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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다시 개벽 3회 천명을 받아 창도한 동학

문계석 연구위원

2016.10.26 | 조회 1873

동학과 다시 개벽 3

 

동학과 다시 개벽

 

 2) 천명을 받아 창도한 동학

 

수운의 수행과 득도

수운은 젊은 시절에 아버지를 여읜 후, 21세가 되던 해부터 명목상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이유로 장사를 하면서 나그네처럼 전국을 떠돌게 된다. 주유팔로하던 기간이 바로 이때(1844-1854)이다. 이 기간 중에 그는 몸소 세태를 직접 체험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데, 기존의 가치체계나 다른 종교로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과 금수와 같은 효박한 세상을 바로잡아 도성덕립이 된 새 세상을 열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오직 만유의 존재를 주재하는 절대적인 천주의 실존을 분명히 밝히고, 이로부터 새로운 대도[天道]를 깨달아 세상에 밝힘으로써 인류가 천명을 따르고 천리를 거슬리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의지를 점차 마음 깊이 굳히게 된다.

30세가 되자 그는 10년간의 주유팔로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처자들과 함께 울산 유곡동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봄날 자신이 금강산 유점사의 선승이라고 밝힌 자가 수운을 찾아와 책을 한 권 주면서 그 뜻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그 선승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서佛書를 수 없이 읽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어 백일정진을 하게 되었고, 정진을 마치는 날 불탑 아래서 우연히 잠들게 되었는데 깨어나 보니 책 한 권이 탑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내용인지를 몰라서 박식한 유학자로 소문이 난 수운을 수소문해서 찾아왔던 것이다. 수운이 3일 만에 책의 뜻을 파악하자 선승은 책을 그에게 주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것이 도원기서에 실려 있는 을묘천서乙卯天書에 관한 사건 내용이다.

수운에게서 을묘천서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그가 천주로부터 목숨을 건 구도의 역정으로 들어가 천명을 받아 내려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하늘에 기도를 시작하였다. 도원기서에서는 이 책이 기도의 가르침’[祈禱之敎]이 담긴 책이라고 하였으나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가 평범한 삶에서 본격적인 구도자의 길에 들어섰다는 점은 분명하다. 구도자의 삶으로 변신한 그는 그 해 여름 양산 통도사 뒤의 천성산에 올라가 49일 동안 천주로부터 가르침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유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천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대도를 얻어 삶의 절망에 처한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고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험난한 수련과 구도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딸린 식솔들은 그로 하여금 구도에만 정진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사업을 하면서 구도의 수련을 병행했던 것이다. 끝내 천주의 가르침을 얻지 못한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또다시 구도의 수련에 들어간다. 그가 수운水雲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불출산외不出山外(득도하기 까지는 절대로 하산하지 않겠다)”, “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하면 사특함이 침입하지 못하느니라. 득도할 때까지는 세간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리라”)는 글자를 벽에 써 붙이며, 그는 다부진 마음으로 두문불출하고 책과 기도에 몰두하게 된다.

37세 되던 경신년庚申年(1860) 45(음력)에 마침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천주가 새로운 도를 찾아 일심으로 기도하는 그에게 감복하여 직접 가르침을 내리고 득도하여 대도大道를 세우게 한 바로 그 날이다. 수운은 이러한 신비체험을 처음 겪는 일이라 정확히 무어라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이성적인 능력으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절대적인 천주와의 만남을 통하여 알게된 영적靈的 체험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운이 처음으로 천주를 친견하여 천명과 신교를 받아 득도하게 되는 영적체험은 어떠하였을까? 사실 그날(45)은 장조카 맹륜의 생일날이었다. 생일잔치에 오라는 조카의 초대에 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억지로 참석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자 몸이 떨리고 마음이 몹시 불안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집에 돌아오자 수운은 뜻밖의 일을 겪게 된다. 마음은 선뜩해지고 정신을 놓은 것처럼 어지러우며, 몸은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술에 취한 것 같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떨리고, 무슨 병이 들어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이상한 상태에 이른 것처럼, 그러한 증상을 알 수도 없고 말로 형언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영적체험은 마치 신 내림과 유사한 현상과 같아서 몸과 마음에 이상한 증상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수운 또한 병이든 사람처럼 몸이 몹시 떨리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그는 몸이 몹시 떨리고 한기를 느끼면서 밖으로는 신령을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자 갑자기 공중에서 어느 신선의 말씀이 귀에 문득 들려온다.” 수운은 어떤 신선이 말하는지를 몰라 놀라서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상세하게 묻게 되는데, 두려워하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어찌 상제를 모르느냐 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볼 때, 절대적인 천주가 다름 아닌 상제였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에는 몰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운 자신이 어느 신선이라고 표기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시냐고 묻자 자신에게 말하는 어느 신선은 바로 상제라고 스스로 신원을 밝힌 것이다.

자신의 신원을 스스로 밝힌 상제는 도대체 누구인가? 글자 그대로 보자면, ‘위 상자에 다스릴 제, 임금 제자로 지존의 하늘 임금’, 최고의 하느님이란 뜻이다. 분명 그가 득도하여 천명과 신교를 받으려한 절대자는 천주天主이며, 천주의 신적인 위격[神位]은 바로 상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제는 신교의 전통을 잇고 있었던 일부 민중들에게서는 최고의 하늘 임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신교와 단절된 조선 양반들에게서는 낮선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와 조선 왕조의 통치체제에서는 오랫동안 신교의 맥을 이어오지 못했고, 특이 유교문화권에서는 국가의 임금이 최고의 통치자로만 여겨왔지, 하늘 임금이 있어 우주만유를 주재한다고 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운은 안심가에서 상제를 모르는 이들에게 질책어린 어조로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上帝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수운을 만난 상제는 영적교감을 통해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그에게 전하면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라고 천명을 내린다. 상제가 그에게 내린 천명에 대한 내용을 소개해 보자. 그는 나의 이 부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제하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역시 장생하여 포덕천하할 것이다,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를 줄 것이니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밝게 빛나게 하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제와의 영적교감을 통해 수운은 상제로부터 무궁무궁한 대도를 내려 받는다. 이는 그가 용담가에서 천은天恩이 망극罔極하여 경신사월庚申四月 초오일初五日에 글로 어찌 기록記錄하며 말로 어찌 성언할까?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여몽여각如夢如覺 득도得道로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상제의 성적을 기록한 도전이로써 수운이 인류의 새 세계를 알리라는 상제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고 도통을 하였나니, 이것이 곧 우주사의 새 장을 열어 놓은 천주님과의 천상문답 사건이다.”(1:8:15 - 17) 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신년 4월에 수운이 상제와의 직접적인 대화는 일종의 성령체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교감을 통해 그가 상제를 직접 친견한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후 그는 상제로부터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받고 영부를 얻어 새로운 인간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게 되는 그런 조화를 몸소 체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체험은 그가 상제로부터 받은 무궁무궁한 대도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실증하고 확신하게 된 계기가 된다. 이는 절대적인 천주를 일심으로 정성[]을 다해 공경[]하고 믿으면[] 성령체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즉 성경신誠敬信으로써 천주를 모시면[侍天主] 누구나 상제와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왜 동학인가

인간의 몸으로 절대적인 무한한 권능을 가진 천주를 친견하는 사례는 역사상 드믄 일이다. 수운이 각고의 종교적인 수행 끝에 천주를 영적으로 직접 만나 천명을 받은 것도 그렇다. 그에게 천명을 내려준 천주는 신위로 말하면 바로 지존한 인격적인 상제였다. 지존무상의 상제를 신앙하고, 상제의 무궁무궁한 무극대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종교는 바로 그가 창교한 동학이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수운 자신이 동학을 창교할 당시에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는 천주교가 확산되고 있었다. 천주교는 서교의 학이다. 서교의 학은 서도西道를 말한다. 서도 또한 절대적인 천주의 도를 가르친다. 반면에 수운이 창교한 동학은 동도東道이다. 동도 또한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천주의 도를 가르친다. 따라서 서도나 동도는 외연外延이 같다. 그 까닭은 동도와 서도가 모두 절대적인 천주의 도[天道]’를 받아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동학이나 서학은 모두 동일한 절대자 한분의 천주를 섬기고, 그분을 궁극의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분의 도를 받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도에 있어서는 서학의 도나 동학의 도는 모두 같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운은 자신이 창교하는 종교를 서학이라 하지 않고 왜 동학이라 했을까? 동학이나 서학은 절대자 천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천주의 도[천도]에 있어서는 같은 것인데 말이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내포內包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포가 다른 까닭은 주로 세 가지로 분류하여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은 동방의 땅에서 태어나서 천주로부터 동방에서 도를 받고 그곳에서 도를 펼치게 되었다는 것, 서학의 도는 허무하기 때문에 천주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는 천명으로 받은 대도가 과거의 시운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다시개벽으로 열리는 새로운 시대의 시운에 맞는 도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동학과 서학은 천주의 도를 받은 지역의 차이 때문에 다르다. 즉 수운의 동학은 서방이 아니라 동방 땅에서 천주의 도를 받아 태동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나는 동방에서 태어나 동방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즉 동학이니라. 하물며 땅이 동과 서로 나뉘어 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고 하며 동을 어찌 서라고 하리요. 나의 도는 이곳에서 받고 이곳에서 펼쳤으니 어찌 가히 서로써 이름을 하겠는가.” 라고 말한다.

지역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동일한 천주의 도는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즉 수운이 말한 동학은 서학과 같은 천주의 도이지만, 그러나 그 천도를 받아 내고 이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다르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서방인이 바라보는 천도와 동방인이 바라보는 천도 간에는 공간적인 지역의 차이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천도를 받아 가르치는 학 또한 그 의미가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동방과 서방이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문화적인 풍토가 다르게 형성되었다는 점을 착안하여 본다면, 서도와 동도는 달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동방인과 서방인이 바라보는 하늘()은 같은 것이지만, 그들에게 비친 하늘에 대한 의미(meaning) 표현은 각기 다르게 기술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새벽녘에 보이는 샛별(morning star)과 황혼 무렵에 보이는 석별(evening star)이 지시하는 대상은 같은 별이지만, 별이 보이는 관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의미 또한 현격히 다르게 표현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동방인이나 서방인이 천주의 도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 지시하는 대상(reference)은 모두 같은 천도를 지칭하지만, 공간적인 차이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수운은 천도에 이르는 이치를 밝혀내는 학을 서방과는 다른 동방에서 나왔기 때문에 서학이 아닌 동학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서학의 도는 허무하며 천주를 위하는 단서가 없지만 동학은 그렇지 않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운은 종교적 체험을 바탕에 깔고서 서학을 비판한다. 그 핵심은 다음의 글을 분석해 보면 분명해진다. :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는 조백皂白이 없고, 도무지 천주를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라. 몸에는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없고 배움에는 천주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는지라. 도는 허무한 데 가깝고 배움은 천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 글의 내용은 세 관점에서 왜 동학이어야 하는가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첫째는 그가 이해한 서학은 말에는 차례가 없고 글에는 조백이 없다는 것이다. ‘조백이 없다란 이치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 까닭을 풀이해 보면 서학의 경전에는 천도가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서학에는 천도에 대한 가르침이 관념적이고 공허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깨달음이 빈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학을 배우는 자들은 천리天理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천리에 근거한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서교는 오직 절대적인 천주를 빙자하여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을 추구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이 이를 잘 대변한다.

반면에 동학의 도는 천주의 도[天道]이고, 천도는 아무런 작위 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법이다. 즉 천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도법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 동학이라는 얘기다. 이 말의 핵심은 인간 또한 천주로부터 천명으로 품부 받아 나온 것이고, 그 마음을 지키고 그 정기正氣를 바르게 하여 실천하면, 곧 천주로부터 품부 받은 성품을 거느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게 되어 천주의 조화가 자연한 가운데서 저절로 나오게 된다는 뜻을 포함한다.

둘째로 수운은 천주를 지극히 위하는 시천주주문侍天主主文과 천주와 접할 수 있는 강령주문降靈呪文이 서학에 없다는 것을 예로 든다. 뒤에서 상세하게 분석해 보겠지만, ‘시천주강령주문은 천주를 체험할 수 있는 직접적인 단서가 된다. 물론 서학에는 천주를 위하는 단서로 십자가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천주가 아니라 예수의 상이요 그분의 가르침이 있을 뿐, 직접적으로 천주를 위하는 단서는 아니다. 천주를 위하는 단서는 천주를 능동적으로 체험함에서 확인되는데, ‘강령주문이 바로 천주를 의지적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물론 서학에도 성령체험을 들 수 있으나 서교의 성령체험은 천주가 특정인을 선택하여 일방적으로 내려주는 은총일 뿐이다. 반면에 동학은 강령주문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사람은 기화지신氣化之神의 경계에 들어갈 수 있다. ‘기화지신, 뒤에서 상세하게 설명해 보겠지만, 외유기화外有氣化와 내유신령內有神靈로 분석하여 그 의미를 간취해볼 수 있다. 기화氣化의 핵심 의미는 천주의 지극한 기운과의 접령 상태에서 외적으로는 천주의 기운을 회복하여 몸이 떨리고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남을 뜻하고, 내적으로는 천주의 신령神靈에 접하여 천주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받아 내릴 수 있는 주체가 됨을 뜻한다.

셋째로 수운은 서학에 천도가 없으니 천주에 대한 가르침이 없고, 천주를 위하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음을 지적한다. 뒤에서 보다 상세하게 분석해 보겠지만, 그는 천지만물이 창조 변화되어 가는 원리로서 천도를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고, 천주가 이 도를 주재主宰하여 모든 것이 무위이화無爲而化’, 억지로 함이 없이 변화되도록하는 천주의 주재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서학에는 창조변화를 밝히는 천도의 원리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서학에는 천주의 가르침을 제대로 인식하여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서도는 천주에 대한 진정한 학이 아니며, 천주를 일심으로 위하는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수운의 입장이다. 설사 위하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스스로를 위해서만[各自爲心] 사는 이기주의적인 사고일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오직 동학만이 진정으로 천주를 신앙하는 종교임을 자부하고 있으며, 그러한 뜻에서 자신이 창교하는 학을 동학이라 한 것이다.

 

수운이 창교하는 동학은 시운에 맞는 천명을 받아 새롭게 가르치는 도이기 때문에 서학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학은 이와(천도에 있어서) 같으면서 다름이 있고, (천주께) 비는 것은 같으나 실지가 없다. 그런 즉 (서학이나 동학이)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지만 이치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동학이나 서학이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지만 이치는 아니다.’라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동학과 서학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서학이든 동학이든 그 도는 한 천주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아 나온 도이기 때문에 같은 천도이다. 그러나 서학에서 말하는 천도의 운수는 동학에서 말하는 것과 하나이지만 이치가 다르다.’ 여기서 운수가 하나라는 의미는 서도나 동도가 발원하는 근원이 같다는 뜻인데, 그 까닭은 모두 천주의 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경대전東經大全』「논학문論學文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천주의 도는 가고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이법[無往不復之理]”이라는 순환循環 이치이고, 이에 따라 우주 자연은 끊임없이 재창조되어 성쇠盛衰의 법도로 전개되어 드러난다. 그래서 서학의 천도나 동학의 천도는 그 운수에 있어서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천도의 운수를 받은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동학은 서학의 시운時運과 다르고, 따라서 이것을 가르치는 이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운이 받은 천주의 도는 어떤 측면에서 서학의 시운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서도의 천주학은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이미 서방에서 서양인들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아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가 창교하는 동학은 자신이 파악한 천시가 옛날에 맞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시운에 맞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시운은 그가 용담가에서 한울님 하신말씀 개벽후開闢後 오만년五萬年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후에 노이무공勞而無功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成功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 너희집안 운수運數로다.”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시운이 다름은 두 관점에서 말해볼 수 있다. 첫째로 동학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다시개벽의 시운에 따라 창교됨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오만 년 전에 개벽이 있어 지금까지의 세상이 전개되었고, 이제 다시개벽의 새로운 운이 닥치고 있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새 시대의) 시운을 알지 못한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학은 오만 년 전의 선천先天 운수를 받아 나온 가르침이고 동학은 앞으로 오만 년의 후천後天 운수를 받아 일어나는 것이다. 공간적으로 보면 서방과 동방의 차이가 나며, 시간적으로 보면 선천의 시운과 후천 시운으로 서로 구분된다. 그러한 천운을 받은 것은 한분 천주의 도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하나의 운수이지만, 동학과 서학은 시운이 다른 도를 받았기 때문에 이치가 다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천주의 도에 이르는 깨달음의 방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나 역시 공이 없는 까닭의 의미를 해부해 보면 다시개벽의 이치가 도래하게 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내용은 천주가 스스로 천지를 열어 만유를 섭렵하고 질서를 바르게 하여 주재해 오면서 가르침을 편지 오만 년이 지났지만, 작금의 세상은 나를 따르지 않아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지상 천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하게 됐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천주는 수운에게 명하여 개벽기에 온 생명과 세상을 구할 책무와 의무를 지워 세상에 내 보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나 역시 공이 없는 까닭으로 세상에 너를 내어 이 법으로 사람을 가르치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고 수운에게 내린 천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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