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유목민 이야기 제52회 카자흐와 러시아

김현일 연구위원

2018.12.18 | 조회 63

유목민 이야기 제52

카자흐와 러시아

 

카자흐 인들의 역사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시베리아로부터 시르다리야 강에 걸친 광대한 초원지역에는 우즈벡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투르크화된 몽골족과 킵차크 족들이 섞여 있었던 이 유목민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우즈벡이라는 명칭은 금장한국의 통치자로서 스스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화를 촉진하였던 우즈벡 칸(재위 1313-1341)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이후 우즈벡 집단의 통치자들은 주치의 5남으로 알려진 샤이반의 후손이었다. 아불카이르 칸(1412-1468)이라는 인물로 그는 금장한국이 내분으로 혼란스런 틈을 타서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남쪽의 트란스옥시아나로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그의 영역은 시르다리아 강과 야익 강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발하슈 호수, 북쪽으로는 이르티쉬 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그런데 15세기 중엽 동쪽의 오이라트 족이 우즈벡 인들의 영토를 침략하였다. 오이라트의 침략을 막지 못해 패한 당시 우즈벡의 아불카이르 칸은 시르다리야 강변의 시그나크까지 달아났다. 오이라트 족은 우즈벡 인들의 땅을 아주 황폐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재난으로 인해 아불카이르 칸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그 지배 하에 있던 기레이와 자니벡이라는 두 유력자가 차가타이의 후손인 에센 부카가 다스리던 모굴리스탄으로 가버렸다. 그 자세한 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르네 그루쎄는 그의 대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아불카이르가 트란스옥시아나의 오아시스 도시를 좋아하여 그곳에서 정착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그의 취향과 정책이 순수한 유목 생활을 지향하던 사람들로부터 큰 반발을 초래하였다고 한다. (p.668) 기레이와 자니벡을 따라나선 사람들은 순수한 유목생활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루쎄의 주장이다. 중앙아시아사의 대가인 피터 골든 교수에 의하면 그 두 사람은 아불카이르 칸의 통치가 가혹하여 그에 반발한 반도들이라 한다. (Golden, p.103)

당시 모굴리스탄은 그 영토가 파미르 고원 동서에 걸쳐 있었는데 에센 부카는 자신에게로 피신해온 두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 추 강 유역지대를 주었다고 한다. (Howorth, p.627) 오늘날 카자흐스탄 남동쪽의 세미레체 지방이다. 일곱 개의 강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발하슈 호에서 천산산맥 사이의 계곡지대이다. 곧 수천 명의 추종자들이 이 두 지도자를 찾아가 합류하였다. 우즈벡 한국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이 순수 유목민들을 당시 사람들은 우즈벡-카자흐혹은 그냥 카자흐라고 불렀다. 방랑자 혹은 이탈자라는 뜻이라 한다. 이것이 카자흐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필자가 카자흐스탄에서 들은 발음으로는 카작이라고 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카자흐라고 적는다. 러시아어 철자로 ‘kaзax’로 카자흐에 가깝기 때문이다.)

카자흐 유목민들과 접촉하기 시작한 러시아 인들은 이들을 카자흐라고 부르지 않고 키르기즈라고 불렀다. 오늘날 키르기즈 족은 파미르 고원과 천산산맥의 산간 초지에서 유목을 하며 살고 있는데 카자흐 족과는 별개의 족속이다. 그런데 우리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시대까지 카자흐를 키르기즈라고 불렀으며 진짜 키르기즈인들에 대해서는 카라 키르키즈라고 하였다. (‘검은 키르키즈라는 뜻)

카자흐 족은 16세기부터 17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세 개의 주즈로 나뉘게 되었다. 주즈는 투르크어로 백()을 뜻한다고 하는데 왜 이 말이 사용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초기에는 백호 정도가 중요한 행정단위였기 때문이었을까? 좌우간 하워드의 주장에 따르면 테브케(티아브카) (재위 1680-1715)의 시대에 세 주즈로 나뉘어졌는데 원래 주즈라는 것은 순전히 행정단위였다고 한다. 테브케 칸은 세 명의 총독을 세 주즈에 임명하였는데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테브케 칸이 큰 어려움을 겪자 세 명은 모두 칸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Howorth, p.641) 이후 세 주즈는 별개의 칸이 지배하는 나라처럼 되었다.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서로 협력하였다.

카자흐 족과 러시아의 외교적 접촉은 16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카자흐 족은 러시아인들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1594년 당시 카자흐의 테베켈 칸(재위 1586-1598)이 모스크바로 사절을 보내 군사적 협력을 제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스크바가 총포를 제공한다면 카자흐는 노가이 한국이나 부하라 한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모스크바는 노가이나 부하라 모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이러저리 피신하며 말썽을 피우는 시비르 한국의 쿠춤 칸을 잡아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카자흐 인들은 이 제안에 따르지는 못했다. 쿠춤 칸은 1598년 오브 강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에 패하여 칼미크 인들에게로 갔다가 다시 노가이 인들에게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카자흐 인들은 칼미크 족이나 바슈키르 인들과도 더러 싸운 적이 있으나 주적은 오이라트였다. 이들과는 17세기 내내 싸웠다. 종족과 종교에서 두 족속은 달랐다. 오이라트 족은 몽골계였던 반면 카자흐 족은 그 지배자들은 칭기즈칸의 후예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주로 투르크계였다. 의사소통의 수단인 말부터 달랐던 것이다. 더욱이 카자흐 족은 회교를 신봉하였던 반면 오이라트 족은 불교인 라마교를 신봉하였다. 오이라트의 칸은 오이라트의 우세한 힘을 믿고 티베트의 라마와 손을 잡고 카자흐 족을 불교도로 개종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

카자흐 족과 오이라트 족과의 싸움에서 오이라트가 번번이 이겼다. 그 가운데 1723년의 싸움은 카자흐 족에게는 매우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이라트에 쫓겨 남쪽의 타슈켄트, 투르키스탄(야시라고도 부르는데 시르다리야 강변에 위치한 카자흐스탄 도시로 투르크인들의 지역을 위미하는 투르키스탄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람 등의 오아시스 도시들로 도망갔으나 오이라트 족은 안전하다고 여겨진 이곳까지 공격해왔다. 카자흐 인들은 시르다리야를 건너 달아나야 하였다. 대탈주극이 벌어진 셈인데 가축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카자흐 난민들이 밀어닥치면서 히바 한국과 부하라 한국도 혼란에 빠졌다.

더 많은 수가 아랄 해 북쪽의 엠바 강과 야익(우랄) 강 주변의 초원으로 도주하였다. 러시아와 가까운 곳이었다. ()주즈가 주로 이곳에 자리잡았다. 몇 년 뒤인 1731년 소 주즈의 아불카이르 칸(1693-1748)은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이름이 반복되어 독자들이 헷갈리겠지만 이 사람은 앞에서 나온 우즈벡의 아불카이르 칸과는 다른 사람이다. 소 주즈의 칸 아불카이르는 러시아가 주변의 적들로부터 소 주즈의 카자흐 족을 보호해준다면 차르를 주군으로 섬기고 차르에게 공납(야삭)을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러시아의 신민으로 간주되던 바슈키르, 칼미크, 우랄 코사크 등을 공격하지 말 것, 아스트라칸으로 향하는 카라반들을 보호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아불카이르 칸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협정이 체결되었다. 카자흐의 세 주즈 중 소 주즈가 처음으로 러시아에 자발적인 복속을 요청한 것이다. 이제 카자흐가 러시아 제국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물론 카자흐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카자흐 귀족들은 자신들과의 협의 없이 아불카이르 칸이 일방적으로 러시아와 복속협정을 맺었다고 비난하였다. 자신들은 러시아와의 평화조약 체결에 동의한 것이지 러시아에 대한 복속에 동의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차르가 파견한 사절 테브켈레브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반대파들을 공략하였다. (무하마드 테브켈레브는 러시아 외무성의 통역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위관직으로 승진하는데 성공한 타타르계 귀족의 한 예로 꼽히는 인물이다) 능란한 말 뿐 아니라 반대파 귀족들의 마음을 녹일 선물도 동원되었다. 30명의 귀족들이 차르의 신민으로 차르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중() 주즈의 쉐미아카 칸이 같은 선서를 하였다.

자발적인 복속이었지만 러시아에의 복속은 효과가 없지 않았다. 1741년 중가르의 오이라트가 반역자를 추격하여 카자흐 땅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하자 남부 스텝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오렌부르크 총독이 오이라트에 공식적으로 약탈을 중지하라고 경고하였다. 만약 카자흐 인들에 대해 오이라트가 불만이 있다면 그들을 직접 공격할 것이 아니라 차르에게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하라고 하였다. 오이라트 인들이 러시아 총독의 경고를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다. 러시아는 카자흐는 말할 것도 없고 오이라트 같은 강력한 유목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오이라트는 청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된다. 13세기 몽골족의 지배 이후 유목민들이 러시아와 중국을 위협하고 지배하던 시대는 이제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이다.

 

참고문헌

 

Henry Howarth,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Part II, Division II (1880)

Michael Khodarkovsky, Russia's Steppe Frontier : The Making of a Colonial Empire, 1500-1800 (Indianan University Press, 2002)

Peter Golden, Central Asia in Worl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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