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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다시 개벽 2회 동학을 창교한 수운

문계석 연구위원

2016.10.17 | 조회 2004

동학과 다시 개벽 2(제목 동학사상연구동학과 다시개벽으로 바꿉니다. 이하 같음)

 

 

 

 

1. 동학을 창교한 수운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세계열강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동방 조선의 땅에서 1824년에 태어나 1860년에 득도得道하여 절대자인 천주天主로부터 천시天時에 맞는 도를 받아 내렸다. 이로써 그는 한민족의 새로운 종교, 즉 동학東學을 창교한 것이다.

동학의 창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수운이어야 했는가? 중요한 것은 절대자 천주가 지극 정성으로 대도를 구하는 수운을 만났고, 그로 하여금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했다.”(도전2:30:14)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천명과 신교를 받아 내린 새로운 대도에 대하여 수운은 나의 도는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예전에도 듣지 못한 일이요, 지금도 (어느 도와도) 비길 수 없고 예전에 (어느 도와도) 비길 수 없는 법이다. 닦은 사람은 허한 것 같으나 실지가 있고 듣는 사람은 실지가 있는 것 같으나 허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수운이 제시한 도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개벽으로 열리는 새 시대의 시운에 맞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이다. 무극대도는 절대자 천주의 도이다. 그는 각고의 수행 끝에 득도하여 절대자 천주로부터 다시개벽의 도법을 직접 내려 받아 새로운 종교, 동학을 창교하게 됐던 것이다.

 

1) 동학의 창교 배경

 

수운은 용담유사』「교훈가에서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亦是 다했던가라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래 전에 유교, 불교, 도교가 창궐하여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수운이 태어난 조선의 백성들은 오래 동안 유교, 불교, 도교 등을 신앙해 왔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수운은 기존의 신앙체계를 다 버리고 새로운 종교인 동학을 창교하게 된 것이다. 결정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물론 여러 직접적인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조선왕조가 처했던 내우외환內憂外患과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유입이 도화선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수운은 젊은 시절에 전국을 돌아보면서 민중들의 삶을 둘러보고 세태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당시의 조선사회는 열강 제국주의 침탈로 국권의 존립이 붕괴일로에 놓여 있었고, 조선왕조를 지탱해온 유교문화의 사회질서가 붕괴되어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음을 체험하게 된다. 조선의 민중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의식과 극도의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수운은 민중들을 태평곡 격양가가 울려 퍼지는 세상에서 살도록 해야겠다는 소명의식, 즉 새 시대의 종교문화를 창도해야하는 천명天命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수운이 곧 동학을 창교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우외환內憂外患

수운은 유명한 유학자의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鋈은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단봇짐으로 떠들어온 과부를 만나 수운을 낳았던 것이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과 기백이 비상했던 것은 물론이고, 비범한 안광을 가진 남다른 용모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자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부의 사랑과 귀염을 받으면서 유년시절부터 선비로 자랐고 상당한 학식도 쌓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통정할 수 없는 번민과 고독한 심정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유소시절인 7세 때쯤에 생모를 여읜 후, 16세 때에 부친인 근암공도 별세하여 3년 상을 마치자 18세에 집을 나가 호협들과 교류하면서 활도 쏘고, 술도 마시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21(1844)부터 31(1854)까지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을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게 된다.

수운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세태를 직접 목도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가 전국을 주유周遊했다는 사실은 천주의 가르침에 대한 화답和答을 노래한 시, 화결시和訣詩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다 돌아보니 물이면 물, 산이면 산 모두를 다 알겠더라. 그리고 그가 세태를 목도하게 됐다는 사실은 권학가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을 도원기서에서는 주유팔로周遊八路라는 말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세태를 둘러보면서 민중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무엇을 깨닫게 되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많은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했던 질서 체제의 붕괴와 열강 제국주의 침탈에 의한 국권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이었을 것이다. 우선 이러한 문제를 수운이 얼마나 심각하게 통감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수운의 정신을 에워싸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수운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수운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내적으로는 말 그대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유교적 이념이 무너져 인심과 풍속이 없어진 사회였다. 권학가에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있지마는 인심풍속人心風俗 괴이怪異하다. 세상世上구경 못한인생人生 출생이후 첨이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강요와 유교적 사회질서로 유지해왔던 윤리적인 가치체제의 기강이 무너져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평생平生에 하는근심 효박淆薄한 이세상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과 부불부父不父 자부자子不子를 주소간晝宵間 탄식歎息하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누구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을 따르지도 않고 돌보지 않으며 각기 제 맘대로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로부터 조선사회는 지배계급의 탐학과 부패로 물들어 있었고, 그로 인해 어느 성현 군자가 나와도 구제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몽중노소문답가매관매작賣官賣爵 세도자勢道者”, “전곡錢穀쌓인 부첨지富僉知”, “유리걸식流離乞食 패가자敗家者등이나 아서라 이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不足施요 공맹지덕孔孟之德이라도 부족언不足言이라는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궁핍과 핍박을 받아 왔으며, 유리걸식이 일상이었고, 일반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운이 살았던 조선사회의 민초들은 그야말로 금수禽獸 같은 삶 자체였다.

조선 왕조는 대외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당시 지구촌의 세태는 서양의 몇몇 열강 제국주의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상황이었다. 서양 제국주의는 18세기경에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갖추면서 탄생한다. 몇몇 국가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정교한 기계를 발명하고, 신무기로 무장한 채 중상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특히 서양의 제국주의는 동양을 넘보기 시작하면서 극동에까지 들어와 무력으로 국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840-1842년에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은 그 시발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중국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7년에 광저우를 점령하여 텐진조약을 강요했고, 1860년에 청조가 조약의 비준을 반대하자 북경을 점령하기도 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그러하자 이어 조선왕조의 상황도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832년에는 영국 상선이 서해안에 들어와 통상조약을 체결을 요구하였고, 1845년에는 영국 군함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하였으며, 1850-53년에는 미국과 러시아 배들이 조선 연안에 출몰하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왕조를 위협하는 서양 제국주의는 수운에게 국권이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겨주게 됐다. 이에 대한 수운의 생각은 괴이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세간에 흉흉하게 떠도는데, 서양 사람들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져서 그 조화의 힘을 부리는 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고, 또 무기로써 공격하여 싸움을 하면 그 앞에 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니, (이와 같이 강성한 서양의 힘에) 중국이 망해버리면 어찌 우리나라도 따라 화를 당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수운은 조선의 정세가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국권이 풍전등하에 몰릴 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천주학天主學에 대한 우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민중들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금수와 같은 삶으로 전락하게 된 조선사회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학의 유입이 그것이다. 천주학은 조선왕조의 윤리의식을 근본부터 어지럽히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천주학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이다. 당시 천주학은 서학의 가톨릭을 지칭하는데, 천주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천주학은 로마 가톨릭의 예수교 선교자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1552-16010)가 중국에 들어와 서교西敎를 포교하게 되었고, 포교의 일환으로 리치가 중국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를 펴낸 데서 연유한다. 조선 선조 말년(1608)부터 천주실의를 비롯한 많은 서양 책들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오면서 천주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천주학이 퍼지기 시작하자 1783(정조 7)에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사신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게 됐으며,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천주교회로 찾아가 교리를 익히고(1784), 그 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됐다.

천주교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실제적으로 중국에서 선교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천주 개념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후 재주 있는 많은 젊은이들은 천주교를 믿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조선왕조를 지태해온 유교의 사회질서 체제를 위협하고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1860(경신)에 글을 지을 당시에 수운은 서학을 표방하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이 무력으로 동양을 침범하고 강제로 국권을 침탈하는 것을 보고 천주학에 대한 위력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주교가 세상을 구할 올바른 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깨닫게 된다. “지난 경신년에 이르러 전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천주의 뜻으로 부귀는 바라지 않고 온 세상을 처서 빼앗아 (서학을 믿는) 교당을 세워 서도를 행한다고 하더라. 나는 또한 그럴 수 있을까 어찌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글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천주학에 대한 수운의 두려움은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운은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칭하고, 학을 천주라 칭하며, 교를 성교라 하니, 이는 천시를 알고 천명을 수용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를 하나하나 열거해 보아도(그들이 펼치는 서학의 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알 수 없는 까닭에(그들이 이렇듯 강성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나 역시 두려워하여 늦게 태어난 것이 한스러울 즈음에라고 그는 말한다.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는 천주학의 도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으나 천주학 또한 서양인들이 천시에 따라 천명을 받아 나온 것이므로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그가 서양 사람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 그 조화를 부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언급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운이 바라는 세상

조선의 왕조체제를 유지해온 유교의 지배체제와 도덕의 가치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질적인 천주학이 들어옴으로써 사회질서가 더욱 더 어지러운 상태가 되었다고 수운은 믿고 있었다. 더욱이 천주학을 등에 업은 서구 열강 세력이 들어와 조선왕조의 국권을 위협하게 되면서 약육강식의 금수와 같은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수운은 깨닫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가 태어난 조선왕조는 그야말로 상해傷害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들이 상해의 운명에서 벗어나 광제창생廣濟蒼生하게 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한 악폐의 근원을 찾아 이를 해소하는 데에 있다. 수운은 악폐의 근원을 온 세상 사람이 각자 자신의 마음만을 위하고 천리를 따르지 않으며 천명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데서 찾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근래에 들어서 발생하는 모든 악폐가 서양 사람이든 동양 사람이든 모두 각기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극단적인 이기주의[各自爲心]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곧 사람들이 하늘의 섭리攝理를 거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본연의 마음에 따라 살지 못하고, 또한 만유의 생명에 부여된 하늘의 명령[天命]을 전혀 돌보지 않으며, 천도天道와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제멋대로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광제창생을 통하여 그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이상이었을까? 용담유사에서 전하고자 하는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볼 때 그것은 온 세상 사람이 천도와 천명을 깨달아 모두 도성덕립道成德立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이 되는 그런 세상이었을 것이다. 즉 세상사람 각자가 개인적으로는 천주의 도를 받아 모두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각 나라마다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는 그런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써 이에 군자가 되고 지극한 성인에 이른다.”고 하여 도성덕립이 된 성인의 경지를 밝히고 있고, 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억조창생億兆蒼生 많은 백성 태평곡太平曲 격양가擊壤歌를 불구不久에 볼 것이니라고 하여 국태안민이 되어 모두가 태평성대를 누리는 상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두가 도성덕립이 되고 모든 나라에서 태평곡을 부르는 세상이 어떻게 도래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온 세상 사람이 천도天道와 천명天命을 깨달아 다시개벽으로 열리는 새 시대를 준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천도의 원리는 성쇠盛衰의 법도로 운용된다. 성쇠의 법도란 천지만물의 변화가 때와 운수[時運]에 의거해서 무성함과 쇠락함으로 순환함을 뜻한다. 수운이 권학가에서 시운時運을 의논議論해도 일성일쇠一盛一衰 아닐런가. 쇠운衰運이 지극至極하면 성운盛運이 온다.”고 말한 까닭이 그것이다. 성쇠의 법도에서 통찰해 볼 때, 당시에 처한 세계적인 병리 현상이란 바로 말세의 쇠운衰運에서 새로운 성운盛運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그는 당시의 시운을 진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시운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의 속뜻은 당시의 시운이 쇠운의 극점에서 성운으로 전환하는 다시개벽의 시점임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개벽으로 오는 성운은 바로더 이상이 없는 최고의 운수[無極之運]’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 수운은 용담가에서 어화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라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다시개벽으로 열리는 무극지운의 성운을 맞이하기 위해 그 시운에 맞는 새로운 도법을 깨달아 세상에 전하는 것을 천명으로 여겼을 것이다.

새로운 도법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다시개벽으로 열리는 새로운 오만 년 동안 세상을 이끌어 갈 도법, 무극대도無極大道”(용담가)이다. ‘무극대도더 이상이 없는 최고의 대도를 뜻한다. 최고의 대도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가? 그것은 궁극의 도이기 때문에 최고의 존재, 즉 절대적인 존재인 천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주로부터 무극대도를 직접 받아 동학을 창교하여 세상에 전하려 했던 것이다. 천주로부터 받아 내리는 그러한 무극대도는 서양의 천주학에도 없고, 기존의 세상에 유포된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다시개벽의 시운에 맞는 새로운 도법을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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