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유럽 문화의 자존심, 예술과 혁명의 나라 프랑스

김현일

2013.07.01 | 조회 8804

이번 호에서는 세계지역문화탐방 첫 순서로 유럽문화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지역문화에 대해 살펴본다. 트리컬러Tricolor로 불리는 프랑스의 삼색국기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데, 절대봉건왕조에 대항하여 일어난 시민혁명과 국민주권을 표상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풍부한 예술적 감성과 더불어 문화적 다양성과 근대시민국가의 사상적, 문화적 자부심으로 상징되는 나라가 바로 프랑스다.


역사와 영토

엑사곤의 지정학적 위치
프랑스는 영국, 독일과 더불어 유럽의 중심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독일과 더불어 유럽통합을 주도해왔다. 현재 27개국으로 구성된 초국가연합 유럽연합(EU)이 그 노력의 결과다. 프랑스는 인구(6,500만)도 상당할 뿐 아니라 영토도 약 55만㎢로 한반도의 두 배 반이나 된다. 프랑스 땅을 프랑스 인들은 흔히 ‘엑사곤’(Hexagone)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땅이 6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육각형의 3면은 지중해와 대서양, 북해 등 바다에 연해 있으며 다른 2면은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그리고 나머지 한 면은 라인 강과 접해 있다. 프랑스는 위치상 남유럽과 북유럽에 걸쳐 있다.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서부와 북부는 대체로 서안해양성 기후라서 겨울에도 온화한 편이다. 동부로 갈수록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짙어진다. 프랑스의 이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인종도 금발을 주종으로 하는 북유럽 인종과 검은 머리나 갈색 머리의 남유럽 인종이 뒤섞여 있다.


골족에서 비롯된 시원 역사
프랑스라는 나라 이름은 중세초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땅(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갈리아’로 불렸다)으로 쏟아져 들어온 프랑크 족의이름에서 기원하였다. 갈리아에 그리스 로마 문명을 가져다준 로마인들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BCE 125년경인데 지중해 연안의 프로방스 지방이 처음으로 로마 속주가 되었던 곳이다. 프로방스라는 이름은 로마의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키아’에서 나온 말이다. BCE 1세기 중엽에는 갈리아 전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갈리아 땅에는 로마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고 도처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졌다.

원래 갈리아(프랑스어로는 ‘골Gaul’이라고 한다) 땅의 원주민은 켈트 족이다.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르네 고시니와 알베르토우르데조의 만화 『아스테릭스』시리즈는 바로 BCE 1세기 중반 로마정복기의 골족을 그린 만화이다. 로마군대를 골탕먹이는 골족 영웅 아스테릭스는 이제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문화캐릭터가 되었다.


골족은 ‘드루이드’라는 사제가 주관하는 다신교를 숭배하였다. 드루이드들은 농업과 밀접히 연관된 달력을 보관하고 축제일을 결정하였으며 심지어는 전쟁을 결정하는 데도 관여하였다. 드루이드들은 매년 한차례 총회를 열었는데 이 총회를 통해 다양한 도시들간의 갈등이 해결되었다고 하니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것이다. 드루이드교는 후일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쇠퇴하였으나 이 시기 골족의 몇 가지 관습들은 지금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영혼불멸의 상징이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겨우살이를 리본에 묶어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갈리아에는 일찌감치 그리스인들도 바다를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오니아 지방의 포카이아 인들이 그들인데 현재의 남부 해안지역에 정착하여 마르세유를 세웠다(BCE 600년경).



로마제국의 지배와 프랑크족의 등장
갈리아는 기후도 온화하고 땅도 비옥한 편이어서 번영을 누렸다. 귀금속 장신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골족 장인들은 유리와 비누, 도자기 등을 만들었다. 골족은 평화스럽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골족 전사들은 적의 머리를 베어 허리춤에 달고 다니곤 하여 아주 용맹스런 사람들로 인식되어 여러 나라의 왕들이 이들을 용병으로 이용하였다. BCE 385년에는 알프스를 넘어온 골족 전사들이 로마 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갈리아는 수세에 서게 되었고 로마의 정복대상이 되었다.

프로방스를 속주로 지배하던 로마는 BCE 1세기 중엽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 정복전쟁을 ‘갈리아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그 전쟁을 지휘한 인물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갈리아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갈리아의 도시들을 기하학적인 설계에 따라 정연한 모습으로 건설하였다. 열주들이 늘어선 광장, 신전, 공회당, 대규모 극장, 원형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이 세워졌다. 토목에 능한 로마인들은 상수도도 설치하고 포석으로 포장된 견실한 도로를 건설하였다.

골족은 점차 로마의 지배에 동화되었다.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귀족들은 자제들을 학교에 보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만들었다. 그 결과 골족의 과거보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사상에 물든 골족 엘리트층이 형성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는 5세기에 끝이 났다. 게르만족의 일파로서 라인강을 건너온 프랑크 족이 갈리아를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다.

이들의 나라는 로마제국처럼 법체계를 갖춘 정연한 기구와는 거리가 멀어 왕이 아들들에게 왕국을 상속재산으로 분할해 주었다. 그래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결국 동서 프랑크 왕국(프랑키아)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이 프랑스가 되고 동프랑크 왕국이 독일 즉 신성로마제국이 되었다.

10세기 말에는 파리와 그 주변지역을 영지로 갖고 있던 카페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파리는 프랑스의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었다. 카페 왕가의 왕들은 지방의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수도 파리에 행정기구와 사람 그리고 돈이 몰리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 그 과정은 가속되어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다. 그 결과는 오늘날의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인구의 5분의 1, GDP의 4분의 1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프랑스의 철도노선과 고속도로 노선도 파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방사형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프랑스의 중앙집권적 경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프랑스혁명에서 태동한 현대사
현재 프랑스 국가의 정식명칭은 ‘프랑스 공화국’이다. 프랑스는 프랑스혁명기인 1792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였지만 혁명이 끝나면서 왕정이 다시 복위하였다. 19세기에는 공화국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는 공화파와 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줄곧 계속되었다. 1848년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이 공화국도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제정으로 바뀌었다(1852년). 나폴레옹 3세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다시 수립되었다. 이것이 제3공화국으로 이후 왕당파들의 도전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공화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공화국은 드골 때의 헌법개정으로 제5공화국으로 불린다.

현재 프랑스 공화국은 프랑스혁명기에 등장한 삼색기를 국기로 삼고 있으며 국가國歌로는 프랑스혁명기 때 군가로 사용되었던‘라 마르세이예즈’를 사용한다. 라 마르세이예즈의 가사는 군가에서 나온 것이라서 내용이 좀 살벌하다. “폭군을 향하여 피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대오를 짜자. 진격하자. 진격하자. 저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땅을 적시도록...” 그래서 일부 프랑스인들은 국가의 개정을 주장한다.

국기와 국가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늘날의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에서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현대사를 1789년의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잡고 교과서도 그렇게 되어 있다. 프랑스 역사교육과정은 중학교에서는 고대사부터 시작해서 중세사와 근대사를 배우고 고등학교에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 현대사를 배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등학생들은 매우 상세한 내용의 현대사를 배우게 된다.


행정과 대외관계

정치체제와 행정제도
프랑스는 임기 7년으로 연임이 허용되는 대통령 중심제이며 의회는 지역구에서 인구비례로 선출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하원(Assemblee Nationale)과 간접선거로 뽑힌 상원(Senat)으로 구성된다. 상원보다는 하원이 더 큰 권한을 갖는다. 상원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은 지방의회 의원과 시의원, 시장 등으로 구성된다. 지방자치는 최상위 단위인 26개의 지방(region) 의회를 통해 이뤄진다. 지방의회는 주민의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물론이다. 한 지방에 몇 개씩 있는 도(데파르트망departement)는 대통령이 임명한 지사가 관장하는 행정단위로 중앙권력을 대변한다. 모두 101개나 되는 도청은 내무부에 소속되어 있다. 프랑스의 가장 기초 행정단위는 ‘코뮌’(commune)이다. 코뮌의 수는 36,000개가 넘는다. 재미난 것은 인구 2백만이 넘는 파리도 시골마을처럼 하나의 코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코뮌의 수장인 ‘메르’(maire)는 큰 코뮌의 경우는 시장이라 번역해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코뮌의 경우는 촌장 정도이다.


제국주의 식민정책으로 확보된 해외영토
프랑스는 해외 영토도 많이 갖고 있다. 태평양 지역의 뉴칼레도니아, 남미의 가이아나와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 인도양의 레위니용 등이 그러한 해외영토이다. 모두 근대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확보한 해외식민지 가운데 독립하지 않고 남아 있는 땅들이다. 프랑스 인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도 일찌감치 발을 들여놓아 17세기초 현재 캐나다에 위치한 퀘벡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곳을 기지로 삼아 프랑스인들은 오대호를 거쳐 미시시피강 유역으로 탐사를 하였다. 17세기말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인들은 미시시피 연안의 광대한 지역을 프랑스 영토로 만들고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아나’라고 지었다. 그리고 교역거점과 요새가 세워지고 뒤이어 정착식민지가 세워졌는데 이 지역의 중심지 뉴올리언스가 건설된 것은 1718년이었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유럽 내의 영토확장을 놓고 싸웠을 뿐아니라 해외무역과 식민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프랑스의 주적은 영국이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두 나라는 유럽의 정치적 주도권을 넘어서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7년전쟁(1756~1763)이라고 역사에서 알려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퀘벡 식민지를 영국에 넘겨줘야 했다. 루이지아나 식민지는 나폴레옹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생국가인 미국에 팔아넘겨 북미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는 모두 사라졌다. 퀘벡의 경우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 주민들은 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프랑스계 사람들이다. 프랑스에 대해 문화적 애착이 강하고 일부는 캐나다로부터의 독립을 원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배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대였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욕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알제리 태수와 프랑스 영사의 외교적 마찰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알제리를 점령하였다(1830). 당시 알제리는 오토만 투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제 300여년간의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대신하여 프랑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점령에 이어 프랑스인들을 위시한 유럽 이민자들이 알제리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토지를 많이 차지함에 따라 많은 알제리 원주민들이 고향에서 떠나야 하였다. 회교도 알제리인들은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에 비해 법적인 차별을 받았다. 알제리인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가 알제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알제리전쟁은 프랑스 내부에도 큰 갈등을 불러일으켜 알제리 독립 허용을 반대하는 프랑스 장군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프랑스 정부(제4공화국)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의 투쟁과 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여 1962년에 독립을 허용하였다. 19세기에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도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말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였으나 차츰 영토획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월남에서 영토와 큰 영항력을 획득한 프랑스는 월남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불전쟁(1884~1885)이 그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월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었다. 인도차이나인들의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투쟁은 영불전쟁 직후부터 있었으나 2차대전 이전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인도차이나는 2차대전시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프랑스의 수중에서 잠시 벗어났으나 일본이 패전한 후 프랑스가 다시 인도차이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호치민의 베트민 세력과 힘든 싸움을 벌이다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 군대가 참패함으로써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는 끝이 났다.


극동에도 뻗친 침략사
19세기 프랑스는 극동에도 세력을 뻗쳐 영국과 함께 중국에 대해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에 대해서는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응징을 명목으로 강화도를 일시 점령하였다(1866년의 병인양요). 그러나 조선이 미국과 영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886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당시 조불조약에서는 천주교의 선교가 조선에서 허용된다고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정부가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실질적인 포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위에서 보듯이 제2제정기(1852~1871)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해외영토와 세력을 세계 도처에서 확대하려는 제국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가 가장 야심차게 추진한 대외정책의 하나가 멕시코의 보수파들과 손을 잡고 멕시코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친프랑스적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주의적 모험은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군사적 패배로 끝났다. 그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 제국을 부활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국한되었다.


종교

민족 정체성의 뿌리, 가톨릭 문화
프랑스의 지배적인 종교인 구교(로마 가톨릭 교회)의 힘은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 중세와 근대초 가톨릭 교회의 지배력은 그야말로 막강하였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생활도 지배하였다. 기독교는 1세기부터 프랑스 땅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갈리아가 프랑크족에 의해 정복되었던 5세기경에는 갈리아 주민들은 거의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다. 클로비스를 비롯하여 프랑크족의 왕들은 골족 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왕들이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지켜주고 성직자들과 교회에 면세 혜택을 주는 등 친교회 정책을 취한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 교황도 프랑스 왕권을 신성한 것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후대에 프랑스 왕들은 ‘기독교 왕’이라는 교회에서 부여한 칭호를 자랑스레 사용하였다. 프랑스 왕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들의 도전을 앞장서 진압하였다. 중세기 프랑스 남부에는 알비(Albi) 파를 비롯한 다양한 이단들이 등장하였는데 국가가 무자비하게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가 계속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14세기 초에는 성직자에 대한 과세문제를 놓고 프랑스 왕과 교황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주교 임명권을 놓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루이 14세 시대에 주교임명권은 왕에게로 넘어갔는데 그래서 프랑스 교회에 대한 지배권도 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왕이 갖게 되었다. 향후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는 거리가 있는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경향을 ‘갈리카니즘’이라 한다.


종교개혁과 정교분리 과정
가톨릭을 국교로 강제하였던 프랑스에도 ‘종교개혁’(Reformation)시대에는 가톨릭을 거부하고 루터와 칼뱅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단들이 생겨났다. 소위 ‘위그노’들이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자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웠다. 16세기 후반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사이의 내전이 근 40년간 계속되었다. 위그노 세력의 영수 앙리 드 부르봉이 가톨릭 세력과 타협을 벌여 앙리 4세로서 프랑스 왕좌를 차지하였다. 타협의 결과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나(낭트 칙령)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자유는 계속 위협을 받았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국이 하나의 신앙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위그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였다. 당시 많은 위그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 신교도 국가로 이주하였는데 그 수가 3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프랑스 국내의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신민으로서 공식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고 국가로부터 갖가지 협박과 탄압에 시달렸다. 이들의 종교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가 인정된 것은 프랑스혁명으로 인해서였다. 프랑스혁명은 종교와 신분상의 차별을 일소하고 시민들의 법적 평등을 확립하였다. 혁명지도자들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였는데 이 선언은 현재 프랑스헌법의 전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만방의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해 혁명세력 내에서도 온 건파와 과격파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과격파들은 왕 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며 부르봉 왕가를 지지 하는 가톨릭 교회를 적대시하였다. 심지어는 기독교의 신 대 신 인간 이성을 신성시하는 종교도 급조되었다. 가톨릭 교회 는 그 토지와 건물 등 막대한 재산을 국가 재정문제 해결을 꾀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에 빼앗겼다. 혁명이 종식된 후에도 교회는 그 재산을 되찾지 못했다. 많은 부동산이 이미 일반인 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혁명기에 가톨릭 교회는 반혁명 진영을 지원하는 바람에 그 위신이 크게 추락하였다. 혁명 이전부터 계몽사상이 확산되 면서 사회상층부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이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혁명으로 인해 교회의 신망은 큰 상 처를 입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정략상 교황청과 화해하였지 만 가톨릭은 예전과 같은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성직자 들은 국가가 지불하는 봉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국가에 충성 을 맹세하였기 때문에 국가 공무원처럼 되었다.

국교가 아니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의 이러한 지위 는 19세기 내내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공화파들은 국가와 교 회간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였다. 종교가 개인양심의 문제가 된 만큼 국가를 종교와 무관한 제도로 만들자는 것이 공화파 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1905년 국가가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4대 공인종교(가톨릭교, 칼뱅교, 루터교, 유대교)에 대한 일체의 자금지원 을 못하게 하는 정교분리법이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로써 정 교분리의 오랜 과정이 완성되었다.


프랑스의 문화유산 ― 교회와 수도원
1500년간 기독교 국가였던 프랑스에는 마을마다 교회요 동네 마다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당이 많다. 교회는 오랫동안 프랑스인들의 생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문화적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나면 교회에 출생신고를 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결혼식도 교회에서 올리고 죽으면 사망신고도 교회에 하였다. 이는 교회가 동네마다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 지만 지금은 이러한 호적기록은 모두 국가의 몫이 되었다.

프랑스의 무수한 교회당은 프랑스 문화유산 가운데서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의 주교좌 성당을 불어로는 ‘카테 드랄’이라고 하는데 주교가 앉는 의자를 의미하는 그리스 말 ‘카테드라’에서 온 말이다. 프랑스에는 이러한 대성당 외에도 수도원들이 곳곳에 있다. 원래 수도원은 인생을 오로지 신에게 바치고 평생을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집을 의 미한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찰과 같은 것이 수도원인데 프랑스 의 수도원들도 다양한 집단에 속해 있다. 수도원 건물들도 오 래된 것이 많지만 수도원들은 학문의 전수와 서적의 필사와 보 관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옛날에는 많은 학자와 교사들이 이들 가운데서 배출되었다.


회교의 신장에 따른 종교갈등
현재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예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우선 미사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는데 특히 젊 은이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사제가 되려는 성 직자 지망생들이 줄어 가톨릭 교회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반 대로 전통적으로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워온 회교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이 늘어 남에 따라 프랑스 종교지형에서 차지하는 회교의 비중은 날로 커지고 있다. 회교도들의 경우 기독교도들에 비해 세속화의 세 례를 훨씬 적게 받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그 힘이 갈수록 강해진다는 느낌을 준다. 기독교를 프랑스의 주요한 정 체성의 요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간혹 회교 사원(모스크) 건립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원주민들과 회교 이민자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최근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라는 극우정당의 지지율이 점 점 높아가는데 이것도 이러한 종교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여겨 진다.


문화

프랑스 문화의 특성
프랑스는 원주민인 켈트계 갈리아인, 로마인,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은 물론이고 이후 이탈리아인 등 수많은 민족들이 뒤 섞여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민족간의 갈등이 거 의 없고 사고방식 또한 다양한 가장 안정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켈트족(Celtes)으로부터 개인주의를, 로마인 으로부터 법과 질서를 사랑하는 마음을, 게르만족으로부터 건 축제조 재능을, 노르망족으로부터 진취적 기질을 이어받았다 고 말한다. 또한 풍부하고 다양한 국토와 천혜의 기후 아래 조 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갖게 된 점도 민족성 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인은 이러한 민족적 특성을 바탕으로 지성과 사고를 중 시하고 명석한 논리와 표현을 좋아하며,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정신을 선호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 만 이런 성향이 지나쳐서 정작 행동으로 옮길 때는 사고의 과 정에 집착하여 눈앞의 사실을 분석하는 측면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가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오히려 ‘원형原型(prototype)의 나라’이고 ‘양산量産의 나라가 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국가를 권력을 두뇌로 하는 유기체로서 이해하 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창조력을 소생시켜 헤쳐 나가야 할 ‘우리 프랑스’라는 관념을 강하게 갖 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인은 쇼비니즘(chauvinism, 배타적 애국심)이 있다거나 이상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추상적 관념이 법률주의로 정착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프랑스인은 현실적이고 검소하며, 인생을 즐기고 자녀교 육이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벼룩시장이 활성화되어 있 고, ‘전통’과 ‘낡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또한 타인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고 유럽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해 있으며, 예술적인 감각과 활동이 탁월하고 음식문화는 영국 다음으로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족에 대 한 의무가 약화되고 이혼율이 높은 편이며, 노령화 현상과 높 은 실업률, 공해, 주택부족, 사회계층 간의 신분 차로 인한 문 제가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것
프랑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

첫째는 프랑스인들이 매일 먹는 빵인 바게트이다. 바게트는 막 대기 모양의 빵이다. 바게트는 밀가루와 물, 소금, 효모 외에는 따로 들어가는 것이 없는 지극히 단순한 빵이다. 화덕에서 구 워내는 이 빵은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식당에서 고기요리를 먹을 때에도 바게트를 잘라서 곁들여 먹고 샌드위 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먹는 네모난 식빵을 갖고 만드 는 것이 아니라 바게트 속에 치즈나 햄, 토마토 등을 넣어서 만 든다. 바게트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딱딱해져 먹기가 힘들 다. 갖 구운 바게트를 구입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은 아침부터 바 게트를 사러 동네 빵집에 들른 다. 식사에서 바게트가 중요한 음식이므로 동네 빵집은 프랑 스인들의 생활에서는 필수적인 존재이다.

둘째는 포도주다. 포도주를 즐 겨 마시는 것은 지중해 지역의 공통된 것인데 로마제국 시대 에 포도 재배와 포도주가 널리 퍼졌다. 포도주는 일조량이 적 은 북부 프랑스를 제외하면 프 랑스 도처에서 재배된다. 프랑 스 포도주는 두 종류로 나뉜 다. 서남부산 보르도 포도주는 떫은맛이 강한 짙은 색깔이고 프랑스 동부와 론강 유역에서 나는 부르고뉴 포도주는 떫은맛이 덜하고 색깔과 맛이 가볍 다. 식사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오랜 전통이며 미사의식에 서도 포도주는 필수품이다. 포도주를 증류하면 증류주인 코냑 이 된다. 코냑은 알콜 도수가 보통 40도 이상 되기 때문에 아 주 조금씩 마신다. 혀에 코냑을 살짝 올려 향을 음미하며 목으 로 넘기는데 우리나라 소주처럼 들이키다가는 정신이상자 취 급을 받기 십상이다. 포도주 외에도 지방마다 특산주가 더러 있는데 유명한 것이 프랑스 서북부의 노르망디 지방의 사과주 다. 사과주를 ‘시드르’라고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의 사이다도 여기서 온 말일 것이다. 알콜 도수가 약한 술이지만 이 시드르 를 증류하면 알콜 도수가 매우 높은 ‘칼바도스’가 된다(칼바도스는 노르망디 지방의 한 도의 이름이다).

셋째 프랑스 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으로는 치즈(불어로는 ‘프로마주’라 고 한다)가 있는데 지방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구린 냄새가 지독 한 치즈도 있고 겉에 파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어 있는 치즈도 있다. 치즈는 요리에 넣기도 하지만 정찬에서는 주된 요리 후 에 여러 종류의 치즈를 생으로 먹는다. 치즈는 포도주의 안주 로도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보르도 포도주에는 노르 망디산 카망베르 치즈가 제격이다.

넷째 프랑스인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페 문화이 다. 프랑스인들은 시간이 나면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신 문이나 책을 읽거나 담소를 하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한다. 날씨가 좋으면 바깥 테이블은 만석이 된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보내기를 좋아하는 데서도 나타나지만 프랑스인 들은 중소도시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파리에서 사는 것도 일자리 때문이지 대도시인 파리가 좋아서가 아니라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전설과 『다빈치코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여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 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갈 때도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 고 가까이서 지켜 보았으며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도한 사람이 라고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 막달라 마리 아에 대한 오랜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는 그 오라비 나사로를 비롯하여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단의 제자들 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 근처의 해안에 도달하였다. 그녀는 그곳 주민들에게 예수를 전 파하여 개종시켰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르세유 근처의 한 동굴 에서 30년 동안 고행의 삶을 살다 죽었는데 그 유해가 생막시 맹 마을 교회에 있다고 한다. 1279년에 도미니크 수도회가 그 곳에 수도원을 짓다가 석관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이 석관을 사 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것으로 믿었다. 그로부터 십수년 후 그녀를 기리는 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의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 전설에 여러 가지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졌다. 막 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사랑하던 여인으로서 예수와 결혼해서 자 식을 낳았으며 아이를 데리고 프랑스 땅으로 왔다고 한다. 프랑 스 왕가의 혈통은 이 자손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이 그 대표적인 이야기다.


프랑스의 자부심 그랑제콜
프랑스 공교육제도는 중등학교 과정까지는 우리나라와 비슷 하다. 6세부터 들어가는 초등학교가 5년인 반면 중학교(콜레주) 는 4년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점이다. 고등학교(리쎄)는 우리 와 같은 3년이다. 그런데 고등교육 과정은 우리와 상당히 차이 가 난다. 대학은 일반대학과 ‘그랑제콜’(grandes ecoles)이라고 불리 는 특수대학으로 나뉜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그랑제콜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랑제콜은 프랑스 엘리트 배출 기관이 되어 있다. 프랑스혁명기에 만들어진 에콜 폴리테크닉 과 국립기술대학(CNAM)을 비롯하여 그랑제콜은 대부분 국가 에서 필요로 하는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학교들이며 문과계통 학교로는 역시 프랑스혁명 때 세워진 고등사범학교를 비롯한 몇몇 학교들이 있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는 장 폴 사르트르가 재수해서 들어간 학교로 프랑스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일반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보는 학력검증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면 되는데 합격자 비율은 80% 정 도이다. 바칼로레아 합격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원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학생들도 많 은 편이다. 반면 그랑제콜의 입학 정원은 보통 수백명에 불과 하고 입학생들에게는 국가에서 월급을 주고 공무원과 비슷한 대우를 해주기 때문에 입학경쟁이 치열하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면 바로 그랑제콜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고교 성적을 토대 로 선발하는 그랑제콜 예비반에 들어가야 한다. 그랑제콜 예비 반은 2년 과정인데 학습량이 엄청날 뿐 아니라 매주 시험을 치 르기 때문에 힘든 과정이다. 그랑제콜 예비반은 그랑제콜이 아 니라 고등학교 내에 설치되어 있다. 고등사범학교는 리용에 한 곳, 파리에 두 곳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앞에서 말한 파리의 울므 가에 위치한 고등사범학교이다. 고등사범학 교 학생은 공무원으로서 월급을 받는 대신 학교생활을 포함해 서 10년간 국가기관에서 복무할 의무가 주어진다. 국가에서 필 요로 하는 고급인재를 일반대학과 달리 그랑제콜을 통해 확보 하는 프랑스 교육제도가 엘리트 위주의 교육제도로서 민주주 의적 가치와 배치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  출처 월간개벽 2013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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