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한국사상의 원형과 특질 2

최영성(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2023.02.24 | 조회 4113

. ‘接化群生과 한국사상의 특성

 

난랑비서에서 가장 심오하면서도 중요한 내용은 접화군생일 것이다. 이 경지는 언설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천하를 살리는[活天下] 대경대법(大經大法)’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접화군생은 한국 상고대의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확대시킨 것이라고 본다. 광개토태왕비에서 선언한 이도여치(以道輿治)’는 도를 가지고 천하대지를 다스린다는 말이고, 고승 원효가 말한 요익중생(饒益衆生)’은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歸一心源) 모든 중생이 이익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말은 서로 다른 듯 하지만 정신과 사상은 하나로 연결된다. 광명이 곧 도요 도가 곧 광명이다. 밝은 빛은 정대광명(正大光明)의 도그것이라 하겠다.

최치원이 중생대신 군생이라 한 것은 우리 고유의 역사적 신앙체가 불교로 잘못 이해될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접화군생은 일차적으로 대인(對人)’, ‘대물(對物)’의 관계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다만 접화에서의 는 일방적인 변화가 아니고, 교접을 통해 상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주객미분(主客未分)의 넓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은 바람의 숨결이 스쳐야 꽃봉오리를 맺는 풍접화(風接花)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은 단순하게 접촉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의 교접에 비유하는 것이 원의(原義)에 가깝다고 본다. 접화란 남녀의 육체와 영혼이 하나로 만나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니, 접화에 담긴 핵심적 의미는 바로 생명과 변화다. 접화의 대상은 인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물론 동식물, 무기물, 우주만물까지 가까이 접하여 감화-교화-진화시켜 무명(無明)의 굴레를 풀어주고, 서로의 삶을 향상시켜 마침내 완성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적극적인 해석은 참고할 만하다.

 

접화군생홍익인간보다 그 뜻이 더욱 넓은 한국 고유의 어짊의 표현이요, 풍류도의 범생물적인 생생(生生)의 자혜(慈惠)를 의미하는 말이다. 초목군생이나 동물에까지도 덕화(德化)를 베풀어 생을 동락동열(同樂同悅)하도록 하는 것을 접화군생이라고 표현한 까닭이다.

 

접화군생의 핵심 명제는 생명’[]변화’[]. 중국 최고(最古)의 의서(醫書)󰡔소문(素問)󰡕생생화화(生生化化)’란 말이 나온다. 낳고 또 낳아 생성이 어어지는 과정에서 변화 또한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성이 곧 변화요 변화가 생성이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 생성으로 원초적 변화가 이루어지지만 생성을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해의 농사는 열매를 수확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 열매 속에는 새 출발의 씨가 들어 있다. 작은 하나 속에 일체를 함축하는 씨알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생()()()()으로 형태를 바꾸어 가며 변화를 지속한다는 것이 동양 생명사상의 골자다. 최치원은 신라를 예찬하면서, 신라는 동방으로 인()을 실천하는 나라라고 하였다. 이어 낳고 변화하며 낳고 변화하는 것이 진(: 동방)을 터전으로 한다”(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고 하면서 생화생화(生化生化)’란 말을 사용한 바 있다.

에는 탄생’[出生]살림’[生之]의 의미가 들어 있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에서 동방을 동방(動方)’이라 하였다. 만물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방위[萬物始生之方]라는 의미다. 그는 또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어진 마음과 호생지덕(好生之德)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대지의 정기가 만물을 낳아 살리는 데 합치된다”(精合發生)고까지 말하였다. 최치원이 생각하는 한국사상의 두드러진 특질은 생명사상인 듯하다.

다음 ()’에 대해 논하기로 한다. 우리 고유사상의 단초를 여는 단군 역사에서는 세상을 천리(天理)대로 변화시키는 재세이화를 말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기(檀君紀)’를 보면 자가 7번이나 나온다. 󰡔천부경󰡕에서는 무궤화삼(無匱化三)’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서두에서 은은상고지화’(隱隱上古之化)라고 하여 접화군생의 가 상고대의 전통을 이은 것임을 시사하였다. 진흥왕순수비에서도 순풍(純風)’과 함께 현화(玄化)’를 말하였다. ‘접화군생넉 자의 함의(含意)와 역사성이 간단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 민족종교에서는 이 의 전통을 잘 포착하였다. 대종교 경전의 하나인 󰡔회삼경(會三經)󰡕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조화(造化: 철학과 종교)와 교화(敎化: 교육)와 치화(治化: 정치)를 제시하였다. ‘는 가깝게는 감화’, ‘교화로부터 멀리는 신화(神化)’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가 넓고 포괄적이지만 결국 변화라는 한 단어로 귀착한다. ‘는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인()과 물()이 변하는 것이다. 이점에 착안하여 풍류를 변화의 원리로 규정한 학자도 있다. 물론 소극적인 것이냐 적극적인 것이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의 문제다. 접화군생의 실체를 밝히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완전한 인간은 이성과 감성, 나아가 영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동서고금이 다를 리 없다. 다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중시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풍류는 합리성정감성영명성(靈明性)의 복합체다. 접화군생은 이 세 요소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풍류의 도를 국교로 삼아 국민정신의 함양에 힘썼던 화랑의 실천 강령을 살펴보자. 신라 화랑들은 도의로써 상호 연마하고(相磨以道義),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기며(相悅以歌樂),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되 아무리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遊娛山水, 無遠不至)고 한다. 이 이성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는 감성 또는 정감에 관계되는 것이다. 의 이유는 복합적이다. 선경(仙境)을 찾아 삶의 여유를 갖기 위함일 수 있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기 위함일 수도 있으며, 명산대천의 영기(靈氣)를 받아 대자연과 교감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국토 순례를 통해 애국심과 국토애를 고취하자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만 화랑도가 종교적 수련단체임을 감안할 때 기도와 주술 등 종교적 행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의 이유를 영지(靈地) 순례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 판단한다. 이것은 재래의 고산신앙(高山信仰)과도 관련이 있다. 화랑의 낭도들이 유람한 곳에 선유(仙遊)나 강선(降仙)의 설화가 생겨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고대의 종교에서는 영가무도(詠歌舞蹈)와 산악 순례가 필수적이었다.

화랑도의 전인적 교육 방법, 수양 방법이 이와 같았으므로,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은 물론 천지와 귀신까지 감동케 한 향가(鄕歌)의 작가와 불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오른 승려들이 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 특히 의 수양 방법은 예술 방면, 종교 방면에서 우뚝한 자취를 남기게 하였고, 화랑도가 풍월도 또는 풍류도라는 별칭을 얻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화랑의 고사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면이 신비성또는 영명성의 측면이다. 진평왕 때 향가 한 수로 왜구가 물러가도록 한 융천사(融天師)의 사례를 비롯하여 그 예가 많다. 해가 둘이 나타나서 열흘 동안 함께 비치는 괴이현상을 도솔가(兜率歌)로 해소한 월명사(月明師), 귀신을 부려서 다리를 놓았다는 비형랑(鼻荊郞), 노래와 춤으로 열병(熱病)의 신을 쫓아낸 처용랑(處容郞), 호국신의 계시를 따라 적국의 정탐꾼인 백석(白石)을 체포한 김유신(金庾信)의 사례가 바로 화랑의 고사이거나 화랑과 관련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화랑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에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 배경에 한국사상이 지닌 영명성의 측면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성감성영성을 각각 ’[]’[]’[]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길이란 나아가는 방향이요, 힘이란 어떤 일을 해내는 에너지요, 빛이란 어둠을 깨뜨리는 광명이다. 길이 있어도 힘이 없으면 나가지 못하고, 길과 힘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제 길로 나아가기 어렵다. 이 세 가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또 진()()()의 세 영역에 나누어 배치할 수도 있음직하다. 이성이 으로서 윤리와 철학 쪽으로 연결된다면, 감성은 로서 문학과 예술 쪽으로, 영성은 으로서 신앙과 종교 쪽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세 영역을 포괄하여 현실에서 기능하는 것이 풍류라는 점에서 현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 사상의 주류는 유교사상이다. 유교사상은 합리적 성격이 강하다. “공자는 괴(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논어󰡕의 한 구절이 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유자(儒者)들의 지나친 합리주의적 태도에 대해, 고려 중기의 문호(文豪)인 이규보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어 회의(懷疑)를 표시하고,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신비적 요소를 지닌 고유사상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동명왕편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신비하고 이적(異蹟)이 있는 나라로서 그 창업이 신묘하다고 하면서 성인지도(聖人之都)’라고까지 하였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 역시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삼국유사󰡕기이편(紀異篇)’을 특별히 배설하였다.

 

옛 성인이 바야흐로 예()와 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과 의()로 교화를 펼치심에 괴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는, 제왕이 되라는 하늘의 명을 받고 예언서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일이 있는 법이다. (기이편서문)

 

이규보나 일연은 한국사상사에서 우뚝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한국사상의 신비적 성격, 나아가 영성적 측면을 문제 삼았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접화군생에서의 의 방법이 이성감성영성 세 가지임은 풍류의 바람의 철학으로도 논증할 수 있다. ‘풍류바람과 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바람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원의(原義)에 가까울 듯하다. 바람은 먼저 이성적 측면에서의 해석이 가능하다. 󰡔논어󰡕에서,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드러눕게 되어 있다라고 한 말이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지도자의 덕을 바람에 비유하여, 지도자가 풍교(風敎)로써 백성을 이끌어 그들이 감화되고 교화됨을 말한 것이다. 바람에는 사물을 변화시키는 생동력생명력이 있다. ‘자가 결합되어 풍화(風化)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풍화는 감화와 교화, 나아가 변화를 중시하는 유가에서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다.

바람은 기운이요 기분이다. 바람이 감성적 또는 정감적 측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임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고대부터 재래로 시가(詩歌)나 음악연극 등을 통해서 인심을 고무(鼓舞)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시행하여 왔다. 우리 고유사상인 풍류는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대중을 감화하고 교화하는 데에는 풍류만한 것이 없다. 풍류라는 말에 큰 어울림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 있다. ‘예삼천(禮三千)보다 하나의 풍류가 낫다는 말은 이를 대변한다. 음악의 궁극적 목적은 ()’에 있다. 어울림이 음악의 기본 정신이다. 이것은 유교에서도 강조하는 바다.

바람은 영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만들어낸 흔적은 있다. 영성이란 그런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적인 것은 말로 된 교리와 함께 자연이나 인간에게 참다운 생명을 불어 넣는 구실을 한다. 생명을 불어 넣어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바람이다. 풍류는 인간에게 고유한 영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갈고 닦으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최치원은 영성과 관련하여 바람의 철학을 전개한 바 있다.

 

빛이 왕성하고도 꽉 차서 온 누리를 비출 바탕이 있는 것으로는 새벽해보다 고른 것이 없다. 기가 온화하고 무르녹아 만물을 기르는 데 공이 있는 것으로는 봄바람보다 넓은 것이 없다. 생각건대 큰 바람과 아침해는 모두 동방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이 이 두 가지 여경(餘慶)(한 곳에) 모으고, 산악이 영성(靈性) 높은 분을 내려 보내, 그로 하여금 군자국(君子國신라)에 빼어나 불가에 우뚝 서도록 하였으니, 우리 대사께서 바로 그 분이시다.

 

이것은 동방사상의 원천이 밝음(광명)과 열력(熱力)을 상징하는 ’, 그리고 생명을 상징하는 바람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우리 민족의 밝사상’, 즉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사상과 통한다고 하겠다. 비문의 주인공인 대낭혜화상 무염국사(無染國師: 800888)영성 높은 분이라 한 것이 돋보인다.

 

새벽 해가 우니(嵎尼: 동방)에서 떠오름에, 광명이 만상(萬像)에 다 통하고, 봄바람이 진위(震位: 동방)에서 나옴에 기운이 팔방의 끝까지 흡족하다. 마침내 천하의 어둠을 깨뜨리고 지상(地上)의 열매를 맺게 하고야 만다.

 

이는 마테복음 제21(3346)에 나오는 열매 맺는 백성을 연상하게 한다. 동방에 열매 맺는 백성들이 있을 것이요, 그 열매는 해와 바람이 맺게 해준다는 것이다. 해와 바람이 동방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에서 최치원의 동방사상, 동인의식(東人意識)을 읽을 수 있다.

바람은 한국 고유신앙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풍백(風伯)이란 신격(神格)을 들 수 있다. 바람은 대개 동서양의 차이를 떠나 기식(氣息), 생명, 영혼을 의미한다. 또 신격으로서의 바람은 전령신(傳令神), 즉 신의 사자(使者) 구실을 한다. 우리 말에 바람잡이가 있다. 신과의 교접에 필요한 사람이 바람잡이다. 본디 나쁜 의미의 말은 아니었다.

필자는 자에 담긴 의미에 주목한다. ‘은 단순한 교접이나 만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접신(接神)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접신이란 사람에게 신이 내려서 영혼이 서로 통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하늘의 신령한 기운을 접한다는 의미로 풀어낼 수도 있다. 접신의 경지에 이르고, 그 경지가 고조되면 영가(詠歌)를 하고 무도(舞蹈)를 한다. 이런 영기(靈氣)가 주어지고 통할 때 완전히 다른 사람, 다른 사물이 된다. ‘로 표현할 수 있는 정감성과 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명성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자는 이처럼 한국사상의 특성을 함축한다.

접화군생은 풍류도의 궁극의 목표다. 우리 역사상 접화군생을 잘 구현한 인물은 아마도 원효(元曉)일 것이다. 원효의 출자(出自)는 자세하지 않다. 대개 화랑 출신의 승려로 전한다. 그는 상구보리의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하화중생에 남달리 힘쓴 고승이었다. 그에게는 하화중생접화군생이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만인이 좋아하는 무곡(舞曲)의 속에 불교를 넣고, 만인이 즐겨하는 가사(歌詞) 위에 불교를 얹어, 산촌(山村)수곽(水廓)주사(酒肆)창루(娼樓) 할 것 없이 차가차무(且歌且舞)로 수기유행(隨機遊行)하는 중에, 언제 어떻게인지 모르게 만인이 불교에 들어와 있었고, 불교가 일세에 덮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방언(方言)과 이언(俚諺)으로써 불교를 풀어서, 무식한 사람에게 비로소 불교를 주었으며, ……

그는 불교가 어떻게 인간적이요, 실생활에 즉한 것이요, 일인(一人)이라도 등질 수 없고 일시라도 떠날 수 없는 소이(所以)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자기의 종교를 다만 불교라고 일컫지 아니하고, 그것이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라고 말하였다.

 

원효불기(元曉不羈)’의 설화는 풍류 실천가로서의 원효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가 실천했던 유심안락도는 접화군생의 풍류와 다름 없다고 본다.

 

. 근대 민족종교에서 본 한국사상

 

1. 고유사상과 신앙의 전승

 

풍류의 정신적, 사상적, 신앙적 전통은 단군으로부터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 백제에도 이런 전통이 이어졌을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이를 증명한다고 본다. 이 향로는 삼교합일, 접화군생의 종합모형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풍류도는 화랑이라는 제도와 조직을 통해 세력을 키웠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 기여한 바 컸다. 통일 이후에도 화랑의 전통은 이어졌으니, 화랑 출신 임금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난랑(鸞郞)’으로 일컬어지는 경문왕이 화랑 출신이다. ‘은 임금의 상징이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는 조직이 이완되었을 뿐만 아니라 낭도(郎徒)들 역시 방종으로 흘렀다. ‘사상적 체계화와는 거리가 멀어져만 갔다. 당나라의 문화가 수입되어 상류층에서 크게 유행하고 불교가 사상계종교계를 압도하여 고유사상의 전통은 크게 흔들렸다. 우리나라를 동방의 철학과 종교의 묘상국(苗床國)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겨우 남은 것은 정감적 측면의 풍류요, 주술(呪術) 등 무속(巫俗)의 일면이었으니 풍류 본래의 면목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지적일 듯하다. 최남선은 풍류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두고 우리 민족이 지나칠 정도로 현실 위주의 낙천적 생활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즉 현실을 중시하다보니 선진 외래사상을 추수(追隨)함으로써 제 것을 지키고 가꾸는 데 소홀하였다는 것이다. ‘현실과의 타협이 한국사상을 지키고 체계화하는 데 지장이 되었다는 것은 새겨봄직한 지적이다. 그러나 단군사상에서부터 볼 수 있는 현세중심의 경향이 세속주의를 의미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고려시대는 외래사상이 고유사상을 압도하는 중에도 고유사상, 원시신앙의 소생을 위해 번민하였다. 재래의 선풍(仙風)을 계승한 팔관회(八關會) 행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 육성하였는데, 의종 22(1168)에는 왕이 교서를 발표하여 숭중불사(崇重佛事)’를 말함과 아울러 준상선풍(遵尙仙風)’을 명령한 바 있었다. 산악 숭배사상의 연장선에 있는 풍수지리사상이 일세를 성행하였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사상적, 신앙적으로 체계화하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조선에 들어서는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태종조에는 신서(神書)들이 금훼(禁燬)의 재액을 입었다. 이 때 적지 않은 비서(祕書)들이 없어지거나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으로 조선을 지배하였던 성리학은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을 이법(理法)으로 해석함으로써 유교의 종교성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사천사상(事天思想), 시천사상(侍天思想)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결과적으로 성리학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성을 중시하는 정도가 지나쳐서 한국사상의 세 축 가운데 감성영성의 측면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경향이 많았다.

17세기 이래로 성리학의 사변화(思辨化) 경향이 짙어지고 불교가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변질되자 민중은 새로운 신앙에 목말라 하였다. 뒤미쳐 서학(西學)이 유입되었지만 재래의 신앙 체계와는 달라 교세의 확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우리의 고유신앙, 원시종교에 대한 민중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널리 퍼졌던 남조선사상(南朝鮮思想), 즉 조선의 남부에 유토피아적 미래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민간신앙이 크게 기여하였다. 재야 지식인 사회에서 문약(文弱),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진 유가적 체질을 바꾸기 위해 선도(仙道)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늘어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근대 민족종교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등장하였다. 국권 피탈기에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정책적 시도에 맞서 국성(國性)을 지키려 했던 데서 빛을 한껏 발하였다.

 

2. 근대 민족종교와 고유사상

 

근대 민족종교는 동학(東學)을 중심으로, 대종교(大倧敎)증산교(甑山敎)원불교(圓佛敎)가 있다. 이밖에 종교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민족종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김항(金恒)의 정역(正易)-‘한국의 주역’-사상까지 포함해서 말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자 을 표방하였다. 그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닌 정감적 실천종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들 종교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종교적 성격 등 여러 면에서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다만 큰 공통점이 있다. , 근본적으로 단군신앙, 단군사상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 근원이 고유신앙, 고유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 삼교합일의 대통합사상을 제시하였다는 점 등을 먼저 꼽을 수 있다. 특히 고유사상이 지닌 정감성과 신비성-종교성을 되찾고, 전통적 정신의 부활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고유사상의 종교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풍류도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풍류가 자연발생적인 역사적 신앙체라면 이들 종교는 교조(敎祖)의 개인적 증오(證悟)를 거쳐 체계화, 조직화하였고, 또 이들 종교가 개벽사상(開闢思想)을 통해 전대와 구별되는 체계적인, 조직적인 모습과 미래상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고유 신앙체와의 차별성을 말할 수 있다.

근대종교에서 한국사상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성과 영명성, 그리고 정감성을 되찾았다는 것은 강조할 만한 점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우리 민족에 대해 북치고 춤추며 신명을 다하는 고무진신(鼓舞盡神)’의 민족이라 하였다. 우리 민족의 힘의 원천은 신명이요 신바람이다. 민족종교의 하나인 남학(南學), 그리고 일부 김항이 영가와 무도를 수련의 한 축으로 하면서, 궁리진성(窮理盡性)은 물론 그 상대 편에 있는 고무진신(鼓舞盡神)의 측면까지 아울러 중시했던 것은 한국사상에 담긴 신비성정감성을 종교적예술적으로 승화시키려 한 것이라고 본다.

민족종교는 고유사상에 들어 있는 신인상화(神人相和)’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신인상화는 신이 인간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더불어 존재하는 조화사상이다. 이 때의 신은 대체로 인격신(人格神)이다.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되는 현인신(現人身)’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또 하늘을 말하고 신을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말하기 위한 전제요 포석이다. 신 역시 초월적 신보다 내재적 신을 중시하였다. 내 속에서 천성(天性)을 찾고 불성(佛性)을 찾고 신성(神性)을 찾는 것이 한국사상의 본령이다. 대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는 자기의 본성 속에서 그 분의 아들 됨을 구하라! 신성(神聖)께서는 너의 뇌 속에 내려와 계신다”(自性求子, 降在爾腦)라고 하였다. 모든 인간의 머릿속 깊은 곳에 하느님이 내려와 계신다는 이 일신강충(一神降衷)’ 사상은 동양적 종교사상의 결정판이라 하겠다.

진리를 초월적인 데서 찾지 않는 것이 동양 사상의 공통점이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心奧]에 하늘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용󰡕에 이른바 본성을 따르는 것, 이를 일러 도라고 한다’(率性之謂道)고 한 데서 인간주체가 곧 진리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선유들이 내 속의 하늘’(吾中之空洞)이라든지 본성 속의 하늘’(性中天)을 말한 것은 이런 인식의 표출이다. 도의 본원인 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된 보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 도가 곧 만인의 도요, 만인의 도가 곧 의 도이다. 처음부터 피차의 간격이 없고 구별이 없다. 최치원이 진감선사비(眞鑒禪師碑)첫머리에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출신국에 따른 차이가 없다”(道不遠人, 人無異國)고 선언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아니 진리의 보편성 앞에서 동서고금이 있을 수 없다. 인종국적종교 등에 따른 차이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대학󰡕에서 명덕을 천하에 밝힌다’(明明德於天下)고 한 것은 세계의 인류가 천부의 본성으로 돌아가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오늘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정신적 차원의 세계화인 것이다. 초월적 피안이 아닌, 인간의 내면적 본질에서 진리를 찾고,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이런 외침이 우리 고유사상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애초부터 없었다. 한결같이 재래의 유선 삼교를 통합하거나 회통하려는 정신을 보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一夫) 김항(金恒: 18261898)무위시(无位詩)가 주목된다.

 

道乃分三理自然 도가 셋으로 나뉨은 이치상 자연스러운 것

斯儒斯佛又斯仙 이에서 유교가 나오고 불교가 나오며 또 선도가 나오는 것을.

誰識一夫眞蹈此 일부가 이 도를 진실 되게 행하는 것을 뉘라서 알랴

无人則守有人傳 사람이 없거든 내가 지킬 것이요 있거든 전해주리라.

 

이것은 근세 민족종교의 사상적정신적 맥락을 대변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김항은 천지는 일월이 없으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至人: 완성된 인간)이 없으면 빈 그림자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역학(易學)이 인간주체에 근원을 두고 인극(人極)을 추구해온 점을 설파한 것이라 하겠다. 인간주체가 곧 진리라는 사상은 동학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고 말하는 데 이르게 된다. ‘인간학적 자각의 절정이라고 하겠다. 인간을 근본으로 하고 인간을 중시하는 것은 동양사상의 근본이자 한국사상의 일관된 맥락이다. 여기서 한국사상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근대 민족종교에서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기초하여, 인존문화(人尊文化)가 활짝 열릴 후천세계를 제시하였다.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인존사상은 후천개벽사상의 근간이다.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사상을 제시하였고, 원불교에서는 도처의 인간과 만물이 곧 부처라는 처처불상(處處佛像)’의 이상을 제시하였으며, 증산교에서는 사람이 신을 부리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말하였다. 천존의 시대는 가고 인존의 시대가 온다는 것은 인간을 중시하는 전통사상을 계승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다만 사상 차원에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민족종교에서는 후천개벽의 시대는 계절로 쳐서 가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지운행의 도수(度數)가 증명한다는 것이다. 가을인 후천세계는 성장을 의미하는 여름과는 다르다. 패러다임도 성장에서 성숙으로 바뀐다. 미래세계는 종래 하늘이나 땅이 할 일을 인간이 대신한다. 과학의 발전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존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인존시대에는 종교와 과학의 인간화가 이루어진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우주관 속에서도 신인(神人)이 합일하는 세상이 된다.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 즉 내 속에서 천주를 찾아 인간세계의 조화를 정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민족종교는 생명사상의 측면에서도 고유사상을 잘 계승하였다. 동학에서는 경천(敬天)으로부터 시작하여 경물(敬物)의 단계까지 가야 천지인합덕(天地人合德)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접물(接物)은 우리 도의 거룩한 교화이니 제군은 일초일목(一草一木)이라도 무고히 이를 해치 마라. 도 닦는 차제(次第)가 천()을 경()할 것이오 인()을 경()할 것이오 물()을 경()할 것에 있나니 사람이 혹 을 경할 줄은 알되 을 경할 줄은 알지 못하며 을 경할 줄은 알되 을 경할 줄은 알지 못하나니 을 경치 못하는 자 을 경한다 함이 아직 도에 달하지 못한 것이니라.

 

사람이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극치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물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덕에 합일될 수 있나니라.

 

이밖에 증산교원불교에서는 생명사상에서 나아가 인간을 자연의 한 산물로 인식하는 차원에까지 접근하였다.

 

우리가 만일 천지에 배은(背恩)을 한다면 곧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고 자연의 산물이라는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의 생태주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통한다고 하겠다.

이밖에 묘합(妙合)의 사유구조, 논리구조를 계승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학계 일각에서는 민족 고유사상을 사상이라 일컫는다. ‘사상 연구자들은 1970년대부터 한국사상의 원형과 원류에 대해 탐구하면서 사상 또는 철학으로 구체화하였다. 여기서 은 다름 아닌 신묘한 합일이다. 둘 이상의 존재가 서로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일체화하기 때문에 묘합이요, 또 하나(1)에다 그 이상의 얼마(α)를 더하더라도 하나일 수 있으므로 묘합인 것이다.

의 기능은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대조화의 기능이야말로 우주 생성의 근원이요 생명의 원동력이다. 사상은 우리 민족사상의 대주류로서 연면하게 이어져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근대 민족종교로 승화하여 꽃을 피웠으니, 인내천과 천인합일의 천도교(東學), 신인합일(神人合一)의 대종교, 원융무애한 일원상(一圓相)으로 대표되는 원불교 등이 사상의 맥락을 이어받은 것이다.

묘합의 원리는 난랑비서에 이른바 포함삼교넉 자를 통해 분명히 제시되었다. 이을호(李乙浩: 19101998)사상의 원천이 단군설화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고, 단군과 단군사상을 한민족의 마음의 고향이요 정신적 지주라고 하였다. 이어 화랑도의 영육쌍전(靈肉雙全)의 정신, 원효의 원융화쟁(圓融和諍)의 논리, 불교의 선교일치(禪敎一致), 율곡 이이의 리기이원적 일원론, 다산 정약용의 신형묘합론(神形妙合論) 등으로 그 맥락이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사상 속에 들어 있는 묘합의 원리는 이원론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 맺음말

 

우리 역사상의 신앙체였던 풍류는 단군을 기점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 때에 이르러 화랑이라는 조직체를 통해 그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이후 불교와 유교가 이 땅에서 성행함에 따라 세력이 시들해졌다. 명맥을 겨우 유지해오다가 19세기 후반 이래로 근대 민족종교에 의해 중광(重光)을 보았다. 민족신앙의 중광을 선언한 민족종교는 오랜 전승을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한국사상의 원형과 특질은 민족종교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문헌적 뒷받침이 풍부하지 못하고, 알려진 문헌마저도 위서(僞書) 시비가 있는 현실에서는 그 방법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한국사상의 밑바탕에는 합리성과 정감성과 영명성이 깔려 있다. 한국사상의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여기서 우러난 것이다. 성리학이 국교(國敎)의 지위에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합리주의와 엄숙주의가 일세를 지배하여 정감적, 영성적 측면이 크게 위축되었다. 정감을 억제나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성리학적 풍토에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역동성이 떨어졌다. 또한 유교의 근간이 예와 악임에도 의 전통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급이 낮은 음주가무의 문화만 남았다. 상류층을 지배하는 것은 중심의 문화였다. 󰡔예기󰡕 「악기(樂記)편에서 악이 승하면 방탕에 빠지고 예가 승하면 분열하게 된다”(樂勝則流, 禮勝則離)고 한 말을 실증이라도 하듯 당쟁으로 인한 분열상이 연출되었다. 섬김과 모심의 대상인 하늘은 이법천(理法天)’으로 인식되었고, ‘을 중심에 둔 한국사상의 종교성은 제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민중은 정신적 위안을 얻을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민족종교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교조(敎祖)의 인격이나 교지(敎旨)의 오묘(奧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 고래로 민중의 심오(深奧)에 침잠(浸潛)한 조선 민족의 전통적 정신에 반응을 일으킨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종교의 등장은 고유사상, 고유신앙의 결실이라는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한국의 사상은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국의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라도 한국적 풍토에서 초탈하기는 어렵다. 한 예로 한국사상에서 중요한 묘합의 논리를 보자. 서로 다른 두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묘합의 정신은 단군 역사 등에 보이는 신인상화신성(神性)과 물성(物性)의 인간주체적 융합’, 신라인들의 이른바 영육쌍전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묘합은 상화쌍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는 이론의 수립과 파괴에서 걸림이 없는 입파묘합(立破妙合)’을 부르짖었고, 조선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율곡 이이는 두 세계가 묘처(妙處)에서 만나는 리기지묘(理氣之妙)’를 철학적 화두로 내세웠다. 근세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은 인간을 설명하면서 무형의 ()’과 유형의 ()’이 묘합한 통일체로서의 신형묘합(神形妙合)’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한국사상을 대표하는 거봉(巨峯)들의 사상이 묘합적 사유구조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사상의 특성은 퇴계 이황의 철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퇴계성리학에서는 종교성이 강하게 풍긴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중시했던 를 우주의 원리로만 해석하지 않았다. 상제(上帝)를 중요 개념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인격적 상제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황의 학문과 철학을 대표하는 ()’ 사상 역시 대월상제(對越上帝), 즉 종교적 차원에서 하늘과 인간이 교감하기 위한 방법론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원시유학의 관념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고, 한국사상의 전통이라는 배경 속에서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다.

한국의 역대 사상가들은 저마다의 철학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려 하였다. 이성의 힘에 의해 도덕적 이상세계의 구현을 희구한 경우가 있고, 감정의 정화를 통해 또는 정화된 인간의 감정을 최고조로 승화시켜 도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예도 있다. 전자를 이화(理化)의 추구라 할 수 있다면, 후자는 기화(氣化)의 추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신이나 하늘의 뜻을 인간 세계에 펼쳐 변화를 추구하고, 속된 세상을 신령한 세상으로 끌어 올리려고 힘쓴 경우도 있다. 이것은 신화(神化)의 추구이자 영화(靈化)의 추구라고 할 수 있겠다. 신화(영화)는 리화나 기화의 가운데 있다. 리화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이 신화 쪽에 접근할 수 있다면, 영화를 대표하는 최제우는 기화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의 성리학은 존리(尊理)’ 철학에, 최제우의 동학은 지기(至氣)’의 철학에 바탕을 두었다. 영화는 어느 쪽으로도 연결이 가능하다고 본다.

접화군생을 표방하는 풍류는 리화기화신화의 세 축을 모두 포함한다. 영역의 다름을 넘어서 묘합을 추구하였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변화의 원리로 구실을 해왔음은 사상사에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풍류는 과거 완료형의 사상이 아니다. 다원화 시대에 변화와 통합의 원리로서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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