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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신앙과 제사의식으로 본 백제의 전통신앙

김선주

2013.07.10 | 조회 7364

고조선 이후 형성된 다양한 형태의 원시신앙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시대에 규모를 갖추게 된다. 신라·고구려에 비해서 백제의 전통신앙은 지금 그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를 거치면서 패권을 상실한 백제관계 기 록은 거의 인멸되었고, 문화사상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백제의 전통신앙은 한국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한국인의 정신세 계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다.


백제인의 정신세계를 오랫동안 지배한 전통신앙 중의 하나는 신교(神敎)신앙[巫]이 다. 이는 동아시아 세계일대에 널리 퍼진 원시종교현상이었는데 개인의 일상생활을 규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형성 초기에 지배이념을 제공해주었다. 백제인의 전통신 앙은 부락제의에서 발전한 소도신앙과, 제사의식에서 그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제천의례로 발전한 소도신앙

백제 초기의 소도신앙은 부락제의에서 발전되었 다. 백제의 읍락에서는 부락제의가 행해졌다. 읍락 공동체가 분화되면서 성읍국가 내지 연맹왕국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부락제의는 점점 국가제의로 발 전하여 제천의례로 정립되었다.


백제의 소도신앙은 마한 이래의 민속신앙인 소도 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닌다. 백제는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였고, 마한과는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 였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소도는 각처에 소재하며 농경 과 관련한 의례를 집전하던 곳이었다. 한편 마한 연 맹의 맹주인 목지국에는 천군(天君)이 있어 가장 격 이 높은 신인 천신에 대한 제의를 주관하였다. 천군 이 천신에 대한 예의를 주관할 때 마한연맹 내의 제 국은 모두 참여하여 제의 공동체로서의 결속을 다져 나갔다.


소연맹국이 성립되면서 성읍국가 단위의 제사가 소도신앙으로 형성되었다. 소연맹국 내에 편입된 성 읍국가의 장은 비록 정치적 간섭을 받았을지라도, 제정이 분리되는 추세 속에서 성읍국가 단위의 독자 적인 제사를 행하였다.


소연맹국에서의 제의는 제천의례에까지 이르지 않았으나, 천신을 제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별 읍이나 국읍 단위로 독립하여 행해지던 모든 소도신 앙이 천군 중심으로 통합하여 함께 행해지면서, 명 실상부한 제천의례로 나타난다.


이렇게 소도신앙은 소연맹국 사회에서 형성되었 고, 연맹왕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제천의례로 통합되었다.



백제의 제사

(1)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

『삼국사기』에 인용된『책부원귀(冊府元龜)』는 백 제의 제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매년 4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 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지냈다. 그 시조 구태 (仇台)의 묘(廟)를 나라의 도성에 세우고 일년에 네 번 제사지냈다.”


즉 백제는 하늘 및 오제의 신, 구태묘에서 제사지낸다는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제사지에는 여러 사료를 인용하여, 시조묘를 동명묘로 보고 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니 혹은 시조 동명(東明)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라고 하였으며, 북사(北史) 및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어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는 시조 구태(仇台)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임은 사적이 명백하니, 그 나머지의 것은 믿을 수 없다.”


『삼국사기』제사지에는 천지신에 대한 제사와 동명묘에 대한 제사 기록이 보인다.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온조왕 20년(2) 봄 2월에 단을 설치하여 천지에 제사지내고, 38년(20) 겨울 10월, 다루왕 2년(29) 봄 2월, 고이왕 5년(238) 봄 정월, 10년(243) 봄 정월, 14년(247) 봄 정월, 근초고왕 2년(347) 봄 정월,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전지왕 2년(406) 봄 정월, 모대왕(牟大王) 11년(489) 겨울 10월에도 모두 위와같이 행하였다. 다루왕 2년(29) 봄 정월에 시조 동명(東明)의 묘(廟)에 배알하고, 책계왕 2년(287) 봄 정월, 분서왕 2년(299) 봄 정월, 계왕 2년(345) 여름 4월,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전지왕 2년(406) 봄 정월에도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2) 조상신, 시조묘에게 제사

백제 개국신화 속에는 천신인 조상신에 대한 숭배가 보인다. 제천의례가 성립된 사회에서 받든 천신도 왕실의 조상신이고, 기본적으로는 청동기시대에서부터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 받들었던 조상신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


백제가 연맹왕국을 이루면서 그 안에 크고 작은 소연맹국이나 성읍국가가 흡수되었다. 본래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은 자기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점차 연맹왕국 체제가 정립되면서 제사는 보다 조직화되어 부족과 부족을 잇는 국가적 제의로 발전하였다. 이리하여 성립된 것이 제천의례이다.


백제는 연맹왕국 집단의 통합과 결속에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종교적 통일을 시도하였다. 마한제국의 사상적 기반인 소도신앙과 더불어 그것과 연관 깊은 산악신앙 등을 비롯한 토착세력의 사상적 기반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효과적인 지배를 단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명묘의 설치라든지 천지신에 대한 제의와 더불어 국가적 산악을 설정하여 국가권력의 지방확산과 더불어 지방 토착세력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소도신앙과 같은 이념기반을 흡수하고자 하였다.


국가의 시조인 온조의 부모가 모두 부여계이고, 부여로써 성씨를 삼는 등, 백제는 부여계로서, 백제의 건국신화는 범부여계 신화와 연결된다. 부여족의 지배자들은 해씨였는데, 이들은 태양숭배 신앙을 가진 부족이었다. 백제 왕실을 구성하는 지배세력 집단 중 비류계도 해씨였다. 백제 건국신화에서 천신계 신앙은 태양숭배로 이어졌다.


백제에서는 시조전승의 내용이 꽤 여러 갈래로 나누어 전해지고 있지만, 다른 나라의 건국신화와 달리 시조의 신성성이 배제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전하는 온조와 비류전승의 경우 시조의 신이한 탄생이나 신성한 행적을 보여주는 영웅전승적 성격도 미약하고, 천계와의 직접적인 관련성도 보이지 않고있다. 그래서 시조로서 제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온조나 비류보다 동명이나 구태가 시조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국왕이 즉위한 이듬해 정월이면 동명왕묘에 참배하였고 큰 가뭄이 들 때면 이것을 찾아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그런데 정작 건국자인 온조왕묘나 비류왕묘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백제왕실에서 주몽이 온조나 비류보다 숭배된 사실을 말해준다.


시조 온조왕은 즉위 원년에 동명왕묘를 세웠다.


“원년(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백제본기』1 「시조 온조왕(溫祚王)」


(3) 제천사지(祭天祀地), 천지신에게 제사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종전의 천신신앙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천신신앙이 나타난다. 종전의 천신신앙이 자연신의 하나로서의 천신에 대한 신앙이라면 삼국시대의 천신신앙은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천지신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백제가 연맹왕국을 이루면서 그 안의 소연맹국이나 성읍국가가 흡수되었다. 연맹왕국체제가 정립되면서 제사는 보다 조직화되어 부족과 부족을 잇는 국가적 제의, 즉 제천의례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백제 왕실이 천지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성읍국가시대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연맹왕국 속에 흡수된 성읍국가의 조상신인 여러 지신을 함께 제사하지는 않았다.


백제의 의례는‘제천사지(祭天祀地)’로 나타난다. 즉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백제는 하늘과 땅에 대해 제사지낸다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어 특이하다.


제천의례는 이전의 소도신앙에서 치렀던 여러 토착신의 제의를 연맹왕실이 중심이 되어 통합한 것인데,‘ 제천사지’의례는 연맹왕실이 천신을 주재하는 가운데 지신도 함께 제사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인상을 준다.


백제의 제사에서는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천지신 제사 기록이 백제본기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온조왕 20년(2) 봄 2월에 왕이 큰 단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 신이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왔다.”


이는 천신과 새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제의와 연관하여 나타난 새는 일단 천신계, 곧 천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의 사자로 인식되고 있다.


“온조왕 38년(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여기서 천지에 대한 제사는 그것을 지낼 때마다 제단을 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천의례는 연맹왕국 이후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완비되었다.


백제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한 시기는 근초고왕 이후 침류왕 때이다. 백제의 제천의례는 근초고왕 때에 정립되기 시작하여 침류왕을 지나 아신왕과 전지왕 때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근초고왕 이후에 왕실이 천지를 제사한 양태는 진정한 의미의 제천의례에 가깝다.


근초고왕 때에는 천지의 신지(神祗)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는 천신과 함께 지신을 제사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포함한 셈이다. 근초고왕대 정복왕조로서의 등장과 왕권의 안정은 왕실의 제천의례가 보다 권위를 갖게 하였다. 이때가 되면 시조묘와 천신 및 지신에 대한 제사를 묶어서 함께 지냈다.


(4) 제사유적

제사유적으로 흔히 제사의례가 행해진 것을 알수 있는 유구나 유적을 지칭한다. 제사유물의 존재양상이나 유물에 나타난 흔적으로 제사의례 행위를 판단하고, 유물이 없더라도 유적에 독특한 시설이 있어서 주거지나 고분 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를 제사유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의 국가제사와 관련된 유적은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공주 정지산 유적이 대표적이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제사유적으로 변산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죽막동 유적에서는 제사용으로 판단되는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석촌동 고분군과 무령왕릉 등의 고분은 제사유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백제의 장례풍습과 제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석촌동 고분군은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일대에 있는 백제의 고분군이다. 석촌동 고분군의 동북쪽에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 백제 한성시대의 도성이 소재하고 있다. 석촌동 1-4호분은 전형적인 기단식 적석총(基壇式積石??)으로 고구려의 적석총과 같은 양식이다.

 

고대의 능묘는 곧 묘(廟)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석촌동 고분군은 그 자체로 제사를 거행하는 제장(祭場)이라 볼 수 있다. 즉 선조왕을 장사지낸 후 정기적으로 제를 올리는 제사의 공간인 것이다. 또한 왕족과 백성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종교적인 집회장소이기도 하다.


부여 궁남지의 수로시설도 제사유구의 성격을 가진다. 여기서는 새모양 목제품과 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새는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천사의 사자로 인식되었으며 새 모양 목제품은 제사와 관련된 상징적 유물로 볼 수 있다. 궁남지 수로의 북단에는 삼족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역시 제사와 연관된 것이다. 때문에 이곳에서 수로를 관장하는 수신이나 농경신에게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 외 백제의 전통신앙

(1) 국가적 산악신앙

백제에서는 한성 도읍기부터 산악신앙이 존재하였다. 국가적 제의 산악에서는 기우제를 비롯한 국가적 제의가 행하여졌다.


사비천도가 단행되던 때 국가적 제의 대상이 되는 산악들은 백제의 신(新)왕도인 사비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백제에 삼산(三山)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비시대에는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이 삼산이었는데, 이들은 도읍인 부여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지로서 왕성과 국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계룡산은 국도의 운명과 직결된 신라의 침공을 방어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산악이다. 서악인 월출산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장악하는 역할을 하고, 남악인 지리산은 가야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떨치는 임무를 띄고 있다. 북악인 오서악은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는 성격과 함께 잃어버린 한성을 찾으려는 염원이 담겨 있었다.


(2) 용신신앙

백제의 전통신앙으로 용신(龍神)신앙이 있다. 용신은 곡물이나 대지의 창조자로, 사회와 자연을 통합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왕의 어머니는 도성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한 뒤 무왕을 낳았다고 한다. 용은 물과 가장 관련이 깊은 동물이다. 한성시대(漢城時代) 도성의 방어시설로 짐작되는 풍납성(豊納城) 토성의 본래 이름이 사성(蛇城)이고 부여 능산리에서 나온 6세기 후반의 백제금동대향로에서 백제의 용신신앙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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