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정원식 연구위원

2020.06.11 | 조회 720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지난 6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제65주년 현충일 추념식은 작년 추념식과는 다르게 큰 논란 없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지나갔다.

작년 현충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전부터 독립 유공자 서훈과 관련해 논란이 일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해 약산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우리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는 언급 때문이었다. 이때 보수 성향의 언론과 시민단체, 정치권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남침의 원흉인 약산 김원봉과 그 조선의용대가 국군의 뿌리---국민에 대한 모욕이라며 대통령 추념사 발언에 대해 맹렬히 성토하였다. 이에 정경두 국방부장관은 국회 법사위(2019.7.16.)에서 야당의원 질의에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는 항일무장투쟁과 광복군 활동에 대해선 큰 공적이 있지만, 좌익 계통에서 활약하고 북한정권 창출과 6.25 남침에 기여했다라고 답변하며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1940년 조선의용대 대장시절 약산 김원봉>

 

이처럼 뜨거운 논란 중에 작년 119의열단 약산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가 창립식을 거행했다. 그날 참석한 400여 명의 시민들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삶을 재조명해보며, 좌우 이념의 대척점에 서 있는 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는 그 자체에 가치와 의미를 두었다.

 

<2019119일 성공회대학교에서 열린 의열단 약산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

 

그날 창립식에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약산 김원봉장군기념사업회가 주도가 되어 민간 차원에서라도 그 분들의 항일애국 정신을 기려야한다라고 강조하였다. 또 도올 김용옥 선생은 약산은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힘쓴 순수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임을 힘주어 피력했다.

한편, 다음날은 신흥무관학교 항일정신으로 의기투합하여 결성한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의열단은 항일 무장단체인 조선의용대, 한인애국단, 광복군의 설립에 큰 산파역할을 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 30여 년 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해방 후 북한에서 11년 행적으로 서훈은 커녕, 좌우이념과 정파 간 프레임에 갇혀 세간의 온갖 오해를 받으며 정치공방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래서 약산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진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약산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약산은 독립운동 초반에  한때 공산주의로 기울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2781일 중국 장쑤성에서 일어난 난창 봉기에 참여했던 대부분 의열단원 출신들이 장제스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받아 희생되자, 김원봉은 중국 공산당 세력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했음을 인지한 후 공산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약산 선생과 조선의용대에 대해 서울시립대 염인호 교수는 해방 때가지 김원봉은 소련 및 중공과 전혀 연계를 갖지 않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서 항일투쟁에 유리한 현 실적인 정치행보를 취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약산은 19304월 북경에서 안광천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울 때 관여한 적은 있지만 공산주의자로 산적은 없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특히, 약산이 주도하여 조직한 조선의용대(1938.10.10/중국 우한(武漢) 한커우(漢口)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창설)가 공산주의 단체로 변모해 1941년 황하강을 건너 화북지역 공산당 지구로 북상할 때, 약산은 본진 40 여명을 데리고 19424월 김구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들어갔다. 만약 약산이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다면 임시정부에서 받아들였을까, 또 장제스 국민당정부가 과연 지속적으로 지원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담당했던 미국 전략국 요원이었던 클레런스 윔즈(Clarence Weems)약산 김원봉 보고서에서 김원봉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단체들과 손잡고 일했다. 일례로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이 결성한 국민당 소속의 극우파인 남의사(藍衣社:1931년 중국 장제스 국민당 우파가 결성한 국민당 산하 비밀정보기관)의 일원이었으며 그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약산 김원봉은 조국 독립만 쟁취할 수 있다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실용적 좌파 민족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역사편수관인 리처드 로빈슨은 그의 저서 미국의 배반에서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가입을 단호히 거부하는 좌파 민족주의자로서 공산당의 고질적인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를 거부했다.....김원봉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 기꺼워 하지는 않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 김원봉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 있었다. 그는 조선노동당 강원도당 지부에서 활동하다 중앙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이 인물로 인해 약산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것으로 오해받았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였던 알렉산더 푸자노프는 그의 일지에 약산은 북에서 조선노동당에 결코 가입하지 않았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한편, 현재 진보와 보수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김구가 민족주의 우파세력의 지도자라면 김원봉은 민족주의 좌파세력의 한 축을 이룬 지도자로 인식한다. 약산은 한마디로 실용적인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다. 약산의 정치성향은 민족주의를 뿌리로 삼고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를 자양제로 삼아 민족주의를 내실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절충주의를 넘어 실사구시적 이념, 곧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생명력 있는 정치적인 신념체계를 정립해나간 것이다.

둘째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의용대가 한국전쟁에 남침의 전위대로서 활동했다는 오해이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 우한에서 김원봉이 체계적인 항일 군사대오 형성을 목표로 창설했다. 중국 관내 정치·군사의 지형 변화로 인해 대원의 대다수가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화북 지역의 근거지로 북상하여 19417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된다. 이때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중공 팔로군과 대등한 관계이면서, 동시에 김원봉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미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