는 직접 투표로 선출된다. 면 선거에서는 각 부락의 최다득표자가 의원으로 선출되고 면장은 의원들이 선출한다.

경제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국방과 안보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진국 가운데서는 GDP나 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편이다. 한국이 GDP 대비 국방비가 2.5% 반면 이스라엘은 6%를 넘는다. 또 병력확보를 위해 특이하게도 남녀 모두에 대한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다. 복무기간은 남성의 경우 3년이며 여성은 그보다 약간 짧다. 이스라엘은 과학기술 수준도 매우 높기 때문에 첨단 무기들도 많이 갖추고 있다. 주변 적대국가들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체제를 개발하였으며 핵무기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군사정찰 위성들도 운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미국 다음으로 첨단기술을 이용한 창업이 활발한 국가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의 높은 교육수준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 많은 세계적 IT 기업들이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 해외 연구개발(R&D) 센터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첫 번째 해외연구개발 센터를 이스라엘에 세웠다. 이스라엘은 또 주변의 중동국가들과는 달리 농업도 매우 생산성이 높은 선진적인 농업으로 만들었다. 초기 유대인 이민자들은 키부츠Kibbutz라는 농업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했는데 키부츠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적 공동체이다. 그 구성원들은 모두가 각자의 능력에 맞게 노동을 하고 분배하는 공동체로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키부츠가 많이 존재한다. 최초의 키부츠는 1910년 갈릴릴 호수 남쪽에 세워진 드가니야 키부츠였다. 초기의 키부츠들은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적인 옥토로 바꾸어나갔다. 이스라엘은 키부츠에서 볼 수 있듯이 소농 중심이 아니라 기업농 중심이다. 높은 교육을 받은 이주민들이 운영한 키부츠는 하이테크 농업을 개발하였다. 물을 최대한 절약하는 스프링클러, 점적설비 및 다양한 제어기기 등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농업기술이다. 농업에서 보듯 자원도 없고 국토도 협소한 이스라엘은 뛰어난 인적 자원을 이용해서 선진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현재 이스라엘의 1인당 GDP는 31,691 달 러에 달해 중동에서는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자랑한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노력 여부에 따라 불리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얼마든지 선진적인 경제를 이룩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준 귀중한 사례라 할 것이다.

문화와 종교


 

사회 문화적 특성

이스라엘은 국토는 좁지만 다양한 윤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채 세계 각국에서 이주한 유대인과 아랍인,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회가 역동적이고 활력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전체 인구 중 0~24세의 비율이 43.5%로서 OECD 국가의 비율(24%~31%) 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젊은층이 많은 구조적 배경으로 인해 사회가 비교적 역동적이며 생산성이 높은 특성도 보인다. 사회구성원간의 관계도 예의보다는 실리를 앞세우고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의 융합은 상대방의 차이를 용납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2000년이 넘는 유랑생활Diaspora의 경험은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시온주의Zionism를 통하여 조상의 땅을 되찾으려는 열망을 구체화시켜, 이스라엘 안에서 자발성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유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와 함께 건국을 전후하여 개척정신에 입각, 소련 및 중동부 유럽으로부터 이주한 유대인들이 평등주의와 공동 사회 원칙에 기초하여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을 시도한 키부츠Kibbutz는 새로운 사회의 모델로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1948)은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각각의 종교 공동체는 안식일, 신앙생활, 내부 문제를 관리하는데 있어 자유롭다. 각 종교는 법에 의해 종교 의회와 법원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되어 있으며, 종교 법원은 결혼, 이혼과 같은 개인의 신상 문제에 대해 관할권을 가진다. 종교 사원으로는 유대인 회당Synagogue과 이슬람교 사원Mosque 및 교회Church 등이 있다. 성지聖地는 각 종교의 직권으로 관리되고 접근과 예배의 자유도 법에 의해 보장된다. 예를 들어, 유대교도에게는 ‘통곡의 벽Wailing Wall’과 성전산 등이, 이슬람 교도의 경우 성전산에 있는 하람 아슈 샤리 프 복합 건물로 ‘바위 사원’과 알악사 이슬람 사원 등이, 기독교 교도의 경우 예루살렘의 겟세마네, 마가의 다락방(최후의 만찬) 등이 중요한 성지로 꼽힌다.

이스라엘에는 코셔Kosher 및 코셔 인증제도라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코셔Kosher 혹은 코셔 음식은 유대교의 율법 카쉬룻kashrut에 의하여 먹기에 합당한 음식을 의미한다. 카쉬룻은 먹기에 합당한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다. 채소와 과일은 일반적으로 코셔로 합당하지만, 육류와 어류, 조류 등은 코셔 판정 기준에 따라 먹을 수 있느냐의 여부가 좌우된다. 율법에서는 돼지와 같이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동물,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 비늘이 없는 해산물 등은 먹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문어나 오징어, 돼지고기 등은 먹지 않는다. 또 코셔라 하더라도 육류를 우유, 치즈 등 유제품과 함께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함께 요리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같이 먹어서도 안 된다. 유대교는 율법의 음식물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코셔 인증서를 별도로 유대교 랍비(율법학자)로부터 받아야 하는데, 해외에 있는 외국기업이 이를 취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코셔 인증을 획득한 업체의 수는 100여 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대인과 유대교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국가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유대인 가운데에는 다양한 혈통들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어머니만 유대인이면 모두 유대인으로 친다. 그래서 중국인의 얼굴을 한 유대인도 있고 아프리카 흑인의 모습을 한 유대인들도 있다. 유대인들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터라 적지 않은 혼혈이 이뤄졌다. 그리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금발도 적지 않다. 혈통으로 유대인들을 규정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크게 쇠퇴하였다. 그렇다면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런데 이것도 좀 곤란한 것이 현재 이스라엘인들의 절반 이상이 유대교를 믿지 않는 세속파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핵심은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선택한 야훼 하나님과 그가 내려준 율법을 믿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 율법은 ‘가르침’이라는 뜻의 ‘토라Torah’에 들어 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내려주었다고 믿는데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에 그 율법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다섯 권의 책들을 토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토라에는 무려 613개에 달하는 율법 조항이 들어 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248개, 하지 말라는 금령은 365개라 한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대체로 준수하는 편이다. 안식일 즉 사바트Sabbath는 금요일 해 질 때부터 -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가 질 때부터 시작된다 - 토요일 일몰시까지인데 이 날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중교통은 운행하지 않으며 실제로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가스불도 켜지 않고 전기스위치도 올리지 않는다. 모두 일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율법 중에는 명절(절기)에 관한 조항들이 많은데 이방인들에게 신기한 것 가운데 하나가 무교절無酵節이다. 유대력으로 1월 15일부터 칠일동안 누룩(효모)이 들어 간 빵이나 누룩이 들어간 술 등 누룩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되며 집에서도 치워버린다. 이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도망 나올 때 누룩이 든 빵을 해서 먹을 겨를이 없이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조상들의 고생을 맛본다고 해서 무교절 기간에는 반드시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먹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모두 이러한 율법준수자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조상 전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전체 국민의 20%를 넘지 않는다. 이들은 하고 다니는 복장부터 남다르다. 여름에도 검은 중절모와 검은 외투를 입고 다닌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는 양옆으로 꼬리 모양으로 길게 땋는다. 학교는 일반 학교가 아니라 ‘예시바’라고 부르는 율법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좋은 직업을 가지기도 힘들고 결혼을 해서도 피임을 하지 않고 자식도 많이 낳는다. 그래서 생활이 힘든 사람들 이 많은데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시대와 역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보수적이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양보나 평화공존에도 반대하는 경우가 많아 평화정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관계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중국, 인도 등의 지지를 얻어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싱가폴 등 아시아권의 경제력이 있는 국가와 경제통상협력 확대를 추진한다는 기본 입장을 갖고 있다. 특히 최근 유럽과 미국의 경제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배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2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우리 나라와 FTA 체결을 추진함으로써 아시아 지역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하고 있고, 국제무대에서도 상호 교환 지지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등 우리나라와의 관계 증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외교관계 수립 이후 교역이 급속히 확대되다가 2008년 하반기에 본격화한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교역액이 급감하였고, 2010년도 들어 교역이 다시 증가하여 2011년도에 25억불을 기록하였다. 2011년 기준으로 한국에 있어 이스라엘은 수출규모로 제39위, 수입규모로 제52위의 대상국이다. 한국의 대對이스라엘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휴대전화기, 평면 TV 등이며 이들 상품에 대한 이스라엘 내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어 미국, 일본, EU 등의 동종제품과 수위 경쟁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로부터의 수입품은 주로 반도체 등 하이테크 제품으로 완성품이 아닌 부품 형태로 들여와 국내에서 이를 활용하여 완제품으로 제조하여 재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시장규모가 작아 제조업 발달이 미약하나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하이테크 산업이 발달해 있어 한국의 건실한 제조업 기반 및 마케팅 능력과 이스라엘의 창의성 및 발달된 하이테크 기술을 결합해 세계 시장 진출을 도모할 여지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 이스라엘은 북한이 이란과 시리아 등 중동지역 내 미사일 및 기술 판매, 여타 대량살상무기(핵기술 포함)의 확산에 관여했거나, 향후 관여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최근 이란핵 문제가 부각되면서 이스라엘은 이란과 북한간의 핵 및 미사일 커넥션에 주목하고 있으며, 북한의 이란 연계를 차단하기 위한 외교적 조치 방안도 연구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북한의 동향에 대해 요주의하면서, 한국과 미국 등 관련국들과 북한관련 정보 교류를 더욱 확대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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