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남미의 유럽 아르헨티나

김현일 연구위원

2016.04.18 | 조회 6477
[세계지역문화탐방]

남미의 유럽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유럽’으로 불리는 나라다. 동일한 유럽의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아르헨티나는 원주민의 비율이 현저히 낮고 유럽계 백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여 문화도 유럽풍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축구에 열광하고 탱고 춤의 본산지이며 최근 한국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출생국이기도 하다. 근대사에 있어서 많은 부침을 겪은 아르헨티나는 서민의 우상 ‘에바 페론’과 불세출의 혁명가 ‘체 게바라’라는 두 영웅의 이야기가 세월과 함께 회자되기도 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국가이다.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아르헨티나Argentina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에서 동쪽의 대서양과 서쪽의 안데스 산맥 사이에 위치하는 큰 나라이다. 현재 인구는 남한보다 적은 4,300만 정도이지만 영토 면적은 한반도의 약 열두 배인 278만㎢나 된다. 이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 남미에서는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면적이다. 국토가 상하로 길게 뻗어 있어 남북 최장거리는 3,700㎞, 동서 최대거리는 1,700㎞에 달하고, 고원지대와 사막을 포함하여 열대우림에서부터 한랭지대까지 전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기후지역을 갖고 있으며, 북쪽으로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북동쪽으로 브라질과 우루과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칠레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남극 중 97만㎢의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파라과이와 브라질에 가까운 북부 지방은 열대와 아열대 기후가 나타나는 곳으로 면화와 사탕수수가 주로 재배된다. 남쪽으로는 남극권까지 영토가 길게 뻗어 있다.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곳이 파타고니아 지방인데 위도가 높아 빙하가 다수 존재한다. 그 남쪽에는 마젤란 해협이 있고 해협 너머로는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가 있다. 그 가운데 큰 섬은 남한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데 서쪽은 칠레, 동쪽은 아르헨티나 영토이다. 기후는 극지방의 특성을 나타내지만 원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칠레와의 경계에 안데스 산맥Andes Mountains이 있는데 6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최고봉은 멘도사 시에서 100여㎞ 떨어져 있는 안데스 산맥의 아콩카구아 봉Cerro Aconcagua으로 높이가 거의 7000m에 달한다. 이 봉우리는 남북아메리카를 통틀어 가장 높다.

사막도 몇 개가 있는데 안데스 산지에서 가까운 몬테 사막Monte Desert, 남쪽의 파타고니아 사막Patagonia Desert 등이 있다. 사막이 생긴 것은 높은 안데스 산맥이 태평양으로부터 오는 습기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파타고니아 사막은 예전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막에는 숲의 화석들이 많이 발견된다.

오늘날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이 있는 곳은 라 플라타 강La Plata River 연안이다. 200여㎞ 길이에 불과한 이 강이 엄밀한 의미의 강인지 아니면 바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정도로 그 폭이 넓다. 파라과이 쪽의 파라니아 강과 우루과이 강이 합류하여 만들어진 이 강은 강폭이 좁은 곳은 2㎞ 정도지만 넓은 것은 그 폭이 200㎞가 넘는다. 라 플라타 강은 스페인어로 ‘Río de la Plata’, 즉 ‘은(銀: silver)의 강’이라는 뜻이다. 강물 빛이 은빛이라서가 아니다. 당시 스페인인들 사이에서는 은이 엄청나게 많이 나는 땅이 강의 상류 먼 곳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강의 하구에서 1500㎞를 거슬러 올라가면 볼리비아의 포토시 광산이 있다. 안데스 산지의 이 광산은 16세기 중엽부터 엄청난 양의 은을 토해낸 곳이다. 유럽인 탐험가로서 스페인 왕실의 명으로 이 지역을 탐사하였던 세바스티안 카보트Sebastian Cabot가 은이 많이 나는 지역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강 이름을 ‘은의 강’이라 불렀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이름도 은銀을 뜻하는 라틴어 ‘아르겐툼ărgéntum’에서 온 것이다.

이 라 플라타 강 남북으로 팜파스Pampas라고 불리는 광활한 초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중부 지역을 차지하는 이곳은 면적이 무려 75만㎢에 달하는데 북쪽으로는 파라과이와 우루과이는 말할 것도 없고 브라질의 일부도 포함된다. 기후는 온난하고 강우량도 500~1200㎜ 정도로 농업에 적당하다. 목축은 말할 것도 없고 밀과 다른 농작물 재배에 유리한 지역이다. 오늘날 팜파스 지역은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한 농업의 중심지이자 제조업 또한 발달해 있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중심지로 작용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역사

스페인 식민지 시대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년밖에 되지 않지만 독립 이전에는 약 300년간 스페인 왕의 영토였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더불어 남아메리카를 나누어가졌다. 포르투갈은 오늘날의 브라질 지역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스페인의 차지였다. 아르헨티나 지역은 1516년 스페인 항해사 후안 데 솔리스Juan de Solis에 의해 발견된 후 1580년 스페인 식민이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오늘날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가 들어서 있는 라 플라타La Plata 강 연안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이곳에 정착촌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원주민들의 반발로 쉽지 않았는데 금이나 은 등 자원이 많아 굳이 정복을 강행할 대상 지역도 아니었으므로 아르헨티나는 16세기 내내 스페인 식민지 변경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토지는 광대하고 비옥하였지만, 이곳에 정착해서 살려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인구는 오랫동안 매우 희박하였다.

라 플라타 지역에 대한 스페인 당국의 관심이 급상승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페루를 관할하고 있던 스페인 총독의 지배를 받으며 페루와 인접한 북서쪽 지역(투쿠만Tucuman, 코르도바Cordoba 등)이 교역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정도였으나, 177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아르헨티나 총독부가 독립하여 설치된 후부터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유럽과의 중심 무역항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에 오랫동안 스페인과 대립관계에 있던 영국과 그 동맹국 포르투갈이 라 플라타La Plata 지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자 스페인 당국은 군사적인 이유에서 라 플라타 지역을 새로운 부왕령(총독부)으로 독립을 시킨 것이다. 스페인의 관리들이 몰려들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도 번창하게 되었다. 기존에 페루를 경유하여 교역을 하도록 제한했던 스페인 정부의 상업정책도 바뀌어 스페인 식민지 내의 다른 항구들로부터 직접 선박이 물건을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으로 들어올 수 있게 허용하였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지역의 경제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인구가 늘고 산업활동도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구는 1750년 12,000명 정도였는데 1800년에는 5만으로 늘어났다.

독립과 국가 형성기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스페인의 부왕체제가 붕괴(5월 혁명)되고 1816년 투쿠만Tucuman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Las Provincias Unidas del Rio de la Plata)를 결성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의 동맹국이었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는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동맹국을 공격한다는 입장에서 스페인의 영토인 라 플라타 지역을 몇 달간 점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의 백성들인 이들 현지 주민들은 스페인 주둔군과 힘을 합해 저항하여 영국군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군사적 저항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 아메리카 현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인 크리오요Criollo들이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자신감을 얻어 내친 김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수년간에 걸친 독립전쟁(1810~1817)이 일어났다. 이 독립전쟁은 라 플라타 지방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었고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인들이 독립 영웅으로 여기는 호세 데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칠레와 페루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함으로써 스페인은 1817년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마르틴 장군에 의해 칠레와 페루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물론 새로이 탄생한 나라는 오늘날의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큰 나라로서 남아메리카 연합제주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1811년 파라과이가 떨어져나가고 1825년 볼리비아가 떨어져나갔으며 우루과이 역시 아르헨티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 브라질에 합병되었다가 1828년 영국의 중재 하에 양국 사이의 완충국이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렇게 하여 새로운 나라로 탄생한 것이다.

독립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함하는 전지역 합병을 주장하는 중앙집권주의자(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의 상업자본가)와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연방주의자(서부 내륙지방 군벌, Caudillo) 간의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어 쿠데타와 반란이 빈발하였고 심지어는 내전도 몇 차례 벌어졌다. 양측의 대립으로 인해 국가원수가 없이 주provincia 연합이라는 형태로 국가를 유지(1831~1852)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지사가 외채관리와 대외관계를 맡았지만 국가원수는 아니었다.

연방정부의 출범과 발전
1853년 아르헨티나는 내전 끝에 연방헌법(임기 6년의 대통령제 및 양원제)을 제정함으로써 지방 군벌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연방주의적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후스토 호세 우르키사Justo Jose Urquiza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함하는 최초의 단일 연방국가 탄생은 1861년 바르톨레메 미트레Bartolomé Mitre 장군의 대통령 취임으로 실현되었다. 독립 이후 반세기만인 미트레 대통령 재임 중에 비로소 국고, 관세청, 국민군, 민법전 등 국가의 구성 원칙들이 반포되고 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시가 주에서 분리, 연방수도가 되면서 실질적인 아르헨티나 연방정부가 출범하였고, 1880년 이후 1930년대까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서 농목축업에 기초한 곡물 및 육류의 유럽 수출로 거대한 국부를 축적하여 세계 5대 경제 부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외국 자본(특히 영국 자본 등)의 투자에 의해 철도, 도로, 전기, 통신 등 국가 기간시설들이 건설됨에 따라서 외국자본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수출의 감소와 농촌인구 도시이주 및 노동 빈민계층의 형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증대와 국가주의 의식 확산 등 여러 가지의 사회정치적인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페론Peron과 군사정부
1943년에 국가주의적 의식을 가진 청년장교 중심의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로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 대령이 부통령 겸 노동장관으로 취임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1946년 6월 대통령에 취임한 페론은 재임 기간 중(1946.6~1955.9) 서민 대중과 노동자들의 경제적 지위 및 복지 향상을 표방한 페론이즘Peronism정책을 추진(1949년 헌법개정)하는 한편, 수입 대체 산업육성을 위한 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페론 대통령은 1955년 군부 쿠데타로 스페인으로 망명하였다가, 1973년 대통령으로 다시 복귀했으나 1974년 7월 서거하여 3번째 부인이자 부통령이던 마리아 마르티네스 페론María Estela Martínez de Perón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보통 ‘이사벨Isabel’이라는 예명으로 불리는 마르티네스 페론은 이로써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군부독재시대
하지만 1976년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도 실각하고 호르헤 비델라Jorge Rafaél Videla 군사평의회의장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비델라 정권은 곧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실상 헌법을 정지시켰으며, 의회해산, 노조활동 금지 등 좌익인사와 노동운동가에 대한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 불리는 탄압 정치와 함께 반정부 인사 납치·살인 등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군부통치 기간에 실종자만 최하 9천명에서 높게는 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부 정권은 1978~1980년 사이에 금융자유화, 무역자유화 등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로 인해 과도한 외자도입이 이루어진 결과 외채 증가 및 대규모 금융파동이 발생되고 경제혼란이 야기되었다. 1981년 3월에는 로베르토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 Redondo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8개월 만에 사임했고, 그해 12월 레오폴드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82년 4월에 말비나스Malvinas(포클랜드Falkland)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175일 만에 패전하였고, 당시 경제 상황이 외채 450억 달러, 인플레이션 430%에 달할 만큼 악화로 치달았으므로 정치 사회적 국정 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이어 1982년 7월에 레이날도 비뇨네Reynaldo Bignone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국민들의 민정이양 요구로 1983년 10월 총선거를 실시해 같은 해 12월 혁신당UCR의 라울 알폰신Raul Ricardo Alfonsin이 대통령에 올랐다.

군부 통치 기간 중인 1960년대에는 인민혁명군ERP이라는 이름의 좌익 게릴라 집단이 태동되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정치가이자 혁명가인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대기업 경영자, 군부인사들을 납치 살해하는 등 도시게릴라로서 활동하였는데 쿠바의 지원을 받았다. 1983년 군부 통치의 종식과 함께 이들의 게릴라 활동도 차츰 사라졌다.

민주주의 회복과 메넴 정부
알폰신 대통령 취임과 민간 정부의 출범은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는 했지만, 인권위반 조사를 둘러싸고 벌인 군부와의 마찰과 노조 파업 등 사회적 혼란으로 초인플레(1989년 4,900%)가 발생하고 서민층의 폭동과 약탈 사태 등이 이어져 알폰신 대통령은 5개월을 앞당겨 조기 정권이양을 단행했다. 그 결과 1989년 7월 정의주의당PJ(일명 페론Peron당)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Carlos Saul Menem이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는 화폐를 개혁하고(austral에서 peso로) 고정환율정책(미 달러와 페소화의 환율을 1:1로 고정), 시장 개방조치 등 물가안정 정책과 및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집권 2기(1995. 5월 재선)에 들어 고정환율정책의 부작용과 방만한 경제운영으로 재정적자 확대를 초래하였다.

루아 대통령의 하야 및 디폴트 선언
1999년에는 혁신당UCR과 국가연대당(Frepaso당)의 연합야당(Alianza) 후보인 페르난도 데 라 루아Fernando de la Rúa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하지만, 2001년 12월 긴축재정 정책의 일환으로 예금인출 제한조치가 실시되자 피케떼로Piquetero 운동(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으로 특히 실업자운동의 대표적 투쟁방식)이라 불리는 과격한 민중시위에 의해 루아 대통령은 결국 하야하게 되었으며, 아르헨티나는 1,32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에 대한 디폴트default(채무불이행)를 선언함으로써 국가 부도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는 루아 대통령의 잔여임기 기간 동안의 임시대통령으로 에두아르도 두알데Eduardo Duhalde 상원의원을 선출했다. 두알데 대통령은 절박한 경제난 타개를 위해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의 구제금융 지원 획득을 위한 교섭과 정치안정에 주력하면서 2002년 1월 고정환율 정책을 폐지하고 평가절하를 추진(1미불=1페소를 1미불=3페소로)하였으며, 예금동결 해제 방안으로 예금의 강제 채권화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예금주들의 강력한 반발과 의회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법안 제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동결된 예금의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하는 시위와 연이은 각종 시위의 발생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2002년 6월에는 시위대와 경찰 간에 유혈충돌 사태가 발생하였다. 두알데 대통령은 경제사정 악화에 따른 사회불안과 IMF와의 교섭부진 등 총체적 위기 극복을 위한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2003년 대통령 선거 실시와 정권교체 계획을 발표하였다.

키르츠너Kirchner와 페르난데스Fernandez 정부
2003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과 여당의 네스토르 키르츠너Nestor Kirchner 산타크루스 주지사가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키르츠너 대통령의 부인인 정의주의당PJ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 상원의원이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아르헨티나 역사상 직접 선거로 당선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고, 선거를 통한 부부 간의 정권 이양을 실현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직선 부부 대통령이라는 진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취임 초기 60%대 이상의 지지율을 보였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08년 3월 곡물류에 대한 변동 수출세 부과로 시작된 정부와 농업계간의 갈등, 지속적인 인플레이션과 경제활동의 둔화로 생긴 페론당 내의 반대 여론과 함께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통치 스타일에 대한 중산층의 거부감 등이 겹쳐서 신뢰도가 하락하였으며, 2009년 중간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2010년 10월 집권 정의당 총재이자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부군으로서 사실상 통치권력의 핵심역할을 수행해 오던 키르츠너 전대통령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서거한 직후 페르난데스 대통령에 대한 동정 등 요인으로 지지율이 급상승하였고 국제곡물가 상승에 따른 경기 호황도 정국의 안정 및 페르난데스 정부 지지율 상승에 기여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2011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여 중남미 국가 중 연임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아르헨티나는 연방공화국 체제로서 각 주의 자치권을 대폭 인정하면서도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3권분립 원칙에 따라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각각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존재한다. 19세기 초 형성된 강력한 주州중심의 연방체제는 1930년대 이후 수입대체산업화 과정에서 약화되면서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1970년대 군사정부 및 1980년대 민간정부 출범 이후 지방분권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행정부는 3권분립 원칙하의 대통령 중심제로서,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이며 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고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으며, 중임제한 규정은 없다.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직한다. 2014년 9월 현재 대통령은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이다.

입법부

아르헨티나의 연방의회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며, 상원은 개별 자치주(또는 자치도시)를 대표하고 하원은 국민을 대표한다. 상원 의석은 72석이고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6년이다. 각 자치주(또는 자치도시)별로 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매 2년마다 선거를 실시하여 의석의 1/3을 교체한다. 상원은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고위 군 간부, 대사, 대법관, 연방법원 판사 후보 등의 임명에 대한 승인권과 대통령, 수석장관, 행정 각부의 장관 및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

하원 의석은 257석이고 인구 비례에 의한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인데 매 2년마다 선거를 실시하여 의석의 1/2을 교체한다. 하원은 예산안 승인 및 조세부담이 있거나 병력 소집을 요하는 법안을 발의할 권한을 지니며 이러한 법안들은 하원의 의결을 거친 후 상원에 상정된다. 또한 대통령, 수석장관, 행정 각부의 장관 및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발의권을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 의회는 연방헌법 제75조에 따라 무역세 부과 및 관련 규정 제정, 조세의 신설 및 폐지, 연방 세입 시스템의 설정, 외채의 도입 및 상환, 정부 예산의 확정, 필요시 지방 정부 정책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개입 명령, 아르헨티나 군대의 파견 및 외국 군대의 아르헨티나 주둔, 국경선 획정, 조약의 승인 등에 관한 사항을 의결한다.

주요 정당으로는 정의주의당PJ(Partido Justicialista, 일명 Perón당), 혁신당UCR(Unión Cívica Radical), 사회당Partido Socialista, 시민연합당Coalición Cívica, 공화당PRO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제도는 연방법원과 주법원이 공히 3심제(1심, 항소심, 대법원)로 운영된다. 법원의 체계는 국가의 최고 법원인 연방법원과 주州법원으로 구성되며, 연방법원은 국가적인 사안이나 서로 다른 주나 주민들이 상호 당사자인 사안을 관할한다. 또한 1994년 개정 헌법에 의해 창설된 사법위원회Consejo de la Magistratura는 연방판사 임명 및 징계 등 사법부 운영을 관장하는 기구인데, 2006년 당시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위원회 규모를 20명에서 13명으로 축소함으로써 동 기구의 친여 성향이 강화되었다.

행정구역

아르헨티나는 23개주, 1개 자치시(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는 독자적인 행정부, 사법부 및 입법부를 운영하고 있다.

경제


 

아르헨티나의 경제현황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GDP 교역 면에서 멕시코·브라질에 이어 3위의 경제대국이고 스페인어권 남미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8위, 남미 2위의 국토면적을 가진 아르헨티나는 전국토의 60%(1억 7,000만ha)가 농업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대평원 지대(팜파스Pampas)여서 ‘목축의 천국’이라 불리우며 전통적으로 농목축업 중심의 경제를 영위하여 왔다. 1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대규모의 유럽 이민자들이 유입되며 농업발전이 본격화되어 한때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농업국가로서 쇠고기와 밀 뿐 아니라 대두와 옥수수, 해바라기도 유명하다.

우호적인 자연조건으로 세계적인 농업국가가 되었지만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아르헨티나 100대 기업 가운데 70 퍼센트 이상이 외국계 기업이라고 하니 제조업의 취약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공산품은 대부분 외국에서 직접 수입하거나 국내에 투지한 다국적 기업의 생산에 의존한다. 유통업도 1990년대 이후 카르푸, 월마트 등의 다국적 대형유통업체들이 진출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계 연쇄점들도 그 수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풍부한 자원과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광물자원(금, 은, 동, 납, 아연, 리튬 등) 잠재보유량은 세계 6위이며, 자본 부족으로 전체 국토의 75% 지역이 미개발된 상태에 있다. 현재 칠레, 볼리비아 국경과 인접한 길이 4,500㎞에 달하는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다양한 탐사 및 채굴 활동이 진행 중이다.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으로 노동권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로 노조 활동이 활발하여 생산활동에 많은 애로 사항이 존재한다. 노사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정부, 법원은 대부분 근로자의 입장에서 법규를 해석하며, 사용주의 해고 비용이 매우 높은 실정이다. 2011년 아르헨티나의 최저임금은 2,300페소(약 547달러)로 중남미 최고 수준이다.

아르헨티나의 외채 딜레마

아르헨티나 경제가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외채 문제이다. 아르헨티나는 다른 남미국가들처럼 독립전쟁 시기부터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여 유럽 은행들로부터 돈을 끌어다 썼다. 독립 직후에는 철도나 항만 등을 놓기 위한 개발자금을 위해 외채에 의존하였다. 아르헨티나가 외채를 갚지 못할 정도로 경제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이다. 과도한 외자유치, 부실기업에 대한 공적 자금 투입 등으로 외채가 급속히 늘어났다. IMF의 구제금융 지원까지 받으며 분투를 벌였지만, 결국 2001년 외채의 상환을 중단한다는 디폴트 선언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긴축정책에 따른 대규모 정리해고, 페소화 평가절하, 월급 및 연금의 공채지불 등으로 빈곤층이 급속히 늘어났다. 2003년에 취임한 네스토르 키르츠너Nestor Kirchner대통령은 환율의 평가절하 정책과 함께 수입대체산업 육성으로 수입을 억제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경제를 안정시키고 외환 사정도 호전시킨 결과, 2006년 IMF 차관 95억 달러를 조기상환하였다. 그 전해에는 채권자들의 대다수와 협상을 벌여 2001년 디폴트 선언된 외채의 3분의 1만 상환하는 것으로 외채조정에 성공하였다. 2005년과 2010년에 실시된 부채 스와프(서로 다른 금리 또는 통화로 표시된 부채를 상호 교환하는 거래)에서 부채액의 약 93%(US 758억 달러)를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채권 재조정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던 NML Capital 등 미국의 일부 채권자(헤지펀드)들은 미국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자신들은 그 협상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자신들의 외채 전액을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액수는 원금과 이자를 합해 15억 달러 정도이다. 이 미국의 헤지펀드들은 2008년에 해당 아르헨티나 국채를 4,870만 달러에 사들였다. 부도난 아르헨티나 국채에 투자하여 엄청난 돈을 번 것이다. 양측이 벌인 여러 차례의 협상이 결렬되고 항소 끝에 미 대법원은 “아르헨티나 정부는 2010년 부채 스와프 당시 참여하지 않은 NML Capital 등에게 15억 달러를 배상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탐욕스런 미국 헤지펀드들의 외채 전액 상환요구를 거절하고 2014년 7월 31일, 13년만에 다시 디폴트default(국가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지난 2001년의 디폴트 선언과 달리 이번에는 정부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음(2014년 7월말 현재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에도 불구하고 디폴트를 선언한 것이어서 그 양상이 조금 특별하다. 아르헨티나의 채무조정 채권에는 ‘채권자 동등 대우 조항(RUFO)’이 명시돼 있는데, 이 조항에 따라 아르헨티나가 미국 헤지펀드에 채무액 전액을 물어줄 경우 채무를 재조정한 나머지 채권단에게 빌린 돈 역시 전액 갚아야 한다. 이것이 아르헨티나가 빚을 청산하는 대신 디폴트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 할 수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 정부는 미 법원의 판결로 인해 집행하지 못했을 뿐, 디폴트의 직접적인 이유라 할 수 있는 국채 이자 5억3900만 달러를 이미 대외결제은행에 예치했기에 자국의 상황을 디폴트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딜레마에 빠진 아르헨티나가 향후 모색해 나갈 전략과 협상 방안 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유럽인이라는 기층 의식

아르헨티나인들은 팜파스 지역의 넓은 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주로 도시에 몰려 산다. 도시에 사는 주민의 비율은 90% 정도로 영토가 좁은 남한과 비슷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전체 4천만 명 중에서 1,700만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도 유독 유럽계 백인의 비중이 높은 나라이다.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아르헨티나가 원주민들의 비율이 낮은 이유는 원래 이곳이 유목생활을 하던 소수의 인디오들만 살던 곳이기도 하지만 스페인인들의 군사적 공격과 노동력 착취, 유럽으로부터 도입된 전염병 등으로 인해 원주민 인구가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원주민은 주로 북부 지역에 산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는 유럽의 이민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1860년부터 1910년까지 3백만 명 이상의 유럽인이 이민을 왔다. 최근에는 중국인들도 많이 이민을 가고 있지만 아르헨티나 국민 중 유럽계 백인의 비중은 97% 정도에 달하며 대부분 이태리계 및 스페인계이다. 그래서 유럽인이라는 의식이 아르헨티나인들의 의식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들도 유럽식 건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레콜레타Recoleta 지역은 파리를 옮겨놓은 것처럼 프랑스풍의 건물과 식당이 밀집해 있다. 이곳에는 국립미술관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 수준 높은 묘들이 많이 있는 레콜레타 묘지가 위치해 있다. 에비타 페론의 묘도 이곳에 있는데 예술성이 높은 묘들 때문에 이 묘지는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이다.

종교와 문화 형태

아르헨티나는 식민지 시대 이후 가톨릭이 주된 종교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2014년 8월 한국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본명 Jorge Mario Bergoglio)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1282년 만에 선출된 비유럽 출신 교황이자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첫 미주 출신, 첫 예수회 출신 교황이라는 기록을 지니고 있다. 아르헨티나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이지만 교회출석자는 20%도 되지 않는다. 유럽처럼 종교적 열정이 식어가는 것이다. 현대 유럽인들은 종교에 대한 열정을 이제는 다른 곳에 쏟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럽인의 후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축구를 좋아한다. 아니 축구에 열광한다. 축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국민들의 사랑을 독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월드컵에서 두 번 우승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었던 1978년 대회와 멕시코에서 개최되었던 1986년 대회에서였다. 유명한 마라도나Diego Maradona가 활약한 것이 멕시코 대회였다. 축구천재 마라도나는 16세에 벌써 국가대표선수가 되었는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아르헨티나의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그 때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처럼 아르헨티나는 독일과 맞붙었는데 아쉽게도 1대 0으로 패했다.

아르헨티나 축구팀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곳이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 클럽이다. 보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네로 원래 항구가 있던 곳이다. 지금도 서민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지만 예전에도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출신의 세 형제가 이곳에서 만든 축구 클럽이 보카 주니어스였고, 마라도나도 이 팀 출신이다. 보카 주니어스와 라이벌이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누네스 지역을 근거로 한 리버 플레이트River Plat 클럽이다. 이 두 팀의 경기는 ‘수페르클라시코’라고 해서 최고의 경기로 여겨진다. 두 팀 모두 영국식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은 20세기 초 축구가 전파된 것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에 정착한 영국인 노동자들로부터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탱고Tango라는 춤으로도 유명한데 남녀간의 노골적인 성욕을 포현하고 있어서 보고 있노라면 좀 낯이 뜨거워지는 춤이다. 이 춤도 보카 주니어스처럼 19세기 말에 서민들의 동네 보카 지역에서 탄생하였다. 원래는 남자끼리 추는 춤이었으나 점차 남녀가 짝을 지어 추는 춤으로 변했다. 탱고가 지금처럼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이 춤이 프랑스로 전파되어 그곳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음식은 문화의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아르헨티나는 소가 많이 사육되는 나라라서 쇠고기를 많이 먹는다. 소갈비를 큼직하게 잘라 소금을 뿌려서 구운 요리인 ‘아사도Asado’가 유명한데 흔히 와인과 함께 먹는다. 아르헨티나의 와인은 우리나라에도 최근 칠레 와인과 함께 많이 수입되고 있는데 안데스 산지에 인접한 멘도사Mendoza 주에서 많이 생산된다. 이 지역은 1000m에 가까운 고지대로 와인 생산에 적합한 기후를 가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마테 차Mate Tea도 우리나라에서 건강음료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감탕나무 과에 속하는 식물에서 딴 잎을 볶아 만든 차이다. 마테는 원뜻이 표주박이라고 한다. 표주박을 자른 그릇으로 먹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차를 만드는 방법은 우리나라의 녹차와 비슷하다. 미네랄과 비타민이 풍부해서 남미인들이 많이 마시는 음료이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관계


아르헨티나는 1962년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이래 전통적으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UN 등 각종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지지하고 있다. 남북 당사자간 직접 대화를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지지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과 한국의 경제발전 및 경제위기 극복을 높이 평가하고, 양국간 통상, 경제협력, 투자, 기술이전 등 실질협력관계 심화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의 아주지역 제3위 교역국이며, 양국간의 교역액 추이는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이전인 1997년에 9억 달러를 기록한 후 계속 감소하다가 2003년 이후 반전되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2013년 현재 양국 교역규모는 약 22.6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대對아르헨티나 주요 수출(10.7억 달러) 종목은 자동차, 무선통신기기부품, 액정디바이스, 폴리에스 테르수지 등 공산품이며, 한국 브랜드 핸드폰, 가전제품 등은 주로 브라질, 멕시코 등을 경유하여 수출이 이뤄지고 있다. 또한 주요 수입(11.9억 달러) 종목은 대두유, 동광, 박류, 사료, 가죽, 원유, 은 등 농산물 및 원재료 중심인데, 특히 대두유 수입량의 70~80%를 아르헨티나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한국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투자 진출은 아직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에너지·자원 분야와 문화 교류 분야 등에서는 양국이 비교적 활발한 협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아르헨티나 이주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반공포로로 석방된 후 아르헨티나를 택한 반공포로 12명(현재 2명 생존)이 현지에 도착해 정착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후 1965년 대한민국 최초의 농업이민단 18세대(93명)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에 도착 후 라 마르께 농장에 정착하면서 한국인의 아르헨티나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66년 파라과이 등지서 교포들이 대규모로 재이주하여 집단 거주를 시작하였고, 1970년엔 해외개발공사 추진으로 취업이민이 성사되었다. 1984년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에서 재이민 교포가 급증하였으며, 1985년에는 한-아르헨 양국 간에 투자이민을 허용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5년에는 한국과정 6년제의 아르헨티나 한국학교가 개교하였고, 1999년에는 아르헨티나과정 7년제의 한국학교가 문을 열었다. 2005년 10월에는 아르헨티나 이민 4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의 한국인 거주 지역은 플로레스Flores(일명 109촌), 아베쟈 네다Avellaneda, 온세Once 등 3개 지역에 밀집되어 있고 교민 수는 1980년대 중반부터 크게 늘어 한때는 3만6천명에 달하고 코리아타운도 형성되었으나 장기간 계속된 주재국 경제불황으로 상당수 교민이 본국, 미국, 멕시코, 브라질 등으로 재이주하여 1만5천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2003년 무비자 입국 조치 이후에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서서 2011년 현재 교민은 약 2만 내지 2만5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유의 근면함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쌓은 한인 이주민들은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학력 인정을 받는 한국 학교, 한국 병원, 한인 골프장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우리 교민의 대부분은 원사 공장을 제외한 원단생산, 의류 봉제, 도·소매업, 수입업 등 섬유 의류에 관련된 전후방 연관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 이민역사 46년이 되면서 교민들의 높은 교육열로 1.5세대 내지는 2세대들이 현지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약 100여 명이 전문인(회계사, 변호사, 의사, 치과의사)으로 활동하면서 현지 주류 사회에 진출해 있는 상태이다.



 

에비타의 주인공, 에바 페론Eva Peron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두고 떠나지 않아요.....)

이것은 1978년 런던에서 초연이 되고 미국에서도 공연 및 리바이벌이 된 바 있는 뮤지컬 ‘에비타EVITA’에서 여주인공 에비타가 부르는 대표곡 가사이다. ‘에비타’(꼬마 에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불린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이 영부인에 오르고 난 뒤 발코니에서 대중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대중들을 높이며 부르는 유명한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노래의 주인공 에바 페론Eva Peron(본명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Maria Eva Duarte)은 1919년 아르헨티나 시골마을 대지주인 아버지와 그의 가정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온갖 역경과 풍파를 겪고서 극적으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인물이다. 15세 때 성공을 꿈꾸며 과감히 가출을 한 에바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출하여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영화배우에 도전하였지만 단역과 조역 배우를 전전하다가 여러 남자들을 편력해가면서 점차 배우와 성우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 25세였던 1944년 지진 자선행사에서 군부의 권력자요 ‘통일 장교단’의 리더였던 49세의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on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후안 페론은 국가 사회주의의 성격을 띤 ‘페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동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권을 잡은 반 페론주의자들에 의해 후안 페론이 구금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에바 페론은 정치적이고 선동적이며 설득을 할 줄 아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후안 페론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자신의 출생과 가난 및 인생 역정의 스토리가 노동자들과 빈민들에게 동질감을 안겨주었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연설을 통해 노동자들을 부추겨서 총파업을 일으킨 결과 파업 10일 만에 후안 페론은 전격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후안 페론은 1945년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며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에바 페론의 인기 덕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은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의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획기적인 정책들을 내세우며 정권유지를 도모했는데, 그의 뒤에는 에비타가 있었다.

에비타(에바 페론)는 에바 페론 재단을 만들고 여성 페론당을 창당하였으며 노조들을 장악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의욕적이고 거침없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아르헨티나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면서 성녀聖女를 자처하였고,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식량 배급, 위생 시설 등을 전격 지원함으로써 노동 계층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가는 곳에는 항상 지지자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에바 페론은 1952년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34세의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 달간의 장례식 동안 에바 페론의 빈소는 국민들이 바친 꽃으로 뒤덮일 만큼 아르헨티나 대중들은 거의 광적으로 에비타를 애도했다.

에비타는 한편으로 ‘국민들의 성녀’, ‘국민들의 영웅’이라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실질적인 나라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포퓰리즘populism(인기영합주의)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 선심성 정책과 허세를 남발하고 사치와 부패에 물들어 나라를 몰락시킨 장본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페론의 집권 시기에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 있는 부富의 재분배가 이뤄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60%를 차지했던 극빈 서민들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 받았고 산업은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후안 페론은 반대세력과 군부의 견제를 받아 실패한 통치자로 낙인찍히고 물러나 망명 길에 올랐다. 에바 페론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후, 페론의 시대는 그렇게 한 시절 역사의 장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노동자, 여성, 빈민들은 여전히 에비타를 그리워했다. 후안 페론은 죽은 아내 에바 페론의 후광을 등에 업고 18년 만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1973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10개월 만에 사망하자 이번에는 재혼한 아내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민중들은 에바 페론을 그리워하고 추앙한다. 아르헨티나의 시골 농가에서 지금도 종종 발견되곤 하는 에비타의 초상화가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월간개벽. All rights reserved. ( 2014년 0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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