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한국사상의 원형과 특질 1

최영성(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2023.02.24 | 조회 3904

2021년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 


한국사상의 원형과 특질

-풍류사상, 민족종교와 관련하여-

 

최영성(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강연요지

이 글은 철학적차원에서 한국사상의 원형을 탐색하고 그 특질을 뽑아 유형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한국 고대 역사상의 신앙체(信仰體)였던 풍류도(風流道)는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라 때에 이르러 화랑(花郞)이라는 조직체를 통해 그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불교와 유교가 이 땅에서 성행함에 따라 세력이 시들해졌다가 19세기 후반 이래 근대 민족종교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 글에서 근대 민족종교에서 이해하는 한국 고유사상의 실체를 중요하게 인식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한국 근대의 민족종교는 대개 단군사상에 귀결된다. 민족 고유사상을 뿌리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단군신앙-단군사상은 한국사상의 고향이다. 한국사상의 밑바탕에는 합리성과 정감성과 영험성(靈驗性: 신비성)이 깔려 있다. 한국사상의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여기서 우러난 것이다.

. 머리말

 

한국사상의 원형이나 정체성에 대해 선학(先學)들은 국수(國粹)’라 표현하였다. 국수를 찾는 일은 한국의 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중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를 한 현대의 학자로 고 류승국(柳承國: 19232011) 교수가 있다. 그는 한국사상의 원형 및 고대 사상 형성의 연원을 탐구하는 데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갑골학 자료를 주요 근거로 한 한국 고대사상 연구는 학문의 과학성과 역사의식의 측면에서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 가운데 삼국시대의 사상, 즉 유교불교도교 및 민속신앙 등을 각 영역에서 연구하는 경우는 적지 않지만, 한국사상의 원형에 대해 전공하는 학자는 매우 드물다. 연구 수준은 대개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최남선(崔南善: 18901957) 등의 단군 연구에서 크게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문헌적 뒷받침이 어렵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조선의 고문화 연구는 초문헌적(超文獻的)이라야 한다는 주장이 당당하게 나왔지만, 오늘날엔 문헌과 실증을 중시하는 학계의 분위기에 눌려 연구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게다가 설화민속언어역사지리고고(考古)사상종교 등 섭렵해야 할 분야가 많다보니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식견 있는 학자가 배출되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일 수 있다.

국권피탈기에 우리의 선학들은 고대사 연구에 연구 역량을 집중하였다. 학문에 애국심이 결부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열악한 연구 여건 속에서 수준 높은 성과를 이끌어냈다. 특히 정신과 사상의 면에서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이 글에서는 한국사상의 원형에 대해 철학적 차원에서 접근하려 한다. 이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사상의 특질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방법적으로는, 우선 최치원이 증언한 국유현묘지도왈풍류(國有玄妙之道曰風流)’를 화두로 고유사상에 소급하려 한다. 고유사상은 단군사상(檀君思想)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단군신앙-단군사상은 한국사상의 원두처(源頭處). 원고의 분량상 단군사상을 정면에서 논하는 것은 별고를 기약한다.

한국 근대의 민족종교는 대개 단군사상에 귀결된다. 민족 고유사상을 뿌리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단군교인 대종교(大倧敎)에서 중광(重光)’이라 함은 종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낱 같이 이어져오던 단군사상, 즉 고유사상을 다시 일으켜 빛을 보도록 한다는 의미다. 동학에서 말하는 다시개벽은 역사 속에 잠자고 있던 우리의 고대 문화와 사상을 되살린다는 의미다. 근대 민족종교가 우리의 고유사상으로 복귀한 것은 시조리(始條理)에 대한 종조리(終條理)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이들 종교의 교전(敎典)에서는 단군사상으로 귀결되는 한국 고유사상에 대해 요약적으로 정리해놓았다. 이들 교전은 오랜 전승을 통해 내려온 사상적 결정체를 집약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실증적인 테두리 안에서 수용할 가치가 있다.

요컨대, 최치원이 증언한 풍류도의 실체에 대한 해부 및 근대 민족종교에서 파악한 한국 고유사상의 원형과 특질, 이 두 축으로 논의를 전개할까 한다.

 

. 한국사상의 연원 및 檀君學

 

한국사상의 연원을 논할 때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 고유사상문제다. 고유사상을 고찰함에 상고대 신화, 제천의식(祭天意識), 무속신앙, 고분벽화 등이 주요 자료로 이용된다. 이 가운데 단군의 역사와 신앙을 통해 한국의 고유사상을 탐색하는 학자가 많다. 단군의 역사에는 우리 민족의 우주관인생관가치관역사관 등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최남선의 단군 연구는 이 분야에 이정표를 놓은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문화사학적(文化史學的) 관점에서 접근한 그의 연구는 문헌학문화인류학민속학언어학종교학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범위가 매우 넓다. 그의 업적 가운데 단군론(壇君論)은 연구의 정점을 찍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후학들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라 하겠다.

단군 연구는 역사학철학고고학종교학민속학 등 다방면에서 그 성과가 적지 않다. 근자에는 단군학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연구가 활발하다. 단군학에 관계된 학회 또는 단체로 고조선연구회, 단군사상선양회, 고조선단군학회 등이 있다. 이들 단체에서 나오는 연구 성과가 적지 않다. 자료적 뒷받침이라든지 객관성 확보의 측면에서 진일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학, 고고학의 측면에서 단군 연구의 성과는 많지만 단군의 사실(史實) 속에 담긴 사상적 본질에 주목한 연구는 많지 않다. 대개 신화적 분석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단군연구는 과학성에다 이념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철학 전공자의 연구 성과가 드문 현실이 아쉽다.

단군신앙의 기원과 전승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김성환(金成煥)의 지속적인 연구가 돋보인다. 그는 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여 󰡔고려시대 단군인식 연구󰡕라는 단행본으로 집성하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단군 전승이 보편화한 것은 고려시대이며, 민족주체의식의 발로와 연결된다고 한다. 단군학 연구의 동향과 미래전망에 대해서는 그의 단군 연구사의 정리와 방향-단군릉 발굴 이후 역사학 분야 성과를 중심으로이 볼 만하다. 근자에 문화인류학자 박정진(朴定鎭)󰡔단군신화에 대한 신연구󰡕(한국학술정보, 2010)를 통해 신화와 과학의 통합을 주장하였으며, 고조선의 ()’ 문명체계와 풍류도의 관계를 논하였다.

한국 고유사상의 정체와 관련하여 인본적(人本的) 사고가 많이 거론되었다. 이것은 유교와 통하는 바가 많다. 기자(箕子)의 홍범구주(洪範九疇) 사상과 한국 고유사상을 연결시킨 연구도 있다. 그러나 한국 고유사상과 민족 본유의 ()’ 사상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것은 일제시기 신채호(申采浩)를 비롯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영향이 크다. 근자에 철학자 김성환(金晟煥)한국 고대 신선사상의 지속과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최치원의 국유현묘지도설(國有玄妙之道)’설을 재해석한 바 있다. 우리나라 고유사상은 대개 ()’, ‘()’, ‘()’으로 표기되어 내려왔다. 이 가운데 은 중국의 신선사상과는 구별되며, 형성 연대도 훨씬 이전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國風으로서의 風流의 실체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풍류로 명명되어 왔다.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郎碑序)첫머리에서 민족 고유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고 한다. ()를 설()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내용은 곧 삼교를 포함(包含)하는 것으로서, 군생(群生)을 접하여 변화시킨다. 이를테면, 들어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 孔子)의 주지(主旨), 무위(無爲)로써 세상일을 처리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 老子)의 종지이다,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실천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釋迦)의 교화이다.

 

조선 후기에 나온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인용한 뒤 그의 말은 선성수훈(先聖垂訓)의 정화(精華)를 잘 캐냈다고 할 만하다고 평가하였다.

최치원은 화랑의 주요 행동 강령-실천 덕목을 예로 들어 풍류의 실체를 증언하였다. 여기서 한국사상과 화랑도의 관계성이 문제가 된다. 신채호는 화랑은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다라고 하였다. 화랑은 국선(國仙)’, ‘화랑국선’, ‘선화(仙花)’, ‘미륵선화(彌勒仙花)’ 등으로 불렸다. 그냥 신선(神仙)’으로도 불릴 정도로 우리 고유의 선사상(仙思想)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뒤에는 불교에서 이를 상당 부분을 끌어들였는데, 특히 호국불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풍류는 한국사상의 원시태(原始態) 또는 원형질(原形質)이라 할 수 있다. 풍류에는 후일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유도 삼교의 핵심적 요소가 들어 있었다. 여기서 풍류의 고유성을 논할 수 있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명(智證大師碑銘)에서 계림의 땅은 오산 곁에 있는데, 예부터 선()과 유()에서 기특함이 많았네”(鷄林地在鰲山側, 仙儒自古多奇特)라고 하였다. 이 말의 의취(義趣)를 보면 여기서 말하는 는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것이 아니다. 딱히 무어라 명명할 수 없어 라 하였지만, ‘에 앞서는 사상적 묘맥(苗脈)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포함삼교, 접화군생여덟 글자는 최치원이 해석한 풍류의 실체다. 앞의 것이 체(: logos)라면 뒤의 것은 용(: praxis)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전자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후자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최치원이 풍류를 현묘지도라 한 것은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신비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일반적으로 인식에는 경험론, 합리론, 직관론 세 가지가 있는데 신비주의는 직관론과 통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천도설교(天道設敎)’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묘지도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의 선학들이 고유의 사상과 종교를 범칭(汎稱)하여 고신도(古神道)’라 일컬었던 이면에 이런 내력이 있다.

삼교로써 풍류를 설명한 것은 다름 아니다. 우선 당시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종교와 사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상고대부터 내려오던 신교(神敎)의 삼원사상(三元思想), 즉 삼위관(三位觀)이 깔려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삼위란 하나의 실체 안에 있는 세 위격(位格)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문화권에는 천인의 합일체(合一體)를 최상의 진리로 여기는 사유구조가 상고대부터 존재하였다. 이를 삼일지도(三一之道)라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 셋을 하나로, 하나를 셋으로 보는 것이다. 󰡔천부경(天符經)󰡕에서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 한 것이 대표적이다. 최치원이 풍류를 유도 삼교와 대비하여 관계를 설정한 것은 한국사상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풍류의 전통은 오래 이어져 왔던 것 같다. 다만 문헌적 뒷받침은 신라에서나 찾을 수 있다. 풍류도의 전통은 6세기 중반에 나온 진흥왕순수비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진흥왕순수비난랑비서는 사상적으로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순수비 첫머리에 나오는 순풍(純風)’현화(玄化)’는 최치원이 증언한 풍류의 역사적 실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최치원의 선배 학인인 김대문(金大問)은 풍류사상과 관련하여 󰡔화랑세기(花郎世紀)󰡕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최치원의 이른바 선사(仙史)’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김대문은 󰡔악본(樂本)󰡕이란 책도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풍류의 주요 기반인 민족고유의 음악에 대해 논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류의 역사적 실재는 이처럼 분명하다.

풍류의 어원에 대해 최남선은 ’[] 또는 광명을 의미하는 부루(夫婁)’의 음사(音寫)라고 주장하였다. ‘밝사상을 주장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논리라 하겠다. 이 설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적지 않고 현재까지 따르는 이들도 있다. 다만 연구자 개인의 주관성이 강한 까닭에 통설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최치원이 말한 풍류의 명칭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닌 듯하다. 뭔가 그 실체는 있었지만 이름 없이 내려오다가 최치원에 의해 비로소 명명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최치원의 철학사상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상적, 철학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최치원이 말한 풍류의 어원은 본디 유풍여류(遺風餘流)’라는 말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 같다. 중국 동진(東晋) 때의 고승 도안(道安: 312385)이교론(二敎論)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동도(東都)의 일준동자(逸俊童子)가 서경(西京)의 통방선생(通方先生)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제가 듣건대 풍류(風流)가 기울고 추락하여 육경(六經)이 이 때문에 편수(編修)되었으며, 뻐기고 자랑하는[誇尙] 기풍이 더욱 늘어남에 (󰡔노자󰡕) 이편(二篇)이 이 때문에 찬술되었다고 합니다. ……

 

가상의 두 인물을 등장시켜 유가와 도가의 성격에 대해 논한 것이다. (堯舜禹湯)으로부터 문주공(文武周公)에 이어졌던 풍류가 날로 기울고 추락하자 공자가 이에 발분하여 육경을 편수하여 풍류의 실마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풍류유풍여류의 의미다. ‘국풍(國風)’이란 말과 잘 통한다.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사상적 전통이나 종교적 전통이 될 듯하다. 최치원이 말한 풍류는 유풍여류국풍원류(國風源流)’의 줄임말로 보면 풍류의 실상에 잘 맞을 것이다. 최치원은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에서 도안의 사상에 깊이 공감했음을 시사하였다. 그런 최치원이 도안의 이교론을 지나쳐 보았을 리 없을 것이다.

최치원은 다른 글에서도 금선(金仙: 부처)이 꽃을 들어 보이며 후세에 전한 풍류가 진실로 이에 합치되는구려운운하여, 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 바 있다. 여기서 후세에 전한 풍류염화시중(拈華示衆)의 유풍여류바로 그것이다. 또 다른 글에서는 화랑 출신인 경문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렸다.

 

선대왕(경문왕)께서는 …… 처음 국선도[玉鹿]에서 명성을 날리셨는데 특별히 풍류의 기풍을 떨치시었다.

先大王, 虹渚騰輝, 鰲岑降跡. 始馳名於玉鹿, 別振風流.

 

이처럼 민족 고유의 도는 선인들의 유풍여류이자 국풍원류이었기 때문에 줄여서 풍류라고 명명하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화랑도를 풍월도(風月徒)라고 하였던 점도 고려되었을 듯하다. , 풍류가 본디 유풍여류, 국풍원류의 의미이면서도 줄여서 말할 때 풍월이라는 의미와 통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포함삼교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종래에는 이 말이 수식을 좋아하는 최치원의 문장 습관에서 나온 것으로 보거나, 도 삼교사상의 관점에서 풍류의 실체를 간략히 설명하고 만 것으로 본 연구자가 많았다. 그런데 류승국 교수는 최치원의 증언이 역사적 사실임을 상고대의 고문헌과 갑골학의 연구 성과를 이끌어 증명하였다. 류 교수는 한국유학사상사 서설이라는 논문에서 한국 유교의 연원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유교사상의 형성은 역사적으로 인방족(人方族)-동이족과의 관계를 떼어놓고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주나라 이전 은나라하나라요순(堯舜) 등 상대(上代)로 소급하면 할수록 동이문화권이 문화적 선진(先進)으로서 중국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류 교수는 한반도 안의 고국(故國)이었던 군자국(君子國)의 전통에서 한국 유교의 연원을 찾았다. ()을 중시하는 군자국의 전통이 은나라의 동방(東方) 정벌 당시 중국으로 파급되어 유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갑골학 등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논증하였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언급들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A)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고 싶다고 하였다.

(B) 공자가 구이(九夷)에 거()하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거하시렵니까?”하였다. 이에 공자가 군자가 사는 곳이어늘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만 중국에서 공자에 의해 집대성되고 이후 더욱 체계화된 유교가 우리나라에 전래함으로써 한국 고유의 유풍(儒風)은 이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유가사상의 핵심이라면 도가의 핵심은 ()’ 한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사상과 사상은 유가나 도가의 핵심 사상이기에 앞서 한국사상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류승국 교수는 주장하였다. 도가사상은 요동반도 지역에 있었던 청구국(靑丘國)의 유박사상(柔樸思想)에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청구의 나라에 구미호(九尾狐)가 있고 유박(柔樸)한 백성이 있다. 이곳은 영토(嬴土)의 나라다고 하였다. 청구국이 영성(嬴姓)의 후예라는 것이다. 도가사상의 핵심은 포박(抱樸)’에 있고 포박무위자연과 같은 의미다. 󰡔산해경󰡕은 위서(僞書) 시비가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군자국과 청구국에 대해 언급한 해외동경(海外東經)’ 조와 대황동경(大荒東經)’ 조는 갑골문의 내용과 합치되어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갑골복사(甲骨卜辭)에 견주어보면 군자국과 청구국이 있었던 시기는 중국 은나라 무정(武丁) 때 해당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B.C 1400년 이전에 존재했을 것이다.

류 교수의 주장에 앞서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한국이 유교의 종조국(宗祖國)임을 주장하였고,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鍾徽: 17311786)는 노장사상이 신라에 전래, 수용되기 이전부터 신라에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 것이 뿌리 박고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대개 진한(辰韓)의 구속(舊俗)은 스스로 외루(畏壘)나 화서(華胥)와 같은 경지에 올랐음에도 스스로 알지 못한 채 89백 년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노담(老聃)과 장주(莊周)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 스스로 다스리도록 한다 하더라도 진실로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없을 것이다. ⋯⋯ 노자의 도를 실행한다는 명색(名色)은 없었지만, 기실 나라를 다스리면서 실행에 옮겨졌다. 신라가 그 정수(精髓)를 얻은 것은 대개 배우지 않고도 그것에 능하였던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문헌적 뒷받침이 충분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런 약점들은 류 교수에 의해 많이 보완되었다.

한국사상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최치원이 불교와 관련한 글들을 찬하면서 밝혔다. 그는 마한(馬韓)으로부터 내려온 소도(蘇塗: ‘수두’)의 의식을 불교 의식과 견주고, 나아가 불교의 묘맥(苗脈)이 우리나라에 있었다고 보았다.

 

옛날 우리나라가 셋으로 나뉘어 솥발[鼎足]처럼 서로 대치하였을 때 백제에 소도(蘇塗)의 의식이 있었다. 이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 부처)에게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또한 가비라위(迦毘羅衛)의 부처님은 해돋는 곳의 태양이시네. 서토(西土)에 나타나시되 동방에서 솟으셨네라고도 하였다. 우리 동방의 고유 사상과 의식 속에는, 종교적 형태로 종합, 완성된 불교에 앞서 이미 불교적 요소가 함장(含藏)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 끝에 그는 해돋는 곳[郁夷]의 유순(柔順)한 성원(性源)을 인도하여 가비라위의 자비의 교해(敎海)에 이르도록 하니, 이는 돌을 물에 던지는 것 같고, 비가 모래를 모우는 것처럼 쉬웠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불교의 자비정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진 성품을 연결시킨 것이다.

최치원의 이런 사고는 그의 일방적인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라의 사상적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불 이전의 부처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신라의 월성 동쪽 있었다고 하는 전설이 그 단적인 예다. 전불시대(前佛時代)부터 신라는 불교와의 인연이 있었던 불국토(佛國土)라는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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