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증산도의 근본사상 제11회 피은(被恩), 지은(知恩), 보은(報恩)에 대한 우주론적 이해

유철 연구위원

2019.10.10 | 조회 43

증산도의 근본사상 제11

 

2) 피은(被恩), 지은(知恩), 보은(報恩)에 대한 우주론적 이해

원시반본의 실천이념인 해원과 상생도 상호 주고 받음의 관계이지만 보은의 주고-받음의 관계는 이와 다르다. 엄밀히 보면 해원과 상생은 오히려 보은과 반대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해원이나 상생은 상대방에게 은혜를 베푸는 행위라면, 보은은 이와 달리 받은 은혜를 전제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관계이다. 즉 보은은 은혜 입음이라는 전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는 보은이 쌍방적 관계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상생도 서로 살림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엄격히 쌍방적 관계일 필요는 없다. 내가 남을 살리는 것은 반응을 필요로 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원 또한 원의 주체와 객체의 상관관계를 필요로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원이 쌓이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 입음, 피은被恩이 없이 보은이란 것은 불가능하다.

피은과 보은의 순환 고리는 모든 존재의 존재원리이다. 이러한 쌍방적 관계는 보은줄이란 개념을 통해 필연적 행위원리로 귀착된다. 여기서 우리는 피은과 지은知恩과 보은의 상관관계를 주목해야한다. 은혜를 입었다는 것만으로 보은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그 은혜가 암묵적이거나 워낙 작을 수 있고,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커서 그 은혜의 존재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은혜는 그 은혜에 보답할 필요도 방법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은혜는 반드시 인식되어야만 보은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은혜에 대한 인식, 즉 지은은 보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은의 의미이다. 즉 은혜를 갚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 받은 은혜를 반드시 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은혜 입음, 즉 피은이 보은의 전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는 진정한 보은이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은은 은혜가 과연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인 만큼 은혜의 근원과 내용에 대한 분석이 불가피하다.

보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보은의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 보은의 구체적 대상은 은혜의 구체적 내용과 그 은혜를 베풀어 준 모든 존재이며, 보은의 주체는 은혜를 입은 자이다. 자연의 오묘한 변화와 인생의 모든 일은 그 어느 것도 주고받는 법칙을 벗어난 것이 없다. 은혜를 주고받음은 생명의 조화와 창조의 원리이다. 인간은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간에, 사회 구성 원간에, 더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며 모든 생명존재와 은혜를 주고받는다.

보은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은혜의 대상에 대해 말해준다. 천지의 만물은 모두 상호 은혜 갚음의 주체이며 대상이다. 증산은 이를 천지보은天地報恩이란 말로 요약한다. 이는 한편,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은혜의 주고받음으로 그 생명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뜻하며, 다른 한편 우주 내의 모든 생명존재는 그 생명의 근원이며, 만물의 존재근거인 천지와 천지의 주재자에게 보은해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중 후자의 의미는 증산도 보은사상의 우주론적 이해를 위한 바탕이다.

보은사상과 관련해서 은혜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천지보은의 개념분석이 가장 일차적으로 요구된다. 천지보은이란 말은 천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는 다시 그렇다면 천지의 은혜란 무엇인가란 물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천지보은이 증산도의 보은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천지는 곧 만물의 존재근거이며 만생명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증산은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2:26:5) 라고 단언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도전의 다음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형상하여 사람이 생겨났나니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니라. 하늘땅이 사람을 낳고 길러 사람을 쓰나니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를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느냐!(2:23:2????6)

천지는 만물을 낳은 근본이다. 인간은 그 중에서 그 은혜를 인식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보은이란 개념은 인간에게 해당되며, 특히 천지가 낳은 생명의 은혜에 대한 보은을 우리는 천지보은이라고 한다. 위 구절에서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를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라는 구절에서 천지보은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낳음에 대한 보은의 중요성, 그리고 그 보은은 곧 천지개벽의 때에 인간의 역할과 관련된다.

만물을 생성함이 끝이 없음은 천지의 대업이요 쉬지 않고 운행함은 천지의 대덕이니라.(2:49:3????4)

천지의 대업은 만물을 낳고 기름이며, 천지의 대덕은 그러한 만물을 쉬지 않고 이치대로 운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천지의 은혜는 사람을 낳고 기르는 은혜 그 자체이므로 천지에 보은함은 생명의 근본에 보은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증산은 이러한 천지보은은 바로 천지대업에 참여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천지의 은혜는 곧 생명, 삶의 은혜이다. 이러한 천지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인식은 동양적 사유의 본질이다. 서양의 자연관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 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한 기계적 자연관이라면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을 따라야할 대상, 생명의 어머니로 인식한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곧 유기적 관계이며 이를 통한 자연관은 유기적 자연관이다. 서구의 기계적 자연관은 자연을 도구로 생각하도록 하였으며 그러한 자연관의 결론인 과학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서양의 과학은 자연과 물질을 분석하여 잘게 쪼개고 다시 그것을 종합하여 문명의 도구로 이용한다. 이러한 서양이성의 특징을 계몽철학자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도구적 이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양적 사고에서 자연은 인간과의 조화를 통해 그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며 천인합일天人合一, 혹은 자연합일을 추구한다.

자연에 대한 지배는 근세 과학의 아버지 베이컨(F. Bacon, 1561-1626)에 의해 아는 것이 힘이다는 모토motto로 드러났고 이러한 서구과학의 힘은 철저히 자연의 생명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자연을 기계로 간주하고 정복하고 이용해야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즉 자연이 기계라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서양의 기계적 자연관에서 천지와 인간의 관계는 은혜를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가 아니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 또한 도덕적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반면 동양의 자연은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어머니 가슴과 같은 존재이다. 신은 자연을 창조하였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라고 명령하는 기독교적 자연관은 물질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생태계파괴와 환경의 오염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천지자연을 생명의 근거로, 양육의 어머니로 받아들이는 동양의 자연관에서 볼 때 자연의 변화와 운동은 곧 인간과 만물의 존재이유, 생명의 근거이다. 즉 다시 말해서 자연을 기계가 아니라 천지생명의 부모로 인식하는 자연관에서 자연과 인간은 동종同種의 생명성이며, 상호 파괴적,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상생적 은혜수수관계에 있다.

이러한 자연의 은혜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연은 말없이 순환할 뿐이다. 그러한 천지자연의 순환의 이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질 때 우리는 천지의 은혜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진정한 은혜 갚음, 즉 보은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천지의 이치와 상제의 무위이화, 그리고 후천개벽과 후천선경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우주의 섭리이며 목적이다. 우주변화의 원리와 상제의 주재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보은에 대한 우주론적 해답을 분명하게 알려줄 것이다.

지금 현재 주어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반성해 볼 때,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 혹은 천지자연 전체의 유기적 생명성에 대한 인식의 당위성은 바로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가능하게 한다. 과학은 그 힘의 극단적 확대로 자연에 대한 지배와 정복,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자연의 창조까지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학문과 기술은 스스로 가치중립적 판단기준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한정 지웠다. 특히 과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은 그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과학 유토피아는 결국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합리화에 불과한 기만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는 과학만능주의, 즉 과학은 미래에 대한 창조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순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독단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태도의 부당성, 혹은 과학적 발전의 무한성에 대한 미신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양심이나 선한 태도 등의 수동적 관심으로 수정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잔인해지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 수탈에서 이제 인간은 스스로의 삶과 생명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선한 양심의 판단을 벗어나 자연의 본질, 천지의 원리, 우주의 생명에 대한 인식의 당위가 요청되고 있다. 이제 자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바람직한 도덕적 태도를 규정하게 해 줄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으로의 회복, 천지와 인간의 원래적 본성으로의 되돌아감은 이러한 인식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천지보은의 본질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천지에 대한 바른 인식을 근거로 한 보은의 당위성은 바로 인간의 생명성의 본질을 회복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다. 이는 현대 생태윤리학이 주장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변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 과학의 무차별한 자연파괴는 인류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대미문의 위기적 상황을 초래하였다.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행위는 바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은혜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하고 자연의 은혜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는 증산이 말한 배은망덕만사신 背恩忘德萬死身”(7:66::2)으로 드러난다.

자연은 이제 인간의 배은에 대해 생태계의 질서를 스스로 바꾸게 되었다. 자연의 인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제 자연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시작한 것이다. 이는 결국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윤리적 태도를 설정하도록 만들게 되었고 이것이 생태윤리학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생태윤리학이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도덕적 관계회복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즉 자연을 도덕적으로 착취하자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형식적 관계는 무의미하다. 오직 천지와 인간, 천지만물의 생명적 동일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할 때만 진정한 생명윤리학이 가능해질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도덕적 관계, 자연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이제 천지보은이란 말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의 필요성을 우주론을 바탕으로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선천 상극의 원리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과학의 힘을 토대로 한 인간의 자연수탈역사로 드러났다. 자연과 인간은 상호 살림의 관계가 아니라 대립과 투쟁의 과정을 통해 상호 극()하는 성장을 지속하여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기술과 문명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천지의 기운은 파괴와 질병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천지와 인간의 상호 살림, 즉 상생의 문제는 보은을 토대로 설명되어야한다. 천지에 대한 수탈을 그만두고 천지가 만물을 낳은 최초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천지와 만물이 보은의 관계를 회복할 때 진정으로 상생의 근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해원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보은, 해원, 상생의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실천적 행위규범의 문제에 제한되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주원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근거로 할 때 보은의 당위성과 원리성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해원, 상생의 문제 또한 자연스럽게 도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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