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12 칸트 (4)

황경선 연구위원

2022.08.11 | 조회 3385

  4. 경험에 앞서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렇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철학자가 구분하고 있는 또 다른 차이이다. “분석판단이 이뤄지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굳이 경험할 필요가 없다. 곧 모든 총각들을 상대로, 결혼했는지 여부를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총각은 언제나 미혼이다.”란 주장은 애초부터 타당하다. 때문에 칸트는 이 명제를 선험적先驗的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종합판단이 성립되려면 먼저 이 총각이 실제로 참한지 그렇지 않은지 경험해봐야 한다. 곧 우리는 이 젊은 남자에 대해 실제로 잘 알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총각은 참하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판단은 시간상으로 보면 경험 뒤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유형의 명제를 후험적後驗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차이는 칸트를 심각한 곤경 속에 빠트린다. 두 판단 사이의 차이는 결국 다음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절대적으로 확실한 판단에 이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인식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지 못한다. 다른 한편으론 우리는 인식을 확장시켜주는 판단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의 판단은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타당한 게 아니다. 절대적으로 엄밀한 인식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식은 충분할 만큼 엄밀하지 않다.

칸트는 이제 세 번째 유형의 판단 안에서 앞선 두 유형의 판단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은 제거하고 장점들은 하나로 모음으로써,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다주면서도 절대적으로 타당한 판단에서 철학적, 과학적 사유의 근거를 구하려고 한다. 이러한 판단은 종합적이면서 동시에 선험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물음이 순수이성비판을 주도한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가?”

그렇지만 칸트는 답을 제시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가 하나의 대상이나 사건을 지각할 때 시간과 공간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캐묻는다. 여기서 그는 인과법칙에 대한 흄의 설명만큼이나 건전한 인간 오성을 자극하는 한 결론에 이른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사물도, 사건도 아니라는 합당한 주장을 편다. 그것들은 또한 (냄새나 색과 같은) 사물들의 속성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은 흔히 일상적으로 믿고 있듯 외적 혹은 내적 현실성(실제성)도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인간의 인식구조에 속한다. 시간과 공간은 감성의 직관 형식들로서 우리가 사물의 현상들(물 자체가 아니라)을 지각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칸트 말대로 옮기면, 그것들은 지각을 위해 감성에 이미들어 있다. 이 형식들은 경험가능성의 영역에 적용되지만, 모든 개별적 경험에 앞서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그것들 안에서 체험한다.

칸트는 공간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들어 있는 한 직관형식이란 것을 무엇보다도 공간 없이는 어떤 대상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증명한다. 나무를 빼놓고서 잎이나 가지 또는 껍질들만을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공간에 퍼져 있음(연장성)을 떼놓고서 그것들을 생각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공간과 시간을-인과법칙처럼-사물과 사건들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또한 수학, 특히 기하학의 증명들을 들어 자기 이론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많은 자연과학자들로부터 반발을 산다.

왜냐하면 칸트는 앞서의 주장 외에 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관형식으로서 주어져 있는 공간 이외에 흔히 현실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공간이 있는지 증명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예컨대 물 자체가 공간 안에 있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에도 전문가들을 열띤 토론으로 이끄는 이 논쟁과 무관하게, 공간과 시간이 감성의 전 질료들, 곧 지각될 수 있는 세계가 그 안에서 나타나는 형식들이란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오성이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 그리고 촉각에 지각되는 인상들에 질서를 부여하지 못하면 그 직관된 것들은 맹목적으로그리고 무의미하게 남게 된다. 칸트는 이것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다시 말해 오성이 어떻게 해서 인상들을 우리가 이해하게끔 정리하는지 그의 이성비판중 가장 어려운 장에서 기술한다. 장의 제목은 초월론적 분석론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오성에는 12개의 범주들이 있다. 범주들, 곧 근본개념들은 맹목적인”, 당장은 무의미한 직관 질료들을 정리하여 밝게 드러나게 한다. 범주들 또는 사유의 근본형식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단일성, 다수성多數多, 전체성) 2. 성질(긍정, 부정, 제한) 3. 관계(실체, 인과성, 공통성/ 상호작용) 4. 양상(가능성, 실재성, 필연성).

우리는 어떤 직관을 많은[] 사람들이란 인식으로 수용하는데, 이는 순전히 오성 안에 다수성이란 범주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오성에 구비된 실재성”(현존, Dasein)의 도움으로 실재함실재하지 않음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과성이란 범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과성이란 근본형식이 오성 안에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는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유의 판단형식들은 범주들에 근거한다. 즉 범주로써 획득된 개념들을 논리학의 규칙들에 따라 판단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범주들의 수에 상응하여 12개의 판단형식들이 있다.

1. 개별판단: 칸트는 천재다.

2. 특수판단: 많은 사람들이 영리하다.

3. 보편판단: 모든 사람이 죽는다.

4. 긍정판단: 칸트는 이성적이다.

5. 부정판단: 칸트는 부유하지 않다.

6. 제한판단: 칸트가 어떤 사람이든, 그는 어리석지는 않다.(곧 우리의 판단을 칸트에 국한한다).

7. 무제약(실체)판단: 원은 둥글다.(원의 모양은 우연히둥글 수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실체적으로, 결코 달라지는 법 없이 둥글다.)

8. 제약(인과)판단: 태양 때문에 밝다.

9. 배타적 판단: 모든 원들은 하나의 공통성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사각형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이밖에도 공통성들에는 상호작용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간의 가족과 같은 공통성이 그렇다.

10. 가능판단: 비가 올지 모른다.

11. 현실판단: 비가 온다.(비가 그 시간/그 곳에 온다.)

12. 필연판단: 인간은 죽기 마련이다.

칸트는 범주에는 단지 위의 12개 범주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주장(판단)을 할 때마다, 이 범주들 가운데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란 직관형식이 그렇듯이, 인식능력 안에서 작용하면서 인식을 도대체 가능하게 하는 범주들이 인간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칸트는 말하자면 범주들의 적용을 조정하는 최고의 법정을 의식의 통일성또는 나는 사유한다.”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나는 사유를 수행하면서, 사유와 함께 내가 사유하는 자라고 사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유의 통일성은 단지 사유의 시간적 경과에서만 유지된다.

이론이 여기에 이르러 칸트는 이제 스코틀랜드 출신의 회의주의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흄이 인과법칙은 자연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고 주장할 때, 전적으로 옳다. 인과법칙은 (가장 중요한 범주로서) 오성 안에 있다.

다른 범주들과 함께 오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법칙은 단순히 경험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면서도 가능한 경험의 영역에 적용되는 종합적(결합적) 판단을 가능하게 해준다.

종합 판단의 한 전형적인 예는 인과성범주의 뜻이기도 한, 다음의 명제이다. 모든 변화들은 각기 원인을 가지고 있다. 자연법칙들의 기초명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히 경험에서 나온 게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변화들이 과연 다 원인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실제로 확인해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명제가 단순히 하나의 일반화가 아니라 어느 경우에도 들어맞는 보편타당한것이며 자연과학자들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연구를 진행한다고 확신한다. 왜 그럴까?

칸트는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경험이란 오성이 거칠고 맹목적인 감각들에 자기가 지닌 사유형식들을 집어넣음으로써 생긴다. 때문에 경험에서 오성의 사유형식들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일은 불가피하다.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면, 예를 들어 인간은 인과법칙을 해가 뜨는 사건에 집어넣고 나서, 해가 뜨는 사건은 인과법칙에 따라 진행된다는 인식을 얻는다. 그밖에 달리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칸트는 여기서 다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한다. 인과법칙은 물론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에게 나타나는바대로의 세계에 대해서만 그렇다는 것이지 물 자체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대해서도 인과법칙이 동일하게 필연적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인과법칙을 현상의 세계에 적용하는 한, 틀림없이 인과성을 경험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는 모든 사건들에 있어 마찬가지이다. 열과 녹는 버터의 사건이 그렇고, 해와 날 밝음의 사건이 그렇다.

이같은 사실을 밝힌 후 칸트는 그가 특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인간은 하늘과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의 법칙들을 규정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신하가 아니라 군주이다. 나아가 다소 들뜬 기분으로 한마디 더 덧붙인다. 인간이 자연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인간에게 맞춰야 한다. 우리는 자연에게 우리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지 묻는다.

칸트는 스스로를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한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때까지 여겨져 온 것처럼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기존의 세계관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어떤 과학자가 세계관을 바꿀 만한 획기적 발견을 했을 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칸트의 업적은 의심의 여지없이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에 견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의 발견은 사유의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연에는 법칙들이 존재하고, 그 법칙들은 인간의 사유법칙들과 동일하다는 종래의 생각이 명백히 그릇된 것임을 입증한다. 그것을 대신하여 철학자 칸트는 원칙적인 진리 내용에 관한 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설명을 내놓은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지위를 자연의 군주로 높이 끌어올리지만, 또한 그 만큼 이 군주에게 사유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엄격하게 밝힌다. 칸트는 이성비판3부에서 형이상학이란 유서 깊은 건축물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합당한 방식으로 해명한다.

오성이 직관의 질료들을 다듬어 경험으로 만들고, 종국에는 이성이 경험 질료들을 영혼, 세계, 신이란 세 가지 최고 이념들에 따라 정돈한다.

세 이념들은 범주들처럼 현상들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순수이성구조들로서 우리로 하여금 일정한 의미내용들에 따라 오성-인식들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칸트는 그래서 이 이념들을 규제원리들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영혼이란 이념은 의식 내의 모든 현상들을, 그 근거에 단일성(곧 영혼)이 있는 것처럼 정돈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혼은 칸트가 또한 라고 부르기도 하는, 일종의 논리적인 연결 중심이다. “”(영혼)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 사건들을 의식하게 한다. 그러나 이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식 바깥에 있다. 물론 를 밝게 드러나게 하면서 사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가 실제로 존재하기도 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어떤 증명도 하지 못한다.

세계의 경우도 같은 사정이다. 우리는 물 자체의 본래적 세계에 대해 그리고 세계 존재의 전체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우주, 즉 현상의 세계가 어떤 근거에서 존재하는지, 왜 무가 아닌지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주가 영원히 유지되는지, 아니면 다시 소멸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세계란 이념은 우주의 근거엔 단일성이 있는 것처럼, 세계 안의 현상들을 결합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마지막으로 의 이념이 있는데, 인간은 신이 실존하는지 증명할 수 없다. 칸트는 자신의 증명을 포함하여 신의 현존을 증명하고자 하는 모든 논증들을 허문다. 그렇지만 이란 이념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세계 안에서의 행위들을, 한 지적인 존재가 유의미하게 질서를 부여한 것처럼 사유하게 한다.

칸트는 초감각적인 세계의 실존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형이상학이란 신성하고 전통 있는 건축물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특별히 칸트의 이성을 괴롭히고 이성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의문들, 즉 신, 영원성, 영혼의 불가사성不可死性에 대한 물음들은 이론적으로는 대답되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한 가지 작은 위안이 있다면, “개념은 사유될 수는 있으며 어떤 논리적 모순(이를테면 결혼한 총각이란 개념처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신의 실존은 증명될 수 없지만 반대의 경우인 신의 부재 또한 마찬가지로 증명될 수 없다. 때문에 마르크스 이론이 내세우는 것처럼 스스로를 무신론이라고 말하고, 고집하는 학문 또한 있을 수 없다. 칸트가 입증한 것은 신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란 사실이었다.

단지 하나의 이론적 입장만이 비판적으로 온전한 것으로 남는다. 우리는 (완전성으로서의) “(불가사성으로서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통찰이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실천적, 따라서 윤리적 관점에서는 물론 신과 영혼이 있는 것처럼 살고 또 신과 영혼을 믿으며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이다.

1781년 마침내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돼 나온다. 그리고 전문적인 철학자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이 책은 마치 납처럼 무겁게 서가에 꽂힌 채 있다.

그래서 칸트는 부득이 이성비판을 간결하게 줄인 프롤레고메나를 쓸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 책은 2년 후 출간된다. 또 그의 동료인 요한 슐츠가 칸트 순수이성비판 해설이란 책을 쓴다.

이렇게 해서 이성비판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성비판은 학계의 중심에 들어선다. 철학, 문학 관련 잡지들이 긴 서평을 싣는다. 칸트 철학은 곧바로 대학으로 파고들고, 때로는 저항에 부딪치기도 한다. 사상가는 처음으로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갖게 된다. 나중에 이들은 스스로를 칸트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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