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찾기

【논문】 《삼성기》저자 ‘안함로’에 관한 오해 2회

노종상 연구위원

2016.04.14 | 조회 6610

▣논문

《삼성기》저자 ‘안함로’에 관한 오해

 

 

 

Ⅱ. 《삼성기》저자는 누구인가

《환단고기》의 편자 계연수가 작성한 〈범례〉에는 다음과 같이 《삼성기》가 편찬된 과정을 밝혔다.

《삼성기》는 두 종류가 있으나 모두 완편完編은 아닌 것 같다. 안함로가 찬술한 것은 오래 전부터 우리 집안에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제 이를 〈삼성기전〉 상편으로 하고, 원동중이 찬술한 것은 평안도 태천泰川의 진사 백관묵白寬默으로부터 얻은 것인데 이를 〈삼성기전〉 하편으로 하며, 이 두 편을 합본하여 〈삼성기전〉이라 한다.1)

이 글에는 《삼성기》 상·하편의 저자가 안함로·원동중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삼성기》 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저자가 ‘안함로·원동중’이고 하였으므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게 되었다. 《환단고기》를 통해 드러난 《삼성기》와 그 저자에 관한 문헌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 《삼성기》 (주로 《한단고기》를 통한)의 모든 번역서와 논문은 이 〈범례〉에 의거하여 저자를 ‘안함로’로 표기하고 있다.2)

《삼성기》저자 안함로와 관련하여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아주 기본적인 곳에서 발생하였다. 모든 기록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이 경우 문학서, 특히 시와 소설과 같은 분야는 제외된다) 특히 역사서는 사실성에 그 존재 가치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헌자료 가운데 사실성만을 두고 가치를 평가한다고 하였을 때, 그 중 머리 부분을 차지하는 사료가《조선왕조실록》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3) 바로 이 《조선왕조실록》에 《삼성기》라는 책명이 기록되어 있고 저자의 이름도 밝혀져 있다.《조선왕조실록》 세조世祖(이하 《세조실록》으로 줄임. 다른 실록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3년(1457) 5월 26일 기사가 그것이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4)

 

기사 내용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재위 1455~1468)가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등 19종의 책들 개인이 간직해서는 안 되므로 거두어들이라는 내용이다. 일종의 ‘금서禁書’에 대한 기사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으로 줄임)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이 기사에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삼성기》와 그 저자에 관하여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7책 200면”을 인용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 한글 번역문인 이 기사의 번역상황(원문·번역문)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바로 이 문제점이 《삼성기》 저자 안함로의 ‘조작 내지 왜곡’설이 나오게 된 일차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보다 꼼꼼한 분석이 요구된다.

먼저 이 기사의 홈페이지 ‘국역’난에는 인용문과 같이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되어 있다. 같은 홈페이지 ‘원문’란에는 “《安含 老元 董仲三聖記》”라고 되어 있다. 또한 같은 홈페이지에서 이 기사의 원본을 이미지 형태 그대로 “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싣고 있다. 그러니까 1차 문헌자료인 원본 이미지가 가정 정확한 자료라고 한다면, 국편에서는 원문을 작위적으로 건드려(물론 이와 같이 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읽기가 편리하도록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安含 老元 董仲三聖記”라고 해놓았고, 바로 이 의도에 맞추어(혹은 반대일 수도 있다. 번역에 맞추어 원문을 건드렸다는 얘기다)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번역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安含老元董仲三聖記”를 한 권의 책명으로서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표기에 따르면 이 책은 저자가 따로 존재하고(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책명에 따른 책의 성격 혹은 내용을 유추한다면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에 관한 기록’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5) 고전번역원에서 밝히고 있는 《삼성기》 관련 기사의 출처가 “【원전】 7집 200면”이고, 국편 역시 “【국편영인본】 7책 200면”라고 밝혀놓고 있는 것을 본다면, 두 번역물은 민추의 그것으로 보인다. 관련 문구만 인용하면,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OB 조선왕조실록에서 제공하는 같은 기사에는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하여 책명을 표기하는 기호 “《》”만 빠져있을 뿐, 국편의 그것과 비슷하다.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에 관한 기록’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번역이다. 그러나 이 번역문에서는 국편과 달리 책명을 표기하는 기호 “《》”가 빠짐으로서 다른 읽기도 가능하다. 먼저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이 쓴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는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이 저자가 된다.

다른 문제점도 발견된다.《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삼성기三聖記》와 《환단고기》〈삼성기三聖紀〉의 한자 책명(‘―記’와 ‘―紀’)이 다르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자전적 의미에 따르면 ‘기記’는 ‘기록할 기’자로서 단어 뜻풀이를 한다면 ‘(어떤 말 다음에 붙어)'어떤 사실事實을 적은 기록'의 뜻을 나타내거나 한문 문체의 한 가지로서 주로 사적事蹟 또는 풍경을 적은 산문체의 글’을 가리킨다. ‘기紀’는 ‘벼리 기’ 자로서 ‘기전체紀傳體 역사에서 제왕의 사적을 적은 글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전적 의미 자체에 충실한다면 고전번역원과 국편의 번역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安含老元董仲三聖記”로서 ‘―記’이므로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이 썼거나, 그들에 관한 “개인적인‘ 기록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논의하는 《삼성기三聖紀》는 한국 상고사를 서술한 역사책이다. 삼성은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가리킨다. 삼성이되, 3인의 성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7세의 환인, 18세 환웅, 47세의 단군이 다스렸던, 그러니까 한국민족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단군조선의 건국과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사서다. 그렇다면 《세조실록》에 기록된 《삼성기》와 다른 책인가.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환단고기》 안에서 《삼성기》 관련 내용에 동의한다. “1457년(세조 3) 세조가 팔도관찰사에 수압령을 내렸던 책들 가운데 그 이름이 등장한 바 있는 《삼성기》는 한국민족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단군조선의 건국과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삼성은 환인·환웅·단군을 가리킨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三聖紀》와 《三聖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세조실록》에 나오는 민추와 국편의 번역과 같이 《삼성기》를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이 썼거나, 그들에 관한 “개인적인‘ 기록으로 번역하는 것은 근대적인 시각에 함몰된 결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서 우리는 먼저 ’―紀‘와 ’―記‘자의 ’형성문자‘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1) ’―記‘에 대한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말씀언(言☞말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己(기☞굽은 것을 바로잡다→좋지 못한 것을 바로잡다→흩어진 것을 정리(整理)하는 일)로 이루어짐. 뒤섞인 일을 정리하여 순서 있게 하다→적는 일을 말함

2) ’―紀‘에 대한 형성문자

뜻을 나타내는 실사(糸☞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己(기)가 합(合)하여 이루어짐. 초두머리(艹(=艸)☞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음(音)을 나타내는 己(기)는 굽은 것을 바로잡다→뒤섞인 것을 整理(정리)하는 일, 실사(糸☞실타래)部는 실, 紀(기)는 뒤얽힌 실을 풀어서 정리하다→실마리, 나중에 구분(區分)짓다→나이의 한 구분(區分)이라든가 記(기)와 같이 적어서 표하다란 뜻으로도 씀.(NAVER사전, 한자사전)

위와 같이 두 글자(記, 紀)는 형상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문자의 뜻, 단어의 뜻풀이는 물론 형성문자의 내력까지도 비슷하다. 이와 같이 뜻과 모양이 비슷한 한자는 전근대적 필사 혹은 판각하는 과정에서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기紀’와 ‘―기記’가 혼용되어 판각된 경우로서 현존 최고의 사서로 꼽히는《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의 사서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삼성기》 저자 안함로와 동일인 여부가 문제시 되는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1215) ‘안함安含’조에서도 이와 같은 혼용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좀 길지만 한 연구자의 지적을 인용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의 ‘本紀’를 가리키는 용어로 허다한 ‘本記’와 함께 馬韓조의 예처럼 ‘本記’가 혼용되고 있다. 또 文虎王法敏조에서는 《신·구당서》 고종본기를 인용하여 ‘唐書高(宗本)記’라고 하였다. 만약 ‘本紀’와 ‘本記’의 표기차이가 자료를 구별해주는 유효한 논거라고 한다면 이 ‘唐書高(宗本)記’도 현존하는 양 《당서》가 아닌 또 다른 《당서》였다고 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 (중략) 또한 설사 《삼국유사》를 논외로 치더라도 이규보는 《동명왕편》 서문에서 《구삼국사》의 ‘東明王本紀’를 보았다고 하였고, 본기에 나타난 인용대목에서는 ‘本記’의 표기를 사용하였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本紀’나 ‘檀君本紀’와 함께 ‘東明本紀’를 인용하고 있는데, ‘東明本紀’의 경우 이규보의 《동명왕편》분주에 인용된 ‘本記’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각훈의 《해동고승전》안함 조에도 분명한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 기사를 인용하면서 ‘新羅本記’라고 하였다. (중략) 이처럼 ‘本紀’와 ‘本記’는 얼마든지 서로 혼용될 수 있는 것이지,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표기는 원문 그대로 따랐다-인용자)6)

‘―기紀’와 ‘―기記’가 혼용되어 사용된 경우는 근대에서도, 바로 《삼성기》와 관련된 텍스트에서도 발견된다. 먼저 계연수에 의해 편찬된 《환단고기》가 전해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유립의 《대배달민족사》권1에 실려 있는 《삼성기》는 〈삼성기전三聖紀全〉으로 기록되어 있다.7) 이후 대부분의 번역서, 논문 등에서는 《三聖紀》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임승국 번역·주해본을 비롯한 일부 번역, 논문 등에서는《三聖記》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7)

《세조실록》의 금서목록에 실려 있는 《삼성기》 관련 기사에서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저자이름이다. 위에서 소개한 국편과 민추에서 “安含老元董仲三聖記”를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라고 번역하였다. 두 기관에서 번역한 결과물은 ‘안함ㆍ노원ㆍ동중이 편찬한 《삼성기》’ 혹은 저자미상의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문제는 “安含老元董仲三聖記”를 ‘안함ㆍ노원ㆍ동중’ 3인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8) 이것은, 안함로·원동중이 지은 《삼성기》가 1911년 계연수에 의해《환단고기》 속 한 편으로 묶여졌고, 그의 제자 이유립에 의해 공개된 이후 누구도 의심 없이 (적어도 저자명에 관한 한) 통용되었던 저자명이 의심받는 단초가 되었다.

민추에서 텍스트로 삼았던 태백산사고본 《세조실록》의 한문원본은 표점은 물론 띄어쓰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다른 외국어 번역도 마찬가지겠으나 특히 한문번역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어디를 끊어서 읽느냐에 따라서 번역이 달라질 수 있다. 문제가 되는 “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 마찬가지다. 《삼성기》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문자만을 두고 논의할 때, 번역자에 따라서 “안함로ㆍ원동중, 《삼성기》”로 번역할 수 있고, 민추의 그것과 같이 “안함ㆍ원로ㆍ동중 삼성기”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삼성기》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 번역자(혹은 독자)가 《삼성기》는 물론 그 찬자를 사전에 알고 있다면, ‘옮음’은 그 지식 여하에 달려 있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또한《삼성기》의 ‘기記’자 자체에 대하여 함몰되어버린다면 민추와 국편의 번역결과물이 나올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한 해명은 《세조실록》에 실려 있는 관련기사 전체를 놓고 검토할 필요하다. 이 기사는 일종의 금서령에 관한 내용이다. 이와 같은 금서령은 이후 《예종실록》, 《성종실록》에서도 실려 있다. 제목만 가지고 전체 내용을 파악한다는 것은 위험하지만, 금서령에 실려 있는 목록만을 보면 대부분 한국 상고사에 관한 서책들과 도참서들임을 알 수 있다. 《세조실록》에 실려 있는 금서목록에 올라있는 《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삼성밀기》등은 《환단고기》를 비롯하여 《규원사화》 등 한국 상고사서에서 자주 인용되는 서책들이다. 이밖에도 《고조선 비사》(원래 《조선비사》로서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책인데, 조선시대 사관이 같은 ‘조선’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고조선비사》라고 기록하였을 것이다)가 상고사 서책이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할 때, 같은 금서목록에 실려 있는 《삼성기》 역시 개인의 사적을 기록한 《안함ㆍ원로ㆍ동중 삼성기》가 아니라 같은 금서 목록에 올라있는 다른 서책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상고사를 기록한 역사책 《삼성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이 결론에 신빙성이 있다면, 《삼성기》 저자 역시 계연수, 이유립 등이 처음에 밝힌 그대로 안함로·원동중 2인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밝힌 결과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삼성기》의 저자가 안함로·원동중이 아니라는 일부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민추, 국편의 번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세조실록》 기사가 아닌, 다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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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桓檀古記》〈凡例〉. 三聖紀有二種而似非完編安含老氏所撰余家舊傳今爲三聖紀全上篇元董仲氏所撰得於泰川白進士寬默氏今爲三聖紀全下篇 總謂之三聖紀全. 桂延壽 原著·利己 校閱, 《桓檀古記》, 相生出版, 2010. p.2.

2) 지금까지 출간된 《환단고기》 번역서들은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 임승국, 정신세계사, 1986 ; 《환단고기》(이하 같은 제목은 생략한다), 고동영 역, 한뿌리, 1996 ; 이민수 역, 한뿌리, 1986 ; 양태진 번역·주해, 예나루, 2009 ; 강희남, 법경원, 2008 ; 단학회연구부 엮음, 코리언북스, 1998 ; 金靑度 譯, 고대원출판사, 1992 ; 손석우 역, 한밝문화원, 1988 ; 환단학회 편 , 광오이해사, 979 ; 김은수 역주, 가나출판사, 1985 ; 《 바로보인 환단고기》, 문재현 역저, 바로보인, 2005 ; 《백의민족의 뿌리(역사) : 註解 桓檀古記》, 전동헌 편저, 태봉기획, 2003 ; 《홍익인간과 환단고기》, 금령돈 편저, 유풍출판사, 1995 ; 《발로 확인한 환단고기》, 지승, 학민사, 2012 ; 박상득 역, 춘풍서방, 2003 ; 《桓檀古記要義 》, 鹿島昇 著, 新國民社, 平成2(1990) ; :강수원 옮김, 온누리, 1985 ; 《桓檀古記 : シルクロード興亡史》, 鹿島昇 訳, 新国民社, 昭和57(1982) ; 안경전, 앞의 책.

3) 국보 제151호이기도 한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세계적으로 실록은 여럿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이 유일하다.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왕조실록은 단일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점 외에도 공정성과 객관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록물이다. 왕의 곁에 사관을 두고 국사를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사관은 철저하게 공정성과 소신에 따라 역사를 기록했다. 또한, 그 기록은 당대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실록의 진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했다.” 문화유산채널, 다큐 "조선왕조실록 1부, 조선의 백과사전 조선왕조실록" 편

4)《朝鮮王朝實錄》 世祖 3年 5月 26日.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三聖密記》、《安含 老元 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卷、《動天錄》、《磨蝨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道詵《漢都讖記》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원문 및 번역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이하 동일함). 또한 원문에서 책명을 표기하는 《》는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5) 한국고전종합DB(http://www.itkc.or.kr/itkc/Index.jsp). 고전번역원은 1970년 3월에 설립된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로 줄임)의 후신이다. 민추는 1972년부터《조선왕조실록》의 번역 사업에 착수하여 1993년 12월에 번역을 완료(12종 229책 출간)하였다.

6) 이강래, 〈《삼국사기》 원전론과 관련한 ‘本記’와 本紀‘의 문제〉, 《역사학연구》Vol.11 No.-, 전남사학회, 1997, pp.12-13.

7) 李裕岦, 〈三聖紀全〉, 《大倍達民族史》卷1, 高麗家, 1987, pp.387-393.

8)임승국 번역·주해,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98, pp.17-54.

9) 논자의 기억에 정확하다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구 기관(국편 혹은 민추) 중의 한 쪽은 “안함로·원동중 삼성기“로 번역되어 있었다. 최근에 바뀌었는데, 그 이유를 확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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