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풍속사전

씨름

2013.06.27 | 조회 4034

씨름 



김홍도 씨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씨름은 두 사람이 상대발의 다리나 허리를 서로 부둥켜 잡고 힘과 기술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넘어뜨려 승부를 내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경기이다. 다리나 허리를 잡기 쉽게 샅바나 끈을 이용하였다. 씨름이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며 한자로는 각저(角抵), 각력(角力), 각희(角戱) 등으로 표현하였다. 


씨름은 원래 고대의 투기(鬪技)의 하나가 놀이로서 발전한 것이다. 서양의 레슬링이나 일본의 스모도 모두 비슷한 기원을 가진 놀이이다. 중국의 후한서에는 부여의 왕이 한나라를 방문했을 때 피리를 불고 각저희(角抵戱)를 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각저희가 씨름과 같은 것이었다고 보인다. 씨름은 제사의식의 일부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소도에서 행하는 제사의식으로서 씨름을 말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에서는 귀족계급에서도 씨름을 애호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환도성 (丸都城: 현 중국 吉林省 集安縣 通溝)에서 발견된 고분의 하나인 각저총(角抵塚)의 현실(玄室)에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고분의 이름을 ‘각저총’이라고 붙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서도 씨름은 아주 인기가 있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은 중요한 정사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과 매일 씨름을 하였다고 하며 그 아들 충혜왕 역시 용사들이 씨름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씨름은 점차 명절놀이의 하나가 되었다. 단오절에는 여자들은 그네를 타고 남자들은 씨름경기를 하게 되었다. 씨름대회는 단오 뿐 아니라 백중, 한가위, 설에도 열렸다. 아이들과 어른이 씨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씨름대회는 연령별로 이루어졌다. 애기씨름은 16세 미만의 아이들 씨름이고 중씨름(혹은 포씨름)은 16세에서 25-26세까지의 청년들의 씨름이다. 상씨름은 그 이상의 연령대 즉 장년층의 씨름이다. 


씨름에서 우승한 사람들에게는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 주어졌는데 포목을 주기도 하였으나 큰 씨름대회의 상씨름 우승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소가 주어졌다. 그래서 상씨름을 ‘소걸이’라고도 한다. 소를 상으로 주는 전통은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증산 상제는 조선의 현실을 씨름판에 비유하였다.“현하대세가 씨름판과 같으니 애기판과 총각판이 지난 뒤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치리라.” 하시고 더 의미심장하게는 “씨름판대는 조선의 삼팔선에 두고 세계 상씨름을 붙이리라.”라고 하였다. 열강들이 조선을 놓고 싸우는 씨름판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한 각축은 애기판과 같았으나 그 각축은 총각판, 상씨름판으로 규모를 키워간다. 


실제로 20세기 초부터 조선을 둘러싸고 주변의 국가들이 대립하였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격파한 일본은 러시아와 조선과 만주를 놓고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러일전쟁(1904-1905)이다. 이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산동반도에 있던 독일의 세력권을 재빨리 점령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중화민국 대통령 원세개에게 일본의 영토 및 경제적 야욕이 담긴 21개조를 강요하였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의도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전면적 군사적 침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인들의 강력한 반발과 세계 열강들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 본격화되었다. 만주를 지배하에 넣은 후 얼마 있지 않아 일본은 중국 본토를 공격하였다.(중일전쟁) 이 전쟁이 태평양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중국의 침략은 미국과의 충돌을 빚었으며 석유와 원료 확보를 위한 동남아로의 세력 확대는 네덜란드, 영국, 호주 등과의 충돌을 빚었다. 태평양전쟁은 앞의 애기판 씨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배워 서양에 대적한 셈이 되므로 배사율을 범한 것이다.(도전 5:118) 일본은 그 결과 참혹하게 패배하였다.


세 번째 상씨름은 조선의 삼팔선을 두고 세계가 대립하는 국면이다. 이러한 상씨름 단계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시작되었다. 조선의 해방 직후에 미국과 소련이 38선 남북을 각각 점령하였던 것이다. 곧 남북한에 이념을 달리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그리고 전세계에 걸쳐서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대립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소위 냉전이 막을 올린 것이다. 그 와중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대립을 토대로 한 내전의 양상도 띠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 소련과 중국이 참전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한국전쟁은 어느 한쪽에게 완전한 승리나 패배를 가져다주지 않고 종식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남한과 북한의 치열한 체제경쟁이 시작되었다. 심지어는 게릴라를 파견하여 수뇌부를 공격하거나 인민봉기 등 혼란을 획책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말 이후의 동구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으로 냉전도 종식되었지만 한반도에서의 남북한 간의 대립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간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으나 북한의 핵개발 문제로 인해 관계의 개선은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남북간의 대립보다는 북한과 미국의 대립이 첨예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미국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시도가 어느 선을 넘으면 무력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실제로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이처럼 북한의 핵문제는 세계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증산 상제는 조선의 정세 즉 세운을 씨름판에 비유하였을 뿐 아니라 도운도 씨름판에 비유하였다.“나의 일은 상씨름 씨름판과 같으니라.”는 말이 그것을 잘 드러내준다. 그런데 도운은 마무리할 인물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다. 이를 두고 증산상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씨름 딸 사람은 술이나 먹고 잠이나 자면서 누워서 시치렁코 있다가 ‘상씨름이 나온다.’고 야단들을 칠 때 그제야 일어나서 판 안에 들어온다. 다리를 둥둥 걷고 징검징검 들어가니 판 안의 씨름꾼들 여기저기 쑤군쑤군...허허, 헛참봉이로고, 소 딸 놈은 거기 있었건만 밤새도록 헛춤만 추었구나.”(도전 6:71) 상씨름의 우승자는 씨름판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판밖’의 인물이다.


증산상제는 그래서“내 일은 판밖의 일”(도전 6:73:5)이라고 하였다.


[김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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