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유목민 이야기 제57회 러터 전쟁

김현일 연구위원

2019.03.15 | 조회 254

유목민 이야기 57

러터 전쟁

 

러시아와 투르크는 이반 4세 시대(1547-1584)에 처음으로 싸웠다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재상 소콜루는 돈 강과 볼가 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여 흑해에서 카스피 해로 해상운송로를 만들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흑해는 완전히 오스만 제국의 호수나 마찬가지였고 돈 강 하구의 주요 항구인 아조프를 오스만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가 강과 연결되는 수로를 뚫기만 하면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로의 통상로를 용이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556년에 모스크바 공국이 정복한 볼가 강의 하류에 위치한 아스트라칸을 빼앗아야만 한다. 1568년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군대가 파견되어 한편으로는 운하 공사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스트라칸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아스트라칸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대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한다. 운하도 1/3 정도 뚫다가 기술적인 문제로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크림 한국의 영토에서 벌인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원정에 대해 크림 한국의 칸은 상당히 못마땅해 하였다. 오스만 군대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에 흑해에서 폭풍을 만나 많은 병력을 잃었다. (Kinross, The Ottoman Centuries, p. 263)

이 전쟁 이후 백년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신성동맹과의 전쟁에 돌입하자 러시아도 신성동맹 측에 가담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신성동맹은 1684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11세의 호소로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 그리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결성한 동맹이었다. 동맹에 참여한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 싸우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이해관계는 차이가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발칸으로 세력을 확대하기를 원했으며 폴란드는 흑해연안으로, 또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 연안의 영토와 에게 해의 섬들 및 그리스를 차지하기를 원했다. 신성동맹 측이 1686년에 헝가리의 부다(Buda) 시와 베오그라드를 연속해서 탈환하자 러시아도 그에 틈타 크림 한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1687년 골리친 장군이 이끄는 대군은 크림 반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초원지대에서 군대를 돌려야만 하였다. 초원은 불타 있었고 식수는 구할 수 없었으며 환자들은 속출하였다. 러시아 군이 전투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병참의 실패였다. 2년 뒤에는 크림 반도로 들어가는 길목의 페레코프 요새까지 진출하여 타타르 군대와 여러 차례 접전을 하였으나 이번에도 병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식수부족으로 갈증과 병에 시달린 러시아 군은 다시 군대를 돌려야만 하였다.

골리친 장군은 당시 섭정으로서 통치자 노릇을 하던 소피아 공주(표트르 1세의 이복 누이)의 측근이었는데 두 차례의 원정실패로 그 명성이 땅에 떨어졌다. 젊은 표트르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누이 소피아를 제거하고 권력을 쥐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을 위해서는 먼저 해상으로 진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아직 선박과 대포 전문가가 부족함을 절감하여 유럽 여러 나라들로부터 관련분야의 인재들을 데려와 전함과 대포를 만들도록 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1695년과 1696년 두 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끝에 마침내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였다. 이는 그가 거둔 첫 번째 군사적 위업이었다. 그는 돈 강 입구에 가까운 타간로그에 조선소를 세우고 전함을 계류시킬 수 있는 항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조프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함대는 아조프 해를 벗어나 흑해로 진출할 수 없었다. 좁은 케르치 해협을 오스만 제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해로 러시아 함대가 진출하게 된 것은 예카테리나 2세 때 와서 가능하였다. 1768-1774년의 러터전쟁은 예전의 전쟁보다 훨씬 전선의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싸움은 다뉴브 지역으로부터 크림 반도, 카프카즈 지역 뿐 아니라 에게 해에서도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동맹이자 속국이었던 크림 한국이 그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러시아는 오스만의 호수나 다름없던 흑해로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직접적 발단은 오스만 제국 영토 내로 도망쳐온 폴란드 반란군 문제였다. 당시 폴란드 왕국은 이름만 왕국이었지 귀족들이 왕을 선출하는 선거왕제를 채택하였다. 폴란드의 의회였던 세임(Sejm)은 특이하게도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자유거부권’(liberum veto)이라는 이름의 거부권을 의원 누구라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은 제도적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런데 1764년 포니아토프스키가 스타니슬라브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자 폴란드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러시아 황제인 예카테리나 2rk 대공 부인으로 있던 시절에 사귀었던 애인으로서 러시아의 자금지원을 받아 왕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당시 폴란드 귀족들에게도 금전살포가 통했던 모양이다. 이 선거 이전에도 러시아는 폴란드 국정에 간섭하였는데 이제 반러시아파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꼭두각시에 다름없는 왕에게 저항하였다. 이들은 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 영토에 포함되어 있는 포돌리아 지방의 바르 요새에서 동맹을 선언하였다. 이 때문에 이 동맹은 바르 동맹’(Bar Confederation)이라고 역사에서 불린다. 이름은 동맹이지만 폴란드 왕과 그 후원자인 러시아 측에서 보면 반란군의 무리였다. 반군들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자신들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폴란드 국왕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폴란드 왕국의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군대가 반군을 공격하자 반군은 국경을 넘어 오스만 투르크로 달아났다. 그런데 당시 이들을 공격한 러시아의 코사크 부대는 국경을 넘어서까지 이들을 추격하여 이들이 피신한 발타 시를 포격하고 그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였다. 사태를 보고 받은 당시 술탄 무스타파 3세는 러시아 대사를 감옥에 가두고 즉각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폴란드를 유럽 제국들과의 사이에 있는 완충국으로 생각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노골적인 개입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 러터전쟁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대서양을 돌아 지중해까지 와서 오스만 해군을 격파하였다는 점이다.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먼 거리를 돌아서 온 발틱 함대는 에게 해에서 오스만 해군을 격파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봉쇄하였다. (17707월 체스메 해전)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던 그리스인들도 무장봉기를 일으켜 러시아 군에 호응하였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부터 예디산 노가이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드네프르 강과 서쪽의 드네스트르 강 사이의 스텝 지역에 살던 노가이 족으로서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의 영역 사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예디산 노가이의 우두머리인 칸 맘베트 베이에 대한 외교적 노력을 통해 러시아 정부는 예디산 노가이를 러시아 편으로 만들었다. 러시아 편으로 돌아선 예디산 노가이를 본보기로 제시하면서 러시아는 다른 크림 한국의 유력자들도 러시아 측으로 끌어들였다. 러시아의 외교가 성공한 것이다.

오스만의 동맹이었던 크림 한국은 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키림 기레이 칸이 1769년 초 추운 겨울에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 군대가 들어와 있는 베사라비아로 진격하여 러시아 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그에 더하여 키림 기레이 칸은 러시아 영역을 침탈하여 천 여명의 포로를 잡아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은 크림 한국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키림 기레이가 갑자기 병사하였을 뿐 아니라 크림 한국의 병력 태반이 다뉴브 전선으로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1771년 크림 반도는 러시아 군대에게 손쉽게 함락되었다. 러시아 군은 두 방향으로 진격하였는데 하나는 페레코프 지협을 통해 들어왔고 다른 한 부대는 케르치 해협을 건너 들어왔다. 오스만의 총독은 이스탄불로 쫓겨나고 크림 한국의 새로운 칸 셀림 기레이는 러시아의 돌고루키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러시아는 크림 한국에 독립을 약속하였다. 물론 이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1768년에 시작된 러터 전쟁이 1774년에 끝나면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쿠축 카이나르자’(Kuchuk Kaynarja) 조약이 체결되었다. 쿠축 카이나르자는 터키어로 작은 온천을 뜻한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가리아의 국경 마을로서 그냥 카이나르자라고 불린다. 이 지명은 독자들에게 무척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슨 큰 도시도 아니고 작은 시골 마을이기 때문이다. 1774721일 이곳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대표가 평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6년간의 러터 전쟁도 끝났다. 쿠축 카이나르자 조약은 그 낯선 이름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역사 뿐 아니라 동유럽 일대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약문은 28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제3항은 크리미아와 쿠반 등의 모든 타타르 부족들은 어떠한 외세로부터도 독립을 누리는 민족임을 양 제국은 인정한다고 선언하였다. 크림 한국은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제 종주국인 오스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조약에서는 승전국인 러시아가 돌려주는 영토와 이제 러시아의 지배로 들어간 지역들을 상세히 나열하였다. 러시아는 베사라비아, 몰다비아, 왈라키아 등 다뉴브 공국들을 점령하였지만 모두 돌려주었다. 지도를 찾아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다뉴브 공국들은 드네스트르 강에서 다뉴브 강에 이르는 영토로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한다. 당시 이 나라들은 크림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흑해로 나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요충지들은 돌려주지 않았다. 돈 강 하구의 아조프는 표트르 대제 때 점령하였다가 다시 투르크인들에게 빼앗겼는데 이번 러터 전쟁에서 탈환하여 이제 영구적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또 아조프 해에서 흑해를 빠져나가는 좁은 해협을 지키는 케르치와 예니칼레 두 요새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는 드네프르 강과 부크 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인 킨부른 반도의 요새도 양보하지 않았다. 킨부른 요새 맞은편에는 오스만의 오차코프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요새는 함락되지 않아 그대로 오스만의 수중에 남겨졌다. (1788년 러시아 군이 포템킨 장군의 지휘 하에 이 중요한 요새를 함락하게 된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흑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에게 해의 점령지들도 돌려주었다. 그 대신 러시아 상선들은 러시아 국기를 달고 지중해와 콘스탄티노플로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쿠축 카이나르자 조약은 후대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조항을 포함하였다. 러시아 황제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그리스 정교회를 세울 수 있으며 그 관리권은 콘스탄티노플 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주어진다고 규정하였다. 이 교회에 속한 기독교도들을 보호할 권리도 러시아 측에 있는 것으로 양해되었는데 이 조항은 향후 계속해서 문제가 된다. 러시아 황제가 이를 근거로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 있는 모든 기독교도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오스만 술탄 역시 크림 한국의 무슬림들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은 상실하였지만 그들에 대한 종교적 권한은 인정받았다. 오스만 술탄은 이리하여 크림 타타르인들에게는 가톨릭 교도들의 교황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참고문헌

 

Lord Kinross, The Ottoman Centuries, The Rise and Fall of the Turkish Empire (Morrow Quill Paperback Edition 1977)

Lindsey Hughes, Peter the Great (Yale University Pres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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