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찾기

이즈모出雲에 남은 신교神敎의흔적

김철수

2013.07.12 | 조회 8617

“일본의 고(古) 신도는 신교의 유습”




1. 신들의 고향, 이즈모(出雲)


신화의 나라, 신들의 수도

하늘에 구름조차 잘 보이지 않는 쾌청한 날씨였다. 이른 아침, 이틀 동안 머물렀던 고베(神戶)를 출발하여 오사카(大阪)의 이타미(伊丹) 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出雲)로 가는 보기에도 좀 낡은 36인승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이렇게 작은 비행기를 타보기는 30여년 만에 처음이었다. 때문에, 나 혼자만이었을까? 속으론 내심 불안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불안한 마음과 그동안 오매불망 기다려왔던 이즈모로 향하는 흥분된 마음이 뒤섞인 것인지도 모르겠다.(사진4)


시마네현은 일본열도의 혼슈(本州)의 서북단에 한반도와 가까이 위치한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한국 영토인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는 망발을 자주 하여 참으로 우리를 불편케 하는 악연을 가진 지역이다. 아직도 현청(縣廳) 앞에 가면 독도문제를 왜곡하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는 현장을 볼 수 있다.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역사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국가간의 예의를 모르는 패악무도한 모습이다. (사진1,2,3)


그러나 오늘 이곳을 탐방한 목적은 고대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신교(神敎)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시마네현 이즈모 지역은 말 그대로‘일본의 뿌리’[島根]가 된 곳이며, 일본 신화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일본의 신화시대는 우리의 신라시대에 해당하며, 이즈모 신화는 큐슈의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선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즈모(出雲)는 수많은 신화의 무대가 되고 있어‘신들의 고향’‘신들의 수도’‘신화의 나라’‘구름의 나라’‘하늘의 나라’라 불린다. 그리고 여기는 신교의 유습이 신라를 거쳐 일본열도로 흘러들어간 곳이다.




그러면 이즈모 곧 출운(出雲)은 무슨 뜻일까? 구름은 천상에서 신이 타는 수레로, 물[水]과 불[火]이 합해져 형성된 조화(造化)이자 신이 타는 마차를 뜻한다. 때문에 구름은 변화무쌍하게 형태를 바꿈으로써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하늘에서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구름이 일어났다’(出雲)는 것은 바로 천상의 신들이 이곳으로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표징인 것이다. 그런데 이 출운을‘이즈모’라 읽는다. 무슨 뜻일까? 단순히‘이쯔’(出づ)와‘쿠모’(雲)의 합성이라 보기엔 석연치 않은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일부의 주장처럼, ‘잊지마’의 변형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견강부회하는 감이 없지 않고. 분명히 고대 한국말인듯 싶은데,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는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하게 풀지 못한 의문 중 하나이다. 이즈모의 비밀! 이번 탐방에서 내가 확인하고 싶은 내용들이 널려 있는 곳이다. 이즈모! 그런 연유로 이곳에는‘일본의 태고로부터의 신앙, 신도의 가장 오래된 신사’라고 불리는 이즈모 대사(出雲大社)가 세워져 있다.


동북아의 뿌리문화, 신교

그러면 먼저 간략하게나마 신교(神敎, Spirit or God Teaching)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드러나 왔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일본열도에서 신교의 흔적을 찾는데 유익할 것이다. 고대 동북아에는 인류의 시원종교, 모체종교인 신교가 있었다. 신교를 문자 그대로 본다면 삼신상제[The God, 神]의 가르침[Teaching, 敎]이며, 동북아의 뿌리문화이자 문화원형이다. 간략히 말한다면 삼신상제와 천지신명을 받들고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생활문화였던 것이다.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神敎)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 제사문화의 본고향이니라. (道典1:1:6)


이 신교는 한민족의 삼성조[환인·환웅·단군성조] 시대를 거치며 이어져 내려왔다. 이에 따라 고대 한민족은 10월 상달에 제천(祭天) 행사를 열어 삼신상제와 천지신명, 그리고 선령신들을 받들어 왔던 것이다. 제천은 삼한의 옛 풍속이고, 그 제천의 장소가‘소도’(蘇塗)였다. 부여의 기록으로 본다면, ‘소도’는 곧 고대 종교적 성소였다. 『삼국지三國志』「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마한조」에 의하면, “마한은 신을 믿으므로 국읍(國邑)마다 각기 천군(天君) 한 사람을 세워 천신(天神)께 제사를 드린다. 또 나라마다 별읍이 있으니 이름을 소도라 하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고 귀신을 섬긴다”(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고 하였다. 별읍, 곧 소도는 종교적 중심지로 신성시된 영역이었다. 곧 그것은 종교 수도적 의미를 지닌 지상신전이었던 것이다. 소도에는 큰 나무가 있었고, 여기서 신을 모시고 받들었다.


신라 때는 이곳을 신궁(神宮)이라 했다. 『삼국사기』에 신궁 설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신라본기’의 소지마립간 9년(487)의 내용이다.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다. 나을은 시조께서 처음 사셨던 거처이다(置神宮於奈乙. 奈乙,始祖初生之處也).”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태어나 살았던 곳(나을)에 신궁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고 역사정신이 퇴락하고 사람들이 경건심을 상실해 버리면서 점차 그 명맥이 희미해져 버렸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신교는 아예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신교의 모습이 거의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서글픈 일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불교와 성리학 등이 활성화되면서 신교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가 하면, 일제 식민지 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이 자신들의 정신적 신앙인 신도(神道)를 이식하기 위해 이 땅에 남아 있던 신교의 유습을 미신으로 치부해 엄금해 버렸다. 더욱이 해방 후에는 19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새마을 운동이라는 명목으로 미신타파를 내세워 신교의 흔적은 아예 그 뿌리조차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교의 유습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일본열도에서는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교의 흔적은 일본열도에서 종교 아닌 종교‘신도’란 이름으로 남아있었다. 대륙에서 반도를 내달리다가 바다를 건너 섬, 곧 일본열도로 들어간 문화. 신교문화는 거기서 사라지지 않고 모양을 바꾸면서 흔적을 남겨왔던 것이다.


일본의 신사가 숲으로 둘러싸인 이유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비행기는 이즈모 공항에 무사히 내렸다. 도착시간이 점심 때가 되었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오늘 볼 예정인 이즈모 대사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즈모 대사 근처로 오자, 이즈모 대사 위로 펄럭이는 대형 일장기가 보였다. 특이한 광경이었다. 왜 신사에 저런 대형 일장기를 내걸었을까? 뭔가 한반도와의 연결 흔적을 미리 차단하고 일본인의 마음, 일본 왕실과 연결지으려 애를 쓰는 것은 아닐까 라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이즈모 대사를 들러보기도 전에 씁쓸하였다. (사진5)


오늘날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신궁(神宮)·신사(神社)를 보게 된다. 현재 일본 전역에는 12만 내지 14만 여개의 신사가 있으며, 더욱이 아직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일본의 신도는 이러한‘신궁’‘신사’를 터전으로 한다. 신궁이나 신사는 신단이 있는 곳으로, 신사는 원래‘신(神)의 사’(社, 야시로)로 신을 모신 곳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이두와 같이 한자를 이용하여 만든 만요가나(萬葉假名)로 쓰여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집인『만엽집』(萬葉集)에서는 杜, 森, 社, 神社를 모두‘모리’(森)라 읽었다. 신사를 모리(森또는 社) 곧‘숲’으로 본 것이다. 이는 고대 일본인에게 숲 곧 삼림이란 신들의 영이 깃든 신성한 영역으로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음을 뜻한다.


그 한 예로 일본 초대국가인 야마토 왜가 자리잡았던 나라지방에 세워진 오오미와 신사(大神神社)에는 신체를 제사하는 본전(本殿)이 없다. 대신에 신사 뒤편에 신성시되는 미와산(三輪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사를 둘러싼 숲을 이룬 신성시되는 산을 신체산(神山)이라고 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이세신궁(伊勢神宮)의 가미지산(神路山), 나라의 가스카 대사(春日大社)의 미가사산(三笠山) 등도 바로 그러한 예이다. 오늘날 일본의 유명한 신궁·신사를 보면 주변에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이유도 그 때문이다.



2. 일본 최고(最古)의 신사, 이즈모 대사(出雲大社)


이즈모 대사의 신령스러운 산, 야쿠모산(八雲山)

이즈모 대사는 아마테라스를 제사하는 이세신궁과 함께 일본의 2대 신사이다.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3대 신사를 들라하면, 이 양대신사에 오오미와 신사를 추가하고 싶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즈모 대사는 일본신사의 원형을 간직한 최고(最古)의 신사라 본다. 이러한 이즈모 대사 역시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곧 신체산이 신사 뒤편에 있는 야쿠모산(八雲山)인 것이다. (사진6)




때문에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 먼저 이즈모 대사의 신체산인 야쿠모산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어느 산인지 잘 모르겠단다. 신사의 본래 설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관심이 없는 일일 것이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신체산을 찾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였을 터이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나타나서야 대형 일장기 뒤로 보이는 산이 야쿠모 산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 왼쪽이 쯔루산(鶴山, 학산), 오른쪽이 가메산(龜山, 거북이산)라고 했다. (사진7)


그리고 나중 이즈모 대사의 보물전에 들렀을 때 옛 지도에서도 야쿠모 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보물전 관리자에게 왜‘팔운(八雲)이라 했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팔’(8)은 일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수이며,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라 했다. 그리고 구름은 매우 높고, 변화무쌍하여 그 속을 알지 못하고 신령스러우며 비를 내려준다고 했다. 일견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때문에 일본의 고대 신화를 보면 ‘팔’과 관련된 용어가 많이 나온다. 팔백만 신(八百萬神, 야요로즈노가미), 삼족오를 뜻하는 야타가라스(八咫烏), 일본의 삼종의 신기 중 하나인 야타노가가미(八咫鏡) 등‘팔’은 신령스럽고 가장 큰 수로 여겨졌다. 이처럼‘팔’은 구름과 함께 조화를 부리고 신선문화를 상징하는 수였던 것이다.


또한 보물전 관리자는 야쿠모 산이 주위의 학산(鶴山), 거북이산(龜山)과 더불어, 다른 말로 헤비산(뱀산)이라 말한다고 알려주었다. 뱀산! 일본신화에서 뱀은 용을 뜻한다. 이 뱀과 용의 문제는 이즈모 신화에서 흥미롭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살펴보고, 여기서는 다시 신궁·신사에 대한 설명으로 돌아가 보겠다. 그러면 신교의 신궁·신사가 어떻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져 성스러운 숲[신체산]을 지닌 신도(神道)가 되었을까? 일본의 역사기록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자.


신라왕자가 일본열도에 갖고간‘곰의 신단’

일본의 본격적 문화를 연 조정이 야마토 왜(大和倭)였다. 이 야마토 왜가 기틀을 쌓기 시작한 11대 수인왕(垂仁王) 때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신라에서 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무리를 이끌고 일본으로 왔다고 한다. 아메노히보코의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에 아구누마라는 늪이 있었고, 여기서 태양의 빛으로 음부를 자극받은 여성이 붉은 옥(玉)을 낳았다. 이것을 어떤 남자가 탈취하였고, 마침내 이 옥은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의 손에 건네졌다. 아메노히보코가 곁에 두자 이 옥은 아름다운 을녀(乙女)로 변했고 왕자는 이 여성을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아메노히보코는 방약무인해져 갔고, 부인은 도망하여 왜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아메노히보코는 부인을 쫓았으나, 부인이 향한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 지역)에 이르지 못하고 서로 다른 곳에 살게 되었다.’


아메노히보코는 이 때 7개의 신물(神物)을 갖고 도래했다. 그중에는 옥과 칼과 거울, 그리고‘곰(熊)의 히모로기(神籬)’등이 있었다. 앞의 세 가지는 일본 왕실이 보물로 여기는‘세 가지 신의 물건’[三種의 神器]으로 아직도 왕위 계승 의례를 행할 때면 다음 왕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곰의 히모로기’였다. ‘곰’[熊]은 지난 번 큐슈지역의 쿠마소(熊襲)를 설명하면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개벽》2010.11월호 참조) 한민족과 관련이 깊은 토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면 히모로기(神籬)는 뭘까? 20세기 초반 한국의 민속학자였던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히’는‘해’이고‘모로기’는‘모퉁이(方隅)’라 했다. 산모퉁이를 산모로기라 한다. 따라서‘모로기’는‘알지 못하고’(不知),‘ 보지 못하고’(不見),‘ 거리껴 숨는다’(忌避)는 의미로 쓰였다. 그에 의하면 해모로기는 웅녀가 신단굴에서 햇빛을 기피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라 보았다.


일본신화에서 히모로기를 보면, 초대 신무왕이 산에 올라 단을 설치하고, 사카키( ,비쭈기나무)를 세워 신에게 제사를 지낸데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히모로기였다. 무성한 나무의 숲으로 신을 숨긴 것이다. 바로 앞서 말한 신체산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옛날에 신사에 사전(社殿)이 없었고 수풀 속에 신이 있다는 관념에서 큰 나무를 대상으로 제사지냈다. 이때 히모로기는 신단, 신령을 제사지내는 제단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신단에 있는 큰 나무였다. 곧 신단수(神壇樹)였던 것이다. 이처럼 단(壇)에 나무가 있음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단군왕검이 신단수 밑으로 내려왔고, 앞서 보았듯이 마한의 소도에도 방울과 북을 매단 큰 나무가 있었다.


그‘곰의 신단’이 오늘날 일본의 정통왕조인 야마토 왜로 건너간 것이다. 그래서 이능화는“히모로기는 본디 조선 물건”이라 했고, 미야자키 미치사부로(宮崎道三郞) 같은 학자도‘히모로기는 조선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히모로기는 신단을 모신 옛 조선의 소도이자 신단수였던 것이다. 고대 일본에서 히모로기는 신령이 머무른다고 여겨진 산이나 나무 둘레에 대나무 등의 상록수를 심어 울타리를 친 곳이었다. 곧 이는 후대 일본 곳곳에 세워진 신궁·신사의 원형이 되었다. 때문에 지금도 신사에 신을 모신 신전을 보면 신을 대신한 삼종의 신기 중 하나인 거울 등이 있고, 그 옆에는 히모로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곰의 신단’을 일본으로 갖고 온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는 누구였을까? 『일본서기』에 신라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신라에서 도래했음은 분명한데, 그 실체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 『삼국사기』나『삼국유사』등의 기록에는 그러한 이름을 가진 왕자가 없다. 다만 오사카대학 사학과 명예교수인 나오키 코지로(直木孝次郞)의 지적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아메노히보코를 그런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인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아마도 창이나 검으로 신을 받드는 종교, 또는 창이나 검을 신으로 삼는 종교를 신봉한 집단이 한반도, 특히 신라로부터 도래했던 것”이라 했다. 아메노히보코를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신단(수)’을 가진 종교집단의 도래로 보았던 것이다.


신라국 소시모리에서 이즈모로 건너간 스사노오노미코토

앞에서 보았듯이 신라는 고래로부터 신궁을 설치하여 천신(天神)을 받들고 있었다. 아메노히보코가 신라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어느 곳에 도착하였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가 신들의 땅이자 신화의 고향인 이즈모 지역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왜냐하면 일본신화에 나타난 이즈모 신화가 이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즈모 신화는 아마노히보코 이야기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신라와 이즈모의 연결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모 신화는 아마테라스오오가미(天照大神)의 소위 남동생으로 알려진 스사노오노미코도(須佐之男命, 素盞鳴尊)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추려 살펴보자.


‘높은 하늘나라’(高天原)에는 세 신[三神], 곧 태양신[日神]인 아마테라스오오가미와 달신[月神]인 쯔쿠요미노미코도(月讀尊), 그리고 바다의 신이자 대지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있었다. 스사노오는 성격이 난폭하여 높은 하늘나라에서 추방되기에 이르자, 어머니의 나라를 가고자 했다(물론 이 신화 내용은 그대로 믿기보다는 한일 고대사와 연관되어 숨겨진 그 의미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한상 생략한다). 그래서 높은 하늘나라에서 나온“스사노오는 아들이다케루노미고토(五十猛尊)를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와 소시모리(曾尸茂梨)에 살았다. 그리고는 … 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이즈모국(出雲國)에 도착했다.”동행한 아들 이다케루는 올 때“많은 나무의 종자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가라쿠니(韓地)에 심지 않고 쯔쿠시(筑紫, 큐슈 북부지역)로부터 시작하여 대팔주국(大八洲國, 일본국) 전체에 심어 나라 전체가 푸르렀다. … 이가 기이국(紀伊國)에 머무르고 있는 큰신(大神)이다.”또 스사노오는“가라쿠니(韓鄕)에는 금과 은이 많다. 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 나라로 건너가려 하여도 배가 없으면 건너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즈모로 건너온 스사노오는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자신을‘국신’(國神)이라 소개했다. 일본신화에는 천신天神과 국신이 나오는데, 보통 천신은 고천원의 신들이고 국신은 일본 열도에 본래부터 있던 신들이다. 따라서 천신들은‘어디선가 들어온’신들을 말한다. 국신이라면 천손이 강림하기 이전 일본열도에 정착해 살고 있던 지역신들이다. 노인은 스사노오에게 자신의 자녀들이 꼬리가 여덟 달린 야마다노오로치(八岐大蛇)라는 뱀으로부터 여러 해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고 토로했다. 스사노오는 노인을 도와 가라사이의 칼(韓鋤之劒,‘ 사이’를‘쇠’혹은‘쇠로 만든 삽’의 음이기 때문에‘한국의 쇠로 만든 칼’이라는 뜻이다)로 그 큰 뱀을 퇴치하게 된다. 그 칼로 큰 뱀의 목을 베고 배를 갈랐다. 이 때 뱀의 배에서 나온 칼이 쿠사나기의 칼(草劒, 草那藝之大刀)이다. 나중에 이 칼을 아마테라스에게 주었고(니니기노미코도瓊瓊杵尊가 이 칼을 갖고 일본열도로 내려온 것이 소위‘천손강림’신화이다), 이것이 일본 천황가의‘삼종의 신기’중 하나가 되었다.


아마테라스 계열에 일본열도를 이양한 오오쿠니누시노가미

스사노오는 계속해서 일본열도를 평정해 나갔다. 참고로 여기서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아마테라스오오가미의 후손 니니기노미코토의 천손강림보다도 먼저 신라를 거쳐 일본열도에 최초로 발을 디딘 천손이다. 따라서 스사노오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작업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스사노오는 신라 소시모리에 살았었기 때문에 일본열도의 곳곳에서 모셔지는‘소시모리=우두牛頭천황’과 동일인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또 하나의 팁을 지적한다면, 스사노오와 이 글에 나오는‘아메노히보코’와‘연오랑’, 더 나아가『환단고기』의‘협야노’와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길 바란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있을 것이다. (사진8)


여하튼 일본 고대사는 지배집단인 천신이 열도에 산재한 국신들을 정복하고 나라를 평정하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스사노오가 평정한 나라(葦原中國: 일본)는 큐슈의 다카치호 구시후루 봉우리에 내려온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니니기노미코도에게 이양되었다. 이양한 자는 스사노오의 후손 오오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 오오모노누시노가미大物主神, 오오아나무치노미코도大己貴命이라고도 불렸다. “韓의 神”이라고도 한다. 『廣辭苑』)였다. 아마테라스의 명을 받고 이즈모에 사자로 내려온 신[建御雷神]이 있었다. 그 신은 파도치는 바다에 창을 거꾸로 꽂고, 그 위에 앉아 일본열도(葦原中國)를 통치하는 오오쿠니(大國主神)에게 (일본)국토양도를 요구했다.


오오쿠니는 니니기에게 국토를 양도했다. 이것이 소위 일본 국토이양(出雲國讓り) 신화이다. 그리고 나라를 평정할 때 사용한 창인 히로호고(廣矛)를 그에게 주며 말했다. “지금 내가 나라를 바치니 누가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이 창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반드시 평안할 것이다.”그리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일본열도(葦原中國)를 헌상하겠습니다. 단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거주할 장소로, 천신의 아들이 황위를 이어 갈 훌륭한 궁전처럼, 땅 깊숙이 반석(磐石)에 큰 기둥(宮柱)을 깊게 박아, 고천원을 향해 치기(千木)가 높이 치솟은 신전을 만들어 주신다면, 저 멀리 유계(幽界, 신명세계-인용자)로 은퇴(隱退)하겠습니다. 다른 많은 신들도 거역하지 않을 겁니다.”


곧 현세의 일은 니니기가 맡고, 유계[신명계]의 신사(神事)는 오오쿠니가 맡는다는 안이었다. 이래서 타협안이 이루어졌고, 신궁이 조영되었다.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 계열간에 역할분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아마테라스 후손은 일본나라[정치]를 경영하고, 스사노오 후손이 신의 일[종교]을 맡게 되었다. 나라를 양도한 오오쿠니의 아들들은‘푸른 잎의 나무로 만든 울타리[靑柴垣]’『( 고사기古事記』)로 숨어버렸다. 이 울타리가‘신이 깃드는 장소,’곧 앞서 말한 히모로기(神籬)이며 소도였다.



3. 일본신도는 삼한 제천의 옛 풍속


이즈모에 세워진 48m의 고층신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사가 바로 이즈모 대사이며 일본열도에 산재한 신궁·신사의 모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즈모에는“훌륭한 궁전처럼 땅 깊숙이 반석에 큰 기둥을 깊게 박아, 고천원을 향해 치기가 높이 치솟은 신전”이 지어졌다. 우선 땅 깊숙이 반석에 9개의 큰 기둥을 박았다. (사진9,10)




2000년에는 13세기(1248)에 세워졌던 이즈모 대사 본전을 지탱했던 기둥이 발견되었다. 이 기둥을 보면 직경 1.3m의 기둥 세 개를 묶어서, 지름 3m가 넘는 하나의 기둥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나의 기둥을 만드는데 큰 나무 세 개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9개의 기둥 중에 가장 중앙에 있는 기둥을 신노미하시라, 곧 심어주(心御柱)라 했다. 혹자는 이 중간 기둥인 심어주를 소도 신단의 큰 나무 곧 신단수라 보기도 한다. 이러한 9개의 기둥 위에‘궁전같은 신전’이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고대의 이즈모 대사는 높이 48m의 고층신전으로 거대한 목조 건축이었다. 일설에는 100m 높이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현실상 불가능한 높이였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오오쿠니의 바램대로 신전 지붕 위에 치기를 세웠다. 치기는 신사지붕 위에 고천원을 향해 X자형으로 세운 커다란 목재였다. 이 치기는 소도에 세운 큰 나무의 형상이었다. (사진11,12,13)


이쯤되면 동북아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즈모의 놀라운 고층 신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대 이즈모 대사의 고층신전이 바로 피라미드 형 구조였다는 사실이다. 동북아 신교문명에서 보면 광개토대왕릉이나 장수왕의 무덤인 장군총 등 적석총의 형태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이는 모두 삼신을 받들어 제사했던 신교의 제천단(祭天壇)이 변형된 모습으로 볼수 있다. 이러한 제천문화의 흔적인 제천단의 자취는 슈메르를 비롯 이집트·중국·티벳 등지에 산재한 피라미드에서 발견된다. 그 중 슈메르인들의 제천단이 지구랏(Ziggurat)이다. 이 지구랏의 전형적인 양식은 계단식으로 돌을 겹쳐 쌓고 그 최상봉에 직사각형 신전을 안치한 것이었다( 『개벽 실제상황』, 252쪽 참조).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오쿠니누시노가미가 원했던, 그리고 일본열도에 최초로 세워진 고대 이즈모의 고층 신전을 보라! 그 모습을 보면, 무수한 계단을 올라 그 정상에 직사각형의 집으로 이루어진 신단이 있었고 신단 꼭대기에는 높은 하늘을 향해 치기가 솟아 있었다. 이것이 일본 신사의 원형으로, 다름 아닌 신교 제천단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신라를 바라보는 이즈모 대사의 최고신

그리고 궁전처럼 지어진 이 신전 안에는 신체가 모셔졌다. 여기에는 당연히 신라에서 건너온 스사노오노미코토가 모셔져야 했지만, 일본열도를 아마테라스 계열에 이양한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오쿠니누시노가미가 모셔졌다. 이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 정통 왕조의 시작이 야마토 왜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스사노오보다는 국토를 아마테라스 계열에 이양한 오오쿠니를 제사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신에 스사노오는 이즈모 대사의 신체산인 야쿠모 산속에 소가신사(素神社)에 모셔졌다. 자그마하고 허름한 섭사(攝社)의 모습이다. 어찌보면 이즈모 대사의 주객이 바뀐 감이 없지 않다. 주인공이 뒷방 노인이 되어버린 신세와 다름없어 쓸쓸함마저 느낀다.


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 정통 왕조의 시작이 야마토 왜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스사노오보다는 국토를 아마테라스 계열에 이양한 오오쿠니를 제사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신에 스사노오는 이즈모 대사의 신체산인 야쿠모 산속에 소가신사(素神社)에 모셔졌다. 자그마하고 허름한 섭사(攝社)의 모습이다. 어찌보면 이즈모 대사의 주객이 바뀐 감이 없지 않다. 주인공이 뒷방 노인이 되어버린 신세와 다름없어 쓸쓸함마저 느낀다.


이제 그 신사의 원형을 간직한 곳, 선조의 고향 신라를 향해 신체가 앉아 있는 이즈모 대사를 돌아볼 차례가 되었다. 이즈모 대사 경내로 들어섰다. 이즈모 대사는 시마네현 이즈모시에 소재하고, 신라신 스사노오와 그 후손인 오오쿠니누시노가미를 제사하는 신사이다. 신라에서 이즈모로 들어온 신교의 유습을 간직한 신사로, 일본열도에 신도를 확산시킨 터전이었다. 때문에 여기 세워진 이즈모 대사는 일본의 800만신의 총 본산이었던 것이다.


일본열도의 팔백만신이 이즈모로 모여드는 10월 상달

이와 관련해서 이즈모 대사에는 또 하나 널리 알려진 풍속이 있다. 신유월(神有月, 가미아리쯔기)과 신무월(神無月, 간나쯔기)이 그것이다. 신들의 고향, 이즈모. 이즈모 대사에는 신유월 이라는 특이한 기간이 있는 것이다. 곧 음력 10월이 되면 일본 전역의 팔백만 신들이 모두 이즈모로 모여든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 전역에는 각 지역의 신들이 모두 이즈모로 가 버렸기 때

문에 역으로 신무월이 된다. 이처럼 음력 10월달은 일본 전역으로 보면‘신이 없는 달’인 신무월이지만, 유독 이곳 이즈모 대사만은 일본 전역의 팔백만 신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신이있는 달’인 신유월이 되는 것이다. (사진14)


그러면 이즈모로 몰려든 신들은 이즈모 대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막부시대 이전의 기록들을 보면, 이즈모로 온 신들은 이즈모 대사의 본전 동쪽과 서쪽에 마련된 19사(社)에 숙소를 잡아 머물고 있다. 동쪽 19사와 서쪽 19사로 모두 38개의 숙소이다. 신들은 이즈모 대사에 모여서 종종 회의를 개최한다. 본사의 서쪽 방향에 있는 상궁(上宮)이 신들의 회의소이다. 신들은 38개의 숙소에 머물다가 회의를 위해 상궁으로 가는 것이다.


회의는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7일 동안 개최된다. 신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서 지난 1년간 일어난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고, 또 향후 1년간의 지역 현안을 상담하러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서 일어나게 될 각종의 일들을 결정하고, 사람들 사이의 인연도 정하며, 특히 남녀의 인연도 결정지어 주었다. 곧 남녀의 짝을 맺어주는 것이다. 때문에 오오쿠니누시노가미는 일본에서‘인연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참으로 흥미로운 풍속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도신앙을 이해 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즈모 지역의 신유월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 하나의 답안을 갖고 있다. 음력 10월 상달, 이즈모 대사로 모여든 일본 열도의 8백만의 신들은 여기서 멈춘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쪽에 모여서 조상의 고향인 한반도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주지하다시피 고대 삼한시대에 한민족의 조상들은 10월 상달이 되면 제천행사를 열었다. 이 때 받드는 천제(天祭)는 하늘의 삼신상제에 지내는 제사였다. 10월은 일년 중 달(月)이 운행을 시작하는 첫 달이었다. 한민족은 이러한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겨, 열두 달 가운데 첫째가는 상(上)달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10월은 사람과 신명들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한해 시작의 달이었던 것이다.


숫자로 본다면 10은 신과 인간 그리고 만물이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는 수로서, 이상과 현실이 조화된 신천신지(新天新地)의 개벽세계를 상징하였다. 하느님의 조화의 수가 10인 것이다. 이러한 10월 상달에 신라와 연결된 이즈모에 몰려든 신들, 곧 일본열도에서 자신의 지역을 떠난 신들이 이즈모 지역을 통해 한민족의 천제에 참여한 것은 아닐까? 이것이 이즈모 대사의 38개 숙소에 머물던 신들이 서쪽으로 가서 회의를 열고 인간사와 신명계의 일들을 결정지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도쿄대 교수가‘일본 신도는 삼한 제천의 옛 풍속’(1891년 발표)이라 했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사실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본 고대사를 보는 적확한 판단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 신도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교수직마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모든 신사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정문에 고려의 개[高麗犬, 고마이누]가 지키고 있다. 왜 고려의 개가 일본의 신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신궁·신사가 한반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리고 구메 구니다케의 지적처럼 신교의 유습이 아니라면 고려의 개가 지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즈모 대사의 세 개의 도리이와 대형 시메나와

신들이 몰려드는 10월, 이에 맞춰 이즈모 지역은 마쯔리(祭)를 준비한다. 소위 신맞이 축제[신영제神迎祭]로 일본열도의 팔백만 신을 맞이하는 행사이다. 동네를 청결하게 하고 음주가무를 금지하여 경건하고 정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행사는 음력 10월 10일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첫날인 곧 10월 10일, 용뱀[龍蛇]이라 불리는 바닷뱀[海蛇] 크고 작은 것 다수가 해안으로 몰려들어온다. 이즈모 대사의 서쪽에 있는 바닷가인‘태양의 언덕’곧 히노미사키 언덕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용뱀을 맞이하여 모신다. 그리고는 풍작, 풍어를 기리고 재난을 피하기를 기원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 용뱀들은 사람들의 인연도 가져다 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이 정해준 인연을 받아들이려 한다. 이것이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용사신앙(龍蛇信仰)이다. 동네를 다니다 보면 대나무에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풍선, 곧 용뱀을 주렁 주렁 매달아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용사 곧 신을 받아들이는 신앙인 것이다. (사진15)




이즈모 대사로 가기 위해서는 신성한 지역의 입구임을 알리는 문인 세 개의 도리이(鳥居)를 지나야 하다. 그 첫번째가 시내에 있는 일본에서 제일 크고 높은 25m 높이의 도리이이다. 그리고 그 길로 곧바로 나아가면 이즈모 대사 경내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두번째 도리이가 있고, 이를 지나면 이즈모 대사를 둘러싼 소나무 숲 사이로 길게 뻗은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10여분 곧바로 가면 청동으로 만든 마지막 도리이를 마주하게 된다. 여기를 지나서 처음 마주치는 건물이 배전(拜殿)이다. (사진16,17,18)


이즈모 대사를 찾는 대다수는 이 배전에 걸린 대형 시메나와(注連繩)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다른 신사에서는 볼수 없는 독특한 대형의 시메나와이기 때문이다. 신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관람객들의 놀라움을 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해댄다. 여기 걸린 시메나와의 본체는 용을 상징하고 그 아래 드리워져 있는 것은 비와 번개를 상징화했단다. 그러나 이것은 시메나와를 어떻게든 용과 관련시키려 한 이야기지만 그들만이 재미있게 만들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입가로 가벼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이것은 분명 고대 한반도의 신교문화에서 성(聖)과 속(俗)을 구분할 때 사용했던 줄, 검줄, 신줄 혹은 금줄이다.(사진19,20)


예로부터 신전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금줄을 내걸었다. 신교의 유습이 남아 있는 일본의 신사에도 고대 삼한의 풍속에 따라 금줄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이즈모 대사에는 그러한 일본 신사의 원형인 금줄, 곧 시메나와가 걸려 있다. 그런데 이곳의 시메나와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대형 새끼줄로 왼새끼줄이다. 다른 신사와는 정반대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일반 신사의 시메나와는 사전(社殿)에서 보아서 좌측을 상위(上位)로 하며, 이것은 소위 좌우존비본말론(左右尊卑本末論)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즈모 대사의 시메나와는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하여 참배자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사진20,21)


이처럼 이즈모는 종교·정신사적으로 일본열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보통 신사라면 배전에서 두 번 손뼉치기를 하면서 예를 표하나 이곳에서만은 4번을 친다. 특별한 예(禮)를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손뼉치기는 우리의 절하기[배례拜禮]에 해당하고, 또 우리는 재배(再拜)와 사배(四拜)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네 번 손뼉치기는 이곳의 위상을 짐작케 해준다.


메이지 시대의 국가신도와 신사정리

그런데 19세기 중반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신도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신도를 국교화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신궁·신사를 일제히 정리하였던 것이다. 메이지 정부 4년인 1871년 5월 14일‘신사(神社)의 의(儀)는 국가의 종사(宗祀)로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사유(私有)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태정관 포고(太政官布告) 제 234호가 공포되었다. 이로써‘신사는 국가의 종사’라는 공적(公的) 성격이 정식으로 규정되면서 국가신도(國家神道) 시대가 이루어졌다. 이후 일본정부는 신사를 일반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신사의 모습에 국체론적(國體論的,‘ 만세일계’의 일왕을 중심으로 백성을 신민으로 재편하여‘천황제 국가’형성을 목표로 하는 국가주의) 사상을 결합하여‘국교(國敎)’로서의 특권적 지위를 확보하도록하고, 이에 따라 신사사격제도(神社社格制度)를 정리하였다.




일본왕실의 황조신(皇祖神)인 아마테라스를 제사하는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메이지 정부는 전국의 모든 신사들의 위계서열을 정리하고 이로써 국가지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여 나갔다. 이즈모 대사도 이런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테라스 및 대대의 일본 왕을 봉사(奉祀)하는 것은 신궁(神宮), 왕족을 봉사하는 것은 궁(宮), 그 외는 대·중·소사(大·中·小社)의 사격을 부여했다. 신궁은 국유국영(國有國營)이며, 신궁의 직원은 관리가 되었고, 경비는 국고의 부담으로 그 수입은 국고의 수입이 되었다.


이와 함께 신사에 스며들어 있는 도래인들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한반도와 관련된 지명들도 바꾸고 신사의 이름이 모두 바꿔나갔다. ‘가라쿠니 신사’라 읽는 오사카와 나라 지방에 소재한‘한국신사’(韓國神社)를 음이 같은‘신국신사’(辛國神社)로 바꾼 예가 그러하였다. 일본의 신사제도를 이세신궁을 정점으로 고래의 신교의 유습을 지우고 일본화(日本化)시켜 정비한 것이다. 그리고 나라지역에는 일본의 초대왕인 신무왕(神武王)이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가시와라 신궁(彊原神宮)도 지어졌고, 일본 각 왕들의 능묘도 지정되었다.


이와 함께 지난 번 글에서 보았듯이, 큐슈 지역의 소위 천손강림지를 확인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졌고, 큐슈 가고시마의 단군을 모신 환단신사라 알려진 옥산신사도 통합의 수난을 당했다. 또 곳곳의 신사들에 아마테라스를 권청하여 제신으로 받들어졌다. 이러한 신사를 권청신사(勸請神社)라 한다. 곧 신의 분령을 모셔와 새로운 신사를 설립한 것이다. 분령(分靈)이라 함은 제신(祭神)의 신령을 나눈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신령의 분령, 곧 무한분령성(無限分裂性)은 일본의 신 개념이 갖고 있는 특징 중 하나이다. 또한 신사의 제신은 무형의 신령이다. 때문에 모든 신사에는 이러한 신령을 상징하여 표현하는 물(物)을 대상으로 제사하고 있다. 이 신령의 상징물 혹은 표현물을 영대(靈代) 또는 신체라 한다. 영대는 보통 삼종의 신기인 거울, 구슬, 칼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4. 히노미사키 언덕과 한국신사


신라를 향한 태양의 언덕, 히노미사키

이즈모 대사 경내를 몇 시간에 걸쳐 둘러보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아쉬운 일이 생겨버렸다. 배전을 보고 본전으로 들어섰을 때 본전이 모두 천막으로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차! 다름 아니라 지금이 60년마다 한번 이루어지는 천궁(遷宮)의 시기였다. 본전의 지붕을 새로 갈고 치기를 새롭게 바꿀 때인 것이다. 그래서 본전은 작업을 위해 장막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아쉽다. 어떻게 온 길인데.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다. 이번의 단장은 2013년 5월 10일에야 마친다고 한다. 이즈모 대사를  둘러보면서, 경내에 있는 보물전과 대사 주변에 있는 이즈모 역사박물관도 함께 관람하였다. (사진22)




대사 경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게 개인 하늘에 구름 몇 점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며 이즈모의 하늘에 둥실 떠 있었다. 아! 이래서 팔운(八雲), 곧 야쿠모라 했나 싶었다. 이즈모 지역에서 또 하나 볼 곳이 남아 있었다. 다름 아니라 이즈모 대사의 신체가 바라보고 있는 서쪽 바닷가 히노미사키 언덕이었다. 지금도 이 곳 해안에는 한반도의 울산이나 포항지역에서 바다에 버린 부유물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고 한다. 물길 방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고대에도 그런 물길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배를 띄우면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길, 그 길이 신라와 이즈모를 연결시켰을 것이다. 지금 이곳 이즈모 해안에는 히노미사키 등 대와 히노미사키 신사가 세워져 있다.


히노미사키(日御崎)! 말 그대로 본다면‘태양의 언덕’이다. 그 언덕에서 앞 바다를 건너 멀리 바라보면 저 멀리 신라 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고대 이즈모에서는 신라가 태양이었을까? 왜 태양과 관련된 지명을 동쪽이 아닌 서쪽 바닷가에 사용하였을까? 물론 히노미사키 언덕의 옛 이름은‘기츠기’(支豆支) 언덕이었고, 이즈모 대사의 옛 이름도 기츠기 대사(杵築大社)라 했었다. ‘기츠기’라는 말도 나중 꼭 확인해 봐야 할 고대어이다.


먼저 히노미사키 등대로 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서둘러 등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한 두 사람이 바위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낚싯대를 드리운 모습이 보였다. 이 히노미사키 등대에서 북서쪽 200Km 정도 지점에 우리의 땅 독도가 있다.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주장이 억지를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이것을 생각만해도 마음 속으로부터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온다. 이런 감정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히노미사키 등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등대 바로 앞 가까이에 돌섬 후미시마(經島) 하나가 보였다. 이 자그마한 돌섬은 마치 한반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듯 보였다. (사진 23,24)


연오랑·세오녀 이야기가 서린 곳

『삼국유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서기 157년, 동해안에 살던 연오랑은 바닷가에서 해조를 따다가 갑자기 바위가 움직이는 바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를 본 왜인들은 연오랑을 예사롭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 나섰는데 남편의 신발이 바위 위에 있었다. 바위에 올라갔더니 바위가 움직여 세오녀도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이에 부부는 다시 만나고 세오녀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은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일본으로 가버려서 생긴 괴변이라 했다. 왕이 일본에 사자(使者)를 보냈더니 연오랑은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며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했다. 신라에서 그 말대로 했더니 해와 달이 다시 빛을 찾았다. 이에 그 비단을 국보로 삼고 비단을 넣어둔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했다.’


지금 포항의 호미곶에는 이 이야기에 따라 연오랑 세오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는 이즈모 지역이 연오랑 세오녀 전설과 관련된 곳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돌섬이 바로 신라 동해안에서 바위를 타고 물길을 따라 일본 이즈모로 온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를 간직한 듯 보였다.


또 이즈모 앞 바다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오키섬이 있다. 이곳에는 조상들이 서방천리 가라사로국(加羅斯呂國, 韓之除羅國)에서 온 목엽인(木葉人), 곧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가라사로국은 당연히 신라국을 말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즈모 대사 주변에는 가라카마(韓龜) 신사도 있는데, 이곳에 가면 스사노오가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설화도 들을 수 있다. 이즈모 신화의 주인공인 스사노오가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와 섞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세오녀와 바위를 타고 온 연오랑이 아들과 함께 신라에서 이즈모에 도착한 스사노오가 동일 인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라에서 끌어온 히노미사키, 그리고 초라한 한국신사

그리고 또 한가지 사실!


고대 이즈모 지역에는 국토 끌어오기(國引き) 신화가 있다. 이즈모국의 어떤 한 신이“구름이 사방으로 퍼지는 이즈모라는 나라는 작은 나라구나. 앞으로 더 넓게 만들어야겠다.”하고는 “고금지라의 곶을 여분의 토지로 이으니 국토가 넉넉하구나”라고 했다. 고금지라는 당연히‘신라’인 것이다. 갈대를 헤쳐 세 줄로 꼰 새끼줄로 풀을 당겨오듯 신라의 땅을 슬슬 조용히 끌고 왔다. “나라여 와라, 나라여 와라”하고 끌고 온 나라는 고즈(去豆)의 절벽에서 야호니키즈키(八穗爾支豆支)의 곶까지이다. 곧 지금의 히노미사키 언덕 일대가 바로 신라에서 끌어온 땅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는 한반도의 고구려 등에서 끌고 왔다고 하는 사키(佐伎), 요나미(良波), 고시(高志)와 같은 지역도 있다. (사진25)




이런 저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등대를 내려와 히노미사키 신사로 향했다. 이곳은 신라에서 끌어온 땅이니만큼 이곳은 옛 신라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물론 국토 끌어오기 신화는 그대로 믿기보다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확인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이 일대가 신라 곧 한반도와 연결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곳 신사가 자리한 뒷산은 가라쿠니(韓國)산이었다. 예전에는 그 산에 신사가 있었는데 소위 한국(韓國) 신사였다. 지금 그 산 앞에는 히노미사키 신사가 들어서 이곳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한 두 개의 신전이 불균형스럽게 세워져 있다. (사진26,27)


그런데 걱정이 앞섰다. 한국산 아래 아주 자그마하고 초라한 한국신사의 모습이 남아 있다 했는데, 언뜻 귀동냥한 바로는 한국신사의 흔적을 지웠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히노미사키 신사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히노미사키 신사의 옆을 돌아 달려갔다. 자그마한 신사가 보였다. 그러나 팻말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소문대로 흔적을 지워버렸는가? 가까이 다가가 앞의 판자와 둘러친 금줄 뒤를 살펴보았다. 아, 있었다! 뒤편에‘한국신사’라는 빛바랜 팻말이 보였다.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심한 것도 잠깐이었고 곧이어 서글픔이 몰아쳤다. 너무 작고 초라한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큰 신사에 딸려 있는 작은 신사를 섭사(攝社) 혹은 말사(末社)라 한다. 신사에 따라서 다수의 섭사나 말사를 가진 곳도 있고 그러지 못한 신사도 있다. 한 예로 이세신궁의 경우는 125사의 섭사·말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즈모 대사도 뒤쪽 신체산인 야쿠모 산 기슭에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모신 소가신사(素社) 등 몇 개의 섭사를 갖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즈모 대사나 이곳 히노미사키 신사 모두 주객이 바뀌어버린 모습이다. 이즈모 대사는 신라에서 건너온 스사노오가 주신(主神)이 되었어야 했을 터이고, 한국산 밑에 중심 신사는 분명 한국신사였을 터인데. 이렇게 구석진 곳에 거의 버려지듯 한 초라한 한국신사의 모습을 보니 이리 저리 뜯기고 왜곡되어버린 우리역사의 현실을 보는 듯했다.


옛날 신라의 신과 사람들이 몰려들었던‘태양의 언덕’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바쁜 하루 일정을 매듭지으면서 석양을 등지고 숙소로 향했다.


이즈모는 일본열도의 곡옥의 나라

설래임을 품고 보낸 이즈모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다음 날,

이즈모의 옥작(玉作) 자료관을 둘러보았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일본신화에서 뱀과 용은 같은 뜻이다. 그리고 일본 왕실의 상징인 삼종의 신기인 거울, 칼, 곡옥에서 곡옥, 곧 굽은 옥(玉)은 바로 이러한 용을 뜻했다. 그런데 옥은 신교문화의 본류였던 동북아 문명인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옥기시대(玉器時代)가 설정될 정도로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유물이었다. 이러한 곡옥은 한반도 남부의 고대 유적에서도 무수히 발견되어 왔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의 고분에서도 발견되었고, 신라 왕관에서도 볼 수 있다. 1971년에 공주지역에서 발굴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는 환두대도와 동경(銅鏡)과 함께 다수의 곡옥이 발견되었다. 일본 왕실의 상징인 삼종의 신기, 곧 거울·칼·곡옥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곡옥은 용의 형상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즈모 지역은 일본열도에서 곡옥 원료 생산지였다. 야요이(彌生) 시대 한반도에서 벼농사 문화가 들어오면서 곡옥을 만드는 기술도 유입되었고, 1969년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는 야요이부터 헤이안(平安) 시대까지 여기서 곡옥을 생산하여 전국에 보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즈모 곡옥 장인들은 아직도 일본왕실의 곡옥을 생산하고 있다.


곡옥과 관련하여 또 흥미로운 것은 이즈모 대사의 보물전에서 볼 수 있었던 모자곡옥(母子曲玉)이다. 이러한 모자곡옥은 국립경주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그 몸체에는 81개의 홈이 파여져 있다. 『본초강목』에 의하면“용의 등에는 81개의 비늘이 있는데”(其背有八十一鱗) 그것은 양수 중 가장 큰‘9’를 두번 곱한 것(9×9=81)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로부터“용생구자”(龍生九子) 곧 용에게 아홉 자식이 있다고 하여‘9’라는 수가용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수라 했고, 또‘9’는 왕이나 황제와 관련된 숫자로 용을 상징했고 모자곡옥의 홈은 용의 비늘을 상징하였다. 이처럼 곡옥과 용의 연관성이 일본에서도 보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야쿠모산은 뱀산이었다는 사실과 일본 전역의 용사신앙에서 볼 수 있는 뱀 신앙도 모두 용 신앙의 변형이었다.


옥작 자료관을 한 바퀴 돌고 자료 몇 권을 주섬 주섬 챙기자 오전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비행기 출발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기에, 주변에 있는 일본 제일의 정원이라 하는 아다치(足立) 미술관의 정원도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점심 무렵이 되었고 시마네현 동쪽에 맞닿아 있는 돗토리현(鳥取縣)으로 넘어가 요나고(米子) 공항으로 갔다. 이번 탐방의 모든 일정을 마친 것이다. 여기서 점심을 먹은 뒤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낮인데도 잠이 몰려온다. 깨어나면 몇 일 동안 큐슈 일대와 고베 그리고 이즈모에서 돌아다니며 보았던 것들이 일장춘몽으로 느껴지겠지. 아직도 여전히 몇 가지 풀지 못한 숙제는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이번은‘일본의 고신도는 한민족 신교의 유습이다’라는 큰 소득을 얻어서 그런지 풍족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 출처 월간개벽 2011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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