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후천개벽과 천지굿

원정근(상생문화연구소)

2023.03.02 | 조회 3615

2021년봄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후천개벽과 천지굿

-신명풀이를 중심으로-

 

원정근(상생문화연구소)

 

 

목차

1. 후천개벽과 풀이문화

2. 신명풀이란 무엇인가

3. 천지판과 신명풀이

4. 천지굿과 신명풀이

5. 신명풀이의 의의

 

 

논문요지

이 글은 증산도의 후천 개벽사상을 천지굿의 신명풀이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증산도의 신명풀이는 한국 전통문화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는 판문화와 신명문화와 풀이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명풀이는 자연질서와 문명질서의 동시적 전환을 뜻하는 후천개벽-자연개벽, 인간개벽, 문명개벽-을 통해 모든 생명이 독자적 자유와 통일적 조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건립하는 데 그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있다.

증산도의 신명풀이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판론이다. 우주생명이 선천세계의 상극질서에 의해 상호 감응과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모든 생명이 상호 유기적 질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후천세계의 새 판을 짜려는 것이다. 둘째, 풀이론이다. 선천세계의 상극질서에서 비롯되는 우주만물 사이의 원한관계를 풀고 후천세계의 상생질서에 근거하여 우주만물의 창조적 변화작용을 온전하게 발현하려는 것이다. 셋째, 개벽론이다. 묵은 천지판을 새롭게 짜서 신명의 원한을 풀어버림과 동시에 신명의 조화를 풀어냄으로써 후천의 새 세상을 열기 위한 것이다.


1. 후천개벽과 풀이문화

 

19세기 말 조선 후기는 대내외적으로 모순과 부조리가 판치는 혼란한 시대였다. 대내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무능과 부패로 인하여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졌으며, 대외적으로는 세계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야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조선의 민중들은 힘겹고 고달픈 일상생활 속에서 허덕이고 신음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인간의 삶을 옥죄고 옭아매는 올가미에서 벗어나서 신명나고 신바람나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민중들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운 세상 속에서 온 생명이 오순도순 살아가면서 덩실덩실 춤추고 즐겁게 노래할 수 있는 그야말로 살맛나는, 살판나는 세상을 바란 것이다.

19세기 후반, 신명나는 세상을 갈구하던 조선 민초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동학과 참동학의 개벽사상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다시 개벽과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1871-1909)후천개벽後天開闢이다. 개벽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온 생명이 살고 있는 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한다. 인간과 사회뿐만 아니라 우주 그 자체를 거대한 하나의 판으로 보고, 그 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기획한다. 기존의 천지와 문명은 대립과 투쟁의 상극질서가 난무하는 죽임의 난장판이기 때문에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상생질서로 연결된 살림의 축제판으로 새 판짜기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선각자들은 천지와 인간과 문명을 따로 또 하나로 융합할 수 있는 신세계의 새 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판에 대한 이론은 19세기 조선 후기문화의 참신한 발상이다.

개벽세상의 새 판을 짜기 위한 방안으로 대두되는 것이 풀이문화이다. 풀이란 말은 말 그대로 응어리진 것을 푸는 것을 뜻한다. 죽임의 기운을 풀어서 살림의 기운으로 전환하려는 것이 바로 풀이문화의 근본특성이다. 모든 생명은 우주라는 하나의 커다란 판 속에서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 문제는 우주라는 거대한 판 안에서 살아가는 온 생명이 그 생명의 창조적 변화작용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할 때 각 개체생명끼리 상호 충돌과 대립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 후기 한국사상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신명풀이에 주목한 이는 바로 증산 상제다. 증산 상제는 우주라는 거대한 판을 새롭게 짜기 위해서는 천지만물의 조화작용을 수행하는 신령스러운 힘을 지닌 신명의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임을 자각한다. 그렇다면 왜 신명의 질서를 다시 짜지 않을 수 없는가? 증산 상제는 신명의 질서를 새롭게 개편함으로써 생명 상호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응어리진 원한관계를 풀어버림과 동시에 생명 안에 깃들어 있는 신명의 무궁한 변화작용을 풀어내려고 한다.

증산 상제의 신명관이 독창성을 지니는 이유는, 기존의 천지신명과 인간신명에다 문명신명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증산 상제는 천지와 인간과 문명을 신명의 관점에서 하나로 융합하려고 한다. ‘신명풀이가 바로 그것이다. 신명풀이는 신명神明의 원한寃恨을 풀어버림으로써 신명神明의 조화造化를 풀어내려는 것이다. 신명풀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신명의 원한을 풀어내는 원한풀이와 신명의 창조적 변화작용을 풀어내는 조화풀이.

아래에서 우리는 증산 상제의 신명풀이를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검토하려고 한다. 첫째, 신명이란 무엇이며 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신명풀이란 무엇인가. 둘째, 신명풀이가 일어나는 천지판은 어떤 판인가. 셋째, 신명풀이를 위한 천지굿은 어떤 굿인가. 신명풀이의 천지굿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가. 넷째, 신명풀이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논의를 통해, 우리는 신명풀이가 자연과 인간과 문명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켜 온 생명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개벽세상을 여는 원동력임을 밝히고자 한다.

 

2. 신명풀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신명이 있는 민족이라고 한다. 우리네 일상생활에서 신명이란 말은 매우 다채롭게 쓰인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신명이 내렸네”, “신명이 지폈네”, “신명나게 춤추세”, “신명나게 노래하세”, “신명나게 놀아보세”, “신명나게 일하세등이 그것이다. 신명이란 개념은 종교제의의 신격, 민속예술의 연행현장, 놀이판, 노동판 등 인간활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 신명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신을 말한다. 인간 밖에 존재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격을 말한다. 춘추좌전』 「양공14백성이 자기의 군주를 받들되 부모와 같이 사랑하고 일월처럼 숭앙하며 신명처럼 공경하며 세찬 천둥소리와 같이 두려워한다면, 어찌 내쫓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둘째, 인간의 오묘한 마음을 말한다. 순자』 「해폐마음은 형체의 군주요, 신명의 주인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신명은 천의 얼굴처럼 갖가지로 변화하는 온갖 사물의 변화작용이 너무도 오묘하여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렵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공영달孔潁達』 「계사 하에 나오는 신명神明의 덕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만물이 변화함에 생겨나기도 하고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신명의 공덕이다.”라고 말한다.

신명神明이란 신에 명이 덧붙어져 이루어진 말이다. 신명에서 신은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신을 총칭하는 것이고, 명은 만물을 주재하는 신의 창조적 변화작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백하게 구현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신명은 신의 존재와 작용을 동시에 일컫는 말이다. 신과 신명을 신령神靈이라고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신령은 신의 영명함을 더욱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신과 신명과 신령은 모두 신의 존재와 작용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증산도에서 신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천지의 신명과 인간의 신명과 문명의 신명이다. 천지의 신명은 천지만물의 운행과 변화를 관장하는 신명을 말한다. 증산 상제는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도전4:62:4-6)고 한다. 모든 일은 신명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명의 조화작용에 의해서 생겨나고 변화하기 때문에 신명이 없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생명의 창조적 약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증산 상제는 천지개벽을 해도 신명 없이는 안 되나니, 신명이 들어야 무슨 일이든지 되느니라. 내 세상은 조화의 세계요, 신명과 인간이 하나 되는 세계니라.”(도전2:44:5-6)고 강조한다.

인간은 천지신명의 조화작용에 의해 태어나 살다가 천지신명의 조화작용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의 신명이란 천지신명과 상호 감응과 소통을 이루면서 인간에 내재한 신명을 말한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신명으로서 모든 인간 활동의 존재근거이다. 천지의 신명이 인간에 내재된 것으로 볼 때, 인간의 신명은 곧 마음이다. 주희는 맹자』 「진심 상의 주석에서 마음이란 사람의 신명이니, 뭇 이치를 갖추고 모든 일에 응할 수 있는 까닭이다.”라고 하고, 주자어류에서 마음은 신명의 집이요, 온몸을 주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에게 온몸을 주관하는 신명이 없다면, 지금 여기에서 잠시라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증산 상제는 너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고 사람마다 몸속에 신이 있단다. 사람마다 그것이 없으면 죽는”(도전4:54:8)다고 강조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바로 이 신명의 조화작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문명의 신명은 인류 문명을 개화시키는데 기여한 신명으로서, 문명에 정통한 신명을 말한다. 문명신은 역사에 실존했던 동서양의 종교가, 철학자, 과학자들의 신명으로 노자, 석가, 공자, 예수, 마테오 리치, 진묵 등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문명이란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의 총체를 뜻한다. 철학, 종교, 예술 등이 포함되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를 가리킨다.

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꿈풀이’, ‘괘효풀이’, ‘문제풀이’, ‘예제풀이’, ‘운수풀이’, ‘화풀이’, ‘분풀이’, ‘살풀이’, ‘원풀이’, ‘한풀이’, ‘원한풀이’, ‘귀신풀이’, ‘몸풀이’(解産), ‘마음풀이’, ‘액풀이’, ‘시름풀이’, ‘심심풀이’, ‘피곤풀이’, ‘소원풀이’, ‘욕심풀이’, ‘애정풀이’, ‘댕기풀이’, ‘앞풀이’, ‘뒤풀이’, ‘신풀이’, ‘기운풀이’, ‘속풀이’, ‘기분풀이’, ‘울적풀이’, ‘삼신풀이’, ‘흥풀이’, ‘성주풀이’, ‘소풀이’(解牛)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풀이를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풀이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알기 어려운 심오한 뜻을 아주 쉽게 풀어서 밝히는 것이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여러 과목의 난제들을 모아 알기 쉽게 풀어서 밝혀 놓은 문제풀이예제풀이가 바로 그것이다. 둘째, 오해나 원한 따위의 맺힘을 풀어서 없애는 것을 말한다. “살이나 액을 풀어낸다고 할 때의 살풀이액풀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마음이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어떤 맺힘을 풀거나 끄른다고 할 때에 여기에는 끈의 비유가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풀이문화에서 가장 큰 특성은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종교와 예술과 놀이와 노동 등)에서 활용되는 신명에 불을 지펴 신바람을 풀어내는 데 있다. 신명풀이가 바로 그것이다. 증산 상제는 주로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된 우리 전통문화의 신명풀이를 우주적 차원의 신명풀이로 확대한다. 인간과 문명의 신명풀이뿐만 아니라 우주의 신명풀이를 시도한다.

증산도에서 풀이는 신명의 응어리진 원한의 해소와 신명의 조화작용의 발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소극적 의미에서는 우주생명의 감응작용을 가로막는 신명의 원한을 풀어버리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우주생명의 신묘한 변화작용, 즉 신명의 조화작용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풀이는 우주생명의 교감관계를 가로막던 것이 풀리고 그 감응관계가 원활하게 수행되고 소통될 때 완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증산 상제에서 신명풀이란 우주생명의 원한관계를 풀어 없애버리는 것과 동시에 우주생명의 원동력인 신명성을 능동적으로 발현하려는 것이다.

 

3. 천지판과 신명풀이

 

우리는 판이란 말을 자주 쓴다. 예컨대, ‘씨름판’, ‘애기판’, ‘총각판’, ‘상씨름판’, ‘모래판’, ‘놀이판’, ‘소리판’, ‘축제판’, ‘춤판’, ‘탈판’, ‘싸움판’, ‘살얼음판’, ‘난장판’, ‘노름판’, ‘윷판’, ‘술판’, ‘시장판’, ‘모략판’, ‘굿판’, ‘정치판’, ‘선거판’, ‘잔치판’, ‘먹자판’, ‘놀자판’, ‘울음판’, ‘웃음판’, ‘싸움판’, ‘노동판’, ‘생판’, ‘장기판’, ‘바둑판’, ‘딴판’, ‘들판’, ‘벌판’, ‘독판’, ‘개판등이 그것이다.

이란 말은 외국어로는 제대로 번역할 수 없고 다른 민족은 그 미묘한 어감을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특유한 말이다. 우리민족의 판문화는 세계적인 저력을 지닌 것으로 따로 또 함께의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씨름을 하든, 탈춤을 추든, 판소리를 하든, 풍물굿을 하든, 놀이를 하든, 일을 하든 어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판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각자 제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다.

판을 벌이기 좋아하는 우리민족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흥이 나는 판을 깨서 김새게 하는 사람이다. 판을 독식하려고 깽판을 치는 사람이나 판을 엉망진창의 난장판싸움판으로 만드는 사람을 막기 위해 우리민족은 멍석말이를 시도했다. ‘멍석말이란 한마디로 판을 깨는 사람을 집단적으로 왕따를 시키는 가혹한 형벌이다.

그렇다면 판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볼 것인가? 판은 일반적으로 어떤 놀이나 일이 이루어지는 활동공간으로서의 마당을 의미한다. 그러나 증산도에서 판은 단순히 정치, 사회적 활동의 마당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증산 상제는 우주 그 자체를 매 순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하나의 판으로 보기 때문이다.천지의 판’(도전5:6:1)이 바로 그것이다. 증산 상제에서 판은 인간과 문명을 포함한 우주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장소를 말한다.

 

하늘과 땅이 교감하니 만물이 생겨나고 변화한다. 성인이 사람의 마음에 감응하니 천하가 평화롭다. 그 감응하는 바를 보면 천지만물의 실정을 볼 수 있으리라!

 

』 「함괘咸卦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계라는 판은 본래 천지가 상호 감응하고 소통하는 유기적 연관관계 속에서 만물의 조화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온 생명의 한 마당판이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판에는 단순히 공간적인 장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판을 한 판과 두 판또는 첫판과 막판(끝판, 결판)’이라고 표현하듯이 판 위에 숫자를 붙이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횟수나 순서를 뜻하는 말이 되어시간의 개념이 함축된다. 우주생명의 한마당으로서의 판은 온갖 사물이 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명의 기운을 주고받는다. 생명끼리 소통이 없다면, 우주생명은 창조적 변화작용을 일으킬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라는 판은 고정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약동하는 과정적 존재로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증산도에서 판은 시간의 측면에서 선천과 후천으로 나뉜다. 증산 상제는 인류사를 포함한 우주사의 변천과정을 선후천이라는 우주 일년의 거시적 지평에서 진단한다. 판은 선천이든 후천이든 본래 상극과 상생의 일방지향적 판이 아니라 쌍방지향적 판이다. 우주만물은 상극과 상생의 양극성이 동시적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연속적 순환과정을 이룬다. 생겨나고 자라나며 수렴收斂하고 함장含藏하는 생장염장生長斂藏’(도전2:20:1)이라는 사계절의 변화과정을 반복한다. 이런 순환작용은 미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구 일년을 단위로 이루어지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주 일년의 단위로 이루어진다. 지구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우주에도 사계절이 있다. 지구 일년이 봄 여름의 생장단계와 가을 겨울의 염장단계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우주 일년도 선천의 생장단계와 후천의 염장단계로 나누어진다.

우주만물의 상극과 상생의 관계를 우리는 민속놀이의 널뛰기에서 그 구체적인 예증을 찾아볼 수 있다. 널뛰기에서 널을 뛰는 두 사람은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널을 뛰는 사람은 널을 뜀으로써 상대방을 널에서 떨어뜨려야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널에서 상대편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높이 오르도록 힘껏 굴려줘야 하고, 힘껏 구르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리듬과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따라서 널뛰기에서 두 사람은 경쟁자(상극적)이면서 협력자(상생적)일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관계를 이룬다. 널뛰기의 원리가 그런 것처럼, 모든 사물은 상극이 상생이 되고 상생이 상극이 되는 양가적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선천은 후천과는 달리 상극관계가 상생관계보다 주도적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선천세계는 천지만물이 생성하고 성장하는 우주의 봄과 여름의 발산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라는 속언과 마찬가지로, 우주만물이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응축과 수렴의 상생관계보다는 분열과 확산의 상극관계가 선도적 위치를 점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주의 가을철에 이르면 천지만물이 분열과 성장의 단계를 넘어서 모든 생명이 하나로 수렴되는 통일단계로 나아가기 때문에 상극질서보다는 상생질서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천세계이든 후천세계이든 천지는 똑같이 상극과 상생의 동시적 상관관계로 운행하고 변화하지만, 그 판의 특성은 서로 다르다. 같은 천지판이 시간질서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주도하는 판의 특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상극과 상생 가운데 무엇이 주된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천지의 판세가 판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왜 판이 문제인가? 지금 인류문명은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인류문명의 마당판인 천지가 자연의 생태계의 위기상황으로 내몰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찌 천지만 그러한가? 인간도 자기관계의 분열과 갈등으로 인하여 자아정체성의 상실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인간이 소우주이면서도 동시에 대우주와 하나로 연결된 전일적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삶의 왜곡된 관계망 속에서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의 통일적 연관관계를 단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소외와 자기왜곡을 일삼고 있다. 또한 인간 활동의 총체성이 드러나는 마당인 사회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면서 공동체적 연대성이 붕괴되고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현대 과학기술문명이 인간 삶의 편의를 위해 우주만물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급기야는 인간 자기 자신마저도 도구화하고 수단화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상극의 살기가 판치는 죽임의 판을 상생의 기운이 왕성하게 발현되는 살림의 판으로 되살려서 새 판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새 판짜기의 핵심적 방책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4. 천지굿과 신명풀이

 

증산 상제는 이제는 판이 워낙 크고 복잡한 시대를 당하여 신통변화와 천지조화가 아니고서는 능히 난국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도전2:21:4)고 한다. 자연과 인간과 문명이 모두 중병이 들어 신음하고 있는 지금의 총체적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신통방통한 천지조화를 통해 판을 새롭게 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증산 상제는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주생명의 새 판짜기를 시도한다. 새 판짜기가 바로 천지공사天地公事.

 

현하의 천지대세가 선천은 운()을 다하고 후천의 운이 닥쳐오므로 내가 새 하늘을 개벽하고 인물을 개조하여 선경세계를 이루리니 이 때는 모름지기 새 판이 열리는 시대니라. 이제 천지의 가을운수를 맞아 생명의 문을 다시 짓고 천지의 기틀을 근원으로 되돌려 만방(萬方)에 새기운을 돌리리니 이것이 바로 천지공사니라.(도전3:11:3-4)

 

천지공사는 만물 사이의 우주적 교감을 수행하는 신묘한 힘인 신명의 질서에 새 생명의 숨길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연질서와 문명질서를 동시적으로 전환시켜 신천지와 신문명을 건설하려는 후천개벽의 청사진을 담고 있다. 후천개벽의 삼대 과제는 자연개벽과 인간개벽과 문명개벽이다. 증산 상제는 이 세상은 신명조화(神明造化)가 아니고서는 고쳐 낼 도리가 없”(도전2:21:2)라고 하여, 신명의 조화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후천세상의 새 판짜기의 핵심적 관건임을 분명히 한다.

천지공사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 신명풀이로서의 천지굿이다. 그렇다면 굿이란 무엇이고, 천지굿이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상제님께서 친히 장고를 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才人)이요, 너는 천하 일등 무당(巫堂)이니 우리 굿 한 석 해 보세.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 집에 가서 빌어야 살리라.” 하시고 장고를 두둥 울리실 때 수부님께서 장단에 맞춰 노래하시니 이러하니라. 세상 나온 굿 한 석에 세계 원한 다 끄르고 세계 해원 다 된다네. 상제님께서 칭찬하시고 장고를 끌러 수부님께 주시며 그대가 굿 한 석 하였으니 나도 굿 한 석 해 보세.” 하시거늘 수부님께서 장고를 받아 메시고 두둥둥 울리시니 상제님께서 소리 높여 노래하시기를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단주를 머리로 하여 세계 원한 다 끄르니 세계 해원 다 되었다네.” 하시고 수부님께 일등 무당 도수를 붙이시니라.(도전6:93:4-10)

 

굿은 좁은 의미에서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길흉화복 등의 인간의 운명을 조절해 달라고 비는 제의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굿은 무당이 하는 굿 이외에 호남과 영남의 동신제나 징, 장구, 꽹과리 등의 풍물로 신바람을 일으키는 풍물굿을 포함한다. 증산 상제는 여섯 살이 되시는 병자(兵子: 道紀 6, 1876)년에 풍물굿을 보시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려 장성한 뒤에도 다른 굿은 구경치 않으시나 풍물굿은 자주 구경”(도전1:19:1)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증산 상제에서 천지굿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굿이나 사회적 차원의 풍물굿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과 사회를 포함한 천지만물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우주굿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된 천지해원굿이자 천지개벽굿이자 천지해방굿이다. 증산 상제의 천지굿은 천지와 인간과 문명 속에 내재한 상극의 기운을 털어버리고 상생의 기운을 다시금 불어넣으려는 것이다. “이제 만물의 생명이 다 새로워지고 만복(萬福)이 다시 시작되“(도전2:43:7)게 하려는 우주적 살림굿이다.

천지굿이란 말은 본래 증산 상제가 천지인 삼계대권을 고수부高首婦(1880-1935)에게 넘겨주는 굿의식을 집행한 데서 유래한다. 천지굿은 음양의 조화를 바탕으로 삼아 천지와 인간과 문명의 꽉 막힌 천지비天地否’(도전2:51:1)의 선천 상극 세상을 뜯어 고쳐서 지천태地天泰’(도전2:51:1)의 후천 상생 세상을 건설하려는 데 그 궁극적 목표가 있다. 고수부는 천지공사나 기도 시에는 천지 음양굿이라야 하나니, 남녀가 함께 참석하여야 음양굿이 되느니라. 남자만으로는 하늘굿이며 여자만으로는 땅굿이니 이는 외짝굿이라. 외짝굿은 원신(寃神)과 척신(隻神)의 해원이 더디느니라.”’(도전11:78:1-2)고 하여, 천지굿을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천지 음양굿으로 정의하였다. 증산 상제는 신명의 조화를 바탕으로 삼아 천지의 조화와 인간의 조화와 문명의 조화를 하나로 조화시킴으로써 후천개벽-자연개벽과 인간개벽과 문명개벽-을 이루려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굿은 바로 우주생명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원시반본에 근거하여 천지보은과 천지상생과 천지해원을 이루려고 하는 천지개벽굿이다.

우주생명을 살리려는 천지굿에서 주체로서 놀이꾼은 증산 상제와 고수부이며, 구경꾼은 온 인류이다. 우리 민족예술의 특성이 그런 것처럼, 천지굿도 놀이꾼과 구경꾼이 주객일체를 이룬다. 왜냐하면 구경꾼은 단순히 천지굿을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꾼과 함께 추임새를 통해 천지굿판에 참여하여 신명의 조화를 추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천지굿의 놀이꾼으로서의 증산 상제와 고수부는 고수와 명창의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고 있다. 이는 천지와 음양의 합덕관계를 뜻한다. 천지와 음양의 상관관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전일적 화해和諧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우주적宇宙的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추구하는 천지굿은, 고대 삼한시대의 제천행사 때부터 있어온 대동굿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 제천 의식의 군취가무群聚歌舞하던 국중대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지굿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춤과 노래이다. 천지굿에서 춤과 노래는 신명이 발현되는 궁극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으로 추어지든 우주생명의 신명성을 북돋우어 신명의 성취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춤의 본래의 뜻은 그 무엇인가를 부추겨 준다는 말이다. 천지굿에서 춤은 곧 천지의 신명과 인간의 신명과 문명의 신명을 추어올림으로써 선천의 상극세계를 후천의 상생세계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천지굿은 일차적으로 우주만물의 원한풀이를 그 목표로 한다. 우주생명의 마당판이 위기상황을 안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천세계의 일차적 비극의 원인은 상극질서가 상생질서보다 주도적,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선천세계의 모든 사물은 상극질서에 종속되거나 예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선천은 상극(相克)의 운()이라 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하늘과 땅에 전란(戰亂)이 그칠 새 없었나니 그리하여 천하를 원한으로 가득 채”(도전2:17:1-3)우기 때문에 우주와 인간의 역사는 바로 원한의 역사’(도전11:179:12)가 된 것이다. 원한의 궁극적 원인은 선천의 상극질서에 있다. 우주생명의 신명작용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상극질서에 근거한 원한의 기운이 우주만물의 신묘한 생명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증산 상제는 한 사람의 원한(寃恨)이 능히 천지기운을 막”(도전2:68:1)는다고 강조한다.

원한寃恨은 원과 한의 복합어로서, 인간사회의 고통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원은 구부린다는 뜻이다. 토와 멱으로 되어 있다. 토끼가 덮개 밑에 갇혀 달리지 못하여, 더욱 휘어져 꺾이는 것이다.” 은 토끼가 올가미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어떤 장애물에 가로막혀 신음하는 모든 존재의 상징이다. 외부의 억압에 의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쌓이는 고통과 절망의 감정을 표현한다. 설문해자에서는 한은 원망함이다.”라고 정의한다. 은 인간의 가슴 깊이 알알이 맺힌 설움 같은 응어리로서 원망함을 품고 분노하는 감정이다. 원이 자기 밖에 있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감정이라면, 한은 자기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희구하고 성취하려는 욕구가 좌절되는 데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예컨대 춘향전에서 한양으로 떠나간 이도령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한을 표현한 것이다. 만약 춘향이가 서울로 간 뒤 소식을 끊은 이도령을 미워했다면 그것은 한이 아니라 원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원한이 개체의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기殺氣로 터져 나와서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사회나 우주만물의 관계망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증산 상제는 선천에는 상극의 이치가 인간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도전4:16:2-3)킨다고 한다.

증산 상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우주만물의 원한관계가 선천 5만 년 동안 시공의 흐름에 따라 복잡다단하게 얼키고설켜 극한적 상태에 이르렀다고 규정한다. “천하의 크고 작은 모든 원한이 쌓여서 마침내 큰 화를 빚어내어 세상을 진멸할 지경”(도전4:31:4)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피맺힌 원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맞물려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극도의 위험수위에 도달한 것이다.

원한은 우주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한 개체의 원한이 풀린다고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만물은 개체와 전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어떤 하나의 개체의 원한이 해소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개체의 원한이 남아 있다면 그것이 다시 다른 개체나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산 상제는 모든 생명의 원한관계를 근원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원한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원한에 관계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한풀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증산 상제는 선천 개벽 이래로 상극의 운에 갇혀 살아온 뭇 생명의 원()과 한()을 풀어”(도전5:1:1)야 새 세상의 영원한 화평을 열 수 있다고 한다.

증산 상제의 신명풀이는 선천 개벽 이래로 상극의 운수에 갇혀 살아온 모든 생명의 원한을 해소함으로써 천지와 인간과 문명 속에 내재한 신명의 조화작용이 원활하게 발현하기 위한 것이다. 증산 상제의 신명풀이는 세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천지의 신명풀이다. 천지의 신명풀이는 구천지의 묵고 낡은 생명기운을 새롭게 바꾸어 천지생명의 변화작용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천지조화天地造化’(도전11:77:3)가 발현되는 이상세계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한도(限度)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도전5:416:1-2)가 바로 그것이다. 증산 상제는 천지의 상극적 기운을 상생적 기운으로 전환시켜서 천지운화의 기틀’(天地運路)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천지만물의 원한관계를 해소해야 한다고 본다. .

선천은 하늘과 양만 존숭하고 땅과 음은 비천한 것으로 여긴 천존지비天尊地卑억음존양抑陰尊陽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천지와 음양의 상관관계가 서로 감응과 소통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천은 천지비(天地否), 후천은 지천태(地天泰)니라. 선천에는 하늘만 높이고 땅은 높이지 않았으니 이는 지덕(地德)이 큰 것을 모름이라. 이 위에는 하늘과 땅을 일체로 받드는 것이 옳으니라.(도전2:51:1-3)

선천은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세상이라. 여자의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차서 천지운로를 가로막고 그 화액이 장차 터져 나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멸망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비록 성신(聖神)과 문무(文武)의 덕을 함께 갖춘 위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가 없느니라. 예전에는 억음존양이 되면서도 항언에 음양(陰陽)’이라 하여 양보다 음을 먼저 이르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오. 이 뒤로는 음양그대로 사실을 바르게 꾸미리라.(도전2:52:1-5)

 

선천의 천지는 불통과 비색의 관계를 이루었다. ‘천지비天地否가 바로 그것을 대변한다. ‘천지비는 하늘은 양으로서 위에 있고 땅은 음으로서 아래에 있어 천지와 음양의 조화기운이 부조화를 이루는 상극관계를 상징한다. 이 때문에 묵은 하늘과 낡은 땅인 구천지는 크나큰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구천지舊天地 상극相剋 대원대한大寃大恨 신천지新天地 상생相生 대자대비大慈大悲.(도전11:345:2)

 

그렇다면 대원대한의 상극적 구천지를 어떻게 대자대비한 상생적 신천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위해서 증산 상제는 천지와 음양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고 한다. 구천지의 천지비天地否의 불통과 불화의 관계를 신천지의 지천태地天泰의 소통과 감응의 관계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지천태는 땅은 음으로서 위에 있고 하늘은 양으로서 아래에 있어 천지와 음양의 조화기운이 상호 교감하는 관계를 상징한다. 이런 천지와 음양의 소통관계가 되살아나는 지천태의 신천지에서 비로소 천지의 신명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신명력을 회복한다. 그것이 바로 천지와 음양의 조화기운이 한껏 펼쳐지는 정음정양正陰正陽’(도전4:59:2)의 신천지다.

둘째, 인간의 신명풀이다. 인간은 본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원한이 맺힌다. 원한은 자기 자신을 병들게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기가 될 수 있다. 증산 상제는 네 마음을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 그러면 곧 낫게 되리라”(도전3:188:6)고 하여, 원한관계의 일시적 해결보다는 근원적 해소를 강조한다. 원한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일체화함으로써 원한 그 자체를 뿌리에서부터 해소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우주생명의 통일적 존재근거를 이루는 무극대도無極大道’(도전11:247:6)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우주생명의 분화과정에서 인간이 독립된 개체를 지니게 되면서 우주생명의 원초적 생명성과 분리되는 비극적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신명풀이는 마음의 작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증산 상제는 마음이 모든 창조적 변화작용의 원천임을 이렇게 말한다.

 

천용지용인용天用地用人用이 통재어심統在於心하니 심야자心也者는 귀신지추기야鬼神之樞機也요 문호야門戶也요 도로야道路也. 하늘이 비와 이슬을 내리고 땅이 물과 흙을 쓰고 사람이 덕화에 힘씀은 모두 마음자리에 달려 있으니 마음이란 귀신(鬼神)의 문지도리요 드나드는 문호요 오고가는 도로이라. 개폐추기開閉樞機하고 출입문호出入門戶하고 왕래도로往來道路에 신이 혹유선或有善하고 혹유악或有惡하니 선자사지善者師之하고 악자개지惡者改之하면 오심지추기문호도로吾心之樞機門戶道路는 대어천지大於天地니라. 그 문지도리를 여닫고 문호에 드나들고 도로를 왕래하는 신이 혹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니 선한을 본받고 악한 것을 잘 고치면 내 마음의 문지도리와 문호와 도로는 천지보다 더 큰 조화의 근원이니라.(도전4:100:6-7)

 

인간이 천지만물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신명세계를 열고 닫는 사령탑으로서, 신명이 머무는 집이자 오가는 문으로서 신명조화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신명은 인간의 마음 씀에 따라 각기 다르게 감응한다. 예컨대 인간이 마음속으로 성현을 생각하면 성현의 신명이 감응하고, 영웅을 생각하면 영웅의 신명이 감응하며, 장사를 생각하면 장사의 신명이 감응하며, 도적을 생각하면 도적의 신명이 감응한다. 요컨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감응하는 신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에 내재한 신명조화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천지보다 더 큰 조화의 근원인 마음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증산 상제는 이 때는 신명시대(神明時代). 이제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 몸속에 출입하게 하여 그 체질과 성품을 고쳐 쓰리니 이는 비록 말뚝이라도 기운을 붙이면 쓰임이 되는 연고라.”(도전2:62:1-3)라고 하여, 신명이 뱃속의 오장육부에서 기운생동하게 작용할 때 인간의 생명활동이 온전하게 영위될 수 있다고 본다.

증산 상제는 이처럼 생명활동의 주체인 몸의 오장육부를 고도로 단련시킴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마음과 몸의 신명풀이는 인간의 생명력의 조화기운이 완벽하게 구현되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증산 상제에서 이상적 인간이란 우주생명과 적극적인 교감작용을 통해 그 생명의 신명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신인간을 뜻한다고 하겠다.

셋째, 문명의 신명풀이다. 신명풀이는 기본적으로 부조리한 문명 속에서 막히고 갇힌 신명의 본래성을 발현하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문명의 온갖 병적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선천세계의 문명이 갈등과 분열의 극단적 한계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음보다는 양이 우세한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상극질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천세계의 문명은 강자가 약자를, 부귀한 자가 빈천한 자를, 남자가 여자를,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마당이다.

증산 상제는 온갖 변화가 통일적 질서를 찾아 돌아가려고 하는 원시반본原始返本’(도전2:26:1)의 시대를 맞이하여 선천문명의 상극적 대립관계를 그 뿌리에서부터 바로잡으려고 한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신명, 인간과 인간이 따로의 자유와 하나로의 조화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도록 온 세상을 한집안으로 만들려는 세계일가世界一家우주일가宇宙一家천지일가天地一家의 문명개벽을 시도한다. 상극의 구문명을 상생의 신문명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증산 상제는 세계 문명신을 통섭하여 문명신의 통일신단(문명신단)인 신명의 조화정부造化政府’(도전4:5:2)를 구축함으로써 문명신의 새로운 판갈이를 통해 문명의 신명풀이를 모색한다. 세계 문명신단의 핵심인물이었던 선교, 불교, 유교, 기독교의 4대 종장(선교의 노자, 불교의 석가모니, 유교의 공자, 기독교의 예수)을 각 문화권에서 가장 공덕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최수운, 진묵, 주자, 마테오리치로 교체한다. 이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선천종교의 해묵은 기운을 거두어 새 기운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선천문명의 핵심정수를 뽑아내어 후천세계의 새로운 신문명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증산 상제의 신명풀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우주는 하늘과 땅, 사람, 만물이 다 같이 개별적 자유와 전체적 조화를 이루는 천동天動 지동地動 인동人動 만물합동萬物合動”(도전11:249:3)의 이상세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증산 상제가 후천개벽의 천지굿을 통해 신명의 원한풀이와 조화풀이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새 판을 짜놓았지만 그것을 완결시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증산 상제는 어디까지나 세 세상이 열릴 수 있는 천지운로의 새 기틀을 짜 놓은 것뿐이다. 그러니 새 우주는 인간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거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 우주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증산 상제는 지금 이 시대를 인간이 우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실천적 주체로 새롭게 거듭나는 인존시대人尊時代’(도전2:22:1)로 규정한다.

 

5. 신명풀이의 의의

 

지금까지 우리는 증산 상제의 후천 개벽사상을 천지굿의 신명풀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신명풀이는 우리의 전통문화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는 판문화와 신명문화와 풀이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연행예술의 심미적 특성에 주안점을 두던 신명풀이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민족종교의 개벽사상과 맞물리면서 신천지의 조화세상을 여는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증산 상제의 신명풀이다. 증산 상제의 신명풀이는 자연질서와 문명질서의 동시적 전환을 뜻하는 후천개벽-자연개벽, 인간개벽, 문명개벽-을 통해 모든 생명이 독자적 자유와 통일적 조화를 마음껏 누리는 신나는 신바람나는 조화선경造化仙境의 이상세계를 건립하는 데 그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있다.

신명나는 세상은 천지와 인간과 문명 속에서 존재하는 우주생명의 창조적 변화작용이 온전하게 실현되는 세상이다. 자연과 인간과 사회가 다 같이 그 자체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신묘한 조화작용造化作用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조화풀이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천지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구천지의 상극질서를 신천지의 상생질서로 바꾸어야 한다. 또한 천지 속에서 우주만물과 교감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인간과 구문명의 상극질서도 새롭게 바꾸어 신인간과 신문명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천지인天地人 삼계三界의 신묘한 조화작용을 온전히 풀어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새로운 개벽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증산도의 신명풀이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판론이다. 우주생명의 한마당은 천지와 인간과 문명으로 구성된다. 문제는 우주생명이 선천세계의 상극질서에 의해 상호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증산 상제는 모든 생명이 상호 유기적 질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천지의 새 판짜기를 시도한 것이다. 둘째, 풀이론이다. 선천세계에서 천지와 인간과 문명의 소통작용과 교감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상극질서에 예속된 우주만물 사이의 원한관계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천지만물의 원한관계를 어떻게 풀어버리고 신명의 조화작용을 온전하게 발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과제로 신명풀이가 등장한다. 셋째, 개벽론이다. 판론과 풀이론은 궁극적으로 신명개벽을 통해 후천개벽-자연개벽, 인간개벽, 문명개벽-의 새 세상을 열기 위한 것이다.

증산 상제는 천지와 인간과 문명에 내재한 신명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우주생명이 조화의 기운을 맘껏 발현할 수 있는 살림의 생명판으로 만들기 위해 천지공사를 집행한 것이다. 신명풀이는 천지공사의 일환으로 천지와 인간과 문명에 내재한 신명의 조화작용이 원활하게 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신명풀이를 위해 벌인 굿이 바로 천지개벽굿이다.

천지개벽굿은 선천세계의 상극질서 아래서 서로 교감을 이루지 못하던 천지와 인간과 문명에 내재한 신명의 원한을 해소하여 모든 생명이 한데 어울려 조화롭게 살기 위한 우주적 대동굿 놀이로서, 신명나는 후천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증산 상제의 신명풀이의 담론은 신명의 원한풀이로 선천세계의 상극질서를 허물고 신명의 조화풀이로 생명의 운화작용이 원활히 이루어지게 하는 후천세계의 상생질서를 지향한다.

참고문헌

 

1. 단행본

十三經注疏 上冊, 北京: 中華書局, 1996.

楊伯竣 編著, 春秋左氏傳注, 北京: 中華書局, 1983.

王先謙, 荀子集解 下, 北京: 中華書局, 1988

許愼, 段玉裁注, 說文解字注, 臺北: 黎明文化事業股份有限公社, 1985.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증산도 도전, 서울: 대원출판사, 2003.

김열규, 한국인의 원한과 신명-맺히면 풀어라-, 서울: 둥지, 1991.

김성곤, 한국인의 판문화, 조선일보 문화비전 20021227.

김진, 종교문화의 이해, 울산: UUP, 1998.

박성규, 주자철학의 귀신론, 서울: 한국학술정보, 2005.

박희병, 운화와 근대, 서울: 돌베개, 2003.

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제2, 서울: 대원출판사, 2001.

안경전, 개벽 실제상황, 서울: 대원출판사, 2005.

이어령,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 서울: 문학사상사, 1995.

이어령, 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 서울: 문학사상사, 2003.

이재석, 인류 원한의 뿌리 단주, 대전: 상생출판, 2008.

조동일,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서울: 지식산업사, 1997.

조동일, 이 땅에서 학문하기-새 천년을 맞이하는 진통과 각오, 서울: 지식산업사, 2000.

조동일, 탈춤의 원리 신명풀이, 서울: 지식산업사, 2006.

조용일, 동학조화사상연구, 서울: 동성사, 1990.

허원기, 판소리의 신명풀이 미학, 서울: 박이정, 2001.

임재해, 한국의 민속예술,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4.

채희완,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 서울: 명경, 2000.

 

2. 논문

김기선, 천지굿과 디오니소스 제의, 증산도사상2, 2002.

김익두, 상생해원대동의 천지굿비전과 신명 창출의 문체, 계간 시작11, 2012.

김진형, 신명풀이의 변화양상과 판문화 콘텐츠적 계승방안, 비교민속학58, 2015.

오인제, 증산도 선후천론에 대한 현대적 이해, 증산도사상창간호, 2000.

유철, 증산도의 해원사상, 증산도사상5, 2001.

이어령, 이어령의 미래가 보이는 마당:널뛰기, 중앙일보 2001824.

이어령, 이어령의 미래가 보이는 마당:쌍방향의 신바람 , 중앙일보 20011024.

한양명, 민속예술을 통해 본 신명풀이의 존재양상과 성격, 비교민속학22, 2002.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71개(4/8페이지)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