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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 승리의 숨은 조력자 ‘체코군단’ 1

정원식 연구위원

2020.12.15 | 조회 116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 승리의 숨은 조력자 체코군단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경자년 올해는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로부터 자유와 광복을 맞아한지 제75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시에 67일과 1021일은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신기원으로 기록된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 각각 승리를 거둔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기도 하다.

 <봉오동 전투 지역과 청산리 전투 지역>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봉오동 전투

      

100년 전 192067일 봉오동 전투는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가 두만강을 넘어 일본군을 공격하여 괴롭히자, 이에 일본군은 별동부대를 편성하여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 근거지를 토벌하려다가 우리 독립군의 유인작전에 걸려 대패한 전투를 말한다.

봉오동 전투 발발 전 19203월에 작성된 일본 정보자료에 의하면, “19201월부터 3월까지 우리 독립군은 국내진공작전을 총 24회를 실시하여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19201225일자 기사에는 “19203월부터 6월 초까지 우리 독립군이 일제 관공서를 파괴한 곳이 34개소에 달한다.”고 보도하였다.

이는 일본군에게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하여 일본군이 토벌을 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을 했다. 이때 우리 독립군 부대는 소대, 혹은 분대 단위로 익숙한 주변 지형과 지물을 활용하여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법을 적극 구사하였다.

실제 일본군이 토벌군을 편성하여 소탕에 착수하게 된 것은 바로 봉오동 전투가 벌어지기 이틀 전 192065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서 일본군 순찰소대를 타격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다음날 66일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추격해오자, 최진동·운산·치흥 삼형제가 이끈 군무도독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때 이화일 소대장의 유도작전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일본군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는 이를 구실로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와 남양수비대 1개 중대 총 500여 명을 이끌고 독립군 근거지인 봉오동 토벌에 나섰다. 이때 대한북로독군부와 한경세의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1,200여 명)가 일본군 토벌대인 최정예 정규군 맞서 싸워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1225일 자에 일본군 전사자 157, 중상 200여 명, 독립군 전사자 4, 중상 2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이 봉오동 전투는 17일 상해 임정이 무장독립전쟁을 선포한지 5개월 만에 거둔 승리로써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라고 규정했다.

 


<독립군의 봉오동-청산리 대첩과 일본군 토벌작전 현황>

  
 독립전쟁 제2차 대승리---청산리 전투
 

  한편,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 북간도 지역 내 독립군의 항일무장활동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대규모 독립군 토벌작전계획에 착수했다. 그 첫 번째 정지작업으로 일본군은 두만강 건너 중국 영토 내에서 원활한 토벌작전 수행을 위해 10월 2일 중국 마적단 두목 창지앙하오(長江好)로 하여금 훈춘(琿春)의 일본영사관을 공격할 것을 사주한다. 이에 따라 400여 명의 마적단이 훈춘성을 공격하여 살인,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여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수명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비어 있던 일본공사관을 불태웠다.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이다.
    일본군은 이 훈춘사건을 트집 잡아 중국 영내로 진입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여 대규모 독립군 토벌부대를 편성했다. 토벌부대를 세 방향에서 북간도로 이동시키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착수했다. 바로 서남쪽 방향에서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2천여 명, 시베리아 출병으로 파병된 블라디보스토크 동쪽 방향에서 포조군(제11사단과 제14사단)4천여 명, 남쪽 방향에서 조선 주둔군 19사단(함경북도 나남)과 20사단(서울 용산 주둔)1만여 명 등 총 1만 7천여 명이 독립군을 포위공격 하려고 하였다.
   이때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 적극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主戰論)과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避戰論)이 맞섰으나, 현실적으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 병력은 두만강 상류인 중국 지린성 화롱현 청산리 일대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