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유목민 이야기 제56회 크림 반도의 노예무역

김현일 연구위원

2019.03.08 | 조회 287

유목민 이야기 56

크림 반도의 노예무역

 

크림 한국이 세워진 직후부터 크림 한국은 모스크바 공국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전쟁에서 잡은 러시아인 포로들을 카파로 데려가 노예상인들에게 넘기니 엄청난 돈을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크림 한국의 타타르인들은 전쟁을 구실로 빈번히 국경을 넘어 인간사냥을 자행하였다. 노예무역은 단번에 크림 한국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1480년 이반 3세는 리투아니아와 사라이의 금장한국에 대항하기 위해 멩글리 칸과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이로 인해 크림 한국의 타타르인들은 마음대로 러시아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그 대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인들이 노예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16세기 초 금장한국이 사라지자 멩글리 칸은 다시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1512) 리투아니아가 다스린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이제 공격 대상에서 벗어났다.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가 다시 빈번한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공국은 크림 한국을 군사적으로 압도하게 되는 17세기 말까지 타타르인들의 노예사냥으로부터 피해를 면하지 못했다. 규모가 큰 약탈원정의 경우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잡혀갔다. 포로로 붙들려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을 다시 데려오는 것이 모스크바 국가의 큰 국가적 사업이 되었다.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 (재위 1654-1676) 때 편찬된 유명한 법전이 있다, 러시아의 신분의회인 젬스키 소보르에서 제정한 법전이라고 해서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라고 불리는 이 법전은 러시아 국가의 통치 질서와 사회 질서를 규정한 법전으로 약 2세기 간 제정 러시아의 헌법 역할을 하였다.

모두 25개의 장으로 976개의 항목을 담고 있는 이 법전의 제8장은 포로로 잡혀간 러시아 신민을 몸값을 지불하고 되사오기 위한 조항들을 담고 있다. 타타르 인들로부터 러시아인 포로를 되사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한 세금이 규정되어 있고 또 포로의 신분에 따른 몸값 지불의 규정이 들어 있다. 법전의 이러한 조항들은 러시아가 금장한국의 지배로부터 한 세기 반 이전에 독립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금장한국의 후예인 크림 한국의 약탈원정으로부터 시달렸음을 드러내준다.

크림 한국은 지중해 노예무역의 주공급원이 되었다. 노예사냥이 좋은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크림 타타르인들은 전쟁과는 상관없이 소규모 원정대를 구성하여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러시아로 노예사냥을 나갔다. 크림 한국에 복속되어 있던 노가이 족 역시 인근 카프카즈 지역의 체르케스인들과 그루지아인들을 즐겨 노예사냥의 대상으로 삼았다. 앨런 피셔에 의하면 1500년부터 1700년까지 근 2백만 명에 달하는 노예가 크림 한국으로부터 팔려나갔다고 하니 매년 1만 명 정도의 노예가 잡혀온 셈이다.

이러한 흑해의 노예무역은 12044차 십자군 이후 이곳에 자리잡았던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확립된 것이었다. 제노아들은 아조프 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파를, 베네치아인들은 돈 강 하구의 타나를 각각 무역거점으로 삼고 무역활동을 벌였는데 그들이 취급한 상품 중에서 노예가 차츰 중요한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여러 지역들이 흑해에서 들여온 노예로 넘쳐났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서민들도 노예를 한둘 거느릴 수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이 크게 재미를 보던 흑해 노예무역은 15세기 중엽 오스만이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면서 그 양상이 급변하게 되었다. 제노아 상인들과 베네치아 상인 모두 흑해지역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제 이탈리아 상선이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로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흑해에서 공급되던 노예는 그 수가 크게줄어들어 노예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노예는 이제 사치품이 된 것이다. 오스만 인들이 흑해 연안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노예무역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 이탈리아 상인들에 대신하여 무슬림 상인들이 노예상으로 등장하였다. 카파에서 구입한 노예는 오스만 제국으로 대거 팔려나갔다. 콘스탄티노플에 온 노예들은 대부분 기독교 백인노예들이었다. 같은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은 무슬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인들은 기독교 노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하였다. 신체가 건장한 남자인 경우는 노를 저어 운행하는 갤리선의 노수(櫓手)로 사용하였다. 17세기의 한 크로아티아 수도사가 오스만 제국에서 목도한 바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갤리선에는 대부분 러시아인 노예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Eizo Matsuki, p.177) 노예가 기술이 있는 경우는 장인으로 만들었다. 여성들의 경우 성적인 노리개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이슬람은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양심상의 거리낌도 별로 없었다. 가장 예쁜 여자들은 오스만 술탄의 후궁으로 팔려갔다. 오스만 술탄들에게서도 유럽 여성들은 인기가 많았다. (이는 크림 칸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후궁으로 삼은 백인여성에게서 낳은 아들이 술탄의 자리에 오르는 일도 간혹 벌어졌다.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대정복 군주인 술레이만 1세의 아들 셀림 2(재위 1566-1574)가 그런 예의 하나이다. 원래 셀림 2세는 술탄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사람인데 형들이 병사하거나 처형되는 바람에 운 좋게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그 부친인 술레이만 1세에게는 후렘이라는 후궁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록세라나라는 폴란드 여자로 정교회 신부의 딸이었다고 한다. 10대 때 크림 타타르인들에 의해 포로로 잡혀와 카파를 거쳐 이스탄불로 팔려왔다. 술레이만 술탄의 모친인 하스파 술탄이 그녀를 아들에게 선물로 하사하였다.

술레이만의 후궁에 들어간 후렘은 곧 아들을 낳았는데 관례로는 후궁은 아들 하나만 낳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애정을 독점하였던지 연달아 네 명의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 정비인 마히데브란 술탄이 자리를 위협받게 되었다. 두 여자 사이의 갈등이 몸싸움으로 폭발하였는데 정비 마히데브란 술탄이 후궁 록세라나를 때려 술레이만 대제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 결과 마히데브란은 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록세라나가 후렘 술탄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스만 술탄이 노예출신의 후궁과 정식으로 결혼하는 일은 전통에는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술레이만 대제가 마법에 걸렸다고 쑥덕거렸다. 후렘 술탄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수도 이스탄불에 그대로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이 성인이 되면 그 아들이 총독으로 파견되는 먼 지방으로 함께 밀려나는 것이 오스만 제국의 왕비들이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관례였다. 이렇게 지방으로 밀려나면 다시는 수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례 또한 후렘 술탄에게는 예외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후렘 술탄은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에서 살다가 56세의 나이로 남편과 같은 해에 죽었다. 셀림 2세는 바로 이 후렘 왕비가 낳은 셋째 아들이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와 폴란드 왕국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술레이만 대제가 당시 폴란드 왕 지기스문트 2세에게 보낸 한 서한에서는 후렘 술탄을 귀하의 누이이자 나의 처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의 주된 적이었으니 폴란드 왕국과의 우호관계 유지는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폴란드 왕국 역시 그 영토였던 리투아니아를 러시아가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오스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실제로 술레이만 대제 때 여러 차례에 걸쳐 두 나라 사이에는 우호협정이 체결되고 갱신되었다. 종교와 문화가 다른 두 나라 사이의 지속적인 우호관계 유지에는 후렘 왕비가 폴란드 출신이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던 후렘은 남편에게 국내 문제 뿐 아니라 대외 문제에서도 자문관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izo Matzuki, "The Crimean Tatars and their Russian-Captive Slaves" Mediterranean world (地中海論集) 18 (2006)

Mikhil Kizilov, "Slave Trade in the Early Modern Crimea From the Perspective of Christian, Muslim, and Jewish Sources" Journal of Early Modern History, Volume 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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