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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적(一元的) 다신관(多神觀)

2013.06.27 | 조회 2650
일원적(一元的) 다신관(多神觀), 조화와 통일의 신관


‘원’(元)의 두 가지 의미

증산도 신관을 일러 일원적(一元的) 다신관(多神觀)이라 한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말은 역시 ‘다신관’이다. 증산도 신관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의미의 신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신론이되, ‘일원적’이란 것이다. 따라서 증산도의 일원적 다신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문자적 의미를 따지는 것에서 논의를 출발해보자. 

‘일원’(一元)에서 ‘원’(元)은 크게 보아 근본, 바탕이라는 뜻이 있고, 으뜸, 처음, 시초란 뜻이 있다. 이에 따라 일원적 다신관은 우주 만물의 바탕이 되는 것에 여러 신들이 속해 있는 신의 세계를 가리킬 수 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으뜸이 되는, 최고의 신아래 여러 신들이 놓여있는 사태를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이제 궁금한 것은 원의 두 가지 의미에서의 신은 각기 누구인가 혹은 어떤 신인가 하는 점이다. 또 증산도 다신관의 세계에는 그밖에 어떤 신들이 있는가?


신의 세계

먼저 원의 첫 번째 의미에서의 신에 대해 알아보자. 증산도에서는 우주 만물의 근본, 바탕을 이루는 것을 신으로 파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을 원신(元神)이라고 부른다. “천지만물의 바탕에 내재된 근원적 실재이며 존재근거”인(도전 4편 후주) 원신은 비인격적 자연 신성을 말한다. 그래서 구체적 형태를 지니지 않으며 딱히 고정된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대우주에 충만한 성령, 신령한 순수 靈氣와 같은 것이다. 우주 만유의 숨이나 천지를 채우는 생명의 바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원신은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천지의 온갖 변화를 짓는다. 없는 곳이 없고 하지 않음이 없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고,,,,, 천지의  온갖 생성과 변화는 이 신의 조화가 아님이 없다. 가히 허령하다, 즉 어떤 유형의 실체로 존재하지 않은 ‘텅 빈’ 것이지만 조화로 가득 찼다. 그래서 원신의 다른 이름은 조화성신이다. 다음 성구는 일차적으로 그 원신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천지에 가득 찬 것이 신(神)이니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도전 2:45:1)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神)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도전 2:87:4)

그리하여 풀잎 하나, 새 한 마리는 물론이고 흙 바른 벽 등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주 원신이란 그 하나의 보편적 신성〔一者〕을 나눠 갖고 있는 분신(分身)들이다. 모든 것은 원신의 화생(化生)이다. 원신은 만물의 바탕자리로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의 비유로써 말하면, 물고기〔만물〕가 물〔원신〕 속에 있지만 물고기의 장 속에도 물은 있는 것이다. 이 신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비단 눈에 보이는 것들뿐만 아니다. 그것은 원신과 구별하여 주신(主神)이라고 불리는 다수(多數)의 신명들과 상제 또한 마찬가지다. 

하늘, 땅에 들어찬 신명들로는 우선 사람이 죽어서 천상에 새롭게 태어나는 인격신들이 있다. 조상신, 억울하게 죽은 원신(寃神), 혁명을 꾀하다 무참히 죽은 역신(逆神)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밖에도 풀, 나무, 바위, 산 등의 자연 사물들에 각기 다른 위격을 갖고 내재하여 변화를 다스리는 자연신들이 포함된다. 천지 안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신명들은 순수한 자연 신성인 원신이 구체적 모습으로 형상화, 개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원신에서 화생하고, 원신의 대광명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신명들은 우주의 최고신 상제의 주재 아래 조화로 충만한 원신이 자연과 역사의 현실 속에 현실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상제의 뜻에 따라 천지 조화성신의 이상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주의 거대한 에너르기 같은, 원신의 조화권능을 현실로 실어 나르는 ‘수레’로 비유될 수 있다.


원신과 한 몸인 상제

이렇게 보면 일단 크고 넓은 것에 관한 한 원신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세상 모든 것들과 하늘, 땅의 신들과 상제마저도 신령스럽게 한다. 그러나 원신이 현실의 천변만화를 지어내는, 조화의 힘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우주 주재자 상제를 필요로 한다.  상제는 으뜸의 신으로서 모든 신명과 원신을 그의 생각과 뜻대로 써서 우주를 다스린다. 상제는 “자연원신계(一者)와 인격 신명계(多者)를 모두 주재하시는 최고의 주신(一者)이다.”(도전 4편 후주) 원신은 상제의 주재함이란 그 씀(用)을 통해 천지 자연과 인간 역사를 다스리는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제를 넘어서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여기에 이르러 증산도의 일원적 다신관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된다. 일원이 근본, 바탕이 되는 일자의 의미라면, 그것은 ‘가장 크고 넓은’ 원신 안에 모든 신명과 상제가 근본을 두는 방식으로 조화 통일됨을 말한다. 또 일원이 최고, 으뜸의 뜻이라면, 그것은 원신과 신명들이 주재자 상제아래 포함되는 신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원신과 상제는 원환의 일체를 이룬다. 원신은 상제의 주재를 통해 비로소 조화성신으로서 자연과 역사의 변화를 이끌고, 상제는 그 원신의 현묘불측한 공능을 통해 무위이화로 우주를 주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둘은 한 몸을 이룬다. 원신은 언제나 상제와 일체로서의 원신이며, 상제는 원신과 일체로서의 하느님이다.

 
기존 신관을 넘어서

흔히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으로 우주의 궁극 근거에 대한 물음을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실 이 물음은 이중적이란 점이다. 우선 그 물음은 우주는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이뤄졌는가를 묻는 것일 수 있다. 또 우주는 누가 혹은 무엇이 최고의 자리에서 다스리고 있는가를 묻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구별되지 않으면, 대화나 사유는 모호함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예컨대 수운 최제우의 사상적 면모를 여러 관점에서 잘 드러낸 논문들을 엮어 만든 책이 있다. 그런데 수운 최제우를 다룬 이 한 권의 책에서 수운의 동학에서 우주의 궁극자 자리를 차지하는 천주 혹은 한울님은 이중적으로 쓰인다. 어떤 전문가를 그것을 우주의 신령한 기운과 같은 것으로, 또 어떤 이들은 인격신 하느님으로 이해하며 각자의 주장을 펴고 있다. 또 이들이 어느 학술 모임에서 그 같은 동상이몽 속에 천주에 대해 토의를 벌인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 개념의 혼란을 접하는 우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주 존재의 궁극적 근거가 갖는 양의성은 충분히 파악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두 근거들은 구별 속에 따로 떨어진 것에 머물지 않고 조화와 통일을 향해야 한다. 

증산도의 신관에서 보면, 원신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일 것이고, 상제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일 터다. 증산도의 일원적 다신관에서 두 궁극의 일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제는 원신과 하나 되어 우주를 다르시고 동시에 원신은 상제와 하나 되어 조화를 짓는 방식으로 일체를 이룬다. 즉 둘은 서로 번갈아 체가 되고 용이 되면서 한 몸을 이룬다. 

그리하여 증산도의 일원적 다신관은 우주의 최고 신 상제를 고려하면 유일신론의 성격이 강조된다. 또 비인격적 우주 원신에 주목하면 범신론적 성격이 부각된다. 뿐만 아니라 증산도 신관은 다신론을 기본으로 한다. 나아가 증산도의 신관은 기존 신관들의 특성을 단순히 나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신관들의 편협함을 극복하면서 그것들을 하나로 아우른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로 통일되고 그 통일의 원리나 요소는 신적인 것이라는 게 범신론의 기본 입장이다. 범신론은 그 하나의 신을 자연 속에 내재한 비인격적 신성으로 본다. 이로써 신의 초월성을 부정하고 객관적 내재성을 견지한다. 따라서 범신론적 신관에서는 우주 만물은 죄다 한 신성의 표현이거나 출현방식이다. 만사와 만물이 모두 한울이라는(物物天 事事天), 해월 최시형의 말이 그 한 예다. 이 신관 아래서는 세계와 신 사이의 차별성은 사라진다. 

이 같은 범신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우주 생성과 변화의 근원, 능력으로서의 자연 신성은 그 자체만을 따로 떼놓고 보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의 사과와 이념의 ‘사과’가 다르듯, 신성 자체〔神〕와  눈앞의 사물과 사건〔事〕은 구별돼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신성이 저 홀로 그 차이를 뛰어넘어 현실의 자연과 인간 역사를 주재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이다. 여기에는 그것을 역사하는 어떤 조화주의 개입이 요구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설사 비인격적 신성 자체가 자기 밖의 어떤 주재적 작용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것이라고 하자. 그렇더라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시비가 따른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얼굴 없는 비인격의 신, 비인칭주어 "It"로 불려야 할 그 자연의 신성에서 우주 만물과 우리 자신의 유래를 구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천지의 부모로 섬겨야 한다. 또 그를 향해 무엇을 간구하고, 그 앞에서 제의(祭儀)를 올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이해나 기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예컨대 우주의 생명의 바람 같은 신성에다 대고 정성 가득히 제사를 올리거나 그에게 아들, 딸 낳아달라고, 우리 가족 잘 되게 해달라고 빌거나 나의 부끄러운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겐 조금은 우스꽝스런 일로 비칠 게 틀림없다.   

하나의 보편적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다신론의 경우는 다음의 문제에 봉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저러한 다수의 신들이 어떤 공통성, 예컨대 원신 같은 하나의 신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서로 소통할 수 있는가? 아니 뭘 기준으로 그들을 다같이 신(신명)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철학적으로 탄탄한 신관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을 인격신이며 세계초월적인 절대자로 보는 유일신론의 경우는 특히  변신론의 문제 앞에서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이 그렇게 완전한데, 그래서 선하기만 한데, 어떻게 이 세상에 악과 비참함, 쓰라림 등을 허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선함이란 대관절 뭐라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증산도 신관에서는 이 같은 문제란 전혀 난감한 것이 아니다. 천지 이치를 따라 지공무사한 신도로써 우주를 다스리는 상제는 좁은 선악의 시비를 벗어나 있다. 상제의 마음자리는 그런 이분법적인 논리로는 폭 잡을 수 없다. 

이제는 이 동일한 문제를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주제라는 문맥 안에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서구 형이상학의 잃어버린 고향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근본 뼈대는 존재-신-론이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이면서 신론이란 소리다. 여기서 존재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내재된 공통의 특성 같은 것이다. 장삼이사, 각색의 인간들이 두루 인간성이란 본성을 지니듯 말이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들을 산출하는, 최고의, 으뜸의 존재자다. 물론 이 형이상학의 신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다른 곳에 두지 않는, 이른바 자기원인자다. 
   
앞서 논의된 것과 관련하여 말하면, 존재는 우주 만물을 이루는 바탕자리며 신은 우주에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근거다. 또 각기 원신과 상제에 상응된다. 물론 양편의 두 궁극자, 특히 상제와 형이상학의 신은 여러 가지로 구별된다. 하지만 둘 모두 우주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면서 우주를 통틀어 주관한다는 점에서 비교될 수 있다. 따라서 서구 형이상학은 모든 것을 가장 보편적인 존재로부터 근거 짓는 존재론이자 모든 것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신아래 귀속, 통일하는 신론이다. 
   
그런데 존재는 그 역시 어떤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인 한에 있어서 그 근거를 신에 둬야 한다. 존재 또한 신이 산출한 것에 포함되는 것이다. 반면 신은 최고의 존재자로서 우주 만물의 보편적 바탕자리인 존재로부터의 규정을 피할 수 없다. 예컨대 존재가 정신이라면 신은 정신 자체이거나 순수 정신, 절대 정신이다. 즉 신 또한 예외 없이 존재에 속한다. 그와 같이 신은 존재를 낳고 존재는 신을 규정함으로써, 양자는 서로에게 속한다. 따라서 서구 형이상학 역시 알고 보면 두 궁극자, 존재와 신이 서로를 잡고 도는 원환의 일체성으로부터 성립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서구 형이상학은 자신의 본질이 유래하는 저 일체성을 사유하지 않고 망각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형이상학을 지해하는, 근거를 구하는 사유방식의 특성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근거 구하기의 사유는 원인이란 언제나 결과보다 시간에서 앞서고 능력에서 우월하다고 여긴다. 이들에게는 원인이 결과를 낳지만, 거꾸로 결과가 원인을 규정하기도 하는 되먹임을 전혀 이해되지 못한다. 그런 순환은 혹은 원환의 일체성은 이성의 영역에서 추방돼야 할 불순한 것이다. 말하자면 서구 형이상학의 땅에서는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는 살지 못한다. 
   
따라서 바야흐로 성숙의 때를 맞아 서구 형이상학이 근본을 찾고자 한다면, 증산도의 일원적 다신관은 그 원시반본의 길을 밝혀주는 향도의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황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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