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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 승리의 숨은 조력자 ‘체코군단’ 2

정원식 연구위원

2020.12.15 | 조회 45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전의 신성로마제국은 원래 독일인, 폴란드인, 체코인, 마자르인, 이탈리아인, 남슬라브 제족(諸族) 등을 포함하는 다민족(多民族) 국가로 13세기부터 합스부르크가() 왕가의 통치 하에 있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등장한 나폴레옹이 1804년에 프랑스 제국을 선포 한다. 이후 1806년 프랑스 제국은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여파로 천년 동안 내려오던 허울뿐인 신성로마제국(962~1806)을 프란츠 2세가 자진 해체하였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자구책으로써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대공국를 중심으로 그 주변의 여러 소공국을 묶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승격하고 프란츠 1세라 칭하였다.

1815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회복했으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사르데냐 왕국 및 독일을 통일하려는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연거푸 패배하자, 신성로마제국에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위를 계승해 왔던 전통 마저 흔들린다. 이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67529일 헝가리 귀족들에게 의회 설립과 자치를 보장하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서 형성된 체코는 1525년부터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면서 1867년에 자동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는데 제1차 대전 말인 1918년에 해방을 맞이했다. 슬로바키아도 906년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모라비아 제국을 침략하여 슬로바키아를 점령함으로써 이후 1,000년 가까이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918년 제1차 대전 종전과 함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였다.

 

체코(체코슬로바키아)군단 설립과 전투

 

이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19세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범슬라브 민족주의 열풍으로 강한 결속을 다지며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3국 협상(··)3국 동맹(·이태리·오스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징집된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똑같이 동유럽 남부 발칸반도 일대의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동부전선 일대는 슬라브계 민족들이 대거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이다.

마침 동유럽을 중심으로 불어 닥친 범슬라브 민족주의 열풍은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민족주의 정서에 큰 자극제로 작용하였다. 일부 체코슬로바키아 병사들은 탈영해 러시아 쪽으로 집단 귀순하기도 했다. 이는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던 제정 러시아의 지향과 들어맞았다. 그들은 조국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와 뜨거운 열망을 제정 러시아 육군 제3군 예하 6만 여 명의 체코군단으로 결집했다. 이들은 러시아를 통해 연합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상태에서 곧바로 1914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제국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이때 제정 러시아 측을 설득하고 협상하여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을 포로가 아닌, 군 무력집단으로 조직하고 군사교육훈련을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마사리크(1850~1937)였다. 그들의 눈과 총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그 동맹인 독일 제국으로 향했다.

당시 체코군단은 갈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19177월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일어난 즈보로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크게 이겼다. 이 승리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자원군 수가 늘어나면서 바흐마흐 전투에서도 독일 제국군에게 승리하면서 휴전 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체코군단 극동 블라디보스코크로 향하다

 

 

 

그런데 1917107일 볼셰비키가 적위대를 동원해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점령하는 10월 혁명을 일으킨다. 이에 등장한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정부는 체제 안정을 위해 이듬해인 191833일 연합국(··)일원에서 이탈하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독일과 전격적으로 체결한다. 이로 인해, 연합국은 물론, 제정 러시아 편에 서서 싸웠던 체코군단 장병들은 큰 충격 받고 거의 패닉상태에 빠지게 된다. 체코군단은 자력으로 서유럽 전선으로 가서 전투에 계속 참전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러시아 북부 무르만스크나, 아르한겔스크 등을 통해 체코군단을 서유럽전선으로 이동 및 배치하려 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이 러시아 서부로 군대와 배를 보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체코군단 장병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편을 통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프랑스 주재 체코 망명정부 지도자 토마스 마사리크는 연합국과 함께 러시아 레닌 혁명정부에 압박을 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

첫째, 체코군단은 현실적으로 독일군에 막혀 서유럽전선으로 이동 및 배치될 수 없으니, 시베리아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동시킨다.

둘째, 블라디보스크 항구에서 연합군 선박을 이용해 서유럽 전선으로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서 투입 및 배치한다.

셋째, 체코군단 이동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체코군단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태리, 캐나다, 일본을 포함한 25천명 규모의 연합군을 시베리아로 출병시킨다.

볼셰비키 혁명의 후유증으로 인해 발발한 19185월 러시아 혁명군(적군)과 반혁명군(백군)간의 내전(1981~1922)에서 체코군단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때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 마사리크는 체코군단 장병들에게 가급적 내란에 휘말리지 말고 목숨을 잘 보전하여 안전하게 서유럽 전선으로 가라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에 체코군단은 볼셰비키에게 호의적이진 않았지만 서부전선으로 가는 길이 급했기에 내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체코군단은 상황에 따라 백군과 적군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이동하였다.

 

 

  체코군단은 이동 중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세계적인 사건을 일으키는데 일조한다. 바로 1918년 7월 17일 우랄산맥 남부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이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전격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체코군단이 백군과 함께 도시로 접근하여 황제 일가를 구출한다는 정보 때문에 초조해진 유대인 출신의 스베들로프의 적군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어 있던 니콜라 황제 2세와 그 일가족을 처형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체코군단의 이동은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즈음,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했던 연합군이 체코군단의 철수를 돕기 위해 상당량의 무기도 지원했다. 특히 체코군단의 안전한 기차 이동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7만 3천 명의 일본군은 연합국과 함께 소위 시베리아 출병(1918.7~1922.10)을 단행했지만, 실은 시베리아 영토에 대한 야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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