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서양사산책 2. 동서문명교류의 문을 연 알렉산더대왕

김현일 연구위원

2020.02.07 | 조회 7487

동서문명교류의 문을 연 알렉산더 대왕

 

김현일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알렉산더가 부왕 필립포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이 된 것은 그가 20세 되던 BCE 336년이었다. 이 젊은 왕자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부왕이 계획하던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페르시아는 오늘날의 이란은 말할 것도 없고 바빌론 제국의 영역인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동쪽으로는 인도 서북부까지 지배한 아시아의 대제국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에 비교해보면 마케도니아 왕국은 넓이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신흥강국 마케도니아가 이 엄청난 적수와 싸우려면 무엇보다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들을 마케도니아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였다. 알렉산더의 부왕이었던 필립포스는 이 그리스 국가들을 한편으로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하면서 하나의 동맹으로 묶어가는 작업을 거의 완수할 즈음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후궁 클레오파트라를 맞이하는 결혼식 자리에서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살해의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들 알렉산더는 당시 마케도니아와 대립하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사주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인들의 원수였던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을 위해서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를 맹주로 하여 일치단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지만 그리스의 주요 폴리스들은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마케도니아는 북방의 야만족(바르바로이) 국가에 불과하였다. 테베와 아테네는 필립포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리스의 자유를 외치며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들었다. 알렉산더 왕은 즉각 군대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테베를 정벌하였다. 그는 테베 시를 파괴하고 많은 주민들을 처형한 후 나머지는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러자 아테네는 알아서 몸을 사렸다. 알렉산더는 테베와는 달리 평화를 요청하는 아테네인들에게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곧 그리스 폴리스들의 대표들이 코린토스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그리스 세계의 UN 총회라고 할 수 있는 이 코린토스 회의에서 알렉산더가 전그리스의 지도자(헤게몬)로 추대되었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원정은 BCE 336년부터 10년 동안 진행되었다. 알렉산더는 동방으로의 이 원정길에 나선 후 한 번도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원정 중에 결혼도 하였는데 박트리아 귀족의 딸 록사나를 왕비로 맞았던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의 이란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완전한 정복을 위해서는 인도까지 진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페르시아는 2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이 힌두쿠시 산맥 너머의 간다라 주였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파키스탄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곳으로 간 알렉산더는 간다라 너머의 인도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들을 불렀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인도는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알렉산더의 명에 일부는 순종하고 일부는 복종을 거부하였다. 당시 탁실라 왕국의 왕 옴피스는 그리스 군의 힘을 알았던지 알렉산더에게 귀한 선물을 바치고 5천 명의 군대를 내어 남진의 안내를 자청하였다. 펀잡 지방에 있던 또 다른 파우라바 왕국의 포루스 왕은 복종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양측의 전투는 휘다스페스 강변의 전투’(BCE 326)로 알려져 있다. 인더스 강의 한 지류인 젤람 강을 당시 그리스인들을 휘다스페스 강이라 불렀는데 장맛비로 불어난 이 강을 건너 알렉산더는 포루스 군을 공격하였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보병 4, 기병 5천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수적으로 포루스 군을 압도하였다. 포루스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그리스 군의 승리로 끝났다. 알렉산더는 포루스의 용기를 칭찬하고 패배한 그를 제국의 총독(사트라프)으로 임명하여 펀잡 지방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리스군 병사들은 원정에 지쳐 더 이상 진군하려 하지 않았다. 10년이나 되는 오랜 원정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의 동쪽 해변까지 진출하고 싶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인도는 아시아의 동쪽 끝이었기 때문에 그 동쪽 바다에 도달하는 것은 세상 끝까지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병사들의 반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알렉산더는 원정군 전체 회의를 열어 병사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아시아 정복이라는 영광스런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데 돌아가서 안락한 삶을 누리려고 하느냐고 병사들을 질책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더 이상 진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동안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제까지의 전과에 만족하고 돌아가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화가 난 알렉산더는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 붙들지 않을 터이니. 자신과 진군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병사는 남아서 정복사업을 완수하자.”라고 하였으나 병사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알렉산더는 철수를 결정하였다. 병사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알렉산더는 12개의 큰 제단을 쌓게 하고 승리를 허락한 신들에게 제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그가 군대를 돌린 곳은 펀잡 지방의 휘파시스 강(오늘날의 베아스 강) 우안이었다. 포루스 왕의 영토였다.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의하면 포루스 왕의 나라에는 300개의 도시들이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하여 자신의 정복지 곳곳마다 도시를 세웠는데 휘다스페스 강 양안에 하나씩 두 개의 도시가 세워졌다. 그의 애마 이름을 딴 부케팔리아와 또 하나는 승리를 뜻하는 니카이아였다.

알렉산더가 세운 이러한 도시들의 수는 20여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것도 몇 개나 된다. 가장 북방에 위치한 도시는 페르가나 지방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인데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타지키스탄에 속하는 곳으로 당시에는 소그드인들의 땅이었다. 그 성벽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알렉산더는 이러한 도시들에 은퇴한 병사나 부상병을 정착시켰다. 이 도시들에서는 그리스어가 사용되고 그리스문화가 주변으로 전파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BCE 323년 바빌론에서 병사하였다. 불과 33세의 나이였다. 록사나 왕비는 남편이 죽은 직후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이름을 부친과 같은 알렉산더라 하였다. (알렉산더 4)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국의 권력을 잡은 카산데르 장군은 록사나와 그 아들을 암피폴리스에 유폐시킨 후 살해하였다. (BCE 310)

알렉산더 제국은 그의 부하 장군들에 의해 여러 나라로 갈라졌는데 옛 페르시아의 영토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BCE 358-281)의 수중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가문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시리아에서부터 이란을 거쳐 박트리아까지 통치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부 이란 지역으로 그리스인들을 이주시켜 도시를 건설하고 그리스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셀레우코스 왕국과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시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는데 그 틈을 타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박트리아 지방이 차츰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디오도투스 1세는 BCE 250년경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박트리아를 독립시켰다.

데메트리우스 1세 때에 박트리아는 인더스 강을 넘어 인도를 침공하고 펀잡 지방을 영토로 편입하였다. 박트리아 왕국은 곧 내분에 휩싸여 박트리아와 펀잡으로 분열되었는데 펀잡 왕국의 메난더 왕(BCE c.160-130) 때에는 갠지스 강 너머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라자스탄 지방이 그곳이다. 팔리어로는 말린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메난더 왕은 불교로 개종하였다. 불교의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은 메난더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불교에 대해 묻는 대화를 기록한 경전이다. 그리스 후예와 불교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가져온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리스 미술이었다. 찬드라굽타가 세운 마우리아 왕조 (BC 317-BC 180) 때 불교는 국가의 후원으로 크게 번창하였는데 소위 간다라 미술은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영향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분야였다. 그리하여 태동한 것이 간다라식 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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