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찾기

대륙백제를 생각한다

김현일 연구위원

2010.08.18 | 조회 8388

잃어버린 제국, 대륙백제를 생각한다[한민족사찾기]


 대륙백제를 생각한다
 
 김현일(연구원) / 상생문화연구소 
 

 “백제의 전성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쪽으로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
 
 “백제멸망 후에도
 중국에서의 백제인 해상공동체와 조직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중국 해상무역활동의 중추를 이루었다”

 
 
 「송서」와「양서」에 나타난 대륙백제의 기록
 중국의 25사 가운데 하나인「송서宋書」의 이만전夷蠻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모두 요동 동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침략해서 소유했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해서 소유하였다. 백제의 치소는 그것을 일러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송서」는 6세기 전반 양자강 이남의 중국을 지배하던 남조 국가인 양나라 때 편찬된 사서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점령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는 백제가 요서지역을 언제 점령한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 시기를 언급한 기록이「양서梁書」의 제이전諸夷傳백제조이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자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 땅을 점령하였다.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 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양서」는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사서인데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점령한 것은 진晉나라 때라고 한다. 진나라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魏나라를 이은 나라이다. 위의 실력자인 사마염이 위의 마지막 황제 원제를 폐위하고 진晉을 세웠던 것이다(265년). 이것이 서진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서진은 사마염(시호는 무제武帝)의 사후 무능한 그의 아들인 혜제가 제위를 이었으나 곧 권력을 놓고 무제의 왕후 양씨와 혜제의 왕후 가씨, 그리고 왕족들간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를 역사에서는 여덟 명의 왕자가 난의 주역이었다고 해서‘팔왕의 난’(290-306)이라고 한다. 왕족들은 흉노, 선비 등 북방의 이민족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 용병으로 온 이민족들은 서진 내부의 무력함을 목도하여 자신들의 독립을 꿈꾸게 되었다. 흉노의 왕이었던 유연劉淵은 한 왕漢王을 칭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는 몇 년 후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유총이 군대를 동원하여 서진을 멸망시켰다. 나라가 망하자 건업(오늘날의 남경)에 있던 왕족 사마예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 진나라의 명맥을 유지해갔다. 이것이 동진(317-419)이다. 물론 그 영역은 강남에 국한되었다.
 
 유연의 건국을 시발로 하여 화북 지역에는 흉노, 선비, 티베트족 계열의‘다섯 오랑캐’가 연이어 나라를 세웠다(五胡十六國). 「 양서」의 기록에 진나라 때라는 것은 아마 서진에서 동진으로 교체되는 이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틈을 타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점령하였다.
 
 요서군은 진시황秦始皇때에 설치한 군으로 북경에서 가까운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 진평군의 경우 역사 지도책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당대에 편찬된「통전」과 송대에 편찬된「문헌통고」등에는「양서」의 기록을 인용하며 진평군이‘유성柳城과 북평北平사이’라고 그 위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요서군의 서쪽에 인접한 지역이다. 사서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백제가 바다 건너의 요서 지역을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점령하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보인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
 백제가 중국대륙에 해외영토를 갖고 있었음을 드러내 주는 또 다른 성격의 기록이 있다. 북위北魏와 백제의 전투기록이다.
 
 북위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선비족의 하나인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나라이다. 사서에 따르면 탁발씨는 서진 시기에 오늘날의 산서성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탁발규 때 와서 북위라는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했다(386). 북위는 차츰 화북 지역의 다른 비한족 국가들을 평정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439년). 이로써 오호십육국 시대가 끝났다. 이제부터 6세기 중반까지 북중국에는 선비족이 지배하는 북위가, 양자강 이남에는 한족의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나라가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도래하였다.
 
 북위가 백제와 충돌하였다는 기록은 우리나라의 사서인「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동성왕(재위 479-501) 10년 즉 488년 위나라가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 패배하였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삼국사기」와 같은 기록이 중국 송나라 때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당시 위나라의 군사가 한반도에 위치한 백제까지 쳐들어왔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라는 강대한 나라가 자리잡고 있음을 염두에 두면 그 가능성은 없다. 위나라 군대와 백제의 전투는 백제의 해외영토가 위치한 화북성 지역과 그 근방인 산동반도 지역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당시 북위는 남제와 싸우고 있었다. 이는「남제서」뿐 아니라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위서」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북위와 남제의 전투는 488년 한차례로 끝나지 않고 근 10년간 계속되었다. 490년에도 큰 전투가 있었는데 당시 북위는 남제와 백제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던 터라 일단 적을 분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한편으로 사신을 남제에 보내 화해를 청한 후 10만 대군을 투입하여 백제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490년의 이 공격을 물리쳤다.
 
 「남제서南齊書」에는 백제왕 모대가 남제 왕에게 보낸 서한이 실려 있다. 모대는 동성왕의 이름이다. 그 서한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록 하자.
 
 
 “지난 경오년(490)에 험윤(북쪽 오랑캐를 지칭한다—필자)이 저희들의 죄를 뇌우치지 않고 군사를 내어 깊이 침범해오기로 신은 사법명 등을 보내서 군사를 거느려 이를 토벌해서 우뢰와 같이 습격하자 오랑캐들은 황겁해서 마치 바닷물 끓듯이 무너졌습니다. 이 기회를 타고 쫓아가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이니 이로인해서 그 예기가 꺾여 고래같이 사납던 것이 흉한 모습을 감추어 이제는 나라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남제서」동남이전)
 
 
 강시단야O尸丹野!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백제는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구절 다음에는 백제왕이 승전한 장수들을 대상으로 한 논공행상의 기록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사법명의 경우‘행정로장군매라왕行征虜將軍邁羅王’으로 봉해졌는데 정로장군이란 오랑캐를 물리친 장군이라는 뜻이며 매라왕은 매라 지역에 봉해진 왕이라는 뜻이다. 매라 지역이 어디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것은 왕이라는 관작이다. 이는 백제왕이 중국의 황제처럼 그 수하에 왕을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문정창 같은 재야사학자는 모대 즉 동성왕을‘동성제’라고 부르고 있다.

 
 전쟁에서의 승리로 대륙에서의 백제영토가 확대되었다. 동성왕이 상으로 부여한 관직들에는 산동성 지역에 위치한 청하淸河태수, 또 오늘날의 강소성에 위치한 광릉廣陵태수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산동성 일대로부터 양자강 하구까지 백제영토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북사」백제전에 백제가“진, 송, 제, 양 나라 때부터 양자강 좌우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自晉宋齊梁據江左右”는 기록이 있으며「구당서」와「신당서」백제전에도“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 경계는 왜, 북쪽 경계는 고구려”라고 백제의 세력범위를 명시하고 있다. 당나라에서 오랜 동안 유학과 관직 생활을 하였던 최치원 선생도“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쪽으로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오월 지방이라면 오늘날의 강소성과 절강성에 해당하는 양자강 북안과 남안을 포괄하는 지역이다.
 
 다시 북위와의 전투로 돌아가자. 490년 북위는 패전의 결과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야 하였다. 「위서魏書」에는 전쟁에서 패배한 문제가 직접 궁터를 선정하기 위해 낙양으로 왔다가 심회가 울적하여 서리시(黍離詩: 나라의 황폐한 궁터를 보고 지은 시)를 짓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위문제의 마음은 비탄과 더불어 복수심으로 불탔다. 그래서 493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먼저 남제를 공격하여 제압하고 백제와 싸우는 전략을 택했는데 남제군에 대해서는 쉽게 승리하였으나 곧 산동반도 방면에서 들이닥친 백제군의 공격으로 퇴각해야 하였다. 496년에는 다시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남제와 산동의 백제군을 상대로 한 이 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는데 결국 문제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근 10년간의 전쟁으로 국가재정이 파탄 난 문제는 태화 22년(497년) 조서를 발해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반 이하로 줄이고 근위대도 1/3로 줄여버렸다. 다음해 남제의 공격이 있자 몸소 전장에 출전하였던 문제는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북위의 황실은 급속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쇠망으로 치달았다.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북위 쇠망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대륙의 영토를 뒷받침한 백제의 해상활동
 중국대륙에 위치한 백제의 영토는 백제가 망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단지 당나라 때 재상인 두우杜佑가 편찬한「통전通典」의 짤막한 언급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백제가 당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언급 뒤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 붙어 있다.
 
 
 “그 옛 땅은 신라에 몰수되었다. 성 주위에 남은 무리는 그 후 점차 수가 줄어 약해져 돌궐과 말갈에 흩어져 투항하였다. 그 우두머리 부여숭은 그 옛 나라로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땅은 모두 신라와 말갈에 몰수되었다. 부여씨의 군장은 드디어 단절되었다. 其舊地沒於新羅城傍餘 衆後漸寡弱散投突厥及靺鞨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土地盡沒於新羅靺鞨夫餘氏君長遂絶”「통전」변방邊方백제전
 
 
 성 주위(城傍)라는 말이 모호한데 문정창 선생은 성을 만리장성으로 보고 방을 그 밑에 위치한 하북성 지역으로 해석하였다「( 백제사」354쪽). 즉 백제의 요서군과 진평군이 위치한 지역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대륙백제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그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륙백제는 4세기 초부터 7세기 중반까지 3세기 반 정도 지속한 셈이다.
 
 이렇게 백제가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의 핵심지역에 해외영토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오호십육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라는 중국의 내부적 사정도 작용하였지만 백제의 뛰어난 해상활동 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중국과의 해상교류에 대해 근초고왕(재위 346-375) 대에 동진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처음 보이지만 그 이전부터 해상교류가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측의 기록인「진서晉書」에는 마한의 왕이 빈번하게 사신을 보내 공물과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근초고왕보다 한 세기 이전에 이미 마한의 사신이 빈번하게 중국으로 건너갔다면 해상을 통한 교류는 백제가 대륙으로 진출한 4세기에는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고학 유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성시대 백제의 왕성이었던 몽촌토성에서 진나라 때의 도자기조각과 벼루 등이 발견되었으며 서울의 석촌동 고분에서도 진대의 청자와 노魯가 발견되었고 풍납동 토성에서는 동진 시대의 초두O斗(다리가 셋인 자루달린 그릇)도 발견되었다. 중국제 자기와 초두는 강원도 원주와 천안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중국제 물품들이 해상 교역을 통해 백제로 유입되었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백제인들은 어떠한 항로를 통해 대륙과 교역을 하였을까? 초기에는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선을 돌아 양자강 유역으로 내려오는 연안항로를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항로는 고구려 연안을 통과하는 항로였다. 그래서 백제 선박이 고구려 수군의 방해로 되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삼국사기」개로왕(4세기 후반) 조에도 보이고 5세기 후반의 문주왕 조와 동성왕 조에도 그런 기록이 보인다.
 
 그래서 새로운 항로가 생겨났다. 서해 연안을 따라가는 연안항로가 아니라 서해를 가로질러 산동반도로 가는 항로가 개척되었다. 그에 더해 498년 탐라국(제주)의 복속은 또 다른 항로인 남방항로를 열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탐라는 이미 후한 때부터 중국의 강남지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여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백제는 탐라를 항해기지로 삼아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해협 쪽으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남방항로의 개척은 백제의 해상무역권을 크게 넓혔을 것이다. 그 결과 백제의 해상활동 영역은 남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서기」흠명 4년(543) 조에는 백제 성왕이‘부남扶南’의 보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부남은 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이다. 또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백제 성왕 때의 승려 겸익은 중국 내륙을 통해서가 아니라 배를 타고 중부 인도로 갔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백제인들의 무역 및 해운 활동이 중국을 넘어 동남아 및 인도까지 뻗어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할 것이다.
 

 백제의 해상활동을 추적한 역사학자 김성호 선생은 백제는 건국 초부터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였다고 지적한다. 백제인들이 항주만의 주산반도에 근거지를 두고 회계會稽(현재의 절강성)와 교역하였다는「한서」지리지의 기록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비류백제沸流百濟가 이러한 해상활동의 주체였다고 한다. 비류백제는 초기부터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진출하여 중요한 포구마다 담로擔魯를 건설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인 임나가라任那加羅는 오늘날의 부산지역에 세워진 담로였는데 대마도 뿐 아니라 서기 100년경에는 북큐슈에 야마태국(왜국)을 세웠다고 한다.
 
 김성호 선생은 중국과 일본의 많은 사서기록들을 분석한 결과 3세기 중엽에는 이미 주산반도와 한반도 및 큐슈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역을 무대로 하는 고대교역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하권). 왕망 시대에 주조된 화폐들이 제주와 김해, 북큐슈, 오사카, 교토 등의 지역에서 출토된 사실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강력한 해상활동을 바탕으로 백제는 4세기 초부터 수 세기 동안 중국 대륙의 영토를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백제가 7세기에 멸망한 후에도 중국에서의 백제인 해상공동체와 조직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심지어는 중국의 해상무역활동의 중추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앞에서 본「통전」의 기록과는 다른 것으로서 우리가 앞으로 규명해야할 문제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김부식 찬,「 삼국사기」, 이재호 역, 솔, 1997.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지문사, 1982.
 김성호,「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맑은소리, 1996.
 김성호,「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푸른숲, 2000.
 문정창,「 백제사」, 백문당, 1975.
 이민수 역,「 조선전」, 탐구당, 1974.
 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1997.
 이희근,「 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 다우, 2001.


월간개벽 2010.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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