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전통이 살아있는 환상의 나라, 인도

앞잘

2013.07.08 | 조회 11296





1. 영토와 역사


인도의 영토

인도의 지형

지형적으로 인도는 크게 세 지역으 로 구분된다. 첫째, 인도 북부를 동서 를 가로지르는 세계적인 고산지대인 히말라야산맥 지역이다. 이곳에는 해 발 8,000m가 넘는 수십 개의 고봉들 이 자리잡고 있으며 곳곳에 빙하와 설 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둘째, 인도 갠 지스평원으로 길이 2,400km, 너비 240~320km, 면적 100만 km 2 에 달 하는 충적평야지대 이다. 이곳에는 인 더스, 갠지스와 브라마푸트라 강이 북 쪽의 산악 지역과 남쪽의 고원 지역에 서 많은 토사를 운반, 퇴적시키면서 형 성한 넓고 비옥한 평야 지대가 펼쳐지 면서 평평한 지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는 해안 지역과 더불어 집약적인 농업 이 행해지고 있는 인구 밀집 지역이기 도 하다. 셋째,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질구조가 비교적 안정된 데칸고원 지역이다. 데 칸고원 지역은 동고츠, 서고츠산맥 및 북쪽으로 뻗어 있는 빈디아산맥, 삿푸 라산맥을 경계로 다른 지역과 구분된 다. 서고츠산맥은 고원의 서쪽 끝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아라비아해 사 면과 벵골만 사면의 분수계를 이룬다.


데칸고원을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이 서고츠산맥에서 발원하여 벵골만으로 유입된다. 지질학적으로 인도의 위치 는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으 나 20세기 후반 판구조론이 유력해진 뒤 오늘날에는 초대륙 ‘곤드와나’에서 떨어져 나온 인도 반도가 북쪽으로 이 동하면서 아시아 대륙과 충돌하여 히 말라야산맥을 형성하고, 이곳에서 발 원하는 하천의 오랜 침식과 퇴적 작용 으로 인도 갠지스평원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인도의 기후

국토가 328만 km2나 되는 광대한 인 도는 매우 다양한 기후를 가지고 있 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한대성 기후 와 서북부의 사막 기후를 포함한 건조 기후, 그리고 중부에서 동부까지의 온 대성 기후, 남부의 열대성 기후가 있 다. 인도의 계절은 세분하면 6개로 나 누어지지만, 크게 건조기, 혹서기, 우 기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3월경 부터 우기로 들어가기 직전의 3개월은 연중 기온이 가장 높이 올라가는 혹서 기이다. 4월경이면 인도 평야부의 기 온이 50도 가까이 올라갈 정도가 된 다. 그 후에 우기로 들어가는 6월~9 월까지는 인도 남부에서 아라비아해 의 습기를 머금은 계절풍이 불어온다.


이 몬순Monsoon(계절풍)이 인도의 대 부분 지역에 비를 뿌린다. 그렇다고 해 도 비가 온종일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인 소나기가 대부분이므로 여행 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우기가 끝나는 9월부터 인도는 건기에 접어든 다. 그 중에서도 11~2월까지는 북인도 의 일교차가 상당히 심해지는 겨울철 인데, 그렇다고 해도 선선한 한국의 가 을 날씨 정도이기 때문에 외국 여행자 들이 제일 붐비는 계절이다.



인도의 형성과정

국명의 유래

‘인도’라는 명칭은 원래 인더스강Indus River 유역인 하라파Harappa에서 거 주하는 지역을 불러온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더스 강을 중국어로 ‘인도하 印度河’라 불렀는데, 실크로드 문화의 교 류를 통해 인도 문명이 ‘인도’라는 이 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 더스강의 원래 발음은 ‘신두Sindu’이 다. 고대 페르시아인들과 무역을 했을 당시 그들이 인더스강인 ‘신두’의 ‘ㅅ’을 ‘ㅎ’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신두’를 ‘힌 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도를 ‘힌두스 탄’(신두 주변에 사는 곳)이라는 이름으로 불 렀다. 현재 통용되는 인디아India라는 명칭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ㅎ’ 발음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두’ 또는 ‘힌두’ 라는 이름에서 ‘ㅎ’를 제거하여 만든 것이다. 이처럼 ‘인도’에 대해 다른 나 라에서 부르는 다양한 명칭들은 인더 스강 유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정 작 그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 신의 나라를 인도 신화에서 유래된 이 름인 ‘바라트Bharat’ 1) 라고 불러왔다.

1) 바라트Bharat: 대내적으로 사용하는 인도의 국가 이름. 일찍이 리그베 다시대에 갠지스강 상류의 광활한 지역을 통일하여 성세를 이룬 전설적 인 바라타족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인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국가 이름이 다. 1949년 인도 제헌 의회에서 채택하였다.

외국에서 코리언Korean으로 불리는 사람을 한국에서는 한국인이라고 부 르듯이, 외부에서 인도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인도 현지에서는 바라트 사 람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금도 인도 헌 법에서는 인도에 대해 ‘바라트’라는 명 칭을 사용하고 있다.


인더스문명으로 시발된 고대 역사

인도는 고대 인더스문명Indus Civilization 의 발상지이자 역사적인 무역로 역할 을 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인도의 존 재로 인해 아시아 대륙은 오랫동안 그 상업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에 있어 크 게 인정을 받아왔다. 인도에는 두 개 의 강이 대륙을 관통하고 있다. 히말 라야 산에서 발원하는 인더스강은 서 부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가고, 갠지스강은 동부 인도로 흘러서 벵 갈만으로 빠져나간다. 세계 4대 문 명 발상지 가운데의 하나인 인더스문 명 또는 인더스계곡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은 BCE(기원전) 3300년 ~1700년경에 존재하였으며 특히 BCE 2600년~1900년경에 흥했던 문명으 로, 인더스강과 현재 파키스탄과 북 서쪽 인도에 걸쳐 있는 가가하크라 Ghaggar-Hakra강 사이에 있었다.


처음 발굴된 유적지가 하라파에 있었 기 때문에, 가장 부흥했던 시기는 ‘하 라파문명’이라고도 부른다. 인더스문명 이 남긴 하라파Harappa와 모헨조다 로Mohenjodaro 등의 유적을 통해 관 찰된 인더스문명의 수준은 메소포타미 아, 수메르문명 등에 버금가는 세련된 문화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질서정연하게 계획된 인도의 고대 도시로서, 벽돌로 이루어진 가옥과 도로, 하수시설 등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인더스문명은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문명의 후기 단 계로, 종교는 다신교였으며 정치 체제 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체제 였다. 본래 인더스강 유역에 거주하던 최초의 주민은 프로토오스트랄로이드 Proto-Australoid로서 검은 피부와 납작한 코를 가진 중간 키의 인종이 고,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문명을 일 으킨 인종은 드라비다Dravida족으로 알 려져 있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 유적에 서는 많은 테라코타제의 토우(흙으로 만 든 인물상 또는 동물상), 석회암제의 상像, 동 석제凍石製의 호부(부적), 도장 그리고 귀 금속으로 치장된 장신구 등이 출토되 었다. 그 가운데 표면에 약간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도장에는 약 400여 가지 의 독특한 기호가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 문자는 정확히 해독되지 못하고 있 다. 드라비다인에 의해 이루어진 이 문 화는 그 후 BCE 2000년경부터 이주 하기 시작한 철기 문명을 가진 강력한 아리아인Aryan들의 침입으로 역사 속 으로 사라지게 된다.






아리아인의 침입과 베다시대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 부분 #아리 안Aryan족 사람들이 인도 대륙을 침입 해 정착하면서 형성이 된 것이다. 중아 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인 아리 안족은 BCE 5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로 이동하여 수 세기 동안 정착한 후 다시 각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 다. 인도로 이주한 아리아인은 페르시 아에 정착했던 부족으로서 인도-이란 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BCE 2000년 ~1500년경 사이에 이란 고원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을 침입하고 드라비다인 원주민을 정복하였다. 아리아인들은 초기에는 인도의 북서부(현재 파키스탄의 신 드Sindh주와 인도의 펀잡Punjab주) 지역에 정착 하다가 서서히 갠지스강 유역을 따라 전 인도에 뻗어나갔다.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한 후 제일 먼저 만든 것이 ‘베다Veda’라는 성전聖 典이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된 ‘리그베 다Rig Veda’에는 1028가지의 찬사가 들어있으며, 그 내용을 통해 전기 베 다 시대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 회적, 문화적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리아인들은 소, 말(馬) 이외 에 불을 숭배하는 문화를 도입하였고, 유목민에서 정착 농민으로 바뀌면서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 해나갔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탄생되었으며, 현 대 인도 언어들의 기원인 산스크리트 어와 더불어, 드라비디안, 시노-티베트 어, 문다 언어가 발달했다. 베다Veda, 우파니샤드Upanisad와 더불어 라마 야나, 마하바르타와 같은 산스크리트 어로 된 대서사시가 이 시기의 문화를 말해주는 주요 작품들이다.


왕권국가 시대

BCE 6~5세기경 베다시대의 말기에 이르러 인도에서는 제사장 계급인 브 라만Brahman의 확고했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부족중심의 도시국가들이 쇠퇴하고 마가다Maghadha, 코살라 Kosala와 같은 군주가 중심이 된 강 력한 왕권국가들이 등장하였다. 아울 러 브라만 중심의 베다에 근원을 둔 종교나 사상에서 벗어나 불교(석가모니)와 자이나교(마하비르) 등 새로운 철학과 사 상들이 풍요롭게 발전하여 인도의 특 색 있는 문화와 사회형태가 만들어졌 다. BCE 5세기경에는 마가다국과 같 은 왕권국가들이 정복전쟁을 통하여 인도 전체의 통일국가를 지향하였으 나 BCE 4세기 중엽 이후 난다Nanda왕 조에 의해 멸망되었고, BCE 327년에 는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을 받아 인더 스 유역의 작은 왕국들이 복속되었다.


BCE 322년 알렉산더가 죽자 혼란한 틈을 타서 찬드라굽타Chandragupta 는 북서 인도를 지배하던 알렉산더의 군대를 격파하여 펀잡지방을 차지하 고, 난다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야Maurya왕 조(BCE 321∼BCE 184)를 창설하였다. 마우리 아왕조의 제3대 아소카Ashoka왕(BCE 269~232) 때는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이루어 마우리아왕조의 최전성기였으 며,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완성 되었다. 아소카왕은 불교를 통치이념 으로 삼았고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앞 장서 동남아시아 소승불교의 기원이 되었으며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 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아소카 왕 사후 50년이 지나 마우리야왕조는 BCE 185년에 브라만 계급 출신의 푸 쉬야미트라Pushamitra에 의해 멸망 하였다. 이후 인도는 BCE 2세기에서 CE 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여러 왕 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북인 도의 서북지역은 박트리아Bactria, 샤 카Sakya가 연속하여 지배하였으며 이 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쿠샨족 이 박트리아를 정복한 뒤 인도의 간다 라 지역을 지배하면서 쿠샨Kushan왕조 (BCE 60~CE 240)를 열었다. 쿠샨왕조의 카 드페세스 2세 때는 인더스 강하구에 서 힌두쿠쉬 산맥 지역까지 차지함으 로써 홍해와 지중해 세계, 인도 세계 가 연결되는 거대한 해상 및 육상 통 상로를 확보하여 동서간의 교류가 촉 진되었고, 동서문화의 융합의 결과로 써 그리스 로마 계통의 미술과 인도의 불교미술이 혼합된 간다라 미술이 나 타났다. 이 시기 불교는 왕족과 상공업 자의 지원을 받아 대승불교로 발전해 나갔으며, 카스트제도에 따른 4개 계 급의 종교적 의무와 생활규범들을 규 정한 ‘마누법전’이 브라만에 의해 편집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브라만이 중심 이 되는 브라만교의 전유물이었던 베 다성전에서 볼 수 없었던 시바신이나 비슈누신이 나타나고, 갠지스 강이나 히말라야 산의 신격화가 일어나고, 서 사시로 된 대중적인 종교문헌인 ‘마하 바라타’나 ‘라마야나’가 등장하면서, 민간신앙과의 결합을 통하여 힌두교가 성립되었다.


쿠샨왕조가 쇠퇴하면서 북동 인도 지 역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CE(기원후) 3 세기 말엽 찬드라굽타 1세는 오늘날 의 비하르 주에 해당하는 마가다 지역 에서 굽타Gupta왕조(280년~550년)를 건설하 였다. 굽타왕조의 왕들은 전인도를 거 의 통일하여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으 며, 특히 서인도의 항구들을 차지함으 로써 지중해 무역까지 참여하는 등 유 럽지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굽 타시대에는 도시가 번창하고 부유한 시민들의 생활은 사치스럽고 우아했으 며, 힌두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만 큼 힌두교와 힌두문화가 매우 중시되 었다. 당시의 왕들은 힌두교의 신을 숭 배하면서도 불교사원에 대한 적극적인 희사도 이루어져 불교와 힌두교는 공 존하였다. 또한 굽타왕조 시대에는 힌 두문화가 다양한 외래문화와 섞이면서 문학, 예술, 과학, 종교, 의학과 수학에 서부터 천문학, 심지어 성학(카마수트라)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발전이 이루어 졌는데 인도적인 민족적 색채가 만들 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굽타왕조는 5세기 경에 훈족의 침입으 로 쇠퇴의 길을 걸어 6세기 경에는 마 가다 지방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북인 도는 7~8세기에는 갠지스 강 유역의 마우카리왕조, 델리 북쪽의 푸수파부 티왕조, 수라스트라 지방의 마이트라 카왕조, 데칸북부의 와타타카왕조, 동 인도와 벵갈을 지배한 팔라왕조 등 여 러 지방 왕조가 등장하였다. 남인도의 경우도 통일왕조를 이룬 팔라와왕조를 비롯하여 찰루끼야왕조, 라슈쿠라쿠 타왕조 등 여러 왕조가 차례로 번성하 였다. 특히 남인도의 타밀지방은 독자 적인 힌두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지방 의 팔라와왕조는 시바신을 숭배하는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를 권장하였는 데 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를 통하여 동남아 시아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왕조와 무굴제국 시대

아라비아의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성 장하면서 인도에도 7세기 무렵 이슬람 교가 전파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 슬람의 인도 침입과 이슬람왕조의 성 립은 11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아프가 니스탄 고르를 중심으로 활동한 투르 크계 이슬람왕조인 구르Ghur왕조가 인 도 서북부에 깊숙히 침입하여 1192년 에 힌두 연합군을 패배시킴으로써 인 도에서의 무슬림 지배가 시작되었다. 10 세기말 작은 도시로 만들어진 델리 Delhi에는 무굴제국이 세워졌고 300 년(1526~1857) 동안 인도 무슬림 왕 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 초에는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술탄왕조 (1206~1298, 노예왕조라고도 함)가 탄생하였고 이후 킬지파가 세운 킬지왕조(1290-1320) 를 비롯하여, 투크라크 왕조(1320~1423), 세여드 왕조(1414~1451), 로디왕조 (1451~1526) 등 여러 이슬람 왕조가 이어졌 다. 한편 북부인도의 이러한 변화가 진 행되는 가운데 남부인도에는 위자야나 가라 왕조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 여 이슬람 세력이 남인도로 팽창하는 것을 막았다.


1526년에 몽고제국 티무르의 5대손 이며 아프가니스탄의 토호세력이었 던 바부르Babur는 대포와 같은 화기 를 사용하는 새로운 전쟁기법으로 인 도를 침략하여 아그라를 수도로 하고 무굴Mughul제국(1526~1857)을 세웠다. 무 굴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Akbar (1542~1605)는 종전의 이슬람 지배자와 다 르게 힌두에게 종교적 관용과 화해의 정책을 실시하였고 군사력을 바탕으 로 데칸고원의 남쪽을 제외한 인도대 륙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4대 황제 자항 기르Jahangir는 악바르의 유업을 계 승하여 영토확장 정책을 계속하였고, 1608년에는 영국 상인들에게 상업 교 역의 항구 도시인 수라트Surat에 동 인도 회사를 설립하도록 허락함으로 써 영국세력의 인도 진출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다. 자항기르의 아들인 샤 자한Shah Ja han(1592~1666)은 반란을 거듭하다 결국 왕위에 올라 영토확장 에 착수하여 악바르 시대보다 넓은 영 토를 차지하였고, 타지마할Taj-Mahal을 비롯하여 델리성, 자마 마스지도, 아 그라성Agra fort등 무굴제국의 대표 적인 건축물들을 건설하였다. 샤자한 의 아들인 아우랑제브(1618~1707)는 아버지를 유폐하고 왕위에 오른 뒤 힌 두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도들에게 인 두세를 부활시키는 등 이슬람 근본주 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영토확장 정책 을 폈다. 그러나 과도한 영토확장정책 과 이슬람화 정책은 국력을 소진시키 고 힌두교도들의 반란을 야기시켰으며 국가재정의 고갈을 가져왔다.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늘어나고 왕권경쟁 으로 내분을 겪으면서 무굴제국은 아 우랑제브 이후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 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식민지시대와 독립

이와 같은 무굴제국의 혼란 상황 속에 서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연이어 인도 에 건너와서 면직물, 향료 등의 무역에 종사하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은 서로간에 무역의 패권을 둘 러싸고 각축을 벌였는데, 영국이 다 른 나라를 제압하고 마침내 프랑스까 지 격파하여 패권을 장악하였다. 1765 년 영국은 인도 북동부에 있는 벵골 Bengal의 영유권을 획득해서 인도 식 민지 지배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동인도회사가 벵골을 영유하게 되자 인도를 통치할 기관으로 인도 총독을 두었다. 그 무렵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영국은 인도의 모든 왕국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북서부를 제외한 모든 지 역에 지배권을 확립하므로써, 인도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늘어난 상품을 판매할 시장과 원료 공급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57년 북인도 를 중심으로 영국군의 인도인 용병과 하층 농민 및 구 지배계급까지 합세한 세포이의 항쟁Sepoy Mutiny(1857~1859)이 발 생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의 식민지배 에 항거하여 인도의 광범위한 계층이 참가한 인도 최초의 민족항쟁이었다.




이 사건을 무력으로 진압한 영국은 탄 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 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을 멸망시 켰고, 동인도회사에 의한 통치 대신 영 국 정부에 의한 인도의 직접 통치를 시작 하였다. 세포이의 항쟁은 실패로 끝났 지만, 종교적 자유의 보장과 함께 비인 격적인 식민지 정책은 부분적으로 완 화되었고, 인도인들은 인도인들대로 힌두교의 종교와 사회를 반성, 개혁하 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서양사상에 자극을 받 은 인도의 지식인들은 각종 종교적, 사 회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러 한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연결되 었다. 1885년에 창립된 인도국민회의 Indian National Congress는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초기에는 영국정 부에 건의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 하였으나, 1905년 커즌Curzon 총독 이 민족의식이 높고 반영운동의 중심 지인 벵골 지방의 분할안을 내놓자 영 국의 기만적 행동에 반기를 들어 영국 상품 불매운동 등 급진적인 활동을 전 개하였고 그 결과 영국은 1911년에 벵 골분할령을 철회하였다. 인도국민회의 는 이후 반영 단체를 주도하게 되었고 인도 근대화 및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로 발전해 나갔다. 국민회의는 인 도 경제가 빈곤한 것은 부富가 영국으 로 유출되기 때문이며 인도인들의 정 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힌두교도의 종교와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고, 스와라지Swaraj(자치·독립) 운동 과 스와데시Swadeshi(국산품 애용) 운동 및 민족교육 등의 강령을 주장하면서 민족의 일체감을 높였으며 국내 산업 의 발전을 유도하는 등에 기여를 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 면서 더욱 강경한 식민정책을 실시하 였다. 강력한 인도인 억압정책을 담은 로울타트법이 1919년에 책정되자, 마하 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는 비 폭력 불복종 저항 운동과 전국파업을 선포하므로써 새로운 민족운동을 전 개하였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 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이 퍼져 나갔 으며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도 활발 해졌다. 대공황 후의 제2차 비폭력적 인 저항운동에 의해서 독립을 요구하 는 열기가 높아졌으며, 마침내 인도 민 중의 힘이 결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 시작되면서 인도국민회의는 전쟁비 협력을 선언하고 영국의 철수를 요구 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연방제를 골격으로 하 는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하 였으나, 반영운동을 주도하던 국민회 의와 무슬림연맹(1906년 창설)간의 합의가 실패로 끝나고 각지에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싸움이 일어나자 결 국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인디아공화 국’과 ‘파키스탄공화국’으로 분리해서 각각 독립하였다.




최근의 인도 정황

영국연방 중에서 독립 주권국가가 된 인도(인디아공화국)의 초대 총리로는 네루 Nehru(1889~1964)가 취임하였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새로운 헌법을 공 포한 후에 영국연방 안에서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이후 간디와 네루의 국 민회의당은 네루의 영향력 아래 인도 를 통치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네루의 딸(인디라 간디)과 손자(라지브 간디)가 1970 년대와 1980년대의 짧은 기간을 제 외하고는 계속해서 인도를 통치하였 다. 총리인 네루는 그가 사망한 1964 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으며 이후 샤 스트리Shastri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가 1966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 에게 이양되었다. 네루의 무남독녀 인 디라 간디Indira Gandhi(1917~1984)는 1966 년부터 1977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 고 1977년 데자이Desai 정부와 1979 년 싱Singh의 임시정부를 거친 후 다 시 1980년 1월 간디 여사에게 권력 이 이양되었다. 1984년 10월 간디 여 사가 시크교도인 경호원에 의하여 암 살되면서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Rajiv Gandhi(1944~1991)가 권력을 계승했으나 1989년 부패혐의에 의해 붕괴되고 셰 크하르Shekhar에게 정권이 이양되었 다. 1989년 야당의 연합인 자나타달 Janata Dal은 라지브 간디의 국민회 의당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1991년 5 월27일 라지브 간디가 타밀나두 지역 에서 선거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하면 서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는 국민회의 당이 승리하여 간디나 네루 가계의 출 신이 아닌 첫 번째 총리로 라오Rao가 취임하였고 5년의 임기를 모두 채웠다. 이 시기는 인도가 경제적으로 점차 자 유화되고 개혁하는 과정이었으며 세계 로 인도의 경제를 개방하는 시기였다. 인도의 국내정치는 새로운 형태를 띠 게 되었는데 각 계급, 종교, 민족 단체 들의 지역적, 정치적인 소규모 정당들 이 난립하였다. 라우 정부의 임기 마 지막해인 1996년 봄 몇 가지의 정치 적 부패 스캔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연 정체제가 성립되었으나, 1998년 선거 에서 국민회의당이 참패하면서 인도인 민당Bharatiya Janata Party 중심 의 연정이 이루어져 바지파이Vajpayee 총리가 등장하였다. 1998년의 선거에 서 참패한 국민회의당은 피살된 인디 라 간디의 며느리이며 라지브 간디 총 리의 아내인 소니아 간디Sonia Gandhi (1946~ )를 당수로 내세웠다. 2004년 5 월의 선거에서 국민회의당 중심의 연 합정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소니아 간 디는 재차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인 대신 연정을 이룬 만모한 싱Manmohan Singh을 총리로 지명하 며 인도의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할 기 회를 제공하였고, 인도는 싱 총리의 주 도하에 지금까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2009년 15대 총 선에서 국민회의당 중심의 UPA 연합 이 대승을 거두어 재집권에 성공하므 로써 만모한 싱 총리도 재취임에 성공 하였다. 경제학자 출신인 싱 총리는 그 간 인도의 경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 로 나섰고, 국제 정치에도 활발히 참 여하며 새로운 대국으로서의 인도의 위상 강화에 나서고 있다. 인도는 초강 대국의 세력권 확장 배격과 모든 국가 와의 평화공존 추구를 외교정책의 기 조로 삼아, 좁게는 서남아 지역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확고히 하고 넓게는 비 동맹운동의 기수로서 제3세계에서의 지 지확보 강화를 대외관계의 주안점으로 삼았던 전통을 지니고 있다. 냉전 종 식 이후 신 국제질서 형성에 따라 다 극화를 지향하면서 실용주의 외교노선 에 따라 세계 모든 국가와 관계발전 을 도모하고 있으나, 과거 개발도상국 developing country 세력을 대표하고 자 했던 외교 노선도 상당 부분 유지 되고 있다.




2. 정치 및 행정


정치와 행정체제

인도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는 주요 여건으로는 일반국민의 민주의 식, 언론자유의 보장, 사법부의 독립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정치면에서 보면 인도는 문자 그대로 세계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이며, 높은 문맹률과 극 심한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자유민 주주의에 대한 의식은 일반화되어 있 다. 무엇보다도 인내와 관용의 국민성 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국민성도 민 주주의 확립에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의 헌법은 1950년 1월 26일 공포된 22장 395조 및 부칙 9조로 구 성되어 있으며 정부형태는 내각 책임 제 공화국을 표방하고 종교 무차별주 의로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


즉, 인도는 의회민주주의 체제하의 연방 국으로서 연방 28개주와 7개 연방직할 지로 구성되어 있고, 의원내각제의 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도 행정부는 대통령, 부대통령 국무 위윈회로 구성되며 대통령이 국가원 수로서의 지위를 갖는 대신 내각 수반 인 총리가 행정실무를 담당하여 사실 상 국정을 책임지는 의원내각제를 채 택하고 있다. 대통령은 상하양원과 각 주의 주의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선거 인단에 의해 선출된다. 대통령은 35 세 이상의 인도 시민이어야 하며 하원 의원으로서의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 다. 임기는 5년이고 재선이 가능하다.


부통령은 상하양원으로 구성된 선거 인단에 의해 선출된다. 총리를 수반 으로 하는 국무위원회는 내각을 구 성하는 장관들로 구성된다. 2013년 6 월 현재 인도의 대통령은 프라납 무 커지 Pranab Mukherjee, 총리는 만 모한 싱 Manmohan Singh, 여당 대 표는 소니아 간디 Sonia Gandhi, 야 당 대표는 수쉬마 스와라지 Sushma Swaraj이다. 연방의회는 상원과 하원 으로 나누어지는데, 하원은 각주의 각 선거구마다 주민들에 의해서 직접 선 출되는 530명 이내의 국회의원과 연방 직할지를 대표하는 20명 이내의 국회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의 임기 는 회기 개시일로부터 5년이다. 상원은 250명 이내로 구성되는데 그 중 12명 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나머지는 하원 의원이 선출하는 간접선거 형식을 취 한다. 상원은 해산되는 것이 아니고 2 년마다 성원의 3분의 1씩을 교체한다.


또한 인도 각 주의 주정부의 형태는 연방정부와 매우 흡사하다. 주 정부는 대통령이 5년 임기로 임명한 주지사 Governor 및 주총리Chief Minister 를 수반으로 하는 주 국무위원회로 구 성된다. 주 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 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총리가 장악한다. 주의회는 주에 따 라 단원제 또는 양원제이며 주에 따라 정원을 달리한다. 또한 각 주마다 입법 부가 있는데 대부분의 주가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반면 몇몇 주에서는 양 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사법부는 대법원 연방고등법원, 주 고 등법원, 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인도 의 수도인 뉴델리 연방직할지와 각 주 에는 고등법원이 하나씩 있다. 군의 최 고 지휘권은 대통령에 위임되어 있는 반면 행정 및 작전상의 통제는 국방부 와 육해공군 사령부에서 담당한다. 인 도 국방부에서는 주로 육해공 3군의 균형발전과 활동사항을 점검하고 정책 입안과정에서 정부가 내린 결정들이 3 군 사령부로 이관되어 잘 실행되는지 의 여부와 국회의 동의를 받은 국방예 산업무를 관장한다. 그리고 최고심의 기구는 내각에 설치된 정책위원회로, 모든 주요국방사무가 이곳에서 총리의 주재 아래 결정된다.



행정 구역

인도의 행정 구역은 28개의 주State 와 7개 연방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 으며, 각 주에는 주정부와 주 의회 가 있고 주를 대표하는 주지사 및 주 의 수상이 있다. 주정부의 형태는 연 방정부와 매우 흡사하다. 주 정부는 대통령이 5년 임기로 임명한 주지사 Governor 및 주총리Chief Minister 를 수반으로 하는 주 국무위원회로 구 성된다. 주 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 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총리가 장악한다. 또한 주의회는 주 에 따라 단원제 또는 양원제이며 정원 도 주에 따라 그 수를 달리한다.




3. 경제


인도는 1947년 독립 직후 전근대적 사 회제도인 종교 관습, 사회 간접 자본의 미비와 공업기반 결여로 농업부문에 크게 의존하는 전형적인 농업국에 불 과했으나, 1950년대 초부터 수입 대체 산업 육성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 발 전과 농업 생산기반의 견고화에 중점 을 둔 경제발전계획을 지속적으로 추 진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공업 생산 기반 구축과 식량 자급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들어 석유증산 및 선진국들 의 경기 회복에 힘입어 연평균 5%의 성장을 실현하고, 특히 1984년 라지브 간디 총리 집권 이후 제한적이나마 외 국인투자 자유화 조치 등 경제자유화, 개방화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1990년 초에 발발한 걸프전으로 인도 경제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 국내 정 치의 불안과 함께 외환위기가 초래되 었으나 IMF 등 국제 금융기관의 지원 으로 이를 극복하고 라오 총리 지도하 에 1991년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을 채택, 경제개혁 및 개방정 책을 시행하였다. 1999년 10월 출범 한 BJP(인도인민당) 주도의 집권연합인 NDA(National Democratic Alliance:국민민주연합) 정부는 빈곤타파 및 국력에 상응하는 경제력 달성을 목표로 제2세대 경제개 혁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특히 전 업종 에 걸친 외국인직접투자(FDI) 한도 확대 및 IT 산업 등 서비스산업 권장, 그리 고 공기업의 과감한 민영화를 통한 정 부 재정적자 완화 등에 정책의 우선순 위를 부여하였다. 2004.5월 집권한 국 민회의당 주도의 UPA(United Progressive Alliance:진보연립) 정부는 전임 NDA 정부 의 개혁정책 혜택이 주로 중산층 이상 에게만 집중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경제개혁은 계속 추진하되 그 동안 상 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부문 및 계층 (농업, 저소득층 등)에 대한 배려 확대에 역 점을 두는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개 혁’을 추진했다. 2009년 5월 재집권에 성공한 UPA 정부는 제1기 UPA 정부 에 비해 좌파의 영향력이 배제된 상황 이므로, 경제자유화 및 개방정책을 보 다 강력하게 추진해 나갈 것으로 전망 된다. 골드만삭스, 미국국가정보위원 회(NIC) 등 세계 주요 연구기관들은 인 도의 젊고 풍부한 노동력,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전통, 과학기술분야 우수성, 영어 사용능력 등 중장기적 경제성장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인도경제 가 21세기에 미국 및 중국과 함께 세 계경제를 이끌어 갈 3대 강국으로 도 약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4. 종교


종교의 나라로 불리는 인도는 힌두교 와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이 며, 수세기에 걸친 회교도 및 영국 지 배에서 회교와 기독교가 전파되어 각 종 종교가 공존해 왔다. 인도정부는 이들 제종교의 평화적 공존을 보장하 여 사회적 통합을 기하고 있는 바, 종 교 세속주의원칙Secularism은 인도 헌법의 주요 요소이며 국시라 할 수 있 다. 힌두교 이외에도 이슬람교, 기독 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가 소수종 교로서 인도인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힌두교는 오늘날 인도 인 구 가운데 80% 이상의 추종자를 갖 고 있는 가장 중요한 종교로서 BCE 1500년경 베다교가 민간신앙을 흡 수, 대중화한 것이다. 힌두교의 원어는 Hinduism으로 Hindu란 ‘큰 강’을 뜻 하는 ‘신두Sindu’의 페르시아 발음이 며 인더스Indus, 인디아India라는 어 휘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원적 으로는 북서 인도의 강 이름, 혹은 강 주변의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힌두스탄’이나 ‘인디아’와 같이 인도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의적으로 볼 때 힌 두이즘은 인도교, 즉 인도에서 발생하 여 성장한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광범 위한 개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힌 두교라고 할 때는 ‘베다’의 권위와 ‘카 스트’제도를 부정하는 비정통적인 자 이나교와 불교를 제외한 나머지를 가 리킨다.


BCE 6세기에 인도는 브라만Brahman 중심의 농촌경제 시대에서 전사 계층 인 크샤트리아Ksatriya와 상공업에 종사하던 바이샤Vaisya가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 뿐 아니라 종교, 사상적인 면에서 도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는데 ‘베다’와 브라만의 권위를 무시한 자유사상가 무리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도 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 적으로 영향을 미친 세력은 바로 불교 와 자이나교이며, 이들은 각각 독자적 인 사상체계와 경전 및 교단조직을 남 겼다. 자이나교의 창시자는 마하비라 Mahavira, 불교의 창시자는 마하트마 붓 다Mahatma Buddha라고 존칭되었다.


또한, 시크교도는 600만 정도의 추종 자를 가진 인도의 소수종교로서 주로 북인도의 펀잡Punjab 지방 주민들에 의해 신봉되는 종교이다. 이는 16세기 경 구루 나낙Guru Nanak(1469-1539)에 의해 창시되었다. 오늘날 시크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래 힌두교에 있어서의 하나의 개혁운동으 로 볼 수 있으며, 자이나교나 불교와 달리 이슬람교로부터 중요한 요소를 병합한 것으로 힌두-이슬람의 종합이 라 할 수 있다.




이슬람교는 중동아시아의 이슬람군이 10세기 경에 인도의 델리 지방을 점거 하면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거의 700년 동안 인도를 지배했다. 영 국이 식민지 이후 행한 분할 통치의 결 과로 인도는 1947년에 종교적인 이념 을 기준으로 파키스탄(이슬람교)과 인도(힌 두교)라는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도에는 약 13%가 넘는 이슬람 교도들이 살고 있다.



5. 문화


인도의 문화는 ‘다양함 속의 조화’로 특 징지워진다. 지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언어, 인종, 종교와 사상에 이르기까 지 다양성多樣性Diversity은 인도 문화 를 규정짓는 키워드의 역할을 하고 있 다. 먼저 지리적, 자연적 환경에서 인도 문화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인도 문화권은 인도를 포함하여 인접 국가 인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 랑카를 널리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인도 의 기후는 아열대의 타오르는 열기와 히말라야 지대의 만년설, 세계 최대 강 우량과 사막의 건조함, 인도 평원의 풍 요로움과 남부 지방 데칸고원Deccan Plateau의 척박함 등 광활한 지역에 걸쳐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성격이 공존 하고 있다.


인도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두 번 째 근거는 인도 언어의 다양함이다. 200가지가 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 으며, 그 중 국가에서 공인한 주요 언 어만 18개로서 전혀 다른 네 개의 어족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북부 인도와 남 부 인도는 커다란 문화적 차이를 드러 내며, 이것이 인도의 사상과 문화를 더 욱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인 도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도 대륙이 오랜 옛날부터 현 대에 이르기까지 이주와 침입, 무역 등 을 통해서 많은 민족이 만나고 교류해 온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 재 인도에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뿐 만 아니라 시크교, 회교, 기독교, 조로 아스터교, 유대교의 추종자들까지 있 어 실로 세계의 종교 박물관 같은 인 상을 주고 있다. 그밖에도 인도는 심한 빈부격차와 높은 문맹률, 종교적 사회 적 신분제도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 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복 합사회이다. 그러나 독립 이후 현재까 지 인도는 수많은 다양성 속에서 조화 와 균형을 추구하는 나라가 되었다. 인 도인들은 이러한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포용하는 가운데 수천 년에 걸친 전통 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국가 적, 사회적인 조화와 정체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인도의 예술과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 지고 있으며 전통 예술에서 현대 예술 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왔 다. 독립 이래 연방 정부와 여러 주정부 는 랄리트칼라 아카데미(국립 미술 아카데미), 상게트나타크 아카데미(음악·무용·드라마 아 카데미), 사히티아 아카데미(국립 문학 아카데 미) 등 여러 관련 기관을 설립하여 문화 예술활동을 촉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도는 또한 영화 문화 산업 이 매우 발달해 있으며, 문화적 유산들 도 즐비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 로 등재된 곳이 아그라요새Agra Fort, 타지마할Taj Mahal, 엘로라동굴Ellora Caves, 아잔타동굴Ajanta Caves, 코 나라크의 태양신 사원Sun Temple, 마 하발리푸람Mahabalipuram 기념물군, 케올라디오Keoladeo 국립공원 등 28 곳에 달한다.


인도의 의복문화도 특이한 점들이 많 다. 인도 여성들의 전통 의상인 사리 Sari는 바느질이 되어있지 않고 긴 천 으로 되어있어서 몸에 옷을 두르는 형 태를 하고 있고, 살와르 까미즈Salwar Kamiz라는 의상은 원래 무슬림의 여 인들이 입던 옷이지만 지금은 북부 지 방에서 종교와 관계없이 입는 의복이 다. 가그라Ghaghra는 사리와는 달리 바느질을 한 옷을 말한다. 인도의 북동 부 지역의 여성들은 티벳의 전통의상 을 입고, 전통적 무슬림의 여인들은 부 르까Burka라는 긴 베일의 옷을 입는 다. 남성의 경우에는 사리처럼 바느질 을 하지 않아 한장의 천으로 되어있는 도띠Dhoti라는 옷이 있고, 허리에 둘 러 발목까지 늘어뜨리는 룽기Lungi라 는 의상도 있다. 셰르와니Sherwani는 인도의 남성이 입는 일종의 코트이고, 꾸르따 삐자마Kurta Pijama는 인도의 북부지방에서 남성들이 평상복으로 즐 겨 입는 옷이다.


인도 음식문화의 특징은 향신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열대지방에 속 하는 인도는 풍성한 나무로부터 인도 특유의 맛을 내는 향신료를 만들어 조 리하는데 사용했다. 인도의 주식은 북 인도와 남인도에 차이가 있는데, 북 인도는 밀가루로 만든 인도 빵인 난 Naan, 남인도는 쌀밥을 주식으로 한 다. 인도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볶음 밥 종류인 풀라우pulau와 비리야니 biriyani가 있고 빵 종류로는 난nan과 차파티chapati, 파라타paratha, 푸리 puri(인도식 스낵)이 있다. 또한 커리curry 는 채소와 고기에 향신료를 넣고 걸쭉 하게 끓인 음식을 말하는데 우리가 먹 는 카레보다 매운맛이 훨씬 강하고 자 극적이지만 버터를 넉넉히 넣어 깊은 맛을 지닌다. 커리의 가장 기본이 되 는 향신료는 심황과 고추인데, 심황 때 문에 인도의 음식은 노란색을 띤 것 이 많다. 이외에도 탄두르라는 진흙화 덕을 이용하여 요리를 한 탄두리 치킨 tandoori chicken과 부드럽게 삶은 콩 에 마살라(혼합향신료)를 가미한 수프인 달dhal도 주요한 음식에 속한다.



한국과 인도의 관계

한국과 인도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 져 있지만 불교라는 종교적 공감대를 통해 일정한 문화적 교류의 역사를 가 져왔다. 한국과 인도의 긴밀한 관계는 현대에 들어 정치적, 경제적 필요에 따 라 강화되어 왔는데, 식민 통치와 반식 민주의 운동의 경험이 서로에 대한 관 심을 일깨운 측면이 있다.


인도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국으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편에 서 의료파병국으로 활동했다. 대한민 국과는 1962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3년 12월 10일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했으며 북한과도 역시 1962년 영사관계 수립을 거쳐 1973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종래 인도는 표면적으로 비동맹 중립 정책을 표방하면서 남북한 등거리 정 책을 표방해 왔으나, 갈수록 우리나라 의 신장된 경제력과 국제지위 향상을 높이 평가, 우리와의 실질 협력관계를 크게 중시하는 추세이다. UN 총회에 서 남북한 문제에 대한 종래의 불언급 또는 중도입장을 탈피, 1991년 제46 차 총회에서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을 지지하였다. 각종 비동맹회의에서 도 북한의 강경하고 비합리적인 입장 채택에 반대, 우리나라의 입장을 이해 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 며, 특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 한 우방으로서 남북한간 대화와 협력 을 통한 평화통일 추진을 적극 지원한 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인도 관계는 남북 한 대결로 인한 기존의 정치 외교 중심 의 관계에서 무역 투자를 중심으로 한 실리적인 관계로 한 단계 격상되었다.


1993년 Rao 총리가 인도 총리로서 최 초로 방한함으로써 인도는 남북한 등 거리 외교에서 우리측에 편향된 외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고, 1996년 우리 정상으로서는 최초로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함으로써 양국간 실질협력 관계를 공고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 다. 2004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인 도 국빈방문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장 기적 협력 동반자관계(Long-term Cooperative Partnership for Peace and Prosperity)’ 구축에 합의하였고, 2006년 2월에는 Abdul Kalam 인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 기로 한-인도간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 정(CEPA)’ 구축을 위한 협상 개시를 선언 하였다. 2010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인도 Republic Day 주빈자격으로 인 도를 국빈방문하였으며, 동 방문을 계 기로 양국관계가 ‘전략적 동반자관계 (Strategic Partnership)’로 격상되었으며, 외교, 경제, 사회, 문화 등 양국관계 전반에 서의 협력강화에 합의함으로써 협력확 대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인도는 특히 경제 분야에서도 대한민국 과의 관계 증진에 힘쓰고 있다. 양국간 에는 1974년 8월 맺은 무역협정을 시작 으로 문화협정(1974년 8월)과 과학기술협력 협정(1976년 3월) 그리고 2009년 포괄적 경 제동반자 협정(CEPA)이 체결되었다. 교역 량이 점차 증가추세에 있어 1996년 현 재 대한수입액 11억 7,697만 달러, 대 한수출액 9억 7,572만 달러였다가 현재 는 대한민국의 대對인도 수출은 114억 3459만 달러, 인도의 대對대한민국 수 출은 56억7445만 달러(각 2010년)에 달하 여, 인도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7위의 수출국, 제16위의 수입국이다. 그동안 한국의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 주요 대기업들은 인도에 대규모의 투자를 진 행해 왔으며, 그 규모는 작년 말까지 총 26억 달러로 추산된다. 인도의 대 한국 투자는 이미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올 해는 한국과 인도가 수교를 맺은 지 40 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라서 양국 의 정부가 옛날부터 전해온 교류를 더욱더 활성화 시키려는 전망이다.




인도의 대도시(인구별 순위)





베다Veda 문화


베다는 고대 인도의 종교 지식과 제례규정을 담 고 있는 문헌들을 말하며 브라만교의 성전聖典 을 총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구전되어 오던 내용 을 산스크리트어로 편찬하였고 고대인도의 종교, 철학, 우주관, 사회상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인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종교 뿐만 아니라 출생, 결혼, 장례 등 인간의 삶과 계절제와 관련된 의례 와 제식을 모두 망라하기 때문에 고대 인도의 사 회, 정치, 경제, 문화상을 보여주는 역사 사료로 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인도 유럽어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베다어(산스크리트 베다 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어원학과 문학 영역에서 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베다Veda란 ‘안다’라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비 드(vid-)에서 파생한 말이다. ‘지식’ 또는 ‘지혜’를 뜻하며, 넓은 의미로는 기록될 가치가 있는 지식 전체를, 좁은 의미로는 성스러운 지식이나 종교 적 지식을 뜻한다. 그 명칭이 보여주듯 고대 인 도의 종교 및 사상과 관련된 노래, 시, 기도문, 공 물 제의 방식, 주문 등 성경의 6배에 달하는 방대 한 지식을 담고 있다. 베다 문화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은 베다 문헌(Vedic texts) 또는 베 다 산스크리트 전집(Vedic Sanskrit corpus)이다. 일 종의 신의 계시서로서 크게 리그베다Rig Veda, 사마베다Sama Veda, 야주르베다Yajur Veda, 아타 르바베다Atharva Veda의 네 종류가 있으며, 각각 의 베다는 내용에 따라 삼히타Samhita, 브라흐 마나스Brahmanas, 아란야카Aranyaka, 우파니샤드 UpanishCEs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그베 다에 이어지는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 아타르바 베다 등 3베다의 성립은 BCE 1000년경이다. 그 뒤 제사의 의식과 그 방법을 설명하는 브라마나 (제의서祭儀書)는 200년 후에 성립되었고 우파니샤 드(오의서奧義書)는 BCE 500년경에 성립되었다.



카스트caste 제도

인도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대다수가 아직 오랜 전통사회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있는 바, 종교와 더불어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카스트 제도는 인도인의 생활을 지배하는 가장 주된 요소로서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이를 사회 관습 내지는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 다. 현재 카스트 제도에 의한 차별은 헌법상 금 지되어 있고 이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꾸준히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도 사회생활 전반 에 걸쳐 카스트 제도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 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ㆍ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 ks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 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안에 는 다시 수많은 하위카스트subcaste가 있다. 최 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있 다. 카스트제도가 생긴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 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 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 범으로 굳어졌다. 엄격한 카스트제도 하에서 인 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 규범을 준 수해야 했다. 예를 들어 브라만은 반드시 해가 지거나 뜰 때 기도를 해야 했고 경을 외워야 했 다.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 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 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 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크다.


마하트마 간디를 포함한 많은 사회 개혁 운동가 들은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 해 노력하면서 불가촉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 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 보 호에 앞장섰다. 오늘날 인도에는 1억 명이 넘는 하리잔이 있다. 인도 정부에서는 입학이나 취업 시 일정 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 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 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  출처 월간개벽 2013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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