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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2013.06.27 | 조회 4062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중국에 와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이다. 1552년 아드리아 연안에 면한 이탈리아의 마체레타 시에서 출생하였다. 마체레타 시장을 역임하였던 약사 조반니 바티스타의 장남으로 부유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년기에 니콜로 벤치베니라는 신부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어린 리치는 이 신부로부터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매우 총명하였던 마테오 리치가 예수회 학교를 마치자 부친은 그를 로마로 보냈다.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여 출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도사가 된 마테오 리치는 예수회가 세운 로마 대학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철학과 수사학 뿐 아니라 수학과 천문학도 배웠다. 로마 대학에서 그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인물은 당시 유럽에서 명성이 높았던 수학자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였다. 클라비우스는 후에 그레고리우스력을 제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리치는 클라비우스로부터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 뿐 아니라 역법 및 해시계, 자명종, 지구의, 천체관측의 등의 제작도 배우게 되었다.

예수회 수도사 리치는 동양에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다. 1578년 3월 다른 예수회 수사들과 함께 출항길에 올라 6개월이나 되는 항해 끝에 인도 서부의 고아에 도착하였다. 그가 고아에서 신학공부를 마칠 무렵이었던 1582년 드디어 중국 선교사로서 발령이 나 리치는 마카오로 가는 배를 탔다. 

리치는 이마두(利瑪竇)라는 중국식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호는 서방의 현사라는 뜻으로 서태(西泰)라고 지었다. 2년 뒤 리치와 동료 선교사 루제리는 조경(肇慶)에서 소주(韶州)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리치는 유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인 친구의 조언으로 승려복을 벗어버리고 중국의 유생들과 똑 같은 복장을 하였다.  

리치는 이곳에서 유교의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번역을 위해서는 유학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수적이었다. 리치는 중국고전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유교와 기독교의 합치점을 찾고 있던 그에게 중국의 고전에 대한 연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리치가 사서를 번역한 것은 1591년부터 1594년의 시기였다. 그것은 중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이용되어 여러 예수회 신부들의 손을 거쳐 문장이 가다듬어지고 주가 첨가되어갔다. 그리하여 대학의 전문과 논어의 일부를 번역한 중국의 지혜 (Sapientia Sinica, 1662), 중용을 번역한 중국의 정치도덕학 (Sinarum scientia politico-moralis, 1667, 1669), 논어를 번역한 중국 철학자 공자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1687) 등이 차례로 유럽에서 간행되어 근대 중국학의 기초를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한문으로 된 천주교 교리서를 쓰게 되었다. 이 작업은 오랜 시간이 지난 1603년에야 천주실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천주실의는 대성공을 거둬 중국 뿐 아니라 조선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1595년에 리치는 소주를 떠나 남창(南昌)에 정착하게 되었다. 리치는 이곳에서 왕족의 한 사람인 건안(建安) 왕을 만나게 된다. 리치가 1595년에 저술한 교우론은 바로 건안 왕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해서 씌어진 책이다. 이곳에서 리치는 훌륭한 인격과 학식 그리고 뛰어난 기억술로 인해 유명인사가 되었다. 
리치는 다시 난징으로 갔다. 난징에서 리치는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종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불교와 도교뿐 아니라 특히 가톨릭 교리와 아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 유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이러한 연구 끝에 그는 고대 중국인들이 상제를 믿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상제가 가톨릭의 천주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몇 년 뒤에 간행하게 되는 천주실의의 주요한 테마의 하나가 된다. 

리치는 다시 북경으로 가 황제를 알현하여 전교의 허가를 받고자 하였다. 리치는 북경에서 중요한 친구이자 협력자 두 사람을 얻었다. 이지조(李之燥)와 서광계(徐光啓)가 그들이다. 이지조의 요청으로 리치가 제작한 지도가 그 유명한 곤여만국전도이다. 이것은 리치가 중국인들에게 전해준 서양의 문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1602년 북경에서 간행된 곤여만국전도는 이전의 지도보다 훨씬 상세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대륙에 대한 한문해설이 부기되어 있다. 

1608년 리치는 기인십편(畸人十篇)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에는 인생에 대한 지혜가 번득이고 있어 출간된 후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리치는 수학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서양의 수학을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유클리드의 기학학을 서광계의 협조를 얻어 기하원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리치가 로마 대학에서 배웠던 수학자 클라비우스가 저술한 라틴어 교재 유클리드 기하학 기초 (Euclides Elementorum) 15권 가운데 전반부 6권을 번역한 것이다. 또 하나 유명한 한역수학서인 동문산지는 마찬가지로 클라비우스의 초등수학서 실용산술서 (Epitome Arithmeticae Praticae)를 리치와 이지조가 함께 번역한 것이다. 

당시에 수학은 천문현상의 계산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수학과 더불어 서양의 천문학을 리치는 중국에 소개하였다. 이후 천문학과 역법 분야는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분야가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천문역법은 ‘제왕의 학’이기 때문에 중국의 조정에서 천문학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리치는 죽기 직전인 1609년부터 중국에서의 전도사업의 전개과정과 중국에 대한 포괄적인 개관을 담은 글을 써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글은 한문으로 된 이전의 글들과는 달리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저술되었다.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교사라는 책이 그것으로 이 책은 리치의 사후 예수회 신부인 트리고(Trigault)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지식인들에게 중국의 사정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지막 남은 여력을 이 책의 저술에 쏟았던 리치는 1610년 5월 10일 별세하였다.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지 28년째였다. 이 위대한 서양의 현자를 위해 중국의 만력제는 북경 성문밖에 있는 땅을 장지로 하사하였다. 다음해 이곳에 벽돌로 된 성당이 신축되어 그 지하에 리치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었다. 중국 황제는‘慕義立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에게 서양의 문물을 전해주고 또 동시에 중국의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동서양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증산은 이마두가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쳤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마두는 현‘해원시대에 신명계의 주벽이 된다’고 하면서 이를 아는 자는 그를 경홀히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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