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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다시 개벽 8회 천주와 하나 되는 시천주侍天主

문계석 연구위원

2017.01.04 | 조회 228

 ◈동학과 다시 개벽 8회

 

 천주와 하나 되는 시천주侍天主

 

3) 시천주侍天主의 의미 분석

 

동학이 보다 위대하고 절대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것은 강령주문 보다는 본주문 13자에 들어 있다. 그것은 본주문이 시천주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운이 교훈가열석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라고 말한 것을 깊이 파고들어 그 핵심을 음미해보면 쉽게 간파해낼 수 있다.

본주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천주侍天主는 동학이 지향하는 바의 가르침을 압축한 중핵이 된다. 그 이유는 동학의 발생 동기가 수운이 영적 대화를 통해서 직접 체험한 천주(상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운이 본래 의도했던 시천주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동학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시천주에 대한 핵심의미의 정곡을 찌르지 못한 채 동학을 운운하는 것은 동학의 근본사상이 왜곡되고 곡해될 우려가 다분히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천주가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을 심도 있게 파악하는 작업은 수운이 의도했던 관점으로 돌아가 자신의 저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종교적 입장과 형이상학적 관점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맥을 잡아 그 중심에서 시천주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노선을 충실하게 따르다 보면 시천주 사상에 대한 기존에 축적된 동학 연구자들의 견해와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방법이 원래 수운이 제시한 시천주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라 생각하며, 시천주가 최소한 양천주사상이나 인내천사상으로 변질됨을 막을 수 있을 길이라 믿는다.

 

에 대한 수운의 풀이

시천주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말하면 모실 시자에 하늘 천주인 주자의 결합어이다. 여기에서 모심은 목적어로서의 대상을 전제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신다는 행위 자체는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모심의 대상은 바로 ’,‘천주天主’,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수운은 에 대해서는 규정을 내리지 않았고 에 대해서만 존칭하여 부모와 같이 섬겨야 하는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에 대하여 명확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었고, 또한 시천주에 대한 설명이 각기 달라질 소지가 발생하게 됐을 것이다.

필자는 모심의 대상을 단순한 하늘이 아니라부모와 같이 섬겨야 하는 인격적인 하느님’, 천주로 설정하고, 시천주란 곧 천주를 부모와 같이 모신다는 뜻으로 파악해야 올바른 이해라고 믿는다.

천주를 모시려면 우리의 지성은 우선 천주에 대한 관념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천주에 대한 관념이 없으면 모신다는 말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에 대한 관념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인식하여 소유하고 있지만, 천주에 대한 관념은 우리 앞에 현시되지 않는 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천주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천주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천주에 대한 관념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근대 인식론의 관점에서 볼 때, 수운의 천주 관념에 대한 기원은 본유관념론과 유사한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훈가에서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는 이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네 몸에 모셨으니사근취원은 태생부터 천주에 대한 관념이 이미 내재하기 때문에 이를 깨달아 천주를 모셔야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천주에 대한 관념이 선험적으로 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천주에 대한 진정한 모심이 되는 것인가를 풀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수운은 모심에 대해서 여러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논학문에서는 공경하여 부모를 섬기는 것과 똑같이 하는 것”, “천주를 지극히 위하는 글자, 권학가에서는 한울님만 생각하소”, “한울님만 공경하면”, 수덕문에서는 천주를 위하겠다는 맹세를 길이 간직하겠음등으로 모심의 뜻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경’,‘위함’, ‘생각등은 모두 자신의 생명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은공을 잊지 않고 늘 몸과 마음을 다하여 극진히 보살피고 섬긴다는 뜻도 포함된다.

시천주가 부모를 섬기듯이 천주를 모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모심이 되는 것인가? 수운은 모심에 대하여 독특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는 논학문에서 시라는 것은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어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깨달아서 이를 조금도 옮기지(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선 각각의 말에 담긴 뜻을 풀어 보고 시천주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참 뜻을 정리해 하자.

 

내유신령內有神靈

안으로는 신령함이 있다[內有神靈]’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안에 있다는 말은 어떤 주체를 전제한다. 주체는 바로 개별적인 생명[]이다. ‘의 생명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生氣]이며 물질적인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개별적인 생명인의 주체 중심에는 사람의 마음[]이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라는 유기체는 생명의 기운(), 마음(), ()으로 분석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세 측면으로 분석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유신령은 마음, , 몸 중에 신령이 자리를 틀고 있거나 아니면 개별적인 생명의 주체 중심 안에 어디엔가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재하는 신령과 마음을 동연의 범주로 보고, 양자가 같은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마음 안에 있는 신령은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마음과 같다는 것이 그것이다. 수운 사후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이 대표적이다. 그는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落地初]의 자식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내재하는 신령은 포태된 생명이 모태에서 떨어져 나온 갓난아기의 출생과 함께 있게 된 아기의 마음이란 뜻이다. 해월은 내재하는 신령을 아기의 탄생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출생되기 이전, 즉 모체에서 포태되어 세상에 나오기 전의 만삭이 된 태아에는 신령[마음]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필자는 마음과 그 안에 있는 신령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신령은 모체에서 포태의 순간부터 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명이 포태되는 순간은 곧 외부로부터 신이 들어오고, 그 순간에 영적인 마음이 생겨나 신과 함께 활동하는 데, 이것이 신령이라는 얘기다. 이는 바로 생명활동의 근원이 신이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마음의 활동이 시작하게 됨을 뜻한다. 역으로 말해서 만일 신이 들어오지 않으면 개별적인 인간의 생명은 포태될 수 없고, 마음 또한 생겨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별적인 생명의 활동은 곧 내재하는 신의 작용으로 인해 유지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논리는 앞서 지기至氣의 분석에서 밝혀진 신령에 근거한다.

신령은 어떻게 해서 개별적인 생명의 활동 근거가 되는가? 개별적인 생명이 포태되는 순간, 신은 천지기운을 타고 모태 속으로 들어와 터를 잡게 된다. 앞서 신은 기요 기는 허이며 허는 곧 일기임을 밝혔듯이, 신과 기는 음양 짝으로 같이 있으면서 기를 바탕으로 만유의 생명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신이 천지기운을 타고 내려와 터를 잡는다는 것은 곧 삼신이 개별화되어 생명의 창조 활동을 개시했다는 뜻이다. 이때 개별적인 생명활동은 삼신이 신화神化의 과정을 거쳤음을 뜻하는데, 신화의 과정이란 삼신이 개별화되어 곧 내재하는 신령神靈으로 전화轉化되었을 함축한다.

신화의 과정을 거쳐 내재하게 된 신령은 신성神性과 영성靈性의 합성어로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신성의 측면은 포태된 태아가 그 순간부터 생명, 마음, 몸의 변화 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근거가 되는데, 즉 조화의 신은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을 있게 하며, 교화의 신은 천지기운을 운용하여 개별적인 생명의 기[生氣]를 있게 하고, 치화의 신은 개별적인 몸[]을 있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영성의 측면은 포태된 개별적인 생명체의 마음 중심에 자리를 잡고서 신과 마음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신이 들어온 순간부터 개별적인 생명과 함께 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포태된 태아도 마음의 활동이 있다는 뜻이다. 영적인 마음이 그것이다. 즉 태아의 마음이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중심에 머무르는 신과 령[神靈](신성과 영성)이 교감함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태아의 마음이란 영성이 신을 감싸고 있으면서 활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태아가 성장하면서 마음으로부터 감각적인 의식이 나오게 되고,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는 마음에서 의식의 활동이 있게 되는데, 의식작용이 싹이 트면서 개별적인 생명의 마음은 대개 의식에 의거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와는 반대로 마음에 내재하는 신령은 의식의 활동에 의존하는 마음에서 점점 소원해지게 되는데, 개별적인 영성의 퇴화가 그 징후이다. 따라서 신령이란 개별적인 생명활동의 근원이기 때문에 인간이면 누구나 다 내재하는 것이지만, 의식에 의존해서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은 내재하는 신령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마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중심에 내재하는 신령을 회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통상 어떤 방식으로든 신안神眼이 열림으로써 가능하다고들 말한다. 신안의 열림은 마음의 중심에 있는 퇴화된 영성을 회복하여 본래의 상태를 되찾음에 있다. 본래의 영성을 되찾음은 곧 신성의 일깨움으로 이어지게 되고, 영성의 회복으로 인해 마음은 의식이 아니라 신성에 의지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성에 의지함은 어떻게 가능한가? 생명의 본성은 신성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내부와 외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의식을 완전히 끊고 침잠한 상태로 돌아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마음의 중심에는 신령이 자리를 틀고 있음을 직감直感할 수 있다. 수행자들이 체험하게 되는 무아의 경계[無我之境]가 그것이다. 이 순간은 개별적인 마음이 내재하는 신령과 교감하여 서로 소통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신령과 소통하여 하나가 된 마음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영성의 질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영성의 질적인 도약은 일종의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수운이 제시한 시천주 주문 수행은 영적인 도약을 가능케 하는 한 방법이 된다. 수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인 도약은 관계의 논리에 따라 내적으로 잠들어 있는 신령을 일깨워 소통하게 하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극한 신적인 기운과 마음이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수운의 말로 표현하면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가 가능한 것이다.

접령지기는 의식의 방해가 없는 한 내재하는 신령이 곧 질적인 전환으로 상승해 있는 상태가 됐음을 말해준다. 내재하는 신령의 질적인 전환은 다름 아닌 신화하여 개별화되기 이전의 본원적인 신, 즉 우주에 꽉 들어차 있는 전일한 신과의 접촉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원적인 신이란 전체이며 하나인 근원의 삼신, 즉 천주의 지기에 실려 있는 무형의 조화신성이라 할 수 있다. 이 경계에 이르러야 만이 수운이 그랬던 것처럼 절대적인 천주와의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고, 천주로부터 내유강화지교內有降話之敎를 천명으로 받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유기화外有氣化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다[外有氣化]’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화氣化란 글자 그대로 말하면 기의 전화轉化, 즉 기의 유동流動을 뜻한다. 기의 전화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의 변화란 두 방식으로 구분하여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소위 본질적인 변화(essential form)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적인 변화(accidental form)이다. 본질적인 변화는 사람이 죽거나 나무가 타서 재가 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물 자체가 본성적으로 달라짐을 뜻하고, 우연적인 변화는 뚱뚱한 사람이 홀쭉해지거나 파란 나뭇잎이 갈색으로 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겉모습만 달라짐을 의미한다. 우연적인 변화는 달리 표현하여 운동이라 한다. 운동은 질적인 것을 비롯하여 사물의 장소의 이동, 색깔의 교체, 크기가 달라짐 등을 말한다. 따라서 기화란 기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의미에서 이합집산에 따른 기의 흐름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 자체는 동질적이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이, 허령창창한 혼원渾元의 일기는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자체로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무형의 것이지만 만유의 창조변화를 이루는 천주의 지기이다. 온 우주에 편만해 있는 혼원의 일기는 논리적으로 순수한 원기와 원신()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모든 변화에 있어서 겉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고 안으로는 신이 내재하지만, 신과 기는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즉 기의 흐름은 항상 신을 동반하며, 신은 기를 타고서 기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천지간에 가득한 것이 신이니 신이 하지 않는 것이 없고, 흑 바른 벽이나 손톱에 가시 하나 박히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는 것이라는 정의는 바로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만유의 생명은 안으로는 신령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는 항상 기화의 작용[外有氣化]이 있다. 즉 신의 활동과 기화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은 창조변화의 과정으로 돌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화의 작용은 전적으로 신의 운용방식을 따른다. 신이 작용의 원인이 되고 그 현상으로 드러난 결과가 곧 기화의 작용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적인 생명체는 그 안에 신령이 내재해 있고, 신령으로 말미암아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신령은 기화를 이끌어가는 주체이고, 기화는 신령에 의한 기의 변용이다. 이러한 변화과정을 수운은 기화신氣化之神이라 표현했다. ‘서학의 가르침에는 기화지신이 없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화지신이란 기의 흐름을 타고 들어온 신이 작용하여 변화를 일으킴을 뜻한다.

신에 의한 기화의 작용, 밖으로는 기화의 작용이 있다는 뜻은 두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본질적인 변화의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적인 변화의 경우이다. 본질적인 변화의 경우는 개별적인 존재가 다른 것과의 접촉을 통해서 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달라짐을 지칭하는데, 사람이 죽거나 나무가 타서 재가 되는 것이 그 예이다. 요컨대 사람에게서는 생명의 신이 나가고 죽음의 신이 들어오게 되어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게 될 것이고, 나무에게서는 불의 신이 들어오게 되면 나무의 기는 화기로 전환되어 열기를 뿜으면서 타버려 재가 된다. 우연적인 변화의 경우도 신에 의한 기화의 작용으로 볼 수 있는데, 신이 들어옴으로써 기의 흐름이 달라짐을 볼 수 있다. 즉 나약한 사람이 갑자기 용감해진다면 그에 맞는 영웅의 신이 응기하여 그러한 기운이 들어와 발산하게 되는 것이고, 가을에 나뭇잎이 누렇게 변한다면 가을기운을 타고 들어온 신에 의해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변화는 기화지신을 동반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수운이 기화지신을 제기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궁극의 목적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이는 시천주와 관련하여 수운의 인간관 및 수행관의 측면에서 풀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수행을 통해서 마음과 몸이 곧 외적인 영적인 지기와의 접함이 이루어지는 경계[接靈之氣]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내유신령외유기화가 합일하게 됨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일상의 삶에서는 기화지신이 생명의 유지하는 수단으로 미미하게 작용하다가 수행을 통해 내적으로 영적인 도약이 이루어지게 되면 급작스런 기의 변용, 즉 몸이 떨리고 주체할 수 없는 만큼의 접령接靈의 기운을 직감할 수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내재하는 신령과 외부의 신령이 합치되는 사태, 곧 수운이 말한 접령지기의 상태에 이르게 됨을 뜻한다.

접령지기의 경계에 이르게 되면, 보다 강력한 신기가 들어오게 되는데, 수운이 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진 까닭이 그 예라 볼 수 있겠다. 이런 경우는 천주의 지기와 충만한 접촉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령지기를 체험하는 것은 불노자득不勞自得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맹렬한 수행을 통해서 내재하는 영적 도약이 이루어지고, 천주의 지기와 접하여 곧 천주의 마음과 내가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기화지신의 극단적인 상태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을 하다보면 삿된 기운을 타고 오는 신령과 합일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흔히 허령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그 징표이다. 이 경우에도 기화지신을 직접 체험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수운은 허령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심정기正心正氣의 수행법을 제시한다. 설혹 천주의 지기에 접함이 있더라도 천주의 성령에 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수운은 각지불이各知不移의 정신으로 천주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마음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

 

각지불이各知不移

온 세상 사람들이 각기 깨달아서 이를 조금도 옮기지 않는 것[各知不移]’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각지불이各知不移에서 각지불이에 대한 의미를 각기 정의하고 종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지는 문자적으로 말하면 각기 알아서라고 풀이할 수 있고, ‘불이란 알고 있는 것을 절대로 변함없이 유지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우선 각지의 의미를 알아보자. 소위안다는 뜻은 통상 우리의 의식意識이 신체에 딸려 있는 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각을 뜻하거나, 이러한 감각지각을 소재로 해서 추리하여 얻을 수 있는 이성적인 직관을 말한다. 전자는 소위 경험주의 전통에서 구축된 앎의 방식이고, 후자는 합리주의 전통에서 체계화된 인식 방법이다. 하지만 수운이 말하는 각지는 감각지각에 바탕을 둔 경험주의방식이나 이성적 직관에서 비롯되는 합리주의 방식을 넘어서 있다. 소위 깨달음을 통한 앎이 이에 속한다. 깨달음이란 의식이 뿌리를 박고 있는 마음이 감통感通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보다 완성된 직관이라 할 수 있겠다. 즉 마음은 영적인 도약을 통해 신령과 소통할 수 있는데, 각지는 바로 감성과 이성을 넘어서 제3의 눈이라 불리는 영적인 눈으로 얻어지는 통각統覺인 것이다.

감통으로 얻어지는 통각은 세 단계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인식일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내재하는 신적인 영성을 회복한 마음이 앞서 설명한 의 내유신령과 의 외유기화의 묘합작용으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영적인 도약을 통해 개별적인 생명체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기화지신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수운이 서학의 가르침에는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다고 비판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깨달음의 궁극 목적은 기화지신을 통해 천주와 소통하여 그와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이른바 수운이 말한 각지의 참 의미가 된다고 본다.

불이란 천주에 대한 깨달음이 망각되거나 변질됨이 없이 항상 마음에 간직하여 모시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 유철은 이처럼 불이모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즉 수운의 해석에 의하면 모든 세상 사람들은 상제의 신령스러움과 지극한 기운을 체험하고 그것으로부터 옮기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다른 말로 표현해서 모심이다. 그래서 에 대한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상제를 향한 인간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 신앙을 변치 않는 것, 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각지불이세상 사람들이 각자 저마다 기화지신을 통해 천주에 대한 믿음을 깨달아 그 믿음이 흔들리거나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이 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된다.

그러므로 수운이 말한 밖으로는 영적인 지기와의 접함이 있고[外有接靈之氣] 안으로는 강화의 가르침을 받아 내릴 수 있다[內有降話之敎]”는 참 의미는 바로 천주를 모심을 전제로 해서 발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밖으로 접령의 기운이 있다는 것은 천주의 지기와 접하여 합일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개별적인 신령을 통해 안으로는 강화의 가르침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운은 시천주를 말한 것이다. 시천주의 진정한 의미는 천주와 수운의 마음이 소통하여 하나 된 상태, 곧 개별적인 신령이 천주의 신령과 일체가 됨을 목적으로 하며, 이는 곧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으로 표현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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