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찾기

다시 동이를 말한다(5) 동이족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선주 연구위원

2016.10.17 | 조회 4761

다시 동이를 말한다 (5)

 

 

 

동이족의 활동 

 

2. 동이족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제 동이족의 발자취를 통해 시원 역사의 원형을 찾아보자.

문헌 기록이 거의 없는 고대 역사는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하여 그 역사적 사실을 밝혀갈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인류의 시원 역사를 찾아가는 데에는 거의 발굴자료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최근에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요령성 홍산일대에서 고고학적 자료(유물)가 발굴되었다. 이를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는 요령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약 5500년전의 후기 신석기시대 문화에 해당한다.

 

우하량 유적지가 대표적인 광의의 홍산문화는 일반적으로 홍산의 신석기 유적지 외에 이와 유사하거나 같은 같은 계통의 문화적 특징을 갖고 있는 여러 문화유적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소서하小西河문화(기원전 7000-기원전 6500), 흥륭와興隆窪문화(기원전 6200-기원전 5200), 사해査海문화(기원전 5500-기원전 5700), 부하富河문화(기원전 5200-기원전 5000), 조보구趙寶溝문화(기원전 5000-기원전 4400), 협의의 홍산문화(기원전 4500-기원전 3000), 소하연小河沿문화(기원전 3000-기원전 2000), 하가점夏家店하층문화(기원전 2000-기원전 15000) 등이 포함된다.

 

홍산문화란 명칭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 동북방에 위치한 산인 홍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홍산 인근에서 거대한 신석기문화가 발견되었고, 이후 이 유적은 요령성, 내몽골, 하북성 경계 연산燕山 남북과 만리장성 일대 등 대규모 지역을 포괄한다.

 

홍산문화의 유적은 1906년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우[鳥居龍藏]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는 적봉일대의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바로 후에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의 적석총 유적이다. 그러나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홍산문화가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의 발견에 의해서이다.

1980년대 이후 옥기 부장묘, 제사 유구와 그 유물이 합쳐진 대규모 유적군을 이루는 우하량 유적의 발견은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대한 발견의 하나로 손꼽힐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우하량 일대에서의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 등이 발굴되었다. 이들 유적은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시대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유적지는 이미 당시에 계급이 분화되고,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고대 국가의 기반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유적이었다.

적석묘가 발견되는 지역은 만주 일대와 한반도 지역 그리고 일본 등으로 기마 민족의 이동 경로와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 계통의 민족 이동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다. 적석묘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인정되고 있다.

 

여신묘는 제단과 적석총으로 조성된 대형 종교유적지이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물 조상造像은 여신묘의 주체로 당시 받들어 공양한 신령이다. 여신묘에서 출토된 인물 소상塑像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어, 공양을 받은 신이 이미 으뜸과 버금으로 나뉘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홍산문화에서는 옥기玉器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홍산문화가 주목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옥기를 부장한 무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옥기는 장신구와 제사용의 도구로서 중국 전통적인 정신세계에서는 진귀하고 소중히 여겨지는 것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돼지, 용의 형상, 구운형鉤雲形의 장식패옥 등은 비교적 복잡한 옥기로,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있으며, 조형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이는 일정한 규격으로 원시 예기禮器를 만든 것에 따른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백옥저룡白玉猪龍을 들 수 있다. 관념상 용은 일종의 추상화된 신령神靈이다. 이러한 옥저룡의 출현에 대해 홍산문화 거주민이 이미 용을 숭배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옥저룡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돼지형상의 옥저룡이라고 보지만, 곰 형상의 옥웅룡玉熊龍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초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동물 모양의 옥제품이 돼지를 닮은 것으로 보아 옥저룡玉猪龍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 특징이 곰에 더 가깝다며 '옥웅룡'으로 바꾸고 웅룡이 용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홍산문화의 곰토템을 황제족과 연결시켜 요서지역이 황제족영역이었다는 논리로 전개시킨다는 점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엽서헌葉舒憲교수는 곰토템의 황제집단 기원설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곰토템은 유웅씨有熊氏라는 별명을 가졌던 황제집단에서 시작돼 우순虞舜 시대와 하나라 시대로 이어졌고, 곰을 조상으로 삼는 신화는 전욱顫頊을 거쳐 진나라, 나라, 나라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승됐다.

(황제족의) 곰토템은 고대 퉁구스인과 가까운 종족군種族群의 전파작용에 의해 조선족(한민족)의 옛 기억 속에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웅모생인熊母生人신화를 남겨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옥웅룡을 또 하나의 증거사례로 들어, 중국의 고문헌에는 황제족의 곰토템과 관련된 기록이 없지만 그 실마리는 남아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참조하면 황제족 곰토템신화를 복원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이와 함께 발생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화하족의 토템동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용은 곰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면서 신석기에 속하는 홍산문화 우하량 여신묘의 발견으로 용의 기원 연구가 참신성을 띄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무대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홍산문화 지역의 여러 유적.유물 발굴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신석기인의 곰숭배 문화는 황제족의 것이 아니라 퉁구스족이 가져온 2-3만년 전의 고아시아족 것으로서, 황제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게 국내 학자들의 일반적인 학설이다.

우실하 교수는 이와 관련, 홍산문화 만기(기원전 3500-기원전 3000)의 주도세력을 곰토템 집단이자 그 이전 모계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보면서 황제족은 홍산문화를 주도한 단군신화 웅녀족의 후예였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우교수에 따르면, 우하량유적으로 대표되는 홍산문화 만기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로서 아직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초기 부계사회였으나 황제 신화를 보면 그 후손이 모두 남성으로 이어지는 등 이미 고도화한 부계사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만일 홍산문화의 곰토템이 황제 유웅씨와 관계된다면, 부계사회의 황제족은 그보다 이른 초기 부계사회인 홍산문화의 후예가 되고, 그럴 경우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족은 홍산문화를 주도한 곰족, 즉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족의 후예가 된다는 것이다.

 

옥기는 묘장墓葬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상등 규격의 옥기는 대형 적석총 중심 대묘 가운데에서 많이 보인다. 이들 옥기를 출토한 대묘大墓는 기세가 웅위雄偉하다. 같이 매장된 옥기의 수량이 많고 정미한 재료를 사용해 묘 주인이 당시 사회의 귀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산 정상에서 발견된 중앙 대형묘의 주인은 손에 옥 거북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의 씨족 구성원들의 신분 분화가 이미 명확했으며, 집단의 수령이 이미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에, 중형 묘지들도 항상 옥기를 매장하여, 옥기가 홍산 문화 에서 중요한 부장품이 되었다. 이같이 옥을 매장하는 현상은 홍산문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옥기문화는 북방계통 세석기문화의 후속문화이다.

중국의 곽대순, 대만의 양미리 등은 발달된 옥기문화가 서요하유역에서 기원한 것은 이 지역의 어렵문화와 관련된 세석기문화 전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세석기문화는 시베리아 남부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이는 세석기문화 주도세력이 옥기문화의 주도세력이고, 이들의 주맥은 한반도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석기문화는 중원쪽으로는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후에 일부 세력들은 산동 지역으로 남하하여 양저문화용산문화대문구문화 지역에서 많은 옥기를 남기게 된다.

한반도와 세계 최초의 문명이 형성된 요하지역과의 연계성은 이것 외에 또 있다. 요하지역의 최고 문명인 흥륭와 문화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굴되었는데 이 옥 귀걸이에 사용된 옥은 요녕성 수암에서 나온 수암옥이다. 이는 만주지역의 동쪽과 서쪽이 교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중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옥 귀걸이가 그것도 흥륭와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이 그것인데, 외양이 흥륭와문화의 옥귀걸이가 비슷하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청동기 시대로 가면 BCE 2400-BCE 1500년의 적봉일대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BCE 1400-BCE 700년의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였다. 이들 문화는 홍산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후속문화로, 이 지역에서 발원한 고조선의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신석기와 청동기가 모두 출토되는 내몽고 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에는 초기국가 단계로 진입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를 중심으로 한 요하일대 신석기문화를 요하문명이라고 칭한다.

기존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을 아무런 근거없이 중화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요하일대에서 빗살무늬토기고인돌적석총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 등이 대량 발굴됨으로써 중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이들 유물은 중원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한반도에서는 많이 발굴됐다. 또한 이것은 모두 내몽고-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다. 중국은 중원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을 오히려 역이용한다. 요하문명과 한반도의 연계성을 단절해 중원문명의 시작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중국 고고학계는 요하 문명을 황하 문명과 더불어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즉 황하 문명에 기초한 중화주의를 폐기하고 동이의 요하 문명과 한족의 황하 문명, 그리고 남방·서북 문화가 중원으로 모여 완성된 문명으로 거의 정리한 상태다.

 

한반도와 요하문명은 동일문화권이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빗살무늬토기인데, 과거에는 노르웨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유럽과 시베리아를 거쳐, 한 갈래는 흑룡강과 두만강, 또 하나는 바이칼을 거쳐 몽골, 만주, 압록강으로 해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설이 유력했다. 암사동과 북한 평양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의 것과 상당히 다르고 이런 토기는 발해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농경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석기도 다르다. 대표적인 것인 반월형석도인데, 산동반도나 황하 하류 등에서 다 나오지만 시베리아에는 없다. 토기의 경우 신석기와 청동기를 거쳐 빗금무늬에서 무문토기까지 계속 발전해왔다. 이렇게 한반도와 요동반도·발해연안이 동일문화권으로, 동이東夷 문명이 고대문화를 형성한 걸로 보는데 왜냐하면 동질성의 문화, 일종의 비슷한 문화가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형구 교수는 중국의 요하문명론에 대응해 발해문명론을 주창하고 있다. 동아시아 고대 문명을 요하 유역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황하, 대릉하, 요하, 압록강, 유역을 포함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대 문명은 모두 강과 바다를 끼고 발달했고, 이 강들은 모두 발해만으로 흐르며, 이 일대의 문화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 대부분은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예맥족으로 본다. 그러나 중국은 홍산문화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중국의 홍산문화를 주도한 세력은 황제족의 후예들인 예맥족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예맥이란 명칭은 선진시기부터 요하 동쪽에 거주하며 농경을 영위하던 예족濊族 일반에 대한 범칭이다. 예맥족은 본래 한반도와 만주일대에서 거주하였다.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예맥족의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요하문명의 주인공 - 예맥족은 화하족의 후예가 아니라 동이족이다.

그런데 가면과 옥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홍산문화 유적지가 단군신화 속 곰토템을 지닌 웅족과 고조선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이 자리했던 곳이란 입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홍산문화는 앙소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원류로 홍산문화를 들고 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된다.

동이족의 활동 무대였다고 인정되는 산동 및 회수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대체로 북신문화 대문구문화산동용산문화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문화北辛文化인데, 북신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또한 BCE 4500년경의 이 지역 초기 대문구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다. 북신문화와 초기 대문구문화의 분포 범위가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산동 연주왕인兖州王因, 태안대문구泰安大汶口 등의 유지 등 몇몇 유적의 지층을 분석한 결과 상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유골의 신체적인 특징까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대문구문화가 북신문화를 계승하여 독자적인 발전 과정을 겪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1959년 산동성 태안현에서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100개소 이상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탄소 방사성 측정 결과 5,700여 년 전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소호少昊)는 문자까지 발견되었다는데 소호는 동이족의 성씨이다.

이 대문구문화는 산동용산문화山東龍山文化에 선행하는 동이계 문화라고 보여진다. 대문구문화는 토기 제작기술 등에서 산동용산문화와의 긴밀한 계승관계를 명백히 볼 수 있기 때문에 대문구문화의 기초위에 산동용산문화가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문구문화의 연대는 BCE 4300-BCE 2200년으로 추정되는데 신석기 말기-청동기 발생기의 문화라고 한다. 학자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초기(BCE 4300-BCE 3500), 중기(BCE 3500-BCE 2800), 말기(BCE 2800-BCE 2000)가 그것이다.

묘장과 부장품을 통해서 보면 대문구문화 초기는 모계씨족사회의 말기에 해당되나, 중기에 이르면 사유재산과 계급분화가 두드러져 이미 부계제단계에 진입하였음을 볼 수 있다. 대문구문화 말기에는 생산력이 증가하였고, 도기제작 기술도 동시대의 어떤 문화보다 뛰어났다.

산동성 거현 능양하에서 아사달문양이 새겨진 팽이형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대문구문화 말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팽이형 토기는 고조선 전기에 청천강 이남부터 한강 이북 지역에서 크게 성행한 토기인데, 이 토기가 산동지방에서 발견된 것이다.

사회학자이면서 민족사를 연구해온 신용하는 이 유물들을 통해 고조선이 서로는 발해와 서해를 건너 산동, 하북, 하남 으로 진출해 고조선 문명권을 형성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산동지방에 고조선 문명권에 속하는 여러 소국들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대문구문화는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된다. 4천에서 45백년 전 산동山東과 강소江蘇 북부에 대문구문화가 발전해 내려오고, 고대 동이인이 창조한 선사시대 문화인 용산문화가 출현했다. 그 생산력은 장족의 발전을 했고 도기 제작업이 발달했는데 반짝거리는 흑도黑陶가 가장 특색 있었다. 산동용산문화의 토기는 토기색채와 제작법, 기형으로 미루어 볼 때 대문구문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고, 대문구문화 말기에 출현한 녹로기술을 도입하여 발전하였다. 그러나 대문구문화기는 후기에 와서 토기조성에서 흑도의 중가세가 보이기는 하지만, 홍도, 회도가 많은데 비해 용산문화기는 토기제작에 녹로를 사용한 흑도 위주이다. 또한 정교한 옥기가 있고 동기銅器제련 기술에도 능했다. 견고한 큰 성루의 출현과 호화스런 대형묘 등은 용산문화가 이미 초급 문명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BCE 3000-BCE 2000년 전후의 용산시대를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라고 하며, 신구세력이 교체되고 원시사회에서 문명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보고 있다.

치우천황이 수도를 정한 청구국은 대문구문화를 계승한 용산문화의 시기에 해당된다. 치우 생존시기에는 청동기가 병기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발달한 산동용산문화를 그 배경으로 한다.

청구국의 강역은 중국대륙의 태항산맥太行山脈 동쪽의 화북평원임을 알 수 있으며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과 일치한다.(讀史方輿紀要에 의하면 청구는 산동 청주부 낙안현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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