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멀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 미국

김현일 연구위원

2016.09.28 | 조회 5432

 

 

멀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 미국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지리적으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먼 나라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미국만큼 우리와 가까운 나라도 없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한국의 맹방이며 또 우리나라 교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이며 한국 학생들이 가장 유학을 많이 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국이 세계를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데 반감을 가지며 또 미국이 미국인들의 가치와 이념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강요한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남북한 간의 긴장상태도 그 태반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본다. 아마 이런 비난들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좋던 싫던 미국은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미국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미국을 객관적으로 한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김현일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U.S.A.)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서, 영토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유럽과 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통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대서양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태평양 지역, 즉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동쪽에는 2,000미터 높이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고도 4,000m 이상의 험준하고 큰 봉우리들이 많은 로키 산맥Rocky Mountains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로키산맥에는 유명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다. 두 산맥 사이에 펼쳐진 대평원 지역에는 광대한 농경지가 존재하여 기계화 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영토가 크다보니 서부에는 사막Desert도 존재하는데,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도 네바다 주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기후 역시 다양하다. 중북부와 동부, 오대호 부근은 겨울에는 북극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대륙성 기후인데 비해 서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지중해 지역처럼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겨울에도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작물도 지중해지역처럼 오렌지와 포도를 많이 재배한다.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기후가 좋아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주는 플로리다Florida이다. 햇볕비치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별명이 ‘선샤인 스테이트sunshine state’이다. 플로리다 반도 남부에는 아열대기후가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열대식물들이 자라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지역은 온난한 기후로 인해 살기가 좋지만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해 있어 지진地震이 잦은 편이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의 많은 건물들을 파괴한 1906년의 지진(진도 7.8)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지진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자연재해로는 카리브 해 연안에서 발생, 멕시코 만으로 상륙하여 동부 연안을 휩쓰는 열대성 저기압 허리케인Hurricane과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빈발하는 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있다.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발생하여 집과 자동차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돌풍인데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강력한 뇌우를 동반하는 토네이도는 허리케인과는 달리 발생과 진행방향의 예측이 쉽지 않다. 최근 많은 피해를 남긴 허리케인으로는 2005년의 카트리나Katrina를 들 수 있는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남부의 뉴올리언스 시의 태반을 물에 잠기게 만들고 2,500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강은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이다. 그 이름 자체가 큰 강이라는 뜻이다. 오대호 근처의 미네소타 주에서 발원하여 미국의 중부 평원지대를 구불구불 만곡하여 멕시코 만으로 흘러가는데 길이가 3,700km에 달한다. 지나는 주들이 31개에 달하며 오하이오 강Ohio River, 미주리 강Missouri River, 아칸소 강Arkansas River, 테네시 강Tennessee River, 일리노이 강Illinois River 등 주 이름의 원천이 된 많은 지류를 갖고 있다. 미시시피 강은 철도시대 이전에는 증기선을 통한 중요한 내륙교통로였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의 무대가 바로 이 미시시피강이다. 미시시피 강에는 몇몇 지역에 얕은 여울이 있어 항해가 어렵지만 연방정부는 운하와 우회수로를 건설하여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대호의 하나인 미시간 호와 연결하는 운하(1848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도 건설하였다. 19세기 중엽 철도시대에는 미국에서 철도건설 붐이 불면서 많은 철도가 놓여 졌으나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광대한 자동차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미국의 역사

식민지 시대와 미국의 탄생
오늘날 미국의 역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 발견으로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유럽 지역에 소개된 이후, 16세기 유럽 각국은 남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게 되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Virginia주에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건설한 이후 1733년까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영토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캐나다, 5대호 및 미시시피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식민지들은 계속해서 이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고 경제도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남부에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이 세워지고 유럽, 카리브 해 제도, 아프리카 등과의 무역도 활발하였다. 남부 식민지에서 주로 재배한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은 유럽에서 수요가 많은 작물이었는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남부 농장들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를 구입하여 노동력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영국은 내전 및 명예혁명과 같은 국내의 혼란과 지리적 거리로 인하여 효과적 식민지 정책 집행에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지역의 식민지들은 영국 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았지만 18세기에 경제성장을 이루며 자치 확대의 욕구가 점차 커져갔는데 이를 억압하려는 영국 정부와의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식민지에 부과한 설탕조례Sugar Act(1764)와 인지조례Stamp Act(1765) 등 무리한 세금 정책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영국에서 수입되는 종이, 차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쉔드 법령Townshend Acts(1767)을 둘러싸고 영국과 식민지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5명의 보스턴 시민이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1770.3.5)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Lexington과 콘코드Concord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를 계기로 영국과 미 식민지 양자 간의 무력충돌로 발전하였으며, 1775년 5월에 소집된 식민지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버지니아Virginia주 출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전쟁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인들은 정식군대가 아닌 일종의 민병대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나, 과거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스파니아·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이 참전해 반反영국 진영에 서면서 영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결과로 드디어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열린 제 3회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개 주의 대표들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 공포하였는데 이 날이 후에 미국독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외국의 원조를 얻어 식민지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1783년 9월 3일에는 파리조약Treaties of Paris이 체결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은 공식 종결이 되고 영국은 미국 13개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미국은 강력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1787년 5월부터 9월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헌회의를 개최하였고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여 각주에 회부한 결과 13개의 주 중 9주가 비준을 완료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789년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1789년 4월 30일에는 독립 전쟁의 영웅인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듬해 수도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정해졌다가 1800년에는 워싱턴Washington으로 옮겨졌다.

영토의 확장과 남북전쟁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미국은 점차적으로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1803년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루이지애나Louisiana주를 사들여 국토 규모를 2배로 확장한 것을 시발로, 병합·할양·구매 등을 통해 미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59년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0개 주가 성립되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미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American Civil War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쳐야만 했다.

흔히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노예 문제는 표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노예제로 대변되는 남과 북의 생활 방식, 특히 경제 구조의 근본적 차이에 있었다. 이미 17세기부터 미국의 남부는 전원적이며 농업 위주였고, 북부는 도시적이고 공업 위주의 경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하여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북부와 동부지방에서는 제조업과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이 둘이 그런 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 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입지는 자꾸만 좁아져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으로 몰려갔으며, 급기야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 기반을 붕괴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남부는 앉아서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연방의회는 이미 북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1860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남부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링컨Abraham Lincoln이 당선됨으로써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남부 7개주가 반발하며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를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북부에 맞섰다. 1861년 4월 남부의 섬터 요새Fort Sumter 공격으로 남북 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우수한 공업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북부가 우세를 보여 결국 1865년 4월 26일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은 종결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전쟁에도 승리했으나, 1865년 노예해방 반대론자 존 윌크스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냉전체제와 미국의 번영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유럽권을 장악한 소련의 위협을 크게 인식하고 전후에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제33대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해 소련에 대한 포위정책을 수립, 1947년 3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는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제의하는 마샬계획Marshall Plan을 수립하고, 1949년에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서방 12개국을 규합해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크게 인식해 격렬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국가보안법인 매캐런법McCarran Act이 제정되었고,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이 미국을 휩쓸기도 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기본으로 복지국가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고, 한편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을 중심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본격화되는 등 민권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뿌리 깊은 인종차별 관습의 철폐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 되었다. 진보적 성향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하고 빈곤을 없애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하였으며, 1962년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단행해 소련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 쿠바 미사일 사건을 계기로 1963년 핵전쟁 방지를 위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TST(일명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어 미·소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36대 존슨Lyndon Baines Johnson 행정부 시절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 움직임이 강화되어 반체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층과 흑인 등 소수자 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과격한 흑인민권 운동과 급진적인 학생운동이 이어졌다.

데탕트에서 대對 테러전까지

제37대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이전 정권과 달리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였으며 1970년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를 명시하고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국제외교관계에서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6년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에 제3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터Jimmy Carter는 경제문제와 자원보존을 정부개입주의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대외정책에서는 인권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79년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건 발생시 구출작전의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보수주의 성향이 강화된 미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을 안고 1981년 취임한 제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줄임으로써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공산주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군비를 확충했다. 레이건 노선을 승계한 제41대 대통령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국가 재정적자 증가 및 경제상황 악화가 지속되는 상황 하에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촉발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상승하게 되었다.

1992년 지속적인 경제침체 해결에 대한 기대로 정부개입과 복지국가노선을 추구하는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이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클린턴은 소수인권과 근로자 권익을 강화하고 의료보험혜택을 확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경제 호황에 힘입어 2차 대전 이후 민주당 출신 최초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적 규모의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2001년에는 항공기를 이용해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Pentagon)를 공격한 ‘9.11테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제43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행정부는 대對테러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2002.12)하고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2003.5)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고, 대테러전 차원에서 대량파괴무기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확산 저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하였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2008년 실시된 제44대 대통령 선거에서 ‘희망hope과 변화change’를 주창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했고 적극적, 전향적 대외 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12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는 2014년 4월 25일, 재선 후 처음으로 방한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정치 및 행정


 

정치 체제의 특성

미합중국은 ‘연방공화국’이라는 국가체제를 토대로 하여, ‘대통령중심제’의 정치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다. 즉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연방공화국 체제라 할 수 있는데, 미국 정부는 연방주의Federalism, 권력분립Seperation of Powers,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라는 헌법의 주요 원칙에 입각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의 권한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에 나누어지고, 다시 각자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세 기관 사이에 나누어진다. 그 이유는 정부의 권한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건국 당시에 만든 헌법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계속해서 수정조항들이 추가되었는데 권리장전의 10개 조항을 제외한 17개의 조항(수정헌법 11조~27조)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노예제 금지(제13조 1865년), 대통령 3선 금지(제22조 1951년) 등이다. 현행 미국의 연방헌법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규정하여 두고 그 이외의 사항은 모두 주정부의 권한으로 해 두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연방정부가 주정부를 규제할 수 있는 사항은 연방헌법이 연방의회에 권한을 부여한 사항에 한정된다. 다만 연방법과 주법이 상충할 경우에는 연방법이 우선한다.

행정부(내각)

헌법상 미국의 국가원수이자 연방정부의 수장인 대통령The President은 직접 선거가 아니라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을 통한 간접선거로 선출이 된다. 특이한 것은 주에서 한 표라도 더 많이 얻는 후보가 주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간다는 승자독식 제도winner takes all이다. 그래서 실제 득표수와 확보한 선거인수가 어긋나 더 높은 표를 얻었지만 선거인단수에서는 지는 경우도 간혹 일어난다. 최근의 경우로는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엘 고어 후보가 국민들의 표는 더 많이 받았으나 선거인단 수의 차이로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게 패배한 바 있다. 선거인단의 수는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수를 합치고 여기에 미국 연방정부가 소재한 컬럼비아 특별구에 배당된 몇 명을 합한것으로 현재는 538명이다.

현행 미국 행정부 내각Cabinet은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과 바이든Joseph Biden 부통령, 그리고 국무부를 비롯해 연방정부 집행기능의 주축을 이루는 15개의 중앙행정부처로 구성된다. 중앙 행정부처 각 부의 최고 책임자는 장관Secretary이며 연방 내각의 구성원이 되고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진다.

또한 중앙정보국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이나 연방준비은행제도Federal Reserve System 등 대통령을 위해 일을 하는 독립 행정기관들이 있는데, 이는 업무가 특수하여 행정 각 부에 소속되기가 어려우며 그 업무가 초당적 입장에서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설치된 기관들이다. 4년 임기의 대통령은 헌법상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가지며 주요 권한으로는 공직임명권, 의회소집권, 의회법률안거부권, 조약체결권, 사면권 등이 있다.

연방의 구성원인 각 주State의 정부 수장은 주지사Governor라고 하며, 주정부는 외교권과 교전권 등을 제외하고는 주권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권력의 거의 전부를 보유하고 있다. 즉, 주정부에는 주 자체의 의회, 법원, 행정부가 있어 각주에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각 주가 담당하는 사항에 관하여는 각 주 스스로가 정한 방식에 따라 규제방식도 달라지게 되므로, 각 주에 따라 동일한 사항에 대한 규율방식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많다.

입법부(의회)

미국의 의회Congress는 상원Senate과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나뉘는데 상원의원은 주의 대표이고 하원의원은 지역대표이다. 하원의석이 인구비례에 의해 결정되는 반면 상원은 인구와 관계없이 주당 2명으로 되어 있다. 양원제를 택하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과는 달리 미국의 상원은 하원보다 더 명예롭고 권한도 크다. 하원이 갖지 못한 조약비준, 장관 및 연방판사, 군軍고위장교 등에 대한 임명동의권 그리고 연방관리들에 대한 탄핵심 판권이 있다. 임기도 2년인 하원의원보다 길어 6년이다. 대통령은 의회의 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나 의회가 다시 결의하면 그 법안은 법으로서 효력을 갖도록 대통령의 거부권을 제한하였다.

미국은 양당제도가 정착되어 있는데 현재의 공화당 Republican Party은 보수주의를, 민주당Democratic Party은 진보적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많은 국민들이 양당의 당원으로 등록, 활동하고 있는데, 이는 소수 엘리트의 정당이 아닌 대중정당의 성격을 띠면서 견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징표로 해석되고 있다. 양당 외에도 소수 정당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상당 기간 사회당도 존재하였지만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미국 사회가 비교적 유동성이 큰 사회여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약하기 때문이다. 빈부의 실제 격차는 크지만 하층민들도 창의성을 발휘하고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미국인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법원)

미국의 사법부는 연방주의 원칙에 따라 연방법원과 주법원이라는 이원적인 사법 체제가 병존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법률 및 권한을 가진 50개 주와 연방정부가 서로 다른 재판관할권을 보유한다. 연방법원과 주법원은 서로 독립 병존해 있으므로 연방법원은 주법원의 권한에 간섭이 불가하지만, 연방헌법이나 연방법률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주법원의 사건이라도 연방대법원이 최종 심판권을 보유한다. 연방법원은 연방 대법원US Supreme Court, 연방 항소법원 US Court of Appeals, 연방 지방법원US District Court의 3심급 구조로 되어 있으며, 연방법관은 헌법에 의해 독립된 지위가 보장되고 탄핵을 받지않는 한 자의에 반하여 파면이 불가한 종신 임기제이다.

주법원의 조직은 대체로 1개의 대법원(Court of Last Resort 혹은 Supreme Court)과 항소법원(Court of Appeals), 일반관할권 또는 제한적 관할권을 가진 1심 법원(Trial Courts)으로 구성되나, 주에 따라서는 2심 제도를 채택하기도 한다.

경제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다.

GDP를 보면 16.7조 달러로 인구 13억이 넘는 중국의 13.3조 달러를 넘어선다. 인구도 3억 20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이다.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로서 이민자들이 지속적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미국은 인구는 줄기차게 증가해왔다. 그러나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 미국의 비밀은 다른 데 있다. 발명을 장려하고 기업을 통한 성공을 높게 평가하는 친기업적인 문화가 그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많은 혁신적 발명들과 기업들이 미국에서 나왔다.

전기는 유럽에서 발명되었지만 전기를 이용한 현대식 조명은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하였고, 자동차 역시 유럽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지만 표준화된 대량생산은 미국의 헨리 포드 자동차 회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20세기의 IT 산업은 대부분 그 기술이 미국인들에 의해 발명되고 주요한 기업도 거의 미국기업이었던 그야말로 미국적 산업이었다. 미국에는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만을 갖고 벤처창업에 나서는 젊은이들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다. 이는 기업을 통한 성공에 큰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친기업적 문화뿐 아니라 사업에 실패해도 재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법제도와 벤처사업에의 투자를 용이하게 하는 금융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근대금융업은 영국에서 발전하였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금융업의 중심도 미국으로 옮겨갔다.

이는 미국에서 대기업이 대거 탄생하고 주식시장이 활기를 띠어 대규모 금융회사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미국금융업의 역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 모건J. P. Morgan이다. 투자은행부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모건은 기업간의 합병을 주도하여 U.S.스틸, 제네랄 일렉트틱 같은 대기업의 탄생을 도왔다. 1907년 경제공황을 이겨내도록 은행가들을 협력을 끌어낸 것도 그였는데 오늘날의 미연방은행도 모건의 그러한 활동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미국의 농업 역시 미국이 내세울 만한 경쟁력 있는 경제부문이다. 미국은 일찍부터 농업을 산업처럼 키웠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도 상업적인 농장이었지만 19세기 중엽부터 미국의 중서부 초원(프레이리) 지대가 농지로 활용되고 정부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미국의 농업은 산업적 농업으로 발전하였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중서부의 농작물들은 철도를 이용하여 시카고로 운송되어 그곳에서 대량으로 거래되었고, 세계시장으로도 수출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세계를 먹여 살리는 역할도 하게 된 것인데 오늘날 한국에도 저렴한 미국 농산물들이 대거 수입되고 있다.

종교와 문화


 

미국 사회의 특징

미국은 16세기 유럽으로부터 이민이 시작된 이래,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지로 부터 온 이민자들이 모여 구성된 다
인종ㆍ다민족ㆍ다문화 사회이다. 이러한 다원적 미국 사회를 동질성을 강조하여 ‘용광로melting pot’라고 부르거나, 각 문화의 이질성을 강조해‘ 샐러드 볼salad bowl’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울러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초기 이민자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또는 계급상 제한에서 벗어나 토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미국은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는 미국에서는 개개인이 계급·종교·인종의 제한에 관계없이 근면(hard work)과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삶의 목표를 추구, 실현할 수 있다는 소망을 의미한다.

미국의 종교문화

미국은 헌법에 정교政敎분리를 명시(수정헌법 1조)하여 국교를 금지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으며,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교회지원 및 학교 내 예배 등은 불가하다. 그러나 정교분리 규정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의 증인 선서나 대통령 취임식 등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할 정도로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며, 미국인들은 종교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 사회의 종교적 성향은 기부 문화를 강조하고, 고아 입양을 증진시키는 등 개인 능력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인해 공적 부조 시스템이 부족한 미국 사회의 약점을 보완하는 순기능도 있으나, 때로는 지나친 종교원리주의, 사이비 종교의 발흥, 타 종교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문화 등 역기능도 초래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역에 따라 종교적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 다른 이민 집단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각기 정착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루터교는 독일인들과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많이 믿는 종교인데 그들이 중서부 지역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중서부 지역에 많은 루터 교회가 있으며, 침례교는 남부에서 발달했는데 남부주에는 아직도 많은 침례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 서부의 유타Utah주는 모르몬 교도들이 정착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몬교 신자다. 남부 지역과 서부의 일부는 ‘성서 벨트(Bible Belt)’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에는 성서가 문자 그대로 진리이고 성서의 내용이 인간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 성향의 신교도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청교도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했던 동북부(뉴잉글랜드 지역) 지역의 경우, 19세기 이후 아일랜드, 이태리출신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가톨릭 세력이 강한 지역으로 변화했으며(케네디 가문이 그 일례), 멕시코 접경지역에서의 히스패닉 인구의 유입으로 바이블 벨트 이외의 남부지역 또한 가톨릭 인구가 증가 추세에 있다. 미국은 종교적 자유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며 기독교 이외에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다. 20세기에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의 여러 종교들이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성공한 데에는 이러한 관용적 분위기가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미국 사회의 흑백문제

미국사회의 최대 고민은 흑백문제이다. 흑인과 백인간의 갈등은 그 역사적 뿌리가 식민지시대 아프리카 노예무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부의 농장들은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면화, 사탕수수, 담배 등을 재배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토착민들이나 유럽 이민자들로부터 확보하지 못하자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노예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1830년대부터 노예제 폐지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서부에서 새로운 영토가 추가되면서 흑인 노예 존폐 문제는 첨예한 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이와 같은 갈등은 끝내 양 진영으로 갈라져 내전을 벌인 남북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전쟁 중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선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의회가 나서 수정헌법 제13조를 제정하여 미국 내 모든 지역에서의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노예해방으로 흑인들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KKK단(Ku Klux Klan)과 같은 백인 비밀결사들의 테러행위가 자행되는가 하면, 법원에서는 ‘수정헌법 제14조가 주 정부의 인종차별을 금지하지만 사조직이나 개인의 인종차별에는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판결(1883년 연방대법원)과 기차좌석의 흑백분리를 인정하는 판결, 학교의 흑백분리를 인정하는 판결 등이 나왔다. 이러한 흑인에 대한 차별이 그대로 지속되자 1960년대에 들어와 흑인들의 불만은 민권운동으로 폭발하였고 때로는 인종폭동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으로 등장했고, 말콤 리틀 Malcolm Littl‘e(말콤 X’라고 불림)같은 급진적인 흑인운동가도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의 흑인문제는 흑인 사회의 문화적 특징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인식도 일고 있다. 전문적 지식이 중요시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상승수단인데 흑인사회에서는 교육이 등한시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흑인사회 내부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을 자꾸 언급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 문화의 대중성

세계 최초의 상업 영화 상영이 1894년 뉴욕에서 이루어진 이래,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영화산업은 부동의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영화계는 미국의 다원적 문화 배경 및 거대 자본에 기반을 두고 블록버스터에서부터 인디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생산해내고 있고, 이는 TV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미국 드라마 역시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으며,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및 인디영화를 선보이는 선댄스Sun Dance 영화제 등 세계 주요 영화제들이 매년 개최되고 있다.

또한 미국 음악은 다인종·다문화적 사회답게 다양한 장르를 지니고 있으며, 20세기 이래 세계 대중음악을 선도하고 있다. 흑인 이주자들의 민속음악에서부터 비롯된 재즈·소울·블루스, 블루스와 백인 육체노동자들의 컨트리 음악이 혼합된 락앤롤 그리고 최근의 힙합, 미국 팝 음악 등이 미국의 대표적 음악 장르이다. 주간지 빌보드Billboard가 앨범 판매량·방송횟수를 집계하여 발표하는 ‘빌보드 차트’는 대중음악의 지표로 유명하다.

아울러 미국의 문학도 전통이 깊다. 대표적인 미국 작가로는 마크 트웨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J.D. 셀린저, 에드가 앨렌 포, 스캇 피체럴드 등이 있으며, 싱클레어 루이스(1930)부터 토니모리슨(1993)까지 11명의 미국인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


한미 관계는 1882년 양국 사이의 수교 조약인 조미우호통상항해조약朝美友好通商航海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진출을 막기 위해 청나라가 주도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나, 당시 고종 임금을 비롯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도덕적 나라로 매우 호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조선의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1905년 7월 29일 체결한 ‘미일협약(카스라·태프트 협약)’에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였다. 이어 1905년 11월 17일‘을사늑약’체결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한미관계는 단절이 되었다. 이후 양국관계는 1945년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등을 기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제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1945년 한반도를 소련과 분할하여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남한을 3년간 통치하였고, 1949년 1월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 승인하였다. 군정軍政 이후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였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곧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반도로 들어와 침략군을 물리쳤다. 종전 후 1953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체결로 양국 간에 동맹관계가 수립됨으로써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게 되었다.

한미 동맹의 수립에 초점을 둔 1950년대의 한미관계는 1960~1970년대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한국의 근대화 및 경제적 도약이 이뤄지면서 점차 심화·발전되었으며, 1978년 한미 연합군사령부 창설과 함께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한미 연합방위체계의 공고화가 이루어졌다. 1980~1990년대에는 한국의 경제성장 지속, 한국 내 민주화 정착,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제고됨에 따라 한미 관계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핵심적 가치를 공유하는 보다 성숙한 동맹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탈냉전 및 북한 핵문제 대두라는 안보환경의 변화와 한국의 제고된 위상을 반영, 양국간 안보협력 강화를 위한 조치들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1994년 평시작전권 전환 및 1991년 방위비 분담특별협정체결 등에 따라 한국의 안보 역할은 더욱 증대되었다. 오늘날 한미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및 번영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공유하면서, 21세기 전략동맹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미국은 군사적 맹방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풍요로운 나라가 되는 것, 사회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자유로운 나라가 되는 것이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에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면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국민들 사이에서 확연히 갈라지게 되었다. 좌파는 한미관계를 신식민주의적인 관계로 보았던 반면 우파는 미국을 여전히 우리가 가까이해야 할 맹방이자 발전의 모델로 간주하였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이러한 좌우파간의 입장차이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한국전쟁 직후와는 달리 현재 한미관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변화로부터 기인한다. 하나는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인하여 한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의 시혜를 받던 빈곤한 원조대상국에서 호혜를 추구해야 할 협력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발전이다. 예전에 중국은 한국의 적대국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로서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더욱이 중국은 정치적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을 유효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한미관계 역시 이러한 상황에 맞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와 대외정책

미국의 식민지 정책
미국은 해외식민지를 대거 보유하고 지배한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탄생한 나라였지만 19세기말이 되면 미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뒤를 이어 후발 제국주의국가로 발전하였다. 당시 유럽은 아프리카를 분할하고 이제는 아시아의 거대한 나라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나라마다 제국주의에 대해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미국도 이러한 경쟁에서 뒤질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해외식민지를 보유해야 하며 해외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미국도 전함 건조 사업에 나서 1900년경에는 세계 3위의 해군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미국은 먼저 하와이의 미국인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요구에 응해 하와이 왕국을 병합하였으며, 쿠바 문제를 계기로 스페인과 전쟁을 하여 굴복시킨 다음 푸에르토리코 섬과 필리핀을 미국의 영토로 차지하였다. 미국은 필리핀 획득을 계기로 아시아에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영토확장은 필리핀으로 끝이 나서 여타 다른 지역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대신 미국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었던 중국에서의 영토분할을 반대하면서 각국이 자신들의 세력권 내에서 다른 나라들의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의 향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직접적 영토획득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ㆍ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국의 세계 개입
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예를 들어 1903년 도미니카 공화국이 파산 지경에 몰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채무를 이행할 수 없게되자 미국은 그 세관을 장악하여 세관수입의 45%를 도미니카인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외국의 채권자들에게 분배하였다. 미국이 도미니카 공화국의 재산관리인 역할을 맡은 것이다. 도미니카에 대한 미국의 재정간섭은 30년 동안 지속되었다. 또 1906년 쿠바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미군이 쿠바에 파견되어 폭동을 진압하고 3년간 주둔하였다. 미국은 니카라과에도 군사개입을 하여 군대를 10년간 진주시켰다. 미국은 유럽의 영향력이 니카라과에 미치는 것을 염려하여 니카라과 정부와 조약을 맺어 어느 나라도 그곳에 운하를 건설할 수 없도록 보장을 받았다.

미국의 개입과 간섭은 미국의 앞마당처럼 여겨진 중남미 지역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경제력이 커짐에 따라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도처에서 외교적, 군사적 개입을 하였다. 직접 공격을 받아 참전하였던 유럽에서의 양차대전은 말할것도 없고 2차대전 후에는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의 침공을 물리쳤으며 베트남 내전에도 개입하였다. 소련의 위협에 맞선 냉전 시기에는 미국의 우방들에게 공산주의가 파고들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경제적 지원 정책을 펼쳤는데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마셜 플랜이 그 대표적인 정책이다. 한국 역시 미국의 경제지원을 크게 받은 나라의 하나였다.

미국의 중동정책
미국은 2차대전 이후에는 중동에도 세력을 크게 확대시켰다. 이 지역에서 미국이 필요로 하는 석유가 대거 생산되면서 그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권위주의적인 친미정권들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중동의 석유자원에 대한 외국인들의 지배에 반발하는 아랍민족주의가 흥기하면서 미국에는 강력한 적이 생겨나게 되었다. 더욱이 미국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친이스라엘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아랍인들의 반미 정서를 부채질하였다. 중동인들은 이스라엘인에 의해 그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의 고난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유럽과 미국 등 서방 기독교권을 악마시하고 기독교 세력에 대한 투쟁을 성전으로 미화하는 이슬람 과격세력은 이러한 반미정서를 바탕으로 그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였다. 현재 미국은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북한, 남미에서는 쿠바와 베네수엘라 같은 반미국가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등 만만치 않은 적들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나라들보다 더 다루기 힘든 골치 아픈 세력이 중동의 이슬람 과격파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등 미국과 공유 할 수 있는 가치들이 적지 않은 반면 후자의 경우는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빈 라덴과 9.11 테러, 아프간 전쟁 등은 미국이 중동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잘 드러낸 사건이었다.

미국의 영토확장 스토리

미국은 넓은 영토와 개척의 역사를 상징처럼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영토에 얽힌 사연과 배경을 가진 스토리가 다양한 편이다. 미국이 1766년 독립할 당시 13개의 주가 있었는데 모두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 영국의 식민지들은 서쪽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을 대체적인 경계로 삼았는데, 산맥 너머에는 모피교역을 주업으로 하던 프랑스인들이 사냥을 하여 자신들에게 모피를 팔던 인디언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저쪽을 지배하던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은 결국 영토를 놓고 충돌하였는데, 이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간의‘ 프랑스 인디언 전쟁’(The French and Indian War, 1755~1763)으로서 유럽에서 벌어진 7년전쟁의 아메리카 버전이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미시시피 동쪽의 영토를 영국에 내어놓았고 영국 식민지의 영토는 크게 늘어났다. 오하이오Ohio, 일리노이Illinois, 인디아나Indiana, 켄터키Kentucky, 미시시피Mississippi, 테네시Tennessee 주 등이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다음으로 미국 영토를 크게 확대시킨 것은 루이지애나Louisiana영토 구입이었다. 루이지애나 즉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부터 로키산맥 일대에까지 펼쳐진 땅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땅이 된 곳이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를 통치했던 나폴레옹은 돈이 쪼들려 미국에 1500만 달러를 받고 이 땅을 팔아넘겼다. 루이지애나 준주로 명명되었던 이 땅에서 많은 새로운 주들이 생겨났는데 루이지애나Louisiana, 미주리Missouri, 아칸소Arkansas, 아이오와Iowa, 캔자스Kansas, 네브래스카Nebraska, 콜로라도Colorado 등 13개의 주들이다. 한반도의 열 배에 달하는 루이지애나 영토를 구입함으로써 미국의 영토는 순식간에 배로 늘어났다.

이러한 영토 확대로부터 힘을 얻은 미국인들의 서부로의 이주물결은 계속되었다. 오늘날의 텍사스Texas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원래는 멕시코 땅이었는데 이곳으로 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멕시코 정부도 미국인 이주민들을 환영하였지만 곧 미국인 정착민들과 멕시코 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져 결국 ‘미국-멕시코 전쟁’(Mexican-American War, 1846~1848)으로 비화하였다. 전쟁에서 진 멕시코 정부는 텍사스Texas와 뉴멕시코 New Mexico뿐 아니라 캘리포니아California도 양도(1848~1850)하였다. 텍사스Texas는 한반도의 세 배에 달할 정도로 큰 주인데 얼마 있지 않아 땅 속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매우 부유한 지역이 되었다. 캘리포니아California 역시 영토의 크기가 한반도의 두 배에 달하는 큰 주이다. 이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기 직전인 1848년 새크라멘토 근처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일어났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미국인들은 물론 유럽인과 중국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캘리포니아에 모여들며 혼성적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영토 편입으로 미국은 동으로는 대서양, 서로는 태평양에 면한 큰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이외에도 멕시코 만으로 쭉 뻗어있는 온화한 기후의 플로리다 Florida(1819)를 스페인으로부터, 오리건Oregon은 영국으로부터(1846) 그리고 알래스카Alaska(1867)는 러시아로부터 각각 양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국의 영토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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