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찾기

다시 동이를 말한다(4) 동이족의 활동

김선주 연구위원

2016.10.05 | 조회 4685

다시 동이를 말한다(4)

 

 

동이족의 활동

 

 

 

1. 동이족의 연원

 

고대에 있어서 동이족의 활동무대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 황하유역의 산동을 중심으로 한 일대였다.

 

동이민족의 연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소련의 인류역사학자인 오과라기야부의 인류의 발생과 이동이란 논문에 의하면 지금부터 만여년 전에 파미르 고원에는 춤 잘추고 노래 잘부르는 황색인종이 녹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 민족이 동으로 이동하여 천산天山과 알타이산맥에 살았기에 알타이어족이라 하였다.” 점차 동으로 이동하여 바이칼호에서 몽고사막으로 분산한 일파가 9000년전에 적봉시 오한기 흥륭와 보국토향保國吐鄕에서 살았다고 한다. 다시 6000년전에 적봉시 홍산紅山에서 홍산고국紅山古國을 세운 것이 환국시대로서 이 환국문화가 홍산문명이며 홍산문화계열은 하가점문화까지 발전하였고 바로 고조선의 문화라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동이족들은 회하 유역과 산동반도에 걸치는 중국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거주하면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북아시아 문화의 주체를 이루는 동이문화는 동이족에 의해 창조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와 역사 문헌에 기록된 내용 및 연구성과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동이족에 속했던 민족임이 분명하다. 중국의 고대사학자들은 동이족의 발상지는 지금의 바이칼호 일대로, 그 후 점차 남하하여 요녕성 서부에 와서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한 갈래는 발해를 따라 산동반도로 진출하였다고 본다. 또 중국의 고고학 자료와 학계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요령성 서부의 홍산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라고 본다. 결국 바이칼 호수에서 남하한 동이족이 요령성 서부에 정착해 홍산문화를 이루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시라무렌강과 노합하에서 기원전 4천년경부터 꽃핀 홍산문화는 기원전 2300년경에 쇠하면서 소하연문화라는 조그만 신석기 말기문화로 대체된다. 소하연문화는 이내 하가점하층문화라는 초기청동기시대문화로 다시 대체되는데 이때가 기원전 2천년경이다. 소하연문화는 과도기적단계로 지적되는 문화단계인데, 이때 만주 송화강유역에 등장하는 문화가 백금보문화를 비롯한 신석기말 청동기초의 문화로서 고조선 초기문화라고 여겨지고 있는 문화이다.

요령지역의 문화전개양상을 고고학적으로 보면 기원전 2300년경을 전후하여 문화의 중심지가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과 북만주지역으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기원전 2000년경을전후하여 다시 요서지역이 융성해지는 이전상태로 돌아간다.

시라무렌강과 노합하유역의 홍산문화가 쇠하면서 송화강유역에서 일단의 문화가 전개되고 이후에 다시 노합하유역을 중심으로한 하가점하층문화가 발전하는데 이를 북만주지역의 고조선세력의 문화권역이 확산되어 하가점하층문화가 전개된다는 역사적 사실로 해석한다.

시라무렌강 상류 임서林西에서 기원전 2000년경의 다량의 구리 노천광산이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오랜 기간동안 초기청동기시대의 제련이 행해졌음이 밝혀졌다. 하가점하층문화는 이러한 청동기를 바탕으로 전개된 문화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3세기경에 어떠한 기후변동의 결과로 인간생활에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기온의 급강하(-3)로 이전의 농경기반이 목축기반으로 전환되면서 하가점하층문화도 문화의 성격이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의 하가점하층문화가 비파형청동검을 표지유물로 하는 완전한 청동기문화인 하가점상층문화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이족의 문화권에 거주하고 있던 종족 중에서도 후에 우리 민족을 형성하는 데 주류가 된 것은 맥족와 한족이었다.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라고 하나, 그 퉁구스족과 분화된 시기는 상당히 일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퉁구스족(만주족 포함), 몽골족, 터키족을 알타이(Altai)족이라 하는데, 이 세 민족의 언어는 같은 알타이어족에 속하고, 오랜 어느 시기에 같은 종족에서 갈라진 것이라 한다. 알타이족은 원주지로부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의 동쪽에까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의 레나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의 서쪽에까지 이동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알타이족이 본주지로부터 동쪽으로 또는 북쪽으로 이동 확산하기 전에 북방 아시아에는 이전부터 살고 있던 종족들이 있었다. 이 선주 종족들은 알타이족의 이동에 밀려 동해안과 북극지방의 불모의 땅으로 옮아갔다. 이들을 통틀어 고아시아족 또는 고시베리아족이라고 부른다. 북극지방의 축치족이나 사할린 남부와 북해도의 아이누족, 멀리 동북쪽으로는 베링해협의 양안에 분포하고 있는 에스키모들이 그들이다. 이들 고아시아족은 알타이족에 밀리기 전에는 아시아의 내륙에 있었다. 따라서 만주와 중국 북부 역시 고아시아족의 일파가 점거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우리 민족와 만주족 등의 알타이족에 밀려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였을 때에, 그 일부는 한반도로 밀려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두고 일부 학자는 우리 민족을 고아시아족이라 한 일이 있으나, 다른 연구 경과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구성에 고아시아족의 요소가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고아시아족은 아닌 것이 여러 모로 분명하다.

 

한편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통용되는 것이 퉁구스족 설이지만 이는 학문적 근거와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한 추론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이 몽골족와 퉁구스족의 잡종이라든가 또는 한족漢族와 몽골족의 후예라든가 하는 이설도 있으나, 이것 또한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내세운 일제시대 식민사학의 영향이며, 과학성이 결여된 학설인 것이다.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듯이 예와 맥들이 우리 민족의 선조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중국 사서에 우리 민족을 예맥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아무튼 예맥족은 넓은 의미에서 동이족에 포함된다.

예맥족은 발달된 농경문화의 경제력은 기반으로 하여 먼저 홍도 계통의 문화와 그 종족들을 흡수하여 보다 넓은 문화기반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예맥족濊貊族에 관해서는 고조선을 이룬 중심세력이라는 것과 그 위치가 부여·고구려지역에서 원래부터 분포하고 있었던 종족이 예족濊族이고 서쪽에서 이동해 들어가 예족과 융합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 맥족貊族이라는 견해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고구려가 맥족이란 사실이 고대사의 통설이다. 고조선지역에 예족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맥족이 이동해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족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동이족 중 토착민이고 맥족은 유목적 기질을 지닌 이주민들이라는 의미가 짙게 배여 있다. 후대의 예맥조선이라는 표현도 예족과 맥족의 조선이란 의미이지 그 자체가 국가명칭은 아닌 것이다.

중국동북지역의 중원지방과 가까운 발해북안 요서지역에 일정한 시기동안 맥족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맥족이 중국북방의 호와 함께 서주말부터 춘추시대에 걸쳐 중원지방으로 빈번하게 침범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원식 청동기물을 반입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양상이 하가점상층문화에 반영되어 부분적으로 중원식 청동기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족은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부터 강이나 하천을 터전으로 농경생활을 영위해왔던 선주민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예족도 맥족과는 자연환경이 달라 경제생활 방식이 달랐지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지역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맥족은 하가점상층문화에서 나타난 기마풍속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또한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구성한 중요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맥족은 비록 목축을 주로 하였지만 농경을 바탕으로 한 예족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기 때문에 상호 융화에 큰 무리가 없었을 줄 안다. 이것은 요동지역과 길림장춘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주인공은 예족이고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맥족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맥족이 동천하기 전의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동지역 청동문화가 지역에 따른 문화적 성격은 다를지라도 종족적으로는 같은 동이족으로서 상호 연계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동이족은 중국의 토착인으로서 초기에는 구려九黎라 하였고, 4700년전 배달국 14대왕 치우천황의 전성시대부터는 치우족, 삼묘족(묘만족)이라 불렀다.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는 구이九夷, 팔만八蠻, 칠융七戎, 육적六狄의 민족으로 부르는 등 또 다시 동서남북 이만융적夷蠻戎狄으로 갈라 수십 종의 민족명칭으로 존재하였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族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陝西성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복희·신농·치우 등이 있다. 주역의 창시자이며 인류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복희는 성기成紀 혹은 천수(天水,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나, 에 도읍하여 115년간 재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복희는 감숙甘肅, 섬서陝西 일대인 황토고원, 곧 중화민족의 요람에서 최초로 생활하였다가 후에 활동범위를 확대시켜 점차 하남 동부지역까지 도달했다. 산동성 미산현에 묘가 있다. 의약과 농경의 창시자인 신농神農은 천수지방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 협서성 기산현) 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따서 성을 강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진에서 살다가 뒤에는 동으로 뻗어나가 곡부(曲阜,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동북)에서 살았다. 그의 시신은 호남성 차능현에 묻혔다고 한다. 강씨의 마을은 지금 중국 보계寶鷄 남쪽 교외의 강성보姜城堡일대가 된다. 중국고금성씨사전中國古今姓氏辭典에 의하면, “신농은 강수에 살았다. 성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염제는 강수에서 낳았다. 씨칭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신농이 강수에 살면서 이로써 성이 생겼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동 조상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만족의 조상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대표 부족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만족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환단고기에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황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다.

神市之季有治尤天王恢拓靑邱.(桓檀古記』 「三聖記全上)

 

14세는 자오지환웅인데 세상에서는 치우천황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

十四世曰慈烏支桓雄世稱蚩尤天王徙都靑邱國在位一百九年壽一百五十一歲.(桓檀古記』 「三聖記全下 神市歷代記)(蚩尤는 속언으로 뇌우를 크게 일으켜 산하를 고치고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치우가 중원을 개척하여 넓힌 뒤에 그 땅을 청구국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중심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이었다. 서량지徐亮之중국사전사화에서 동이족의 중심지가 산동성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동이족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여 요령성,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호북성 등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대륙의 핵심적인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중원 대륙의 대부분을 여러 갈래의 동이족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다만 중국인들이 시대에 따라 이들을 다르게 호칭했을 뿐이다.

구려는 구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동이족은 대륙의 주요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복희로부터 신농, 치우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에서 천하를 호령하였던 위대한 지도자를 배출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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